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현 씨는 여전히 제가 조심스러우세요?”
“…물론. 조심스럽다 못해 사랑스러워요.”
“그럼 참지 않으셔도 돼요. 이현 씨가 저를 이해해주는 만큼, 저도 이현 씨의 모든 걸 이해해요. 저는 이현 씨가 저를 좀 더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이런 거?”
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선아야…. 나 지금 하고 싶어.”
그녀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이현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볼멘소릴 냈다.
“진심이야. 빗장 푼 건, 선아 너잖아. 시동을 걸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턱 끝을 잡은 그에 의해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던 입술에 메마른 입술이 포개진다. 이곳이 아파트 중앙 현관 앞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수줍게 입 맞췄다. 끈적하게 벌어진 입술 새로 파고든 혀가 뭉개지고 숨을 섞었다. 그녀의 뒷머릴 감싸 쥔 그가 앓는 소릴 내며 와락 끌어안아 품 안에 가두어 강하게 힘을 준다. 그에게서 열기가 느껴졌다.
“책임질게요. 제가 죽을 때까지, 이현 씨 책임질게요. 평생….”
한참을 안고 있던 그가 무언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아파트 현관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곧장 승강기에 올라 두 사람이 사는 층을 눌렀다.
그가 깍지껴 잡은 손바닥 안으로 땀과 열이 고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부드러운 살을 엄지로 문지르다 손바닥 중앙을 누르는 야릇한 신호에 선아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 남자다 싶었던 첫 만남의 감정이 새록새록 솟구친다.
그가 또다시 앓는 소릴 내며 이마를 짚더니 결국 승강기 구석으로 그녀를 밀쳐 키스를 퍼부었다. 멈춘 승강기 문이 열리고, 문 앞엔 앞집 총각이 얼굴이 벌게진 채 서 있었다. 이현은 근사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전했고, 선아는 숨죽여 웃었다.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노란 센서 등이 들어온다. 그러다 몇 번이고 깜빡이길 반복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수없이 교차한다.
***
거친 파열음과 함께 바이크 헬멧이 바닥을 굴렀다.
조금 전 최이현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선아를 붙들 수 있었다.
경준은 티 나지 않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이크에 걸터앉아 머리채를 쥐었다.
집착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저 아닌 다른 이를 주인으로 섬기는 선아의 모습은 도무지 용서되지 않았다.
해소되지 못한 욕망은 갈 길을 잃고 헤매다 분노가 되어 그의 뇌리를 갉아먹었다. 사빈의 말대로 최이현은 선아를 품에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접근조차 불가능할 만큼 어찌나 경계하던지…. 게다가 요 며칠간은 그녀 곁에 이상한 감시자까지 붙어있었다.
단 한 발자국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그것이 경준을 더욱더 조바심 나게 했으며 냉정함의 한계를 시험하게 만들었다.
최이현을 자극하는 게 아니었나…?
목 안쪽이 답답하고 입이 마른다.
〈출국하고 48시간 뒤…. 이선아 씨가 찾아올 거예요. 마지막 기회예요…. 경준 씨도, 저도. 이제 더는 자신 없네요….〉
48시간.
경준은 바닥을 구르는 헬멧을 집어 들어 먼지를 털고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래, 마지막 기회. 이 끝이 어딘지 몰라도, 이 분노가 해결된다면…. 미친 짓이라도, 기꺼이.
***
잠든 선아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이현은, 때맞춰 걸려온 니르의 전화에 침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 창 너머로 희미한 야경이 흔들리고 이현은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캔을 열었다.
“어, 말해.”
[플레이어는 세 명, 장소는 명화 빌딩 7층. 플레이 명은 레이프 갱뱅. 뭐, 강간에 난교에 갈 데까지 가는 거냐? 어쨌든 둘은 네가 말해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진입할 거야. 그럼 바로 너부터 작업 들어가고, 곧장 서브미시브와 플레이를 시작해. 돔으로서 자존심을 버리는 플레이가 될 거야. 버릴 수 있겠어? 네가 묶일 텐데.]
“이미 버렸어. 흥미 없어. 흥미가 사라졌달까…? 이제 완전히 바이바이야.”
[좋아. 넌 방관자야. 플레이는 두 사람이 할거고, 넌 바닥에 무릎 꿇고 플레이를 끝까지 지켜봐야 해. 플레이가 끝나면, 섭은 묶일 거야. 그럼 네 플레이는 끝나. 48시간 뒤, 네가 말했던 구원자, 또는 오리 아빠가 등장할 차례지. 슬레이브(slave:노예)를 원했던 돔이라 흔쾌히 승낙했어. 마지막 돔이 섭을 구할 거고, 그럼 섭의 플레이는 종료돼. 뭐, 따를지 안 따를지는 그 여자 마음이겠지만, 적어도 돔으로서 너를 존경했던 마음은 사라지겠지. 천하의 최이현이 무릎 꿇는 걸 찍어놔야 하는데! 아오,]
“시끄럽고, 문제 생기지 않게 잘 컨트롤 해. 섭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아. 알지?”
[알지.]
“부탁한다.”
니르는 호락호락한 이현이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이현은 그녀가 종종 앉아있는 베란다로 나가 두 캔의 맥주를 비웠다. 그녀가 바라보던 세상을 그도 함께 바라보았다. 붉은 후미등을 밝히며 달려나가는 차량, 달그림자가 유난히 신비로운 하늘. 시선 언저리를 차지한 녹음이 마치 어울리지 않는 콜라주 같다.
잘 정돈된 베란다를 나온 그가 곧장 침실로 돌아가 그녀 곁에 누웠다. 맥주를 마셔서인지, 잠이 오지 않는다. 이현은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보들보들한 뺨을 어루만졌다.
플레이에 직접 행동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에겐 상처가 될 것이다.
알게 하고 싶지 않아 자꾸만 숨기다 보니, 마치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반듯하고 매끈한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 품 안으로 당기자, 그녀는 마치 잠꼬대하듯 웅크려 안겨왔다.
“미안, 선아야….”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한 그가 각인을 새기듯 잠든 몸에 흔적을 남기고 결국은 흥분해 깊숙하게 파고들어 그녀에게 속해졌다.
잠결이었지만 반응하며 안겨오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피부가 뭉개질 만치 뜨겁게 몸을 겹친다. 결혼이란 연애와는 달리 서로가 변화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행위와도 같다. 아마 흰머리가 듬성듬성 자라나고 눈가와 입가엔 주름이 잡히며 지금보다 조금 덜 근사한 얼굴로 변한다고 해도 사랑한다고 속삭일 것이다.
아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아내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고, 그것은 첫사랑 따윈 비할 바 없을 만큼 강렬한 충격이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점점 더 완전해지고 싶을 뿐이다. 평생을 함께할 사랑하는 연인이자 반려, 그리고 욕망 덩어리.
“사랑해….”
***
출국 당일,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사빈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조금은 과한 화장, 평소보다 과감한 옷차림. 이번 플레이를 거치고 나면, 관계는 변한다.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 몰라도 처음 받게 될 주인의 명령에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준비를 마친 그녀가 방을 나서자, 캐리어 끄는 소리에 막 잠에서 깬 광주댁이 앞치마를 두르며 거실로 나왔다.
“아가씨, 출장 가세요?”
“네.”
“잘 다녀오세요. 끼니 거르지 마시고.”
“네.”
표정 없이 인사하는 사빈을 보며 광주댁은 오싹한 팔을 쓱쓱 문질렀다. 사빈이 초등학교 입학할 당시부터 보아왔던 광주댁은, 점점 더 변해가는 사빈이 적응되지 않았다.
숫기 없고 소심했던 아이가 점점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 보이더니 이제는 완전히 딴 세상에 사는 사람 같다.
광주댁은 집을 나서는 사빈을 배웅하곤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커튼이 쳐져 어두컴컴한 방에 불을 켜고 출장준비로 어수선해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가씨 방이 왜 이래?”
오늘따라 유난히 정신없는 방. 광주댁은 널브러진 옷가지를 집어 들다 침대 위에 놓인 묘한 기구들에 시선을 옮겼다.
남사스런 모양의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구들과 축축한 침대. 마치 질펀한 정사라도 벌인 듯, 혹은 밤새 실수라도 한 것처럼 젖은 시트를 보며 광주댁은 숨을 참았다.
닫혀있던 방문이 다시금 열리고, 광주댁은 흠칫 놀라 돌아섰다. 그러자 살짝 상기된 표정의 사빈이 광주댁과 침대를 번갈아 보고는 애써 담담히 다가와 그것들을 집어 들어 핸드백 안에 쑤셔 박았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굳어버린 광주댁의 귓가에 스쳐 지나가는 사빈의 음성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사생활이에요. 입도 벙긋하지 마세요…. 난 아줌마 음식이 마음에 드니까.”
사빈은 광주댁을 매섭게 노려보고 방을 나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은 광주댁이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고 선득한 공포를 눌렀다.
“아이고, 사모님…. 사모님, 사모님 아…, 아가씨가 이상해요. 아이고….”
현관문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광주댁이 뛰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어있을 안주인의 방문 앞에서 그녀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사, 사모님…. 사모니임…. 나와보셔요. 사모님!”
현관밖에 서 있던 사빈은 광증에라도 걸린 짐승처럼 짖어대는 광주댁의 목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내 대기 중인 차에 짐을 싣고 이현과의 약속장소로 움직였다.
해가 뜨기엔 이른 새벽 5시.
그녀가 건물 앞에 도착하자, 간판이 떼어진 de Rosa 앞에 웅크리고 잠을 청하던 길고양이가 후다닥 줄행랑쳤다. 사빈은 숨이 모자란 듯 심호흡을 한 뒤에야 승강기에 올랐다.
지난번 이현에게 목이 졸린 그 날, 7층에 자신의 아틀리에가 있다는 걸 들켰다. 악의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현은 그에 대해 일언반구의 추궁도 하지 않았다.
무섭다.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기에 플레이 제안은 더더욱 달콤했다.
정상인 아내와의 관계에서 만족할 수 없는 거라면 더더욱. 어느덧 불안은 사라지고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사빈은 비밀번호 대신 지문을 이용해 문을 열었다. 정적을 긁어내는 기계음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쪽의 어둠이 괴물처럼 밀려 나와 그녀를 반긴다.
불을 켜는 대신 한걸음 들어간 그녀가 문을 닫고 침대 앞에 놓인 1인용 안락의자에 시선을 집중했다. 희끄무레한 형체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오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아 앉은 이현이 관자놀일 누르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눈빛. 사빈은 아랫도릴 꿰뚫린 듯 저릿한 감각에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그 앞으로 다가가 다소곳이 무릎 꿇었다.
탁, 소리와 함께 라이터의 작은 불꽃이 사위를 밝혔다가 사라진다. 이어 메케한 연기가 공간을 좀먹기 시작했다.
“주인님….”
핸드백을 내려놓은 사빈은 무릎으로 기어 이현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마치 주인을 반기는 애완견처럼 그의 발치에서 몸을 꼬았다. 서늘하게 내려다보던 이현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뒷머릴 쓰다듬었다.
“주인님…. 하아, 주인님.”
감정이 북받치는 듯 울먹임을 눌러 문 음성이 이현의 신경을 거슬렸나 보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그녀의 뒷머릴 강하게 움켜쥐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목줄을 집어 그녀의 목에 걸고, 사슬을 침대 기둥에 묶었다. 사빈은 묵묵히 이현의 모습을 시선으로 쫓으며 기대감에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