75화
노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뺨에 입맞춤을 해 주고 나간 후 그녀는 인벤토리를 켰다. 꿈에서 남신에게 받은 대로 <월급 루팡의 축복이 담긴 목걸이>가 인벤토리에 추가되어 있었다. 얼른 아이템을 꺼내 목에 착용하자 반짝거리던 목걸이가 <동정 레이더> 때처럼 사라지더니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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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루팡의 축복이 담긴 목걸이>의 효과로 이제 하루 종일 놀아도 업보가 생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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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본 실비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드디어… 드디어 놀아도 된다!
물론 나태지옥을 가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열심히 게임을 할 거지만, 놀아도 되는데 일하는 것과 놀면 안 되기 때문에 억지로 일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제 맘이 한결 편해지네.’
느긋해진 마음으로 인벤토리를 연 실비아는 개수가 늘어난 레몬 빛 씨앗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노엘 님과는 해도 해도 질리지가 않아. 늘 새로워, 짜릿해! 한 100개쯤 채우면 좋으려나.’
활짝 웃으며 최선을 다해 뒹굴거리고 있던 그녀는 아침 식사를 알리는 사용인의 노크 소리에 간단하게 옷을 걸쳐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는 간단하지만 고급스러워 보이는 브런치가 차려져 있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서 기다리자 곧 눈을 비비며 식당에 들어온 세비스가 졸음이 잔뜩 묻어 있는 얼굴로 맞은편에 앉았다.
“세비스! 다음 주부터 축제니까, 그 전까지 며칠 여기서 쉬다 갈까?”
“네? 집에 가고 싶은데…. 휴, 알겠어요.”
세비스는 잠시 어두운 표정으로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밤새도록 오아시스에서 봤던 노엘과 실비아의 모습에 시달린 탓에 기분이 저조해진 상태였다.
눈 밑이 시커먼 세비스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실비아는 새로 얻은 아이템 덕분에 기분이 너무 좋은 상태였기에 그의 이상을 신경 쓰지 못했다.
세비스는 머릿속이 복잡해 노엘의 별장에서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지만 즐거워 보이는 실비아의 얼굴을 보고 차마 집에 가자고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꾸욱 손끝으로 누르고는 힘없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머리 아파, 몸도 으슬으슬한 것 같고….’
그의 반응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던 실비아는 세비스가 알겠다고 하자 즐거워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후 노엘도 내려오고 모두와 함께 브런치를 즐기고 있던 실비아는 기뻐하는 얼굴로 뛰어 들어온 사용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비아 님! 마을 주민들이 저택으로 찾아왔습니다. 구해 줘서 고맙다며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네요!”
감사 인사?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임 속이니 당연한 퀘스트를 수행한 것일 뿐이었는데 마을 주민들이 감사 인사를 하러 올 줄이야. 이것도 아마 게임 이벤트의 일부분이겠지만 그녀는 어쩐지 가슴이 찡해지면서 울컥하는 감정이 차올랐다.
‘감사 인사를 하러 올 줄은 몰랐는데, 이 게임 속 사람들은 내가 현실에서 겪었던 사람들과 달리 하나같이 착하구나. 루카 빼고….’
현실에서의 그녀는 남을 돕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후원하던 봉사 단체가 후원금을 빼돌려 골프 여행을 갔다는 충격적인 뉴스를 보거나, 보험 가입을 해 달라고 사정하길래 도와줬던 친척이 알고 보니 불리한 보험을 가입시켜 그녀를 고생시키는 등. 일련의 사건을 겪은 후로 누군갈 돕는다는 것에 회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게임 속 사람들은 달랐다. 실비아는 이런 세상에 살면 평생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마음이 훈훈해지네.’
실비아는 감격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바라봤다.
“인사를 하러 올 줄이야, 전혀 예상 못 한 일이네요.”
마을 주민들이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는 사용인의 말을 들은 세비스는 놀란 표정이었고 노엘은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게요, 전혀 예상 못 했어요.”
“가끔 별장으로 놀러 올 때마다 생각했듯, 이 마을 사람들은 고마움을 아는 분들이죠. 그래서 당연히 감사 인사를 하러 올 거라 생각했어요.”
“잠깐….”
실비아는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창문으로 뛰어갔다. 밖을 내다보니 어제 봤던 주민들이 커다란 꽃다발과 이것저것 풍성하게 든 바구니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와! 마을 주민들이 많이 와 있네요. 기다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세비스, 노엘 님. 지금 당장 같이 내려가요.”
실비아가 재촉하자 일행들은 급히 빵부스러기가 묻은 입을 닦고 사용인을 따라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정원을 지나 입구에 도착하자 일행들을 발견한 마을 주민들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실비아 님!! 우리의 영웅! 실비아! 실비아!”
“일행분들도 감사합니다! 정말, 여러분들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오크 이교도가 될 뻔했어요!”
주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들을 빙 둘러싸자 쑥스러워진 실비아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마을 주민 중 맨 앞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노인이 흐뭇하게 웃더니 다른 주민에게서 꽃목걸이를 건네받아 실비아와 일행들에게 걸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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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기운이 실비아를 감싼다. <꽃목걸이>의 효과로 하루 동안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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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목걸이를 걸자마자 메시지가 뜨더니 실비아의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일행들도 같은 효과를 느꼈는지 안색이 한결 밝아진 게 보였다. 실비아는 노엘과 네 번 한 뒤로 꿀잠을 자 몸은 전혀 피곤하지 않았지만 조금 피로했던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꽃목걸이를 거니 기분이 좋아지는걸.’
실비아는 뿌듯한 마음으로 꽃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꽃목걸이를 걸어 준 노인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저는 이 마을의 촌장입니다. 어제는 다들 지치셨을 거라 생각해서 바로 인사드리러 오지 못했어요. 저택 사용인분께 여쭤보니 오늘 떠나신다고 하길래 실례를 무릅쓰고 아침 일찍 찾아뵙게 됐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실비아 님 덕택에 저희 모두 종교의 자유를 되찾았어요.”
촌장의 말에 실비아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곤 수줍게 웃었다.
“뭘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아유, 겸손하시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촌장의 옆에 서 있던 조그만 남자아이가 머뭇거리더니 실비아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기….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은 다 계신데…. 그… 말은 어디 갔죠?”
“말? 아! 림보요.”
어제 그 정신없는 와중에 일행 중에 말도 있단 걸 알았나 보다. 촌장의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가 꽃목걸이를 든 채 수줍게 묻자 사용인이 빠르게 뛰어가서 마구간에 매여 있던 림보를 데려왔다.
림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사용인의 손에 이끌려왔다. 림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하니 있는데 남자아이가 그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며 말을 걸었다.
“말아! 고마워, 네 덕분에 우리가 던전에서 탈출할 수 있었어!”
“히이잉!”
잠시 멍하니 있던 림보는 남자아이의 말을 듣고 수줍은 듯 투레질을 했다.
모두 하나씩 꽃목걸이를 걸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촌장이 다른 이에게 손짓해서 바구니들을 가져오게 했다. 바구니 안에는 본 적 없는 진귀한 과일들이 한가득 있었다.
“이건 약소하지만 마을 주민들을 구해 주신 보답입니다. 저희 마을에서만 나는 특산품인데 향이 좋고 고급스러운 맛을 자랑해서 황궁에만 납품되는 것이랍니다.”
“이런 귀한 걸 다…. 맛있게 잘 먹을게요.”
실비아와 일행들이 감격한 표정으로 바구니를 받아들자 촌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별거 아니지만 하나 더…. 어이! 가져오게나.”
실비아가 바구니를 든 채 고개를 갸웃하는데 마을 청년이 누런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바구니를 세비스에게 건네고 상자를 받아든 그녀는 상자의 옆면에 사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웬 사과? 과일이 든 거 같진 않은데.’
“열어 봐도 되나요?”
그녀가 묻자 촌장이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은밀하게 목소릴 줄였다.
“실비아 님에게만 드리는 거니 정 궁금하면 살짝만! 몰래! 열어 보세요.”
“아, 넵!”
촌장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엿듣는 이가 없는지 살폈다. 다들 이쪽에 관심이 없음을 확인한 뒤로는 다시 목소리를 크게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헛, 어제의 그 명장면은 잊을 수가 없어요. 대체 물구나무를 선 채 몇 바퀴를 도신 거죠? 오래 살아서 희귀한 볼거린 거의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촌장이 지팡이를 팡- 땅에다가 치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마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한 헤드스핀 80바퀴를 말하는 듯했다. 80바퀴나 돌 생각은 없었는데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의 효과가 생각보다 지나치게 뛰어나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미친 듯이 돌아 버렸다. 다 돌고 일어났을 때는 정수리가 화끈해졌을 정도였다.
잠시 민망하게 웃던 실비아는 마을 주민들이 다른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는 새에 사과 상자를 힐끗 내려다봤다.
‘몰래 열어 보라고 했지?’
쳐다보는 사람이 없는지 바쁘게 눈을 굴린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리본으로 묶여있는 종이 상자의 틈새를 살짝 열어 들여다보았다.
‘뭔가 번쩍번쩍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