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충동-23화 (23/25)

23화

“자, 세이프 워드는?”

“에르난테로 하겠습니다.”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

“주인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이현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러자 거친 구둣발이 그녀의 얼굴을 짓밟는다. 바닥에 짓밟힌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희한한 소릴 냈다.

“더러워. 붙지 마.”

“네.”

“벗어.”

이현은 사빈에게 명령하곤 무릎을 털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본 그가 옷을 벗기 시작한 사빈에게서 벗어나 소파에 몸을 앉혔다.

이제 슬슬 배우들이 들이닥칠 시간이다.

이현은 반쯤 넋이 나간 사빈을 바라보며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본격적인 플레이의 시작은 이제부터였다. 사빈이 입은 블라우스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속옷 차림의 그녀만이 남았을 때였다.

“이제 시작이야.”

알아들을 수 없는 한마디와 함께 번호키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빈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문은 열렸고 모자를 푹 눌러쓴 두 명의 사내가 안광을 빛내며 뛰어들어왔다.

“누, 누구야!”

사빈이 소리쳤지만,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힘에 밀린 그녀가 바닥으로 짓눌리고, 속옷은 너덜너덜하게 벗겨졌다. 거친 손길에 머리채가 잡히고 눈앞의 사내들은 잔인하게 그녀를 옭아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현을 찾아 두리번거림과 동시에 불이 켜졌다.

사빈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갈이 물린 이현이 바닥에 무릎 꿇고 노끈에 묶인 모습은 강인한 도미넌트의 모습을 기대했던 사빈의 상상을 철저하게 깨부쉈다.

이현이 뺨을 맞은 듯 붉어진 얼굴로 두 눈을 가라 뜬다. 쳐들어온 사내가 걸걸한 욕설을 내뱉으며 그의 머리채를 잡고 한 번 더 얼굴을 가격했다.

“꺅!”

사정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음부를 파고든 손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든 샘을 거칠게 유린했고 그녀의 입엔 누군가의 양말이 물렸다. 사빈은 어쩐지 익숙한 상황을 느끼며 천천히 벌어지는 무릎 너머로 이현을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들곤 한숨과 함께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누군가에게 유린당하는 그녀를 방치했다. 음습한 공기와 함께 진짜 레이프 플레이가 시작됐다.

‘이건 아니야…. 아니야!’

허둥대던 그녀가 세이프 워드를 외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입안 가득 채워진 천 뭉치에 소리는 삼켜지고 뭉개진 비명은 차가운 형광등 아래 산산이 무시되었다.

‘본부장님…. 최이현!’

핏대 선 그녀의 눈시울이 빨갛게 부어오른다.

***

“아주 빨간 색은 어떠세요? 면세점에서만 판매하는 색상인데,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요?”

직원의 말에 선아는 피처럼 붉은 립스틱을 손등에 발라보곤 선뜻 카드를 내밀었다. 아주 가끔은 이렇게 쨍한 컬러가 필요했다. 그가 말한 샴페인 한 병과 약간의 화장품, 그리고 소화제를 산 뒤 항공사 라운지로 향했다.

탑승시각까진 겨우 30분 남은 상황. 간단하게 커피와 쿠키 몇 개를 집어먹은 그녀가 원예학 책을 폈고 책갈피가 끼워진 페이지를 찾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하다. 불안감과 조급함에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책장 가득한 활자에 집중하던 그녀의 귓가에 탑승안내 방송이 나왔다. 티켓을 확인한 그녀는 면세점 봉투를 들고 라운지를 빠져나와 탑승구를 향했다.

티켓을 검사받으면서도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한적한 일등석 전용 출구. 상냥한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은 그녀는 더운 수건에 손을 닦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탑승구를 흘긋흘긋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바쁘게 움직이던 스튜어디스를 붙들었다.

“오늘 일등석은 만석인가요?”

“네, 만석입니다. 일행분이 아직이신가요?”

“네…. 전화도 안 되고 해서요. 알겠습니다. 몇 분이나 남았죠?”

“탑승마감 8분 전입니다. 저희 측 직원이 고객님을 찾으러 수속장에 나가 있으니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네….”

대체 무슨 일로 먼저 가 있으라 한 걸까? 새벽부터 사라져버린 이유가 뭘까? 왜 안 오는 거지? 김 비서는?

별의별 생각에 머릿속에 쥐가 나는 것만 같다. 혹여 엇갈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 안쪽이 뻐근해졌다. 오금이 저려 탑승마감 2분 전,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때였다.

“앉아. 위험하게 왜 일어나.”

그녀의 어깨 위에 닿은 손, 살짝 가쁜 숨소리.

마치 전력 질주라도 한 듯, 땀을 닦은 이현이 싱긋 웃으며 그녀 곁에 자리했다. 선아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스튜어디스에게 재킷을 넘기고, 차가운 얼음팩을 받아드는 그를 보며 선아는 버럭 소리쳤다.

“어, 얼굴이 이게 뭐예요!”

마치 싸움박질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입가에 든 푸른 멍과 핏자국에 선아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곤 그녀의 손목을 잡아 곁에 앉혔다.

“괜찮아. 약간 트러블이 생겼었는데, 잘 해결했어.”

그녀가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정말 괜찮아요? 누가 그랬담? 그걸 가만뒀어요?”

“아니. 가만두긴. 아주 잘 해결했지. 걱정 마. 이제 아무것도….”

그의 미소에 죄어들던 가슴이 확 풀어졌다. 뜨거운 열기가 번진다. 그녀가 그의 손등에 입 맞추며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김사빈 씨도 안 오고…. 얼마나 걱정하고 마음 졸였는데요….”

“김 비서는 안 와. 아마 이제, 볼일 없을 거야. 하도 귀찮아서 치워버렸어.”

“치워요…? 그게 무슨,”

그녀의 말을 자르듯, 스튜어디스가 웰컴 음료와 간식을 가져왔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은 그가 상체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다. 은은한 피 맛에 또다시 울컥한 표정을 짓는 선아.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 못해 미치겠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몇 번이고 물고 빨며 나른하고도 다정하게 속삭인다.

“비행시간도 긴데, 자극하지 마. 베트남에 도착하면 뭐부터 할지 생각해 봤어? 우리 신혼 여행 이후 첫 여행인데…. 나 지금 엄청 떨고 있는 거 알아? 좋아서.”

***

아프다.

온몸에 매질을 당한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은 흠뻑 젖었고 정액이 묻은 얼굴은 끈적하고 비릿하며 따끔거렸다.

사빈은 손을 움직여보았다. 허리 뒤로 묶인 손바닥에 감각이 사라지고, 바닥에 놓인 그릇에 담긴 물과 쿠키는 이제 바닥을 보인다. 눈물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더욱 두려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

두 명의 괴인은 사정없이 박고 몇 번의 사정 후에야 플레이를 멈췄다. 하지만 풀어준 건 이현 하나였다.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이들은 멋쩍게 웃으며 손수건을 건넸고, 이현은 매너 좋게 웃으며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돌아서서 문으로 향하던 그가 일순 고개를 틀어 비릿하게 웃었다.

오만하며, 섬뜩하고, 교만한 아름다움. 남자의 미소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상황을 잊고 가슴이 뛰었었다.

모든 게 계획된 일.

큭, 큭, 갈라진 웃음소리가 어둠을 가른다. 사빈은 고개를 숙여 그릇에 담긴 물을 핥았다. 몇 번을 느꼈는지 몰라도, 사실 이현이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절정이 찾아왔다. 정말 정신병자라도 된 걸까? 나쁜 짓인 거야? 아니잖아…. 그저 성향일 뿐이잖아.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까…. 물론, 본부장님은 썩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이현을 떠올리자 눈물이 또 흘렀다. 미움과 그리움이 동시에 솟구친다. 첫눈에 반했고 그 아니면 안 된다며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철저하게 그의 취향에 맞춰 변해가는 모습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나는 잘못이 없다. 모든 건 나를 받아주지 않은 그의 잘못이야.

입술을 깨문 그녀가 바닥에 엎드려 가쁜 숨을 헐떡였다.

누구든 좋으니, 나를 알아채 줘…. 나를 구해줘. 그때처럼, 나를….

***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스타일리스트가 달려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준다. 경준은 마지막 에르난테 화보촬영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왔다.

마지막 촬영을 아쉬워하는 스텝들과 한가로이 인사한 경준은 촬영장 입구에 서서 바닥에 닿을 듯 허릴 숙인 매니저를 발견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

명숙은 다가오는 경준을 물끄러미 노려보곤 몸을 돌려 사라졌다. 경준은 어찌할 줄 모르고 서 있는 매니저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매니저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헛기침하며 경준의 어깨동무를 했다.

“우리 배우님, 좋으시겠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량 쪽에서 새로 투자하는 영화에 너를 쓰고 싶대. 무려 김완 감독 캐스팅 오디션 티켓이야. 그것도 최 전무 직인이 박힌.”

경준은 걸음을 멈췄다. 분명 최이현 쪽에서 엉망으로 만들었던 전속계약이다. 그런데 마치 우는 아이에게 사탕이라도 던져주듯 오디션 기회를 줘?

“믿어도 될까요? 전속까지 물렀던 사람들 아닙니까. 썩 신뢰가 가진 않네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너 요즘 이상해. 안 그래도 대표님이 지난번 심리상담사를 다시 한 번 만나보라고 하셨어. 그땐 기분 나쁘다는 티 팍팍 내며 그냥 나와 버렸다면서. 그러지 마.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너 지금 미친 듯이 노 저어야 해. 요즘 세상만큼 물갈이가 쉬운 세상이 또 있는 줄 알아?”

경준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 매니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선아를 발견한 뒤부터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알겠어요. 찾아가 볼게요.”

“그래.”

심리상담가는 말했다.

〈서경준 씨는 의외의 성향이 갖고 계시네요. 설문지만 보더라도, 당신은 도미넌트…. 아니 사디스트입니다. 성생활은 어떠세요? 파트너는요? 정신병에 가까운 성벽은 사람을 망칩니다. 자칫 잘못 했다가는 범죄로 이어지고, 조금이라도 타협이 부족하면 폭력이 되죠. 자, 인정하고 이끌어주는 올바른 관계가 필요해 보이는데…. 서경준 씨, 당신 만족하고 있어요?〉

묻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대답이었다. 마치 살갗을 뒤집어 본성을 긁어내 눈앞에 들이댄 듯한 심리상담사의 말에 냉 녹차가 든 유리잔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도 심리상담가의 왼쪽 입술 끝에 새겨진 점이 익숙해서일지도 모르고, 그녀가 선아와 닮아서일지도 모른다.

자신과의 플레이, 그 이상 애정을 어째서 선아는 견디지 못했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이 너무나 처절해 경준은 견딜 수 없었다.

밴으로 들어온 경준은 잠시 눈을 붙였다. 앞 좌석에 탄 매니저는 최 전무의 제안을 상부에 보고하며 벌써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화 속에서 이미 경준은 한류스타가 되어있었다.

“명화 빌딩에서 내려주세요. 만날 사람이 있어서.”

차량이 움직이는 감각에 경준이 말하자, 매니저는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

“누구? 그 꽃집 아가씨?”

“꽃집 없어졌어요. 잠깐 친구를 만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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