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우와아아아!! 묶여 있던 주민들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끈을 다 잡아 뜯곤 무대 위로 난입해 실비아를 둘러쌌다. 그리곤 귀청이 터질 정도로 큰 환호성을 질렀다. 그 중엔 여우들도 껴 있었다. 춤 대결로 하나가 된 던전. 2002 월드컵 난리는 난리도 아닐 정도였다.
“와! 씨발! 찢었다!”
와아! 와아!
어리게 생긴 여우 하나가 흥분해서 외치자 마을 주민들이 실비아를 들어 올려 광란의 헹가래를 쳤다. 노엘과 세비스, 림보도 함께 올라와서 마을 주민들이 건넨 실비아를 이어받으며 광장을 한 바퀴 쭉 도는 개선 행진을 했다. 승부는 이미 판가름이 났다. 인간이 아니라 팽이 그 자체가 되어 버렸던 실비아를 누가 이길 수 있을까.
실비아는 수줍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겸손을 떨었다. 물론 압도적인 실력으로 이겼단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한국인 특유의 겸손이 나온 탓이었다.
“아이참, 별거 아닌데. 내가 뭘 잘했다고 이런담.”
“실비아 님! 아닙니다, 진짜 멋져요!”
실비아가 공중에서 실실 웃으며 점잔을 떨자 세비스를 시작으로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저 인간 팽이 이름이 실비아인가 봐!”
“실비아 님, 멋졌어요!”
실비아! 실비아!
광장은 실비아의 이름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고 열기는 일행들이 실비아를 들어 올린 채 광장을 한 바퀴 돌 때까지 식을 줄을 몰랐다.
흥분의 열기가 지나고 여우들과 마을 주민들은 점차 서로를 의식했다. 뒤늦게 소란이 진정되자 정신을 차린 여우들이 마을 주민들을 위협했다.
“이것들이… 줄을 풀고 말이야!”
“묶으면 되잖아요, 묶으면.”
마을 주민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무대 밑으로 내려가 끊어진 줄을 제 몸에 얼기설기 감았다.
일행들 손 위에서 내려 무대 앞으로 간 실비아가 대신관 여우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무릎을 털고는 실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우….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인간 중에 이렇게 대단한 춤 실력을 가진 자가 있었다니, 느려져 있던 내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는 기분이었어.”
“그럼 패배를 인정하시는 건가요?”
“그래, 춤 실력을 보고 나니 어제의 느린 망치질도 위장이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 다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 거란 자신도 안 생겨…. 패배를 인정하도록 하지. 마을 주민들도 풀어 주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정화? 그것도 받을게.”
“좋아요.”
대신관 여우의 손을 맞잡아 흔들며 실비아가 싱긋 웃자, 마을 주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실비아의 이름을 복창했다.
“실비아, 실비아!”
대신관 여우의 명령에 풀이 죽은 여우들이 포박을 풀어 주고, 주민들은 실비아에게 연신 감사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실비아 님.”
“실비아 님 덕분에 살았어요.”
떠들썩하게 연신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감사 인사를 한 그들은 잠시 후 손을 흔들며 여우들이 내준 낙타를 타고 줄지어 광장을 벗어났다. 실비아가 뿌듯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대신관 여우가 그녀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이제 정화를 받을 차례군.”
그가 무릎을 꿇자 나머지 여우들도 눈치를 보더니 하나둘 옆에 쫘르륵 무릎을 꿇었다. 대신관 여우뿐 아니라 나머지 여우들도 모두 순순히 정화를 받기로 했다.
인간 같지 않은 미친 춤 실력도 모자라 마무리로 헤드스핀 80바퀴까지 보고 난 그들은 전의를 상실한 건지 반항할 의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혹시나 승패에 불복하고 싸우려고 한다면 높아진 민첩으로 부메랑 망치 맛을 보여 주려고 했는데 짐승들이라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수염을 죄다 뽑아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온다면 굳이 잔인해질 필요는 없지.’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가 망치에 입김을 불어 넣고 정화 스킬을 사용하려 하는데, 무척 아플 것 같아 보였는지 대신관 여우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잠깐, 힘껏 내리치지 말고 부드럽게 해 주면 안 될까?”
“시른뎅.”
그녀가 다시 망치를 높이 들자 대신관 여우가 급하게 소리쳤다.
“야, 약속한다면 전설의 폭포를 열 수 있는 주문서를 줄게!”
뭘 준다고? 그녀는 망치를 힘껏 내리치려다가 일시 정지했다. 그리곤 무릎 꿇은 그를 내려다봤다.
“전설의 폭포? 그게 뭐죠?”
“거기서 폭포를 맞으며 수련을 하면 세상의 모든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몸을 가지게 돼.”
“!!”
엄청난 폭포였다. 그 폭포수를 맞으며 수련하면 루카를 공략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이다.
‘루카…. 이제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그녀는 오랜만에 루카를 떠올렸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안과 항시 촉촉한 붉은 입술, 그리고 옷 위로도 숨겨지지 않는 터질 듯한 웅장한 가슴과 빨래판이 따로 없는 선이 분명한 근육…. 무엇보다 입에 넣기도 전에 얼싸를 당해 죽음을 맞이하게 해 줬던 그의 크고 아름다운 남성.
‘정말… 정말? 이제 먹을 수 있는 거야?’
잠시 떠올렸을 뿐이건만 바로 군침이 싹 돌았다. 싹 돌다 못해 흐를 판이라 그녀는 얼른 입가를 훔치곤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림의 떡으로만 봐 왔던 독이 든 남자, 루카. 역시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더니 던전을 공략하면 자연스럽게 해결책이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대신관 여우는 본인을 과격하지 않게, 부드럽게 정화해 준다면 주문서가 든 상자를 주겠다고 했다. 그 후 원래대로 돌아온 잊혀진 신전 뒤편으로 가면 금빛 폭포가 나올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실비아는 망치를 어깨에 메고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떠나는 마당에 좋은 걸 주고 가서 고마워요.”
“뭘. 후…. 죽기 딱 좋은 날씨네.”
대신관 여우가 먼 곳을 바라보며 아스라이 미소 지었다. 실비아는 그의 바람대로 조심스럽게 망치를 들어 가볍게 그의 머리를 갈겼다.
툭. 툭 툭 툭.
조심스레 머리를 두드리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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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스킬이 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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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약하게 주변 여우들의 머리통을 두드리자 그들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대신관 여우를 포함해서 망치를 머리에 얻어맞은 여우들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실비아라고 했나? 네가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 던전이 공략됐단 소식이 그분한테 들어가면, 앞으로의 던전들은 공략이 쉽지 않아질 거야. 우린 오염된 기운으로 만들어진 몬스터들이라서 정화를 받으면 소멸 돼…. 그렇지만 다른 던전의 상위 몬스터들은…….”
“어? 다른 몬스터가 뭐? 그분은 또 누구….”
왜 중요한 얘기는 꼭 사라지면서 하는 걸까? 대신관 여우를 포함 여우들 모두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실비아가 안타까움에 급히 대신관 여우의 몸에 손을 뻗어 보았으나 허공만 만져질 뿐이었다.
그들이 완벽히 사라지고 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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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여우들은 모든 속박을 벗어던지고 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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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는 끝나지 않고 빵빠레 소리와 함께 연거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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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퀘스트 완료로 <주문서가 든 상자>를 획득했다.]
[<잊혀진 신전> 공략 완료. 갱신된 공략 창을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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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관 여우가 있었던 자리엔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실비아가 상자를 들어 올려 흔들자 안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떠오른 메시지를 봐선 대신관 여우가 준 것이 아니라, 어차피 퀘스트를 완료하면 나올 예정이었던 보상 같았다.
‘여우들 머리를 세게 치든 약하게 치든 이 상자가 나왔을 거 같은데…. 뭐, 굳이 남의 고통을 즐길 필욘 없지.’
달칵.
상자를 열자마자 눈부신 빛과 함께 종이 한 장이 그녀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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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려라 폭포 주문서>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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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황금 폭포를 여는 주문서인가 보네.’
주문서를 주머니에 넣고 나니 공략 창에 ‘NEW’가 떠 있는 게 보였다.
시스템을 열어 확인해 보자 인간 팽이가 되어 헤드스핀 80바퀴를 도는 실비아의 모습, 사람들이 실비아를 헹가래 치는 모습, 여우들이 손을 흔들며 하늘로 사라지는 모습들이 사진첩에 추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아시스에서 은밀한 시간을 가지던 노엘과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사진을 보며 실비아가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시스템 좀 변태 같기도 하고…. 이런 것도 다 저장 하는구나.’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위로 올리던 실비아의 낯빛이 더 안 좋아졌다. 노엘과 있었던 야한 일이 모두 다 그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완전 섹스다이어리 수준이었다.
‘세상에…. 이런 건 혼자 있을 때 다시 봐야겠네.’
급히 공략 창을 끈 실비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우들이 사라지면서 주변의 풍경들이 점차 모습을 바꿨다. 모래와 오아시스가 사라진 자리에 오래 방치된 것으로 보이는 낡은 신전과 잡초들이 무성한 텅 빈 대리석 광장이 나타났다.
“여우들을 물리치니 신전이 원래 모습을 되찾았군요!”
일행들은 기뻐하며 낡은 신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엘의 주도하에 그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신전과 그 주변을 깨끗이 청소했다. 청소왕 세비스 덕에 요령 있고 빠르게 청소를 끝낼 수 있었다. 부지런히 쓸고 닦자 신전은 순식간에 낡은 티를 벗고 번쩍번쩍해졌다.
“낡은 신전이 새것처럼 변했네요.”
“뿌듯한걸.”
일행들은 땀을 닦고 싱긋 미소 지으며 두 손을 모아 신전의 기도 대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하, 대신관한테 이것저것 좀 더 물어보는 건데, 아쉽게 됐네. 그분의 정체가 대체 뭘까.”
실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세비스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차차 알게 되겠죠. 여우들도 이미 사라진 마당에 어떻게 물어보겠어요? 에이, 걱정 마세요! 제가 실비아 님 옆에 있는 한 던전 공략은 다 성공할 거예요.”
세비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엘도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토닥였다.
“저도 항상 실비아 님 곁에 있겠습니다.”
림보도 눈치를 보더니 재빠르게 말소릴 냈다.
“히잉!”
“좋아, 힘이 좀 나네. 우선 대신관 여우가 말한 대로 신전 뒤편의 황금 폭포에 가서 수련을 해야겠어요.”
실비아 일행은 폐허가 된 신전의 뒤편으로 향했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걷자 절벽 사이로 물이 쪼르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물이 흐르는 곳으로 걸어간 그녀가 주머니에 있던 주문서를 꺼내 ‘사용.’이라고 속으로 외쳤다. 그러자 우르르 쾅쾅 소리가 나더니, 눈앞에 거짓말처럼 황금색 물이 시원하게 떨어지는 웅장한 폭포가 나타났다.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