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샤워를 마친 그가 은은한 등을 밝힌 침실로 돌아왔을 때, 선아는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뒤였다. 그녀의 귓불에 박힌 작은 귀걸이가 앙증맞게 빛난다.
“먼저 출근해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은 좀 쉬다가 나가시는 거죠?”
촉촉하게 젖은 머릴 털어낸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가볍게 입 맞췄다. 상쾌한 민트 향이 번진다.
“태워다 주고 싶지만, 오늘 좀 늦장을 부렸더니.”
“괜찮아요. 어제 새벽에 들어오신 거 같은데…. 몸 상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알겠어요. 걱정시키지 않을게요.”
그의 싱그러운 미소에 그녀 역시 환하게 웃으며 현관에 놓인 신발에 발을 넣었다. 가운 차림의 그가 현관 앞까지 그녀를 배웅하며 아쉽다는 듯 몇 번이고 그녀를 끌어안는다.
선아에게서 풍기는 상큼한 자몽 향이 코끝을 맴돌다 사라진다. 그녀가 사라진 아파트엔 적막이 찾아왔다.
이현은 곧장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천천히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머리를 말리고 잘 다려진 셔츠와 슈트를 차려입었다. 곱게 걸린 넥타이들 사이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검푸른 빛의 타이를 꺼내어 목에 건 그가 시계를 손에 들고 거실로 나왔다.
쏟아지는 빗물은 온 도심을 잿빛으로 만들었다.
굳게 닫힌 서재 문을 연 그가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우아한 마호가니 테이블에 올려진 투명한 화병이었다.
싱그러운 백합 서너 송이가 반듯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은은한 향을 낸다. 서재 한쪽에 마련된 전신 거울 앞에 선 그가 타이와 시계를 바로 매곤 서적 사이에 자리 잡은 금고문을 열었다.
축축한 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기분이다. 이현은 쌓여있는 문서를 옆으로 밀어내 작은 상자 하나를 찾아냈다. 주먹만 한 그것을 꺼낸 그가 차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케이스 덮개를 열었다.
어딘가에서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작은 크기의 서랍 열쇠. 이현은 천천히 주저앉아 책상 맨 아래 칸 서랍에 열쇠를 꽂았다.
지난 9개월간 단 한 번도 열어 본 적 없는 서랍.
매끄럽게 열린 서랍 안에서 이현은 무언가를 덮어둔 검은 천을 들었다. 유난히 서늘했던 표정에 건조함이 더해진다.
서랍 속 가지런히 들어있는 승마용 채찍과 검고 얇은 밧줄이 시신경을 지배하고 심장박동을 드높였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현은 옆에 놓인 휴지통에 검은 천을 버리고 서랍 문을 닫았다.
손에 든 열쇠를 몇 번이고 쥐었다 편 그가 가죽 상자와 함께 열쇠 역시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그제야 편안해졌다.
고아하고 청초한 백합 꽃잎이 축 늘어져 말간 물을 톡 흘린다.
***
“컨디션은 어떠세요?”
본부장실이 있는 12층에 도착한 이현을 기다린 건 승강기 앞에 서 있던 사빈이었다. 그녀는 막 본부장실에서 나온 듯 이현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뒤를 따랐다.
“괜찮습니다. 어제 좀 과음을 해서. 미안합니다.”
“커피를 내올까요?”
“차갑게.”
“예.”
사빈은 이현을 대신해 본부장실 문을 열었다. 과한 대우라며 그녀를 타박하기 전, 그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엄청난 크기의 꽃다발을 발견하곤 황당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게 뭡니까?”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없는 꽃다발이었다. 온갖 종류의 꽃을 모아 하나로 묶기만 한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이 전해지지도, 호기심이 일지도 않을 만큼 어딘지 모르게 오싹했다.
“아침에 본부장님께 배달된 꽃입니다.”
“나한테요?”
“예.”
“누가 가져왔습니까?”
“그건 모르겠습니다. 안내 데스크에 두고 갔다고 합니다.”
이현은 재킷 단추를 풀면서 책상으로 걸어갔다. 걸맞은 화병을 찾기 어려울 만큼 꽃다발은 거대했다. 게다가 적당히 묶은 포장지 표면의 희미한 붉은 빛. 마치 누군가의 혈흔처럼 상태가 엉망인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가 백합과 폼폼 사이에 끼워져있던 작은 카드를 발견했다.
이현은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마른 꽃으로 장식된 카드를 열었다.
-de Rosa
하얀 바탕엔 날카롭게 휘갈긴 한 단어뿐이었다.
때마침 차가운 커피를 들고 본부장실 안으로 들어온 사빈은,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꽃다발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는 장면을 보았다.
이현은 다가서기 어려울 만큼 위압적인 표정으로 꽃다발을 짓이겼다. 부러진 꽃대와 꽃잎들이 깔끔했던 본부장실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짓이겨진 꽃에선 선득한 풋내가 진동했다.
사빈은 그런 이현을 묵묵히 응시했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손에 잡힌 크리스털 장식을 있는 힘껏 던진 그로 인해 엄청난 파쇄음이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앞으로 천천히 다가온 사빈은, 얼음을 띄운 커피를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 올려 바닥에 무릎 꿇었다.
“사람을 불러서 치우면 됩니다. 김 비서는 빠져요.”
사그라지지 않은 분노에 그의 음성이 갈라졌다.
“지금 치우지 않으면 다치실 수도 있으십니다. 치우겠습니다.”
“사람 부르라는 말 안 들립니까!”
“…명령이십니까?”
사빈은 고개를 들어 이현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인형 같은 여자. 이현은 언뜻 드러난 사빈의 손목을 시야에 담았다.
시곗줄 안으로 희미하게 드러난 붉은 자국.
평범한 사람이라면 학대의 흔적이 아닐까 걱정하겠지만, 최이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싹한 예감이 그의 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김사빈 씨.”
“네.”
“나하고 사적으로 만난 적이 있던가?”
사빈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흔들렸다. 이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무릎 꿇은 그녀가 짓이겨진 꽃송이와 크리스털 조각을 천천히 모으곤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사빈은 무릎에 짓이겨진 꽃잎들을 털어냈다.
“하지만 본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만남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만남? 김 비서가 생각하는 그런 만남이 뭐지?”
“건전하지 못함이라고 할까요?”
“건전하지 못함이라 함은?”
“…어쨌든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냉랭한 이현의 질문에 의미 모를 미소를 띤 그녀가 작게 한숨 쉬며 돌아섰다.
억측이다. 김사빈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아 벌어진 억측. 이현은 과민해진 탓에 사빈을 오해한 거라며 감정을 합리화했다. 사빈이 가져온 커피를 들이켠 그가 가죽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철을 당겼다.
“혹시 서경준이라고 압니까?”
결재란에 휘갈기듯 사인한 그가 두 번째 결재판을 열었다.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던 사빈이 콧등을 찡긋하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지만, 기이한 위화감을 숨기지는 못했다.
“서경준이라고, 이번 시즌 우리 전속모델입니다. 광고팀에 연락해서 서경준 연락처 좀 받아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적막한 공간에서 울리는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어쩐지 섬뜩하다.
본부장실을 나온 그녀는 화장실에서 막 빠져나온 청소직원을 불러 사정을 설명했다. 청소직원이 이현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사빈은 비서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비상구 문을 연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리자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변했다. 사빈은 서둘러 통화버튼을 누르고 계단 끄트머리에 멈춰 섰다.
[잘 전해드렸나요, 사빈 씨?]
***
생각지 못한 이유로 찾아온 선아를 보며 부동산 주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1년은 버텨야지, 장사도 잘 되는 것 같은데 왜 가게를 빼려고 해? 한 5개월 됐나?”
“사정이 생겨서요. 다른 곳을 좀 알아볼까 해요. 집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이만한 자리 찾는 것도 힘든데, 정말 빼야겠어요?”
“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부탁드릴게요.”
선아는 책장 가득 쌓여있는 서류뭉치를 뒤적이며 주인의 연락처를 찾는 공인중개사에게 전화번호를 남기고 밖으로 나왔다. 이현이 선물해준 연한 딸기 우유색 우산을 펴자 후두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좋게 울린다.
부동산과 숍은 그리 멀지 않았다. 터벅터벅 걸으며 그녀는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했다. 오픈 이후 처음으로 새벽시장에 들르지 않았다. 지난밤 서경준이 휩쓸어간 진열장이 허전했지만, 선아는 오늘 하루 문을 닫고 남은 화분들의 줄기를 다듬기로 했다.
서경준이 이곳을 알아낸 이상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선아는 숍의 문을 잠근 채 지난밤의 흔적으로 가득한 테이블을 정리하고, 바닥을 쓸었다. 피 묻은 가위 하며 엉망으로 엉긴 철사가 빗자루 끝에 휘감긴다.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어 드러난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이 턱 끝에 맺혔다.
작은 캐비닛 안에든 장부를 정리하던 그녀는 아주 오래된 파일 하나를 발견하곤 파랗게 질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여기 있었나…?”
3년 전 서경준과 작성한 디엣 계약서.
시작은 아주 흔한 호기심이었다.
자신에게 피학적인 성향이 있음을 사춘기 이후 의식했고, 성인이 된 뒤로는 구체적인 성향이 궁금했다. 많은 시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어떤 관계에서도 성향을 증명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서경준을 만났다.
무명작가의 미술전에서 우연히 만난 그는 어느 날인가, 기묘하고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그녀는 승낙했고, 그날 서경준은 club KIE라는 곳으로 이끌었다.
검은 방, 먼지 한 올 없는 침대, 처음 보는 기구들과 어딘지 모르게 고압적인 기류가 흐르던 그곳. 처음엔 다소 놀랐지만, 조금씩 그의 지배에 따르자 이유 모를 평온이 찾아왔다.
존경과 신뢰, 애정을 기반으로 한 소위 플레이란 것은 그녀가 원했던 피학적 성향의 일부분을 채워주기 시작했고, 서경준은 점점 그 놀이란 것에 심취해갔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어두운 방에 불려가는 날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24/7. 즉, 24시간 7일, always라는 용어를 들먹이며 어느 날인가부터 그녀의 눈앞엔 언제나 검은 방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