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선아. 누가, 이랬는지 물었어….”
“화초에….”
“거짓말.”
“실수로….”
“누군가 실수로 뺨을 내리쳤나 보지? 마지막으로 물어. 누구야.”
이현의 시선은 더없이 고요했기에 더욱 오싹했다. 선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그녀의 턱 끝에 이현의 손이 닿는다. 그는 뺨에 난 상처를 유심히 살피고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막 승강기에서 내린 사빈이 건물 앞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하곤 흠칫 굳어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선아의 턱을 놓아주곤 문 열린 숍을 턱짓했다.
“들어가서 기다려.”
서늘한 그의 명령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선아는 숍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현은 승강기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사빈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분노로 번들거리는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빈은 입술을 꽉 깨물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김 비서도 실수로 뺨을 맞았나?”
“…무슨 말씀이신지.”
“김사빈.”
“…네.”
그녀가 대답함과 동시였다. 순간 사빈의 목울대를 움켜쥔 이현이 더할 나위 없이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입 끝을 비틀어 웃었다. 발뒤꿈치가 들려 파랗게 질린 사빈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내 손에 더러운 물기 한 방울이라도 떨어트리면, 이 목을 부러트려 버릴 거야. 당신 여기 왜 있어.”
“노, 놓고 말씀하세요. 보는 눈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여기서 내가 당신을 죽인다고 해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본부장님…! 하아, 숨 막…,”
“김사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하지. 그러니 흥분하지 말고 잘 들어. 내 아내 곁에 바퀴벌레처럼 맴돌지 마. 난 벌레는 밟아 죽이자는 주의거든. 꿈틀꿈틀,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껍데기를 밟아 바스러트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밟는 게 취향이야. 아무리 크고 거대해도 상관없어. 밟는 맛이 끝내주거든.”
겁에 질려 이를 부딪치면서도 사빈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손목을 움켜쥐곤 깊게 손톱을 박아넣는다. 이현의 두 눈이 선득하게 가늘어졌다.
“그럼 밟아주세요. 취향대로 밟혀드릴 테니.”
사빈이 받아치자 이현은 키득 웃으며 비릿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제정신이 아닌 거엔 관심 없어. 김사빈…. 너는 발톱에 때만큼도, 매력이 없어서.”
순간 이현은 손에 힘을 풀었다. 한껏 까치발을 들었던 사빈이 휘청이며 벽을 잡고 섰다. 손을 터는 이현을 보며 사빈은 헛구역질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손을 닦은 그가, 그녀의 발끝에 손수건을 버리고는 흐트러진 재킷을 툭 턴다.
“말 못하는 짐승은 매를 맞으면 말을 들어. 하지만 인간은 매를 맞으면 반항심만 늘지. 물론, 매를 맞아야 말을 더 잘 듣는 족속도 있지만.”
“후자에게만 반응하는 족속도 있지요.”
가령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 같은 것.
“그럼, 그런 족속을 찾아.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관심 없는 세상이거든. 난, 매를 맞으면 반항하고 슬퍼하는 인간이 좋아. 넌…. 단 한 번도 내 눈에 차본 적 없어. 양말을 물고 있을 때도, 패들을 들고 있을 때도.”
사빈의 눈이 커다래졌다.
“기, 기억… 하세요?”
“그러니 꺼져. 한 번만 더 내 아내를 건드리면, 그땐 네가 생각하는 바닥을 보게 될 거야.”
“프, 플레이하려 했잖아요! 예쁘다고 하셨잖아요!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이현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리곤 못들을 소릴 들은 사람처럼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난 우리 선아보다 예쁜 여잔 본적이 없는데? 미안하지만…. 김 비서, 내 취향 아니야. 경고 무시하면 회사생활 힘들어질 거야. 그리고 구한 게 아니잖아. 말은 똑바로 해. 지나가던 초등학생도 나와 같은 판단을 했을 거라고.”
“…아니에요….”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 몰라도, 기분이 더러워…. 몹시, 기분 나빠. 그러니 내일부터 다른 곳으로 출근해, 김 비서. 그 얼굴 안 보고 싶으니까. 전무님께는 내가 보고하지.”
차갑게 받아친 이현이 돌아서서 데 로사의 후문을 열었다. 윈드차임의 가벼운 소릴 내며 문이 닫힌다. 이현이 사라진 뒤에야 사빈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기억하지 못하기에 냉정하게 군다고 생각했다. 저를 기억해 내고 나면, 이선아 같은 건 눈에 차지 않을 거라 믿었다. 최이현은 누구보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남자였으니, 가장 이상적인 여자를 품에 안을 거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악을 써야 이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아, 사빈은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주저앉아있던 사빈이 비틀거리며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차 앞에 쌓인 몇 개의 담배꽁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 사빈의 곁으로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가 다가섰다.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멍청한 취미를 가졌을 줄 몰랐네요.”
***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현은 어둠 속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선아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가 이현의 기척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널브러져 있던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모은다.
화원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서류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방으로 흩어진 채였다.
“선아 씨.”
이현이 불렀지만, 선아는 듣지 못한 사람처럼 종이를 모으는 데 집중했다. 이현은 종이를 줍는 선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그녀가 두 눈을 힘주어 감았다가 뜨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말씀하세요.”
“통화도 안 될 만큼 바빴어요? 뺨은 왜 이래요. 김 비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요.”
무슨 짓?
당신 컴퓨터에서 빼낸 사진과 서류로 협박하고 몰아세운 것? 아니면 이상한 소릴 지껄이며 사람을 인간 이하 취급을 한 것? 아니면….
“보고 계신 것과 같아요. 제가 먼저 뺨을 때렸고, 그쪽이 저를 친 거예요.”
“선아 씨가 먼저요? 이유는요?”
“기분이 나빠서요.”
“기분이 왜?”
그가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의 어투는 다정했지만, 시선만큼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참지 못할 분노를 억누르는 게 느껴졌다. 선아는 이현에게 잡힌 손을 비틀어 빼내며 시선을 피했다.
“그분과 디엣을 맺은 적 있나요.”
“아니.”
“결혼을 약속한 적은요.”
“없어요.”
“섹스는…?”
“선아 씨.”
“플레이는요?”
“전혀! 무슨 소리예요, 대체.”
그녀의 양팔을 움켜쥔 그가 소리쳤다. 그제야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누르며 조용히 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요? 사진을 받았다고…. 계약서를 보게 됐다고.”
“…김 비서가 그래요?”
“그 여자 누구예요…? 왜, 그 사진으로 우리 사이를 협박하는 거죠? 이현 씨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데요!”
처음이었다. 선아가 절박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른 건. 이현은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으며 목덜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여리게 뛰는 맥박과 흐느낌이 느껴진다. 눈물을 참는 그녀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그의 품은 더욱 좁아졌다.
사랑스럽다. 그녀는 슬퍼하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김 비서가 무슨 소릴 지껄였는지 몰라도, 우리 사인 아무 이상 없을 거예요. 문제는 저쪽과 일어나야 해요. 우린….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요…!”
“아니. 괜찮아. 우린 괜찮아요. 그러니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해요. 만약 오늘처럼 내가 모르는 사이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그녀의 뒷머릴 힘주어 쓸어내린 그가 섬뜩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날 믿어요.”
그가 선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우아하고도 매혹적인 그녀의 눈매가 처연하게 휘어지다 스르륵 감긴다.
이현은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감싸고 그녀의 허리춤을 끌어안아 진하게 키스했다.
허공을 떠다니는 의미 모를 불안들이 하나로 집결해 기분 나쁘게 그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유난히 심한 명숙의 집착 하며, 도를 지나치기 시작한 사빈의 행동.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서경준까지.
머릿속에 의문의 트라이앵글을 그린 그가 한 명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 다시는 내 전화 무시하지 말아요. 나 엄청 화났어요. 보여요? 이마에 땀 난 거. 선아 씨가 책임져요.”
***
사빈은 눈앞에 나타난 경준을 노려보며 주차된 차에 올랐다.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탄 경준이 눈물범벅이 된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선아, 때렸어요?”
선아의 이름에 손수건을 받아들던 사빈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제가 맞은 건 안 보이시나 봐요.”
“그러네요. 빨가네요.”
“다 보셨어요…?”
“네. 이곳으로 오라고 하셔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런 식으로 삼자대면시켜주려 한 거예요?”
경준은 키득 웃으며 푹 눌러쓴 모자를 벗고 눌린 머릴 흐트러트렸다. 꽤 오래 기다린 듯, 그에게서 짙은 담배 냄새가 났다. 사빈이 시동을 걸자 그가 에어컨을 틀어 눅눅한 공기를 환기한다. 경직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발라드가 스피커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경준은 볼륨을 줄이며 말했다.
“이량 쪽에서 전속계약을 파기하고 시즌계약으로 돌렸어요. 최이현 본부장 짓이겠죠.”
“촬영장에서 바보 같은 짓을 한 건 서경준 씨잖아요.”
“김사빈 씨가 계약서와 사진으로 장난만 치지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반응이 날카롭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좋아요. 어디까지 내 일을 망칠 생각인지 들어나 보죠.”
사빈은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선아를 자극하기 위해 계약서와 사진 원본이라는 미끼를 던졌고 48시간이라는 올무에 그녀를 밀어 넣었다. 물론 명숙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선아에게 줄 기회 같은 건 없었으며 최이현과 제가 연인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기엔 너무 많은 길을 왔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갖지 못한 아이처럼 사빈은 마음이 조급하고 울분이 치솟았다.
이선아를 망가트리면 이현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괴로워할까? 화를 낼까? 오늘처럼 숨을 조이려나…?
숍 앞을 지나치는 두 사람의 시야에 손을 잡고 함께 걸어 나오는 이현과 선아가 보였다.
사빈은 그들을 지나치며 본능적으로 속력을 줄였다. 떨리는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며 바뀌어버린 신호 앞에 멈춰선 그녀가 말문을 연다.
“다음 주 수요일, 이선아 씨가 7층을 찾을 거예요….”
“협박이라도 했나 보죠?”
“이선아 씨를 데려다 놓고 싶다고 한 건 경준 씨예요. 전 주인의 말에 복종한 것뿐이고요.”
“디엣은 그날로 끝났지 않았나?”
사이드미러를 통해 사라지는 두 사람을 응시하던 경준이 시선을 옮겨 건물 7층 창문을 건조하게 훑었다.
“어쨌든 다시는 선아 때리지 마세요. 선아가 누구한테 맞는다고 상상하면…. 굉장히 기분이 나빠서.”
사빈은 조용히 차를 몰아 서경준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경준의 주차장엔 커다란 밴 앞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매니저가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사빈이 차를 세우자,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경준이 문을 열고 내렸다.
김사빈에게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었다.
선아의 위치와 현재 상태. 그리고 그녀의 거처까지. 물론, 그녀의 남편이 최이현이라는 건 꽤 의외였지만….
창문 너머 모자 아래로 내리뜬 그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번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