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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충동-18화 (18/25)

18화

“출장 잘 다녀오시고, 우리 거래는 여기까지 하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더 궁금한 점은?”

“없습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경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인배우의 모습으로 매니저에게 돌아갔다. 경준과 만난 매니저가 언성을 높이며 삿대질을 할 때도, 그는 그저 머리를 긁으며 수더분하게 웃었다.

사빈은 그런 경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점점 미쳐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사랑받고 싶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저, 최이현이란 남자가 사랑해주길 바란 것. 그 날것의 감정이 이토록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핸들에 이마를 찧은 그녀가 새빨간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손바닥에 묻어난 그의 향수 냄새를 맡았다.

은은한 머스크향.

이선아와 마주 앉았을 때 맡았던, 그 향기.

너무 멀리 왔다. 너무… 멀리.

***

흰 쌀밥에 뜸 들인 카레를 듬뿍 올린 선아는 냉장고 안에 들어있던 반찬 몇 개를 꺼내어 식탁에 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이현은 잠시 할 일이 있다며 서재를 찾았고, 그녀는 저녁을 준비했다. 정신없고 진 빠지는 하루를 보내서인지, 거창하게 차려낼 기력이 없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카레 그릇을 식탁에 차려낸 그녀가 서재에 들어간 이현을 불렀다.

그러자 지난번 선물로 들어온 샴페인 병을 요리조리 살핀 그가 주방으로 걸어 들어온다.

“그거 드시려고요?”

선아의 질문에 그가 코끝을 찡긋했다. 어지간해선 술을 즐기지 않는 이현이었다. 운전을 못 하는 그녀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선아는 이현이 술 취한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가 샴페인 라벨을 읽으며 의자를 꺼냈다.

“아니, 식사하고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어차피 마시지도 않는 술, 좋은 데 써야죠.”

“어디 가시는데요?”

“친구를 좀 만나러?”

그가 싱긋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현관 앞에서부터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야만 했다. 흘러내린 원피스를 움켜쥐고 반항 아닌 반항을 해봤지만, 뽀얗게 드러난 호빵 같은 젖가슴을 베어 무는 그로 인해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벌렸다. 현관 입구에 장식용으로 깔아 둔 부드러운 카펫 위에 올라 파고드는 그의 재킷에선 은은한 풋내가 났다. 그게 너무 좋아 그의 품에 안겨 한없이 달아올라 열렬하게 몸을 열었다.

고작 한 시간 전의 일을 떠올리며 그녀가 따끈해진 뺨을 감쌌다.

“정말 베트남 가실 거예요?”

선아의 질문에 카레를 크게 뜬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같이 갈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계약서와 사진은요…? 이현 씨에게 사진을 보내온 사람이 정말 서경준이었을까요…?”

“누구든 상관없어요. 그것이 서경준이든 김 비서든, 둘 다 악의를 가졌으니까. 그리고 전무님께 사진과 계약서가 넘어간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듯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뭣하면 공갈죄로 경찰에 신고해버리죠. 뭐.”

그가 흐릿하게 웃으며 카레를 듬뿍 입안에 넣었다.

조금 무모한 결정이라고 선아는 생각했지만, 그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차가운 보리차가 담긴 컵을 그에게 내밀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식사는 빠르게 끝이 났다. 이현은 식사를 마친 뒤 다시금 외출복을 챙겨입었다. 출근할 때와는 또 다른 복장. 20대라 해도 믿을 만큼 가벼운 평상복 차림에 캡모자를 푹 눌러쓴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며 바닥에 놓인 샴페인 병을 집어 들었다.

“자고 있어요. 문 잠그고, 절대 나오지 말고. 문 열어주지도 마요. 나 말고는, 우리 어머니가 오신다고 해도.”

“네.”

“그럼, 다녀올게요.”

“네.”

이현이 문을 닫고 나간 뒤, 찾아온 정적은 생각보다 견고해 쉽게 깨어지지 않았다.

선아는 한참이나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선득한 목덜미를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복도 끝을 어슬렁거리던 사내 두 명이 흠칫하며 몸을 숨겼다.

역시….

며칠 전부터 따라붙은 사내 두 명이었다. 처음엔 이현의 뒤를 쫓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현이 없는 시간에도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보호의 목적이 아니란 건, 김사빈과의 만남에서 알았다. 혹여 그들이 보호의 목적을 가졌다면, 사빈과 함께 7층에 올라가도록 그냥 놔두진 않았을 게 분명했으니까.

선아는 태연하게 손잡이에 걸린 우유 함을 빼내어 집안으로 돌아왔다.

현관 보조키를 잠그고, 차가운 타일 위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서경준이 이현에게 접근했고, 이현에게 집착하는 사빈은 제게 접근했다.

제 앞에서 싸늘하게 몰아세우던 사빈을 떠올리자 저절로 심장박동이 늘어나고 손끝 발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의 말을 곱씹던 그녀가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전화를 꺼내 몇 안 되는 저장된 번호 중 하나를 눌렀다. 짧은 신호음이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반가운 음성이 그녀를 맞는다.

[어머, 선아니?]

그는 어머니를 일컬어 정상이 아닌 여자라고 했지만, 선아에겐 아니었다. 선아는 오랜만에 듣는 시어머니 혜수의 음성에 밝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

쿵, 소리와 함께 지하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덩치를 뒤로한 이현이 니르의 공간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막 은밀한 장면을 감상하던 니르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현을 보며 빽 소리쳤다.

“그만 보자니까, 왜 자꾸 와! 다신 안 온다며!”

지난번과 바뀐 것 없는 내부를 둘러보고 니르의 앞에 들고 온 샴페인 병을 가볍게 내려놓은 그가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뭐야, 아르망드 브리냑…? 어? 이걸 왜 가져왔어?”

오랜만에 좋은 빈티지를 발견한 니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벽장에서 샴페인 잔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한쪽 벽을 가득 채운 화면에선 눈뜨고는 보지 못할 음란한 장면들이 실시간으로 보였고, 그것을 배경 삼은 니르의 표정은 답지 않게 천진했다.

“뇌물. 정보료. 혹은 주선료라고 할까?”

이현이 담배를 꺼내물자, 뒤쪽에 대기 중이던 덩치가 라이터를 내밀고는 씩 웃었다. 이현은 담뱃불을 붙이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에게 눈짓하는 니르로 인해, 고개를 꾸벅 숙인 덩치가 문을 닫고 밖으로 사라졌다.

“주선? 뭐야, 다시 플레이하려고? 미쳤어? 너 지금 누구랑 살고 있는지 잊은 거야?”

“선아는 서브미시브가 아니야. 그저 범죄에 악용된 피해자일 뿐이지.”

“정말? 정말 아니야? 오, 지저스! 맙소사…! 그럼 뭐야. 그래서 설마 부족해서 찾아온 거냐?”

담배 연기를 흘리는 이현의 눈썹이 꿈틀, 니르는 짐짓 모른 체하며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달큼한 냄새가 번진다.

“흠흠, 장난이고. 자, 그럼 말해 봐. 뇌물, 정보, 주선료에 대해서.”

흘긋, 이현의 눈치를 보며 샴페인 잔을 넘치도록 채운 니르가 입맛을 다시고는 한 번 더 재촉했다.

“플레이할 거야?”

“레이프.”

“…뭐? 다시 말해 봐.

“레이프 플레이(rape play). 다시 말하게 하지 마. 레이프가 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니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샴페인을 마시려던 마음을 접었다.

레이프 플레이라 함은, 말 그대로 강간플레이. 물론, 진짜 강간은 아니었다. 역할을 정해 합의에 따른 플레이를 진행하는 것이 바로 레이프 플레이였고, 꽤 많은 에세머들이 첫 만남에 즐기는 행위였다.

니르에겐 별거 아닌 플레이의 일종이었지만, 이현에겐 아니었다. 니르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못마땅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설마 네토라레(*속어:남의 배우자나 애인과 정을 통하여 빼앗는 행위.)에 눈 떴냐?”

“미쳤어?”

“그래. 그러니까… 음, 네가 할 거 아니지?”

“어.”

“그럼?”

“진짜 레이프 플레이가 아니야. 누구 버릇을 좀 고치고 싶은데, 카메오가 필요해. 레이프 플레이 중 섭을 도와줄 히어로랄까? 그거 알지? 오리 새끼가, 처음 본 사냥개를 어미인 줄 알고 마냥 쫓아다닌다는 통설.”

“알지.”

“그 오리 새끼에게 진짜 어미를 찾아주려고 그러는 거야. 언제 물어 죽일지 모를 사냥개 말고.”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니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찰랑거리는 샴페인을 반쯤 들이켜곤 종종걸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린다.

“플레이 장소는?”

“개인 공간. 본디지가 가능한 남자로.”

“좋아. 성별은 여자, 누구냐? 어떤 관계?”

“비서.”

“what?”

“비·서. 이름, 김사빈. 김재욱 의원 막내딸, 나이 서른둘. 서브미시브라기보단 슬레이브(노예) 성향이 강해. 이 여자에게 다른 사냥개를 좀 붙여줘.”

김재욱 의원?

니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남은 샴페인을 모두 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날짜는?”

“다음 주 월요일. 오후 10시.”

“너무 빨라! 촉박한데?”

“그래서 못해?”

“아니, 해. 위험부담이 크긴 하지만, 재밌을 것 같은데? 그쪽은 동의한 거지?”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리던 니르가, 대답 없는 이현의 분위기에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설마 아니야…?”

“흠,”

“…범죄인 거 알아?”

“응.”

“…근데도 해?”

“그 샴페인, 클럽에서 300짜린데…. 알지?”

방금 먹은 샴페인이 식도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뒤적였다. 니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현의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들고 온 니르가, 웃음기를 없앤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받아와. 이유는 몰라도 네 제안이 확 땡기긴 해.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인만 받아오면, 아주 즐거운 플레이를 약속드리지요, 고객님.”

***

성북동 꼭대기 외교관저 맞은편, 거대한 대문이 열렸다. 선아를 내려준 택시 기사는 으리으리한 저택 초인종을 위화감 없이 누르는 손님을 보며 신기한 듯 눈을 몇 번 굴리다, 차를 몰아 사라졌다.

그녀의 시어머니 혜수는 남편과 사별한 뒤, 본가로 들어와 지내고 있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했던가? 이량 모직의 회장 부부는 유난히 불안정한 혜수를 아꼈고, 아들이 사고로 안타깝게 사망한 이후론 혜수를 곁에 두고 딸처럼 여겼다.

선아는 환갑이 다된 나이에도 여전히 소녀 같은 혜수를 떠올리며 마중 나온 김 씨와 함께 커다란 꽃다발을 나누어 들었다. 비가 올 것처럼 구름이 가득한 날엔, 유난히 감성적이 되는 법. 그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몰래 뒤따르던 그림자 둘은 건물 밖에 몸을 숨겼다.

‘누가 붙인 것인지는, 이제 알게 되겠지….’

잘 가꾸어진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 대신 온실과 연결된 데크에 올랐다. 그러자 테라스 문을 열고 차를 즐기던 혜수가 선아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이게 누구야?”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어제 연락하더니, 오늘 바로 온 거야? 아유, 우리 선아는 역시 센스가!”

무릎을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혜수는 테라스에서 신을 벗고 들어오는 선아의 손에 들린 꽃다발에 한 번 더 감탄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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