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경준아, 그 아가씨가 네 옛날 애인인 건 잘 알겠고 안타깝게 헤어진 것도 알겠지만, 몸 좀 사려. 너 지금 이럴 때 아니야.”
“네, 알아요.”
“마지막이야. 더는 안돼. 위에 보고할 거니까, 오늘로 다 정리하고 오디션 준비나 신경 써.”
파주를 빠져나와 서울 길을 한참이나 달려 도착한 건물 앞엔 학원을 찾은 학생들이 막 승강기에 오르던 중이었다. 경준은 쓰고 있던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도로변에서 기다리겠다고 말을 남긴 매니저가 사라진 뒤에야 경준은 건물에 들어가 비상구 문을 열었다. 괜히 승강기에 올라 불특정 다수와 마주치느니 조용한 계단을 이용하는 게 나았다.
인적없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고인 식은땀을 바지춤에 쓱쓱 닦았다.
선아는 어떤 표정일까? 화를 낼까? 대화하지 않으려 할까? 그녀는 정말 서브미시브가 아니었던 걸까?
비상구 너머 학원에 드나드는 아이들 소리가 잦아지길 기다리던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강사진을 소개하는 화려한 벽보를 지나 복도 끝 명패 없는 문앞에 섰다. 경준은 천천히 지문센서에 손가락을 올렸다.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짜릿한 소리를 들으며 그가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길게 뻗어 들어온 빛줄기에 비친 사람의 인영. 정신을 잃은 듯 바닥에 쓰러져있던 누군가가 꿈틀거리며 무릎을 세웠다. 경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사빈의 모습을 응시했다.
목에 걸린 목줄, 묶인 손목, 그리고 바닥에 놓인 지저분한 물그릇. 경준은 그녀의 모습에서 낯설지 않은 누군가를 떠올렸다.
경준은 입구 쪽에 있는 불을 켜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통수를 한 대 가열하게 까인 기분이다. 실소가 터짐과 동시에 그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키득키득 웃었다. 사빈의 눈동자가 창황하게 흔들린다. 그녀의 눈동자엔 안도감과 놀라움, 그리고 기묘한 경외가 넘실댔다.
담배를 문 경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일 꾹꾹 누르곤 사빈에게 다가가 입술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더럽게…. 질질 흘리고.”
왈칵 눈물을 흘린 사빈이 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일은 틀어졌다. 피부 위로 솟아난 미세한 소름을 느끼며 경준은 사빈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사빈은 뻣뻣하게 굳어가는 손끝을 파르르 말아쥐고는 희미한 미소로 경준을 올려다보며 핏기없는 입술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주인님.”
***
전화를 받은 이현의 표정이 의아하게 굳었다.
이현은 벤탄 시장의 공예품점에 들어간 선아를 응시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다시 말해 봐. 아무도 없었다고?”
[어. 아무도 없어서 당황했나 보더라. 화가 나기도 했고. 잘 타일러 보냈으니, 문제 될 건 없지만, 대체 누가 들어온 거냐? 경찰에 신고라도 한 건가?]
“경찰에 신고 못 해. 김 의원 딸이야. 얼굴에 먹칠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없어. 어쨌든…. 한국에 가봐야 알겠지만, 내 쪽에도 아직 김사빈의 연락은 없어.”
[좋아, 일단 들어오면 보자. 재미는 좋냐? 베트남?]
쨍하다 못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햇살에 이맛살을 찡그린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힌다. 멀리 공예품점에 들어간 선아는 직원이 권유하는 붉은색 아오자이를 애써 거절하며 물러서고 있었다. 직원이 선아의 몸에 대어준 아오자이를 보는 순간, 그녀가 입은 모습을 상상했다.
“재미 정도가 아니야…. 어쨌든 들어가면 봐. 끊는다.”
이현은 공예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눌한 영어로 너무너무 잘 어울리는 아가씨라며 치켜세우던 직원은 이현에게도 동의를 구하듯 붉은색 아오자이를 내밀었다.
허벅지 옆으로 길게 슬릿이 들어간 그것은 한눈에 보아도, 그녀의 피부색과 퍽 잘 어울렸다.
“이런 건 필요 없는데 자꾸 권하셔서 곤란하던 차예요.”
선아가 멋쩍게 웃으며 손에 든 공예품을 내려놓았다.
“한번 입어보지그래? 잘 어울리면, 기념으로 하나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정말요? 하지만….”
“입어봐. 색이 예쁘네. 립스틱 색이랑 비슷해.”
이현은 직원이 들고 있는 원단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하얀 이를 드러내곤 착장을 준비했다. 병풍처럼 처진 휘장 안으로 어리둥절한 선아를 끌고 들어가 그녀의 옷을 능숙하게 벗겼다.
눈 부신 햇살이 통유리를 통해 쏟아졌다. 이현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그녀가 들어간 휘장 바깥에 서 있었다. 밀고 들어온 햇살에 선아의 그림자가 하얀 원단 너머 희미하게 일렁였다. 발가벗은 그녀의 그림자에 가슴이 뛴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그녀가 들어간 휘장을 움켜쥐었다.
서울에서 일어난 일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린 뒤.
휘장을 걷고 나오던 직원은 앞에 서 있는 이현을 보며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싱긋 웃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베트남 어로 안쪽을 가리켰다.
이현은 휘장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한국에 돌아가면 쏟아지는 질문들과 해결해야 할 일들에 당분간은 바빠질 것이 뻔하다. 따가운 햇볕 때문인지 혹은 긴장 때문인지, 이현은 공예품점의 공기가 한층 더 뜨거워짐을 느꼈다.
물론, 가장 빠르게 처리해야 할 사람은 서경준.
그녀의 그림자에 알 수 없는 기다란 줄 그림자가 합쳐졌다. 그녀의 허리 뒤에서부터 시작한 긴 줄을 따라 시선을 들자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줄 전구의 전선이 보였다. 이현은 빳빳하게 굳어버린 하반신의 무게감을 헛기침으로 억누르며 휘장을 들었다.
눈부신 빨강.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카락, 목덜미에서부터 이어진 아오자이의 우아한 선을 따라 길게 뻗은 슬릿 사이로 숫눈 같이 흰 다리가 수줍게 모인다.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볕을 만끽하며, 어쩐지 눈가가 시려 왔다. 첫눈에 반한 남자의 애정 어린 미소에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던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예쁜가요?”
“어.”
“얼마나요?”
“…눈부시게, 마땅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시장통을 울리는 낯선 언어에 가슴이 들뜬다. 오토바이의 매연도 귀를 찢는 경적도 멀게만 느껴졌다.
“예쁘다, 우리 선아.”
***
콧등에 걸린 안경테를 추어올린 명숙은 사직서를 내민 사빈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네 멋대로 들어왔다가 네 멋대로 나가는구나.”
날카로운 말에도 사빈은 딱히 동요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기간 중국에 나가 있어야 할 이유가 생겨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중국?”
“네.”
“중국은 왜?”
“사생활입니다.”
지난번 이현 내외의 정보를 함부로 입에 올린 죄로 명숙에게 호되게 혼쭐난 사빈이었다. 그녀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혜수가 말했던 이현의 특이점은 생각보다 쉽게 발견되었고, 모든 게 사실임이 밝혀졌다. 했기에 한동안은 혜수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량의 주인이 될 이현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한 명숙의 계획은 일보 후퇴한 채 멈춰버렸다.
명숙은 사빈이 내민 사직서를 흔쾌히 수리했다.
“좋아. 의원님도 요즘 들어 사빈이 너를 집으로 불러들이려 하시는 것 같던데…. 중국에 잘 다녀와. 선물 사오고.”
“네.”
싱긋 웃는 미소에 여유가 느껴졌다. 사빈은 꾸벅 인사한 뒤 평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하나로 높게 올려묶은 사빈의 뒷덜미에 원인 모를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의 손자국처럼 보이는 소름 끼치는 피멍에 하마터면 명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부를 뻔했다.
저게 대체 뭐야?
사빈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평정심을 되찾은 명숙은 비서실을 호출해 박 실장을 불렀다.
“지난번 일은 어떻게 됐어? 그쪽에서 승낙했다고 하던데….”
마치 비밀스러운 이야길 하듯 목소릴 낮추자, 박 실장 역시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보고했다.
“김완 감독 측에서 서경준 씨를 캐스팅했고, 조만간 해외로 나갈 겁니다. 아마 3년에서 4년 정도는, 한국에서 볼일 없을 겁니다.”
“그래? 잘됐네.”
“그런데 서경준 씨는 왜, 해외로 보내버리시는 겁니까? 본부장님 때문인가요?”
“신경 쓰지 마. 그냥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거니까. 수고했어, 두둑이 챙겨줄게.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 박 실장.”
박 실장의 안색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녀가 나간 뒤 명숙은 펜대를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혜수가 다녀가고 사빈을 불러 닦달한 결과, 선아의 상대가 서경준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근본 없는 변태 놈이 본부장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챘다. 선아를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놈의 목을 졸라 선아와의 관계를 실토하게 한다면 더 좋았겠지만, 혜수의 말대로 지금의 이현에겐 선아가 필요했다.
그럼 눈엣가시는 치우고 봐야지. 최이현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건 두고 볼 수 없으니까.
명숙은 점심을 위해 집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임원 식당이 있는 3층으로 내려오자, 유리 난간 너머 회사를 드나드는 직원들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인사하며 합류하는 사람들과 식당에 들어서려던 명숙은, 로비에 나타난 선아를 보며 걸음을 멈췄다. 단 한 번도 당황한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당돌한 조카며느리. 그렇다고 무례한 것도 아니며, 예를 갖추지 않은 적도 없다. 이선아는 마치 모든 걸 자로 잰 듯 정확한 판단력과 언변으로 심기를 건드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친절에 녹아내리겠지만, 명숙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완벽한 사람은, 누구보다 견고한 벽을 세워 아주 더러운 치부를 숨긴다.
허점 없는 사람일수록 그 비밀은 끈적하고 역겹다고 생각했다.
선아의 곁으로 이현이 다가갔다. 선아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이현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이현 씨, 여기요.”
이현을 흘긋대던 사람들이 선아를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최이현이라면 좀 더 도회적이며 돈깨나 많아 보이는 여자와 결혼했을 거라고 상상했나 보다. 그들은 선아의 소녀 같은 외모에 한번, 그녀를 향한 이현의 표정에 두 번 놀랐다.
얼음송곳처럼 뾰족하게 날 서 있던 이현은 마치 딴 사람처럼 근사하게 웃으며 선아의 허리춤에 팔을 감았다. 반쯤 안긴 자세로 마주 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싱긋 웃으며 반대편 손을 깍지꼈다.
“뭐 사주시려고 불렀어요? 저 고기 먹고 싶은데.”
“고기? 그래, 고기 먹자. 근데 요즘 자꾸 체하는 것 같던데, 고기 먹어도 괜찮겠어?”
“그래도 먹고 싶은 걸 어째요? 맛있는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음, 그래. 좀 멀어도 괜찮지? 아직 12시 전이니까.”
“네.”
손목시계를 살핀 그가 그녀를 이끌어 회사를 나와 차에 올랐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이후 이현은 한결 느긋해진 표정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데 로사에 들어오기로 했던 사빈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했다고 한다. 주인이 직접 선아에게 연락해, 다시 한 번 화원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선아는 점점 외곽으로 향하는 이현을 보며 궁금증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산뜻한 햇살, 조금은 서늘해진 바람. 9월 셋째 주 월요일. 그는 근사한 고깃집을 소개하겠다며 경기도 외곽으로 차를 몰았다.
창문을 살짝 열어 자연 바람에 행복해하던 그녀는, 창밖으로 펼쳐진 산세의 모습에 멍하니 시선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