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실비아는 어디에다가 표출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를 이글이글 불태우며 신전을 향해 경보했다.
지름길을 지나칠 무렵 껄렁거리며 한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던 문신뚱땡이가 실비아를 불러 세웠다.
“어이, 거렁뱅이. 통행세 내고 가야지?”
‘기분 안 좋은데 성질 건드리네.’
그녀가 우뚝 선 채 대꾸하지 않고 노려보자 문신뚱땡이가 껌을 짝짝 씹으며 다가왔다.
“이것 봐라? 통행세 내란 말 못 들었냐, 귀먹었어?”
“후….”
실비아는 사실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문신뚱땡이를 떠올렸다.
‘새로 획득한 망치 전사의 기본 스킬인 뚝배기 깨기라면… 이놈을 물리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첫날과는 달리 레벨이 낮아서 물리치기 힘들다는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왠지 가능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실비아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며 가만히 서 있으니 화가 난 뚱땡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실비아의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밀며 이죽거렸다.
“귀먹었냐고! 어? 야!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내놔!”
“그냥 넘어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실비아는 입꼬릴 삐죽하게 올리며 뚱땡이를 노려봤다. 애초부터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소설이나 웹툰에서 본 멋진 대사를 한 번쯤 실제로 써 보고 싶었다.
‘뚝배기 깨기’
깡!
실비아는 속으로 스킬 명을 말한 뒤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문신뚱땡이가 알아챌 틈도 없이 꿀밤을 갈겨 버렸다.
“억?”
잠시 비틀대던 문신뚱땡이가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실비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뚱땡이의 귀에 속삭였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깡 깡! 실비아는 뒷걸음질 치는 뚱땡이를 따라가며 연속으로 꿀밤을 자비 없이 갈겨 버렸다. 몇 번 연거푸 갈기자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스킬 <뚝배기 깨기>의 상태 이상 <전의 상실>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역시! 맨손으로 갈겨 버리니 몬스터가 아닌 이런 찌끄레기 악역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메시지가 뜨고 난 후 문신뚱땡이는 자신감을 잃은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으으… 죄송… 죄송합니다!”
전의를 상실한 문신뚱땡이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실비아에게 배꼽 인사를 하더니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가 버렸다.
“콱, 마…. 더 때려 버릴라다가 참았다.”
실비아는 도망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탁탁 털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캬, 이 맛에 게임 하지.’
현실이면 경찰에 신고하면 그만이지만, 이 세계에선 제 손으로 혼내 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더욱 강해져서 버릇없는 놈들을 다 혼내주고 싶어진 실비아는 신전으로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신전 안은 드나드는 이 없이 조용했다. 실비아는 실망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노엘 님은 아직 안 왔나?’
대강당에 갔다가 정원에도 가봤지만 노엘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감에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 대강당의 쪽문으로 돌아갔는데, 마침 중앙 문을 열고 들어서는 노엘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침 햇살을 배경으로 성스러운 얼굴이 신전 입구에서 나타나자 어두웠던 신전의 명도가 올라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갑작스럽게 맞닥트린 실비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비명을 삼켰다.
‘크악…. 갑자기 미남을 봤더니 눈이 아려.’
레몬 빛 금발 머리를 찰랑거리며 나타난 노엘은 차분한 몸짓으로 문을 닫고 돌아서다가 실비아를 발견하곤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오셨군요!”
“아… 안녕하세요. 노엘 님.”
자신을 반기는 노엘의 은혜로운 미소에 실비아는 남아있던 분노와 울분이 사르륵 사라지는 걸 느꼈다. 노엘의 미소에 힘입은 실비아가 청소를 시작하려고 청소도구함으로 걸어가자 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번에 길거리 전도를 잘해주셔서 신도가 많이 늘었습니다. 모두 실비아 님 덕분이에요.”
“아, 뭘요. 저한테도 도움이 됐는걸요.”
‘화술도 올리고 돈도 벌었으니 개꿀알바지 뭐.’
실비아는 대답을 하며 청소도구함을 열었다. 그런데 그녀가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를 꺼내자마자 노엘이 다가와 그녀의 손에서 빗자루를 부드럽게 뺏어가더니 다시 청소도구함에 넣어버리는 게 아닌가.
‘뭐야, 설마 청소 말고 다른 좋은 짓을 하자고 하려나.’
19금 게임에 대한 기대를 아직 버리지 못한 실비아가 망상에 빠져 있는 와중에 노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대강당 청소는 새로 온 신도들이 봉사해 주실 겁니다. 그러니 대강당은 청소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요? 그럼 저는 뭘 하죠?”
아니. 새로 온 신도들에게 청소를 시켜도 되는 건가.
실비아는 이 신전의 정체성에 대해서 잠시 의구심을 품었지만 노엘의 이어지는 말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실비아 님은 저랑 같이 도서관 정리를 하시면 됩니다.”
“아아… 좋네요.”
좋다, 아주 좋다. 둘이서 도서관을 청소한다니. 도서관이야말로 여타 게임에서 섬싱이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장소가 아닌가.
실비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탈탈 털었다. 그러자 노엘이 앞머리를 살짝 넘기며 상큼한 미소를 짓곤 몸을 돌렸다.
“그럼 가실까요?”
“네!”
실비아는 노엘을 따라 밖이 훤히 보이는 개방형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 도달한 노엘이 커다랗고 무거운 문을 열자 돔형 구조의 도서관이 나타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도서관은 신관들과 일부 신도들만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는 건가? 둘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실비아는 도서관 안을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다 훑어봤지만 그들이 첫 입장객이었는지 실비아의 바람대로 도서관엔 노엘과 그녀 둘뿐 다른 이는 없었다.
대박. 하늘이 날 돕는군.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오해한 노엘은 부드럽게 입꼬릴 올렸다.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가끔 읽으러 오셔도 됩니다.”
책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를 좋아하는 거다. 실비아는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 뭐 그런 셈이죠. 근데 책은 일부 신도들만 읽을 수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 그건. 모두에게 개방하면 도서관리가 어려워서요. 실비아 님은 저희 신전을 앞으로도 잘 도와주실 테니까 괜찮습니다.”
‘흠, 노엘을 공략하고 나서도 도와줘야 되는 건가. 하고 나면 밖에서 따로 만나면 될 텐데. 아니다….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
실비아는 노엘과 함께 서고 정리에 나섰다. 정리하면서 얼핏 살펴본 책들은 한국어는 아니었지만 플레이어 버프인지 다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서고 정리를 하는 동안 신앙심이 착실하게 올라갔다. 띠링- 띠링- 효과음들과 함께 올라가는 신앙심 수치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 이게 뭐야.’
한참 서고 정리를 하던 실비아의 눈에 이색적인 장소가 들어왔다.
도서관 중앙엔 대강당에서 봤던 신의 문양이 크게 조각되어 있는 조그만 기도 대가 있었다. 돔형의 도서관 천장은 유리로 되어있어서 밝은 햇살이 도서관 내부를 아름답게 비췄다.
‘이 신전의 신은 날 게임 속으로 데려온 그 남신일까? 아니면 다른 신일까….’
실비아가 정리를 잠시 멈추고 신의 문양을 가만히 바라보자 노엘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책을 읽다 보면 기도를 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어서요. 그래서 기도 대를 설치해 놨습니다.”
“아… 예.”
기도를 하고 싶은 충동이라니.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봤다. 이렇게 신한테 진심이어서야…. 어느 세월에 공략할지 암담해져 왔다.
실비아가 그런 걱정을 하는 와중에 노엘이 단상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노엘의 호감을 사보자.
1.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한다.
2. 뒤로 바짝 다가서서 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3. 빽허그 한 뒤 탄탄한 가슴을 움켜쥔다.]
‘이런 미친.’
실비아는 이제 이 게임이 다른 19금 게임과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단 걸 알고 있었다. 2, 3번을 했다간 바로 데드엔딩 행…. 그래도 화술을 좀 찍어서 정상적인 선택지가 껴 있는 게 다행이었다.
곧이어 실비아는 1번을 택하곤 노엘 옆에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눈을 감은 그녀는 처음엔 좀이 쑤셔서 꿈틀거렸으나 곧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게 됐다.
‘신이시여…. 제발 노엘 좀 하루빨리 따먹게 해 주시고, 세비스가 순식간에 성체가 되게 해 주시며, 독이 든 빨강머리의 독을 제거할 방법을 찾게 해 주소서. 그리고 다음번 공략 캐릭터는 좀 쉬운 남자로 부탁하나이다….’
그녀가 진땀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도를 드리자 마치 신이 화답하는 양 밝은 햇살이 둘을 비췄고 곧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실비아의 진심 어린 기도를 지켜본 노엘의 호감도가 10 상승하였습니다.]
오, 좋아.
이제 노엘의 호감도는 20, 그래도 터무니없이 낮은 수치였다. 역시 한동안은 신전 알바를 해야 공략에 가까워지려나.
호감도가 올라가서 그런지 기도를 마친 노엘이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자매님은 참 신실하시군요. 기도를 열심히 하셔서 이마에 땀이 다 맺혔어요.”
“진심을 다해서 기도했을 뿐입니다….”
실비아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짐짓 순수해 보이게 미소지었다. 따뜻하게 바라보는 초록색 눈에 실비아는 잠시 뜨끔했지만 진심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아우, 더워.’
서고 정리도 열심히 했고 특히 기도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지 온몸에서 땀이 진득하게 배어 나와 찝찝했다. 실비아가 한구석에 비치되어 있던 길거리 전도용 전단지 뭉치를 잡아 펄럭펄럭 부채질하며 땀을 식히자 노엘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땀이 많이 나신 것 같아요. 정원 구석에 우물이 있으니 거기서 손이라도 씻을까요?”
“아,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