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러나 감동한 것과 별개로 세비스는 여전히 찬 바닥에서 잤다.
실비아는 괜스레 허전한 옆구리를 만지며 혼잣말을 했다.
“아우, 추워. 옆에 인형 같은 거라도 있으면 참 좋겠다. 사람이면 더 좋고….”
“잘 자요, 실비아 님.”
‘휴…. 망할 게임.’
어찌 보면 자신은 정말 성실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냉대에 실망하면서도 공략 캐릭터인가 싶어 끊임없이 세비스를 찔러보고 있었으니까.
현실에서라면 거절하는 남자에게 계속 추잡스럽게 접근할 일이 없었겠지만, 여긴 19금 게임. 게다가 세비스가 성체가 될 수도 있다니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실비아는 짐짓 추운 척 헛기침을 하며 오돌오돌 떠는 모션을 취했다.
“아우…. 혼자 자는 건 정말 싫어….”
그러자 그녀의 말을 들은 듯 바닥에 누워있던 세비스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혹시?’
기대하기도 잠시, 꿈도 꾸지 말라는 듯 그가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게 아닌가.
‘저런…. 그럼 그렇지, 뭘 바란담.’
계속 거절당하니까 변태 아재가 된 거 같아 실비아는 기분이 팍 상한 상태로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신전에 가 보니 노엘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신관에게 물어보니 급하게 출장을 갔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설마 날 피하는 건 아니겠지.’
골똘히 생각하던 실비아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자신도 모르게 공략 캐릭터를 현실 속의 인간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게임의 스토리대로 행동한 거겠지.’
노엘이 없다고 해서 신전 알바를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실비아는 노엘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신전 알바와 길거리 전도 알바에 열중하기로 했다.
게임 7일 차, 신전 알바를 일찍 마친 실비아는 거리로 나와 제국민들을 현혹하려 시도했다. 그녀는 간드러지게 미소 지으며 순하게 생긴 제국민의 앞을 막았다.
“저기, 맑은 기운이 흐르시는….”
“안 사요.”
‘어?’
단호하게 손을 들어 그녀를 막고 제 갈 길을 떠나는 제국민을 보는 실비아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길거리에서 말을 거는 사람을 따라가면 전도를 당한다고 소문이 난 게 분명했다.
‘미친 듯이 싸돌아다니며 전도했으니 당연한 건가.’
길거리 전도는 점차 제국민들이 면역력이 생겨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실비아는 괘념치 않고 거리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아직 길거리 전도를 경험하지 못한 제국민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3일 동안 돌아다니자 노력의 성과가 있었는지 실비아의 신앙심은 총 200, 화술은 아쉽게도 첫날에만 빨리 올랐던 것인지 300이 되었다.
게임 9일 차, 화술이 300이 되자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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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놀라운 말발. 왕년에 입 좀 털어보셨군요? 화술 300 달성으로 스킬 <헛소리를 진지하게>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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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게 뭘까.’
실비아는 스킬 창을 열어 획득한 스킬을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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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를 진지하게
- 스킬 시전 시 아무리 헛소리라도 진지하고 설득력 있게 들리는 마법의 스킬. 같은 캐릭터에게 여러 번 쓸 시엔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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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스킬 같다. 화술이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선택지가 고급화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미친 선택지가 간간이 껴 있지만 정상적인 선택지도 있어서 데드엔딩에 이르진 않았다.
거기다가 자유도도 올라간 건지 저번 우물가에선 선택지가 한 번도 안 뜨지 않았던가.
너무 나대다가 천벌을 받을 뻔했지만….
아무튼, 지금 이 스킬은 노엘과 다른 공략 캐릭터들에게 써먹기 좋을 듯했다.
그때 새로 획득한 스킬 창을 보고 있는 실비아에게 늙은 신관이 다가왔다. 신관을 본 실비아가 꾸벅 인사를 하곤 차렷 자세를 했다.
“실비아 님! 오늘도 열심히 하고 계시군요.”
“아아, 네. 에효, 처음이랑 달리 제국민들이 눈치가 생겨서 전도하기가 힘드네요.”
“아닙니다.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사실 실비아 님의 전도 실력을 보고 탄복했습니다. 이런 대단한 분은 저희 신전 역사상 없었어요!”
“과찬입니다.”
“허허, 겸손하시기까지. 실비아 님의 괄목할 만한 전도 실력을 치하하고자 대사제님이 실비아 님께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번쩍이는 황금색 상자를 신관이 건네주었다. 딱 봐도 뭔가 좋은 아이템이 들어 있을 법한 상자였다.
‘오, 뭐지?’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실비아는 신관이 건네준 상자를 조심히 열어 보았다. 찬란한 빛과 함께 효과음이 울리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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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제의 금팔찌
- 길거리 전도를 뛰어난 업적으로 완수 시 받을 수 있는 팔찌.
착용 시 화술 +50, 신앙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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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아이템이다. 실비아는 황송해하며 얼른 팔찌를 착용해 보았다. 상태 창을 확인해 보니 신앙심이 200(+100), 화술이 300(+50)으로 올라가 있었다. 그 순간 찌잉- 하고 실비아의 가슴에서 정체 모를 감정이 올라왔다. 신앙심이 올라가서 그런지 아직 어떤 신인지도 모르지만 그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것까지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실비아가 두 손을 모은 채 감격에 젖어있자 노신관이 손사래를 치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덕택에 유례없이 신전이 북적이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멀어지는 늙은 신관을 바라보던 실비아는 착용한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아이템들과 다르게 팔찌는 게임 속 캐릭터가 준 아이템이라서 그런지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템으로 한 방에 신앙심이 100이나 올라가다니, 조만간 노엘을 공략해도 천벌이 안 내리는 경지에 도달하겠는걸?’
어느새 노을이 지고 퇴근할 시간이 됐다. 실비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을 향해 걸었다.
‘오늘 저녁은 뭘까, 세비스가 뭘 해 놨을까!’
“랄라라.”
차랑차랑- 팔찌가 흔들리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신나게 춤을 추며 스텝을 밟는데 불쾌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어이!”
오랜만에 건방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그 뚱땡인가? 저번에 꿀밤을 먹여서 쫓아낸 거로는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실비아는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이번엔 문신뚱땡이가 아니라 멸치양아치였다. 사마귀같이 생긴 멸치는 쭉 찢어진 눈으로 실비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 말하는 건가?”
“그래, 저번에 우리 죄 없는 아우한테 꿀밤을 먹였다고 들었다만?”
죄가 없다니. 실비아는 코웃음 쳤다. 지름길에서 통행세를 불법으로 받고 있었으면서!
“그건 그 문신뚱… 그 사람이 불합리하게 통행세를 요구했기 때문이야.”
“허, 참. 우리 아우는 당연한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지름길 통행세는 몇 년간 지속적으로 걷어오고 있었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몇 년간 불법을 자행한다고 해서 그게 합법이 되지는 않는 법.
‘이놈에게도 꿀밤 맛을 보여 줘야겠군.’
실비아는 주먹을 쥐곤 하- 하고 입김을 불어 넣는 모션을 취했다. 그사이 멸치가 건들거리며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아우야 쉽게 당했다만, 난 쉽지 않을걸!”
“긴말 말고 받아랏, <뚝배기 깨기>!”
실비아는 멸치랑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주먹으로 머리통을 갈겨버렸다.
깡!
“억!”
몸에 비해 큰 가분수 머리통에 꿀밤을 선사하자 멸치가 비틀거렸다. 스킬 <뚝배기 깨기>는 맨손으로 하면 <전의 상실> 효과가 있을 뿐 살생을 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깡 깡 깡 깡 깡! 한 번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연속 꿀밤을 먹여 주자 멸치도 역시나 문신뚱땡이처럼 비틀거리더니 손사래를 치고 도망쳐 버렸다.
“너, 너! 두고 보자. 형님에게 이를 거야!”
“짜식이 말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내 눈에 띄기만 해 봐라!”
실비아는 손을 탈탈 털며 멀어져 가는 멸치에게 경고를 날렸다.
실비아의 용감한 모습에 옆을 지나가던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허리를 쫙 펴더니 박수를 짝짝 치며 환호성을 보냈다.
“이야! 멋지구만!”
실비아는 정중하게 환호성에 화답하려고 없는 모자를 벗는 제스처를 취하곤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는 크으- 하면서 엄지를 추켜올리곤 유유히 사라졌다.
‘꿀밤 몇 방에 나가떨어질 거면서 왜 찾아오는 거야.’
실비아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멸치의 마지막 말이 조금 걸렸다. 형님에게 이른다고? 저렇게 순서대로 차근차근 찾아오다가 나중에는 보스가 오는 거 아닐까? 실비아는 그에 대비해 열심히 힘을 기르기로 결심했다.
골목길을 벗어나 대로로 들어설 때쯤 짜란! 하며 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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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양아치를 물리쳐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 세간의 평가가 <거렁뱅이>에서 <정의로운 거렁뱅이>로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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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렁뱅이인 건 똑같잖아.
그러나 메시지가 뜨고 나서부터 시민들이 간간이 실비아를 존경의 눈길로 쳐다보며 쑥덕댔다.
‘저 사람이 그….’
‘꿀밤쟁이….’
시민들의 숙덕거림이 실비아에게도 전해졌다. 그녀는 태연한 척 거리를 걸어갔으나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뭐, 그래도 기분은 좋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법이니까. 실비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 * *
주 4일의 신전 알바가 끝나고 휴일의 시작인 금요일이 찾아왔다. 실비아는 세비스에게 말했던 결심을 지키기 위해 쉬는 날이 되자마자 그와 함께 바닷가의 던전을 돌았다.
이미 공략한 던전들은 리젠이 되지 않는 건지 빈 게 껍질만 가득했기에 새로운 던전을 계속 찾아야 했다.
해안 동굴 6, 7, 8, 9는 묘하게 숫자 순대로 조금씩 강해졌지만 실비아의 레벨도 그만큼 올랐기에 어찌저찌 공략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점점 공략 시간이 늘어나서 해안 동굴 6, 7, 8, 9를 모두 공략하는 데 이틀이나 걸렸다.
게임 11일 차인 토요일, 해안 동굴 9까지 공략하고 나니 드디어 실비아의 레벨이 20이 되었다. 새로 생겨난 25의 분배 포인트를 적절히 분배하자 체력이 130, 힘이 70, 민첩이 30이 되었다. 지력에 너무 신경을 안 쓴 것 같아 5 포인트를 분배해 15의 지력을 가지게 됐다.
‘드디어 레벨 20. 점점 레벨 업 속도가 느려지긴 하네. 난이도가 더 높은 던전을 찾아야 하나.’
아마 이번에 구슬을 팔고 나면 가진 돈도 1만 골드를 넘어가게 될 터였다. 슬슬 비밀상점을 가 봐도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