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녀는 어릴 적 했던 모 게임에서 뭣도 모르고 똑똑한 전사가 될 거라고 지력과 지혜만 올리다가 한 달간 밤낮으로 키우던 캐릭터를 버렸던 쓰라린 기억이 떠올라 잠시 눈물을 삼켰다.
노엘은 실비아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부드럽게 비비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목에 입을 파묻었다.
“글쎄요…. 체력? 힘은 저만 세면 되니까, 실비아 님은 밤에 제 힘을 감당하시려면 체력을 키우셔야겠네요.”
“네? …어머, 노엘 님도 참….”
실비아는 잠시 벙쪘다가 곧 그의 말뜻을 알아듣곤 얼굴을 붉혔다. 그리곤 주먹을 쥐고 노엘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웃었다.
사막에서도 꽃을 피울 거 같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노엘이 가녀린 목을 팔로 감싸 당겨 입에 쪽 입맞춤을 했다.
둘이 염병할 헛소리를 주고받으며 키득대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흠칫해서 올려다보니 다행히 세비스는 아니고 림보였다.
“푸르르!”
림보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똥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분위기 뭣 같이 돌아가네.’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젓곤 다리를 내밀어 노엘과 실비아 사이에 자리를 만들곤 털썩 주저앉았다.
“하핫…. 림보가 심심한가 보네요.”
“아니, 왠지 림보 기분이 더러워 보이는데, 기분 탓이겠죠? 호호….”
얼떨결에 림보를 가운데 두고 앉게 된 실비아와 노엘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는 게 좋겠군요.”
몬스터를 잡느라 많이 지친 그들은 일단은 사막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기로 했다. 오아시스 공략 후 잠시 쉬고 있으려니 일교차가 강한 사막의 저녁이 찾아왔다.
“아우 추워, 에취!”
“실비아 님, 감기 걸리시겠어요. 잠시… 여기 어디에 담요가 있었던 거 같은데….”
실비아가 몸을 떨며 재채기를 하자 세비스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밍크 담요와 여러 방한용품을 꺼냈다. 무한저장 되는 가방은 정해진 중량을 초과하지 않으면 무거워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저택에서 출발 전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쑤셔 넣었었다. 안 그래도 점점 추워져서 곤란했는데, 쑤셔 넣은 물건중에 밍크 담요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텐트를 펼친 그들은 슬슬 배가 고파왔기에 큰 바위 사이 너른 공터에 모닥불을 피워 저녁 식사를 간단히 했다.
세비스가 모닥불에 따뜻한 수프를 끓여 일행에게 나눠주었다. 마른고기와 빵도 간단히 나눠 먹었다. 림보가 고기를 보며 입맛을 다셨지만, 실비아는 동물 건강에 해롭다고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유기농 당근을 꺼내주었다. 림보는 유기농 당근을 씹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만 단호한 실비아의 얼굴에 힘없이 당근을 물었다.
고기를 못 먹어 슬픈 초식동물 림보와 실비아 일행들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주린 배를 채웠다. 한창 식사를 하는데 세비스가 초록색 크림을 발라 끈적한 얼굴을 문지르며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초록색 크림을 굳이 계속 바르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점점 얼굴이 가려운 느낌이에요. 따라하는 게 좋다곤 했지만… 지금은 몬스터가 없으니 잠시 지워도 될 듯한데….”
그의 말에 실비아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냐, 준비는 항상 과하게 해도 지나칠 게 없어. 고생해서 모은 돈을 장례식 비용에 쓸 순 없지 않겠니.”
세비스가 재차 강조했었던 말에 어느새 세뇌가 되어 버린 실비아가 장례식을 말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실비아 님이 던전을 나 없이 노엘 님과 단둘이 갈까 봐 일부러 강하게 말한 건데.’
세비스는 한숨을 푹 내쉬곤 뺨을 만졌다. 그리곤 초록색이 묻어 나오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긴 한데… 그럼 이 꼴로 중앙 던전까지 가나요? 자기 전에 세수는 안 해요? 뾰루지라도 나면 어떻게 해요? 아…. 내 백옥 같은 피부가….”
세비스가 절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 쥐자 노엘이 풋- 하고 웃더니 고상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비웃는 표정의 노엘을 눈치챈 세비스가 눈을 가늘게 뜨곤 그를 바라봤다.
“노엘 님, 왜 웃으세요?”
“아, 흠…. 세비스 님은 하루 세수 안 한다고 뾰루지가 나시나 봅니다. 저는 타고난 피부미인이라 그런지 무슨 짓을 해도 얼굴에서 뾰루지를 구경한 역사가 없어서… 신기하네요.”
“뭔 짓을 해도? 며칠 동안 세수 안 한 적이 있으신가 봐요? 에그그…. 신관님 그렇게 안 봤는데 좀 더럽네요.”
세비스가 위아래로 훑어보자 노엘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더럽다니요.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해 두죠. 저는 신의 자식인지라….”
“누군 신이 버린 자식인가요?”
세비스가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끊어먹자 노엘의 여유로운 미소도 사라졌다.
파지직! 두 남자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었다.
‘왜 저래.’
실비아는 왜 갑자기 두 남자가 별거 아닌 걸로 말다툼을 벌이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입에 든 샌드위치를 꿀꺽 급하게 삼킨 실비아가 중재에 나섰다.
“그래, 세비스. 세수 참 중요하지. 난 오늘 중앙 던전으로 가게 될 줄 알았지 뭐야? 세수하고 내일 다시 변장하는 게 좋겠다.”
그녀의 말에 세비스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고 노엘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세수를 하자는 건 합리적인 답이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릴 해도 그녀가 자길 편들어 주길 바라는 맘이었다고나 할까.
노엘은 사실 실비아와 같이 사는 세비스에게 은근한 질투를 계속 느끼고 있었기에 못난 줄 알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 버린 것이다.
사제 교육을 받으며 성년이 되기 전부터 현명하고 성숙하다는 칭찬을 들었던 노엘 역시 어쩔 수 없었다, 나이 불문, 직업 불문 인간을 유치하게 만드는 게 질투니까.
실비아가 자신보다 세비스를 선택했다는 서러움에 그의 가슴이 울컥 뜨겁게 달아올랐다. 노엘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곤 서러운 눈으로 실비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실비아가 시선을 느끼곤 노엘을 돌아보았다.
“왜요, 노엘 님?”
“그게…. 아닙니다.”
‘신관인 내가 성체도 안 된 늑대 수인을 상대로 이러면 안 되지,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인가.’
울컥 서러움이 올라왔지만 신관으로 살아가며 감정을 자제하는 게 일상이 된 노엘은 제 못난 감정을 티 내지 않고 삼켰다.
“자, 수건 하나씩 가져가세요.”
세비스에게 수건을 배급받아 목에 두른 일행들은 물가에서 얼굴을 씻으려고 쪼그려 앉았다. 손을 모아 물을 뜨려던 실비아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찌푸리곤 오아시스 건너편을 바라봤다.
건너편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와 잎사귀 더미들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벌레 먹은 잎사귀들을 나무에서 일부러 뜯어 놓은 것 같았다. 좀 더 자세히 지켜보기 위해 실비아가 몸을 일으켰다. 나무 주변으로 땅을 다진 흔적이 보였다.
실비아는 오아시스 주위를 날카로운 눈으로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잠깐, 가만히 보니까 이 오아시스…. 여기서 누가 작물을 기르나 봐요.”
실비아가 건너편을 가리키자 노엘이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손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음, 맞네요. 저건 자연적으로 자라난 식물이 아닌 것 같아요. 일부러 심은 것처럼 보이는 무화과랑 벼도 있고, 저기엔 대추야자 열매…. 심지어 나무 밑엔 바구니까지 있어요.”
“주인이 있는 작물인 걸까요?”
노엘과 실비아가 심각하게 얘길 나누고 있는 와중에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던 세비스가 건너편을 힐끗보다가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말 녀석! 말 녀석이 언제 저 나무 밑으로 갔지?”
아삭아삭.
방금 전만 해도 물가에 함께 있었던 림보는 언제 간 건지 건너편 과일나무 밑에서 열매들을 주둥이로 흔들어 여러 개를 한꺼번에 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땅에 떨어진 열매들을 입에 잔뜩 넣고 질겅질겅 씹어 댔다.
“림보, 안 돼! 주인이 있는 거 같은데 함부로 먹었다간 곤란해질 수도 있어.”
실비아가 그를 쫓아 후다닥 달려갔다. 림보는 나무를 흔들며 계속 열매를 작살 내는 중이었다. 가까이 가서 말려 봤지만 림보는 이미 달콤한 열매의 노예가 되어서 실비아의 제지가 통하지 않았다.
“림보, 림보! …하, 어쩔 수 없지.”
빠각.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림보의 주둥이를 살짝 쳐 열매를 다 뱉어 내게 했다. 살짝 친다고 쳤는데 힘 스탯이 올라가서 그런지 두개골이 빠개지는 소리가 났다.
‘뱉으라는 말을 못 알아들으면 때리는 수밖에 없다.’
투두둑.
실비아의 주먹질에 주둥이에서 열매를 다 떨군 림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다른 이도 아니고 신뢰 관계로 맺어졌던 그녀가 폭력을 행사한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림보를 껴안고 어르며 달래길 한참, 실비아는 사정을 제대로 설명한 뒤 가방 속에서 꺼낸 유기농 당근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세상 다 산 듯 폭삭 늙은 얼굴의 림보가 힘없이 당근을 입에 물었다.
“주둥이를 친 건 미안해, 하지만 네가 나무를 다 작살 낼 거 같길래 어쩔 수 없었어. 주인 있는 물건은 함부로 손대면 안 돼. 알았지, 림보?”
림보는 그녀의 말에 풀이 죽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비아가 림보를 토닥이고 있는데, 세비스가 코를 들어 킁킁대더니 팔을 길게 뻗어 북쪽을 가리켰다.
“주인이라…. 킁킁…. 여기서 말을 타고 30분 이내의 거리에 마을이 있는 거 같긴 해요. 이 밭의 주인이 그곳에 있지 않을까요?”
웨에에에에엥!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한 요란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