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실비아가 아무리 강해진다 해도, 단순 힘만으로 왕국을 정상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힘으로 해결될 거였다면 일족의 전사들이 이미 해결했을 터. 아냐! 그렇지만 그녀는 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니 무언가 숨겨 둔 스킬이 있지 않을까.
세비스는 혼자서 희망에 찼다가 절망에 찼다가 하며 낯빛을 붉으락푸르락 바꾸었다.
실비아는 그런 세비스를 잠시 힐끗 쳐다보곤 히이익- 하며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세비스의 얼굴이 파래졌다, 벌게졌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더니, 이내 그가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는 걸 봤기 때문이다.
‘화… 많이 났나 보네. 그래, 이제 추잡한 짓은 하지 말자…. 그렇지만 심한 짓은 한 적 없는 거 같은데…. 아니야. 그걸 내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 잠깐, 이건 19금 게임이고 난 19금 게임 플레이어잖아…. 아니야? …조금 억울하다….’
그녀는 조금 씁쓸해지려는 마음을 다독이며 망치를 들고 느릿하게 제자리걸음을 하는 <제대로 오염된 꽃게>에게 다가갔다.
초보용 몬스터인지 속도가 무척 느리고 집게발을 들어 쉭쉭 가볍게 위협할 뿐 별다른 스킬은 없어 보였다.
‘꽃게야, 너한테 억하심정은 없단다. 단지 넌 내가 해치워야 하는 몬스터니까.’
깡! 깡! 손을 연거푸 들어 망치질을 하자 꽃게가 슬금슬금 도망을 갔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에 꽃게 발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한 방에 죽은 허접꽃게들이랑은 달리 오색찬란한 꽃게는 여러 방을 쳐야 죽을 듯했다.
깡, 깡, 깡, 깡! 따라다니며 계속 망치로 내려치자 움찔거리던 꽃게가 별안간 집게발을 들어 실비아의 망치를 낚아채려고 했다.
‘어딜!’
느린 속도에 집게발을 피하는 건 쉬웠다. 벽으로 몰아가며 꽃게를 망치로 계속 내려치길 한참, 드디어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꽃게가 스르르 무너지더니 푸른 액이 흘러나왔다.
‘해치웠다!’
효과음과 함께 그녀의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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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던전 : 해안 동굴의 보스를 해치웠습니다! 레벨 2 업!]
[열심히 망치질을 하여 스킬 <뚝배기 깨기> 획득!]
[보스에게서 <인삼이 든 킹크랩 구이> 획득!]
[획득한 아이템은 인벤토리에 보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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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가 꽃게를 해치우자 세비스가 기뻐하며 다가왔다. 그의 화사한 미소에 실비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화난 건 아닌 모양이야.’
“실비아 님, 대단해요! 혼자서 보스를 해치우다니!”
세비스의 반짝이는 눈에 실비아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생각보다 쉽더라구…. 하하….”
세비스는 꽃게에게서 나온 큰 구슬을 가방에 집어넣곤 실비아를 향해 밝게 웃었다.
“오늘 얻은 구슬이 상당히 많아요. 이것들을 팔면 돈이 꽤 되겠어요.”
“이대로면 금방 부자가 되겠어.”
“이런 식이면 알바는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세비스의 말에 실비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신전 알바는 노엘을 공략하려면 꼭 해야 하는 알바인데 어떻게 변명하지?’
잠시 머리를 굴린 실비아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세비스를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응…? 아 그건…. 알바는 해야 될 것 같아.”
“왜요?”
“…최소 한 달은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관두면 신전에서도 곤란해할걸. 맡은 바 최선을 다해야지….”
그래,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게임은 동정 미남을 따먹는 게임이니까. 씨앗을 모으려면 동정 미남을 공략하는 게 필수인걸.
그리고 사실 그와 하고 싶다. 노엘의 두툼한 가슴 사이로 흘러내리던 땀방울을 떠올린 실비아는 아찔함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 하고 싶다…. 격렬하게 하고 싶어…. 최고로 문란해지고 싶다….’
욕망으로 어두워진 실바아의 낯빛을 책임감이 강한 이의 우직한 표정으로 오해한 세비스는 박수를 짝 치며 감탄했다.
‘이렇게 책임감이 강하신데…. 난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걸까! 딴 생각하지 않고 주인님을 돕겠어.’
“아…. 그런 깊은 뜻이…. 실비아 님은 책임감이 정말 강하시군요. 알겠어요. 그럼 당분간은 알바를 쉬는 날에 던전을 다니기로 해요.”
“으응…. 아, 망치질을 많이 했더니 팔이 좀 쑤시네.”
게임 속이지만 정말 실제 같았다. 오른손으로 쉴 새 없이 망치를 휘둘렀더니 격한 운동을 한 것처럼 실비아의 팔이 고통을 호소했다.
“아야야….”
세비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실비아에게 다가왔다.
“그… 실비아 님.”
“응?”
“제가 마사지를 좀 해드릴까요?”
“어어…. 그래도 되겠어?”
‘내 몸에 닿는 걸 싫어하지 않나.’
실비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세비스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풍성한 속눈썹이 붉은 눈에 그늘을 만들어 냈다.
“네. 그… 친구들이랑 사냥연습을 하고 나면 서로 마사지 해 주었거든요.”
“그래? 어…. 그럼 부탁할게.”
실비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하게 눈을 한번 굴린 세비스는 처음으로 몬스터를 잡느라 무리한 실비아를 위해 어깨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 딴 뜻은 없고 근육을 풀지 않으면 다음 날 더 고통스러울 수 있거든요. 전 주인님이 걱정돼서…. 흠흠, 첫날인데 정말 잘하셨어요.”
“아, 고마워…. 정말 잘하네…. 시원하다.”
‘생각보다 손이 야무지네.’
시도 때도 없이 야한 생각을 하는 실비아지만 순수하게 근육을 풀어 주고자 하는 세비스의 성의를 음란한 생각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잡생각을 물리치려 노력하며 부드러운 손길을 즐겼다.
“어… 거기… 앗….”
“아파요? …여긴 …어때요?”
“응. …아… 좋아.”
“…여기두?”
“응…. 흣… 너무 좋아.”
‘어쩐지 야릇하게 느껴지는 건 내 머리가 썩었기 때문이다.’
음란마귀를 물리치느라 실비아가 속으로 신음을 참자 둘 사이엔 적막감만 감돌았다. 간간이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세비스의 마사지는 황홀했다. 긴장하고 있던 근육이 이완되며 시원하게 풀어졌다. 실비아는 이성을 유지하려 혀를 살짝 깨물곤 세비스를 돌아봤다.
“아! 이제 됐어. 고마워, 세비스.”
“아…, 네.”
세비스는 어쩐지 열이 오르는 느낌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침묵 속에서 미처 챙기지 못했던 전리품들을 주섬주섬 챙긴 둘은 게 껍질만 남은 해안 동굴 던전을 빠져나왔다. 쨍하게 밝았던 해가 기울어 하늘은 어느새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둘 사이의 묘한 기류는 세비스가 피크닉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는 순간 사라졌다.
“그… 실비아 님, 샌드위치… 샌드위치 먹어요.”
“아아…! 맞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네.”
둘은 편편한 바위 위에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 가방을 얹어 고정했다.
“여기 실비아 님 거, 이건 제 거!”
“고마워, 잘 먹을게!”
샌드위치는 쨍한 색의 체크무늬 종이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폭신한 우유 식빵 안을 가득 채운 오이가 박힌 계란샐러드가 먹음직스러웠다.
‘오이…. 내가 오이를 좋아해서 다행이군.’
한 입 베어 무니 고소하고 달달한 달걀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열심히 몬스터를 잡고 나서 샌드위치를 먹으니 꿀맛이 따로 없었다.
‘음, 맛있당.’
먹다가 목이 막혀서 가슴을 치자 세비스가 보온병을 건넸다. 뚜껑에 따라 마셔 보니 차가운 보리차였다. 게임 세계에 보온병이 있다는 것에 실비아는 감탄했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중세유럽 같은 곳이 아닌 한국인이 개발한 게임 세계로 빙의된 게 참 다행이었다. 이상한 곳에 떨어졌으면 풀떼기나 씹었을 수도 있는데, 옆에 있는 요리 잘하는 집사 덕에 하루하루가 먹방이었다.
‘참 편리한 세계야. 먹을 거 하난 걱정 없게 해 놨잖아. 역시 K-게임….’
같이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던 세비스가 가방을 뒤지더니 던전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늘어놓았다. 세비스는 대충 100개 정도의 구슬을 획득한 듯했다.
실비아가 인벤토리에서 작은 구슬들과 큰 구슬 1개, 검은 봉투에 담긴 잘 발린 꽃게 살 2개를 꺼내자 세비스가 깜짝 놀랐다.
“실비아 님, 어디다 숨겨 놓으셨던 거예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 세계에는 던전이 존재하고, 던전을 공략해 강해진다는 기본 개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물건을 보이지 않는 곳에 저장하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세비스가 놀라 자빠질 것 같진 않았다.
“아… 이건, 음…. 나는 물건을 안 보이는 곳에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와, 대단하세요. 신이 주신 능력인가 봐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사실 제일 대단한 건 동정남을 먹으면 보스 몬스터처럼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단 거지만 굳이 말할 필욘 없겠지.’
세비스는 놀라워하며 피크닉 가방 안에 들어있는 걸 이것저것 저장해 보라고 했다. 무기나 방어구는 저장이 가능했지만 보온병이나 피크닉 가방은 저장이 불가했다. 저장되는 아이템이 있고 안 되는 아이템이 있는 듯했다.
“내 거까지 합하니 작은 구슬이 170개 정도 되네. 구슬은 팔면 얼마가 나올까?”
“음, 제가 내일 거래소에 가서 팔아 볼게요.”
“귀는 어떻게 하고?”
“모자로 가리면 되죠, 뭐.”
세비스가 머리 위에서 까딱거리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강아지로 변신한 건 정말 변신욕구 때문이었군….’
샌드위치를 다 먹고 아이템을 정리하고 일어서자 세비스가 꽃게 살을 챙겼다.
“저녁은 게살샐러드가 어떨까요.”
“된장찌개를 해주면 안 될까?”
“된장찌개요?”
“아… 아냐. 게살샐러드 좋네.”
된장찌개는 이 세계에 없는 단어인가 보다. 저번에 스튜를 먹었을 때는 뼈다귀해장국 맛이 났었다. 현실에 있는 요리들을 엇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걸 보니 주방에는 된장 맛이 나는 조미료도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엔 내가 된장찌개를 만들어 봐야겠어. 맛은 장담 못 하지만….’
해안가를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걸어가는 길. 저녁 대가 되면서 얕았던 수심이 아까 전보다 더 깊어졌다. 그 순간 갑자기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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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아련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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