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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충동-20화 (20/25)

20화

캔들 워머 안에 든 향초가 녹으며 달콤하고 녹진한 블랙 체리 향기가 서재 가득 번졌다.

습한 날씨엔 종이 비린내가 심해지고 습기는 책을 상하게 했기에 선아는 비 내리는 날이면 항상 집안 곳곳에 캔들 워머를 밝혔다.

샤워를 마친 그녀가 한 뼘 정도 열려있던 서재 문을 빼꼼히 열고 이현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푹신한 회전의자에 앉아 책상에 다리를 올린 그가 읽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전화를 받지 못한 죗값이랄까? 걱정시킨 값이랄까?

흠뻑 젖은 그를 먼저 샤워실에 밀어 넣고 혜수가 싸준 음식들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나니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벌써 자정. 그는 집으로 돌아온 이후,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 것으로 그녀를 긴장시켰다.

“들어가도 될까요…?”

이현이 책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아는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 그녀가 입은 건 속이 비치지 않는 슬리브리스였지만, 몸의 윤곽만은 선명했다. 이현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무릎 위로 당겨 끌어안았다.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어른 남자의 묵직한 숨결이 가슴팍에 흩어졌다. 선아는 그의 머리칼을 손끝으로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잘못이잖아요. 전화가 온줄 모르고 있었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것인지….”

“성북동에선 별일 없었어요? 갑자기 거긴 왜 간 거예요?”

“그냥요. 어머니 얼굴 뵌 지도 오래됐고…. 어제 그러시더라고요. 이현 씨 좋아하는 보리굴비가 있으니 오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다녀왔어요.”

“하, 어머니도 며느리 꼬시는 재주가 있긴 하시네요. 내일은 그 카페에 같이 가요. 레몬 셔벗이 얼마나 맛있는지 나도 맛 좀 보게.”

“네. 아주 맛있었어요.”

“좋은 냄새 나요….”

그녀에게서 막 샤워하고 나온 사람의 청량감이 느껴졌다. 여자와 남자의 피부는 왜 이리도 다른 걸까? 몸 어디를 만져도 근육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그녀의 기초체력을 걱정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 감촉만은 무엇보다 좋았다.

그가 조금 강하게 안아 그녀는 균형을 잃고 휘청여야 했다. 허우적거린 그녀가 책상에 놓아둔 책 모서리를 건드리자 책갈피를 끼워두지 않은 책장이 파르륵 넘어가 표지가 드러났다. 이현은 아랑곳없이 그녀의 슬리브리스를 내려 뽀얗게 살오른 젖가슴을 빨았다. 뒤로 넘어갈 듯 아슬아슬한 상황에 그녀는 몸을 움직여 책상 위로 올라앉았고 그의 입술은 그대로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사랑스러운 남자.

이현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마치 꿈속에서 기다려온 왕자님을 실물로 마주한 듯한 충격을 받았다. 비단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어렴풋했던 기억이 선명해지고 머릿속에 잔뜩 끼어있던 안개가 걷힌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저를 기억하냐 물을뻔한 첫 만남의 그 날, 이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걸 예상했다.

그의 혀가 유두를 스칠 때마다 자잘한 전류가 하복부에 흐른다. 선아는 자꾸만 움찔거리는 발끝을 꼬물거리다 의자 팔걸이에 올렸다. 이현은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주무르며 흰 목덜미와 갸름한 턱 끝, 그리고 벌어진 입술에 키스했다.

그의 손가락이 파고든 속옷이 축축하게 젖어간다. 숨을 빼앗듯 혀를 밀어 넣은 그가 속옷을 젖혀 미끌미끌하게 젖은 살점을 비볐다.

“왜 이렇게 향기가 좋지?”

입술을 뗀 그가 날카로운 코끝으로 귀밑 여린 살 내음을 음미한다. 그의 가슴너비만큼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들어온 그가 젖어버린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밀어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대로 달콤한 보디클렌저 향이 번졌고, 둘둘 말려 내려진 속옷은 발가락 끝에 걸려 있다가 힘을 잃고 떨어졌다.

“보여줘요. 낱낱이 봐야겠어. 어디서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 건지.”

“부끄러워요….”

“부끄러워해요. 난 빨개진 선아 씨 얼굴 좋아하니까.”

비스듬히 웃는 미소가 근사한 남자. 그가 서서히 무릎을 벌리고 그녀 앞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선아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그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젖혔다. 집요하고도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클리토리스를 검지로 문지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입술을 눌렀다.

뭉근하게 핥기 시작한 그로 인해 선아는 책상을 짚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녀의 긴 머리가 마호가니 책상 위에 검은 물처럼 고였다가 찰랑찰랑 흔들린다.

그건 고문과도 같았다. 간질간질한 내부를 채우고 싶어 허리를 들썩였지만, 그는 집요하게 절정을 통제했다. 혀가 닿는 것만으로도 소변이 나올 듯 저릿저릿한 느낌에 안쪽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입에서는 외설적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말간 물이 흐름과 동시에 그가 길게 핥아 올린다. 위협적으로 발기한 성기가 파자마를 들어 올려 존재감을 보였지만, 그는 묵묵히 그녀의 절정에만 집중했다. 손톱만 한 샘이 벌름거리며 액을 흘린다. 선아는 신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 춤을 잡아 눌렀다.

“하아, 더요….”

처음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요구에 이현의 눈동자가 검게 흔들렸다. 탐스러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움켜잡은 그가 상체를 세우며 그녀를 책상에 눕혔다. 번드레한 입술을 핥고, 나른하게 미소 짓는 이현의 모습에 온몸의 혈류가 격하게 요동친다. 파자마를 내리자 사납게 발기한 성기가 투명한 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 안에 들어올 준비를 마쳤다.

그녀는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열띤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그녀의 양쪽 무릎을 접어 스스로 잡게 했다. 활짝 벌어진 음부의 음란한 형태에 이현은 피식 웃으며 성기를 가져다 댔다. 좁은 틈을 밀고 들어오는 만족스러운 압박감에 그녀의 입가로 촉촉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손 떼지 마. 더 벌려. 무릎을 묶고 싶지만, 오늘은 이거로 용서해줄게요. 다신, 내 전화 무시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니, 무시하지 마요. 절대.”

서재 한 귀퉁이에 세워진 두 개의 여행 가방이 보였다. 선아는 무릎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날 밤, 비는 밤새 쉬지 않고 쏟아졌다.

***

‘아펠란드라’라고 써진 이름표를 만지작거리던 이현이 차가운 표정으로 니르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플레이할 배우들은 모두 준비됐고, 이쪽 계약서도 준비됐어. 문제는 섭인데, 해결했어? 난 범죄는 질색이야. 우린 정상의 범주에서 조금 벗어난 사람들인 거지 죄인은 아니잖아? 너도 그래서 레이프 플레이는 지양해온 거고.]

“이쪽도 계약서 해결했어. 그 플레이에 나도 포함해야 할 것 같다. 저쪽에서 원하는 건 나니까.”

[흠…. 뭐, 너한테 생각이 있겠지. 어쨌든 오케이. 장소와 시간 보내.]

“그래. 이따 잠깐 들르지.”

[그러든지.]

출근하자마자 찾아온 사빈은 이현의 책상에 사인한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플레이는 출장 하루 전, 새벽에 시작한다. 사빈은 아직까진 경계심을 풀지 않았고, 이현은 오히려 당당하게 나섰다.

〈플레이하고 곧장 출국할 거야. 그게 나아. 다른 여자 냄새를 묻혀, 괜히 선아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거든. 말했지? 그쪽은 정상이라고.〉

〈하지만 분명 키에에서 플레이를….〉

〈서경준의 일방적인 플레이였어. 적어도 내 판단은 그래. 그러니 토 달 거면 하지 마. 기분 더럽히지 말고.〉

사빈은 대꾸 대신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마음먹은 일들이 방해 없이 척척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못 믿을 만큼 불안하다. 게다가 이번 플레이로 김사빈의 집착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의 메일함이 반짝이고, 비서실에서 보내온 항공티켓과 여정서가 도착했다. 이현은 정확히 써진 선아의 이름을 보며 씩 웃었다.

먼 나라로 데리고 나가서 살아버릴까? 베트남이란 곳이 썩 끌리는 곳은 아니지만, 잘 알아보면 괜찮은 나라일지도….

이런저런 생각에 결재하던 것을 멈춘 이현이 비서실에서 걸려온 연락을 받은 건 그때였다.

[어머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본부장님께는 알리지 말라 하셨는데, 알려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 전무실로 올라가셨으니,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어머니가요? 아무런 연락 없이 오신 겁니까?”

[네. 잔뜩 화가 나신 듯 보였습니다.]

유일하게 회사에서 집안 사정을 아는 박 실장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아마도 감정 기복 심한 혜수가, 혹여 명숙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제가 알아보죠.”

이현은 결재할 서류를 미루고 집무실을 나왔다. 사근사근한 성격의 윤 대리가 새로 들여온 화초에 대해 칭찬하는 소리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선아가 성북동에 다녀온 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방문이라….

짐작 가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설마라는 생각이 든다. 설마 선아가 그런 여우 같은 짓을 했을 리가 없지… 않나?

그가 전무실이 있는 15층에 내려서자, 복도엔 생각지 못한 검은 옷의 가드들이 가득 진을 치고 서 있었다. 모두 저택을 관리하는 김 씨의 부하직원들임을 알아본 이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걸까?

엄연한 기 싸움이다. 이량의 전무 최명숙과 이량 본가의 안주인이 될 장혜수의 싸움.

이현을 발견한 김 씨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다가왔다.

“어머니가 오셨다고요?”

“예.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르셨습니다.”

“전쟁하러 오신 게 아니고요?”

“아닙니다. 평범한 안부를 전하러 오신 겁니다.”

평범한 안부라는 대목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김 씨는 그가 참견하지 않고 빠져주길 바랐다. 이현 역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정적이 흐르는 복도를 걸었다.

“어머니께는 대신 인사 전해주십시오. 저는 출장 건으로 상무님께 인사드리고 내려갈 테니…. 어머니를 잘 부탁드립니다.”

김 씨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명숙의 집무실 앞에 섰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는 의지가 잔뜩 담긴 표정의 김 씨를 지나친 이현의 입가에 뜻밖의 미소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

명숙은 삐딱하게 앉은 혜수를 보며 짜증스런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비서실에서 최고 귀빈용으로 가져온 작설차도 혜수의 입맛엔 맞지 않는 모양이다. 맑은 찻물을 멀끔히 내려다보던 혜수가 새치름한 눈을 흘기곤 명숙의 얼굴을 훑었다.

“고모 그거 알아요?”

“뭘요.”

“요즘 우리 애들 근처에 이상한 날파리들이 붙어있는 거요. 어제 선아가 왔었거든요? 그런데 웬일이야?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놈 둘이 뒤를 미행하지 뭐예요!”

“아아, 그래요?”

명숙은 이미 보고받은 후였다. 명숙이 선아에게 붙여둔 사내 둘이 험한 꼴을 당해 일에서 손을 뗐다는 박 실장의 보고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명숙을 보며 혜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고모한테는 말 못했는데, 우리 이현이가…. 좀, 음…. 독특한 과거가 있어요. 사실 그래서 이상한 것들이 들러붙은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고모 반응 보니까 다 알고 있는 거 맞죠?”

명숙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곤 능구렁이 같은 혜수의 속내를 읽으려 애썼다.

분명 뭔가 아니꼬운 일이 생겨서 찾아온 건 맞는 것 같은데, 영 본심이 읽히지 않는다. 제 오라비가 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신 나간 여자 같다가도 누구보다 냉정하고, 호방한. 그래서 명숙은 혜수가 싫었다. 도대체 저 안에 어떤 폭탄을 품고 사는지, 알 수 없어서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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