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아마도 동생과 누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성체가 되면 또 몰라…. 그러고 보니 신관은 실비아가 자신을 조카라고 설명하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실비아 님도 숙제나 하러 들어가라고 했었고 말이다.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성질나!’
세비스는 울적해진 채로 요리를 시작했다. 심술이 나 웍을 팍팍 올렸다, 내렸다 했더니 야채가 사방으로 튀었다.
“어어? 세비스, 주방 더러워져, 요리 실력은 알겠는데 기교는 적당히. 요리는 정성….”
“그런 거 아니에요!”
* * *
다음날 실비아는 세비스가 준비해 준 스카프를 매고 집을 나섰다. 비록 하루지만 판촉 알바를 하러 갈 거니, 거렁뱅이 옷에 스카프라도 걸쳐야 성의가 있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세비스도 모자를 쓰고 던전에서 획득한 구슬을 팔러 같이 나왔다.
갈림길에 들어서서 다른 길로 가게 된 세비스는 실비아에게 알바 장소는 지그문트 호텔 지하 1층의 행사장이며 이상한 거 같으면 바로 나오라고 당부했다.
‘옥장판이라…. 진짜 이상한 알바는 아니겠지….’
그녀는 자신 있게 옥장판 판촉 알바를 하겠다고 했지만 조금 걱정이 됐다. 패스트푸드점이나 아이스크림 집에서 일해 본 적은 있지만 판촉 알바를 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옥장판을 판매한단 게 조금 싸했다.
‘화술만 믿고 막 질러 버렸어. 게임 속이니 어떻게든 될 거란 생각도 있었고 말이지.’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으리으리하고 고풍스러운 지그문트 호텔이 나타났다. 호텔 앞엔 딱 봐도 고급진 백마와 흑마들이 매어진 최고급 마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여기 마차 가격이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1만 골드론 턱도 없어 보이네.’
실비아는 게임을 하면서 이 세계의 돈의 개념을 대충 알게 됐다. 세비스와 실비아의 한 달 생활비는 던전에서 공짜 식재료를 가끔 구함에도 불구하고 식비와 잡비를 포함해서 1천 골드였다. 그러나 1천 골드는 최소한의 생계 유지비였다.
밖에서 노점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으려고 하면 5골드 정도였지만 이런 호텔에서 묵으려면 하룻밤에 5천 골드 정도로, 물가 차이가 말도 안 되게 심했다. 아마도 지금보다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려면 훨씬 많은 돈이 들 터였다.
처음 소지금이 200골드였던 실비아가 거렁뱅이로 불릴 만했다.
‘던전 공략 안 했으면 조만간 굶어 죽었을 듯.’
실비아는 자신의 거렁뱅이 옷을 내려다봤다. 인간적으로 옷을 몇 벌 사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오늘 이 알바비 받고 세비스가 구슬을 팔고 오면 소지금이 1만 골드가 넘을 테니, 비밀상점에 갔다가 옷가게도 한번 가 봐야겠어.‘
호텔 입구는 발레파킹을 돕는 직원들과 마차에서 우아하게 내리는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사람들로 북적였다.
게임 세계는 판타지 세계와 현실의 요소가 적절하게 섞여 있어서 고급스러운 양복을 걸친 사람, 하얀 제복을 걸친 사람, 풍성한 드레스를 걸친 사람 등등 옷에 각자의 개성이 있었다.
거렁뱅이 옷을 입은 실비아는 입구에서 잠시 실랑이를 벌였지만 전서구로 받은 명함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호텔 직원은 실비아를 위아래로 쳐다보더니 명함을 한 번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 오늘 지하에서 판촉 알바 하기로 한 분이시군요. 들어가셔도 됩니다.”
명함을 본 뒤 뒤늦게 정중한 태도로 입구를 터 주는 호텔 직원을 보며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댔다.
‘진짜 게임 12일 차까지 거렁뱅이 옷 입기 있냐고. 게임이니까 던전 공략하면 옷 좀 얻을 줄 알았더니 뭔 죄다 셀프야….’
호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화려한 행사장이 실비아를 반겼다. 천이 덮인 원형 테이블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여러 나이대의 귀족들이 속속들이 행사장에 들어와 앉기 시작했다.
단순 옥장판 판촉 행사장치곤 무척 화려한 그 모습에 실비아는 주눅이 들었다.
‘와, 1천 골드 때문에 눈이 뒤집혀서 온 건데, 좀 부담스러운데.’
“저기, 오늘 판촉 알바로 오신 실비아 양 맞으신가요?”
명함의 주인을 기다리며 입구에 서 있던 실비아는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고개를 끄덕이니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남자가 실비아를 안내했다. 그 뒤를 따라가니 소파에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고급양복을 걸친 붉은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한껏 나른하게 늘어진 채 다리를 꼬고 있는 그 남자는 붉은 머리에 금안, 실비아에게 데드엔딩을 안겨줬던 복어남이었다.
‘헉, 복어남.’
불행인지 다행인지 복어남은 실비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저희 사장님이십니다. 루카 님, 이분은 오늘 판촉 행사를 하러 온 실비아 양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알바 하러 온….”
“뭐야, 저 여자 옷이 저게 뭐야? 하!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냥 돌려보내. 저런 거렁뱅이 옷을 입고 어떻게 호구들 주머니를 털어?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복어남이 못마땅한 듯 헛웃음을 쳤다.
‘저게 미쳤나…. 말하는 꼬라지 봐.’
실비아가 속으로 쌍욕을 하는데 복어남 옆으로 다가간 중년의 남자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옷이야 여기 호텔 행사 홀에서 대여해 입으면 됩니다. 외모도 순진해 보이는 게 딱 저희 사업 콘셉트에 알맞지 않습니까? 사파이어 팀장이 부재중이라 인력이 필요합니다.”
“하, 참….”
“루카 님.”
중년의 남자가 걱정하는 눈빛으로 루카를 가만히 내려다보자 그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래. 안 그래도 젊은 피가 필요하긴 했지. 잠깐, 그러고 보니 너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화려한 금안을 살짝 찌푸린 채 실비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는 손가락을 딱-! 하고 부딪히더니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아, 이놈의 거렁뱅이 옷! 골목길에서 마주친 적 있지 않나?”
“글쎄요…. 기억이 안 난다만….”
실비아는 그를 만난 적 없다는 듯 얼굴을 뒤로 물려 이중턱을 만들며 시치미를 뗐다.
“그래?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하던 루카가 갑자기 실비아의 손을 덥석 잡더니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니 중년의 남자는 루카의 막무가내 행동이 익숙한지 가만히 서 있었다. 항상 지 성격대로 멋대로 살아온 듯했다.
‘아니, 이렇게 다짜고짜 손을 잡다니…. 나야 좋지만.’
싸가지 없는 것과는 별개로 화려한 외모의 미남과 손잡는 걸 싫어할 이윤 없었다.
그를 따라 계단을 몇 층 올라가자 화려한 홀이 나타났다. 연회나 기타 행사들을 하는 장소인 것 같았다. 구석에 있는 드레스룸까지 그녀를 데려간 루카가 문을 잠그더니 뒤돌아섰다. 룸 안엔 화려한 드레스들이 옷걸이에 잔뜩 걸려 있었다.
‘와, 보석 박힌 것 봐. 엄청 비싸겠다.’
드레스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루카가 실비아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혀를 쯧 찼다.
“나 원 참. 아무리 봐도 옷 꼴이 가관이네. 어디 동네 거렁뱅이도 아니고.”
‘저런….’
싸가지 한번 더럽게 없다.
루카의 말에 실비아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녀를 위아래로 건방지게 훑어보던 루카가 걸려있는 드레스들을 성의 없이 촤르륵 훑었다.
“실리아 씨, 알바 장소가 호텔인 거 알고도 그런 옷을 잘도 입고 왔네? 이거 다 대여복이니까 아무거나 골라 입어. 돈은 내가 낼 테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전 실리아가 아니라 실비아라고 해요.”
“아, 뭐가 됐든.”
루카는 성의 없이 손을 휘휘 젓더니 붉은색 벨벳 1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들은 이름조차 기억 못 하네.’
잠시 속으로 투덜댄 실비아는 자신의 옷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안 그래도 거렁뱅이 옷을 입고 판촉 알바를 하자니 좀 그랬다.
‘옷가게 먼저 들렀다 올걸.’
근데 왠지 가진 소지금을 다 털어서 옷을 샀어도 루카는 저 지랄을 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실비아는 루카의 건방진 말투에 좀 짜증이 났지만 생각 없이 후줄근한 옷을 입고 온 자신의 잘못이 있기에 순순히 옷걸이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와 눈 색에 어울릴만한 노란 개나리색의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를 골랐다. 가운데에 보석 브로치가 박혀 있어 고급스러우면서도 발랄한 옷이었다.
옷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자 의자에 앉아있던 루카가 눈동자만 옮겨 실비아를 노려봤다.
“그 옷, 입고 반납해야 되니까 몰래 입고 갈 생각하지 마.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서 갈아입어.”
“아니, 그게 무슨….”
루카의 말에 실비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노엘 앞에서 옷을 벗으라면 쌍수 들고 환영했겠지만, 제게 데드엔딩을 선사했던 공략 불가 캐릭터인 루카 앞에서 스트립쇼를 하고 싶진 않았다.
실비아가 망설이자 루카가 한쪽 입꼬릴 올려 비웃는 표정을 만들더니 빈정거렸다.
“부장이 2시간에 1천 골드로 공고를 올렸다고 들었다만? 그 돈을 그냥 날로 먹으려고 했나 봐. 돈도 없어 보이는데 어떤 딴 맘을 먹었을지 어떻게 알아? 녹음기나, 하다 못해 무기가 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해 봐야겠어.”
‘아오…. 의심만 많아가지고.’
사실 그녀로선 루카 앞에서 옷을 벗는 건 그다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옷을 벗어봤자 뭐 한단 말인가. 먹지도 못하는 미남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한다니, 그다지 내키지 않아 망설여졌다.
‘잠깐…. 아니지?’
그러고 보니 아까 루카의 손을 잡고 왔는데도 독에 중독되지 않았다. 조금 만지는 거 정도론 문제가 없는 것 아닐까? 대놓고 체액을 섭취하지만 않는다면 데드엔딩으로 가진 않을 듯했다.
‘공략 불가 캐릭터든 뭐든, 난 지금 19금 게임에 들어왔는데 아주 건전한 삶을 산 지 12일 차다. 더 이상 못 참겠어, 어떻게든 사리사욕을 채워야겠어.’
그러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실비아는 눈앞에 있는 싸가지는 없지만, 눈만 마주쳐도 절정에 이를 것 같은 얼굴의 루카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