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저는 오늘 뭘 하는 건가요? 아무 안내도 받지 못해서 불안해서요.”
“별거 아냐. 자, 이거 한 병 마실래? 우린 옥장판 말고도 여러 가지 건강에 좋은 제품을 팔고 있거든. 이거 마시고 효과가 어땠는지 위에서 얘기해 주면 돼. 혹시 잘 모르겠으면 앞사람들 하는 거 보고 대충 따라 하면 되고.”
루카가 정체 모를 건강음료를 하나 내밀었다. 병의 테두리엔 인삼을 닮은 약초가 빙긋 웃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실비아는 강매를 당할까 봐 속이 안 좋다며 건강음료를 사양했다.
루카는 우리 제품 먹으면 다 낫는데, 하면서 비열하게 미소 짓더니 너 같은 젊은 애들이 우리 사업에 꼭 필요하다고 말하며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사라졌다. 실비아는 사자에게 포옹당한 사슴처럼 얼굴에 핏기가 싹 빠져 버렸다.
‘씨발, 피라미드 맞네. 피라미드…. 느낌이 아주 강하게 오고 있다.’
뒤에는 흉흉한 눈빛의 덩치들, 앞에는 위험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루카,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실비아는 어쩔 수 없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행사가 시작되고 제일 앞에 서 있던 루카가 올라가자 정체 모를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의 사람들이 우르르 단상 위로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뒤에 서 있던 덩치가 우물쭈물하며 가만히 서 있는 실비아를 밀었다.
“뭐 하세요? 위로 같이 올라가세요.”
“아, 네….”
얼떨결에 올라가 보니 단상 위의 사람들이 거지 같은 단체 군무를 추고 있었다. 실비아는 옆구리를 치며 눈치를 주는 옆 사람에 의해 강제로 허접한 군무를 따라 했다.
딴따딴- 딴따따딴따딴. 수상하게 활기찬 음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기분을 업되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기운찬 행사 곡들이 울려 퍼지자 루카가 마이크를 들곤 크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오늘 분위기가 후끈하네요. 행사 즐길 준비되셨죠?”
루카가 말을 끝내고 마이크를 청중들 앞으로 내밀자 모두들 ‘예!’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화답했다.
실비아는 똥 씹은 표정으로 단상 아래를 내려다봤다.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에 약이라도 탄 건지 남녀 할 것 없이 홀린 표정이었다.
물론 호텔 지하에서 행사하면서 약을 타진 않았을 테다. 실비아가 루카를 처음 봤을 때 느낀 바대로 사람 같지 않은 그의 외모에 단체로 넋이 나간 듯했다.
얼핏 단상 바로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서 ‘저런 남자면 빚을 내서라도 착취당하고 싶어!’라는 정신 나간 목소리도 들려왔다.
‘외모 활용 한번 제대로 하고 있었구나.’
루카는 분명 마법을 쓸 줄 알았는데, 왜 이런 사업을 하는 걸까? 실비아의 의문은 바로 풀렸다.
루카는 확신에 찬 어조로 청중들 앞에서 설명을 이어갔다.
옥장판 위에 눕기만 하면 차가웠던 몸도 따뜻해지고 편안한 느낌이 감돌며 피로도 싹 사라진다며, 단돈 1만 골드에 마법의 옥장판을 구매할 수 있다고 했다.
‘뭐래, 옥장판 위에 누웠으니 당연히 따뜻하고 편안하고 안 피곤하겠지. 그건 그렇고 옥장판 하나에 1만 골드??’
1만 골드면 꽤 큰돈인데 사려고 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건 실비아의 오판이었다.
루카가 슬쩍 이 옥장판을 사면 나 같은 남자랑 같이 누울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누가 봐도 개소리가 분명한 멘트를 치자, 귀티가 좔좔 흐르다 못 해 넘쳐흐르는 호구 사모님들은 ‘1만 골드? 어머 뭐가 그렇게 싸?’라고 외치며 너도나도 사겠다고 손을 들었다.
심지어 일가친척들에게 다 돌리겠다며 100개 주문을 외치는 귀부인도 있었다. 발그레해진 볼을 보니 루카에게 제대로 반한 듯했다. 그러나 그 호구 고객들 사이에서도 아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가만히 앞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덩치들이 테이블을 넘나들며 옥장판 구매자 명단을 확보한 뒤 단상을 향해 신호를 주자 루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반가운 소식을 가져 왔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드디어! 마법 옥장판 10만 개 판매 달성을 기념하여 건강식품을 새로 출시했거든요. 이번엔 그 제품의 효과를 미리 본 이들의 경험담을 들어 볼 차례죠!”
‘…옥장판 10만 개 판매한 거랑 건강식품 출시랑 대체 뭔 상관이야.’
실비아는 돌아가는 판을 대충 눈치챘다.
루카의 외모에 홀린 호구들이 1차 판매대상이고, 아직 망설이며 의심하고 있는 2차 판매대상들은 단상 위에 올라온 젊고 화려한 외모의 젊은이들이 건강식품의 효과를 부르짖으면 홀린 듯이 제품을 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가는 제품을 보고 혹한 사람들을 피라미드에 끌어들이는 게 최종 목적이겠지.
그나저나 10만 개면… 히이익, 10억 골드? 이 마을 인구가 그렇게 많은가? 실비아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고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아니다. 아마 1명당 하나씩만 사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방금 전만 해도 대량구매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지 않았던가. 루카의 환심을 사려고, 혹은 잘 팔리는 걸 보고 혹해 피라미드 사업을 시작해 보려는 사람들이 대량구매를 해서 10만 개를 달성한 것일 듯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파는 건 아니라 다행이긴 하다만….’
실비아는 눈앞의 청중들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돈이 썩어나서 할 일 없이 놀러 나온 귀족들로 보였다. 그들을 현생에서의 피라미드 피해자들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순 없었다. 1만 골드를 싸다고 외치는 걸로 봐서는 그들에게 이 행사장은 가벼운 유희 거리일지도 몰랐다.
‘24개월 할부로 눈물 흘리던 현생의 나와는 다른 처지지….’
그렇게 생각하면 루카의 행동이 그리 악독해 보이진 않았다. 실비아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루카에 대한 경계심을 풀진 않았다.
‘쟤라면 날 피라미드에 끌어들여 파산 엔딩을 맞게 할 수도 있어…. 키스하다가 독에 뒤지기도 하는데 파산 엔딩이라고 없으란 법은 없지. 조심하자.’
“…전 그래서 지금 새로운 삶을 살고 있구요! 제 월수입은… 천만 골드입니다.”
“세상에!”
무대에 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오버를 해 가며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렇게 건강식품 경험담 혹은 사업 성공담을 말하는 사람들의 줄도 점점 줄어들었다.
다음은 실비아의 차례였다.
루카가 실비아에게 다가와선 조그맣게 귓속말을 했다.
“너무 떨지 말고, 앞사람들 하는 대로만 말하면 1천 골드 바로 줄게. 오케이?”
떨긴.
실비아에겐 <헛소리를 진지하게> 스킬이 있었다. 기왕지사 하는 거 길거리 전도를 하며 쌓은 화술을 제대로 보여 주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실비아는 크흠, 하고 차분하게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발표 대 위에 올라섰다.
이 게임 세계는 현대문물 중 쓸 만한 것은 다 가져다 놓았다. 판타지 세계와 현대세계가 적절하게 섞였다고나 할까. 마이크가 그중 하나였다.
‘뭐, 굳이 개발할 때 마이크 대신 ‘마법 음성 확장장치’ 이런 말을 쓸 필욘 없을 테니까.’
실비아의 건강식품 체험담 간증에 앞서 잠시간의 휴식시간이 있었다.
그 사이에 루카는 아까 100개의 옥장판을 주문한 귀부인 앞에 가서 살인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동정인 주제에 제비가 따로 없었다.
‘저게 전설로만 전해지던 입만 문란한 동정남이란 걸까.’
루카를 잠시 혀를 차며 바라보던 실비아는 휴식시간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마이크를 톡톡 두드리며 청중들을 주목시켰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헛소리를 진지하게> 스킬 사용.’
실비아가 조용히 스킬 이름을 속으로 떠올리자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과 휴식시간에 잠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던 사람들 모두 실비아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잠깐, 근데 이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때 써도 되는 건가? 에라, 모르겠다.’
“후우….”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그녀는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헛소리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손짓 발짓을 써가며 이 회사의 건강식품을 섭취하고 난 뒤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본인의 증조할머니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으며 아직 배에서 나오지 않은 조카가 4개 국어를 마스터 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자신은 원래 배 나온 50대 중년남성이었는데 이 건강식품을 먹고 아름다운 여자로 다시 태어났다고까지 말할 땐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헛소리를 진지하게> 스킬이 얼마나 먹힐지 궁금해서 온갖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해 본 것이다.
“…그래서 말이죠. 결론은! 저는 불사의 몸을 얻게 되었다는 겁니다! 제 나이는! 지금! 무려! 500살입니다!”
실비아가 한 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웅변하듯 마지막 멘트를 치자 관중석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곤 곧 우와아! 하는 열광적인 환호성이 들려왔다.
스킬의 효과는 굉장했다. 사람들은 실비아의 개소리에도 오오! 탄성을 지르며 건강식품 예약을 하려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당장 사야겠어!”
“저도 무덤에 잠들어계신 증조부님을 깨워야겠어요!”
“나도! 나도 여자가 되고 싶어!”
덩치들은 바쁘게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주문 예약을 받았다. 실비아가 연설을 끝내자 단상 아래는 예약을 하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후, 하얗게 불태웠다. 생각보다 더 엄청난 스킬이었어.’
성공적으로 연설을 마친 실비아가 진땀을 흘리며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 가까이 다가온 루카가 혀를 내두르며 상기 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브라보! 완벽해! 넌 이 회사를 위해 태어난 인재야.”
루카가 극찬을 하자 옆에 일렬로 늘어서 있던 사파이어, 루비, 다이아몬드들이 박수를 치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게요! 엄청난 분이네요.”
“세상에, 이런 분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오신 걸까!”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한 남녀들뿐만 아니라 경호를 하던 덩치들조차 그녀를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좀, 진짜 이상한 걸로 찬사 받고 있는 것 같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네.’
실비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무심한 듯 표정을 꾸며댔다.
“뭐, 이정도야 별거 아닙니다.”
“와, 정말 대단하구나, 너. 일하는 곳 있어? 당장 정식사원으로 채용하고 싶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