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집채만 한 호두나무 사이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과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새소리.
“지금 거의 다 왔으니, 준비해 주세요. 고기 좋은 거로요.”
미리 연락해놓았는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은 그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어디 가는 거예요?”
“고기 먹으러.”
“산에요? 맛집이라 구석에 있나…?”
“음, 그럴걸?”
“와보신 적 있으세요?”
“응. 하지만 고기를 먹어보는 건 처음이야.”
알 수 없는 대답만을 늘어놓는 이현은 새치름한 선아의 뺨을 한번 쭉 늘리곤 계속해서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5분 정도 계속해서 달린 그는 산속에 덩그러니 지어진 농가 앞에 차를 세웠다. 그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따라 내린 선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어디에도 이곳이 고깃집이란 팻말은 없었다. 하얀 회벽에 주황색 기와지붕, 그리고 나무로 만든 대문이 인상적인 곳의 마당엔 백구 세 마리가 뛰어놀고 있었으며, 건물 뒤에선 흰 연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여기 어디에요…?”
“들어가 보면 알아.”
짚단을 태워 고기를 굽는, 고소한 냄새가 두 사람의 코를 자극했다. 이현은 넋 나간 선아의 손을 잡고 안채를 가로질러 뒷마당까지 걸어 들어갔다.
“접니다. 고기는요?”
이현의 외침에 커다란 아궁이 뒤에 서 있던 중년인이 고기 집게를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상 차려놨으니, 앉으세요. 아이고, 사모님이신가 보네.”
“예. 제 아내에게도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요.”
“나 참, 땅 사러 와서는 고기 구워 먹기 좋은 곳인지 직접 확인한다는 분은 처음이네. 그래요, 뭐 어차피 나도 한 끼 하려 했으니 맛좋게 구워 먹어봅시다! 여기 주인이 아궁이 하난 끝내주게 해놓았거든요.”
“좋네요. 냄새도 좋고요. 여기, 부지를 더 넓혀서 건물을 올릴 수 있다고 하셨죠?”
“말씀하셨던, 안채와 별채. 그리고 온실까지 다 만들고도 남지요. 저기 호두나무랑 엄나무, 밤나무 보이시죠? 거기부터 쩌어기 안쪽 소나무 있는 곳까지 다 사장님 땅입니다.”
선아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이현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고기 굽기에 여념 없는 사내를 뒤로한 그녀가 이현의 팔을 잡아당겨 시선을 끌어왔다.
“무슨 소리예요? 땅이라니? 여기 살 거예요?”
잘 익은 배추김치 맛을 본 이현이 시큼한 맛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슬쩍 웃었다.
“별장을 지을까 했는데, 아예 눌러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이 산 전체가 네 화원이 되는 거야. 가게 접고 나서 한동안 힘들었던 거 알아. 아무렇지 않은 척 한 것도. 그렇다고 다른 놈들에게 꽃을 주는 일은 시키고 싶지 않고, 꽃을 만지게 하고는 싶고. 그러니 온실을 만들어 줄게. 백합을 키워도 좋고, 장미를 키워도 좋아. 파리지옥을 키운다 해도 아무 간섭 안 할 테니, 당신 하고 싶은 거 해봐.”
“…진심이에요?”
“응. 안채와 별채를 짓고 이 건물은 개조해서 카페처럼 꾸미려고. 손님들 오면 파티도 하고, 가끔 둘이 커피도 마시는 간이주방 같은 거로 만들지 뭐.”
그제야 선아는 새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쪽엔 작지만, 존재감 있는 개울이 흘렀고, 한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을 만큼 나무그늘 천지다. 선아의 시선이 흔들린다. 접시 가득 삼겹살을 담아온 중년인은 그녀의 시선이 스친 어느 한점을 가리키며 쌈을 크게 싸 입에 넣었다.
“저쪽 풀을 정리하면, 경치가 끝내줍니다. 시내가 한눈에 보여서, 고층아파트 못지않아요. 사장님이 결정 잘하신 거예요. 이 뒤로 이젠 고속도로도 개통될 거고, 길 아래론 발전을 계속하고 있으니 땅값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고요. 아, 물론 조용한 곳이 필요하다고 하셨지만요.”
이현이 소금장을 찍은 두툼한 고기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모이를 받아먹듯 고소한 고기를 우물거리는 선아는 상기된 표정으로 입술에 묻은 기름기를 빨았다.
“온실, 크게 만들어 주세요.”
그제야 이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창은 둥글게…. 아치형으로요. 문은 파란색, 크림색 벽돌집이요.”
“응. 다 네 마음대로.”
두 사람은 동시에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기대감에 들뜬 선아를 보니 몰래 준비한 보람이 느껴져 그의 마음도 기쁘게 두근거렸다.
“그렇다고 화초에만 빠져서 나하고 안 놀아주면 안 돼. 별채는 특별하게 만들 거란 말이야.”
“특별하게?”
“그래. 가끔 나하고 놀아줘야지. 그러기로 했잖아. 플레이 룸을 만들 거야. 완벽하게….”
선아는 삽시간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그가 내민 쌈을 쏙 받아먹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야하게 속삭일 때마다 은밀한 곳이 욱신거렸다. 시선을 피하는 선아와 태연하게 웃으며 쌈을 싸는 그. 아무것도 모르는 중개인이 오이고추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플레이 룸이라니? 게임을 좋아하나 봐요? 아아, 우리 아들내미도 군대 다녀오더니 진종일 게임만 해대고, 그거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 사장님이랑 사모님은, 게임 같은 거 좋아해도 이렇게 번듯하신데, 그놈아는 뭐가 되려 그러는지. 쯧쯧,”
선아는 터져 나온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푹 숙였고, 이현은 입에 든 쌈을 우물우물 씹어 삼킨 뒤,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유쾌한 중개인과의 썩 괜찮은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고기 냄새가 풀풀 풍기는 몸으로 차에 올랐다. 킁킁, 제 몸에 나는 냄새를 맡은 그녀가 중개인의 이야길 떠올리며 또다시 무릎을 모아 키득거린다.
이현은 시동을 틀고 볼륨을 높였다. 루시드 폴의 잔잔한 음색이 한 뼘쯤 열린 창문 밖까지 부드럽게 흩어진다. 이현은 무릎을 모은 그녀를 완전히 돌려 앉혀, 창밖을 보게 했다. 그리곤 긴 머릴 하나로 그러모아 세 가닥으로 나눈 뒤 천천히 땋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스치는 자리마다 꽃송이가 피어나는 기분이다. 간질거리면서도 기분 좋은 감각에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그녀가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불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릴 천천히 땋아 내린 그가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뒷목에 입술을 누른다.
“마음 같아선 해외로 데리고 나가 아무도 못 보게 가둬두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네가 너무 슬퍼할 거 같아서. 나로선 최대한 양보한 거야. 완공하면, 우리 여기서 살자. 답답한 아파트 말고, 조금 더 아늑한 감옥에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귓불에 입술을 붙인 그가 또다시 속삭인다.
“아이도 낳고, 키우고, 사랑하고…. 게임중독자는 되지 않게, 계획적으로 함께 놀면서.”
짓궂은 미소와 함께 그가 그녀의 얼굴을 돌려 입술을 눌렀다.
이마를 맞대고 몇 번이고 서로의 입술을 핥았다. 농밀한 키스를 나누는 동안, 풋풋한 풀 냄새가 차창을 넘어 스며들어왔다.
둘은 레몬 셔벗을 먹기로 했다. 꼭 한번 함께 가자고 약속했던 카페로. 운전하는 내내 붉은 신호 앞에 멈춰 설 때마다 그는 입술을 맞대왔다.
레몬 셔벗.
작은 고블릿에 담긴 레몬 셔벗을 처음으로 접한 그가 시큼한 향에 질린 듯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곤 한입 먹은 셔벗을 넘기며 턱을 괴고 마주 앉은 그녀를 관찰했다.
“신 거 원래 이렇게 잘 먹었어?”
선아는 이미 싹싹 비운 고블릿을 밀어내곤 이현이 남긴 셔벗을 크게 한입 떠넣었다.
“신 거 먹고 싶으면 임신한 거라고들 하던데.”
순간 선아는 수저질을 멈추고 이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가 피식 웃으며 어서 먹으라는 듯 그녀의 손등을 다독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진한 커피를 한잔 주문하려던 이현은 들고 있던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선아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셔벗을 마저 다 비우곤 희미하게 웃으며 아랫배를 어루만진다.
“우리 아이는 신 걸 좋아하려나 봐요. 아니면 아가씨려나? 11주밖에 안 됐다는데…. 벌써 취향이 나오나요?”
쨍그랑 소리와 함께 그녀가 쥐고 있던 수저가 떨어졌다.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쥔 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감격에 겨운 듯 입술을 달싹인다. 나른한 오후, 초목 사이로 불어 드는 바람이 시원한 아파트 근처 카페에서 그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충격을 경험했다.
선아는 온화하게 웃으며 그의 뺨을 감쌌다. 쭉 뻗은 콧대를 지나 뺨을 쓸어내린 그녀가 제 손목을 낚아챈 이현의 손을 감싸 쥐며 조용히 응시했다.
“임신선물 고마워요. 최고의 선물이에요. 사랑해요….”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고, 폐부 안쪽의 열기는 어느덧 뜨거운 습기가 되어 차올랐다.
*에필로그*
경준은 눈앞의 어둠을 직시했다.
중국 후찬성에 마련된 어느 세트장. 김완 감독의 신작은 느와르에 정통액션이 가미된 마초적 작품이었다. 분명 경준이 대본을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달랐다.
경준은 뻐근한 어깨를 움직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목에 묶인 사슬이 철컹 소릴 내며 흔들리고 거친 시멘트 바닥에 꿇린 무릎은 생채기가 났는지 따가웠다. 눈앞의 사료 그릇을 보며 경준은 실소했다.
악역 조연의 비역질 상대. 낡아빠진 팬티 한 장이 그의 유일한 의상이었고, 그에게 허용된 카메라는 감금된 사내가 주인을 반기며 발정할 때뿐이었다.
〈서경준, 너는 감정이입이 부족해. 넌 한마디로 개야. 내 영화에 완전히 이입할 때까지 이대로 지내봐.〉
김완 감독의 취향이 이쪽이라 하더니,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출연을 제안한 거였나?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거대창고. 경준은 어둠만이 유일한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오늘도 문밖에선 매니저와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분에 겨워 날뛰던 매니저의 소린 이내 잠잠해진다. 경준은 이틀 전 맞은 뺨을 어깨에 비비며 바닥에 놓인 그릇에 얼굴을 박았다.
미지근한 물맛, 상해버린 보리빵의 쿰쿰한 냄새가 그의 비위를 건드렸다.
외부의 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미쳐가는 기분이다. 완벽한 개가 될 때까지, 김완 감독은 사슬을 풀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반쯤 미쳐버린 듯 큭큭 웃으며 바닥에 이마를 찧을 때였다.
[보, 본부장님?]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창고 문이 열렸다. 길게 뻗어 들어오는 빛줄기 틈으로 키 큰 남자의 실루엣이 늘어졌다.
그는 묶여있는 자신을 쳐다보며 열려있던 문을 닫았다. 그의 뒤로 겁에 질린 매니저의 표정은, 데뷔한 이래 가장 웃긴 모습이라며 경준은 키득댔다.
다시금 찾아온 어둠.
탁, 소리와 함께 라이터가 켜지고 메케한 연기를 내뱉은 사내는 자리에 서서 그를 관찰했다.
“김사빈도 제게 떠넘기더니…. 이겐 완전히 매장하려 하시는 겁니까? 재밌네요, 최 본부장…. 아니, 최 이사님.”
경준의 말을 들은 사내는 자리에 서서 몇 개비의 담배를 더 피운 뒤에야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
경준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하지만 목에 걸린 사슬에 숨이 막히고 켁켁거리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천천히 닫히는 문틈으로 보이는 위험하리만치 오싹한 미소.
[배우가 아직 각오가 안 된 것 같네요. 제대로 하세요. 이량에서 후원하고 에르난테에서 지원하는 영화입니다. 대작 한 번 찍어야죠, 김완 감독.]
문이 닫혔다.
쩔쩔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내의 뒤를 따라 사라진다. 경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다. 아마 내일쯤 물을 갈아주기 위해 문이 열릴 것이다. 그럼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개처럼 입 맞추겠지? 그리곤 경멸의 시선을 던지곤 사라질 것이다.
그는 웃었다.
누군가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광인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목을 졸라맨 목줄이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그녀의 것이었던가? 지금껏 최이현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제 모습에 미친 듯이 웃던 그가 일순 주먹을 쥐고 고성을 내질렀다.
“아악! 아아악! 젠장, 최이현!”
『나쁜 충동』 마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