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13화 (13/372)

13화

실비아는 이젠 말할 힘도 없다는 듯 고개만 느리게 끄덕였다. 병원을 가면 꾀병인 게 바로 들킬 텐데,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실비아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겨우 올려 X 표시를 하자 세비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럼 저는 구슬들을 팔러 마을 거래소에 갔다 올게요. 실비아 님…. 몸이 완전히 삭아 버린 것 같은데….”

그녀의 혼신의 연기가 통했는지 - 이 정도로 했으면 통해야 한다. - 세비스의 눈망울이 곧 울 것처럼 촉촉해졌다. 그는 임종을 앞둔 할머니를 보살피는 손자처럼 조심스럽게 실비아를 눕히고 이불을 토닥여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던전에서 획득한 게살로 죽을 끓여 식탁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도 실비아를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실비아는 잠시 죄책감이 들었지만 정말 하루는 쉬고 싶었다.

“야호!”

세비스가 나가고 실비아는 환호성을 질렀다. 게임 빙의 후 처음으로 쉴 기회가 생긴 것이다.

“랄라라.”

실비아는 죽을 먹을 때만 빼곤 최대한 시체처럼 누워 휴식을 만끽했다. 죽으면 관 안에서 실컷 잘 거니까 열심히 살라고 하더니 틀린 말이었다. 죽고 나서 이렇게 개고생을 하다니.

하루 종일 일을 할 때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더니 오늘따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잠깐 쉬었다고 어느새 저녁이 찾아왔다. 구슬을 팔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던 세비스는 자그마치 4천 골드를 가져왔다. 실비아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세비스가 4천 골드를 벌었다는 말에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와…, 쏠쏠하구나.”

“이것도 적은 거예요. 그 던전은 최하급 던전이니까요. 높은 급의 던전으로 갈수록 점점 얻을 수 있는 게 많아질 거예요.”

“좋아, 다음 주에도 던전에 가자.”

“네. 한동안은 바닷가 근처 던전들을 돌아다니기로 해요. 잠깐,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세비스의 손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의 팔을 어루만졌다. 잠시 팔뚝부터 손목까지 조몰락거리던 손은 밑으로 내려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종아리를 마사지했다. 무의식중에 실비아를 걱정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사시사철 야한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기에 걱정이 묻어나는 세비스의 손길에 체온이 급격하게 오르는 걸 느꼈다.

‘갑자기 손이 훅 들어오네….’

“어? 실비아 님!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거 같아요. 열도 있으신 건가.”

실비아가 얼굴이 붉어진 채 침묵하자, 세비스는 그녀의 이마를 몇 번 짚더니 손을 내려 그녀의 양 뺨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 행동에 실비아는 순간적으로 피가 코로 쏠리는 걸 느꼈다. 코를 쓸어보니 다행히 코피가 나진 않았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졌어요.”

“그… 그만, 자면 괜찮아질 거 같아.”

실비아는 고개를 돌리곤 다시 누워버렸다. 머리에 달린 귀와 왕방울만 한 눈꼬리를 축 내린 채 걱정하는 세비스의 모습은 실비아에게 너무 자극적이었다.

‘윽… 너무 귀여워. 게임이 하나 같이 내 취향에 맞춰져 있네. 내가 귀여운 거 좋아하는 줄은 어찌 알고.’

세비스는 실비아의 앞머릴 걱정스럽게 넘겨주다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한창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세비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쟁반에 받쳐 가져왔다.

그녀 앞에 의자를 끌어 앉은 세비스가 숟가락으로 죽을 떠 호- 하고 불어 입에 넣어주었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어 아주 팔팔한 상태인 실비아였지만 걱정하는 세비스의 모습을 보니 더 앓는 척해야 할 것 같았다.

“끄응…. 후룩.”

실비아가 아침과는 달리 정상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죽을 받아먹자 세비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관절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거 보니 아까보단 좀 나아지신 거 같긴 하네요. 내일은 일을 해야 하니 아프시면 안 되는데….”

내일은 신전 알바를 하는 날이니 절대 빠질 수 없었다.

‘잘생긴 노엘 님한테 하루라도 더 얼굴도장을 찍어놔야 하니까 절대 빠질 수 없지, 암.’

실비아는 고개를 저으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갑자기 완쾌하면 이상할 테니 덜 나은 병자연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아… 내일은 나을 거야. 안 나아도 가야지. …끙.”

“입맛이 없어도 다 드세요.”

“으응…. 호로록….”

실비아는 숟가락으로 일일이 죽을 떠 자신에게 먹여 주는 세비스를 보며 가슴이 찡해졌다.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쭉 혼자서 살았던 그녀는 아플 때 누군가 죽을 손수 떠먹여 주는 경험이 처음이었다.

사귀었던 남친 중 한 놈은 푹 자면 낫는다며 관심을 주지 않았고, 다른 전남친 놈은 아픈 실비아를 두고 코앞에서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나도 참 남자복이 없었어.’

죽고 나서야 남자복을 보상받는 걸까.

죽을 다 먹은 실비아는 이불을 덮고 편히 누웠다. 배도 따뜻하게 부르겠다, 계속 누워있으니 서서히 잠이 밀려왔다.

“세비스…. 나 먼저 잘게.”

“잘 자요, 주인님.”

세비스가 부드럽게 미소짓는 걸 희미한 시야로 바라보며 실비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을 잤을까. 한참 깊이 잠들어 있던 실비아는 머릿속에서 크게 울리는 경고음에 억지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메시지 알림음까지 들렸다. 좋은 꿈을 꾸고 있던 실비아는 다소 짜증이 났다.

‘뭐야, 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메시지가 오고 난리야….’

실비아는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그렇게 짜증을 내기도 잠시, 메시지 창을 본 그녀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아함… 응? 뭐야 이거!”

[아프지도 않은 주제에 실비아는 잉여처럼 쉬었다. 업보가 100 상승합니다.]

100??? 고작 하루 좀 쉬었다고 100?? 엄청난 수치에 찬물을 맞은 듯 실비아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좀 더 자세히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킁킁거렸다. 꼭 찜질방에서 먹는 달걀 냄새 같았다.

‘뭐야, 세비스가 음식 태웠나?’

띠링-

[업보가 100을 초과하여 나태지옥과 당신과의 거리가 11000000걸음 가까워집니다. 남은 걸음 89000000걸음.]

메시지와 함께 순간적으로 눈앞이 번쩍이더니 지옥도가 펼쳐졌다가 사라졌다. 지옥도 속에서는 소처럼 코뚜레를 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밭을 갈고 있었다.

“으아악!”

실비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지옥도는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실비아는 쿵쿵거리며 격렬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시스템은 공포심을 주기 위해 후각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게임 속에도 빙의 됐는데 냄새가 난다고 이상할 것 없긴 했지만, 찜질방 달걀 냄새가 지옥의 유황불 냄새였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기록 창을 불러왔다.

‘내가 쌓은 업보는 주점에서 털보 때문에 쌓은 거 10, 어제 하루 종일 뒹굴거려서 얻은 100이야. 업보가 110이 되었다고 지옥이 천백만 걸음이 가까워졌다니. 그럼 업보가 1천이 되면 게임의 엔딩이고 뭐고 바로 나태지옥 행이야?’

하루 놀았다고 100이 쌓이다니 최악이었다. 그녀는 비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신은 게임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태지옥으로 다시 가게 될 거라고 했다.

오염된 기운을 정화하지 못하면 신이 힘을 되찾지 못해 소원을 들어줄 수 없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업보가 1천이 되면 엔딩도 못 보고 바로 나태지옥으로 직행하는 거였다니.

암담한 현실에 실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도 쉬면 안 되는 거구나…. 그래, 천국 가서 쉬자….’

그녀는 하루 종일 뒹굴거렸던 어제의 자신을 마구 때리고 싶었다. 열심히 임하기로 해 놓고 며칠도 안 돼서 꾀병을 부리고 놀다니. 당장 나태지옥으로 끌려가도 할 말이 없었다.

이 게임은 완전 욜로족 정신교육 게임이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주저앉아 있자 그녀의 비명을 듣고 놀란 세비스가 양치질을 하고 있었는지 칫솔을 문 채로 뛰어 들어왔다.

“실비아 님, 왜 그러세요?”

“휴… 아니야. 아니야, 세비스. 악몽을 꿨나 봐.”

이 세계가 게임인 줄도 모르는 세비스에게 업보의 개념을 설명해 주는 건 힘든 일이었다. 꾀병을 부리고 놀다가 지옥이 더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해도 그는 알아듣기 힘들 터였다. 걱정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실비아는 괜히 미안해졌다.

‘평생 놀다가 지옥에 갈 뻔해 놓고 또 게임 속에서 놀다니. 세비스한테 미안하네. 꾀병 부린 줄도 모르고 이렇게 걱정해 주고….’

“식은땀 봐요. 앞머리가 다 젖었어요. 옷도….”

세비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곤 무릎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후…. 아냐. 괜찮아. 일하러 가야겠어.”

한숨을 한 번 내쉰 실비아는 벌떡 일어나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비장한 표정으로 척척 걸어가 아침 식사부터 했다. 그리고 전쟁이라도 나갈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 집을 나서는 실비아의 뒤에 대고 세비스가 “파이팅!”을 크게 외치며 그녀를 격려했다.

민첩이 올라간 덕에 평소보다 걷는 속도가 빨라진 실비아는 팔을 휘휘 내저으며 빠른 속도로 건물들을 지나쳐갔다.

‘그래, 망할 놈의 게임아. 안 놀고 계속 공략하면 되잖아. 던전이든, 남자든. 아주 그냥 초토화를 내 주마.’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