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실비아 님! 노엘 님에게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 림보 유지비까진 생각을 못 했네요. 많이 곤란하셨겠어요.”
“아닙니다…. 외제마를 주신 것만 해도 정말 황송한데, 유지비까지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실비아가 감동한 표정으로 배꼽인사를 하자 대사제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웃었다. 실비아는 대사제를 만나게 된 김에 알바를 관두고 싶단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저, 그리고 대사제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실비아가 잠시 머뭇거리자 대사제가 허허- 소릴 내며 소탈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게 생각마시고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이 신전에 새로운 봉사 신도들이 많이 등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열심히 일하시니 점점 저는 할 일이 없구요. 전도도 그동안 열심히 해서 그런지, 제국민들이 면역력이 생겨서 예전만치 신전으로 따라오질 않네요. 그래서 말인데 이번 주까지만 신전 일을 하고 저는 다른 일을 알아볼까 합니다.”
“허어….”
“일손이 필요하지 않은데 제가 껴 있으니 신전의 예산도 낭비되는 것 같구요.”
실비아의 말에 대사제가 인자하게 그녀를 바라보더니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필욘 없습니다. 실비아 님이 신전에 기여한 바가 많으니… 계속 놀고먹으셔도 됩니다.”
‘내가 월급 루팡 짓을 한단 걸 알고 계셨구나….’
대사제의 온화한 눈빛을 바라본 실비아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좀 더 자기발전을 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해 보고 싶기도 하구요. 일손이 더 필요하신 게 아니라면 이번 주까지만 해도 될까요?”
“허허…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실비아 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란 건 전도왕이 되셨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답니다. 여기 신전에서 청소로 평생 썩을 분이 아니시죠…. 이제 노예… 봉사 신도도 많으니 실비아 님을 더 넓은 세계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대신관의 말이 이어졌다.
“허허…. 노엘 님이 많이 섭섭해 하시겠네요.”
“!”
대신관의 온화한 미소에 실비아의 낯빛이 어색해졌다.
‘설마 노엘 님과 내가 무슨 관계인 줄 알고 하시는 말씀인 건가?’
속을 알 수 없는 대신관의 미소에 실비아가 티 나지 않게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엘 님은… 앞길이 창창한 분이시죠. 젊은 나이에 이미 엄청난 신성력을 가지고 계시구요. 신관은 원칙적으로는 이성과 가까이 지내면 안 되지만, 인간의 본능이란 쉽게 제어가 안 되는 것. 여인과 가까이 지내도 신성력을 잃지 않기에 남몰래 연인을 둔 신관들이 많답니다.”
‘서, 설마… 기도실에서 떡 친 걸 눈치채신 건가…! 말도 안 돼.’
대사제의 말에 실비아가 땀을 뻘뻘 흘리며 가까스로 대답을 했다.
“아… 그, 그렇군요.”
“노엘 님은 원래 차기 교황 후보로 제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글쎄요. 평생 자제하는 삶을 사는 것보단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런… 가요?”
마음 가는 대로 떡 쳤다고 뭐라 하는 건가? 실비아가 땀을 흘리며 대사제의 얼굴을 살폈으나 그의 얼굴엔 성스러운 기운만이 흘렀다.
‘대사제로 오래 살아서 그런지 표정 관리가 수준급이시네….’
실비아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대사제가 헛기침을 하곤 손으로 입을 가렸다.
“크흠…. 늙은이가 주책없이 쓸데없는 소릴 한 거 같군요. 모든 선택은 당사자들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노엘 님을 통해 주소를 알려주시면 유기농 당근이랑 해외 직구한 건초들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필요한 것도 말씀만 해 주시면 신전 측에서 다 부담할 겁니다. 일도 오늘까지 하는 걸로 말해 놓을게요.”
“아! 감사합니다.”
실비아가 꾸벅 인사를 하자 그가 흐뭇하게 웃더니 걸음을 옮길 듯 발을 뗐다. 그러다가 돌연 뒤돌아 입을 열었다.
“그! 한 가지 더 말을 얹자면…. 노엘 님이 평소에 실비아 님 걱정을 많이 한답니다. 신관이니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 주시면 좋겠네요… 후후. 제가 이런 말을 한 건 노엘 님에게 비밀입니다….”
대사제는 껄껄대면서 실비아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윙크를 했다. 그리곤 걸음을 옮겨 곧 그녀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흐뭇한 표정을 보니 젊은이들의 연애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말하는 걸 들어 보니 노엘 님이 날 일방적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어렵게 생각하긴커녕 커피점에서 신성모독 플도 했는데 말이지…. 기도실에서 실컷 했단 걸 알았다면 저렇게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가실 리가 없지. 휴… 다행이다….’
노엘은 원래 실비아를 만나기 전엔 여자에 전혀 관심 없던 남자였으니, 실비아 앞에만 서면 낯빛이 밝아지는 그의 모습을 사람을 대하는 데 이골이 난 대사제는 금방 눈치챘을 터였다.
대사제는 둘이 설마 할 거 다 한 사이라곤 차마 생각 못 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있는 풋풋한 신관과 신실해 보이는 신도 둘을 엮어주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대사제가 떠나고 할 일 없이 정원에서 잡초를 뽑으며 농땡이 치던 실비아는 갑작스럽게 등을 두드리는 손에 놀라 뒤돌아봤다. 역시나 노엘이었다.
신전 알바도 마지막 날인데 좀 배덕한 곳에서 하고 싶었던 실비아는 노엘을 정원 뒤 창고로 이끌었고, 둘은 또 연달아 두 번을 했다.
“으응!”
“하아, 실비아 님.”
그러나 아쉽게도 이전에 너무 강한 플레이만 해 온 탓인지 창고에서는 씨앗을 두 개만 획득했다.
정사 후 노엘이 실비아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귀를 살짝살짝 깨물었다. 간지러워하며 까르르 웃던 실비아는 그의 손을 잡고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노엘 님, 저…. 오늘까지 알바 하기로 했어요.”
“…아쉽네요.”
“밖에서도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다독이자 노엘은 풀이 죽은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지만… 실비아 님은 다른 일을 구하실 테고, 그럼 자주 못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노엘 님을 볼 시간은 어떻게든 내 볼게요.”
‘업보를 없애 주니까… 거기다가 노엘 님이랑 하는 건 너무 좋으니까. 가능한 한 자주 하고 싶… 만나고 싶어.’
노엘은 실비아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씨앗을 얻기 위해서, 업보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고 그냥 하는 게 좋아서. 다른 공략 캐릭터를 공략하고 난 뒤에도 노엘과는 시간을 내서 자주 봐야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그녀는 풀이 죽은 티가 완연하게 나는 노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자 그가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손에 제 뺨을 비볐다.
“그리고, 어차피 다음 주에는 노엘 님과 둘이서 실컷 볼 테니까. 훗날 일은 훗날 가서 생각해요. 지금은….”
실비아가 두 손으로 노엘의 뺨을 감싼 뒤 도톰한 입술을 혀를 내어 핥자 노엘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곧 부드럽게 입술이 맞물렸다.
그녀의 입안은 마치 꿀단지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달았기에 입맞춤을 하고 또 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서로의 입술을 정신없이 맛보고 혀로 입안을 한참 휘저어 놓고 나서야 둘의 끈적한 입맞춤은 끝이 났다.
노엘이 타액으로 젖어 있는 실비아의 도톰한 입술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면서 눈꼬리를 휘어 화사하게 웃었다.
“그래요, 다음 주가 기대되네요. 뒷산에 있는 신전은 오랜만에 가는 거라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몰라서 조금 겁이 나지만요.”
“함께 있으면 어딜 가도 좋을 거예요.”
실비아가 코를 맞부딪치며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자 노엘이 입술을 다시 겹쳤다. 둘의 뜨거운 입맞춤은 끝날 줄을 몰랐다.
달콤했던 입맞춤이 끝나고 노엘이 실비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잊혀진 신전에 가기 전까진 쉬는 날이잖아요. 그땐 뭐하시나요?”
“음, 아무래도 세비스가 알아 온 던전 공략을 하러 갈 것 같네요.”
그녀의 말에 노엘이 머뭇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음….”
‘세비스가 싫어할 것 같은데. 옷 살 때 노엘 님을 좋아하긴 했지만 결국엔 싫어할 거야. 왠지… 왠지 모르겠지만 예감이 그래.’
고민하던 실비아는 노엘의 손을 마주 잡고 사정을 설명했다. 다음 주에 세비스를 떼어놓고 오려면 쉬는 날 의심을 사면 안 된다고 하자 노엘이 아쉬워했지만 별수없다며 포기했다. 그렇게 창고에서 나온 뒤 기도 시간이라 한가해진 틈을 타 노엘의 집무실에서 감쪽같이 빡빡 씻은 실비아는 림보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와보니 루카에게 보냈던 전서구가 돌아와 창문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둥지에 들어가 있지, 왜 졸고 있어.”
그녀가 발에 매인 편지를 풀자 전서구가 구루룩거리며 둥지로 가 앉았다.
‘비둘긴가? 생긴 건 참새 같이 생겼는데 이상하게 우는구나.’
편지를 주머니에 넣은 실비아가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 바닥에 뒤돌아 앉은 세비스가 이것저것 상자를 펼쳐 놓고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세비스! 우리 왔어.”
실비아가 활짝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세비스는 택배 상자들을 풀고 있었다. 그는 상자 속 내용물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휴, 이제 좀 한시름 놨네요. 신전에서 저 말 자식 사료랑 유기농 당근을 보내왔어요.”
“정말 다행이네!”
실비아가 화색을 띠며 당근을 하나 꺼내 깨끗이 씻어 림보에게 건네주자 시장표 당근과 달리 냠냠 첩첩 맛있게 받아먹었다.
상자 안에는 유기농 당근 외에도 림보 전용 에비X 생수와 마법으로 압축시켜 둔 말 전용 방석, 림보가 가지고 놀기 좋은 해외 직구 말 전용 장난감까지 있었다.
‘이것들 다 합치면 이 집보다 값이 더 나갈 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