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만약 우리가 섹스를 했다면, 더더욱 입 닥치고 깔끔하게 떨어져야지. 그리고 미안하지만, 난 플레이를 할 뿐 사랑을 나누는 매너남이 아니었거든. 난 당신과 섹스한 적, 없어. 김사빈 씨.”
숨을 고르는 사빈의 팔을 쳐낸 그가 지극히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소란을 의식한 사람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 서 있는 사빈을 지나쳤다.
사빈은 이현이 승강기 앞에 선 뒤에야 천천히 선아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가 이곳에 와있다는 건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알고 있었다. 카페 앞에 침묵하듯 서 있던 선아가 사빈을 보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사빈은 주먹을 파르르 말아쥐고 입매를 끌어올려 희미하게 웃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비서님.”
“여긴 어쩐 일로…. 업무 중 방문은 삼가십시오.”
“죄송합니다. 남편을 보러 온 건데…. 실례했네요. 어쨌든 제 남편을 잘 부탁드려요.”
“….”
“썩, 내키진 않지만 말입니다.”
이선아와 어울리지 않는 비아냥에 사빈의 미소가 뒤틀린다. 선아는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걸 참으며 이현이 있는 승강기 홀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비서? 김사빈? 김 의원의 막내딸. 거래는 또 뭐지?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으로 공들여 차려입은 원피스 아랫단을 구기듯 쥐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유난히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반듯한 등을 따라 흔들리고, 막 도착한 승강기에 오르려던 이현은 저를 향해 뛰기 시작한 선아를 발견하곤 두 눈을 크게 떴다.
“본부장님, 안 타십니까?”
최고 상관인 이현이 승강기에 오르지 않자, 누구도 올라타지 못하고 공손한 자세로 기다렸다.
“대기. 아무도 타지 마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직원들이 서릿발 같은 이현의 음성에 승강기에서 물러났다. 선아는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웃음을 참는 모습이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공주님 같다고 이현은 생각했다.
“선아 씨….”
“미안해요, 이현 씨.”
그가 손을 뻗자 속도를 늦추던 그녀가 성큼 걸어와 그의 곁에 섰다. 그녀가 바로 최이현의 아내임을 짐작한 이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숙이며 승강기 버튼을 누른 채 대기했다.
“다음 승강기를 이용해주시겠습니까?”
“아, 네네!”
이현은 직원들의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선아의 손을 잡고 승강기에 오른 그가 닫힘 버튼을 누르며 마주 선 직원들에게 작게 눈인사를 한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대 소리가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선아는 그에게 잡힌 손을 슬쩍 빼내곤 승강기 구석으로 물러났다. 12층 버튼을 누른 그가 빠져나간 그녀의 팔을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작게 비명 지른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이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차가운 벽으로 밀어붙이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실소했다.
“여기 어떻게 왔어요.”
“그냥, 같이 퇴근하려고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듯 입술을 물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아, 음…. 네.”
“키스해도 돼요?”
“아, 여기 회사인데….”
그녀의 눈동자가 코너에 달린 감시카메라를 향한다. 이현은 그녀를 온몸으로 가리곤 작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발뒤꿈치가 들린다. 은은한 커피 향이 가까워졌다.
다시없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의 나른한 미소에 선아는 숨을 참았다.
“밀폐된 곳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본부장이 키스한다고 해서 문제 삼을만한 간 큰이는 이곳에 없어요. 키스…, 해야겠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뭉개진다.
***
비서실로 올라온 사빈이 흠뻑 젖은 다이어리와 태블릿을 책상 위에 툭 올렸다.
머리가 지끈 아프다. 이현이 이토록 과민하게 거부할 줄 몰랐다. 한참 이현과의 식 이야기가 오가던 와중, 그의 어머니는 최 전무에게 반항하듯 이현을 다른 여자와 결혼시켰다. 했기에 5개월 전 이현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땐,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처럼 며칠을 앓았다.
그저 그런 정략결혼이라기엔,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이었던 이선아와의 결혼.
그뿐인가? 이현은 저란 존재를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을 가열하게 긁었다.
“사빈 씨, 전무님 호출.”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의 박 실장이 비서실에 들어서며 사빈을 불렀다. 생각을 갈무리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실 직원들이 모여있는 출입구를 지날 때였다.
“도대체 무슨 빽이기에, 저렇게 당돌해? 전무님 빽이야?”
머리가 짧아 인상적인 직원 한 명이 사빈을 향해 이죽거렸다.
“음흉하고, 음울하고. 얼굴은 예쁘장한데 사람이 왜 이렇게 칙칙해? 딴 세상에 혼자 살아? 어디서 갑자기 비서실로 뚝 떨어진 건지 몰라도 어지간한 빽 아니면 우리 위아래 구분은 좀 하고 지냈으면 좋겠네.”
사빈은 여자의 말에 아랑곳없이 비서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저따위 비아냥에 일일이 반응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뒤에서 거친 욕지거리가 들려왔지만, 박 실장의 호통에 이내 잠잠해진다.
지하까지 내려간 승강기를 기다리며 사빈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처음 이현을 만난 건 열일곱,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밤이었다. 그때도 똑같았다.
같은 반 아이들은 지나치게 순종적이며 말수 적은 그녀를 못마땅해했다. 그것이 표출된 건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늦은 밤. 짓궂은 몇이 합심해 교실 문을 잠가 그녀를 가뒀다.
넥타이에 감긴 손목은 사물함 손잡이에 묶여있었으며, 그녀의 입엔 누군가의 양말이 박혔다.
얇은 판유리를 때리는 빗소리. 덜컹거리는 나무 창틀. 오래된 교실에서 풍기는 정체 모를 냄새에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솟았다.
그들의 행동은 엄연한 감금이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자신이 울게 되면 일어날 파장을 알기에 사빈은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이현이었다.
사물함에 묶여있던 그녀는 학교 복도를 걷던 이현과 눈이 마주쳤다. 늦은 밤 허공을 움직이는 빨간 담뱃불.
그때의 이현은 반항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학교에서도 손 쓸 수 없는 두려운 남자로 유명했다. 재력과 권력을 모두 갖춘, 금수저의 나쁜 예나 다름없는 최이현.
복도 창문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사빈은 시간이 멈추는듯했다. 그는 묶여있는 그녀를 보면서도 지극히 태연하게 흰 연기를 흘렸다.
가만히 서서 담배를 모두 태운 그가 교실 뒷문을 열었다. 우습게도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그가 뒷문을 통해 교실 안으로 들어와 그녀 앞에 마주 섰을 때, 전신으로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 숨을 쉴 수 없었다.
〈더럽게. 질질 흘리기나 하고.〉
낮고도 야한 목소리. 그는 입에 물려있던 양말을 빼내곤 그녀의 턱을 강하게 잡았다. 마뜩잖은 남자의 눈빛에 고맙다는 말도 못한 채 넋을 놓았다.
〈내일 교무실에 신고해. 그리고 널 이렇게 만든 애들, 다 조져. 얼굴이 예뻐서 질투하는 것뿐일 테니.〉
그 다음 날 최이현은 교내 흡연 죄로 징계를 받았고 사빈은 아이들 모두를 신고했다. 그날 그가 저보다 두 학년 위인 3학년생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부모님과의 식사자리에서 보았던, 이량 모직 대표이사의 손주였다는 것도.
그 후엔 그와 만날 방법이 없었다. 사고로 인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현은 경영수업을 위해 외국으로 넘어가 군대와 대학졸업을 포함 8년 뒤에야 재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나치게 잘난 남자, 완벽한 그에 대한 소문은 신랄했다. 게이 혹은 성불능자. 혹은 독특한 성벽을 가진 도미넌트 일지도 모른다나?
사빈은 마지막 추측에 가장 큰 무게를 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여기 굉장한 돔이 있는데, 그쪽에서 아가씨를 섭으로 지목했어요. 플레이 한번?〉
그렇게 2년 전 최이현을 키에에서 만났다. 무려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라는 관계로 그와의 접점을 만들 수 있었다.
마치 꿈만 같았다. 클럽 매니저 니르는 최이현이 직접 지목했다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물론 일회성 계약이긴 하지만, 성향만 잘 맞는다면 지속적인 관계도 가능할 거라며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렇게 4층 3호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저를 지배할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의 쾌감은 겪어보지 않은 이상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주인님.〉
심연과도 같은 고요, 묵직한 구둣발소리. 변태적인 성벽이라 해도 좋았다. 그가 다가와 무릎 꿇고 기다리던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조도 낮은 밀폐된 공간에서 마주한 이현의 눈은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교육이 아주 잘 되어있네요. 좋아, 뭐부터 시작할까…?〉
짜릿한 성적쾌감이 스쳐 지나가던 순간 벽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키에의 마스터 니르의 고함이었다. 4호실에 누군가 감금되어있다는 니르의 고함에, 이현은 고개를 돌려 차가운 시선으로 벽을 응시했다.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감금….’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마치 그날처럼.
제가 학교 사물함에 묶여있던 그 날처럼. 이현은 여자를 품에 안고 뛰어나왔다. 그 여자가 이선아였다는 걸 알게 된 건, 3개월 전 서경준을 만나면서부터였고 말이다.
참기 힘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질투를 포함한 분노에 숨이 턱 막혔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저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사라졌다.
갖고 싶었다. 저 자신의 힘으로는 닿지 않는 남자였기에, 아버지의 눈에 들어 이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아니, 실은 그에게 소유 당하고 싶다. 그 아래 무릎 꿇고 입 맞추고 그의 지배 아래 완벽해지고 싶었다. 그가 없으면, 자신은 그저 음울하고 의뭉스런 기분 나쁜 여자일 뿐이다.
사빈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전무실 앞에 도착한 사빈은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눈앞이 뿌예지는 걸 느끼며 두어 번의 노크와 함께 문을 열었다.
명숙이 피워낸 메케한 담배 연기가 사빈을 상념에서 끌어올렸다.
의자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던 명숙이 들어온 사빈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내온 사진, 잘 받았어. 자…. 그래. 이게 우리 조카며느리란 말이지? 이 이상한 포르노 사진 같은 게?”
사빈은 입가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 계약서는 뭐야. 돔은 뭐고 섭은? 차근차근 설명해. 김사빈이. 너…. 뭘 알고 있는 거니?”
어금니를 강하게 문 사빈이 명숙의 앞으로 다가가 시들어가는 백합 머리를 툭 잡아 뜯었다. 명숙이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모니터를 돌렸다.
이현에게 보냈던 바로 그 사진과 서경준의 공간에서 몰래 찾아낸 계약서가 명숙의 모니터에 선명하다. 서경준은 이선아를 상처 입히는 일 따윈 못한다. 그저 그녀를 가지려고만 할 뿐. 그녀를 상처 입힐 사람은 바로 자신뿐이라는 걸 알았다.
사랑? 아내? 남편…?
만약 정상적으로 가질 수 없는 남자라면, 같은 높이까지 끌어내리면 되겠지. 사빈은 모니터 속 선아의 사진을 노려보며 분하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