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저희는 작업을 마쳤는데, 사모님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연락 드렸습니다.]
“선아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요?”
[예. 어떤 아가씨랑 커피한잔 하러 가신 것 같은데, 저희가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가게 안은 싹 비웠고, 몇 개의 화분은 본부장님 성함이 쓰여 있어서요. 지금 가지고 가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세요. 그런데…. 누구와 나갔다고요?”
[모르는 분인데, 머리가 길고 정장 입으신 여자분이십니다. 20대 후반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아주 미인이시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연락해보죠.”
회의는 끝났다. 명숙의 말대로 베트남에 새로 설립될 지사에 관한 임원회의로, 결과는 역시 최이현의 해외발령으로 마무리되었다.
선아를 찾아올 사람은 없다. 평소 친정 식구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왔던 그녀도 아니었으며,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럼 혹시 부동산과 관련된 사람일까?
“본부장, 여기 있었네? 회장님이 부르시는데, 같이 올라갈까?”
임원들을 잔뜩 끌고 온 명숙이 이현을 불렀다. 이번 회의에 최 회장은 모든 임원에게 이현의 존재를 알렸다. 돌아가신 최 사장의 맏아들임과 동시에 유일한 후계. 이들의 바뀐 시선을 의식하며 이현은 휴대전화를 품 안에 넣고 명숙의 제안에 승낙했다.
“저도 할 말이 있던 차였습니다. 올라가시죠.”
임원들은 명숙에게 재차 인사하며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소리 없이 뒤따른 박 실장이 임원 전용 승강기 버튼을 눌러 이현과 명숙을 안내했다.
“베트남에 3년만 다녀와. 아마 그 정도면 이쪽에서도 칠 놈 치고, 버릴 놈 버리기 딱 좋아. 윤 상무가 요즘 영 힘을 못 쓰더라고. 3년 다녀오면, 곧장 상무이사 달 수 있을 거다.”
“선아와 상의해보겠습니다.”
“쯧, 네 처는 한국에 두고 가. 네 아버지 제사도 지내야 하고 네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말벗이 필요하지 않겠어? 그리고 놀러 가는 거 아니야. 일하러 가는 거지.”
“아버지 기일에 참석해야 하는 건 접니다. 선아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데 제사 때문에 한국에 남아서 독수공방하라고요? 흠, 심술이십니까?”
“하, 심술이지. 그래, 심술이다마다. 네 마음대로 해. 단, 이번 출장은 혼자 가. 네놈 하는 짓 보니 출장을 핑계로 연애질만 하다 올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쉽게 보지 마. 우리 이량이 동남아 지역에 뿌리내리는 첫 순간이니까. 잠시도 한눈팔 시간 없어, 본부장.”
“겨우 본부장한테 거는 기대가 너무 크십니다. 그러실 거면 부사장님을 보내셨어야죠.”
“어허!”
승강기가 쩌렁쩌렁 울릴 듯 크게 소리친 명숙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최이현이…. 기어오르지 마. 나는 지금 전무이사로서 일개 본부장 따위에 명령하는 거야. 닥치고 하라면 해.”
냉담한 표정으로 입 끝을 말아 올린 이현이 어깨를 으쓱하곤 작게 코웃음 쳤다.
“그러죠. 전무님.”
평소라면 눈도 마주치기 힘든 최 회장과 마주 앉게 되었지만, 이현의 관심은 온통 연락되지 않는 선아에게 꽂혀있었다.
심부름센터직원들이 찾을 만큼 장시간 자리를 비울 여자가 아니다.
수다에 정신 팔려 할 일을 잊을 만큼 시답잖은 성격도 아닐뿐더러, 혼자가 아니라니….
결국, 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창 기분 좋게 떠들던 최 회장과 명숙이 동시에 고개를 치켜들곤 눈썹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급한 미팅이 있었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할아버지, 본가로 찾아뵙겠습니다. 회사에선 역시 일 얘기 외엔 영 기분이 안 나네요.”
단 한 번도 순종적이지 않았던 이현이었기에 최 회장은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명숙은 아니었다. 승강기에 오르는 이현의 지척까지 따라온 그녀가 두 눈에 힘을 주고 얇게 주름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중요한 미팅이 뭔지, 꼭 들어야겠어. 그러니 미팅 끝나면 찾아와. 기다리마.”
이현은 살짝 묵례하곤 무례하게 문을 닫았다. 지하에 도착한 그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자마자 비서실에 연락을 넣었다.
[네, 본부장님.]
“다음 주 출장일정 좀 보내줘요. 오늘 김사빈 씨는 출근 안 했습니까?”
[네. 조퇴하셨습니다. 출장일정 메일로 발송하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혹시 내 와이프 여권 번호 정보 갖고 계십니까?”
[예. 신혼 여행 당시 여권이시라면 갖고 있습니다.]
“좋아요, 예약을 좀 해주시죠. 베트남 출장에 아내가 동행할 예정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고 조용히. 괜히 시끄러워지는 건 싫으니까요. 박 실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리죠.”
[네. 알겠습니다.]
이현은 빠르게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괜한 불안에 넥타이 매듭을 헐겁게 만든 그가 욕지거릴 올리며 가속 페달을 힘주어 밟는다.
***
뜨거운 커피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랐지만, 선아는 커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커피잔 옆에 놓인 한 장의 사진과 프린트한 듯 보이는 계약서 한 장에 시선이 붙박였다.
“본부장님 컴퓨터에서 발견한 사진과 계약서입니다. 사모님, 이런 취향을 갖고 계셨던 겁니까?”
김사빈은 태연하고 여유로웠다.
“숨길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 바보 아닙니다. 정말 서브미시브라는 거였나요?”
“아뇨.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 저 아닙니다.”
사진과 계약서를 밀어내는 선아의 손끝이 떨렸다. 이현의 컴퓨터에서 발견했다고? 그럼 이미 이현은 제가 고백하기 전,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걸까? 알면서도 모른 체해준 거야?
선아가 밀어낸 계약서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본부장님 컴퓨터에 있었던 자료로, 위에 보고해야 할 것 같네요. 사모님과 본부장님 사이를, 혹은 이량 모직을 흔들려는 음모일 테니까요. 저는 전무님께 보고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봐요. 이걸 위에 보고하면, 사실 여부를 떠나, 저라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세요?”
“그럼, 인정하시던지요. 본인 맞다고. 서경준과 디엣 관계를 맺었던 사람이 바로 사모님이셨다고요.”
“김 비서님….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원래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사빈의 노골적인 도발에 선아는 의자를 밀어 자리를 박찼다.
“더 못 듣겠네요. 당신 미친 것 같아요. 이현 씨에게 제가 말하죠. 그 사진에 관해 묻고, 들어야겠어요. 그리고 김 비서님에 대해서도요.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돌아선 선아가 굳게 닫힌 문을 벌컥 열었다. 여기서 빈틈을 보이면, 그것은 약점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안다. 이현이 사진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눈앞이 아득해졌다. 소름 끼치는 떨림을 애써 억누른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설 때였다.
“본부장님이 베트남으로 출국하고 48시간 뒤, 이곳에 오시면 사진과 계약서 원본을 드리죠. 놓고 가겠습니다. 비밀번호는 메시지로 전송해 드릴 테니, 오셔서 가져가세요. 만약 거절하신다면 전무님께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회장님께 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당신 미쳤어?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버럭 소리친 선아로 인해 복도에 있던 몇몇이 웅성대며 모여들었다. 선아는 다시금 거칠게 문을 닫고 사빈과 마주 섰다. 이렇게 분노해 본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에게 휘둘려 본적도 극심한 견제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분노로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손에 든 작은 가방에선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이선아 씨, 미친 건 당신이에요. 주제도 모르고, 감히…. 저는 분명 경고했어요.”
감히?
어금니를 강하게 눌러 문 선아가 사빈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김사빈이란 여자의 적의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이유가 무언지.
명숙이 말했던 순종적인 여자가 필요하다는 의미 역시 김사빈을 두고 했던 말임을.
“주제넘게 굴지 말아요, 김 비서님. 제 남편을 두고 저급한 상상 같은 걸 하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저급하다고요…? 이선아 씨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으세요? 본부장님은 알고 계신가요? 감금에서 빠져나온 뒤, 신고도 하지 않았죠? 이유가 뭘까요.”
“…감금당했던 걸 알고 계시네요. 재밌네요, 비서님….”
“그러게요. 혹시 임신이라도 했던 거 아닌가요? 그렇게 오랫동안 감금당해 있었는데, 이렇게 멀쩡하다는 게 더 말이 안 되잖아요. 아마도 아기 아빠를 신고할 수는 없었겠죠. 아무리 디엣이라도 그런 사고는 종종 발생하니까요.”
순간 파랗게 질린 선아가 사빈의 뺨을 올려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사빈의 두 눈이 창황하게 흔들린다.
도를 지나친 폭언이었다. 아이? 임신? 신고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기를 쓰고 숨기려 하는 엄마의 애원으로 사건을 묻었고 기억에서 지우기로 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최선.
“당신이 뭔데…!”
붉어진 뺨을 문지른 사빈 역시 지지 않고 선아의 뺨을 내리쳤다. 고개가 돌아갈 만큼 강한 타격이었지만, 선아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뺨을 내어준 뒤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시선으로 사빈을 노려보았다.
“이제 좀 후련해요? 그렇게 궁금하면 병원 기록 뒤져봐요. 아무리 협박해도 이현 씨는 제 남편이에요! 전무님께 무슨 소릴 해도, 바뀌는 건 없어요. 당신 참 불쌍하네요. 이걸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당신은 서경준이랑 엮여있지 않길 바랄게요. 정신 차려요.”
상대할 가치가 사라졌다. 문을 열고 나온 선아는 숨 막히는 가슴을 치며 비상구로 뛰었다. 어두컴컴한 계단에 비상등 불빛만이 그녀의 발끝을 밝히고 계단을 울리는 발소리는 직선으로 뻗어 올라가 요란하게 울린다.
머리가 복잡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대체 김사빈이란 여자의 정체가 무언지, 어째서 저런 정신병자 같은 소릴 하는 것인지.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동안 숨이 폐부를 틀어막고 이마에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무엇도 할 수 없다. 패기롭게 협박하지 말라고 외쳤지만, 사실은 두려웠다. 죄어올 고모님의 압박도, 실망을 금치 못할 어머니의 표정도. ‘내 딸이 부족해서입니다.’라고 말할 엄마를 생각하면 더더욱, 숨이 막힌다.
1층에 다다른 선아는 벌컥 문을 열고 뛰어나와 습습한 공기를 크게 들이켰다. 밝은 해를 보니 눈물이 왈칵 차오른다. 선아는 중앙 현관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그와 입 맞췄던 보도블록을 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가렸다.
부어오른 뺨에서 화끈한 열감이 느껴진다.
안돼. 이렇게 자꾸 무너지면 안 되는 거야. 이현 씨 앞에서도 무너졌잖아…. 그러면 안 돼.
자꾸만 젖으려는 눈가를 쓱쓱 비빈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때였다.
그녀의 눈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지고, 익숙한 손길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닿았다. 하지만 차마 닿지 못한 손이 허공에 멈춘다. 선아는 고개를 들었다.
“누구야…. 누가 이랬어.”
이현의 소름 끼치게 낮은 음성에 온몸의 솜털이 아스스 솟았다. 선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앞에 나타난 이현을 멍하니 응시했다. 회사에 있어야 할 남자였다. 이렇게 나타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떨리는 그의 손끝이 새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몹시도 조심스럽게 스쳤다. 그러다 주먹을 말아쥐고 숨을 크게 들이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