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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20화 (20/372)

20화

‘체력이 120 이상이면 비밀상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었지….’

해안 동굴 9를 공략하고 나서 한숨 돌릴 겸 해변에 앉아 주먹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세비스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실비아 님, 내일은 쉬셔야겠어요.”

“응? 무슨 소리야. 난 하루도 쉬고 싶지 않아. 빨리 이 세계를 구해야 해.”

세비스의 말에 실비아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비스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음…. 그것도 좋지만 해안가엔 남아 있는 던전이 없는걸요? 새로운 던전을 찾으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러니 내일은 쉬셔야….”

“안 돼! 쉬고 싶지 않아!”

세비스는 제 주인의 엄청난 성실함에 놀라 버렸다. 절규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그녀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질 정도였다.

‘실비아 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하루쯤은 쉬어도 될 텐데.’

세비스는 실비아와 같이 지내면서 그녀가 점점 맘에 들었다. 잘 때마다 추울까 봐 걱정해주는 배려심, 요리를 해 주면 같이 설거지를 돕는 세심함, 그리고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성실함…. 몇 가지 오해가 있었지만 그가 진실을 알 길은 없었다.

세비스는 제 주인의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절실함에 저절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런 대단하신 분을 내가 모시고 있다.’

그는 감격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박동 소리에 미세하게 몸도 자라났으나 실비아는 절망하느라, 세비스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진짜 안 돼!”

세비스가 감동하는 사이, 바닥을 쾅쾅 내리치며 절규하던 실비아는 세비스를 돌아보며 애원했다.

“제발…. 난 정말 쉬고 싶지 않아. 던전이 없으면, 다른 일거리는 없을까? 신전은 주 4일만 나간다고.”

가슴에 손을 대고 가만히 감격에 젖어 있던 세비스는 그녀의 말에 눈을 번쩍 뜨곤 생각에 잠겼다.

“흠, 일거리라…. 아!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요.”

좋은 방법이 있다는 세비스의 말에 둘은 얼른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거의 경보하듯이 걸어 순식간에 오두막집에 도달했다. 세비스는 실비아를 집까지 데려다주자마자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며 모자를 쓰고 마을로 나갔다.

실비아는 내일 일을 못 하고 쉬게 될까 봐 불안함에 손톱을 물어뜯으며 세비스를 기다렸다.

‘한 번 더 쉬면 또 업보가 100 쌓인다. 100이 뭐야, 이 미친 게임은 가중처벌로 200을 줄지도 모른다고. 지옥에 가는 건 절대 사양이야.’

뒷짐을 지고 불안하게 방안을 돌아다니길 한참, 세비스가 종이 뭉치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실비아 님! 이걸 같이 읽어 봐요.”

“그게 뭔데?”

“엘리셔스 제국 일보요! 여기서 구인광고란을 보면 내일 할 수 있는 당일 알바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게임에 빙의한 지 11일째, 그녀는 드디어 제국의 이름을 알았다.

엘리셔스 제국.

종이 뭉치는 현실 세계의 벼X시장 같은 광고들이 잔뜩 실린 신문이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에 주저앉은 둘은 펜을 들고 신문지를 열심히 읽어 내렸다.

“경호 알바…, 보석 가게 판매원, 식당 서빙…. 이런 것들은 지금 못 하는데. 딱 하루만 하는 알바를 찾아봐야 해. 거기다가 내일 당장 할 수 있는 거.”

“그러게요, 당일 알바가 잘 안 보이네요.”

신문지를 뒤적거리던 실비아는 광고 하나를 발견하곤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새우잡이 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천 골드? 와, 대박이네. 이건 신전 알바 때려치우고 나면 한번 해 보고 싶다. 줄 쳐 놔야지.”

실비아가 신이 나서 광고지에 펜으로 줄을 박박 긋자 옆에서 지켜보던 세비스가 턱을 만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새우잡이 배라, 뭔가 좀 불길한데요.”

“돈을 많이 준다는데 따질 게 뭐가 있어. 잘하면 공짜 새우도 몇 마리 얻어 올 수 있고 말야.”

“음….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에이, 괜찮아.”

세비스의 만류에도 실비아는 ‘새우잡이 배’ 구인 광고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결국 가위로 그 부분만 오려 서랍장에 고이 넣어놨다.

그 모습을 본 세비스는 잠시 한숨을 쉬었으나 이내 다시 신문을 펼쳐 들었다. 실비아도 당장 내일 할 알바를 찾으려고 다시 신문을 팔랑였다. 그때 신문을 앞뒤로 뒤적이던 세비스가 얼굴에 화색을 띠고 광고 하나를 가리켰다.

“인형 눈알 붙이기 알바, 당일 당장 가능. 이건 어때요?”

“음…. 인형 열 개당 1골드…. 그럼 백 개면 10골드…. 하루에 천 개면 100골드….”

인형 눈알 붙이기는 가내수공업이기에 재택근무 느낌도 나고 나쁘지 않았지만 이미 던전의 돈맛을 본 실비아는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그때 실비아의 눈에 딱 맞는 알바가 들어왔다.

“옥장판 판촉 알바, 유창한 말발 필수. 당일 당장 가능. 2시간에 1천 골드? 1천 골드? 대박이다. 오, 이거 좋다.”

“2시간에 1천 골드요? 단순 판촉 알바가요? 수상해요.”

세비스가 눈을 찌푸리며 의심하자 실비아가 손가락을 들어 아니라는 듯 까딱거렸다.

“아냐, 세비스. 이제 곧 여름이잖아. 원래 여름에는 겨울에 필요한 이월상품을 싸게 파는 행사가 가끔 열린다고. 장사가 잘돼서 인력이 필요한 게 틀림없어. 뭐, 여차하면 뚝배기 갈기고 도망치면 되고…. 어쨌든 이걸 해야겠어. 그리고 인형 눈알 붙이기도 한다고 해 놔. 이 알바 뛰고 와서 인형 눈알 붙이면 딱 되겠다.”

화술을 많이 올린 실비아는 게임 속에서만큼은 신들린 듯이 말할 자신이 있었다.

실비아의 자신 있는 얼굴에 세비스는 걱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전서구로 내일 당장 알바를 하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당일 알바를 찾는 동안 저녁 시간이 돼서 세비스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으로 음식을 만들러 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비스 키가 원래 저만했었나?’

어쩐지 세비스의 키가 처음보다 커진 것 같았다.

실비아는 주방으로 가 야채를 다듬고 있는 세비스를 불렀다.

“세비스, 잠깐 이리로 와 봐.”

“왜요?”

“잠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세비스가 손을 닦고 다가오자 그녀가 성큼 그의 앞에 섰다. 붉은 눈이 움찔하고 떨리는 순간 실비아는 아무렇지 않게 세비스를 돌려세우곤 등을 맞댔다. 키를 재보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처음보다 컸어.’

처음엔 저랑 비슷했던 거 같은데 어느새 손톱만큼 위로 자라 있었다.

실비아가 등을 맞댄 상태로 검은 머리를 쓰다듬자 세비스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염소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키…, 키 재려고 그러시는 거구나. 전 또 뭔가 했어요….”

“세비스, 너 점점 자라고 있구나. 성체가 갑자기 되는 게 아닌가 봐?”

“글쎄요, 저희 일족은… 설명하긴 복잡하지만 각성 의식으로 한 번에 자라나거든요. 자연적으로 성체가 되는 모습은 저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음, 아무래도 자라고 있는 거겠죠?”

세비스의 말에 실비아는 닿아있던 몸을 물리곤 한숨을 쉬었다.

“세비스, 난 네가 빨리 성체가 됐으면 좋겠다….”

뒷짐을 지며 먼 곳을 바라보듯 아련해진 실비아의 눈빛에 세비스가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 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성체가 안 돼도 이렇게 씩씩하게 주인님을 돕고 있잖아요! 그리고 성체가 되면 생활비도 더 들 텐데요. 먹는 양이 늘어나서….”

“아니! 꼭 성체가 됐으면 좋겠어….”

“주인님….”

“너는 너만 생각해 세비스. 꼭… 꼭 성체가 되도록….”

실비아의 진심 어린 말에 세비스가 또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체가 돼야… 휴. 아니다. 나만 변태지, 또….’

점점 세비스와 친해지다 보니 그가 성체가 되어 이것저것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던 실비아의 마음이 흔들렸다. 매일같이 보다 보니 그가 게임 캐릭터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느껴져서 공략할 생각뿐인 자신이 변태가 된 거 같은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실비아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이마를 탁탁 치며 정리했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다면 뭐든 공략해야만 한다. 이건 지옥을 안 가기 위해서야. 그리고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내가 변태라서가 아냐.’

세비스는 이마를 치며 진지하게 고찰하는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키가 자란 게 실비아랑 관련이 있는 것일까. 등이 맞닿았을 땐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었다.

‘예상보다 성체가 빨리 되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세비스는 그러나 다시 풀이 죽었다. 그는 실비아를 데려다줬던 레몬 빛 금발 머리의 신관을 떠올렸다.

노엘이라고 했었나. 신관이니 여자를 가까이하진 않겠지만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실비아와 노엘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의 심장이 어쩐지 쿵- 하고 내려앉았었다.

그녀와 자신은 주인과 집사일 뿐, 어떤 관계도 아닌데 실비아가 들어온 뒤엔 저도 모르게 조심하라고 과한 충고도 하지 않았던가.

갈색 머리의 실비아와 레몬 빛 금발 머리의 노엘, 그 둘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같이 잘 어울렸었다.

‘실비아 님과 내가 같이 서 있으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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