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것은 애정도 존경도 신뢰도 아니다.
어느 순간 서경준은 플레이에 도취한 정신병자가 되어있었다.
한 방울의 물도, 식사도 없이 모욕적인 언사와 학대를 퍼붓기 시작했다. 방문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 목에 걸린 사슬이 덜그럭거리며 숨을 죄어왔다. 졸린 목은 파랗게 죽어 갔고 손목엔 생채기가 가득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아름다운 나비처럼, 그는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그것을 유린하며 망가트리는 행위에 쾌감을 얻었다.
감금.
사람들은 그것을 감금이라 불렀다.
음란한 영상을 24시간 재생해놓은 거대한 방 안에, 그는 그녀를 감금했다.
뚝,
선아는 툭 부러져버린 알로카시아 줄기를 손에서 놓았다. 따끔따끔한 화초의 독이 손바닥에 펴져 열감을 낸다. 황급히 세면대로 달려가 손을 닦고 화끈화끈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선아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거울을 응시했다.
파랗게 질린 여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색 없는 입술이 지나치게 보기 흉해 몇 번이고 짓씹어 보지만, 통증만 일어날 뿐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
만약 그때…. 잠겨있던 문을 부수고 뛰어들어왔던 그가 아니었다면….
선아는 고개를 저었다.
다 지난 일이다. 더는 일어나지 않을 과거일 뿐이다. 지금 그녀에겐 사랑하는 남편이 있으며, 안온하고 해가 잘 드는 거처가 있으니까.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두렵지 않다.
몇 번이고 곱씹은 그녀가 잠겨 있던 문을 열고 차양 아래 서서 기지개를 켰다. 앞치마 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꺼내어 이현과 함께 찍은 사진을 꾹 눌러본다.
***
네 명이 마주 앉아도 남을 만큼 커다란 상 위에 빈틈없이 차려진 음식을 보며 이현은 고민에 빠졌다. 양도 양이지만, 횟감이 되었음에도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생선은 과연 누구의 취향일까? 소금도 치지 않고 숯 자국만 내어 구운 송이버섯은? 육회와 낙지를 뒤섞어 소금 후추로 버무린 저건 대체 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거지?
이현은 속이 불편한 듯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작은 도자기 잔에 담긴 술을 연거푸 비웠다.
“날음식은 취향이 아니란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무님?”
삐딱한 이현의 말에 마주 앉아있던 명숙이 파안대소하며 고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전무님이 아니라 고모님이라고 해야지, 조카님?”
“고모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비서실에 내리신 지시도 그렇고…. 요즘 절 괴롭히는 재미라도 발견하신 겁니까?”
“들켰나? 잘난 최이현이가 당황할 때가 어째 난 그렇게 즐겁더라고. 못됐지?”
“예. 못됐습니다.”
나이 쉰을 가볍게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명숙의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껄껄 웃은 그녀가 대기 중인 직원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매운탕이 들어왔다. 회사에선 카리스마 전무이사 최명숙이었지만, 이현의 앞에선 조카 걱정 마를 날 없는 평범한 가족일 뿐이었다.
“회사 일은 회사에서 얘기하자. 식사 때까지 일을 끌고 와 입맛 버리고 싶진 않으니.”
“전무님은 이량 모직에서 제일 바쁘신 분 아니십니까? 지금 묻지 않으면 저는 고모님 얼굴 뵙기도 힘듭니다만.”
“네놈이 찾아온다면, 회의 중간에라도 시간을 낼 수 있어. 네놈이 회사에서 철저하게 나를 무시해서 그렇지.”
“가족이란 타이틀로 오해받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 더더욱 회사에서 만나야지.”
“김사빈 씨에 대해서만 말해주십시오. 도대체 뭡니까, 그 여자. 아직 일개 본부장 주제에 비서라뇨. 상무님이 들으면 기함하시겠습니다.”
이현은 티 나지 않게 손목시계를 쳐다보곤 말을 이어나갔다.
“불편합니다, 전무님. 저는 저 스스로 일 처리를 해왔고,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입니다. 감시자를 붙이실 만큼 문제아였습니까, 제가?”
“어허, 감시라니. 그저 익숙해지라는 것뿐이야. 이제 내년이면 너도 슬슬 본 임원 자리에 올라야지. 그때가 되면 비서 한 명으론 부족해질 거다. 너도 도움받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
“아직은 아닙니다. 어쨌든 김사빈 씨는 누구 쪽 사람입니까…. 전무님이 보내신 거라고 하던데요.”
날카로운 이현의 질문에 명숙은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비서 집안이 나랏밥을 아주 제대로 먹는 집안이거든. 멍청한 네 엄마가 이상한 결혼만 밀어붙이지 않았어도, 네 사람이 되었을 아이야. 네가 좋다니 허락하긴 했다만, 나는 아직도 네 처가 마음에 안 들어.”
“선아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자가 너무 진취적이야. 순종적이지 못해, 네 처는. 네겐 순종적인 사람이 필요하다는걸, 내가 모를까? 네가 최씨 집안 사람인 이상, 너도 별로 다르지 않아. 봐라, 봐. 네 얼굴. 여자가 집 밖으로 도니 중요한 일 하는 남자가 이 꼴을 하고 다니지.”
“순종과 복종은 다릅니다만. 선아는 복종하는 여자가 아닙니다. 그런 여자라면, 제가 결혼을 결심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쯧, 꽃이나 팔고 말이야.”
“제 아내를 모욕하지 마시죠. 이러려고 부르셨습니까?”
“됐어. 식사나 해. 근데 아직이니? 온다고 했지 않아?”
명숙의 말대로 선아가 식당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퇴근 후 곧장 와달라며 식당 주소를 메일로 전송했고, 선아는 밝은 목소리로 서두르겠다고 했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고급 한식당.
김사빈은 분명 저를 안다고 했다. 그 여자의 의뭉스런 태도를 대할 때마다 이상하게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다 했더니….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나?
“나가보죠.”
이현이 직접 나가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순간 굳게 닫혀있던 미닫이문이 열리고, 다소곳한 선아가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현은 그녀의 뒤에 선 박 실장의 표정을 살폈다. 이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하는 박 실장의 모습과 어딘지 창백한 선아의 표정에 그의 뒷머리가 오싹하게 죄어든다.
설마 문밖에 세워두고 지금까지의 대화를 듣게 한 건가?
박 실장의 평소 성격이라면 전무와의 대화 중 선아가 끼어들지 못하게 막았을 가능성이 컸다. 스멀스멀 기어오른 분노에 이현의 손끝이 떨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선아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며 제 곁으로 이끌자 시큰둥한 명숙이 손짓해, 새로운 식기를 세팅했다.
“꾸미고 오느라 늦었나 보구나.”
명숙은 우아한 원피스 차림의 선아를 훑어보며 작위적으로 입 끝을 말아 올렸다. 선아의 미소는 언제나 단아하다. 그녀는 동요하지 않은 표정으로 가볍게 긍정했다.
“죄송합니다, 고모님.”
“식사해요, 선아 씨. 배고팠을 텐데, 제가 나가볼 걸 그랬나요?”
의미가 불분명한 질문이었다. 차갑게 날 선 이현의 눈빛에 박 실장은 이내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래…. 꽃집은 여전하고? 장사는? 그런 거 돌볼 시간에 네 남편 아침을 한 번 더 챙겨주는 게 낫지 않니? 네가 푼돈 버는 거에 만족할 리는 없고…. 설마 어지간히 집에 있기 싫은 거야?”
“전무님!”
들고 있던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이현으로 인해 명숙은 이죽거리던 행위를 멈추고 선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현은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잘난 제 조카가 한낱 평범한 여자를 깍듯하게 대하는 것도, 그녀의 자유를 존중해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일 새벽 꽃을 사러 나가 손님들에게 웃음을 파는 일을, 술집 창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화가 난 듯 험악해진 이현의 손에 선아의 손이 겹쳐졌다. 작은 손으로 커다란 남자의 손등을 감싸 쥐는 따뜻한 온기에 그의 호흡이 가라앉는다.
“아닙니다, 고모님. 가게는 정리했으니, 너무 심려치 마셔요. 고모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저희 부부 문제로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내조에 힘쓰겠습니다.”
싱긋 웃는 선아의 옆얼굴에 두 사람의 시선이 쏟아진다.
“…정리했다고?”
“네. 오늘부터 정리를 시작했으니, 조만간 마무리될 거예요.”
“…그래? 잘 생각했네.”
이현의 눈이 가늘어지고, 명숙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할 말을 찾지 못해 헛기침만 했다. 선아의 젓가락질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다.
하나로 묶어 느슨하게 물결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 우아한 진주목걸이가 잘 어울리는 여자.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이현은 참기로 했다. 그녀 스스로 입을 열게 만들겠다. 스스로 제게 모든 걸 털어놓고, 저 맑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뻐근한 뒷목을 어루만지며 그녀에게로 살짝 상체를 가져갔다.
문득 이 가느다란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
[서경준 씨 매니저와 통화했습니다. 연락처는 본부장님 메일함으로 전달한 상태입니다.]
이현은 퇴근한 모습 그대로 위스키 잔을 들고 창가에 기대섰다.
“좋습니다. 주말 지나 보죠. 그리고 안내 데스크에 연락해서 꽃다발을 가져온 업체명 알아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꽃다발이라는 단어에 막 머리를 풀던 선아가 돌아섰다. 사빈과의 통화를 마친 그가 소파 위로 휴대전화를 툭 던지고는 선아를 쳐다보며 즐거운 듯 미소 지었다.
“오늘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어요? 그거 내가 좋아하는 옷인데.”
그녀가 입은 원피스는 몸매가 드러나면서도 단정한, 레이스 원단의 미디 원피스였다. 아찔하게 높은 하이힐도, 우아한 진주목걸이도 모두 그의 취향. 손가락에 걸린 머리끈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어색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양 뺨을 붉힌다.
“집으로 가지, 왜 호텔로 오자고 하셨어요? 편하게 쉬시는 게 좋지 않아요?”
그는 비어버린 잔을 한 번 더 채웠다.
“우리 데이트 한 적이 거의 없어서.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외부에서 만난 적 없잖아요. 가끔은 청소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선아 씨랑 뒹굴고 싶어요.”
“아….”
발아래 깔린 검붉은 카펫에 그녀의 발자국이 만들어졌다. 이현이 손을 내밀자 다가온 그녀가 재킷 안으로 손을 넣어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풍성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 맞추고, 입안에 머금은 쓴 위스키를 가볍게 키스하며 흘려 넣는다.
술에 약한 그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금세 얼굴을 붉혔다.
“너무 써요.”
“젤리 줄까요?”
“네.”
작은 캔에 들어있던 새콤달콤한 과일 젤리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물오물 젤리를 씹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검은 눈동자에 번드레하게 차오른 성애. 맞닿은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댄다. 손톱만 한 크기의 젤리를 하나 더 그녀의 입술 새로 밀어 넣었다.
살포시 벌어진 혀끝을 누르고 들어간 손가락이 하얀 치열을 어루만지자 그녀는 입을 다물어 그의 손을 깨물었다. 말랑한 혀에 휘감기는 손가락 끝으로 매끈한 젤리가 만져진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숨을 크게 들이켜 그녀의 향기를 음미했다. 그녀에게서 평소의 흙내가 사라졌다.
가늘고 작다. 그녀를 안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것이었다. 누군가를 지배함으로써, 혹은 무릎 꿇리면서 얻는 쾌감과는 달랐다. 성적 흥분으로 얻는 쾌감보다 누군가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얻는 쾌감이 컸던 그로서는, 이선아라는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자극적인 상황이 아니어도 그녀에게 흥분했고 그녀를 무릎 꿇리지 않아도 절정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