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세비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장갑까지 착용하더니 실비아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실비아 님, 잠시 물러나세요.”
화르륵!
그녀가 뒤로 물러나자 화염방사기에서 거대한 불이 뿜어져 나오더니 젖은 나뭇가지에 한방에 불이 붙었다.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주 활활 잘 탔다.
“불은 역시 화염방사기로 붙여야 제맛이죠.”
세비스의 말에 그녀는 잠시 놀라서 입을 떡 벌리다가 곧 여기가 게임 속이란 걸 자각하고 가까스로 진정했다.
‘부싯돌이나 나뭇가지를 비벼서 불을 붙일 줄 알았던 내가 하수였군….’
무한저장 되는 피크닉 가방에서 회칼을 꺼낸 그는 대광어 한 마리를 단숨에 요절을 내곤 회를 정성스럽게 떴다. 모닥불에 구워 먹을 구이용 조각도 잘라 내서 얇은 나뭇가지에 끼웠다. 손으로 휘휘 돌려가며 정성스럽게 굽자 금방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대체 피크닉 가방에 왜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초고추장까지 꺼낸 그는 완벽하게 식사 세팅을 마쳤다.
“실비아 님, 맛있게 드세요.”
“아, 세상에 너무 감격스럽다. 여기서 대광어회를 먹을 날이 올 줄이야.”
피크닉 가방에서 꺼낸 흰 접시 위에 반투명한 광어회가 정갈하게 세팅되었다. 그녀는 쫄깃해 보이는 광어를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실비아가 현생에서 가장 좋아하던 음식은 회였다. 회 한 점에 소주 한잔 들이켜면 그곳이 지상낙원이었다. 비록 술독으로 명을 달리했지만 말이다.
‘이곳에 빙의한 이후로 언감생심 회는 꿈꿔보지도 않았건만, 설마 게임 속에서 회를 먹게 될 줄이야.’
실비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눈가를 훔치고는 회 한 점을 조심스럽게 집어 입에 가져갔다.
“오독….”
입에 넣어 조금 씹자 쫄깃한 광어가 입안에서 춤을 췄고 머릿속에서 빵빠레가 울려 퍼졌다.
빰빠라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머릿속에서 연신 폭죽이 터지고, 미미! 하면서 물고기들이 지팡이를 들고 단체로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갓 잡은 대광어의 맛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했다. 정신없이 광어를 입에 집어넣던 실비아는 아쉬운 대로 소주 대신 가방에서 꺼낸 주스를 꺼내 들이켰다.
크아! 소주를 마시듯 원샷을 하자 온갖 세상근심이 다 사라지는 듯했다. 세비스도 즐거운 표정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광어구이를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그런 한편, 한 마리 짐승이 행복해 보이는 그들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바로 초식동물 림보….
“맞다, 이 녀석. 옜다, 유기농 당근.”
한창 잔치를 벌이던 세비스가 유기농 당근을 잘라서 자신의 앞에 가져다 주자 림보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당근을 바라봤다. 당근을 힘없이 입에 문 림보는 질투심이 어린 눈으로 맛있게 광어회를 집어먹는 세비스를 노려보았다.
세비스는 일부러 림보 보라는 듯 눈을 곱게 접고는 손으로 뺨을 감싸며 감격한 표정으로 광어구이를 섭취했다.
“음, 너무 맛있어. 진짜, 당근쪼가리랑 비교도 안 되네.”
림보는 씩씩대면서 당근을 질겅질겅 씹더니 이내 힘없이 철퍼덕 바닥에 누워 버렸다. 실비아가 그런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림보, 먹고 싶어도 안 돼. 넌 초식동물이야, 먹으면 몸에 안 좋아.”
“히이잉….”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버릇 나빠져요. 음, 그건 그렇고 너무 맛있다.”
세비스는 림보가 못 먹는 게 신이 났는지 과장되게 감격하면서 광어구이를 뜯어먹었다.
절망스러운 표정의 림보를 놔둔 채 맛있게 식사를 마친 둘은 모닥불을 피운 나뭇가지들을 정리하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펄떡거리는 대광어 두 마리와 우럭 두 마리를 바닷물을 조금 담은 비닐봉투에 챙긴 세비스가 신난 발걸음으로 실비아의 옆을 걸었다.
“이거 팔면 얼마 나오려나 모르겠네요. 오늘 해체한 대광어는 냉동고에 얼려 놨다가 튀김을 해 먹어야겠어요. 튀김도 하고 구이도 하고 볶음도 하고… 살을 바르고 남은 뼈는 푹 고아서 생선국을 해 먹으면 되고…. 생각만 해도 신나네요.”
세비스가 신이 난 표정으로 종알종알 떠들자 그녀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도 오늘 기분이 좋네. 회를 먹을 수 있을 줄이야. 가끔 낚싯대로 물고길 더 낚아 봐야겠어.”
“좋아요!”
실비아는 바닷바람에 날려 미친 듯이 따귀를 때리는 제 머릴 넘기며 바람의 저항을 이겨 냈다. 그리고는 결심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일도 낚시를 해야겠어. 갯벌 던전도 더 공략하고 말이야.”
“네! 남은 2일간 대광어 요리도 실컷 먹고 말이죠.”
세비스가 그녀에게 손바닥을 내밀자 그녀는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광어를 못 먹어 슬픈 한 마리의 짐승과 두 명의 사람(?)은 즐거운 발걸음으로 바닷가를 벗어났다.
그들은 이틀간 갯벌 던전 2, 3, 4를 공략했다. 해안 동굴보다 큰 구슬이 나오는 빈도가 높았기에 총 7천 골드의 구슬을 얻을 수 있었다. 낙지 탕탕이를 미끼로 던져 이틀간 대광어 네 마리, 우럭 여섯 마리도 더 얻을 수 있었다. 대광어 한 마리를 제외한 물고기들을 다 팔자 2천 골드의 짭짤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실비아는 첫날 얻은 <한약재가 든 민물매운탕>을 세비스가 자는 사이에 몰래 섭취하여 체력과 힘이 각각 50이 더 올랐다.
‘으엑….’
맛은 전에 먹었던 인삼 든 킹크랩구이보다 더 끔찍했다. 국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윽… 몸에 좋은 건 역시 맛이 없어…. 몸에 좋고 맛도 좋은 건 지금으로선 노엘 님뿐이지….’
레벨도 2가 올라 실비아는 이제 27레벨이 되었다. 레벨이 좀 오른 상태여서 그런지 저번 해안 동굴처럼 빨리 레벨이 오르진 않았다. 7 레벨이 오를 동안 가만히 놔뒀던 분배 포인트를 언제 쓸까 고민하던 그녀는 잊혀진 신전으로 갔을 때 분배를 하기로 결정했다.
‘해안 동굴과 갯벌 던전은 연습 던전이나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잊혀진 신전이 메인 던전인 셈이니 거기서 상황을 보고 포인트를 분배해야겠어.’
밤이 되고, 림보는 이제 실비아의 침대가 아닌 신전에서 준 말 방석에서 자게 되었다. 말 방석은 당연히 림보의 덩치만큼 커서 안 그래도 1.5룸쯤 되던 집구석이 이젠 원룸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세비스가 마당에 림보를 내보내자고 했지만 실비아는 고급 외제마인 림보를 바깥에 놔두는 게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말 방석을 좁아터진 방구석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하루 바닥에서 자 본 실비아는 세비스 옆에서 자는 건 좋았지만 삭신이 쑤셔 불편함을 느꼈다. 그런데 다행히 림보의 말 방석이 생겨 다시 침대 위에서 자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불이 꺼지고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던 실비아는 내일 메인 던전 공략에 앞서 오랜만에 전체적인 점검을 하기 위해 시스템을 불러 냈다.
———————————————
[실비아]
레벨 27
망치 전사
가진 돈 : 17300골드
체력 : 180 힘 : 120 지력 : 35 민첩 : 30
화술 : 300(+50)
업보 : 60
신앙심 : 500(+100)
.
.
피로도 : 50
(분배 포인트가 35 있습니다. 분배하세요.)
세간의 평가: 정의로운 제국민1
———————————————
이번 던전 공략으로 9천 골드를 얻었기에 소지금은 17300골드가 되었다.
‘내일 공략하게 되는 메인 던전에서 제발 수확이 많아야 할 텐데….’
화술과 신앙심은 신관의 팔찌를 착용하여 각각 50, 100이 더 추가된 상태였다. 거기다 노엘이랑 할 때마다 업보가 10씩 깎였기에 160이었던 업보가 60이 되어있었다. 입싸를 포함 열두 번의 관계로 120의 업보가 깎였기 때문이다.
‘업보가 10 내려간다고 해서 실망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깎이네…. 씨앗을 더 열심히 모아 둘 필요가 있겠어. 업보가 갑자기 올라가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해서 업보 내리기 효과도 레벨 업 시켜야지…. 뭐, 틈만 나면 하고 싶기도 하고…. 후후.’
나머지 인벤토리 창과 사진첩을 한 번 둘러본 그녀는 결의를 다지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난 셋은 무한저장이 되는 피크닉 가방에 이것저것 챙긴 후 집을 나섰다. 실비아가 먼저 림보 위에 올라타고 다음으로 세비스가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세비스가 발걸이에 발을 올린 순간 림보가 몸부림을 치려고 해 실비아가 급히 다독였다. 실비아의 다독임에 림보는 똥 씹은 표정으로 몸부림을 멈추고 세비스를 째려봤다.
“노엘 님의 집으로 가자.”
그녀의 말에 림보가 자율주행을 시작했고 뛰어난 승마감에 세비스가 작게 감탄을 했다.
“우와, 이 흔들림 없는 안정감…. 고급 외제마는 역시 달라도 뭐가 다르네요.”
“그렇지? 뚜벅이 신세를 벗어나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노엘의 집 앞에 도착하자 집사와 노엘, 그리고 노엘의 외제마가 양쪽에 가방을 단 채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노엘은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려다가 실비아 뒤에 타고 있는 세비스를 보고는 얼굴을 굳혔다.
‘실비아 님이 왜 세비스를 데려온 거지?’
그의 표정을 본 실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노엘을 일행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데려가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해요. 세비스가 던전이 얼마나 위험할지 모르니 둘이서 가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해서…. 근데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지 뭐예요?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우습게 보고 갔다가 싸늘한 시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노엘은 실비아의 말을 듣곤 한숨을 푹 내쉬곤 앞머리를 대충 쓸어넘겼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둘이서 가는 것보다야, 세비스는 늑대 수인이니 도움이 되겠지. 실망스럽긴 하지만… 동행하는 게 낫겠구나.’
노집사의 배웅과 함께 노엘과 그의 외제마를 동반한 실비아 일행은 잊혀진 신전이 있는 노엘의 별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출발 전, 노엘이 품 안에서 고급스럽게 생긴 열쇠를 꺼냈다. 실비아가 가진 림보용 황금열쇠랑 비슷하게 생긴 열쇠였다.
“좀 빨리 가도록 하죠. 던전 공략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