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레벨 업으로 생긴 분배 포인트는 10. 아마도 1레벨이 오를 때마다 5포인트씩을 주는 모양이었다. 망치로 세게 내려쳐야 하니까 우선 힘에다가 다 몰빵하기로 결정했다.
‘힘에다 10 다 분배.’
그녀가 속으로 외치자 상태 창의 힘 스텟이 30으로 올라갔다. 팔 힘이 튼튼해지는 게 느껴졌다. 옷을 걷어 확인해보니 얇고 가녀린 팔에 잔 근육이 살짝 생성되어 있었다. 팔을 허공에 대고 휘둘러보니 휙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흠, 나쁘지 않군.’
실비아가 잠시 포인트를 분배하며 한눈을 파는 사이 가방을 챙긴 세비스가 그녀의 어깨를 약하게 두드렸다.
“실비아 님? 이제 출발해요.”
“그래.”
세비스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해안가 절벽 사이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입구로 한 발짝 들어서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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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던전 : 해안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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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읽고 나서 앞을 보니 미약하지만 사악한 기운이 앞에서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소름이 돋아 팔을 가볍게 쓸고 있자 세비스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긴 기본 중의 기본인 최하급 던전이에요. 저는 타고난 힘이 강해 성체가 되면 힘을 키울 필요가 없지만, 인간들은 보통 이런 곳에서 훈련한다고 하더라구요. 망치로 마물들을 패면 숨어 있던 구슬이 나올 거예요. 가끔 쓸모 있는 것들도 떨어지니까 다 주워 두세요.”
“응. 알겠어.”
세비스는 이 세계가 게임이란 건 모르지만 던전이나 마물, 레벨 업에 대한 개념은 있는 듯했다.
그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처음엔 세비스가 아무것도 몰라 절망했었지만 그건 게임용어를 써서 그런 거였다. 나름 게임을 자연스럽게 플레이하는 걸 가능하게 하는 이 세계의 법칙들이 있었다.
동굴은 다행히 천장이 뚫려 있어 시야가 어둡진 않았다. 몇 발자국 들어서자 푸른색의, 딱 봐도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맛이 간 꽃게가 나타났다.
[오염 된 꽃게]라. 다행히 포유류가 아니라 꽃게라서 첫 살생의 죄책감은 크지 않을 듯했다.
“속도도 느리고 공격도 치명적이지 않아서 잡기 쉬워요.”
세비스는 검을 휘둘러 꽃게 한 마리를 가볍게 해치우며 실비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의식중에 주인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바로 화들짝 놀라서 본인이 잡아놓고 뿌리치듯 놓아버렸지만 말이다.
실비아는 아쉬운 기색을 애써 숨기며 세비스의 손을 바라봤다. 피아노를 치면 어울릴 것 같은 섬세한 손이었다. 손가락이 잠시 꼼지락하더니 이내 평온을 찾았다.
‘성체가 되어도 손은 여전히 예쁠까? 성체가 돼서도 손은 나긋나긋했으면 좋겠다. 난 손 예쁜 남자가 좋은데….’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채 세비스는 한 손에 든 검으로 꽃게를 연거푸 해치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실비아도 머뭇머뭇하다가 동굴 벽 구석에서 비실거리는 꽃게 한 마리를 깡! 하고 내려쳤다.
끼엑-! 그 일격에 스X크래프트의 프로토스 종족이 죽을 때처럼 끈적이는 푸른 액을 내뿜으며 꽃게가 바스러졌다.
실비아는 바스러진 꽃게 속에서 구슬을 찾아내 인벤토리에 넣었다. 망치로 깡! 깡! 계속 내려치며 나아가니, 마치 게임 속에서 몬스터를 잡을 때처럼 통쾌함이 들었다.
‘뭔가 두더지잡기 게임 같기도 하고.’
동굴에 쉬익! 하고 꽃게를 가르는 세비스의 검 소리와 깡! 깡! 거리는 실비아의 망치 소리가 한참을 울려 퍼졌다.
대충 20마리쯤 잡았을 때쯤, 효과음과 함께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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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1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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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잡아도 레벨 업이 되나 보군. 동정 미남을 공략해야만 오르는 거면 한참 동안 허접일 뻔했는데 다행이야.’
레벨이 오르는 걸 확인한 뒤 실비아의 망치질이 더욱 빨라졌다.
깡, 깡, 깡! 3연속으로 꽃게의 머리통을 깨버리며 그녀는 신나게 앞으로 나아갔다. 꽃게들이 사라진 자리엔 구슬이나 아이템이 나오기도 했고, 아무것도 안 나오기도 했다.
한참 꽃게들을 작살 내고 나니 총 5레벨이 올라갔다. 인벤토리를 확인하니 꽃게에게서 뽑아낸 구슬들도 50개 정도 모여 있었다. 딱 두 마리의 꽃게에게서 <잘 발라낸 꽃게살>이 나왔다. 검은 봉투에 담겨 있는 채로 튀어나온 아이템에 그녀의 입에서 실소가 나왔다.
‘무슨 자갈치시장이냐고….’
상세설명을 보니 <식용이 가능한 맛좋은 꽃게살>이라고 쓰여 있었다. 집에 가서 세비스가 해 줄 꽃게요리 생각에 실비아는 신이 났다.
‘쪼렙이라서 초반엔 빨리 오르는 것 같네. 오늘 10레벨 만들고 간다.’
망치 전사로 각성했단 소리에 처음엔 실망한 실비아였지만 망치는 별다른 스킬 없이도 마물을 팰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깡깡거리며 계속 꽃게를 깨부수던 실비아를 세비스가 불렀다.
“실비아 님, 저 앞을 보세요.”
깡! 하고 꽃게 한 마리를 더 해치운 실비아가 앞을 보았다. 여러 가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남다른 덩치의 꽃게가 으쓱으쓱거리며 게 다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제대로 오염된 꽃게]
실비아가 앞으로 나서려 하자 세비스가 팔을 들어 막았다.
“제대로 오염된 꽃게네요. 실비아 님에겐 위험할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여러 가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꽃게의 껍질은 ‘먹으면 즉사’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실비아는 잠시 상태 창을 켜 새로 받은 분배 포인트 중 15를 힘에, 10을 체력에 분배했다. 꽃게의 걸음걸이가 느려 보여 민첩은 아직 투자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실비아가 상태 창에 한 눈이 팔린 사이에 세비스가 갑자기 앞으로 나아갔다.
‘어어, 안 돼. 막타 먹어야 경험치를 얻는데!’
“잠깐…. 잠깐 세비스!”
저 꽃게가 몇 방에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실비아는 급하게 뛰어가 세비스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를 막으려는 의도 반 그 와중에도 드는 사심 반이었다.
폭- 하고 다급히 뒤에서 껴안자 향긋한 바디워시 향과 늑대 수인 특유의 체향이 어우러져 실비아의 코를 간지럽혔다.
‘아, 역시 생각보다 탄탄한 몸….’
아직 성체가 되지 않았다곤 하지만, 그의 몸은 아침에 본 바대로 탄탄했다. 세비스는 어려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몸은 조금 왜소한 성인 남자와 비슷했다.
수인이라 그런 걸까. 성체가 되면 정말 엄청날 것 같은 잠재력을 가진 몸이었다.
갑작스러운 봉변(?)에 세비스가 돌처럼 굳어 버렸다. 실비아는 잠시 움칠했지만 껴안은 손을 풀진 않았다.
‘골격이 탄탄해. 성체가 되면 엄청 나겠어. 다행히 껴안는 걸론 데드엔딩이 안 뜨나 봐.’
수위조절 해 가며 살짝 가슴을 쓰다듬으려는 찰나 세비스가 정신을 차린 듯 크게 움찔거렸다. 세비스는 자신의 몸을 쓰다듬는 실비아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듯 말을 뱉었다.
“실비아 님…. 하지 마세요….”
살짝 떨리는 세비스의 목소리에 실비아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완전히 뒤를 돌아 실비아를 보는 세비스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는데 그녀의 눈엔 그 얼굴이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붉은 눈이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익, 열받아서 부들부들 떠는 건가?’
그가 입술을 깨물며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실비아는 저번 복어 남 때처럼 데드엔딩을 맞을까 봐 지레 겁이 났다.
‘진짜 화났나 봐.’
그녀는 세비스의 손을 떼어 내고 시선을 옆으로 돌린 채 우물쭈물 변명을 내뱉었다.
“아니, 저 오색찬란한 꽃게는 내가 죽이고 싶어서… 그래서… 음….”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심 가득한 손길이 살짝 있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좀 껴안았다고 저렇게 싸늘하게 쳐다보다니.’
여러 번 결심하는 것 같지만 세비스에겐 한동안 별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실비아는 다짐했다.
그녀의 말에 세비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후…. 알겠어요,”
“응…. 화났어?”
“화난 게 아니라…. 아니에요. 조심해서 잡으셔야 해요. 위험하면 제가 나설 테니까.”
세비스는 잠시 앞머리를 거칠게 털더니 이내 평소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는 갑작스러운 제 주인의 스킨십에 무척 당황했다. 놀란 나머지 송곳니를 드러낸 채 실비아에게 대답했으니 화났다고 오해할 만했다. 세비스는 뜨거워진 귀를 만지작거리며 가만히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실비아를 만난 지 고작 며칠이건만 그동안 조금 자란 게 느껴졌다.
검은 늑대 족은 자라날 필요를 느끼면 성체가 된다. 눈앞에 큰 위협이 다가왔거나, 아니면… 반려를 맞이할 준비를 하거나.
‘주인님을 도와야 한단 위기감 때문에 자라난 걸까? 아니면….’
위기감 때문에 자란 거면 나쁠 건 없었다. 본인이 성체가 된다면 더 강해진 힘으로 실비아 님과 함께 오염 된 지역들을 정화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다른 이유 때문이면?
실비아 님을 이성으로 의식해서 자라나는 거면 곤란했다. 그녀는 세계를 구한다는 일념 하나로 정신이 없는데… 그 옆에서 딴생각을 품다니. 이게 무슨 불순한 생각인가.
실비아가 세비스의 속을 알았다면 ‘아니야. 무조건 이성으로 생각해. 제발 부탁이야.’라고 했겠지만. 애석하게도 둘은 서로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성과 함께 있었던 건 처음이라 그럴 거야. 임무에만 충실하자.’
세비스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주인의 기대(?)를 배반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그는 덩치 큰 꽃게를 잡으려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 님의 힘이 더 강해졌다.’
그는 늑대 족이기에 실비아의 힘을 짐승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너무나도 약했지만 던전에 들어 온 후로 실비아의 기운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쉬는 날마다 근처에 있는 던전들을 격파하면 웬만한 용병들보다 강해질 듯했다.
‘이 속도대로라면 3달 안에 늑대 왕국에 갈 수 있을지도….’
아니다. 세비스는 잠시 기대에 부풀어 실비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