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노엘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입을 가리자 세비스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신관님, 물 좀 드세요. 사레들리신 것 같은데.”
“아니, 괜찮습니다…. 후….”
“실비아 님, 신관님이 속이 안 좋으신가 봐요.”
세비스가 자신을 향해 말하자 실비아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아뇨. 아닙…. 하… 가게 안이 좀 덥네요….”
그녀는 태연하게 음식을 먹으며 계속 노엘의 종아리를 야릇하게 더듬었다. 얼굴을 붉힌 채 거친 숨을 내쉬는 노엘과 걱정하는 세비스의 대화만 테이블에서 이어질 뿐이었다.
세비스를 옆에 둔 채 몰래 발로 노엘을 애무하는 건 생각보다 더 짜릿했다. 언젠가 성체가 되면 따먹을 남자와 이제 곧 따먹을 남자 둘을 눈앞에 두고 하는 배덕한 짓! 이런 짓을 현실에서 하면 천하의 썅년이 될 것이지만 여긴 게임 속이었다.
‘후훗. 어때. 앉은 채로 쌀 것 같지 않아?’
실비아는 노엘이 들었다면 기함할 말을 속으로 삼킨 채 은근한 발짓을 계속 이어갔다. 그는 이젠 손으로 빨개진 얼굴을 감싼 채 테이블로 파고 들어갈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흣… 아….”
이상하게 후끈해지는 분위기에 세비스만 의문을 담은 눈으로 노엘을 바라볼 뿐이었다.
노엘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실비아는 호수 위에 뜬 백조처럼 손으로는 우아하게 국수를 먹으며 발로는 미친 듯이 노엘의 다리를 애무했다.
세비스는 이제 젓가락을 아예 놓아버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노엘을 보며 우동 국물을 홀짝거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신관님, 이제 그만 먹고 일어날까요?”
“세비스, 노엘 님은 식사를 거의 못 하셨잖아.”
실비아가 우아하게 국수를 먹으며 세비스를 말렸다.
“흣…. 저는 음식을 마저 먹겠습니다. 먼저들 가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가셔야죠.”
세비스의 말에 노엘이 별안간 탁자를 쾅- 치며 크게 외쳤다.
“아니! 전… 큭…! 사실 혼자서… 식사하는 걸 좋아합니다! …하! 제발 가 주세요!”
흡사 분노한 거 같은 노엘의 외침에 세비스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노엘이 사 준 쇼핑백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비스는 노엘이 잠시 걱정이 돼서 그를 쳐다봤다. 노엘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식사 기도를 빼먹어서 신께서 노하신 거 같아 다시 기도를 길게 하려고 한다며 빨리 먼저 가 보라고 더듬더듬 말했다.
이 상황에서 실비아도 가만있기엔 뭣했기에 팔을 잡아당기는 세비스를 따라 마지못해 스르륵 일어났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으며 노엘과 눈을 마주쳤다.
“신관님, 그럼 저흰 가 볼게요. 옷 사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세비스가 공용 생활비를 가지고 국수를 계산하러 카운터로 먼저 간 사이 실비아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엘에게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빼먹지 않고 놀리기 위해서였다.
“노엘 님, 어때요?”
“…네?”
“어떠냐구요.”
노엘이 어색한 얼굴로 실비아의 초록색 눈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실비아는 아닌 척 상큼하게 웃고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짜장면이 어떠냐구요. 제가 못 먹어 본 메뉴잖아요.”
“아….”
“못 먹어본 건 꼭 더 맛있어 보이더라구요. 그럼 내일 봐요.”
“예, 내일 봐요….”
노엘의 대답하는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완전히 꼴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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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의 화려한 발놀림에 노엘의 호감도가 10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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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호감도는 85. 그녀의 물밑 작전은 성공이었다.
국숫집을 나오며 세비스가 고개를 갸웃하곤 입을 열었다.
“식사 기도를 안 했다고 신이 노하신다니, 노엘 님이 모시는 신은 생각보다 쪼잔하신가 봐요.”
“그러게. 세비스! 이제 해진 옷은 다 버리고 새 옷을 입도록 하자.”
“생각만 해도 신나네요. 옷장에 온통 걸레짝들만 있어서 불만이었는데, 해진 옷들은 다 걸레로 만들어서 써야겠어요.”
세비스는 야무지게도 해진 옷을 버리지 않고 살림 밑천으로 쓸 계획을 세웠다. 그의 말을 들은 실비아가 귀엽다는 듯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으로 향하는 둘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세비스는 새 옷을 사서 즐거워서, 실비아는 새 옷도 새 옷이지만 오늘도 노엘을 꼴리게 한 게 만족스러워서였다.
‘호감도 올라가는 속도를 보아하니 조만간 공략할 수 있겠는걸?’
앞으로 노엘을 어떻게 공략할지 생각하는 사이 실비아와 세비스는 집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신나하며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세비스는 화장실에서, 실비아는 옷장 앞에서 갈아입었다. 둘이 벌거벗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갈아입는 일은 아쉽지만 생기지 않았다.
“어어?”
실비아가 새로 사 온 파스텔톤의 노란 원피스로 갈아입는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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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거렁뱅이 옷을 영영 입지 않게 됐으므로 <정의로운 거렁뱅이>에서 <정의로운 제국민1>로 세간의 평가가 올라갔다! 이제 동정 미남들을 공략해도 데드엔딩 <분노한 제국 여자들에 의해 나무에 묶여 돌팔매질 당해서 사망> 엔딩이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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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거렁뱅이 상태로 공략했으면 성공해도 바로 사망이었어?’
데드엔딩이 사라졌다는 안내에 실비아는 섬찟함을 느꼈다. 그녀의 등에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기록 창을 다시 불러 천천히 읽어보자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데드엔딩이기에 상세설명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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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엔딩 : 분노한 제국 여자들에 의해 나무에 묶여 돌팔매질 당해서 사망.
- 제국의 여자들 모두가 원하는 동정 미남을 함부로 따먹은 죄는 가볍지 않다. 실비아는 제국 여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한낱 거렁뱅이인 주제에 빛나는 동정 미남을 따먹은 당신은 광장 한가운데로 끌려가 나무에 묶여…. 어쩌구… 저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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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거 아냐? 무슨 불가촉천민도 아니고.’
이놈의 게임은 빈부격차가 심한 만큼 거렁뱅이에 대한 차별 대우도 심했다.
동정 미남을 공략한 것이 어찌 소문이 나며 돌팔매질은 또 뭔지, 어이없는 데드엔딩 설명에 실비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진짜 별….’
그러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법. 떠날 수도 없는 실비아는 게임의 법칙을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 했다. 기분은 좀 더러웠지만 다행히 돌팔매질 엔딩은 피하지 않았는가.
‘어이가 없어서 진짜. 그건 그렇고 소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옷이 문제였어?’
세간의 평가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 내막을 알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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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제국민1
- <정의로운>의 버프로 10%의 확률로 실비아를 알아본 장사꾼이 물건값을 할인해 준다.
- <제국민1> 사람들은 대부분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마련. <제국민1>이 된 실비아는 누더기옷을 입지 않게 된 것만으로 이유 없는 멸시와 차별을 받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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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렁뱅이인 걸 어떻게 다들 아나 싶었더니 옷이 문제였다.
그 당연한 걸 그녀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 오히려 게임 세계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현실에서도 실제로는 빚잔치를 열고 있어도 비싼 옷만 걸치면 누구든 가난뱅이라곤 생각하지 못한다.
그 간단한 이치를 게임 속이기에 소지금의 문제라고만 받아들였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소지금을 늘려야 거렁뱅이에서 벗어날 거라고 판단했으니.
‘진작 새 옷을 샀다면 달라졌을 것을! 나도 참 어리석군.’
막혀 있던 사고가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는 게임 속이면서도 은근히 현실적인 부분이 많다.
‘앞으로는 좀 더 현실에 가깝게 판단해야 할 거 같네.’
“짜잔! 실비아 님. 저를 봐 주세요.”
실비아가 상태 창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세비스가 즐거워하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방 한가운데에서 한 바퀴 휙 돌며 그는 새로 산 옷을 자랑했다.
실밥이 터진 너덜너덜한 천 쪼가리가 아닌 부티크에서 산 세련된 블루 실크 와이셔츠와 각이 제대로 잡힌 검은 바지를 입은 세비스는 명문가 도련님 같았다.
이제야 귀엽고 고급스러운 그의 얼굴에 맞는 옷을 걸쳤다는 생각에 실비아의 코끝이 찡해졌다.
‘옷만 제대로 입어도 도련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애가 누더기옷을 걸치고 있었으니… 내 죄다.’
주인의 처지가 곧 사용인의 처지인 법.
다행히 그녀가 제국민이 되었으니 세비스도 최소 제국민의 집사가 된 셈이었다. 이제 주점이든 길거리든 어디를 가도 거렁뱅이란 소리는 듣지 않을 듯했다.
문득 실비아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세간의 평가가 더 올라가면 어떻게 바뀌는 걸까.
귀족이 될 수도 있는 걸까. 그럼 여타 웹소설에서 본 것처럼 언젠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연회를 즐기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젊은 폭군 황제의 눈에 띄거나 하면 그때부터 광적인 집착이 시작되는 거지….’
잠시 망상을 한 실비아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눈을 반짝였다.
‘어찌 됐든 지금은 먼 얘기지만… 제대로 공략하려면 이 세계를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겠어.’
신전의 도서관에 제국의 생활양식과 관련된 백과사전이 있을지도 모르니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고 정리를 할 때 힐끗 본 책들은 온통 종교 서적뿐이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도서관인데 제국에 관련된 책 한두 권쯤은 있을 법했다.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 실비아는 인벤토리를 켜 아이템을 확인했다.
<최고급 낚싯대>는 해안가에 갔을 때 다시 써 보면 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된단 말이 좀 걸렸다.
데드엔딩을 맞아도 다시 자동 세이브 지점인 집을 나설 때로 돌아오긴 하지만, 실감나는 고통이 따랐기에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조심은 아무리 해도 모자란 법. 조금만 더 있다가 하자. 새로운 던전을 클리어한 후에 말이야.’
<던전 리젠권>은 공짜로 받은 거긴 하지만 해안 동굴 같은 쪼렙 던전에 쓰고 싶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세비스가 새 던전을 못 찾았다고 하지 않았었나?
당장 이번 주는 어떻게 할까 걱정이 된 실비아가 막 바닥에 누운 세비스를 불렀다.
“세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