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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18화 (18/372)

18화

속옷을 눈앞에 디밀자마자 노엘이 고개를 휙 반대편으로 돌리더니 기가 찬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젖은 속옷을 보니까 또 섰기 때문이다.

이미 천벌 루트 메시지를 본 후 음란함을 담당하는 뇌가 활동 정지된 실비아는 노엘의 반응을 자신이 이것저것 부탁해서 화가 난 거라 판단했다.

‘아, 너무 이것저것 부탁했나…. 휴.’

노엘은 머리통을 부여잡더니 거칠게 머리를 털어댔다. 실비아의 눈에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좀 다혈질 성향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저기… 서랍에 보면 주머니가 있어요. 거기 담으시면 됩니다.”

“네….”

노엘의 말을 따라 서랍에서 꺼낸 주머니에 속옷을 챙겨 넣고 뻘쭘하게 서 있던 실비아는 여전히 구석에서 붉어진 얼굴을 감싸 쥔 채 뒤돌아있는 노엘을 바라보았다.

“곤란하셨을 텐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 오늘은 그만 가 볼게요.”

그 말에 노엘이 뒤를 돌아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헐렁한 옷 위로 얼핏 속옷을 걸치지 않은 가슴의 윤곽이 드러나 너무 야했다. 그는 실비아의 가슴으로 가려는 시선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막아 냈다.

노엘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신관인 자신이 이러면 안 되는데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고 거칠게 가슴을 움켜쥐는 상상이 계속 떠올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신관인 나도 세워버리는 실비아 님인데, 저 상태로 집에 가다가 못된 남자들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실비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서 인사하자 노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휴… 실비아 님, 잠깐만요.”

노엘은 실비아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실비아를 자신의 앞에 태운 노엘이 말을 몰았다. 거리를 지나자 지평선 너머로 붉은 석양이 그들을 반겼다.

노엘이 건네준 망토를 걸친 실비아는 옆으로 앉은 채 너른 가슴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기댔다. 물론 천벌 루트를 본 뒤라서 음흉한 마음은 없었고 단지 흔들리는 말 위에서 안정감을 찾기 위한 순수한 의도였다.

그녀가 고개를 기대자 잠시 움찔했던 노엘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곤 다시 말을 몰았다.

실비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노브라로 어떻게 집까지 갈까 막막했는데 노엘이 데려다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화가 난 건 아닌 모양이야.’

머리에 닿은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에 그녀는 잠시 설렜지만 싸늘한 데드엔딩 예고장을 떠올리며 진정했다.

“워워….”

목적지에 도달하자 노엘이 말을 멈춰 세웠다. 말을 타니 걸어서 신전에 갈 때와 비교할 수 없게 빨리 도착했다. 실비아는 탈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것을 구할 순 없을까.’

예전에 하던 어떤 게임은 탈것이 지천에 널려 있어서 올라타는 키를 누르기만 해도 탈것을 가질 수 있었다. 말에 올라타 있다가 버그 때문인지 다른 유저한테 PK를 당해서 아이템을 다 털리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았지만 말이다.

잡생각을 잠시 한 실비아는 노엘의 부축을 받아 말에서 내려왔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실비아는 노엘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노엘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하는 와중에 갑자기 오두막집의 문이 왈칵 열리더니 세비스가 튀어나왔다.

“실비아 님! 오늘 저녁은 게살볶…. 이분은 누구세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문을 열고 나온 세비스가 실비아를 반기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노엘을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얀 말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던 노엘도 세비스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실비아 님, 혼자 사시는 게 아니었군요.”

노엘의 말에 실비아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자칫 잘못하면 공략에 차질이 생길 상황이었다.

‘엇, 안 돼. 누더기옷을 입고 집사라고 소개해 봤자 믿지도 않을 테고. 잘못하다간 임자 있는 여자가 될 판인데, 이거.’

공략 캐릭터임이 분명한 노엘이냐, 공략 캐릭터인지 뭔지 모를 성체도 안 된 집사냐.

데굴데굴 머리를 굴린 실비아는 급하게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태연한 척 세비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실비아가 환하게 웃었다.

“아…, 네. 얘는… 얘는 제 조카예요.”

“??”

세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해명을 요구했지만 당장 눈앞의 공략 캐릭터가 더 중요했던 실비아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조카요? 귀가….”

노엘이 세비스의 귀를 응시하며 물었다. 실비아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황급히 대꾸했다.

“아하! 귀는… 귀는…. 세비스, 코스프레 좀 작작 하라고 했지?”

“코스프레가 뭔가요?”

“그런 게 있어! 숙제나 해. 빨리 들어가!”

얼렁뚱땅 임기응변을 한 뒤 급하게 세비스를 들여보낸 실비아는 노엘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좀 무리수였던 것 같다. 세비스는 조카로 보일 정도로 어리게 생기진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다. 차라리 동생이라고 할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해 봤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실비아가 등 뒤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노엘이 입을 열었다.

“수인족이랑 같이 사시는군요. 당연히 조카는 아닐 테죠.”

애석하게도 변명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침착한 노엘의 표정에 실비아는 괜히 생쇼를 했단 걸 깨달았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한 물에 샤워하세요.’라고 말하곤 말을 타고 돌아갔다. 그의 아무렇지 않은 반응에 실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나 혼자 오버했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비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실비아를 맞이했다.

“저보고 조카라뇨? 저 남잔 누구예요?”

실비아는 세비스를 달래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세비스는 아직 공략 캐릭터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단순히 귀여운 집사일 뿐이었지만. 얘도 혹시 모르니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실비아는 어색하게 미소 짓곤 입을 열었다.

“저분은 신관 노엘 님이야. 오늘 일하다가 옷이 좀 젖는 바람에 날 데려다주셨….”

“헉! 그러고 보니 누더기옷은 어딜 가고 웬 남자 옷을 걸치고 계신 거죠? 저 남자 옷이에요?”

뒤늦게 실비아의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비스의 눈꼬리가 위로 팍 치켜 올라갔다. 얼굴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실비아는 어쩐지 곤란한 느낌에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응, 내 옷은 젖어서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어.”

“저를 조카라고 소개한 이유는요?”

“그건, 어, 오해할 수 있으니까. 이미 결혼이라도 한 줄 오해하면 곤란하지.”

“그게 왜 곤란해요?”

“그건….”

‘눈꼬리 표독스럽게 뜬 거 봐…. 왜 저런담.’

대화의 흐름이 어쩐지 이상했다. 마누라한테 추궁당하는 바람피운 남편이 된 기분에 실비아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좀 그냥 넘어가라….’

세비스는 툴툴대면서도 실비아를 주방으로 불렀다.

식탁 위엔 퇴근 시간에 맞춰 준비한 듯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게살볶음밥이 세팅되어 있었다. 볶음밥 위에 올려진 반숙 계란프라이를 살짝 깨서 비벼 먹자 중국집에서나 맛볼 수 있는 불맛이 올라왔다. 그녀는 세비스의 요리 실력에 한 번 더 감탄했다.

“오, 세비스. 볶음밥도 잘 하….”

“왜 곤란한지 말하지 않으셨어요.”

세비스가 단호한 표정으로 식탁 위에 팔을 얹곤 손깍지를 꼈다. 먹다가 사레가 들릴 뻔한 그녀는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휴… 그건. 사회생활을 아직 안 해봐서 네가 모르는 거야, 세비스. 나 때는 말이야….”

화술을 올린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실비아는 자연스럽게 꼰대 스킬을 시전 하며 세비스의 주의력을 흐트러트렸다. 역시나 세비스는 사회생활의 복잡함에 대한 그녀의 일장 연설을 듣다가 한숨을 푹 쉬며 치켜 올라갔던 눈꼬릴 내렸다.

“실비아 님, 남자는 다 짐승이에요. 위험하니까 함부로 낯선 사람을 집까지 데려오고 그러면 안 돼요. 아시겠죠?”

‘수인이면 얘도 짐승 아닌가.’

잠시 잡생각을 한 실비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 아니다. 알겠어, 세비스.”

‘위험한 남자 좀 제발 만나고 싶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 게임에서 제일 위험한 인물은 나야….’

실비아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고 겉으론 고개를 끄덕였다.

세비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스푼을 들어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이제 끝난 건가.’

실비아도 눈치를 보며 스푼을 들었다. 그런데 불맛 나는 게살볶음밥을 먹고 있으려니 유황불 냄새가 풀풀 풍기던 아침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업보가 100이나 올라가 버린 끔찍한 기억.

“세비스, 신전 알바는 주 4일을 하니 나머지 날은 다 던전을 돌자.”

“어…. 하루쯤은 쉬시지 그래요? 몸살이 나셨던 걸 보니 하루는 쉬셔야 할 거 같은데.”

“휴… 그러게…. 아니, 아냐.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서 내 의무를 다해야지.”

하루는 쉬어야 된단 말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했던 실비아는 다시 정정했다. 쉬고 싶어도 게임이 못 쉬게 하는 걸 어쩐단 말인가.

‘휴. 나도 쉬고 싶다, 정말.’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세비스가 눈을 울멍울멍 뜨더니 양손을 고이 모았다.

“실비아 님…. 정말 감동이에요. 실비아 님같이 성실한 분을 모시게 돼서 전 정말 행복해요.”

세비스가 감동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살짝 찔렸지만 티를 내지 않고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루 쉬는 순간 업보가 쌓이니 지옥에 가기 싫으면 일해야 한다.’

설거지 담당인 실비아는 제 할 일을 끝내고 깨끗하게 샤워를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오니 세비스가 이부자리를 펴고 있었다.

‘아까 분위기를 보니, 혹시 오늘은 침대에서 같이 잘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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