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혼내 주겠단 소린 안 했는데? 알고 싶다고 한 거지. 그리고 실비아는 나랑 친한 사이야.”
“헉….”
“그런….”
두 양아치가 말문이 막혀 어버버하고 있는데, 실비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응? 친한 사이라니요?”
‘우리 둘이 친한 사이였던가. 전혀 친해진 기억은 없는데.’
실비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명연설을 해서 피라미드 사업에 기여하기는 했지만 친해질 만한 추억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루카는 림보의 갈기를 쓰다듬던 손을 자연스럽게 내려 고삐를 잡고 있는 실비아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앞으로 친해질 사이니까, 친한 사이 맞지 뭐. 안 그래 실비아?”
“음… 그… 그렇죠?”
역시 주둥아리로 여자를 홀리는 제비 기질은 어디 안 갔다. 루카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손등을 쓰다듬자 실비아는 순식간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어디, 줄 만한 것 없나?’
그녀는 루카에게 뭐라도 주려고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당장 림보를 전당포에 저당 잡혀서라도 루카의 양손에 금은보화를 잔뜩 쥐여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그녀는 겨우겨우 유혹을 뿌리쳤다.
‘아! 안 돼…. 순간적으로 유체이탈해서 전당포 앞까지 갔다가 왔다. 역시 너무 위험한 남자야. 독이 있는 한 얘 옆에 있어 봤자 득이 될 게 없어. 순식간에 전 재산을 자발적으로 다 털게 될 거야.’
사르르 녹아내릴 듯 눈웃음을 짓던 루카는 단호해진 실비아의 표정을 보더니 입을 삐쭉 내밀곤 삐진 티를 냈다.
“근데, 왜 나한테 연락 안 한 거야? 얼마나 기다렸는데.”
“연락? 연락 할 방법이 있어야지 하죠…?”
“명함을 줬잖아. 집사였던가? 널 데려간 검은 머리한테 명함을 줬는데 말이지. 못 받았어?”
“명함이요?”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루카가 이를 빠득 씹었다. 그리곤 차가운 표정으로 헛웃음을 쳤다.
“하! 역시. 눈빛이 맘에 안 든다 싶더니 전달하지 않았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세비스가 명함을 받아 놓고 전달하는 걸 까먹은 모양이었다. 까먹었든 어쨌든 실비아는 독이 든 루카랑 당장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맘이 없었기에 연락할 일은 없었다. 독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아야 공략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여지는 남겨 두는 게 좋겠지, 조만간 공략하긴 할 테니 말이야.’
실비아는 여전히 손등을 야릇하게 쓰다듬고 있는 루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환하게 웃으며 손을 뒤집어 루카의 손을 마주 잡았다.
“명함을 받긴 받았어요. 근데 피라미드 사업이라면 안타깝지만 더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네요. 저랑 뜻이 안 맞아서….”
“피라미드라니? 이건 미래를 바꿀 네트워크 사업이야. 아니지, 그 얘길 하려던 건 아니고…. 명함을 준 건 사업 때문이 아냐. 다른 은밀한 얘길 나누고 싶어서였지.”
루카가 유혹하듯이 눈을 나른하게 뜨고 실비아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던 뚱땡이랑 멸치는 기가 막혔다. 혼내 주라고 데려왔더니 대장과 꿀밤쟁이 사이에 끈적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조그맣게 속삭이며 동태를 살폈다.
“무슨 일이야 이게?”
“글쎄, 한 가지 알겠는 건 더 이상 꿀밤쟁이를 혼내줄 길은 영영 없어졌단 거야.”
“보스가 혼내 주는 줄 알고 좋아서 따라왔더니… 어쩐지 남의 연애 행각을 바라보는 더러운 기분인걸.”
“쉿, 말조심해. 보스가 화가 나면 머리를 다 불태워 대머리를 만들어 버린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둘이 속닥대고 있자 루카가 실비아를 바라보며 짓던 눈웃음을 거두곤 얼굴을 돌려 둘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멸치와 뚱땡이가 숨을 헉 들이켜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 들린다.”
“아, 아닙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눈치 챙겨. 저기 아무 노점이나 가서 떡꼬치라도 사 먹고 있던가.”
“아, 알겠습니다!!”
둘이 후다닥 배꼽 인사를 하고 도망을 가자 한산한 골목길엔 루카랑 실비아만 남았다. 실비아는 이 상황이 어쩐지 낯설었다. 물론 저번에 몸도 주물럭거리고 얼싸까지 받은 사이지만 루카한테는 그 기억이 없을 텐데 이 끈적한 기류는 뭔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명연설 후 상태 이상 비실비실에 걸려버린 실비아는 세비스와 루카의 질투심 어린 대화와 루카의 끈적한 눈빛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지금 루카의 태도가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었다.
‘피라미드 영업사원으로 끌어들이려다 만 것까진 기억이 난다만…. 이거, 또 피라미드에 끌어들이려는 개수작은 아니겠지.’
실비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루카를 바라보자 그가 양복 재킷을 뒤적이더니 금빛 명함을 내밀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가 눈을 그윽하게 내리깔자 풍성한 속눈썹이 그렇게 또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저 속눈썹을 어떻게 좀 핥아 보고 싶은데…. 아니, 정신 차려야지.’
잠시 멍해졌던 실비아는 제 손을 꼬집으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루카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금안을 유혹적으로 뜨며 실비아의 손에 명함을 은근하게 쥐여 주었다.
“내 전서구 둥지 주소야. 저번에 준 명함의 전서구는 출산휴가 중이니 여기로 연락해. 실비아… 보고 싶었어. 집을 몰라서 먼저 찾아가지 못했지만… 집은 알려 주지 않겠지?”
‘그렇지, 집은 알려 줄 수 없어. 옥장판을 잔뜩 받고 싶진 않으니까.’
실비아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루카가 준 명함을 한 번 보고 옆구리에 찬 미니 백에 집어넣었다.
“아… 전서구가 출산휴가를 갔군요. 순산 기원한다고 전해 줘요. 집은… 함부로 알려 줄 순 없어요. 근데 연락하란 이유가 뭐죠?”
“말했잖아. 은밀한 얘기를 하고 싶다고. 음… 저번 일이 아니라도 난 하는 사업이 많으니까. 너한테 도움이 될 얘기도 많이 들려줄 수 있지.”
루카는 속으로 쳇- 하곤 혀를 찼다. 어째서 자신이 여자에게 이런 변명 아닌 변명까지 하면서 연락을 하라고 안달을 내야 하는가 싶어서였다.
‘내가 얘기 좀 하고 싶다고 하면 다른 여자들은 눈을 빛내면서 이유도 묻지 않고 하던 일 다 제쳐두고 달려오는데 말이야. 체면이 말이 아니군. 역시 먼저 반한 자가 지는 건가.’
루카 딴에는 생전 한 적 없는 손등 쓰다듬기며 도움이 될 얘기를 들려준다는 말까지 하는 등, 나름 노력을 많이 한 거였다. 그만큼 그는 잘난 외모 덕에 양복주머니에서 손 하나 꺼내지 않고도 얼굴과 입만으로 제비 짓을 하며 인생을 편하게 살아왔다.
실비아가 그런 루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명함을 집어넣자 그는 초조해졌다.
‘연락을 안 하면 어쩌지?’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떻게 하면 연락을 할 수밖에 없을까. 재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킨 그는 저번 옥장판 행사장에서 실비아가 돈에 집착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또 한 번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혹할 만한 주제를 꺼냈다.
“옥장판 사업이 뜻에 안 맞는 거라면, 곧 성년의 날 축제가 있거든. 그때 네가 할 수 있는 딱 좋은 일이 있어. 그 얘길 하고 싶은데, 어때?”
“오?”
예상대로 실비아가 화색을 띠며 루카를 바라봤다.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루카가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이냐면….”
루카가 얼굴을 가까이 해 실비아의 귓가에 속삭이려는 순간, 댕댕- 신전의 탑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이 명함으로 연락할게요. 저 신전으로 출근해야 되거든요.”
“아하, 신전에서 일하는구나.”
“그냥 청소 알바예요. 조만간 연락할게요. 안녕!”
실비아가 신전! 이라고 외치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늘게 눈을 뜨고 있던 림보가 잠시 루카를 째려봤다. 마치 ‘여기 말 있어요. 말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거 같은 눈빛이었다. 그를 놔둔 채 둘이서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한 게 맘에 안 든 듯했다.
실비아가 재촉하자 림보가 자율주행을 시작했고 루카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실비아, 꼭 연락해. 알았지?”
실비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루카는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거둔 채 표정을 굳혔다. 그 검은 머리 애송이가 역시 명함을 안 준 게 틀림없었다. 실비아는 명함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 같았다. 저번 명함에는 전서구가 아닌 다른 연락처가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루카는 짜증이 잔뜩 묻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검은 머리 집사야 그렇다 치고 실비아 본인이 나한테 관심을 안 보이니….’
실비아는 말만 걸어도 난리가 나는 다른 여자들이랑은 달리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거 같은 바람 같은 여자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눈빛만 보면 제 얼굴에 반한 게 틀림없는데, 저리도 초연한 태도라니. 원래라면 손등을 쓰다듬었을 때 이미 말에서 후다닥 내려와 알바도 당장 때려치우겠다 말하며 자신의 팔짱을 꼈어야 마땅하건만.
‘본능을 자제할 줄 아는 여자란 건가. 얼굴로 홀리는 건 소용없을지도 모르겠어.’
자신의 얼굴이 그녀의 타입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은 루카였다. 그는 스스로 만국 공통 여자들을 꼴리게 하는 외모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실비아가 자제심이 강한 여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실비아 입장에서야 루카는 독이 들었기에 해결책을 찾기 전엔 굳이 엮일 생각이 없는 캐릭터일 뿐이었다. 볼 때마다 항상 입맛을 다시고 있었지만, 루카는 그녀의 속까진 알 수 없었다.
루카는 머리 뒤로 손깍지를 낀 채 여유로운 걸음으로 문신뚱땡이와 멸치가 있을 노점으로 걸어갔다. 그녀에게 연락할 만한 계기를 제공했으니 곧 연락이 올 터였다. 루카는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지 않고 천천히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항상 쉽게 넘어오는 여자들만 보다가 이렇게 돌아가려니, 이것도 나쁘진 않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