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경기도 파주에 있는 촬영용 세트장 앞에 몇 대의 고급차량이 차례로 멈춰 섰다.
빗물에 젖은 비포장도로로 인해 진흙투성이가 된 차량 문이 열리고 검은 우산을 든 사빈과 박 실장은 서둘러 자신의 상관에게 뛰었다. 하늘이 검어서인지, 정오가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새벽 같은 분위기를 냈다.
“네가 고른 모델이 누군지 직접 보자. 그래…. 알아보니 네 처가 정말 가게를 내놨다더라.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했어. 혼인무효소송에서 한걸음 멀어졌다고 전해줘.”
명숙은 농담조로 말했지만, 그 안의 진심은 가시처럼 뾰족했다.
“모델이 마음에 안 들면 교체하셔도 좋습니다. 저도 서경준이란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들어서 말입니다. 사생활이 지저분한 모델은 회사 이미지만 망칠 뿐입니다.”
“아주 잘 아는구나? 이미지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놈이…. 쯧,”
“고모님, 저는 선아를 사랑합니다. 그만하시죠.”
이현의 말에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던 사빈의 속눈썹이 떨렸다.
명숙과 이현은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현의 어깨에선 물기가 흘렀다. 두 사람의 등장에 세트장 안은 이미 지독한 긴장으로 촬영을 중단한 상태였다. 우산을 접은 사빈이 뒤를 따르고, 이현은 관계자의 인사를 받는 명숙을 지나 서경준이 서 있는 세트 앞으로 걸어갔다.
하얀 바탕에 두 개의 의자. 다소 어두운듯한 주변 조명 아래 그 혼자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채 대본을 살피며 서 있었다.
이현의 눈빛이 차갑게 냉각됐다.
지금은 아닐지 몰라도 한때나마 서경준의 서브미시브였던 선아가 떠올랐다.
“본부장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서경준을 쳐다보며 서 있는 이현의 곁으로 그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와 꾸벅 고개 숙였다. 그제야 대본을 들여다보던 경준이 이현을 발견하곤 가만히 입꼬릴 올렸다.
“서경준 씨를 전무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셔서 모셔왔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라.”
“아, 어이 경준 씨! 본부장님께 인사드려요!”
경준은 스포트라이트에서 빠져나와 이현과 마주 섰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적대감. 매니저는 이량의 독사라 불리는 최이현의 카리스마에 목덜미가 선득해짐을 경험했다.
180cm를 거뜬하게 넘기는 서경준과 마주 서도 시선의 높낮이가 없는 최이현. 오만한 시선으로 경준을 쳐다보던 이현은 머쓱해 하는 매니저가 명숙에게 뛰어간 뒤에야 주머니에 넣은 손을 뺐다.
“오랜만입니다. 어제 늦은 오후, 개인 전화로 연락드렸습니다만. 안 받으시더군요.”
경준이 싱긋 웃었다.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다 주의라서요. 죄송합니다.”
“흠…. 건방지네요. 제 번호를 몰랐단 말입니까? 이거 실망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오늘부터 제 전화를 안 받으신다면, 저는 아주 치졸한 갑질을 행할 테니, 주의하십시오.”
“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나저나 꽃은 잘 받으셨는지 모르겠네요. 그날은 제가 술에 취해 꽃을 샀지 뭐예요. 엉망인 꽃을 보내 죄송합니다. 꽃을 사자마자 본부장님 생각이 나서, 사고를 쳤습니다.”
싱글벙글한 얼굴에 의뭉스런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현은 다짜고짜 걸음을 옮기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경준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잘 받았습니다. 역시 서경준 씨 짓이었습니까? 제 아내의 숍에서 사셨더군요. de Rosa. 제 아내의 화원입니다만. 고의입니까?”
“정말이세요? 고의라뇨, 몰랐습니다.”
미처 몰랐다는 듯 손사래 친 경준이 뒤따르려는 사빈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파랗게 질린 그녀가 걸음을 멈추곤 두 눈을 내리깐다. 두 남자가 흡연구역에 나타나자 모여있던 스텝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조립식 철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치 백색소음 같다.
“서경준 씨.”
“예.”
“나는 서경준 씨를 대한민국 최고로 만들어 줄 수도, 상종 못 할 쓰레기로 만들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시겠죠. 최이현 본부장님이 보통 분인가요?”
이현의 미소가 비틀어진다. 담배를 문 최이현은 언뜻 보아도 냉정하고 오만한 사내였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남자의 비릿한 미소라니.
“그런데 지금 제 머리는 서경준 씨를 쓰레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서경준 씨가 어디 한번 대답해보세요.”
그의 담배 연기가 가늘게 피어올라 경준의 검은 눈동자 앞에서 일그러졌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스트레스받으시는 일이라도?”
이현은 소리 내 웃더니 이내 나른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턱 끝을 들었다.
“스트레스라…. 좋습니다, 서경준 씨.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거기서 멈춰요.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오면, 저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경준의 표정이 순간 싸하게 굳었다가 풀어졌다. 이현은 경준을 뒤로 한 채 담배를 비벼끄고 세트장 문을 열었다. 빗물이 떨어지는 웅덩이를 응시하던 경준이 이현을 향해 돌아선다.
“아직도 선아에게 아무 말도 못 들으셨나 봅니다. 제가 왜 화가 났는지…. 무얼 잘못했는지. 본부장님께서는 저를 이해하실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 우린, 같은 부류 아니었습니까?”
같은 부류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한 경준이 빗속으로 걸어나간다. 촬영용으로 입은 슈트가 흠뻑 젖기 시작했다. 이현은 경준을 말리러 뛰쳐나가는 사람들을 거슬러 안으로 들어갔다.
“김 비서, 이리 와봐.”
멀리 서 있던 명숙이 걸어오는 이현의 모습을 쳐다보며 사빈을 불렀다. 저런 최이현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흥분해 되려 냉정하게 보이는 혼란스러운 남자의 표정은. 명숙이 담담히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사빈에게 지시했다.
“저놈 출장을 좀 보내야겠어. 베트남공장 출장일정 잡고, 사빈이 네가 동행해. 결혼하고 나서부터 나사 하나 풀린 놈처럼 굴어서 안 되겠어. 우리 본부장 좀 잘 부탁해.”
***
비 내리는 날엔 유난히 원두 향이 짙은 것 같다. 선아는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기 위해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뺐다. 이량 모직의 본사 1층에 마련된 카페엔 유난히 많은 직원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대부분 바쁜 업무일정으로 인해 포장 컵을 이용했고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녀처럼 외부에서 방문한 사람들이 주를 이뤘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그의 회사를 찾았다.
명숙의 말대로 화원에 신경 쓰느라 그의 내조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결혼한 지 벌써 5개월. 처음 보자마자 반했다는 남자는 만난 지 고작 한 달 만에 식장을 예약했다.
독특한 성벽으로 폐인에 가깝게 망가진 막내딸이 엄마에겐 창피했던 모양이었다. 누군가에게 감금당해 험한 일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망가진 딸을 처리하려 했다.
병적으로 선 자리에 집착하는 엄마에게 이끌려 나갔던 서른 번째 선 자리. 그날 최이현을 만났다.
다행이라면 아버지가 꽤 유능한 건설업계의 재력가였다는 걸까?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껏 엄마가 들이민 남자들을 떠올리자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
그러던 와중 이현의 등장은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아줄과 같았다. 물론, 이현이 선 자리에 나온 건 그의 어머니가 이현을 약 올리기 위해 일부러 만든 발악에 가까운 자리였지만 말이다. 죽 끓듯 한 어머니의 변덕이 아니었더라면…. 만약 주변의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면, 그를 만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그와 결혼해 이량 모직의 최이현을 겪으며 그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결혼하죠, 우리. 선아 씨 말고 다른 여자는 이제 안 보입니다.〉
가벼운 듯 가볍지 않고, 진중한 듯 우아한 남자.
그런 남자를 성인용품 업체 직원으로 오해했다니…. 하, 웃음이 났다.
도미넌트 성향을 가졌다고 했으니, 당시 클럽에 드나들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거겠지….
자리에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는 선아에게로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빼어난 미인은 아닐지라도 그녀에겐 무언가 독특한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저녁 식사 거리를 고민하며 몇 가지 재료를 쭉쭉 써내려가던 그녀는 동그라미를 몇 번이고 겹쳐 그리다 테이블에 쿵하고 이마를 찧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휴대전화 시계를 켰다. 퇴근 시간에 가까워진 저녁 7시.
오늘 이현은 야근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함께 식사하고 영화를 보자며 다정하게 키스해 주고 출근했다. 선아는 남은 커피를 모두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눅눅한 공기를 밀어내는 천장 에어컨 바람에 그녀의 머리끝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그녀가 카페에서 나옴과 동시에 조용했던 로비가 부산스러워졌다. 느긋하게 움직이던 직원들 몇이 꽁지 빠지게 비상계단을 찾아 들어가고 로비 앞에 세워진 낯익은 두 대의 차량에선 이현과 명숙이 내려섰다.
회사에 와본 적이 없기에 업무 중인 이현은 처음이었다. 선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전무이사 명숙의 곁에서 이현은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모두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선아는 카페에서 나온 그대로 자리에 서서 이현이 저를 발견해주길 기다렸다.
“모델은 아주 마음에 들어. 패기도 있고, 비주얼도 좋고. 그러니 그대로 진행해.”
“아뇨. 이번 시즌만 진행하겠습니다. 전속모델은 재고해보죠.”
“본부장, 요즘 들어 반항이 늘었네? 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닐 테니. 어쨌든 베트남공장에 좀 다녀와야겠어. 김 비서가 일정 잡아줄 테니 준비해.”
“베트남공장 말입니까? 제 업무영역이 아닙니다만.”
“으음, 아니야. 이번에 새로운 지사가 설립될 거야. 위쪽에선 이미 적임자를 찾는 중이고, 나는 아주 유능한 내 조카를 그 자리에 밀어 넣을 생각이거든. 일단 시찰 겸 다녀와. 후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장기 출장이라면 아내와 동행하겠습니다.”
“아니. 공과 사는 제대로 구분해. 사빈이와 가. 교만하게 굴지 마, 최이현. 하라면 해!”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앞서가는 명숙의 뒤에 이현은 멈춰 섰다. 서릿발 날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박 실장이 서둘러 임원 전용 승강기 버튼을 누른다.
교만하지 말라고? 점점 명숙의 간섭이 도를 지나치기 시작했다. 이현은 짜증스런 마음을 누르고 사빈을 불렀다.
“하나 물읍시다. 김사빈 씨. 당신 뭡니까.”
조용히 곁에 서 있던 사빈은 이현의 질문에 주변을 둘러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말씀이신지…. 듣는 귀가 많습니다. 들어가서 말씀드리죠.”
“우리가 숨어서 이야기해야 할 만큼 비밀스러운 관계였나?”
“…기억 못 하실 겁니다.”
“언제 만났습니까.”
“처음 만난 건 10여 년 전, 어른들과 함께였고 최근은 2년 전입니다. 4층 3호. 키에입니다.”
키에라는 단어에 이현의 비소가 짙어진다.
“플레이했나?”
“아뇨.”
“그럼?”
“들어가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쨌든, 베트남 출장은 저와 함께 가실 겁니다. 일정은 조금 전 차에서 짜두었고, 18박 20일 일정입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만히 서 있던 이현이 돌아섰다. 사나우면서도 우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이현을 쳐다보던 사빈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플레이도 하지 않았다 하고, 나는 김사빈 씨를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전무님 말씀으로는 김 의원댁 막내딸이라고 들었습니다. 무슨 거래가 있었는지 몰라도 저, 유부남입니다. 김사빈 씨가 제게 들러붙을 이유 없습니다. 질척하게 들러붙을 생각이라면, 이쪽에서 먼저 깔끔하게 잘라드리죠. 인사과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이현의 냉랭한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빈이 돌아서는 그의 팔을 잡았다.
“플레이가 아니라 섹스여도 말입니까?”
사빈의 눈동자가 크게 너울진다. 작게 실소하며 사빈에게 잡힌 팔을 내려다본 그가 웃음기를 모두 없앤 섬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