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날카로운 가위 날이 교차할 때마다 예리하게 잘려나간 줄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 장미의 가시는 꽤 단단하고 뾰족해 종종 그녀의 손끝에 상처를 만들었다. 이번엔 상처 내지 않겠다며 조심조심 줄기를 모으는 그녀의 입가에 즐거움이 맺혔다.
붉은 장미 100송이를 주문한 남자는 연인에게 줄 카드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붉은색에 걸맞은 하얀 포장지를 깔고 능숙하게 장미를 묶는다. 많은 양의 꽃을 포장하는 것만큼, 기술을 요하는 일도 드물었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아름답게 형태를 잡고 철사로 고정한 그녀가 차가운 물을 포장지 안에 조금 부었다. 카드를 고른 남자가 테이블에 놓인 펜을 들어 정성스럽게 편지를 쓰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고 예쁘다.
아마 이 꽃을 받는 순간, 여자는 환호할 것이며 양 뺨을 붉게 물들이겠지? 아마 그녀는 오늘을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다.
뭐, 아니라면 하는 수 없고.
짓궂은 생각에 고개를 저은 선아는 손님이 작성한 카드까지 곱게 꽂은 뒤에야 포장을 끝냈다.
“좋은 선물 되세요.”
남자는 이렇게 커다란 꽃다발은 처음이라며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숍을 나섰다. 낮부터 우중충했던 하늘은 밤이 되자 더욱 짙게 어그러졌다. 네온사인으로 화려한 도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녀가 램프가 나간 간판을 발견하곤 예쁘장한 입술을 살짝 깨문다.
[내일 오전에 찾아갈게요. 무슨 색이라고요?]
선아는 오픈 당시 간판을 제작했던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분명 고객 정보가 등록되어 있었음에도 상대는 계속해서 색상을 물었다.
분홍이라고 할 수도 없고 핑크라고 하기도 뭣하다. 그렇다고 핑크 바이올렛? 어쩐지 전문적이지 않았다. 살짝 짜증 난 그녀가 사진을 찍어 보내주겠다는 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찍으면 되려나?”
카메라를 들고 긴 머리를 귓바퀴에 걸어 넘기던 그녀는 깜빡하고 풀지 못한 붉은 리본을 발견했다.
손님의 포장을 위해 손목에 감아 두었던 선명한 붉은 리본이 흔들흔들, 흔들린다. 결국, 그녀가 찍은 간판 사진엔 붉은 리본 끄트머리가 등장했다.
“비가 올 것 같은데….”
밖에 내어둔 말린 꽃들이 걱정된 선아는 이른 퇴근을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이현은 오늘 야근이라 했고, 아직 식사하지 못한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며칠 전 문을 연 근처 김밥집에선 여전히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긴다.
그럼 오늘은 자유롭게 김밥에 컵라면?
어제의 이현은 조금 이상했지만, 오늘의 이현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다정함이 좋다. 한없이 저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든든한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 역시 저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듣고 며칠을 두근거려 밤잠을 설쳤다. 차가운 아이스티 한잔을 탄 그녀가 긴 머리를 하나로 틀어 묶고 앞치마 매듭을 풀었을 때였다.
“영업 끝났습니까?”
가벼운 윈드차임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꽃을 좀 사고 싶은데요.”
돌아선 선아의 얼굴이 차게 냉각되어 빳빳하게 굳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다. 선이 아름다운 슈트 차림에, 와인색 행거 치프. 살짝 눈을 가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도회적인 외모를 가진 남자가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서경준.
매끄러운 미소 속에 숨겨진 남자의 본성이 그녀의 발끝을 휘감아 뱀처럼 기어올랐다. 심장이 느리게 뛰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선아는 포장지 속에 숨겨진 가위를 조심스레 움켜쥐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감 시간이라 남은 꽃이 많이 없어요. 어떤 꽃으로 드릴까요?”
가위를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다.
경준은 불 밝힌 진열장 앞에서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턱 끝을 어루만졌다. 지극히 여유롭고 태연하다. 누가 보아도 지금의 상황은 꽃을 사러 온 고객과 포장을 준비하는 플로리스트의 모습이었다.
선아는 가위 쥔 손을 들키지 않으려 커다란 화분 사이로 살짝 물러났다.
“여기 있는 꽃 모두 사죠. 가능한 하나로 포장해주세요. 힘들까요?”
선아의 눈동자가 진열장을 향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예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가격을 말해주시면 맞춰드리는 쪽으로 하시는 게….”
“음…. 어디 보자. 70만 원 정도면 될까요? 그런데 저는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데 로사에 있는 모든 꽃을 사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경준의 구둣발소리가 들렸다. 터질 듯이 뛰어대는 심장박동. 그의 집요한 시선이 그녀의 전신을 훑는다.
“모두 포장해드리죠. 70만 원만 받겠습니다.”
선아는 서둘러 그의 시선을 피했다. 냉기가 흐르는 진열장을 열어 남은 꽃들을 모두 꺼냈다. 이때가 아니면 구매하기 힘든 작약부터 장미, 노란 양귀비와 스마일 락스까지. 안에 있던 꽃들을 모두 꺼내자, 그녀의 작업대가 꽉 찼다.
서경준은 작업을 시작한 그녀에게서 물러나 작업대 맞은편에 마주 섰다.
덜덜 떨리는 손을 꽃가지 사이에 감추고 또각또각 줄기를 잘랐다. 다발의 형태 같은 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그와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에 쏘아진 시선이 뜨겁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서경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줄기를 다듬는 선아를 바라볼 뿐.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시선 속에 감금된 느낌이다.
그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뇌리를 잠식했다. 어둡고 컴컴한. 축축하고 비릿한. 그리고 고통스러운.
“아!”
서두르던 그녀의 손끝을 날카로운 가윗날이 스쳤다. 풀물이 든 손끝에 선홍색 핏방울이 맺히고 뚝뚝 떨어진다.
선아는 티슈를 찾아 움직였지만, 서경준이 좀 더 빨랐다.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그가 피 흐르는 그녀의 손가락을 반대편 손으로 꽉 모아쥐었다. 시종일관 태연했던 그의 시선에 희미한 분노가 맺히기 시작했다. 선아는 손을 빼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서경준의 손바닥이 핏물에 젖어 붉어진다.
“멈춰.”
그에게서 벗어나려 바동대던 그녀의 몸짓이 멎었다.
“움직이면 다칩니다.”
작업대를 사이에 두고 상체를 숙여온 그가 피맺힌 그녀의 손가락을 느릿하게 핥았다. 선아는 움찔했으나,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을 차갑게 응시하며 손가락을 핥은 그가 피 묻은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자연스레 선아의 턱이 들린다. 경준은 목을 감싼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입 끝을 비틀어 올렸다.
“하나도 안 변했네요?”
“…누구신지. 지금 경찰을 부를 상황인가요?”
숨 한번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서경준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서경준이라고 합니다. 초면이라면…. 실례.”
“밖에 계신 분은 함께 오신 분인가요? 도움을 요청해도 될까요.”
그녀의 말대로 숍 밖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경준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그녀의 목을 놓았다.
“제가 사람을 착각한 것 같네요.”
“나가주세요. 꽃 상태가 좋지 않아 팔 수가 없어요….”
“아뇨. 그대로 포장하세요.”
“….”
“포장해요. 당장.”
경준을 노려본 그녀가 목덜미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밴드를 찾아 손가락에 감았다.
서경준은 처음과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포장을 마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숨을 쉴 때마다 그의 향기가 밀려드는 게 못 견디게 싫었다. 결국, 선아는 적당히 둘러 묶은 다발을 그에게 건넸다.
하얀 포장지에 들러붙은 끈적한 핏물. 경준은 거대한 꽃다발을 한 손에 들고선 카드를 내밀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카드 기기에 정확히 70만 원이 찍혔다. 내팽개치듯 카드를 내려놓은 그녀가 물티슈 두어 장을 뽑아 들어 손바닥을 적신 피를 닦았다. 마치 화를 내듯 거칠게 문지르는 그녀의 어깨를 경준이 잡아챘다.
“이름도 같아서, 심히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어깨에 올라온 경준의 손을 날카롭게 쳐낸 그녀의 시선이 변했다.
“경찰을 부를 거예요.”
“이선아….”
“서경준 씨. 당신 여기서 이러면 안 돼요.”
사방에 걸린 거울 속 그녀가 핏물을 닦으며 입술을 짓씹는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 존경 대신 공포만을 주입했던 상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선아는 세면대에 서서 목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아무리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게 못내 화가나 벅벅 문지르고 긁고 할퀴었다.
경준이 차갑게 굳어버린 어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찾았습니까? 당신이 인정하는 진짜를.”
거울에 비친 모습을 응시하던 그녀가 경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혼란을 품은 그녀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찾았어요.”
결국, 참지 못한 경준의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아는 긴 머리를 풀어 핏자국을 가렸다. 넋 나간 표정으로 서 있던 경준이 벽에 걸린 카드 한 장을 뽑아 손에 쥔다.
“서비스로 가져가죠.”
“그러세요.”
“그럼…. 또 봐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호흡이 무너진다. 키 큰 아레카야자 사이에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무너졌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선아의 눈동자가 겁에 질려 흔들렸다.
아무렇지 않은척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나 보다.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모아쥔 그녀가 기도하듯 눈을 감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늦은 새벽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이현은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잠든 선아를 관찰했다.
침실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은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의 검고 진한 시선 속에서 평온하게 잠든 선아의 얼굴은 마치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아름답기에 무구하고, 무구하기에 관능적이다.
이현은 밤새도록 선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붐한 새벽빛이 밝아온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전자시계에서 요란한 알람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커다란 눈을 슴벅이며 몸을 일으켰다. 정결한 고요를 파괴해버린 알람에 허둥대던 그녀는 불현듯 저를 보는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이현 씨…. 설마 안 주무셨어요?”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성큼성큼 걸어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의 양손을 잡아 눌렀다. 잠이 덜 깬 그녀의 작은 얼굴이 푹신한 베개에 폭 파묻히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뜨거운 피부가 겹쳐졌다. 밤새 자리를 지킨 그에게서 느껴지는 피로감에 선아는 반항을 그만두고 얌전히 입술을 내어주었다.
끈적한 소릴 내며 교차하는 입술 사이로 말간 타액이 번드레하게 번져간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깨문 그가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단단해진 성기를 속옷 틈새에 밀어 넣었다.
약간 몽롱한 상태에서의 섹스는 평소보다 조금 거칠었다.
아무 말 없이 허리를 움직이는 이현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가느다란 다리로 그의 허릴 감쌌다. 아주 보통의 섹스였다. 조금 거칠지만, 평범하다는 기준에서 딱히 벗어나지 않은. 그는 충분히 그녀를 흥분시켰고, 그녀의 내부는 끈적하게 젖었다.
머리털이 쭈뼛 설만큼 완벽한 절정이 찾아왔다. 쏟아지기 시작한 빗소리에 몽롱했던 머릿속이 선명해진다.
숨 가쁘게 움직이던 그가 열이 올랐는지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바닥으로 던졌다. 외설적으로 걷혀 올라간 슬리브리스 안으로 뽀얀 살결이 흔들린다. 그가 쥐는 족족 붉게 자국이 생겨나는 피부. 연약한 피부엔 지난번 제가 남긴 잇자국이 남아 있었고 한 줌짜리 손목엔 붉은 자국이 희미하다. 그는 선아의 손목을 감싸 쥐고 맥이 뛰는 안쪽에 입 맞췄다. 이현은 시트를 발끝으로 밀어내며 쥐어짜듯 죄어드는 그녀의 내부를 가르고 깊숙하게 쑤셨다.
들이치는 빗물에 젖어가듯 보송보송했던 피부가 축축하게 젖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