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갑작스러운 소리에 실비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림보가 건드린 대추야자나무 근처에서 뒤늦게 경보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그가 열매들을 따 먹으면서 경보 시스템을 건드린 게 원인이었다. 귀청을 찢을 듯 울리는 경고음에 일행들은 손으로 귀를 막곤 우왕좌왕했다.
“으으, 시끄러. 노엘 님, 이게 뭘까요?”
“뭔진 몰라도 좋은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아마도 열매 도둑을 잡기 위한 보호 마법이 아닐까요?”
“림보, 저 말 녀석. 일 칠 줄 알았어!”
경보음이 이내 그쳤지만 곧 나무의 주인이 올 터였다. 세비스가 귀를 쫑긋대더니 눈을 감고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청력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림보도 같이 귀를 쫑긋댔다. 청력이 좋은 두 짐승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을 미리 알아챈 것이다.
“누군가가 말을 타고 오고 있어요.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5분 내로 도착할 거예요.”
“어떡하지? 텐트 치울 시간도 없겠다.”
“어차피 잡으러 갈 거였는데 제 발로 오면 좋은 거죠. 우선 바위 뒤에 숨어서 대기하며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죠.”
‘이렇게 갑자기? 내일 공략을 시작할 줄 알았더니….’
실비아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긴장감에 꿀꺽 침을 삼켰다. 그나마 빠른 판단으로 세수를 안 하고 오아시스 근처부터 관찰한 게 다행이었다. 초록색으로 위장을 해놔야 고위 몬스터에게 동족인 척 속이기 쉬울 테니까.
‘얼굴을 씻었다면 큰일 났을 뻔했어.’
말발굽 소리가 바로 근처까지 접근했다고 세비스가 황급히 말했다.
실비아는 일행이 오아시스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발에 물기가 묻어 발자국이 남을 수 있다고 판단, 백스텝을 하며 발자국을 지우며 숨자고 했고, 림보를 포함 일행들은 뒷걸음질로 발자국을 지우며 바위 뒤로 숨었다.
잠시 뒤 낙타를 탄 한 무리가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사막여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마치 인간처럼 직립보행을 하고 있었다. 손을 관찰해 보니 보송보송한 게 몸도 다 털로 덮여 있을 터였다.
‘세비스처럼 수인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냥 구미호 같은 거라고 보면 되려나.’
그들을 바위 뒤에 숨어 가만히 바라보자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염된 사막여우]
흉흉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여우들의 모습에 일행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기운이 오크들보다 훨씬 세 보이는데.’
실비아가 진땀을 흘리며 그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데 나머지 일행들의 생각도 똑같았는지 조그맣게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말에서 내린 그들은 림보가 뜯어먹은 흔적이 남은 대추야자나무를 보며 지들끼리 수군덕거리고는 공터에 남은 모닥불의 흔적과 텐트를 살폈다.
대장으로 보이는 붉은 망토를 걸친 사막여우가 열매가 다 뜯긴 야자나무 가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 있던 야비하게 생긴 부하 사막여우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물어뜯은 흔적입니다.”
“인간들이 데리고 있는 동물이었겠지. 침입자들이 이 근처에 있는 게 틀림없다. 오아시스에서 쉬고 있던 초록오크들이 다 당했어.”
“그들은 열심히 일한 후 오아시스에서 쉬고 있었을 뿐이었건만 뭐가 그렇게 심기에 거슬려서! 사악한 인간들 같으니!”
분노가 섞인 부하 사막여우의 말에 실비아가 몸을 움찔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머지 일행들도 침울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여우의 말에 어쩐지 불한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건 그렇고, 알아들을 말을 하는 거 보니 예상대로 고위 몬스터구나.’
실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자 그들의 머리 위 메시지가 더 디테일해졌다.
[lv40 대장 사막여우]
‘레벨 40??’
레벨 40…. 자신의 레벨보다 10은 더 높다. 거기다가 한 명도 아니고 총 5명이 최소 30레벨 이상이었다. 그에 반해 실비아는 레벨 30이고, 나머지 두 명과 한 마리는 레벨이 몇인지 파악이 불가하니 전력 비교가 되질 않았다.
‘보통 던전의 몬스터가 플레이어보다 레벨이 높으면 공략 불가일 텐데.’
너무 놀라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실비아 옆에서 세비스와 노엘이 속삭였다.
“실비아 님, 저들도 몬스터 같은데 이참에 때려잡죠.”
“…안 돼.”
실비아의 파래진 낯빛을 눈치챈 건지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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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몬스터와 마주쳤다.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 보니 대화가 가능해 보여! 실비아의 선택은?
1. 목숨은 소중한 거지만 우선 최선을 다해서 승산 없는 싸움을 걸어 본다.
2. 손을 정중히 모으고 다가가 말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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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은 누가 봐도 선택하면 죽는다고 경고하는 문구잖아. 당연히 말을 걸어야겠지.’
2번을 택한 실비아는 일행들에게 아무래도 저들은 말이 통하는 것 같으니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다고 했다. 손을 정중히 모은 실비아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노엘이 막아섰다.
“실비아 님, 위험해요. 제가 가보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가볼게요.”
실비아가 고개를 젓자 옆에 서 있던 세비스가 둘을 막아섰다.
“두 분 다 가만히 계세요. 차라리 급하면 늑대로 변신할 수 있는 제가 가겠습니다.”
“히이잉!”
서로 내가 간다며 훈훈하게 속삭이며 다투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여기 숨어서 뭐하고 있는 거냐.”
분명히 조그맣게 속삭였건만 사막여우들의 귀는 세비스만큼 예민했던 건지 그들의 은밀한 대화는 금방 들켜 버렸다. 실비아는 돌처럼 굳은 채 사막여우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게임이잖아…. 그리고 게임 선택지잖아…. 말을 걸어 본다고 선택했으면, 말 걸 때까진 안 들키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실비아는 속으로 어이없는 게임시스템을 원망했다. 그들의 꼴을 훑어보던 대장 여우가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근처에 있던 초록오크들이 모두 당했다. 너희는 다행히 살아남았나 보군.”
“네?”
“뭘 멍청하게 서 있어? 짐 챙겨서 빨리 마을로 돌아가자. 인간들이 침입한 것 같으니 여기서 오래 머물다간 위험해.”
그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재촉하며 밀었다. 대장 여우는 터번을 두르고 초록색 피부를 가진 그들을 오아시스에 있던 몬스터들과 동류로 착각한 듯했다.
‘분장이 효과가 있어서 좋긴 한데, 그럼 우리가 저 오크들과 비슷하게 생겼단 거야? 참나….’
대장 여우는 자세히 보니 눈이 흐리멍덩한 게 역시 맛이 살짝 가보였다. 그는 일행들을 오아시스에 있던 오크 무리라고 판단을 마친 것 같았다.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실비아 일행은 주섬주섬 짐을 다 챙겨 그들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 * *
“어이! 거기 말!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가.”
그들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한가운데 솟아오른 동산 위에는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대리석 기둥으로 만들어진 신전이 보였다. 오크들의 숙소에 도착한 뒤 어물쩍대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방까지 배정받았다.
“동료들이 많이 죽어서 상심이 크겠지만 곧 중요한 행사가 있단 걸 잊지 않았겠지? 푹 쉬어 둬. 내일은 바쁘니까.”
대장 사막여우는 그들을 후줄근한 숙소에 던져놓고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곧 사라졌다. 숙소는 오크들이 단체로 생활했던 듯 휑하게 넓었고 이부자리들이 정신없이 널려 있었다.
실비아의 분장이 너무 철저했던지 저들이 맛탱이가 간 건지, 그들은 실비아를 여자로 인식하지 않고 일행과 같은 방에 놔두고 갔다.
‘뭔데, 왜 날 남자들이랑 같은 방에 놔두고 가는 건데? 고맙게시리.’
실비아가 뚱한 표정을 일부러 지으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고 있는데 노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건물은 제가 어렸을 때 봤던 신전입니다. 사방이 사막으로 변했길래 모든 게 다 바뀌어 있을 줄 알았더니 건물은 그대로네요.”
“그래요? 왜 그런….”
그때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던 림보가 울부짖었다.
“히이잉!”
“아니, 왜 림보도 방에 던져두고 갔지? 림보는 여우들이 마구간에 데려갔을 줄 알았더니.”
실비아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자 세비스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늑대 왕국에서의 경험을 생각하면 저들은 지금 오염되어 있어서 이지를 잃어버린 상태죠.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다들 조금씩 맛이 가 있답니다. 그러니 저희의 어설픈 변장을 보고도 의심을 안 한 거죠. 제 말을 명심하시고 여우들이 이상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보여도 당황하지 말고 차분히 대응해야 해요.”
기본적으로 맛이 간 몬스터들이라니, 쉽게 말해 도라이란 소리였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겠어. 말이 안 통하면 그냥 때려잡으면 되지만 말이 통하는 데다가 우리보다 강하고, 거기다가 미친놈들이다….’
실비아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세비스가 얼굴을 만지며 죽을상을 지었다.
“얼굴이 따가워요…. 씻고 싶어요.”
“씻었다가 저 맛탱이 간 놈들이 들이닥치면 답도 없어. 몸만 씻고 얼굴은 좀만 견디자, 세비스.”
그들은 몸이라도 씻기 위해 욕실로 갔다. 그러나 숙소의 후줄근한 욕실에선 녹물이 나와서 깨끗하게 샤워하기도 힘들었다.
‘뭔 놈의 오크들은 샤워도 안 하고 사나. 녹물만 나와….’
어쩔 수 없이 일행들은 방안에 굴러다니던 미지근한 생수통을 주워 천을 적신 뒤 대충 찝찝한 부위만 닦았다.
“차라리 오아시스에 있는 편이 나았겠어요, 여긴 무슨 돼지우리도 아니고… 녹물만 나오고 덥고 더럽고….”
“그러게 말이야. 맛탱이가 가서 우릴 오크로 본 건 다행이지만….”
실비아와 세비스가 한숨을 쉬고 있는데 노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곧 있다는 중요한 행사가 대체 뭘까요? 우선은 분장으로 저들을 속였으나, 계속 속을진 알 수 없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