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런 여자를 서경준이 지배했다?
그녀를 무릎 꿇리고 목줄을 감고, 속박하며 그녀의 사랑스러운 음성으로 주인님이라는 존경을 받았다?
저열하게 끓어오른 분노, 질투, 시기, 그리고 소유욕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만약 서경준이 눈앞에 있었다면 그의 목을 조르고 엉망이 될 때까지 짓밟았을지 모를 만큼 제가 가진 과거가 비록 깨끗하지 않다고 하든들, 그녀만은 오롯이 제 것이길 바란다.
이현은 품에 안겨있던 그녀의 이마와 뺨, 콧날을 따라 입 맞추며 허벅지부터 천천히 손바닥으로 쓸어 올려 전신을 어루만졌다.
야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남자. 그의 어깨에 손 올린 그녀가 살짝 흥분한 듯 개암 색 눈동자를 떨었다.
“선아 씨.”
허리를 휘감아 키스하듯 다가온 그가 진주 귀걸이가 매달린 귓불을 깨물며 낮게 속삭였다.
“네….”
“우리 재밌는 게임 하나 할까요?”
“게임이요…?”
무구한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거울처럼 반사됐다. 약간의 호기심, 기대감, 그리고 미약한 불안이 엿보이는 선아의 눈빛.
잊고 있던 성감이 서서히 자극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듯 부드러운 머리카락 틈으로 손을 넣은 그가 자그마한 뒷머리를 쓸어내리곤 가느다란 허리춤을 와락 끌어안았다.
“위험하거나 강제적이지 않아요. 난 선아 씨를 알고 싶고, 모든 걸 갖고 싶거든요. 제 방식은 조금 고압적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선아 씨는 편안해질 거예요. 어때…. 나를 한번 믿어볼래요?
***
니르는 갑작스러운 정전에 욕지거릴 올리며 지하를 나와 검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대기 중인 덩치 몇이 니르의 뒤를 따르고, 검은 방 안쪽에선 플레이 중인 이들의 비명과 고함, 그리고 신음이 두서없이 새어 나왔다.
정전되어 카메라가 나간 곳은 4층, 세 번째 방.
니르는 한창 플레이 중인 방 앞에서 흠흠 헛기침을 한 뒤, 방문을 두어 번 노크했다.
“고객님, 플레이 중 죄송합니다만, 카메라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안전의 이유로 잠시 흥을 접어주셔야겠습니다.”
하지만 한창 흥분한 플레이어들은 니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기 오늘 어떤 플레이로 예약됐지?”
“갱뱅(1대 다수로 벌어지는 난교)입니다.”
“그래? 그럼 우리 셋이 더 들어간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없겠네. 열어.”
“예.”
한걸음 물러난 니르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주머니에 한쪽 손을 끼워 넣었다. 덩치는 품 안에서 마스터키를 꺼내 센서에 가져다 댔다.
3년 전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 이후 모든 룸엔 마스터키 방식의 잠금장치와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카메라는 비녹화 방식의 실시간 감시채널이었고, 마스터키는 단 두 개만이 존재한다. 키에에 들어오려는 이들은 모두 이것에 동의했다.
플레이란 것은 어찌 보면 양날의 검이다. 독특한 성벽의 만족감을 채워줌과 동시에 비정상적인 사이코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던 에세머(SM 플레이어의 줄임말)들은 적나라한 키에의 보안 방식을 존중했다.
덩치가 문을 열자 침대 위에 엉겨있던 몇몇이 플레이를 멈추고 출입구 방향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니르를 발견한 이들은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키에의 마스터를 실물로 보았다는 사실에 흥분한 듯, 오히려 더 격렬하게 날뛰었다.
“자자, 다들 플레이에 집중하세요. 카메라의 전원만 올리고 나갈 테니.”
니르의 턱짓에 안으로 들어간 덩치가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요리조리 만지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본체에 빨간 불이 들어와 깜빡인다.
세 사람은 끈적하고 외설적인 교성으로 가득한 방을 나와 문을 닫았다. 요즘 들어 성욕이 사라졌는지 제 취향이 분명한 서브미시브를 보아도 딱히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저 짓을 하느니 차라리 지하에 짱박혀 블록을 조립하는 게 낫지….
남자치고 꽤 긴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불현듯 멈춰 섰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한 명의 얼굴.
몹시도 불편한 기억이 떠올랐다.
다급히 지하로 내려온 니르는 서둘러 서랍 안에 들어있던 노트북을 꺼내 열었다. 네트워크가 모두 차단된 그것은 클럽 키에에서 일어났던 사건·사고들이 기록된 블랙박스나 마찬가지.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에 그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변했다. 서둘러 검색한 서경준의 신상명세서와 사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뭐야, 이 새끼….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1급 감시 대상 명단이라는 이름의 폴더가 니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클럽 키에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게 한 장본인임과 동시에 최이현의 손에 죽을뻔한 머저리.
왜 잊고 있었을까?
방치 플레이는 있어도 감금 플레이는 없다. 당시 서경준이 행했던 행위는 플레이가 아닌 범죄였기에 당시 함께 있던 이들 몇몇은 파랗게 질려 키에를 떠났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상대를 감금하고 사육했던, 저급한 범죄자.
니르는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당시 함께 있던 여자의 이름을 까맣게 드래그했다.
이름, 이선아. 최이현이 직접 문을 부수고 들어가 구출해냈던 그 여자가 분명했다. 유난히 흰 피부와 작은 얼굴을 가졌던.
사고가 일어나고 얼마후, 기력을 찾은 여자는 직접 키에를 찾아와 최이현에 관해 물었다. 저를 구해준 남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나? 니르는 수줍은 듯 말하는 그녀가 귀여워 심술을 부렸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성인용품 영업사원이라며 이현에 대해 거짓말을 했고 그녀는 당황한 듯 보였다. 물론, 진짜 속아 넘어갈 줄은 몰랐지만.
“흠…. 결국 찾은 건가? 이 아가씨 무섭네?”
어쩐지 즐거워졌다.
최이현이 첫눈에 반했다며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사랑한다는 제 아내의 성향도 모르고 지금껏 속앓이했을 최이현을 생각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시원했다. 아니지…. 이제 성향을 알게 되었으니, 이 자식이 더 신나서 날뛰려나?
니르는 뚱한 표정으로 화면 속 선아의 얼굴을 크게 확대했다.
아, 이거 볼수록 부럽단 말이지.
***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저는 처음 뵀을 때부터 이현 씨를 믿어왔어요.”
사랑한다는 말보다 떨리는 말은 처음이었다.
서경준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녀의 과거를 알리려 한다. 이유인즉, 일방적인 디엣 해지에 의한 복수 혹은 질투. 그 끔찍한 감정이 애정을 기반으로 한 비틀린 표현이라는 걸 안다. 누군가 그녀를 망가트리고 싶을 만큼 애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현은 손에 닿은 그녀의 가는 목을 가볍게 쥐어보았다. 방어적으로 살풋 벌어지는 입술 새로 하얀 치열과 붉은 혀끝이 그의 검은자를 뒤흔든다.
“키스부터.”
그녀의 발뒤꿈치가 들렸다. 하나로 밀착된 입술에선 기묘하리만큼 관능적인 전류가 흐른다. 두 눈을 꽉 감은 선아를 보며 그는 점점 더 깊숙하게 혀를 넣었다. 심장에서 터져 나온 피가 뜨겁게 들끓어 올라 전신을 달궜다. 그는 목에 감겨있던 검푸른 넥타이를 풀었다.
억눌러왔던 성욕은 다소 조급하고 외설적이라 이현은 자꾸만 숨을 크게 몰아쉬며 제 안의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나쁜 충동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선아를.
잇새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분을 참는 선아를.
갈급하게 저를 원하며 예쁜 소릴 내는 선아를 보고 싶다.
“겁먹지 말아요, 선아 씨.”
그녀의 귓가에 유혹적으로 속삭인 그가 넥타이를 길게 풀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 움찔한 그녀가 손을 올려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바닥에서부터 전해져온 떨림은 흥분인지 불안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묘했다.
“쉬이…. 손대지 말고 가만히. 다치게 하지 않아요. 오늘 저녁 식사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던데…. 잘 먹어야 해요. 점점 말라가는 걸 보면 속상하잖아요.”
“네….”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뒷머리에 곱게 매듭진 리본이 만들어졌다.
“한 번만, 만져봐도 될까요?”
선아의 질문에 이현의 시선이 퇴적물처럼 끈적하게 가라앉았다.
“뭘요?”
“이현 씨를요…. 눈을 가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어디 있어요?”
“바로 앞에 있어요.”
“아,”
그녀가 흠칫했다. 그의 손끝이 하얀 목덜미를 긁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뺨을 만지게 한 그가 싱긋 웃으며 등 뒤로 돌아갔다.
선아는 두 눈을 감고 그의 소리에 집중했다. 가슴이 터질 듯 두근거려 참기가 힘들었다. 그는 원단 사이에 숨겨진 지퍼를 찾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검은 천이 갈라지며 그녀의 흰 등이, 길고 유려한 선이 드러난다.
“선아 씨. 저는 지금부터 선아 씨를 무릎 꿇게 만들 겁니다. 선아 씨는 제 말에 복종해주시면 돼요. 묻는 말에 대답하고 제 지시에 따르되, 저는 선아 씨를 사랑하므로 선아 씨가 그만하길 원하면 언제든 멈춰줄 수 있어요.”
낮고 허스키하게 갈라진 남자의 목소린 끈적하다 못해 농밀한 관능이 뚝뚝 흘렀다. 특유의 달콤하고 다정한. 그런데도 가끔은 농담을 던지고 저를 기쁘게 하는 그의 음성.
그녀는 대답 대신 두 손을 모아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것을 게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게임이 아니란 걸 안다. 그는 저를 시험하려 하고 있음을. 제가 숨겨온 무언가를 끄집어내려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인지했다.
발아래로 허물처럼 벗겨진 원피스가 툭 떨어졌다. 검은 속옷, 아찔한 스틸레토 하이힐, 그것에 대비되는 우아한 진주목걸이와 투명한 피부가 어두운 야경에 유혹적으로 빛났다.
그는 그녀의 날갯죽지부터 천천히 내려오며 입을 맞췄다.
“나는 선아 씨를 묶을 거예요. 손도 발도 쓰지 못합니다. 혹여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행복하지 않을 때. 내가 두려워질 때, 선아 씨는 나를 멈출 수 있어요.”
“…이현 씨.”
“그것을 세이프 워드라고 하죠. 선아 씨의 세이프 워드는,”
“de Rosa.”
그의 입 끝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린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잘했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아요. 대신 저는 선아 씨를 때리지 않아요. 아껴주고 사랑해주며 절정에 오르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볼 겁니다. 좀 이상하죠? 지금껏 선아 씨가 아는 최이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선아 씨가 몰랐던 제 일면일 뿐이에요. 선아 씨의 일면을 제가 모르듯, 저 역시 드러낸 적 없는 모습이니까 당황하는 게 당연합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그녀의 동그란 엉덩이를 힘있게 깨물었다. 밀가루를 발라놓은 듯 흰 피부에 새빨간 자국이 생겨났다. 제 잇자국을 간지럽게 핥고 빨아들인 그가 그녀의 다리를 양손으로 잡아 힘주어 벌렸다. 휘청인 그녀의 다리 사이로 그의 시선이 머무른다.
“사람들은 그런 저를, 도미넌트라 부릅니다. 선아 씨는 저를 주인님, 또는 마스터라 불러주세요. 지금부터 나의 서브미시브가 되어주시겠습니까?”
이현은 대답을 기다렸다.
강제적인 관계는 범죄로 변질할 뿐이다. 만약 아내가 정말 서브미시브의 성향이 있는 여자라면 그로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반쪽을 얻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를 갖고 싶어 성향을 죽였지만, 이따금 솟구치는 본능은 그를 한계까지 끌어내리곤 했다. 예뻐 미칠 것만 같다. 이현은 축축하게 젖어가기 시작하는 그녀의 속옷을 길게 핥았다. 크게 숨을 들이켠 선아의 고개가 작게 움직인다.
긍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