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선아 씨, 오늘은 데리러 못 갈 것 같아요. 먼저 들어가 쉬고 있어요.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갈 테니까.”
다정한 어투의 남자에게 주변의 시선이 가볍게 쏠렸다. 카페 안으로 들어온 최이현은 마치 남성잡지에서 툭 튀어나온 듯 완벽한 슈트 차림을 자랑했다. 서늘하지만 수려한 외모에 저토록 다정한 어투라니.
[무리하지 마시고, 식사 꼭 챙기세요. 아니면 제가 집에 가서 뭘 좀 준비해 둘까요?]
“아니, 그러지 말아요. 예쁘게 기다리고 있으면 돼요. 알죠? 사랑해요, 선아 씨.”
[저도요…. 저도 사랑해요, 이현 씨.]
“그럼 이따 봐요.”
[네.]
마치 라테커피 아래 깔린 진한 에스프레소 시럽 같은 느낌이다. 최이현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에스프레소 시럽을 닮았다. 전화를 끊은 그가 직원이 건넨 롱블랙을 들고 정차 중인 차에 올랐다.
뜨겁고 쓴 롱블랙을 한 모금 머금자 익숙한 거리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현은 천천히 차를 몰아 목적지를 향했다. 현란한 간판, 이국적인 정취. 이태원동 가파른 골목길을 오른 고급 세단이 어느 한적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검은색 패널로 전체를 감싼 건물은 마치 검은색 주사위 같은 느낌을 주었다. 8층짜리 정육면체 건물엔 원형의 창 네 개를 제외하곤 그 어떤 출입구도 눈에 띄지 않았다.
건물과 이어진 주차장 셔터 앞에 서자 기둥에 붙어있던 감시카메라가 움직여 방문객을 확인했다. 이현은 천천히 창문을 내렸다. 그리곤 무감한 시선으로 차량 정면을 응시했다.
가벼운 기계음과 함께 셔터가 오른다. 흔한 보조 등 하나 없는 주차장에 들어서자 다시금 셔터가 내려갔다. 이현은 시동을 껐다. 가만히 차에 앉아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롱블랙을 모두 비웠다.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는 그의 취향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다.
건물 외부에서부터 느껴지는 긴장은 그가 차에서 내리자 더욱더 짙어졌다. 주차장과 연결된 검은 철문이 열리고, 덩치 큰 직원 한 명이 땅에 닿을 만큼 허리를 바싹 숙였다.
“지하로 모시겠습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이현은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안쪽에 붙은 비상등 불빛 아래 이현의 이목구비는 더욱더 서늘해진다.
사내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이현에게 건물이 주는 위압감은 통하지 않았다. 벽을 따라 박혀있는 자수정 같은 불빛이 건물의 주된 조명이었다. 이현을 지하로 안내한 사내가 유일한 색을 띤 파란 문 앞에 서서 다시금 허리를 깊게 숙인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
사내가 손잡이를 돌리자, 어둠과는 맞지 않는 밝은 빛이 쏟아져나왔다. 괴팍한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며 욕지거릴 올린 그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수십 개의 감시카메라 화면이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자연광을 빙자한 조명이 반대편 벽을 밝혔다.
진한 형광 핑크, 어찌 보면 촌스럽고 저급하게 느껴지는 핑크 네온사인이 천장에 박혀 빛을 낸다.
[CLUB KIE]
커다란 마호가니 테이블에 바싹 붙어 앉아 나노 블록 조립에 여념이 없던 남자가 슬쩍 두 눈을 치켜뜨곤 이현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피식 입 끝을 올리며 작은 블록을 찾아 요리조리 핀셋을 움직인다.
“오랜만이다? 다신 안 올 것처럼 굴더니, 웬일이야.”
“다시 온 게 아니라, 알아볼 게 있어서 온 거야.”
이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남자는 핀셋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를 살짝 젖혔다. 물고 있던 담배를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 비벼끈 이현이 가죽 소파에 털썩 몸을 앉힌다.
거만하면서도 오만한. 아내와 통화하며 다정하게 미소 짓던 그는 사라지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내만이 남았다.
“니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인 듯 테이블에 앉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말고는 오랜만에 듣네. 그래. 뭘 알아보러 온 거냐? 네 차 들어오자마자 여기 있는 애들 다 지렸어. 마치 애완견 같지 않아? 주인을 보자마자 너무 좋아 질질 싸는 개새끼들.”
니르는 키득 웃으며 화면을 돌렸다. 수십 개의 룸이 몇 개의 각도로 촬영되어 재생된다. BDSM(bondage, discipline, sadism, masochism)을 즐기는 이들의 광기 젖은 모습에 이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역겨워. 꺼.”
“어이쿠? 하긴…. 요즘 여기에 찾아오는 열 명 중 아홉은, 그저 변태 바닐라일 뿐이지. 쟤도, 쟤도, 그리고 쟤도. 그냥 평범하지 않은 플레이에 흥분하는 변태들의 천국이 되고 있어.”
니르의 손짓 하나에 화면이 모두 꺼졌다.
그제야 이현은 팔걸이에 올린 손에 힘을 풀고 다가온 니르를 노려보았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보자. 어디서 굴러온 여자한테 뻑가 결혼한다고 사라졌던 분이, 여길 다시 찾아온 이유는 뭘까요?”
탁, 소리와 함께 니르가 문 담배 끝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니르는 여전히 위압적이며 오만한 사내를 살폈다.
최이현.
과거, 클럽 키에의 도미넌트 중에서도 상급 도미넌트였던 그는 키에의 창립자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키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만큼,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최이현이란 사람은 유명했다. 물론 실명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없었다. 니르라는 이름이 가명이듯, 최이현 역시 가명을 사용했고 키에를 벗어나면 그는 유능하고 핸섬한 사회인으로 분했다.
그랬던 그가 대략 9개월 전, 갑작스럽게 커밍아웃을 선언했다.
성향을 모두 버려서라도 얻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며, 그는 키에의 출입카드를 자신 앞에서 반 동강 냈다.
당시 그와 묶여있던 서브미시브가 없었기에 다행이라고 니르는 생각했다. 만약, 혹여라도 그가 누군가와 계약을 한 상태였다면 상대는 주인을 잃은 상실감에 목숨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이현은 일회성 계약 말고는 그 어떤 계약도 승낙하지 않았기에 마무리마저 깨끗했다.
지독하게 이기적이며, 자기관리에 철저한 결벽 적 성향.
이현은 제 앞으로 다가온 니르에게 품에서 꺼낸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열어 봐.”
이현은 답지 않게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니르가 이게 뭐냐며 계약서로 보이는 것을 그의 눈앞에 흔들어 보인다.
“그 계약서, 키에의 계약서야. 중재가 키에라면, 분명 자료가 남아있을 거다. 원본 찾아서 가져와.”
“에이, 회원정보를 넘길 수는 없지. 게다가 섭 이름만 있을 뿐이잖아. 돔의 이름을 모르면 무의미한 상황 아니야?”
“그럼 계약했던 돔, 전체를 다 찾아서 가져와.”
“…뭐야. 아는 사람이야?”
니르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이현 앞에 섰다. 하지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는 선아의 사진에 정신이 팔려 계약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성을 찾은 뒤 보게 된 계약서의 하단, 기이한 매듭문양이 그의 뒤통수를 가열하게 후려쳤다.
클럽 키에에서 발행하는 모든 사문서에 새겨지는 매듭 로고. 그것을 확인한 순간 이현은 땅이 흔들리는 충격을 맛보았다.
심각해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사태의 진지함을 눈치챈 니르가 움직였다.
“본명으로 가입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해. 단, 계약서상 이름만 검색을 해줄게. 하지만 엄연히 개인정보 유출이야.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주의해서 행동해.”
웃음기를 모두 뺀 니르의 어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무적이었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 이곳은 9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두 개비의 담배가 재떨이에 짓이겨진다. 얼마쯤 흘렀을까? 손뼉을 친 니르의 표정이 환해졌다.
“빙고, 찾았다.”
이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연신 감탄한 니르는 화면에 뜬 계약서와 사진 몇 장을 프린트했다.
“다행히 계약은 한 건뿐이었어. 물론 그래서 더 찾기 힘들긴 했는데, 이거 완전 보석인데?”
프린트된 종이를 거칠게 빼앗은 이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계약서 하단의 이름을 먼저 확인했다. 저에게 보내온 사진보다 훨씬 더 선명한 글씨. 니르는 이현에게 사진 두 장을 내밀었다.
“첫 출입 당시 찍힌 사진이랑, 계약 당시 사진이야. 와…. 이 정도 마스크 흔한 거 아닌데, 왜 지금까지 몰랐지? 도대체 누구냐? 이선아라는 여자.”
그의 말대로 사진 속 그녀는 지금보다 앳된 외모에 수수하고 고아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현은 선아의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숨이 찬다. 그녀가 누군가의 서브미시브였다는 것이 진실로 밝혀졌다. 저 역시 수많은 섭을 거느렸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파랗게 질린 표정의 그가 계약서를 움켜쥐어 구겼다.
“돔은 누구야….”
분노를 참아내듯 갈라진 음성. 니르는 그가 구긴 계약서를 빼앗아 탁탁 펴고는 그 앞에 내밀었다.
“서경준. 제대로 봐. 휘갈겨 썼지만, 정확히 한글이야.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지? 누군데 이래? 말 안 해줄 거야?”
“아내.”
“…뭐?”
“아내. 내 아내…. 내 여자야, 이 여자.”
니르의 아래턱이 떡하니 벌어졌다.
분명 최이현은 모든 성향을 버려야 그녀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철저하게 숨기고 성향을 죽여서라도 아내를 얻고 싶다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인지라, 조금의 배신감 또한 느꼈었다. 그런 그의 아내가 키에를 드나들던 플레이어 중 한 명이라고?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니르는 긴 머릴 거칠게 헤집었다.
“잠깐…. 그런데 네가 설마 못 알아봤다는 거야? 최이현. 넌 돔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여자의 성향을 못 알아볼 수가 있어? 머리라도 다친 거 아니야?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래. 나도 그게 이해되지 않아.
이현은 갑갑한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못 알아본 게 아니라, 알아볼 수 없었던 거야…. 선아는 피학적인 성향이 없어. 자존감, 자존심 모든 걸 갖춘 여자야. 차라리 돔이라고 했다면 이해될 만큼, 선아는…. 하,”
“이건 누가 보낸 건데.”
“몰라. 익명으로 도착했어. 아마, 서경준이란 놈이겠지…. 만약, 만약 계약 도중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파기한 상황이라면, 반쯤 미친놈이 되어있을 테니까.”
흔들리는 이현의 초점. 니르는 서둘러 서경준의 이름을 검색했다.
“…서경준은 이제 여기 회원이 아니야. 네가 여길 나간 그때쯤, 서경준도 여길 나갔어. 그리고 계약은 네 아내와 했던 계약이 처음이자 끝이고.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이현은 니르가 보고 있는 화면으로 다가섰다.
“본명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서경준이 본명이야.”
이현의 목소리가 위압적으로 가라앉았다.
“네가 어떻게 알아?”
니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답답한 듯 이마를 긁자, 이현은 아무렇게나 널려있던 남성잡지 한 권을 니르 앞에 툭 던졌다.
키보드 위에 떨어진 잡지가 스페이스 바를 누른 듯 듣기 싫은 오류 음이 거슬리게 들려온다.
잡지 메인엔 조금 전 사진 속 주인공인 서경준이 정면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에르난테에서 내놓은 비스포크 슈트를 입고, 한껏 폼 잡은 그의 사진 아래 〈Regnante(에르난테)의 새 얼굴 서경준〉이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니르는 두 번째 충격에 결국 실소했다.
재킷 단추를 여미는 이현의 얼굴에 섬뜩한 조소가 떠올랐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 앞에서 싱글벙글 면접을 봤다…? 재밌네.”
등줄기로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 끈적하게 들러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