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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9화 (29/372)

29화

“헉!”

노엘은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책을 우수수 떨어트렸다. 그리곤 장난을 친 존재가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뒤돌았다.

“노엘 님!”

“허어어억! …실비아 님?!"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누가 장난을 친 건가 싶어 무표정으로 뒤돌았던 그는 곧 자신을 놀라게 한 게 실비아란 걸 확인하고는 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도서정리 대에 있던 책을 와르르 무너트릴 정도로 당황하며 허둥지둥 서고에 딱 달라붙었다.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핼쑥한 낯빛의 노엘이 마른세수를 하더니 사선으로 시선을 둔 채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시, 실비아 님!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요. 서고 정리를 하라고 해서 왔죠. 대강당은 이제 새로 온 신도들이 청소하느라 제가 낄 틈이 없던데요?”

“아, 아! 그러시군요. 그럼 이 도서 정리를 같이 하시면 됩니다.”

실비아가 자신을 보지 않는 그를 빤히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건지 아예 뒤돌아버렸다. 실비아는 그 모습에 속이 살짝 상했다.

‘내가 너무 들이댔나? 반응을 보니 역시 날 피하는 게 맞았구나.’

그렇게 심한 짓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순진한 신관에게는 과한 자극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딴 맘을 먹은 걸 눈치챈 걸까?’

노엘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본 실비아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의도를 눈치챘다면 이렇게 태연히 서고 정리를 같이 할 리가 없다. 그러나 지난 날 좀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건 사실이니 신관인 노엘 입장에선 곤란했을지도 몰랐다.

천벌을 안 받으려면 얼마까지 신앙심을 올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에 실비아는 틈날 때마다 과하지 않게 노엘을 계속 찔러 보기로 결정했다. 한동안 수작질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실비아 사전에 없었다.

그 와중에 노엘은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그는 일부러 출장을 신청해 일주일간 실비아를 피했었다. 계속 물에 젖은 실비아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서였다.

그러나 안 보는 사이에 밤낮으로 그녀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더 곤란해져 버렸다. 그런 실비아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 놀랬으니 노엘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처럼 불가피한 상황에서 남자의 상징이 서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된 그는 어금니를 강하게 물며 결의를 다졌다.

‘나는 신을 모시는 사제, 자제해야만 한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둘은 말없이 서고 정리를 했다. 서고 정리를 반 정도 끝냈을 때쯤 조용한 분위기에 좀이 쑤신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날 빌려주신 옷은 깨끗이 세탁해서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다 놨어요.”

“아…,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

“속옷은 그날 가져갔던 거 같은데, 제 옷을 놔두고 간 것 같아서요.혹시 보셨나요?”

“실비아 님 옷이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날 이후로 정신이 없어서요. 청소하시는 분이 치워 버렸나 봐요.”

옷이 젖은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을 테니 아무것도 모르는 청소부가 걸레인 줄 착각하고 버릴 만도 했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군요.’라고 답하자 노엘이 안절부절못하더니 실비아를 힐끗거리며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자매님의 소중한 옷을 보관해 두지 못한 제 책임이 크네요.”

‘죄송할 것까진 없는데. 어차피 오늘 옷 사러 갈 테고.’

안 그래도 누더기옷은 지긋지긋한 참이었다. 실비아는 오늘 구제시장에서 옷을 사게 되면 거렁뱅이 옷을 다 헌옷수거함에 버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누더기옷의 값어치를 알고도 남을 텐데도 착한 노엘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책을 서재에 의미 없이 넣었다 뺐다 하며 한숨을 내쉬던 노엘이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정말 죄송하네요. 그… 제가 새 옷을 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럴 것까진 없어요. 신관님께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요.”

거렁뱅이 옷은 거의 걸레짝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사실 버려도 상관없었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실비아가 고개를 내젓자 노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 고위신관입니다. 옷 한두 벌은 저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아요.”

“고위신관이셨어요? 와, 대단하시네요.”

어쩐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고위신관이었다. 신전 알바를 하면서 주워들은 거론 신성력이 있어야만 신관이 될 수 있었는데 노엘처럼 젊은 나이에 고위신관이 되려면 타고난 신성력이 엄청 나야 했다.

고위신관의 월급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일반신관 월급보단 훨씬 많다고 들었다.

평신관도 고급인력이기에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그들 중에서도 높은 신성력을 가진 이들은 희소성을 높이 평가해 고위신관으로서 넉넉하게 돈을 준다고 했다.

‘노엘 님…. 생각보다 더 대단한 분이셨구나.’

그냥 신관이어도 대단한 건데 고위신관이었다니.

일반신관들도 가끔 금반지를 끼고 외제마차를 끌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고위신관인 노엘이 돈 때문에 부담될 일은 없을 듯했다.

‘휴….’

실비아는 가만히 생각하자니 왠지 모를 서러움에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 뻔했다.

‘차라리 신성력 강한 성녀로 플레이어를 설정하던가, 그럼 돈 걱정은 안 했을 거 아냐.’

돈이 없으니 피라미드에 인형 눈알 붙이기까지 하게 된 것 아닌가.

그뿐인가. 남들이 볼까 몰래 읽었던 19금 소설에선 성녀가 주인공으로 나와 싫다고 하는데도 남주들이 바글바글 줄을 서서 달려들었었다.

근데 자신은 이게 뭔가. 빙의 전에 남신한테도 거절당해, 노엘은 공략하려면 천벌이 내려, 루카는 몸 안에 독을 품고 있고 가장 가까이 지내는 세비스조차 공략 캐릭터인지 확실하지 않은 데다 성체도 아니었다.

‘휴….’

저절로 욕이 나올 거 같은 상황에 어금니를 꽉 물고 있으려니 노엘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서고 정리는 적당히 하고 같이 옷을 사러 나갈까요?”

“아, 안 그래도 오늘 구제… 구제시장으로 가서 옷을 사려고 했어요.”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뭔가 창피해진 실비아가 말을 더듬더듬하자 노엘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구제도 좋지만 저는 실비아 님께 새 옷을 사드리고 싶네요.”

“아….”

이렇게 여러 번을 권유하니 거절하기도 뭣 했다.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엘이 뿌듯한 표정으로 앞머리를 넘겼다. 어쩐지 그의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진 것 같기도 했다.

“아, 근데 저랑 같이 사는 세비스랑 옷을 보기로 했는데요.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그 늑대 수인이요?”

노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나 세비스 것도 같이 사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나 싶어 실비아가 급히 말을 이어갔다.

“네. 아! 그 아이 옷까지 사달라는 건 아녀요. 그 아이 옷은 저희 생활비에서….”

세비스를 아이라고 지칭한 실비아의 말에 굳어졌던 노엘의 얼굴이 다시 풀어졌다. 왜 그런지 몰라도 늑대 수인을 아이라고 말하는 실비아의 말에 안심이 됐다.

‘남자로 보는 건 아닌 모양이군…. 아니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노엘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한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가 막히는군.’

잠시 눈을 내리깐 채 헛웃음을 친 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입을 열었다.

“저한텐 아무 부담도 안 됩니다. 그 아이 옷도 제가 사 드릴게요.”

“아, 그럼 제가 너무 죄송한데요.”

실비아가 눈썹을 내리며 미안한 표정을 짓자 노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음에 갚으시면 되죠.”

“아! 그럼 되겠네요. 꼭! 꼭 갚을게요.”

실비아는 감동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모은 채 노엘을 바라보았다.

‘그래, 게임 하다 보면 돈이 점점 많아질 텐데, 그때 갚으면 된다.’

고인물한테 소매넣기 당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목도와 런닝만 갖춘 쪼렙이랑 다름없는 실비아는 게임 캐릭터인 노엘에게 아이템을 받는단 것에 감격했다.

실비아의 입꼬리가 저절로 흐뭇하게 올라갔다. 꼼짝없이 일해서 옷을 사야 하는 줄만 알았는데, 공략 캐릭터가 옷도 사준다니.

이것도 게임 스토리에 있는 이벤트인 걸까. 메시지가 안 떠서 알 수가 없지만 구제 옷을 입을 처지였던 실비아는 그저 기쁠 뿐이었다.

노엘은 두 손을 기도하는 자세로 모은 채 자신을 다람쥐처럼 바라보는 실비아를 보며 기분이 좋아져 밝게 웃었다.

“빨리 치워야 옷을 사러 나갈 수 있겠죠?”

“좋아요! 빨리 해치워요.”

어느새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져, 둘은 열심히 책의 라벨을 갈고 어질러진 서고를 순서대로 정리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드르륵.

급하게 이동식 계단을 끌어온 실비아가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서고 가장 위 책들을 깨끗하게 닦으려고 움직였다.

삐거덕 소리가 나서 살짝 불안했지만 새 옷을 입을 수 있단 생각에 신나서 위로 올라갔다. 마른걸레를 들고 계단을 거침없이 올라간 그녀는 먼지를 뒤집어쓴 두꺼운 양장본들을 하나씩 꺼내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닦았다.

노엘이 그런 실비아를 발견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실비아 님! 제가 할까요?”

“아니에요. 올라온 김에 금방 닦고 내려갈게요. 이것만 하면 퇴근이니까.”

무거운 양장본을 하나 꺼내서 닦고 다시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삐거덕거리던 계단의 한쪽 다리가 무너지며 실비아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실비아 님!”

“엄마야!”

쿵!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후 된 계단다리 한쪽이 무너지면서 실비아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으….”

그러나 분명히 계단에서 떨어졌음에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어, 뭔가 푹신하다…. 아주 말랑말랑하고. 노엘 님이 받아 주셨나.’

따뜻하고 몰랑한 감촉이 얼굴에서 느껴졌다. 노엘이 그녀가 쓰러질 때 쏜살같이 달려와 쿠션 역할을 해 준 것이다.

“킁….”

실비아는 눈을 감은 채 잠시 노엘의 향기를 맡았다. 묵직한 비누 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뺨을 비비고 코를 킁킁댈수록 어쩐지 점점 더 묵직해지는….

‘잠깐, 묵직한… 묵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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