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어쩐지 불길하다 싶더니, 역시 질 나쁜 놈한테 걸리셨구나.’
실비아가 열에 들뜬 상태로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눈앞의 몹쓸 놈이 약이라도 먹여서 그런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거기다가 호텔 앞 아닌가. 안 좋은 맘만 먹으면 그녀를 안고 객실로 바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실비아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루카의 금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붉은 눈이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실비아 님의 집사인 세비스라고 합니다. 그 손 놔주시죠.”
그의 말에 루카의 금색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응? 실비아에게 집사도 있었나 보네?”
‘이 남자 뭐지? 실비아라고 친근하게 부르다니. 주인님과 아는 사이인가, 왜 저렇게 친한 척이지?’
얼마 전에 집에 찾아온 신관도 그렇고. 세비스는 제 주인의 사교성이 생각보다 좋은 건가 고민했다. 실비아가 누구랑 교류하든 집사인 저가 주인의 인간관계에 왈가왈부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좀 그랬다. 질이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려니 루카가 픽- 하고 웃더니 세비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집사라…. 집사 맞아?”
루카가 세비스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하자 세비스가 얼른 대꾸했다.
“집사 맞습니다만?”
“그래?”
입꼬릴 한쪽만 올려 비스듬히 웃은 루카가 예고도 없이 세비스의 모자를 벗겨내 버렸다. 잠시 세비스가 제 주인의 허리를 감고 있는 단단한 팔에 신경을 판 새에 일어난 일이었다.
모자가 바닥에 떨어지고 세비스의 검은 귀가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무례한 행동에 세비스가 급하게 모자를 잡아채려 해 봤지만 이미 땅에 떨어진 후였다.
“아하.”
루카가 재밌다는 듯 감탄사를 뱉은 순간 세비스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자라나며 붉은 눈이 분노로 일렁였다. 그는 화가 난 얼굴로 루카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끙끙거리며 안겨 있는 제 주인을 내려다보곤 조용히 으르렁거렸다.
“크르르….”
세비스의 손톱이 날카롭게 길어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카가 과장되게 놀란 척 눈을 떴다.
“와우. 어쩐지 인간 같지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싶더니. 늑대 수인이었군.”
“당신! 지금 뭐하는 거지?”
“검은 귀와 붉은 눈을 보니 검은 늑대족이군. 산골짜기에 살던 종족이 인간세계까지 내려오다니, 살기 팍팍한가 봐.”
세비스는 붉은 머리 남자가 더더욱 맘에 들지 않았다. 자기 할 말만 하는 남자와 더 이상 대화할 필요성을 못 느낀 그는 모자를 주워 깊게 눌러썼다. 그리곤 금색 눈을 차갑게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실비아 님을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손 놓으시죠.”
대치가 길어질 줄 알았건만 의외로 루카는 순순히 실비아를 건네주었다. 의미 없는 실랑이를 해봤자 얻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세비스는 실비아의 어깨를 감싸곤 표정을 살폈다.
이 난리가 났는데 아까부터 조용하다 싶더니 제 주인은 정신을 못 차리며 비실거리고 있었다.
‘병원을 가야 하나.’
가까운 병원이 어디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루카의 말이 그의 생각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래, 실비아 집사.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나도 그녀를 무사히 데려다주려고 나온 거였어.”
“…….”
“마치 나쁜 놈 보는 것처럼 바라보면 기분이 더럽잖아. 그치?”
루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거만한 미소를 짓자 세비스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날 보자마자 주인님의 허리를 꽉 껴안아 놓고선 이제 와서 뭐라는 거야.’
세비스는 그를 무시하고 조심스레 실비아를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루카가 그런 그의 앞을 다시 막아섰다. 손을 들어 세비스를 멈춰 세운 루카는 근처에 서 있던 호텔 직원을 불러 마차를 호출했다. 택시 같은 개념의 간이마차였다.
마부에게 삯을 넉넉하게 건넨 그가 마차 문을 열곤 세비스에게 고갯짓했다.
“이 마차를 타고 가.”
“됐습니다.”
“손수 들고 이동하게? 꼬맹아. 아직 성체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러다가 너도 쓰러질라. 그냥 줄 때 받지?”
루카는 일부러 세비스의 속을 박박 긁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뒤집어엎고 싶어 보이는 얼굴로 가까스로 화를 참고 있는 세비스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하….”
세비스는 안 그래도 실비아를 부축한 채로 걸어서 가기가 막막했기에 자존심은 우선 접어두고 조용히 마차에 올라탔다.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실비아를 내려놓고 문을 닫으려는데 루카가 닫히려던 문을 막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건넸다.
“자, 실비아가 깨면 이 명함으로 연락 좀 달라고 말해 줘.”
“싫은데요?”
“사업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전달 안 하면 실비아가 곤란해할걸?”
물론 거짓말이었다.
루카는 이렇게 얘기 해두면 집사도 어쩔 수 없이 명함을 전달할 거라 생각했다. 당장 마부를 매수해서 집을 알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매너를 지키기로 했다. 쓰레기 사업만 하는 루카였지만 처음으로 반한 여자에겐 신중했다. 예상대로 집사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명함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다시 문이 닫히려던 순간, 루카가 고개를 디밀었다. 그리곤 세비스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있잖아…. 너 정말 집사 맞아?”
“무슨 소립니까?”
세비스가 문을 잡은 채 눈을 날카롭게 뜨자, 루카가 그의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한 채 키득거렸다.
“네 눈빛을 네가 모르나 본데, 너, 자기 암컷을 뺏긴 짐승의 눈을 하고 있잖아.”
“…헛소리.”
세비스가 얼굴을 굳힘과 동시에 루카가 키득대며 몸을 뒤로 물렸다. 문이 닫히고 마부의 채찍질 소리와 함께 마차는 출발했다. 루카는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키득대며 배를 잡고 웃었다.
‘푸흡, 그 굳어진 표정이라니. 자기 감정을 자기가 몰라서야.’
모른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으나 수컷의 얼굴을 한 채 주인에게 충성하는 척하는 꼴을 보니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는 자신의 매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저 검은 머리 남자는 귀엽긴 하지만 자신의 치명적인 매력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실비아도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그냥 갔지만 명함을 줬으니 조만간 연락을 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럴 린 없겠지만 연락이 오지 않으면 우연인 척 다시 만남을 유도하면 됐다. 조직의 차기 보스인 그가 찾아내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키득대며 웃던 루카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실비아와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다는 기시감이 다시금 느껴져서였다.
‘왜 이런 기분이 들까. 진짜 운명인가?’
이렇게 첫눈에 반할 수도 있는 건가. 아니다, 저런 여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면 그 남자는 바보일 것이다.
사업가의 아내로 제격인 능력 있는 여자였다. 엄청난 화술에 건강음료를 마시지 않고 경계하는 현명함, 거기다가 아름다운 외모까지 갖춘 완벽한 여자. 누더기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맘만 먹으면 억만금을 벌 수 있는 여자였다.
후계자였던 형의 빈자릴 메우려면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실비아가 옆에 있다면 그런 그를 도와줄 수 있을 터였다.
나태하게 굴다가 가문의 사업에 여기저기 구멍을 낸 형, 죽을 때도 어찌나 바보 같이 죽었는지.
하루하루 바쁘게 살던 자신과는 다르게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뒹구는 것만 좋아하던 형이었기에 지금쯤 지옥에서 고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루카는 형에 대한 그리움을 애써 억누르며 이를 꽉 물었다.
‘지옥에서 왕이라도 되어 있는 거 아냐?’
루카는 실없는 생각을 한 자신을 비웃으며 호텔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세비스와 실비아를 태운 마차는 순조롭게 거리를 내달렸다. 세비스는 실비아가 옆으로 쓰러지지 않게 부축하며 아까 전 만났던 붉은 머리의 남자를 떠올렸다.
‘정신 나간 남자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불쾌하고 무례한 작자였다. 기분이 나빠진 세비스는 헛웃음을 치며 제 머릴 거칠게 헝클었다. 실비아가 끙끙거리며 신음을 내뱉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그녀를 제대로 부축했다. 그는 힘없이 축 처진 실비아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창밖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창문에 비친 세비스의 붉은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날카롭게 자라있었다.
마차를 타니 걸어갈 때랑 달리 순식간에 집에 도착했다.
세비스는 정신을 못 차리는 실비아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잠시 깨어난 그녀가 병원에 갈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비아 님, 정신 차려보세요.”
“으음, 세비스….”
“역시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냐. 조금 있으면 나아져. 왜 이런지 알고 있으니까…. 나 한숨 잘 테니까… 그 인형… 인형 눈알 붙이기 좀 먼저 하고 있어. 미안해.”
한사코 거부하는 실비아를 억지로 병원에 데려갈 순 없었다. 세비스는 침대에 실비아를 눕히곤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짜서 이마 위에 얹어주었다.
진땀을 흘리며 간간이 잠꼬대를 하는 실비아의 얼굴을 닦아 준 뒤, 카펫 위에 주저앉아 인형 눈알 붙이기를 시작했다.
인형 눈을 붙이며 세비스는 다시 한번 아까 전의 일을 떠올렸다. 붉은 머리카락만 떠올려도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뭐? 암컷이 어쩌고 짐승이 어째? 실비아 님이 못 들었길 다행이지, 미친놈.’
답지 않게 험한 말이 나오려고 해 세비스는 자신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일반 제국민들이랑은 달리 세비스의 머리에 솟은 검은 귀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차려입은 행색이나 말하는 태도로 보아서 일반인은 아닌 듯했다.
실비아 님은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랑 엮이게 된 걸까. 옥장판 판촉 알바를 가지 못하게 말릴 걸 후회가 됐다.
어차피 루카와 실비아는 게임의 법칙에 의해 엮이게 될 거고, 실비아는 루카를 절실하게 공략하고 싶어 한다는 걸 까맣게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다음엔 수상한 알바를 한다고 하시면 따라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