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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3화 (3/372)

3화

어깨를 토닥거리다가 보송보송한 귀까지 만지작거리자 세비스가 가만히 뒤로 물러났다. 더 이상 하지 말란 의미였다.

실망스럽게도 세비스랑 야한 일이 일어날 조짐은 없었다. 이제 이상한 선택지도 뜨지 않는 걸 보곤 실비아는 그를 의미 없이 만지던 손길을 거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거지….’

집안에 귀여운 남자가 있지만 공략 불가인 집사였다.

실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를 갸웃대며 바라보던 세비스가 앵두 같이 붉은 입술을 열어 말을 이어갔다.

“저는 주인님의 성장을 돕기 위해 함께 있는 거예요. 음… 우선 집에 돈이 너무 없네요.”

“그러게…. 에고, 이 누더기옷 좀 봐라….”

“주인님, 이대로는 거렁뱅이 꼴을 못 벗어나요. 빨리 마을로 가셔서 일자리를 구하셔야 해요!”

게임 속인데 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래, 천국으로 가는 길이 쉬울 리가 없다. 한숨을 쉰 그녀는 밖을 나가려다가 세비스를 돌아보았다.

“너는?”

“네? 저는 집에서 실비아 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세비스가 귀를 쫑긋거리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배꼽 인사를 했다. 그래, NPC가 플레이어를 위해 돈을 번다니 말도 안 되지. 돈은 플레이어밖에 못 벌지….

실비아는 한숨을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우선 마을을 돌아다녀 볼게.”

“네! 아직 마을을 잘 모르시니까 우선 주점에 가서 소식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밤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마세요. 주인님은 현재 누구한테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렁뱅이시니까요.”

거렁뱅이 상태로 깝죽대다가 맞아 죽는 엔딩도 있을 수 있는 걸까. 게임이라 생각하니 세비스의 말 하나하나가 경고로 들려 그녀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원래 게임 속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힌트가 되는 법 아니던가.

주변을 조심히 돌아보며 집을 나서자 뾰로롱 효과음이 뜨면서 자동 세이브라는 메시지가 떴다가 사라졌다.

다행히 세이브가 가능하구나.

그와 동시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 주점에 가서 일거리를 얻어 오자.

성공보상 : <동정 레이더>, <비밀상점 위치 안내도>

실패 시 : 업보 +100]

오, 퀘스트다! 퀘스트를 열심히 수행하라고 했었지. 그리고 <동정 레이더?> 그게 뭘까.

‘<동정 레이더> 설명을 보여 줘.’

속으로 중얼거리자 바로 아이템의 설명이 떠올랐다.

[동정 레이더

- 동정인지 아닌지 판단 가능한 아이템. 어떤 남자든 멀리서도 동정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능하다. 현재 상태에서 공략 가능한 동정 미남들의 상태 창을 보여 준다. 레이더로 볼 수 없는 특수캐릭터도 존재한다.]

‘어, 이거 되게 유용한 아이템인데?’

나머지 하나는 <비밀상점 위치 안내도>…. 비밀상점 오픈이면 오픈이지 위치 안내도가 뭐냐…. 까다로운 게임방식에 벌써부터 실비아의 입에서 욕이 나오려고 했다.

‘천국…. 천국 길만 생각하자.’

머리를 가볍게 휘저은 그녀는 우선 퀘스트대로 주점을 가보기로 했다.

마을의 이정표를 따라 주점으로 곧장 가보니 대낮부터 손님들이 가득했다.

‘휴….’

주점 안을 대략적으로 훑은 그녀는 아려 오는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안타깝게도 이 주점 안엔 공략 캐릭터가 없는 듯했다. 아니, 있으면 더 문제다.

한 바퀴 빙 둘러보니 공략 캐릭터일까 두려운 남자들만 주점 안에 바글바글했기 때문이다. 어둠의 루트 중에 설마 모브 캐릭터들의 여왕 같은 게 있진 않겠지.

현생에서 게임을 할 때의 실비아는 배드엔딩을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건 본인이 직접 겪을 일이 없을 때 한정. 실제로 빙의한 상태에선 잘생긴 남자만 수집하고 싶었다.

한 바퀴 빙 둘러보며 입구에 서 있자 주근깨 달린 곱슬머리 점원이 퉁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여긴 당신 같은 거렁뱅이가 올 곳이 아닌데?! 나가!”

‘아니… 씨발. 거렁뱅이, 거렁뱅이 계속 들으니 듣는 거렁뱅이의 기분이 점점 나빠지네.’

실비아가 얼굴을 찌푸린 채 가만히 있자 점원이 명란젓 같은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윽박질렀다.

“적선할 생각 없으니 나가라구!”

“돈 있으니깐 맥주 한 잔만 마시게 해 주세요.”

그녀가 인벤토리에 있던 돈주머니를 꺼내 흔들자 점원이 살짝 낯빛을 바꾸더니 말없이 바의 구석 자리를 가리켰다. 돈주머니를 보고 태도를 바꾸긴 했지만 앉게 해 준단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가 바에 걸터앉자 주근깨가 툴툴대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무시하는 눈빛에 그녀는 게임임에도 하루 만에 서러워져 버렸다.

최대한 빨리 렙업해서 저 주근깨 놈을 혼내줘야 할 텐데.

이를 갈며 실비아가 바에 걸터앉자 사장으로 보이는 털보 남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또 무슨 말을 들을까 싶어 얼른 돈을 지불하고 맥주 한 잔을 시켰다. 털보는 늘상 취해 있는 듯 얼굴이 시뻘건 술톤이었다.

실비아의 눈앞에 풍성한 거품이 있는 생맥주 한 잔과 간단한 마른안주가 서빙됐다. 마른안주는 현실 세계랑 다를 것 없는 땅콩이랑 멸치였다.

‘게임 속에서 현실 음식들을 먹을 수 있나 보군. 맘에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셔보니 실제랑 다를 것 없는 풍성한 거품, 시원한 감각이 입안에 느껴졌다.

“캬아…. 이 맛이지.”

맥주의 알싸하고 시원한 맛, 주점 안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손님들의 목소리…. 모든 것이 현실과 다를 것 없이 생생했다.

눈앞에 선택지와 시스템 창이 뜨지 않았다면 이세계에 떨어진 건지 게임 속에 들어온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켜며 입에 땅콩을 털어 넣고 있자 털보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보통 게임에서는 NPC들이 먼저 다가와서 정보를 주곤 하던데, 저 털보가 NPC일까?’

그녀의 예상이 맞았는지 다가온 털보가 손바닥을 간사하게 싹싹 비비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제국의 온갖 소문들이 지나가는 곳이라네. 조금의 팁만 주면 내가 좋은 정보를 알려 줄 수도 있지.”

“흠….”

나무로 된 바에 팔꿈치를 괸 채 그녀는 주인장을 더 가까이 불렀다. 아깝지만 인벤토리에서 5골드를 꺼내 털보 사장에게 건네자 그가 얼굴을 가까이 붙인 뒤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은밀하게 속삭였다.

“필요한 정보가 있나?”

그의 말과 동시에 선택지가 떴다.

1. 동정 미남의 정보를 알려 줘.

2. 일자리 정보를 알려 줘.

3. 거렁뱅이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지?

“동정 미남의 정보를 알려 줘.”

실비아가 첫 번째 선택지를 택하자 그가 수상스럽게 웃으며 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자 털보의 더운 입김이 생생하게 훅 끼쳐졌다.

실비아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 이거 너무 감각구현이 뛰어난데… 참 불쾌….

“이거 어쩌나… 나도 동정인데.”

털보의 술톤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더운 입김이 실비아의 피부에 여과 없이 느껴졌다.

후…. 쓸데없는 걸 들어 버렸다.

싸늘하게 털보를 바라보자 눈앞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1. 급소를 내려쳐 그를 죽인다.

2. 서빙된 맥주를 털보에게 끼얹는다.

3. 털보의 멱살을 움켜쥔다.

마음 같아선 그녀는 첫 번째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현실 같은 게임 감각에 살인은 좀 찝찝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쪼렙인 주제에 폭력을 썼다간 바로 데드엔딩을 맞을 거 같단 말이지.

그녀는 가까스로 분노를 참고 3번째를 선택했다.

실비아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멱살을 움켜쥐자 놀란 털보가 움찔하더니 파리해진 얼굴로 그녀의 손을 털어 냈다.

“농담이야, 농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성질 급한 아가씨군 그래.”

“팁을 줬으니 물어본 거에 대답이나 하시지.”

“그래 알겠으니 진정하게나! …그, 그래! 동정이라면 조만간 성년의 날에 축제가 열릴 텐데 거기서 찾는 게 좋지 않을까?”

성년의 날 축제!

동정 미남들이 나타날 확률이 높은 축제다. 미성년자일 땐 현행법상 야한 짓을 하지 못할 테니 성년의 날을 맞은 축제참석자들은 다 동정. 거기에 분명히 공략 캐릭터가 있을 거 같았다.

뭐, 겸사겸사 게임 속 축제도 구경하고 말이지.

원하는 답을 얻어 화가 풀린 실비아는 엉거주춤 바에 다시 걸터앉았다.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털보는 손부채질을 잠시 하더니 힐끗 실비아를 훑어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만 그 꼴로는 가도 별 수확이 없을걸? 왜 찾는지 알 거 같지만 말이야. 신랑감을 찾으려는 거지?”

“아니야.”

“뻔하구만, 뭘….”

털보는 다 안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맥주만 홀짝였다.

신랑감이라니. 한꺼번에 다 따먹을 생각이다. 실비아는 성격이 급했다. 씨앗을 빨리 모아야 천국으로 갈 테니 보이는 족족 다 따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팁을 더 건네고 털보에게 거렁뱅이 탈출 방법을 물었다.

“거렁뱅이를 탈출하려면 우선 일을 해야 하지. 내가 일자리를 좀 알려 줄까?”

오, 다행히 3번째를 선택하니 자동으로 2번째 선택지가 따라왔다.

털보는 주점 서빙 알바와 신전 청소 알바를 소개해 주었다. 주점 서빙 알바는… 털보와 주근깨 놈 등 잡캐릭터들을 계속 봐야 하는 알바이기에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가만… 근데 신전 청소 알바라고?

“신전 청소 알바라고?”

그녀가 목소리를 높여 묻자 털보가 어떻게 해석했는지 머뭇거리다 말했다.

“급여가 좀 적긴 해. 그래도 뭐, 신앙심을 기를 수 있지.”

아니, 실비아는 게임 속에 신전이 있단 것에 깜짝 놀란 것이다. 신전이 있으면 백 퍼센트 그곳엔 동정 미남이 있다! 신을 모시느라 여자를 모르는 순진한 동정 미남 신관이 분명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신전 알바를 내일부터 당장 해도 될까?”

“그래. 신전에다가 말해 두도록 하지.”

얻을 것을 다 얻은 실비아는 서빙된 맥주를 대충 들이켜고 주점을 나왔다.

생각보다 쉽게 흘러가는 상황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만간 공략 캐릭터를 만날 수 있겠군.

실비아가 기쁨을 만끽하던 중, 갑자기 주점 밖으로 나오자 경쾌한 효과음이 뜨더니 ‘업보가 10 상승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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