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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9화 (9/372)

9화

샤워가운의 벌어진 틈을 꽉 쥔 세비스가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주인님,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빨리 씻으세요.”

“알겠어….”

실비아는 잠시간의 해프닝으로 달아올랐던 몸을 샤워기의 찬물을 맞으며 식혔다. 그리고 벽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욕정을 가라앉혔다.

‘헛된 생각을 버리자. 정말 버리자…. 데드엔딩은 안 된다….’

아픈 건 죽어도 싫었다.

그렇게 애국가 염불을 외며 찬물로 씻고 나와 보니 세비스는 주방으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실비아는 나갈 채비를 하였다.

“흠….”

그녀는 거기서 거기인 거렁뱅이 옷을 새 걸로 갈아입고 머리를 빗어 넘겨 높이 묶었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가 계속 거슬렸기 때문이다.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으니 깔끔하고 활동성이 좋아졌다.

가만히 의자 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곧 타닥거리며 바닥을 짚고 다니는 짐승의 발소리가 들렸다.

‘웬 짐승? 현관문은 닫혀 있는데….’

실비아는 발소리의 출처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실비아 님, 어서 가요.”

세비스의 목소리가 바닥에서 들렸다.

놀라 밑을 내려다보니 피크닉 가방을 옆에 둔 까만 강아지가 꼬리를 홱홱 흔들며 실비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비스는 늑대 수인이었지만, 늑대를 사진으로만 보고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실비아의 눈엔 그가 귀여운 강아지로 보였다.

“세비스? 너 그 꼴이 뭐야?”

“바깥에 나가는 거잖아요. 제 귀를 보면 사람들이 놀랄 수도 있어서요. 아! 저 원래 동물화하면 덩치가 훨씬 커요. 인간세계에서 돌아다닐 땐 이런 조그만 모습이 거부감이 덜 들 것 같아서 조절해 봤어요. 그리고 서랍장을 열어 보세요, 실비아 님.”

귀 달린 남자보다 말하는 강아지를 보면 더 놀라지 않을까….

원래 덩치가 더 크다고 주절주절 말하는 세비스의 모습에 실비아는 쿡- 하고 웃었다.

뭔가 허세 부리는 소동물 같다고나 할까…. 그가 들으면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실비아는 그렇게 느꼈다.

세비스의 말대로 서랍장을 열어 보니 강아지 몸줄인 하네스가 안에 들어있었다.

“이걸 네 몸에 걸어 달란 거니?”

“네!”

세비스는 무척 신나는지 여러 바퀴 빙빙 돌면서 꼬리를 재빠르게 흔들었다. 얘 산책 좋아했구나. 개 수인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거긴 한데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세비스의 몸에 하네스를 착용시키자 세비스가 좋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쳤다.

‘윽…. 귀여워…. 껴안아 버리고 싶어.’

실비아는 솟아오르는 껴안기 욕망을 가까스로 참은 뒤 하네스 줄을 손목에 매고 피크닉 가방을 든 채 집을 나섰다.

밖을 나서자마자 자동 세이브 음이 울렸다. 피크닉 가방을 열어 보니 샌드위치와 물병, 그 외에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실비아는 주린 배를 움켜쥐며 헥헥거리는 세비스를 내려다보았다.

“배고파. 이 샌드위치 먹어버리면 안 될까?”

“우선 돈부터 벌고 나서 먹어요. 주인님.”

“근데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번단 거야?”

“저만 따라 하시면 돼요.”

세비스는 헥헥거리면서 열심히 걸었다. 간만의 산책이 그를 기분 좋게 했다. 몸줄을 맨 상태라 더욱 기분이 좋았다. 실비아도 신난 그를 앞세우고 열심히 뒤쫓아 갔다.

현생에서는 혼자 살기에 반려견을 키우고 싶어도 강아지가 우울증이 생길까 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있다. 무려 귀여운 남자로 변신도 가능한 만능 반려견을.

들뜨는 기분에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날씨도 적당히 따뜻하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오는 게 최상의 기분이었다.

‘게임 빙의 할 만한데. 기분 좋구나.’

가벼운 바람이 실비아의 앞머리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한참을 걸어 초록 풀들이 있는 언덕을 지나자 이내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그녀의 코로 들어왔다.

“바닷가다!”

“여기서 돈을 벌 수 있어요.”

어느새 바위들이 듬성듬성 있는 해안가에 도착했다. 세비스가 큰 바위 뒤로 숨으며 실비아를 쳐다봤다.

“잠시만요. 저는 변신 좀….”

“다시 사람으로 변할 거면 왜 그러고 온 거야?”

“실비아 님은 모르는 참을 수 없는 변신 욕구…, 뭐 그런 게 있어요.”

세비스는 말을 마친 뒤 큰 바위로 몸을 숨겼다.

그 사이 실비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도착한 바닷가는 바위들이 듬성듬성 드러나 보이는 얕은 수위였다. 투명한 바닷물 안을 들여다보니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아기 꽃게들이 보였다.

‘된장찌개 하면 맛있겠다.’

개발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임 속 세계에서도 원래 세계의 음식을 대부분 먹을 수 있었다. 첫날의 뼈다귀해장국 맛이 나는 스튜부터 해서 세비스가 차려 주는 요리들은 현실의 음식과 비슷한 맛이 났다. 그러니 된장찌개도 조미료를 잘 찾으면 가능할 터.

해물 된장찌개를 먹고 싶은 욕심에 실비아는 가방 안에 있던 물통을 든 채 맨발로 조금씩 바닷물로 걸어 들어갔다.

바닷물 안에는 조그만 꽃게뿐만 아니라 고동과 알 수 없는 해양생물들이 다양하게 노니고 있었다. 실비아는 꽃게랑 고동을 여러 마리 수거해 물통에 집어넣었다.

‘마치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네.’

콧노래를 하며 얕은 바닷가를 첨벙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자 세비스가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그녀를 불렀다.

“실비아 님, 뭐하세요?”

뒤를 돌아본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비스가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일상복 위에 가죽 갑옷을 걸친 그가 실비아를 비장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세비스, 웬 칼을 들고 있어?”

“돈 벌어야죠. 겸사겸사…. 아니, 사실 진짜 목표는 실비아 님이 강해지는 거구요.”

세비스가 피크닉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 실비아에게 던져 주었다. 조그만 피크닉 가방에 어떻게 다 넣었는지 가벼운 망치와 여성용 가죽 갑옷이 나왔다.

“이게 다 뭐야, 언제 챙긴 거야?”

“다 필요하니까 챙긴 거예요. 저장마법이 걸려 있는 가방이라 무한대로 들어가요. 빨리 걸치세요.”

실비아는 주섬주섬 갑옷을 챙겨 옷 위에 걸쳤다. 가벼운 망치를 본 실비아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망치를 쓰라고?”

“주인님은 아직 검을 제대로 쓰는 방법을 모르시잖아요. 망치로 그냥 두들겨 팹시다.”

“팬다고? …이걸로 뭘 패려고? 돈도 벌 겸 강해진단 게 설마….”

실비아는 꿀꺽- 하고 침을 삼킨 뒤 눈만 옆으로 돌려 세비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노상강도라도 될 셈인가?

그녀의 망상은 세비스의 말에 금방 깨졌다.

“실비아 님, 우린 지금 마물을 사냥하러 갈 거예요. 불쌍한 꽃게들은 빨리 놔줘요.”

아, 마물. 실감 나는 감각에 계속 잊게 되지만 여기는 게임 속 세계. 당연히 던전이 있을 것이다. 몬스터를 때려잡으러 간단 거군.

머쓱해진 그녀는 아쉽지만 물통을 털어 된장찌개의 재료가 될 뻔했던 꽃게와 고동들을 물속에 풀어 주었다.

세비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곤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순수하게 꽃게를 잡으며 즐거워하는 제 주인이 과연 세계를 구원할 영웅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마물들을 잡아 돈도 벌고 더 강해지는 법을 가르치려고 주인을 데려왔다.

신탁의 내용이 간단했던지라 실비아가 어떤 방법으로 구원자가 되는 건지 그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주인을 끝까지 도와주면 세계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우선 초급 마물들을 때려잡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한참 후에 동정 미남들을 공략하는 게 그 방법이란 걸 실비아에게서 들은 세비스는 깜짝 놀라게 되지만, 이는 나중 일이었다.

한편, 실비아가 세비스에게 받은 망치를 쥐고 가만히 바라보자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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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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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알 수 없는 메시지였다. 이걸로 괜찮으시겠냐고? 설마 무기를 잘못 쓰면 데드엔딩이 뜨거나 하는 걸까.

실비아는 준비체조와 함께 검을 휘두르고 있는 세비스를 돌아봤다.

“세비스, 다른 무기는 없어?”

그녀의 말에 세비스가 가방을 뒤적여 보더니 얄팍하고 요상한 물건 두 개를 꺼냈다.

“음, 실비아 님이 쓰실 만한 거로는 채찍, 회초리가 있네요.”

어째서? 어째서 채찍이랑 회초리 따위가 가방에 들어있는 거지. 채찍으로 때린다고 마물들이 죽을까? 회초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회초리나 채찍은 세비스가 말을 안 들을 때 쓰면 딱이겠는데….’

잠시 잡생각을 한 그녀는 곧 결심을 굳혔다.

그나마 쓸 만한 무기는 망치밖에 없으니… 망치를 선택해야겠어.

‘이걸로 괜찮을 듯.’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자 갑자기 짜란! 하는 축하 음 같은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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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망치 전사>로 각성했다. 전용 무기가 망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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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실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망치를 황망하게 쳐다봤다. 뭔가 없어 보이는 직업명이었다. 망치 전사라니. 애초부터 던전에 가기 전에 회초리랑 채찍, 망치 중에 고르라면 다들 망치를 고를 텐데 이게 뭐람?

밝은 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더니 또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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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 전사>로 각성한 실비아의 레벨이 초보자 버프로 3 업!, 직업획득 효과로 체력 +10, 힘이 +10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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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건 좋은데.’

실비아는 곧장 상태 창을 켜 능력치를 확인했다. 그동안의 일들로 얻은 능력치가 반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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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레벨 3 망치 전사

가진 돈 : 250G

체력 : 70 힘 : 20 지력 : 10 민첩 : 10

화술 : 100

업보 : 10

신앙심 :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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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도 : 10

레벨 업으로 분배되지 않은 포인트가 10 있습니다. 분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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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한 번에 3이 됐다. 안 그래도 레벨 1 쪼렙인 상태에서 던전을 가도 될까 싶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옆에 붙어 있는 망치 전사란 직업명은 좀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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