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실비아의 말에 노엘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서운해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평소보다 퇴근 시간이 훨씬 늦어져서 세비스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을 텐데, 노엘과 나타난다면 더욱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마구간에 들어가서 열쇠의 버튼을 누르자 자고 있던 림보가 히이잉! 거리면서 일어나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그녀가 림보를 상냥하게 쓰다듬곤 고삐를 풀어 마구간에서 꺼내 오자 노엘이 걱정스런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 말, 괜찮으시겠어요?”
“순하다고 들었는데, 뭐 문제가 있나요?”
“그런 건 아닌데… 그게…. 아닙니다.”
노엘이 말을 줄이자 실비아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 위로 올라탔다. 말을 몰아본 적 없어서 걱정한 그녀였지만 노엘의 말에 따르면 똑똑한 외제마인 림보는 목적지만 알려 주면 자율주행을 한다고 했다.
“사람 말을 잘 알아들으니 다른 말들보다 훨씬 타고 다니기 수월할 겁니다.”
“아, 정말 기뻐요. 이런 좋은 말을 대사제님께서 주실 줄이야….”
자율주행이라니. 현생에서도 타보지 못한 엄청난 기능을 가진 말이었다. 실비아는 벅찬 감동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행복해 보이는 실비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엘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저도 외국에서 온 말을 몰고 있으니까, 혹시 궁금한 거 있으시면 언제라도 물어보세요.”
“알겠어요. 이만 가 볼게요.”
실비아가 떠나려는데 갑자기 노엘이 그녀의 손을 잡곤 손등에 촉- 하고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할 얘기는 많지만 피곤해 보이시니 내일 하도록 해요.”
“후후…. 내일 봐요.”
실비아가 환하게 미소 짓고 떠나자 그녀의 뒷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던 노엘이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그리곤 하늘을 향해 한숨을 푹 쉬곤 눈을 질끈 감았다.
“완전 제대로 해 버렸구나….”
* * *
림보는 역시나 보통 말은 아니었던지 쏜살같이 빠르게 집을 향해 달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훌륭한 승차감, …승마감을 보여 주었다. 말을 타고 지나가자 길을 지나가던 구경꾼들이 ‘이야 말 때깔 죽여준다.’라고 환호성을 지르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당나귀나 국산 말을 타고 지나가던 마부들은 모세의 홍수처럼 실비아를 피해 지나쳐갔다.
그 모습에 실비아의 입꼬리가 저절로 흐뭇하게 올라갔다.
‘이런 맛에 외제마 모는구나.’
“워워….”
집 앞에 도착한 실비아는 림보를 진정시키며 말에서 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세비스가 초조한 얼굴로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실비아를 발견하곤 달려왔다.
“실비아 님!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거예요? 무슨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아니, 이 말은 또 뭐예요?”
“별일 없었어. 어쩌다 보니 잔업을 해 달라고 하셔서…. 말은 말이지. 우선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세비스.”
림보의 고삐를 기둥에 매어 두려던 실비아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수건을 가져와 림보의 말발굽을 정성스럽게 닦고는 문을 열어 집안으로 에스코트했다.
‘외제마를 집 앞에다 세워둘 순 없지. 누가 훔쳐 갈 수도 있고 말이야.’
림보는 좋은 대접이 익숙한지 흥! 하고 콧방귀를 고상하게 뀌더니 다그닥 대며 들어왔다.
그러더니 잠시 멍한 표정으로 집안을 둘러보는 게 아닌가. 집안을 한 바퀴 멍한 표정으로 둘러보던 림보는 이내 철푸덕하고 바닥에 주저앉더니 히잉! 하고 울부짖었다. 마치 이런 거지 같은 집구석이 내가 앞으로 살 집인가, 하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저런 표정 지을 만도 하지….’
실비아는 림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림보를 데리러 갈 때 봤지만 신전의 마구간은 말이 마구간이지 제집보다 좋았다. 바닥에는 고급스러운 비단이 깔려 있었고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으며, 밤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림보 옆엔 외제장난감과 먹다 남은 에비X 생수통이 뒹굴고 있었다. 오히려 이 집구석이 마구간이고 림보가 있던 마구간이 사람 사는 집이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실비아가 조심스럽게 림보를 카펫으로 안내하자 그가 말발굽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카펫을 걷어찼다.
“림보, 바닥에 앉기 싫단 거니?”
말머리가 끄덕여지자 실비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나마 보드라운 이불이 깔려 있는 침대 위로 림보를 안내했다. 그제야 성에 찬 듯 림보가 제 몸이 꽉 차도록 조그만 침대 위에 철퍼덕 몸을 눕혔다. 그 모습을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세비스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림보를 째려봤다.
“아니, 딱 봐도 고급 외제마 같긴 한데, 침대를 내 주시면 실비아 님은 어쩌시려구요?”
“어쩔 수 없잖아. 림보가 바닥을 싫어하는걸…. 세비스, 당근이 있었지?”
“있긴 한데 그건 샌드위치용….”
세비스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실비아는 서둘러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냉장저장장치에서 당근을 꺼내 썰어 왔다. 림보에게 한 입 권하자 몇 번 질겅질겅 씹던 림보가 퉤! 당근을 뱉어 바닥에 흩뿌렸다.
“왜 저러지?”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근이 담겨 있던 포장지를 들여다보았다.
원산지와 재배방법이 친절하게 쓰여 있는 봉투를 가만히 바라보던 실비아가 아하- 하고 감탄을 했다. 봉투의 앞면에는 큰 글자로 ‘유기농! …당근’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단어 사이에 작게 글자가 더 있었다. 돋보기를 가져와 자세히 들여다보니 깨알만 한 글씨체로 ‘유기농!(이었으면 좋았을 농약을 잔뜩 뿌린) 맛 좋은 당근’이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닌가. 현실에서라면 당장 소비자보호원에 고발당할 문구였다.
“유기농이 아닌 건 싫다 이거니?”
실비아가 림보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묻자 그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외제마인 림보는 유기농만 먹는 까다로운 말이었다.
‘유기농 당근은 일반 당근보다 값이 두 배인 걸로 알고 있는데.’
실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림보를 바라보는데 곁에 선 세비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림보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니, 저 건방진 말 녀석…. 주는 대로 대충 씹어먹을 것이지, 소중한 양식을 뱉어 버리다니….”
“세비스, 말조심해. 림보는 똑똑해서 말을 다 알아듣는다구.”
“이 조그만 집구석에 외제마가 다 무슨 일이에요?”
실비아의 경고에도 세비스는 림보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녀는 림보를 세비스에게서 보호하듯이 감싸 안고 토닥였다.
“신전에서 선물 받은 소중한 말이야…. 황제 폐하께도 진상된다는 엄청난 말이라구!”
림보 같은 말은 황제 폐하에게 진상된다고 하자 세비스가 잠시 오- 하고 놀라더니 다시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와, 실비아 님, 정말 대단하긴 한데요…. 쟤 하는 짓을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드는걸요.”
“안 그래도 나도 점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긴 해…. 그래도 어쩌겠니. 내일 이런 가짜 말고 진짜 유기농 당근을 구해와야겠다.”
‘큰일이네. 노엘 님이 뭘 걱정하신 건지 알 거 같아.’
외제마…. 타고 다니긴 폼나지만 현생에서 뚜벅이였던 실비아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유지비가 어마무시하게 든단 것. 카푸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실비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림보 유지비가 얼마나 들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러다간 조만간 홀스푸어가 될 판이었다.
실비아가 림보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푹 한숨을 내쉬자 세비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부엌으로 실비아를 데려갔다. 그때까지 림보는 고고하게 침대 위에 주저앉아 세비스를 째려보고 있었다. 말 녀석이라고 한 말을 알아들은 듯했다.
세비스는 오늘도 정성스럽게 그녀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았다. 살짝 식은 국을 다시 데워준 세비스는 그녀가 수저를 들자 따라서 수저를 들었다. 실비아가 올 때까지 식사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실비아는 그 모습을 보며 어쩐지 미안함에 양심 한구석이 찔리는 걸 느꼈다. 사실 잔업을 한 게 아니라 신나게 떡을 치다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으로 식사에 열중하는 검은 머리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난 게임 공략을 한 것일 뿐인걸? 물론 내 욕구와도 일맥상통하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야…. 아직도 생각난다, 땀에 젖어있던 섹시하고 두꺼운 가슴 근육과 그 아래… 튼실했던…. 크흠….’
실비아는 흐뭇한 표정으로 회상하다가 헛기침을 하곤 식사에 다시 집중했다. 고요해진 식탁 위, 림보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세비스는 건너편에 앉은 실비아한테서 맡아 본 적 없는 낯선 냄새가 나는 걸 느꼈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실비아 님, 오늘 평소랑 다른 냄새가 나요.”
“응? 무슨 소리야?”
실비아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걸 느꼈다. 짐승의 코를 가진 세비스가 눈치챌까 봐 더 빡빡 씻었건만, 몸에 노엘의 향기가 남아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하다? 밖에서 씻고 오셨어요? 우리 집 바디 워시 냄새가 아닌데?”
“아, 아…. 청소를 하다 보니 땀이 많이 나서 말이야. 신전 안의 샤워실 좀 잠시 썼어.”
‘휴…. 이상한 냄새를 맡은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식사 중인데 바디 워시 냄새를 캐치하다니, 진짜 보통 코는 아니네.’
세비스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 세비스의 눈치를 보던 실비아는 잠시 후 다시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왜 지금 눈치를 보고 있는 거야? 게임을 하려면 공략을 해야 한다고. 공략을 해야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어…. 나도 즐겁고 말이야.’
식사가 끝난 후, 당근을 먹지 않고 뱉어 버린 림보를 위해 냉장고를 뒤진 실비아는 그가 먹을만한 음식을 여러 가지 꺼내 왔다.
‘이 중 하나는 먹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