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실비아는 전투 협회의 실상을 바로 알아차렸다. 쉽게 말해 공공기관의 폐해인 셈이었다. 황제가 강제로 만든 협회이기에 오염된 몬스터들을 최소 할당량을 채울 만큼만 해치우고, 굳이 오지 산 구석에 있는 던전을 찾아다니며 처치하진 않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제국 꼴 잘 돌아간다.’
실비아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론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협회장님이라면 경험이 많으실 테니 조언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전서구를 보내시게요?”
“새가 수도까지 날아가려면 너무 오래 걸리죠. 이사벨, 수정구 좀 가져와 줄래요?”
노엘은 신관 교육을 오래 받아서 그런지 사용인들에게도 모두 존댓말을 했다. 그의 말에 이사벨이라고 불린 하녀가 벨벳 천에 감싸져 있는 수정구를 가져왔다. 게임 세계는 현실 문물과 판타지 문물이 적당히 섞여 있어 플레이어의 판타지 환상을 지켜주었는데 연락수단 또한 그중 하나였다.
전서구를 이용한 연락으로 판타지 문물에 대한 환상을 채워줬다면, 수정구는 말만 수정구이지 현실의 스마트폰 같은 존재였다. 도서관에서는 도서 검색대로 쓰였고, 비밀상점에서는 컴퓨터로 쓰이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영상통화도 가능했다.
물론 가난뱅이인 실비아네는 수정구 따위 집에 없었다. 세비스가 야생에서 새를 잡아 와 회유와 협박을 통해 강제로 길들여 전서구로 쓰고 있을 뿐이었다.
‘수정구 봐, 엄청 비싸 보이네. ’
쿠키 접시를 구석으로 치운 하녀가 번쩍이는 수정구를 가운데에 올려놨다. 노엘이 ‘전투 신관 협회.’라고 나직하게 말하자 수정구 안이 연기로 가득 찬 것처럼 흐려지더니 이내 험악한 도적처럼 생긴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 네. 전투 신관 협회입니다.
“협회장님, 저 노엘입니다. 엘베우스 신전의 고위신관인 노엘, 기억하시나요?”
- 아! 기억하다마다요. 신관님의 얼굴을 어찌 잊겠습니까! 시간 나시면 수도에도 자주 와 주세요. 기도 시간마다 노엘 님은 언제 또 오시냐고 부인들이 어찌나 성화인지 모르겠네요.
수정구 너머로 협회장이 너털웃음을 짓자 노엘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하하…. 시간 나면 한 번 들르겠습니다. 오늘 연락한 건 다름이 아니라 오염된 지 오래된 던전에 대해서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요. 공부는 하고 있지만 아직 실전에 투입된 적이 몇 번 없어서 조심해야 할 건 없는가 연락드렸어요.”
- 예? 피곤하게 왜 시키지도 않은 던전 공략을 하세요?
협회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노엘이 머쓱한 듯 앞머리를 넘기곤 대답했다.
“아, 그럴 사정이 좀 있어서요. 지금 가려는 곳은 계곡에 있는 신전인데 오염된 지 오래됐습니다만….”
노엘은 집사와 하녀에게 들은 지역의 상황을 협회장에게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모두 전해 들은 협회장은 잠시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먼 곳을 바라보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회상하듯 입을 열었다.
- 흠, 그런 곳을 한 번 가본 적 있긴 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지역인 국경 근처의 조그만 마을이었지요. 결국 정화에 실패해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남은 신관과 전사들은 모두 도망쳐 왔지만요. 안에 들어가 보니 본 적 없는 다른 세계가 형성되어 있었어요. 그 안엔 기본적으로 하급 몬스터들과 말이 통하는 고위 몬스터들이 존재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정화에 실패한 마을은 어느 날 아예 사라져버려서 마을이 있었던 위치엔 공터만 덩그러니 남았다고 한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그 사례 이후로는 거의 국경지대나 마을에 출몰하는 몬스터 토벌 명령만 내려왔죠. 혹시나 소중한 인력들이 마을이랑 같이 사라지면 곤란할 테니까요. 저희 입장에서도 굳이 시키지 않은 던전 공략을 해서 위험에 노출되고 싶지 않구요. 간혹 정화하면 순해지는 몬스터들도 있긴 한데, 신성력 낭비라서 보통… 그냥 때려잡죠. 도움이 안 돼서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많은 도움이 됐어요.”
- 아! 그러고 보니 거기 살았다가 탈출한 주민의 말로는 분명히 마을 사람들이 좀비처럼 변했다고 했었는데, 들어가 보니 마을 사람은 한 명도 없더라구요? 그 나쁜 몬스터 놈들이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 마을을 차지한 게 아닐까 추측할 뿐입니다. 결국, 아무도 구출하지 못하고 그 마을 자체가 사라져버렸으니 참…. 협회 입장에선 지우고 싶은 기억이죠.
협회장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얘길 해 주었으나 한 번의 사례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냥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단 것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마을이 사라지다니…. 좀 무서운데.’
어두운 표정으로 협회장의 말을 듣던 실비아는 잠시 몸을 떨었지만 이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협회는 실패했다고 하지만 실비아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다름 아닌 여긴 게임 속이며 자신은 빙의한 플레이어라는 것.
‘협회가 던전 공략을 쉽게 성공했다면 이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가 존재할 이유가 없지. 저 사람들은 실패해도 난 아마 성공할 것이다….’
던전 얘기가 끝난 뒤 협회장과 덕담을 주고받던 노엘이 수정구 영상을 종료했다.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세비스가 입을 열었다.
“흠, 아마도 그 마을의 주민들은 오염된 기운으로 몬스터화가 된 걸 거예요. 늑대 왕국이 오염됐을 때도 가족들은 모두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변했었죠. 그 모습은….”
세비스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실비아가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자 세비스가 겨우 입을 다시 열었다.
“전 탈출하기 전까지 다르게 변해 버린 그들의 모습을 따라하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지를 잃어서 그런지 비슷한 행동을 하면 공격하지 않았으니까요.”
“따라했다고?”
실비아는 입술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다가 집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시장에 장 보러 온 사람들의 얼굴색이 어땠는지는 들으셨나요?”
“흠…. 초록색이라고 했던 거 같네요.”
그의 말에 실비아가 세비스와 노엘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초록색 얼굴을 가진 인종이 있어?”
“글쎄요. 신관 교육을 받으면서 대륙의 온갖 인종들을 공부했었지만 붉은 얼굴, 검은 얼굴을 가진 인종은 있어도 초록색 얼굴은… 없었던 거 같아요. 인간이 아니라면 모를까.”
노엘이 말하고 나서 세비스도 말을 얹었다.
“맞아요. 수인족 중에도 초록색 얼굴을 가진 자는 없어요. 초록색이면… 오크족?”
“그럼 아마도 시장에 나타났던 무리는 몬스터일 확률이 높겠네요.”
실비아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곤 집사를 돌아봤다.
“그렇군요…. 집사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어떤 거 말씀이시죠?”
그가 묻자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게….”
* * *
던전 공략이 며칠이 걸릴지 예상할 수 없었기에 의논을 마친 그들은 짐을 챙겨 빠르게 별장을 빠져나왔다. 중년의 집사가 눈물을 훔치며 위험할 것 같은데 그냥 안 가시면 안 되냐고 노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렸지만, 울먹이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한 노엘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외제마에 올라탔다. 림보와 노엘의 외제마는 그사이에 친해졌는지 지들끼리 히잉히잉 거리며 말 언어를 주고받았다.
실비아의 뒤에 올라타려던 세비스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노엘이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세비스 님, 저랑 같이 타고 가시죠.”
“네? 저는 실비아 님이랑 타고 가면 되는데.”
노엘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한겨울 북풍처럼 차가웠다. 실비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멀뚱멀뚱하게 그들을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같은 남자가 아는 법. 세비스는 그의 싸늘한 눈빛을 알아차렸다.
“저랑 가시죠.”
노엘의 단호한 말에 세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에 올라탔다.
‘같이 말에 타자고 권유하는 의도는 뻔히 알겠지만 계속 실비아 님 뒤에 타겠다고 고집부리는 그림도 좀 이상하니 별수 없지.’
그들의 신경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실비아는 같은 말에 탄 둘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둘 중 아무나 내 뒤에 타지. 참나, 왜 둘이서 말을 타냐고.’
세 사람을 태운 외제마들은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뒷산의 정확한 명칭이 없었기에 노엘은 외제마를 직접 몰았다. 길을 모르는 실비아는 림보에게 노엘의 뒤를 따라가라고 자율주행을 시켰다. 외제마 둘의 번개 같은 속도에 일행은 금방 뒷산으로 올라가 신전이 위치한 계곡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노엘은 계곡 근처에서 외제마를 진정시킨 뒤 말에서 내려 바닥을 자세히 관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