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온몸에 힘이 빠져 천천히 무너진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 한 방울이 콧날을 따라 내려와 그녀의 뺨으로 툭 떨어졌다.
“힘들었어요?”
그녀의 이마에 그의 입술이 눌렸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이현은 어안이 벙벙한 그녀의 무구한 얼굴을 응시하며 손목에 감긴 벨트를 풀었다. 하얀 피부에 새빨갛게 남은 벨트 자국은 어딘지 모르게 외설적이다. 마치 선을 본 그 날, 그녀의 손목에 새겨져 있던 시곗줄 자국처럼.
그가 그녀의 손목에 입 맞추며 키득 웃었다.
“혼란스러울 거 없어요. 그저 선아 씨가 몰랐던 제 다른 모습이에요. 어때요…. 무서웠어요? 싫었어요? 저급했나요? 미안해요.”
“아뇨! 절대요…. 저급하지 않았어요….”
그가 맥박이 뛰는 손목 안쪽을 핥으며 축 늘어진 그녀를 정성껏 어루만졌다.
“씻겨줄게요.”
그제야 그녀가 맑게 웃었다. 고통과 눈물로 일그러진 얼굴이 아닌 애정과 신뢰가 가득한 미소에 그의 가슴이 간질간질 요동쳤다.
문득, 진짜 성향은 저쪽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났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들어줄래요?”
그는 방법을 달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검은 비가 투명한 우산 위에 쏟아졌다. 불 꺼진 de Rosa 앞에 한참을 서 있던 경준의 눈빛이 까맣게 죽는다. 그는 우산을 접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건물의 을씨년스런 분위기에 빗소리가 겹쳐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기운을 풍겼다.
진저리쳐지는 축축함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경준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재생했다. 그는 복도와 이어진 데 로사의 뒷문을 지그시 바라보다 도착한 승강기에 몸을 싣고 8층 버튼을 눌렀다.
지어진 지 30년도 넘은 건물 복도엔 흔하다는 감시카메라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그가 7호라고 쓰인 문앞에 서서 지문을 인식하자, 가벼운 기계음과 함께 잠금이 해제되었다.
열린 문틈으로 쾌적한 공기가 밀려 나온다.
슬슬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각종 cf와 지면 광고 촬영, 그리고 지난번 출연했던 예능에서 꽤 괜찮은 반응을 얻어서인지 오늘도 아파트를 나서며 알아본 몇몇과 악수해야 했다.
위험하다.
젖은 우산을 우산꽂이에 툭 꽂아넣은 그가 축축한 머릴 쓸어 넘기며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암갈색 소파 등받이에 던졌다.
공간은 꽤 넓었으나 가구는 간소했다.
가벼운 식사가 가능한 티테이블과 커다란 침대. 그리고 소파와 화면이 작은 티브이가 전부였다. 시계와 넥타이를 풀던 그가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침대를 향해 돌아서서 가볍게 실소했다.
“예쁘게 기다리고 있었네요?”
그의 시선이 닿은 침대맡엔 무릎을 꿇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두 눈을 가렸고 입에는 탁구공만 한 볼을 물고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해 흘러내린 타액이 여자의 턱을 적셨다.
경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입에 물린 볼을 빼냈다.
경직된 턱이 덜덜 떨려 잘 나오지 않는 음성으로 그녀는 말했다.
“주인…님, 하아….”
“네, 사빈 씨.”
“보고 싶었어요….”
경준은 사빈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닦아준 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그녀의 발가락은 파랗게 죽어있었고 고통을 참는 얼굴은 일그러졌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경준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아래 놓인 서랍을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찬찬히 살폈다.
“최이현 본부장이 제 연락처를 물었다고요?”
물방울 모양의 플래그를 꺼낸 그가 덜덜 떠는 사빈의 손을 잡아 침대 위에 눕혔다.
“아파…. 다리가 아파요, 아파. 하아, 너무…,”
“닥치고 내 질문에 대답해요.”
다리가 펴지지 않아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때리자, 무릎을 모은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고통을 넘어선 기대감이 차곡차곡 차오른다. 경준은 작게 조소하며 그녀의 둔부를 양손으로 넓게 벌렸다.
“오늘 그녀가 또 내 눈앞에서 도망쳤어요. 그래서 아주 기분이 안 좋아. 겨우 찾았는데….”
뜨끈한 액으로 범벅된 음부를 길게 핥은 그가 물방울 모양 플래그를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좁은 구멍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녀가 세이프 워드를 외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서경준의 입술이 그녀의 외침을 틀어막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사빈의 입술을 짓씹어 상처 낸 그가 바지 지퍼를 내리곤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다.
“최이현이 왜 제 연락처를 가져오라고 시킨 것인지 알아와요. 협조하기로 했잖아요? 사빈 씨는 최이현을…. 저는 제 사랑하는 여자를 되찾는 데 일조하기로. 그러니 마지막 경고입니다. 제 물건 함부로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아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입술 새로 그의 성기가 거칠게 박혔다. 애정도 신뢰도 없다. 비정상적인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만난 여자가 이선아를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선아.
경준은 눈을 감고 그녀의 피부를 천천히 상기해나갔다. 온몸의 피가 한점에서 들끓는다. 그가 사빈의 얼굴을 잡고 마치 성교를 나누듯 거칠게 삽입하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고통에 일그러졌다.
***
아내를 위해 욕조에 물을 받고 향이 좋은 입욕제를 푸는 일이 퍽 즐거워 보이는 이현이었다. 남들은 아내 바보라고. 혹은 팔불출이라고 하지만, 이현은 기대감에 들떠 욕조 안에 앉아있는 선아는 보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웃음이 난다.
어쩌다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걸까?
첫눈에 반해서? 어딘지 모를 비슷한 성향이 엿보여서? 이 여자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게 언제였지?
더운물에 녹아버린 입욕제의 상큼한 감귤 향이 수증기와 함께 욕실을 가득 채웠다. 선아는 부끄러운 듯 몸을 웅크려 욕조 안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새하얀 타일을 쳐다보는 그녀의 초점이 한점에 고정돼 움직이지 않았다.
이현은 그녀의 어깨에 따듯한 물을 손으로 떠 흘리며 상체를 숙여 입 맞췄다.
가운차림의 그는 침대에서 보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판이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럽고 자상한 남편. 그가 플레이를 제안할 줄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따금 보였던 그의 고압적인 모습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도미넌트 성향을 가졌을 줄이야.
그만큼 그는 완벽한 남편이었다. 디엣 관계에서 흔히 보이는 강압적이고도 오만한 섹스와는 거리가 먼, 다정한 남편.
〈그냥 성인용품 회사의 간부일 뿐입니다. 왜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어요?〉
니르는 그를 단순한 성인용품 판매업자라며 비꼬았다. 그 말을 전부 믿은 건 아니지만, 그가 키에의 관계자가 아니라고 믿은 건 사실이었다. 서경준에 의해 목줄이 채워지고 개밥그릇에 담긴 음식을 거부하느라 몸무게는 뼈만 남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눈은 퀭하니 죽어버렸으며, 손가락 마디마디는 관절염이 온 사람처럼 힘이 없었다. 탈수와 실신을 반복하며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던 와중 문을 열고 들어온 이현은 그녀에게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똑똑히 기억했다.
하긴…. 그때의 저는 사람의 몰골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엉망이었으니까.
서경준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지만, 제 안의 피학적 성향은 그저 호기심에 가까운 정도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현은 달랐다.
이현은 서경준과 다르다.
전혀 기억하지 못할 거라 믿었던 그가, 서브미시브를 제안했다? 설마 기억해 낸 걸까?
선아는 갑작스레 울컥 차오른 눈가를 숨기며 그의 허벅지를 끌어안아 이마를 기댔다. 욕조 가장자리에 앉은 그가 그녀의 머릴 쓰다듬으며 픽 웃는다.
“무서웠나 봐요. 미안해요. 하지만 사실 선아 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어요. 선아 씨가 저 아니면 살 수 없게 만들어보고 싶었달까?”
그녀가 젖은 눈을 올려 떴다.
“저는 이현 씨 없으면 못 살아요.”
“아, 너무 예쁘네.”
그가 상체를 한껏 숙여 그녀를 끌어안았다. 폭이 넓은 소매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늘어졌다. 그는 천천히 가운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와 그녀를 제 앞에 앉혀 끌어안았다.
가는 목덜미에 콧날을 묻은 그로 인해 그녀의 어깨에 아스스한 소름이 솟아오른다. 선아는 몸에 힘을 풀어 그에게 기댔다. 빨갛게 부어오른 유두를 톡톡 어루만지고 목덜미를 핥은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어머니는 정상이 아니에요. 감정기복이 심하고, 고모님과는 관계가 좋지 않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님이 회사를 운영하시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증상이에요. 선아 씨, 저는요…. 어려서부터 통제광이라는 소릴 들을 만큼, 제멋대로에 고압적으로 살았어요. 유년기는 물론이거니와 사춘기, 그리고 실은 20대 초반까지도 제 주변을 통제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이었죠.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바뀌었어요. 제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정중한 사업가가 되어야 했죠. 그것의 표출이 바로 디엣이에요. 상처를 내거나 고통을 주는 SM은 취향이 아니지만, 누군가를 지배한다는 것엔 흥미가 생겼죠.”
상처와 고통. 그리고 지배라는 단어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질렸다. 저도 모르게 뒷목을 쓰다듬은 선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녀의 가슴 앞에 두 손을 교차해 잡은 그가 부드러운 뺨을 수염이 살짝 자라난 뺨으로 비비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선아 씨와의 선 자리는 고모님께 반항하기 위해 나간 자리였어요. 우습죠? 거기서 선아 씨에게 한눈에 반했어요. 카페에서 키스할 때, 저는 선아 씨를 발가벗겨 짓누르는 상상을 했어요. 하지만 선아 씨는 제게 지배당할 여자가 아니었고, 저는 제 성향을 버렸어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현 씨,”
“선아 씨. 제가 왜 존댓말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팔딱팔딱 뛰어대는 혈관에 눌린 그의 입술.
“이게 바로 저를 진정시키는 방법이에요. 지금도 선아 씨를 욕조 벽에 짓누르고 꽁꽁 묶어 사정없이 박아버리고 싶거든요. 아프다고 울 때까지. 용서해달라고 빌 때까지. 하얀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라 먹음직스럽게 변할 때까지.”
그가 젖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비틀어 당겼다. 고압적이고 비틀린 말과는 다르게 몹시도 다정한 키스가 이어졌다. 한참이나 키스하던 그가 그녀를 일으켜 욕조 가장자리에 앉혔다. 자꾸만 모이려는 그녀의 허벅지를 벌려 자극에 붉어진 클리토리스를 검지로 문지르다 얼굴을 묻었다. 숨을 멈춘 그녀가 그의 뒷머릴 잡고 얕은 신음을 낸다. 이현은 제 머릴 잡은 그녀의 손목을 모아 그러쥐고는 도톰한 살점을 간드러지게 핥으며 배꼽까지 올라왔다.
“선아 씨를 보여줘요.”
“보고 있으면서….”
“낱낱이. 하나도 빠짐없이. 음험하고 야하며 충동적인 모습까지, 모두.”
입 끝을 부드럽게 말아 올려 지어 보인 미소는 지금의 야한 분위기와 맞지 않게 건실했다. 대답 없는 그녀의 몸을 꼼꼼하게 핥은 그가 모아쥔 손목을 머리 위로 포박해 흥분에 달뜬 그녀의 콧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질투해줘요, 내 과거에. 나는 이미 선아 씨의 과거에 미친 듯이 질투하는 중이거든요. 사랑해요, 선아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