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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충동-19화 (19/25)

19화

가게를 정리했다고 하기에, 혹시라도 침울해 있는 건 아닌가 했건만 선아는 다행히 굉장히 멀쩡해 보였다.

집안일을 돕는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와 어린아이만 한 꽃다발을 몇 개의 화병에 나누어 꽂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정교한 문양이 수놓아진 카펫을 맨발로 밟은 두 여자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두 손을 맞잡는다.

“날씨가 너무 오락가락해서요. 어머니가 잘 지내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못다 한 신부수업도 좀 받을까 해서요.”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혜수는 마음 씀씀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 이현이가 음식 투정이라도 해? 그놈이 그럴 리가 없는데? 선아 너라면 껌뻑 죽는 놈이 요즘 속썩여?”

“아뇨? 전혀요. 음, 어젯밤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온 것 빼고요?”

“어머, 정말? 확 얼굴에 소금물을 뿌려버리지 그랬어!”

“어떻게 그래요. 잘생긴 얼굴 망가지면 어쩌려고요.”

“쯧쯧, 아주 둘 다 콩깍지 벗겨질 생각이 없지?”

“네. 그런 것 같아요.”

주거니 받거니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 앞에 새로 내린 허브 티와 쿠키 몇 조각이 놓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 기복을 보이는 혜수가 유일하게 한결같은 애정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선아였다. 그것을 아는 고용인들은 오랜만의 평온함에 마음 놓고 각자의 일에 매진했다.

고용인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야 차를 음미한 혜수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설마 이현이가 다시 이상한 클럽 같은 곳에 나가는 건 아니겠지?”

말투는 살벌했으나 표정만은 선선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눈 돌린 적 없는 남자예요.”

선아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아 찻물을 응시했다.

혜수를 처음 만난 건 선아의 집에서였다. 처음엔 엄마의 지인으로 알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는 시선에서 묘한 위화감을 받았다. 마치 경매품을 품평하듯 낱낱이 살핀 혜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고, 며칠 후 선 자리가 잡혔다.

“너만 한 애가 없어. 난 우리 이현이가 너한테 첫눈에 반할 줄 알고 있었다니까? 그러니 둘이 알콩달콩, 아이 낳고 잘 살아. 평범하게…. 뭐, 평범하진 않겠지만.”

찻잔과 소서가 부딪치는 낭랑한 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테라스 너머 대기 중이던 김 씨가 걸려온 연락에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가운 시선으로 담장 끄트머릴 응시했다. 선아와 혜수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을 향한다. 김 씨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다가와 혜수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두 사람? 누굴까요? 뉘신데 남의 담벼락 아래 도둑놈처럼 숨어 있는 건지, 알아봐야겠지요?”

예민하게 날 선 말투에, 김 씨는 고개를 조아리곤 밖으로 나갔다.

선아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축이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수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설마 남자 둘이 여기까지 나타났대요…?”

“설마라니. 너…, 무슨 일 있니?”

“걱정하실까 봐 말씀 못 드렸는데, 요즘 이상한 사람들이 자꾸 쫓아다니는 기분이에요. 감시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이현 씨의 경호원인 줄 알았는데, 혼자 있을 때만 유독 느껴요. 여기까지 따라왔을 줄…. 혹시 위험한 상황인가요?”

선아의 말에 짐작 가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혜수가 자리를 박찼다. 부글부글 끓어오른 표정으로 빽 소리쳐 김 씨를 부른 그녀가 손에 든 찻잔을 벽을 향해 던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박살 난 잔이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진다. 곳곳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 부들부들 떠는 혜수를 보며 공포에 질린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선아야…. 이현이 고모가 별소리 안 하든…?”

올 것이 왔다. 선아는 말없이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그러자 헛웃음을 내뱉은 혜수가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이마를 짚는다.

“그래, 그랬겠지…. 첫정 타령하면서 이현이한테 집착할 때부터 싹수를 알아봤지!”

“어머니, 진정하세요.”

“아니? 난 괜찮아. 확실하진 않지만, 이현이 고모가 노파심에 사람을 붙인 모양이야. 우리 집안에서 제일 간 큰 여자가 최 전무거든. 기어코 나를 건드려?”

마치 전쟁에 나가는 장부처럼 주먹 쥔 혜수는 고용인을 불러 갖은 반찬과 선물로 들어온 굴비를 바리바리 넣어 선아에게 챙겨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상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부렸지만, 선아는 혜수의 신경이 온통 최 전무에게 향해 있음을 느꼈다.

혜수를 이용한 것 같아 마음이 쓰였지만, 고래는 고래끼리 싸워야 하고 미꾸라지는 미꾸라지끼리 싸워야 공평한 싸움 아니던가?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마음이 편해야 아이도 잘 들어서고 부부금실도 좋아지는 거야.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우리 이현이에게만 신경 써. 알았지?”

“네. 죄송해요…. 걱정만 끼쳐드리고.”

“아니야. 슬슬 그 암사자 콧대를 누를 때가 됐지. 제 아버지의 재산이 모두 우리 이현이에게 상속될 걸 아니까, 더 이현이를 제멋대로 하려 하는 거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네.”

혜수는 운전사 김 씨를 불러 선아를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에야 다시금 거대한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저택이 그녀를 삼키는 것 같아, 선아는 대기 중인 김 씨와 눈인사를 한 뒤 흘긋 주변을 훑었다.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사라졌다. 퇴원 후, 어머니와 아버지가 붙여놓았던 사람들만으로도 진절머리나는 그녀였기에, 누군가의 감시를 알아채는 건 쉬웠다.

긴장이 풀렸는지, 뒷자리에 오른 그녀는 엄지손톱 표면을 검지로 문지르며 푹신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시작된 결혼생활이라지만, 끝은 누구보다 평범해지고 싶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오롯한 행복을 원한다.

***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막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어나려던 이현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레이시 블루컬러 넥타이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그가 표정을 구기자 그 서늘함은 배가되었다.

“상무님 라인으로 넘어가란 소리 안 들립니까? 난 비서는 필요 없습니다. 김사빈 씨가 하는 일이 뭐지? 운전도 내가 직접하고 회의 목록도 내가 정리해. 김사빈 씨는 겉으론 내 비서처럼 행동하지만, 실상은 전무님의 끄나풀 아니었습니까?”

사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젓는 모습에서 미약한 절박함이 느껴진다. 이현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려놓고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선아의 화원에서 가져온 여인초가 싱그럽게 줄기를 뻗어 올려 두 사람을 내려다본다.

“공과 사를 구분해주세요. 저는 상무님 아래 들어가기 위해 이량에 입사한 게 아닙니다.”

“그럼. 내 옆에 있으려고? 스토커입니까? 병 있는 거 아니에요? 그거 범죄인 거 알죠?”

“…본부장님.”

“김사빈 씨…. 전무님께 선아의 사진을 넘긴다고 협박했다 하던데…. 내 컴퓨터를 뒤진 겁니까?”

사빈은 두 눈을 치켜떠 이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설마 이현에게 그런 치부를 이야기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배포가 큰 여자였던가? 소심하고 자존감이 낮은 부류가 아니었던 걸까?

사빈의 낯빛이 파랗게 질리는 걸 확인한 이현이 작게 실소하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다.

“이번 일은 그냥 못 넘어갑니다. 그런 짓을 하는 이유를 내 멋대로 해석하겠습니다. 좋아요…. 뭘 원합니까? 나는 내 아내가 곤란해지는 걸 원치 않아서 말입니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서 그래요? 나 유부남입니다. 알잖아요.”

마치 설득하듯 다정한 말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최상위 포식자의 오만함과 거만함을 잃지 않았다. 사빈이 대꾸하지 않자, 이현은 그녀의 눈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휘청인 그녀가 주먹을 말아쥐자,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그가 낮게 속삭인다.

“플레이 한번 할까? 미안하지만, 선아는 서브미시브가 아니야. 우리와는 다른 족속인 거지. 네가 원하는 게 나와의 플레이라면…. 그런 관계라면,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아.”

“…여긴 회사입니다.”

“여기서 하자는 게 아니지. 난 계약서 없인 안 움직여. 사인할 생각이 들면 말해. 난 조용히 이량의 꼭대기까지 오르고 싶거든. 협조할 거 아니면, 꺼져.”

심장에 박혀있던 얼음조각들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빈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하겠습니다. 저도…. 제 마음의 정체를 알아야겠습니다.”

“좋아.”

이현은 그녀를 놓아준 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회의실을 향했다. 사빈의 붉어진 얼굴이 가라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자, 이현은 휴게실을 가리켰고 결국 회의는 혼자서 들어갔다.

회의실 창문 너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업부의 보고를 듣는 내내 성북동에 다녀온다는 선아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지금쯤이면, 집에 도착했을 시간. 진종일 연락이 없는 이유는 뭘까. 설마 어머니가 싫은 소리라도 하신 거 아닐까? 아니면 서경준?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자 발표 중인 사람들은 돌처럼 굳어 이현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다. 커피가 차갑게 식어간다.

업무를 마친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비는 검은 물이 되어 하수로를 가득 채운 뒤였다. 질척한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와 승강기에 오르는 동안 그는 표정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걱정한 티를 내지 말아야지, 그녀가 더 안절부절못하니까.

이미 게임은 시작됐고, 말들은 움직인다. 김사빈에겐 과감하게 계약서를 건넸고, 그녀가 플레이에 동의할지는 이제 운명에 달렸다.

만약 동의하지 않는다면, 범죄라도 저지를 생각이다. 누군가를 해하여 핏물을 뒤집어쓴다 해도, 둘만의 세상에 방해꾼이 사라진다면….

그가 픽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미쳤지…. 선아가 그렇게 좋아?

“선아 씨?”

그가 어두컴컴한 집안을 둘러보며 선아를 불렀다. 하지만 집안에선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참을 비워둔 듯한 서늘함에 이현의 등줄기로 오싹한 식은땀이 주룩 흐른다.

심장이 쿵쾅거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사빈과 서경준의 이름이 그를 과민하게 만들었다. 우산을 챙기는 것도 잊은 채 그가 집 밖을 뛰어나와 1층 중앙 현관을 박찼다.

그녀의 번호를 눌러 몇 번이고 연락을 취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건만 몸은 굼뜨기만 하다. 1톤 트럭을 허리께에 매단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의 그가 빗줄기 아래 서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젠장!”

웅덩이를 밟은 것도 모르고 관리사무소를 향해 뛰었다.

그때였다.

“이현 씨?”

양손 가득 짐을 든 선아가 자전거 보관소 처마 아래 서서 두 눈을 크게 떴다.

머릿속에 응축되어있던 폭탄이 터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의 눈이 선득해지고 선아는 손에 든 짐을 내려놓고 그를 향해 뛰어왔다.

“언제 오셨어요? 왜 비를 맞고,”

“어디 갔었어!”

“…네?”

“어디 갔었냐고! 내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가 강하게 어깨를 잡는 바람에 그녀의 몸이 흠칫 굳는다. 하지만 이내 꽉 끌어안는 그의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는 걸 느끼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젖은 가슴팍에 입술을 눌렀다.

“놀랐어요…? 미안해요. 레몬 셔벗이 너무 먹고 싶어서, 김 기사 아저씨에게 카페에 내려달라고 했어요. 거기서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지체돼서…. 서둘러 나오니까 비가 오지 뭐예요. 전화했었어요?”

그녀의 뺨에 입술을 누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눈썹 끝에 매달린 습기는 과연 비였을까, 아니면 그의 것이었을까?

선아는 차가워진 이현의 뺨을 감싸곤 싱긋 웃으며 입술을 포갰다.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요. 걱정 끼치지 않을게요.”

이현은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죠,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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