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여기 놔둔 샌드위치가 왜 없지? 이놈의 말 자식!”
세비스의 말에 림보가 시치미를 떼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입가에 붙어있던 오이 조각이 단서가 되어 주었다. 세비스가 늑대화 된 상태로 양다리를 들고 힘껏 점프했다. 그리곤 말 목을 잡곤 탈탈 털었다. 림보에게 매달린 세비스의 모습은 무척 귀여웠기에 실비아는 속으로 좋아했다.
“네가 먹은 거 맞잖아! 유기농 당근도 챙겨왔건만 샌드위치를 먹으면 어떡해?”
“히이잉!”
실비아는 말목에 매달린 세비스를 가까스로 떼어 냈다.
발버둥을 치던 세비스는 뒤늦게 허리에 닿은 그녀의 손을 인식하곤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의 속마음을 모른 채로 림보를 옹호했다.
“어쩔 수 없지! 림보를 매어 놨더니 배가 고팠나 봐. 낙지 탕탕이나 먹자.”
“저걸론 배가 차지 않는다구요…. 아으, 아침부터 열심히 싼 샌드위치가 저놈 입에 들어갈 줄이야. 그건 그렇고 실비아 님, 우선 좀 씻어야 할 거 같은데요? 갯벌에서 구를 땐 좋았는데 막상 보니까 집까지 어떻게 갈지 걱정이 되네요.”
고개를 휘휘 돌리며 씻을 곳을 찾던 세비스는 곧 포기하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밀물 들어올 때까지 잠시 기다릴까요. 바닷물에라도 씻어야겠어요.”
“아니야. 조금만 걸을까? 여기서 좀 걸으면 저번의 그 바위들이 있는 바닷가가 나타날 텐데.”
“그게 낫겠네요.”
게임 속 세계는 현실의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있어서 근접한 바닷가임에도 한쪽엔 갯벌, 한쪽엔 얕은 바닷물이 있었다.
피크닉 가방을 입에 문 세비스는 앞장서 걸어갔다. 진흙 묻은 개 꼴인 세비스의 뒤태는 귀엽고 치명적이이었다. 실비아는 속으로 깨물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티 내진 않았다. 터덜터덜 세비스의 걸음을 따라 땅바닥에 진흙이 묻은 늑대 발자국들이 생겨났다.
잠시 후 얕은 바닷물이 있는 해안가에 도착한 둘은 바닷물에 들어가 진흙을 씻어 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 온 옷을 피크닉 가방 안에서 꺼내 갈아입었다. 물론 세비스는 인간으로 다시 변했기에 바위 뒤에서, 실비아도 다른 바위 뒤에서 각자 갈아입었다.
안타깝게도 실비아의 옷이 젖어서 세비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바라봤다거나 둘이 벌거벗고 물장구를 치다가 눈이 맞았다거나, 갑자기 넘어져 바닷가를 뒹굴며 해변 판 러브스토리를 찍는다거나…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 게임은 성인만 공략 캐릭터로 인지하는 건강한 19금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가져온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어 말린 둘은 잠시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민에 빠졌다.
“으… 배고파. 말 자식…. 유기농 당근은 먹고 싶지 않은데….”
“아, 맞다! 물고기를 잡아서 구워 먹으면 되겠다! 낚싯대를 까먹고 있었어.”
실비아가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딱 치자 세비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실비아가 비루한 낚싯대로 쓰레기들을 낚는 걸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비아 님, 바다의 쓰레기를 낚아서 환경 정화를 하는 건 좋은 생각인데요, 좀 더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셔야….”
“아냐! 전이랑 달라! 표정이 왜 그러니, 세비스? 저번이랑 달리 좋은 낚싯대를 구했다구.”
실비아가 인벤토리에서 <최고급 낚싯대>를 꺼내자 세비스가 놀라워하며 아이템을 구경했다. <최고급 낚싯대>는 한눈에 봐도 <비루한 낚싯대>와는 때깔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놀라워하며 구경하던 그는 곧 다시 낯을 굳히더니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장비를 바꾼다고 될 일일까, 사람이 문제였던 건 아닐까….”
“무슨 소리야, 아주 맛있는 생선을 낚을 테니 놀라 자빠지지나 마.”
실비아는 자존심이 상해서 짐짓 큰소리를 치고는 낚싯대를 손봤다.
‘어, 잠깐? 그러고 보니 저번엔 중요한 걸 빠트렸던 거 같네.’
그녀는 피크닉 가방에서 낙지 탕탕이가 담긴 검은 봉투를 뒤적여 탕탕이 한 조각을 낚싯대에 걸었다. 미끼를 걸었어야 했는데 그걸 까먹었던 것이다. <비루한 낚싯대>로 낚시질을 할 때도 미끼를 안 걸었기 때문에 쓰레기만 낚였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낚싯바늘에 탕탕이를 걸자 세비스가 오- 하고 놀란 소리를 내며 그녀를 향해 엄지를 흔들었다.
“앗, 미끼를 거시는군요. 드디어 낚시의 기본을 터득하셨군요, 실비아 님.”
“닥… 조용히 해, 세비스. 고기 도망갈라.”
실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세비스는 림보의 옆에 가만히 주저앉아 그녀의 낚시질을 지켜봤다.
‘또 쓰레기를 낚으면 어떡하지…. 식구도 늘어났는데 개망신 당하고 싶지 않은데.’
림보도 지켜보고 있어 더욱 손에 땀을 쥐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실비아가 <최고급 낚싯대>를 멀리 던져 넣곤 집중하고 있자 눈앞에 띠링-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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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부족해서 굉장한 존재는 아직 낚을 수 없는 듯하다…. 지금 낚아도 곤란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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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리야? 굉장한 존재가 뭔데?’
실비아는 휘휘 손을 저어 메시지를 없애 버리곤 정신을 집중해 바닷물에 던진 낚싯대 끝을 노려봤다. 잠시 뒤 뭔가가 미끼를 문 듯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실비아가 젖 먹던 힘을 다해 낚싯대를 끌어 올리자 펄떡거리는 멀쩡한 물고기가 낚여 올라왔다.
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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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맛이 좋구나! 실비아는 대광어를 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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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봐도 건강하고 맛 좋아 보이는 대광어가 바닥에서 펄떡펄떡 뛰자 세비스와 림보가 놀라서 헐레벌떡 몸을 일으켜 달려왔다.
“히이잉!”
“실비아 님! 엄청 맛있어 보이는 물고기예요! 굉장하네요!”
세비스의 눈이 의심이 가득 찬 동태눈깔에서 존경심이 어린 보석 눈으로 변하자 실비아의 어깨 뽕이 절로 차올랐다. 그녀는 뒷짐을 지곤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림보와 세비스를 돌아봤다.
‘이제야 면이 서네.’
“에헴, 이 몸의 낚시질을 두 눈 뜨고 똑똑히 지켜봤나 모르겠네.”
“당연히 제대로 봤죠! 세상에 대광어…. 시장에서 사면 한 접시에 몇 골드짜리 물고기라니, 엄청나네요! 또 낚을 순 없을까요?”
이 집의 회계담당인 세비스는 게임을 시작한 날 이후로 줄곧 가난에 시달렸기에 광어를 보자마자 가격부터 떠올렸다. 그가 돈부터 생각하는 모습에 실비아는 잠시 가슴이 쓰라려 왔다.
‘저 어린 것이 광어를 보고 가격부터 떠올리다니… 내 죄가 크다….’
잠시 씁쓸하게 광어를 바라보던 실비아는 번뜩 떠오른 생각에 세비스를 돌아봤다.
“어? 그럼 혹시 광어를 시장에서 팔 수도 있어?”
“싱싱한 상태로 가져가면 팔 수 있죠!”
팔 수도 있다니 최고였다. 광어를 좀 팔아서 살림살이가 넉넉해진다면 처음과 달리 핼쑥해진 세비스의 얼굴이 한결 나아질까. 실비아는 그의 밝은 얼굴을 보고 싶어져 씩씩하게 주먹을 들고 외쳤다.
“오, 좋아. 그럼 몇 마리 더 낚아 보겠어!”
“와아!”
“히잉!”
실비아가 팔을 걷어붙이며 낚싯대를 다시 잡자 림보와 세비스가 두 손… 아니 한 마린 두 발, 한 명은 두 손을 모으고 실비아를 존경의 눈길로 바라봤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낙지 탕탕이를 이용하여 연거푸 낚시질을 했고, 자그마치 대광어 세 마리와 우럭 두 마리를 낚을 수 있었다.
“대박이에요! 진짜 대박, 실비아 님! 대광어 두 마리랑 우럭 두 마리는 우선 팔도록 해요. 대광어 한 마리만으로 며칠은 실컷 먹겠어요.”
“히이잉!”
세비스는 실비아가 낚은 물고기를 보며 기뻐했다. 그러다 바로 옆에서 림보가 두 다릴 든 채 흥겨워하는 걸 발견하고는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말 녀석 너는 왜 좋아해? 넌 초식동물이잖아. 꿈도 꾸지 마.”
실비아가 얻은 고기들을 보며 잇몸이 보이게 활짝 웃던 림보는 그 말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더니 별안간 세비스의 귀를 왈칵 물었다.
콰득.
순식간에 림보에게 귀를 물린 세비스는 펄쩍 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야! 아…! 진짜 아퍼! 이게 날 우습게 보네?”
“히이잉!”
림보가 모른 척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세비스의 분통에 찬 목소리로 화를 냈다.
“이래서 내가 변신 안 하려고 했던 건데. 참나, 내가 너보다 작다고 우스워 보이지? 나 원래 덩치는 이것보다 훨씬 크거든? 네가 쫄까 봐 좀 작게 줄여서 변신한 거야. 너 날 우습게 보다간 큰코다친다? 난 원래 너랑은 비교도 안 되게 세다구! 콱, 말 육회를 해 버릴까 보다!”
세비스의 말에 깜짝 놀란 실비아가 그를 제지했다.
“말조심해, 세비스! 림보에게 그런 험한 말을 하면 어떡해.”
“초식동물이니까 못 먹는다고 당연한 말을 한 건데 대뜸 제 귀를 물잖아요. 아우, 아파라….”
세비스가 눈물을 찔끔 흘리자 그녀는 그의 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머리통 위에 솟아있는 검은 귀에 림보의 이빨 자국이 생겼다. 아파서 못 참겠는지 한 번 아우우- 하고 하울링을 하며 분을 삭인 세비스는 림보를 잠시 노려보다가 씩씩대며 풀숲으로 사라졌다. 혹시 삐져서 먼저 돌아가는 건가 걱정하던 찰나, 다행히 그는 나뭇가지를 주워 돌아왔다.
“아, 난 또 네가 화나서 집에 간 줄 알았어.”
“네? 그럴 리가요. 광어 구워 먹으려고 나뭇가지를 모아온 거예요.”
“응? 바닷가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라 바닷바람에 젖어 불이 잘 안 붙을 텐데….”
“예? 무슨 소리시죠?”
그녀의 걱정하는 말에 고개를 갸웃한 세비스는 피크닉 가방을 뒤적이더니 용접 마스크와 커다란 화염방사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