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워워…. 잠시만요. 잡초들이 쓰러져 있는 걸 보니 녀석들이 지나간 흔적이 분명하네요. 여기서부턴 조심해서 가야 할 것 같아요.”
“아까 준비한 걸 꺼내서 바를 때가 왔네요.”
노엘의 말에 실비아가 굳은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녀가 준비해달라고 한 물품은 다름 아닌 초록색 위장크림이었다. 장을 보던 망토 무리의 얼굴이 초록색이었다는 말을 듣고 그들과 비슷한 얼굴색으로 분장할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아무리 현실 세계의 것들이 게임 속에 많이 있다지만 군대용 위장크림이 별장 안에 있을 린 없으니 집사가 건넨 건 급하게 초록색 색소를 섞어 만든 쫀득한 로션이었다.
세 사람은 옷 바깥으로 보이는 부위에 모두 초록색 크림을 잔뜩 펴 발랐다.
“이걸 바르면 던전 공략에 도움이 좀 될까요?”
“뭐라도 해 봐야지,”
초록색 크림을 발랐지만 빛나는 외모는 숨길 수 없는 법. 귀여운 세비스와 잘생긴 노엘은 초록색 크림을 발라도 외계인 왕자처럼 보였다. 림보가 세비스를 지그시 눈을 뜨며 바라보더니 이를 내어 활짝 웃으며 힝힝거렸다.
“저거 봐, 또 비웃네. 쟨 진짜 버릇이 없어.”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세비스. 림보가 비웃을 리가 없대도….”
세비스가 투덜거리자 실비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타박했다.
안쪽으로 조금 걷자 조그만 폭포가 나타났다. 폭포로 다가가던 실비아는 바위 틈새에서 떨어져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이상한 기호랑 알아볼 수 없는 언어가 적힌 쪽지였다.
“역시 마을에 쪽지를 돌리던 무리는 여기 사는 몬스터들이 맞나 봐요.”
“예상대로군요.”
쪽지를 두고 실비아와 노엘이 대화하는 사이 세비스가 양팔을 손으로 감싸곤 파르르 떨었다.
“막상 들어가려니 좀 떨리는데요.”
“풋….”
림보가 세비스의 떨린다는 말에 풋, 웃음을 흘렸다. 세비스는 잠시 그런 그를 째려봤다. 노엘은 긴장한 표정으로 폭포 앞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절벽에서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근처에 다가가자 물줄기 사이로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틈새가 나타났다.
“여길 지나면 그 신전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일렬로 서서 들어가야겠네요.”
말들은 덩치가 사람보다 크기에 틈새를 지나가기 힘들어 보였다. 부를 때까지 집에 가 있으라고 하자 노엘의 외제마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율주행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림보는 고개를 저었다.
“따라오고 싶단 거니?”
실비아의 말에 림보가 히잉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가도 별일이야 있겠어? 그래, 같이 가자.”
림보를 데려가기로 결정한 일행은 그를 낑낑거리며 바위 틈새에 껴 넣었다. 덩치가 큰 그가 뒤에서 따라오기 힘들 거란 판단에서였다. 림보를 틈새에 욱여넣고 밀자 말 몸통이 구겨지듯 점점 안으로 들어갔다. 림보는 비명을 좀 질렀지만 일행들이 뒤에서 밀자 울며불며 어거지로 틈새에 끼여 앞으로 나아갔다.
좁은 바윗길의 끝에 다다르자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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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신전>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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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겠어!’
실비아가 속으로 입장하겠다고 외치자 효과음이 뜨더니 림보가 앞으로 겨우 빠져나갔다.
뽕!
림보가 빠져나가자 그의 몸통 때문에 어둡기만 하던 시야가 밝아져, 일행은 던전 안으로 들어왔음을 알았다. 예상보다 훨씬 놀라운 세계가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실비아 님, 사막인데요?”
“…뭐지.”
“신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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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메인 던전 : 잊혀진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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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뜬 웅장한 메시지 뒤로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거친 모래바람이 그들 사이를 휘젓고 지나갔다. 뜨겁게 작열하는 햇살 아래 서 있자 얼마 안 돼서 모두의 몸에서 비 오는 듯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손부채질을 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우….”
입을 잠시 열었다 닫았는데도 버석버석거리는 모래 알갱이가 입안에 느껴졌다.
퉤퉤, 침을 뱉는 와중에 그녀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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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퀘스트
- 마을주민들을 구출하라 (0/100)
- 고위 몬스터를 정화하라 (0/??)
성공보상 : 던전 클리어 보물상자
실패 시 : 데드엔딩
*필수 공략 스토리입니다. 스킵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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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면 데드엔딩이라니, 실비아는 굳은 얼굴로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동정 미남들을 공략하다가 죽으면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봤다는 위안이라도 있지, 던전에서 싸우다가 죽는 건 정말 말 그대로 개죽음 아닌가. 실비아는 고개를 저으며 비장한 얼굴로 각오를 다졌다.
‘죽어도 미남 앞에서만 죽겠다….’
그녀가 주먹을 불끈 쥔 채 눈을 감고 부르르 떨자 림보가 힐끗,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건 그렇고 마을주민들이 여기에 갇혀있는 게 맞나 보구나. 심지어 100명? 많이도 납치했네….’
실비아가 생각에 빠져있는 와중에 노엘이 사막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이 달라졌네요. 말을 괜히 집에 보냈나 봅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이동을 할지….”
“어쩔 수 없죠. 제가 변신할 수밖에.”
세비스는 빠른 이동을 위해 늑대로 변신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입고 있던 옷가지들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옷더미 안에 붉은 눈을 한 검은 늑대가 나타났다.
노엘은 처음 본 세비스의 늑대 모습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차분해졌는데, 실비아가 오히려 놀라 버렸다. 평소에 봤던 조그만 강아지 같은 늑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성체는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최소한 강아지-개의 중간 단계, 개아지… 뭐 이런 정도로 보였다.
“세비스, 너 덩치가…?”
“말씀드렸잖아요. 원래 그 덩치 아니라구요!”
실비아가 놀라서 묻자 세비스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턱을 치켜들었다.
‘허세가 아니었구나. 그래도 여전히 덩치가 작아서 귀여운데….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세비스는 고개를 높이 들고 킁킁대다가 발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음식이랑 알 수 없는 동물들의 냄새가 나요. 아마 몬스터들 같아요. 바람이 좀 불어 줘서 다행이네요.”
“다행이다, 널 데려오길 잘했네. 노엘 님이랑만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러게요. 하마터면 제대로 공략도 하지 못하고 사막에서 길을 잃을 뻔했군요.”
노엘은 그의 쓸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비스를 데려오길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를 속이고 둘만 왔다면 공략이 가능했을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몬스터들이라면 공략하러 가야지, 거기로 가자.”
노엘과 실비아는 림보를 타고, 세비스는 늑대인 상태로 그들은 빠르게 사막을 건너갔다. 다행히 림보는 이교도에게서 약탈한 말이었기에 사막도 무리 없이 잘 건너갔다.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세비스가 가다가 멈춰서더니 - 림보도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지만 말을 못 하기에 세비스가 우세했다. - 앞을 가리켰다.
“저 오아시스 앞에 몰려 있는 것들, 몬스터 아닐까요? 이제 여기서부턴 전투태세를 갖춰야겠어요.”
그의 말대로 앞을 바라보니 저 멀리 오아시스 앞에서 무리 지어서 쉬고 있는 초록색 생물들이 보였다. 무리를 짓는다니, 개별로 움직이는 몬스터들보다 지능이 높단 소리였다. 해안 동굴과 갯벌 공략 때와는 달리 좀 긴장해야 할지도 몰랐다. 실비아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몬스터들 근처로 다가간 일행은 바위 뒤에 숨어 동태를 살폈다. 가만히 초록색 괴물을 바라보자 실비아의 눈앞에 몬스터의 이름이 떠올랐다.
[오염된 초록오크]
한가롭게 퍼질러 누워 있는 오크들은 덩치가 꽤 컸다. 그들은 호숫가에 벌렁 누워서 잠들어있기도 했고 오아시스의 물을 손으로 퍼 올려 마시고 있기도 했다.
‘저 몬스터들은 정화해야 하나?’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 주려는 듯 실비아의 앞에 퀘스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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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오아시스에서 쉬고 있는 초록오크들을 때려잡자
- 오염된 초록오크를 50마리 퇴치할 것. 파티원이 해치운 몬스터도 셈에 포함된다. 고위 몬스터가 아닌 이상 정화 스킬은 쓸 필요가 없다.얘들은 그냥 마구 때려잡자.
성공보상 : 체력 포션 3개
실패 시 : 데드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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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몬스터만 정화하고 얘들은 그냥 마구 때려잡으라니, 퀘스트 창을 본 실비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간단하게 말해서 약한 놈은 때려잡고, 강한 놈은 정화하란 건가…. 어? 성공하면 체력 포션 3개를 주잖아?’
그녀는 퀘스트 창의 하단을 보자마자 하나에 300골드를 주고 체력 포션을 산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비밀상점을 나오기 전 시크릿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영수증 지참 시에도 교환, 환불은 안 되시구요…. 여길 나가시면 끝입니다, 호구… 아니, 고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