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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2화 (32/372)

32화

실비아가 가버릴까 빠른 속도로 줄줄 내뱉는 세비스의 말에 그녀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음, 참을 필요까지야, 난 같이 사는 네 기분이 더 중요해. 신관님께 말씀드려야….”

“아니요!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에요. 저분 인상도 좋아 보이시고… 좋은 분 같아요! 전 좋아요.”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같이 가도 괜찮은 거지?”

“그럼요!”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비스가 딱 봐도 신이 난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서 갔다.

원래 단둘이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깨트린 셈이니 조금 미안했지만 좋아하는 세비스의 모습에 그녀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뭐, 옷을 사는 건 세비스에게도 좋은 일이니까. 보내려고 했으면 곤란했을 텐데 다행이네.’

한편, 분수대 뒤쪽으로 사라진 둘을 기다리던 노엘의 앞엔 어느새 즉석 악수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악수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여인들로 할머니, 손녀, 며느리 할 것 없이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꺄악거리며 광장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세상에나, 이런 얼굴이 세상에 존재했다니!”

“아, 은혜로워라. 신이 내린 선물이야.”

“홀홀… 죽기 전에 잘생긴 얼굴을 코앞에서 봤으니 여한이 없구만….”

“하하…. 어머님, 과찬이십니다.”

싱긋. 시베리아 벌판도 한순간에 제주도 유채꽃밭으로 바꿔 버릴 것 같은 노엘의 따뜻한 눈웃음에 악수회에 참석한 여인들 중 몇몇은 기절해서 부축을 받아나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뭐야, 잠시 세비스랑 얘기하고 온 사이에 무슨 아이돌 악수회 같은 게 생겨났어?’

“저기, 잠시만요, 앞으로 좀 갈게요.”

실비아는 인파를 헤치며 노엘을 향해 나아갔다. 여인들과 간간이 섞여 있는 남자들의 환호성으로 귀가 다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노엘! 노엘 님!!”

실비아가 환호성 사이에 제 목소리가 묻히지 않게 큰 소리로 노엘을 불렀다.

“아! 실비아 님!”

인파를 헤치며 다가오는 갈색 머리를 발견한 노엘이 반가운 얼굴로 일어나더니 이내 정중히 대중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은 이만 해야겠군요. 다들 집으로 가셔야죠.”

“아아, 아쉬워라.”

차분하고 은혜로운 노엘의 목소리에 즉석 악수회 인원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군말 없이 흩어졌고, 광장은 순식간에 평화를 되찾았다.

‘옷 사러 가긴 글렀다 생각했는데 군중 지배력이 대단하군. 역시 잘생긴 신관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실비아는 잠시 대화를 하러 간 사이에 즉석 악수회까지 만든 노엘의 외모에 한 번 더 감탄했다. 한편으론 저런 노엘이 있는데 굳이 자신이 길거리 전도를 해야 했던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노엘 님, 사제복을 입고 오지 그러셨어요. 그럼 길거리 전도 안 해도 될 듯한데.”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심을 갖춘 분들만 신전으로 오시는 게 맞죠. 괜히 저 때문에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신전이 북적이게 된다면 곤란한 일 아니겠어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즉석 악수회를 만든 노엘이었다. 그가 사제복을 입고 일주일만 밖을 돌아다닌다면 신전은 조만간 고척 돔 콘서트장이 될지도 몰랐다. 진심으로 기도를 드리러 온 신도들에겐 곤혹스러울 일일 것이었다.

어쩐지 신전에서도 기도 시간에 참석을 안 하더라니. 노엘의 은혜로운 얼굴을 본 신도들이 불순한 맘을 품을까 봐서인 듯했다.

‘그리고 나도 곤란하고 말이지. 라이벌이 생기는 건 사양이야.’

플레이어라곤 실비아뿐이지만, 게임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에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이 미친 게임이라면 <불순한 여신도에게 노엘의 동정을 뺏겨 버렸다.> 이런 메시지가 뜰 수도 있는 거니까.

실비아의 속을 모르는 노엘이 싱긋 웃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실비아 님처럼 진심으로 신을 섬기는 분만 신전에 오셨으면 합니다.”

“그러게요….”

그 화사한 미소에 화답해 함께 활짝 웃으며 그녀는 속으로 뜨끔했다.

‘기도를 진땀 흘리며 했더니 단단히 오해를 산 모양이야. 뭐, 정정할 필요는 없겠지.’

신전에서 어떤 신을 모시는지도 모르는데 신앙심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길거리 전도까지 하는 와중에 이렇게나 몰라도 되는 걸까. 혹시나 노엘이 갑작스럽게 신과 관련된 대화라도 시작하면 곤란해질 터였다.

‘조만간 이 신전이 어떤 신을 모시고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실비아는 분수대 앞에서 세비스와 노엘을 제대로 인사시켰다. 다행히 이미 분수대 뒤에서 세비스를 설득했기에 둘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짧은 인사 후 노엘은 본인이 평소에 자주 가는 부티크가 있다며 둘을 이끌었다. 이미 실비아에게 설득당한 세비스는 옷을 얻기 위해 얌전히 노엘을 뒤따라갔다.

“여깁니다.”

노엘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실비아와 세비스는 벙찐 표정이 되었다. 숍은 입구부터 레드카펫이 깔려 있고 정교하게 가공된 조각상들이 문 양옆에 세워져 있었다. 딱 봐도 아무나 옷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노엘을 따라 홀린 듯이 들어가 보니 내부는 더 휘황찬란했다.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입구에 서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새 옷을 사준다고 해도 일반 시장에서 사줄 줄 알았던 둘은 멍한 표정으로 부티크 내부를 둘러봤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구경하다가 슬쩍 가격표를 본 실비아는 경악했다.

‘천 쪼가리가 한 장에 3천 골드씩이나 해??’

생각 이상으로 비싼 가격에 실비아가 황급히 노엘에게 물었다.

“노엘 님, 여기서 저희 옷을 사 주신다구요?”

“네, 부담가지지 마시고 얼마든지 맘에 드는 걸로 골라보세요. 여러 벌 고르셔도 됩니다.”

“아, 음… 예…. 꼭 나중에 갚을게요.”

실비아가 감동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노엘이 밝게 미소 지었다. 구세주가 따로 없는 미소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어차피 갚을 테니 기왕지사 맘에 드는 옷을 사는 게 좋을 듯했다.

빌린 돈이니 맘껏 고르라고 세비스에게 말하자 실비아처럼 망설이던 그도 화색을 띠며 열심히 옷을 뒤적였다.

실비아와 세비스는 한 벌만 사면 갈아입기에 곤란할 것 같아 각각 네 벌씩 옷을 골랐다.

세비스 것까지 해서 거의 25000골드의 옷을 노엘은 한 번에 계산했다. 달아놓는 것도 없이 일시불이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입구를 나서자 직원이 배꼽인사를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세비스는 처음에 못마땅해하던 기색은 거짓말이었던 양 노엘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신관님, 정말 감사해요. 실비아 님 것뿐 아니라 제 것까지 다 사 주시다니!”

역시 돈은 사람의 환심을 사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었다. 세비스는 조심하라며 경고했던 일을 다 잊은 사람 같았다.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든 세비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실비아를 돌아봤다.

“이제 저녁때가 다 됐는데 밖에서 외식하고 들어갈까요? 실비아 님, 저녁은 저희가 사 드려요!”

“네, 저녁은 저희가 살게요.”

노엘은 그들의 말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 저야 좋죠.”

자그마치 소지금의 두 배가 넘는 값어치의 옷을 한 번에 받았는데 염치가 있다면 밥까지 얻어먹을 순 없었다.

노엘은 고급 음식점은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저렴한 식당으로 둘을 데려갔다. 역시 천사가 따로 없었다.

“아, 잠시만 화장실 좀….”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 사이 실비아는 잠시 화장실에 간다며 몰래 밖으로 나왔다. 비밀상점을 가기 위해서였다.

‘까먹을 뻔했네. 음식 나오기 전에 갔다 올 수 있겠지?’

다행히 음식점은 첫날 갔었던 주점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실비아는 조심히 주변을 둘러보며 주점과 여관 사이 골목 안에 있는 막다른 벽 앞에 섰다.

‘벽으로 달려가라고 했었지?’

음식이 나오기 전에 가야 하니 마음이 급했다.

벽 앞에 일렬로 서서 식빵을 굽고 있던 고양이들을 조심스레 옮겨 치운 뒤 실비아는 심호흡을 하곤 기합을 내지르며 벽을 향해 달려갔다.

“으앗! 비밀상점으로 간다앗!”

꽝!

“아악!”

막다른 벽으로 힘껏 달려간 그녀는 벽에 제대로 코가 깨졌다.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뒹굴고 있자 고양이들이 야옹거리며 그녀를 비웃는 듯했다.

힘껏 달려가 벽에 부딪혔더니 눈앞에 별이 보이고 나태지옥 입구에서 뼈만 남은 망자에게 윙크까지 받았다. 축축한 느낌에 코밑을 훔쳐보니 맑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건 피!”

코를 손으로 막은 채 혹시나 해서 상태 창을 켜보니 던전을 돌아다닐 때도 거의 닳지 않았던 체력이 20이나 닳아 있었다.

“으으윽…. 맞잖아. 뭐가 잘못된 건데?”

인벤토리를 켜서 안내도를 다시 읽어 봐도 전과 마찬가지로 [주점과 여관 사이 막다른 벽을 향해 ‘비밀상점으로 간다!’를 외치며 뛰어가면 된다.]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래도 기합을 넣은 게 문제인 듯했다.

혼미한 정신을 가까스로 추스른 뒤 심호흡을 한 실비아는 그러나 약간 겁이 난 관계로 목소리를 조그맣게 냈다.

“비밀상점으로… 간다….”

그리곤 아까랑 달리 얼굴을 옆으로 하여 보호한 뒤 벽에다 몸통박치기를 하였다. 하지만 실비아의 어깨만 아작 나고 벽은 묵묵부답이었다. 망할 놈의 비밀상점은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또 데굴데굴 굴렀다.

“끄아악!”

실비아의 비명에 놀란 고양이가 니야옹! 하면서 찢어지게 울었다. 겨우 진정한 후에 상태 창을 켜보니 체력은 20이 더 줄어 있었다.

‘체력이 또 20이나 닳았네. 왜 체력 120 이상일 때 이용 가능인지 알았다.’

이놈의 게임이 웬일로 별 탈 없이 돌아간다 했다. 실비아는 코피를 닦으며 혀를 쯧쯧 찼다. 시작할 때 뭣 모르고 왔다간 한 번 부딪힌 순간 바로 데드엔딩을 맞았을 것이다.

안내도를 다시 읽어 본 실비아는 ‘외치며’라는 구절에 주목했다. 안내도대로 착실하게 해야 비밀상점을 갈 수 있어 보였다.

‘이번엔 정말 간다.’

실비아는 코를 슥 닦다가 어느새 피가 멎었음을 확인하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비밀상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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