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현이의 독특한 과거라니, 어미가 돼서 할 소리예요?”
“어미라뇨. 엄마 노릇은 고모가 다 하고 계시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건 기본이고, 인사까지 참견 중 아니셨나요? 난 그냥 평범하게 사랑하는 아들을 걱정하는 것뿐이에요.”
“올케, 말이 심한데?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별 볼 일 없는 집안에 밀어 넣어요? 이현이 앞길 망치지 말고, 올케 병원을 좀 다녀보지 그래요?”
혜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오히려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상쾌해 보였다. 코끝을 찡그리며 웃어 보인 그녀가 명숙의 방향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선아 아니었으면, 아마 우리 이현이 별 쓰레기 같은 언론들의 가십거리가 됐을 거예요. 도대체 누굴 닮았나 몰라? 그런 거 본 적 있죠? 막, 손발 묶어놓고 눈 가리고 채찍으로 때리는 그런 거요. 촛농도 떨어트리고 이상한 가죽옷 같은 거 입던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명숙이 주먹을 말아쥐고 분노로 번들거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반응에 평소라면 이죽거리며 속을 긁었어야 할 혜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 하곤 핸드백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우리 이현이에요. 자꾸 연애도 안 하고 걱정이 돼서 뒤를 좀 밟았더니, 에스엠인지 뭔지에 푹 빠져있더라고요. 다행히 더러운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우리 이현이 마음을 확 잡을 여자애가 필요했어요. 알아보니 푹 빠질 수 있는 관계라는 게 있긴 하더라고요. 우리 선아가 적격이었어요. 다행이죠? 선아 아니었으면, 이현이는 아직도 그런 곳에 드나들며 분풀이를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 성격 억압한다고 바뀌나?”
명숙이 본 사진은 기다란 채찍을 손에 들고 누군가를 후려치기 직전의 이현이었다. 배경부터 상황까지 누가 보아도 정상이 아니다. 마치 지난번 선아의 사진을 보았을 때와도 같았다.
온몸의 피가 어딘가로 빨려 나간 듯 명숙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동자를 떨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른 명숙이 자리를 박찼다. 가슴을 들썩이며 부르르 떠는 명숙을 보며 혜수가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다.
“그러니까 우리 애들 좀 가만 놔둬요. 괜히 잘 지내고 있는 애들 들쑤셔서 아홉 시 뉴스 헤드라인 차지하게 하지 말고. 하아, 진짜 더럽게 참견이야. 이러니 내가 고모를 싫어하는 거예요. 한 번만 더 구질구질한 것들 때문에 우리 애들이 피곤해하면, 가만 안 있어요. 아주, 죽여버려야지.”
섬뜩한 말을 남긴 혜수가 문을 열자 대기 중인 김 씨가 그녀를 안내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박 실장은 모든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야 후다닥 뛰어들어왔다. 일단 깨진 것 없는 내부의 모습은 다행이었지만, 석상처럼 굳어있는 명숙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명숙은 주변을 맴돌며 저를 관찰하는 박 실장을 보며 결국 크게 노호했다.
“박 실장! 당장 김사빈이 데려와!”
***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여벌 옷과 사무 도구로 가득 찼다. 베트남은 몹시 덥고 습한 곳이라고 들었기에 선아는 가능한 많은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그날 먼저 공항에 가서 체크인해요. 나는 조금 늦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아쉽게 생각하지 말고 비행기에서 봐요. 아, 샴페인 하나 살래요? 면세점 쇼핑도 하고. 호텔에서 먹기 좋은 거로. 오늘 일찍 들어올게요.〉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환영받지 못할 동행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짐을 모두 챙긴 그녀가 현관 앞에 여행 가방을 가져다 놓고 창문을 열어둔 베란다로 나갔다.
열흘 넘게 집을 비우면, 아마 이 중 몇몇 아이들은 몸살을 앓거나 죽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아는 몇몇 화분을 물이 담긴 커다란 대야로 옮겼다. 쨍한 햇빛에 잎이 상할까 봐 블라인드를 기울여 조도를 조절하고, 액상 비료를 뿌렸다. 제발 잘 살아주기를. 다시 만날 때까지 무사하기를….
화초의 상태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누렇게 변한 잎을 정리한 그녀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거실로 나올 때였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인터폰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선아는 방문객을 확인하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잡지를 정돈해 테이블 아래 넣었다. 두 번째 초인종이 울린 뒤에야 현관으로 달려간 그녀의 손이 떨린다.
엄마의 방문은 언제나 이렇듯 생각외의 긴장을 이끌었다.
“엄마, 어쩐 일로….”
그녀가 문을 열자마자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애란이 인상을 찡그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딸 집에 오는데 말을 해야 해? 그냥 너 가게 그만뒀다고 최 서방이 말해줘서, 뭐 하고 있나 와봤어. 아이고, 이것 좀 받아.”
뭘 그리 바리바리 싸온 것인지, 애란이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 선아는 서둘러 음식으로 보이는 것들을 주방으로 옮겼다.
애란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고는 여전히 깔끔한 집안을 뜻 없이 훑었다.
“그거 밑반찬 몇 개랑 영양제야. 더덕은 프라이팬에 살짝 구워 먹게 생으로 가져왔고, 최 서방 좋아하는 굴비는 두 개씩 싸서 왔으니 꺼내먹어.”
“뭘 이런 걸….”
“너 음식도 못하잖아. 쯧쯧,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텅텅 비어있던 냉장고가 오랜만에 가득 찼다. 혜수와 애란의 합작품으로 만들어진 풍요에 선아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찻물을 올렸다. 애란은 소파 대신 식탁 의자를 꺼내 앉으며 선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티백을 우리던 선아가 고개를 돌리곤 멋쩍게 웃는다.
“왜 그렇게 봐요. 이상해요?”
그러자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애란은 테이블에 놓인 영양제를 뒤적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긴…. 그냥 잘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거지….”
“저 잘살라고 결혼시켜놓고, 웬 걱정?”
“엄마가 좀 무뚝뚝한 성격이라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너 시집보내고 마음 편한 날이 없었어.”
뜨거운 물을 찻잔에 붓자 갈색의 아지랑이가 곱게 피어올랐다.
선아는 예쁜 소서에 잔을 받쳐 애란과 마주 앉았다.
“제가 불행해 보였어요? 저 지금 아주 행복한데요?”
싱긋 웃는 선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애란은 한숨과 함께 찻잔을 들었다.
“별일은 없고? 잘 사는 거 맞아? 최 서방은 어때…. 잘 해주니? 요즘 하도 겉과 속이 다른 놈들이 많아서, 이제야 걱정이 되네.”
“…엄마. 엄마는 제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 것 같아요?”
“뭐긴 뭐야. 아이 낳고 알콩달콩 잘 사는 게 행복한 거지.”
“그럼, 저 행복한 거 맞아요. 알콩달콩, 제 평생 지금보다 행복한 적 없었어요.”
선아는 진심으로 웃었다.
행복의 기준이 누구나 같을 수는 없다. 자신의 기준이 누군가에겐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기준에 맞춰 살아갈 수는 없는 일. 그와 함께 잠들고 함께 일어나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고, 계기를 만들어 준 엄마에게 감사하는 일 중 하나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근데 웬 캐리어야? 여행가니?”
“출장이요.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그래? 멀리 가? 얼마나.”
“베트남으로 오래가요.”
“아유, 그럼 반찬을 괜히 가져왔네…. 연락을 좀 하고 올걸.”
엄마답지 않은 말이었다. 5개월 전 엄마는 지금보다 훨씬 예민했고 신경질적이었으며 하루하루 긴장하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태풍이 지나간 자리처럼 어딘지 황량하다.
그녀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에 저를 향한 연민과 미안함이 느껴졌다.
“출장 가기 전까지 다 먹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무리하지 마. 상하면 버리고 다시 해오면 돼.”
“엄마 반찬 맛있는데, 아깝잖아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애란은 결국 집안을 둘러보는 것으로 질문을 삼켰다.
선아는 행복해 보였다. 아이의 말대로 집안 어디에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표정과 상태 또한 괜찮아 보였다.
괜한 기우였나 싶어진 애란은 향 좋은 차를 모두 비웠다.
결혼 전 찾아온 혜수는 선아의 피학적 성향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아 모든 걸 이야기했더니 오히려 아주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성격이 이상한 여자인가 싶어 선 자리를 거절하려던 찰나, 무시할 수 없는 집안 배경에 홀딱 넘어가 선아를 선 자리에 내보낸 게 사실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밀어붙인 놈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완벽한 남자였으니까.
“아휴, 엄마 가야겠다. 네 아빠가 오늘 닭개장이 먹고 싶다고 해서 장 봐서 들어가야 해. 가끔은 연락 좀 해…. 출장 잘 다녀오고.”
“벌써 가시게요?”
“더 있어서 뭐해. 너 잘사는 거 봤으면 됐지.”
“택시 불러드릴게요.”
“그래라.”
조용히 택시를 호출한 선아는 애란과 함께 승강기를 타고 내려왔다. 혜수에겐 아무렇지 않은 아양이 엄마에겐 어쩐지 힘들고 멋쩍다. 아파트 1층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인사도 없이 멀뚱히 뒷자리에 오른 애란은 출발하려는 기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닫혀있던 창문을 열었다.
“선아야.”
“네.”
“네가 좋아하는 꼬막이 있다는 걸 깜빡했어…. 출장 가기 전에 꼭 먹고 가. 살이 꽉 찬 것들로만 골라 담았으니까, 달래장 살짝 덜어 먹어. 네 것만 청양고추 빼고 만든 간장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먹고…. 통 가져와. 또 만들어 줄게.”
“…네. 고마워요.”
애란을 태운 택시가 천천히 멀어졌다. 선아는 자리에 서서 택시 뒤꽁무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현관 앞에 놓인 벤치에 걸터앉았다. 눅눅한 하늘, 습한 공기.
어쩌면 엄마는 혹여라도 딸이 잘못될까 지나치게 두려웠던 건 아니었을까?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듯 보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매운 것도 잘 먹는데….”
혼잣말하며 시선을 내릴 때였다.
“오늘 저녁은 매콤한 낙지 볶음 먹으러 갈까요?”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온 커다란 손과 낮고도 그윽한 음성. 돌아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맑게 휘었다. 이현이 그녀의 정수리에 입 맞추곤 벤치를 빙 돌아 그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조금 전에 엄마가 왔다 가셨어요.”
“한발 늦었네요.”
“반찬을 바리바리 싸오셔서, 냉장고가 꽉 찼어요.”
“그럼 저녁은 외식 말고 집에서 먹어야겠어요.”
선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손깍지를 끼워 잡은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가만히 감은 속눈썹에 평온이 깃든다.
선아는 불편한 자세로 어깨에 기댄 이현을 보며 쿡쿡 웃었다. 그리곤 아이처럼 보드라운 뺨을 그의 이마에 누르며 입술이 닿은 콧날에 입 맞췄다. 긴 머리가 흘러내려 그녀의 옆얼굴과 그의 턱을 동시에 간질였다.
“우리 아이 가질까요?”
이현의 담백한 음성에 놀란 건 선아였다. 그에 대해 모든 걸 알지는 못해도, 지금껏 아이를 원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멀리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엄마들의 수다가 이곳까지 번져온다. 듣기 좋은 소음이랄까…? 고층에선 잘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였다.
선아가 대답을 않자, 이현이 감았던 눈을 뜨곤 선이 고운 그녀의 턱 끝을 응시했다.
“왜요. 아직 아이는 이른가?”
“아뇨.”
“좋은 아빠가 될 자신 있어요. 물론, 좋은 남편이 우선이겠지만. 평생 고생시키지 않을게요. 우리 아이 낳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