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충동-1화 (1/25)

1화

*프롤로그*

아내의 몸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다.

밀가루를 풀어놓은 듯 뽀얀 피부색 하며, 근육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감촉. 마치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이 표현했던 여성성처럼, 결벽 적으로 관리된 음부는 시도 때도 없이 키스하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분홍빛을 띠었다.

작은 꽃집을 운영하는 그녀는 이따금 뾰족한 장미 가시에 찔려 손끝마다 밴드를 붙이고 퇴근했다. 그럼 나는 그녀 앞에 무릎 꿇고 하얀 손가락에 감긴 밴드를 풀어 새빨간 생채기를 치료한다.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에서 새어 나온 한 방울의 피는, 그조차도 관능적이었다.

힘주어 잡으면 새빨갛게 피가 몰리는 피부.

열이 오를 때마다 발그레해지는 뺨.

성적 흥분을 이기지 못해 조금 과격하게 안는 날이면, 그녀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엔 설명 불가능한 색욕이 일렁거렸다.

우리가 서로에게 끌린 이유는 아마 나쁜 충동일 것이다.

신체가 반응하는 본능, 시선이 그녀를 찾는 시간. 어머니가 마련한 선 자리에서 처음 본 그 날….

나는 내 아내에게 반했다.

창이 커다란 서울 어느 호텔의 한식당. 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켰다.

두툼한 상아색 모직코드에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원피스. 긴 머리는 우아한 웨이브를 넣어 곱게 늘어트렸고 그녀의 입술은 은은한 복숭앗빛이었다.

숱이 많지는 않지만, 길이가 긴 속눈썹을 들 때마다 개암 색 눈동자에 가슴이 떨렸다. 그녀에게 다가온 호텔 직원이 두툼한 코트를 받아가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아내는 무구하면서도 고아한 미소를 띠며 직원에게 코트를 벗어 건넸다. 팔꿈치 즈음에서 커팅 된 원피스의 소맷단. 그녀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단정한 가죽 시계가 결혼을 결심한 첫 장치였다.

그날 나는 커피를 마시던 도중 아내에게 키스했다.

아내는 일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아주 좋은 신호 맞나요?’ 라며 여유로운 어투로 얼뜨기 같은 내 마음을 감싸 안았다.

흔하다는 섹스 한 번 없이 아내와 결혼했다.

성향 같은 건….

섹스의 즐거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내 인생 가장 충동적인 선택이었으며, 아끼는 즐거움을 알게 된 일련의 사고 같은 거였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오늘 나는,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

저녁 8시. 야근하는 몇몇 직원의 키보드 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은 정적을 두드린다. 본부장실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이현은 가벼운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본부장님, 지시하셨던 제품 가져왔습니다.”

디자인팀 팀장 강주예의 양손엔 다음 시즌 새롭게 발표될 슈트 두벌이 들려있었다. 이현은 컴퓨터 화면 창을 닫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의 최이현은 유난히 말수가 적었다. 주예는 기분이 가라앉은 듯한 이현의 눈치를 살피며 서둘러 다가와 잘 다려진 재킷을 먼저 꺼냈다.

“그때 말씀하셨던 활동성을 높였습니다. 센터 벤트를 사이드 벤트로 변경하고 안감의 소재를 변경했습니다.”

“그렇군요.”

“아마 마음에 드실 거예요.”

의류 전문회사 이량 모직의 남성패션 Regnante(에르난테). 총괄사업부 본부장 최이현은 영(young)&리치(rich)&핸섬(handsome)의 본보기와도 같은 남자였다. 제품이 유통되기 전 디자인팀은 마지막 점검으로 그에게 착용감과 선에 관한 컨펌을 받는다.

직접 착용하고 생활해본 뒤에야 허가를 내어주는 최이현의 고집은 그를 젊은 나이의 임원으로 만들었던 하나의 방식이었다.

분명 보기 드문 미남임은 분명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까이하기 힘든 남자. 슈트를 차려입은 최이현은 품위부터 선, 그리고 시선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주예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한참 신혼에 물올라 행복해하는 본부장이라는 걸 떠올리며 쓴 물을 삼켰다.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던 그가 지난번 지적했던 부분을 수정·보완해온 재킷이 마음에 드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인팀에 고생했다고 전해주시고, 다음 작업 진행하죠.”

혹여 이번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어깃장을 놓치나 않을까 걱정했던 주예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연신 감사하다며 인사한 그녀가 본부장실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비서실에서 한 통의 연락이 도착했다.

[새로 본부장님을 담당하게 된 직원이 인사드리러 올라갈 예정입니다. 내일 오전 시간 괜찮으신가요?]

지금껏 딱히 비서실 직원의 도움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 이따금 기사가 필요할 때만 비서실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었다. 누구의 지시인지 짐작한 이현의 이마에 실금이 그어진다.

“누구의 지시입니까?”

[전무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에 뵙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비서실과의 통화를 마친 이현은 조금 전 꺼두었던 컴퓨터 모니터를 다시 켰다. 마우스를 쥔 그의 손이 초조하게 떨린다.

점심시간 즈음 도착한 익명의 메일.

환해진 모니터에 떠오른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첨부된 계약서 전문. 이현은 답답하게 매여있던 넥타이를 느른하게 잡아 내렸다.

사진은 흑백이었다. 깨끗한 침대 위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한 여자의 사진이었지만, 그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얇은 레이스 몇 겹을 겹쳐 만든 안대와 손목을 속박한 매끈한 로프. 모아 묶인 그녀의 손바닥에 놓인 날렵한 패들(paddle)을 보며 그는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순백의 속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피부는 그것보다 더 하얗고 아름다웠다.

뒷머리가 죄어드는 느낌에 이현은 화면에 떠 있는 정체 모를 계약서를 확대했다.

〈1. 호칭은 마스터 혹은 주인님으로 통일한다.〉

〈2. 안전상 문제가 되는 기구류는 사용하지 않는다. 단 섭(sub)의 성적 흥분을 위한 기구는 허용한다. 해당 기구 목록은 3쪽 참조.〉

〈3. 세이프 워드는 [데 로사]로 지정한다.〉

〈4. 돔(DOM)은 섭(sub)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선 안 된다. 해당 플레이는 존경과 신뢰 그리고 이해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혹여 섭이 공포를 느끼고 돔을 멀리하게 된다면, 이 계약은 자연스럽게 파기됨을 알린다.〉

〈5. 섭은 돔을 주인으로 섬기며, 해당 계약이 유효한 기간 동안 절대 다른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6. 돔은 섭을 지배하는 동안 또 다른 섭을 만들지 않는다.〉

〈7. 해당 계약은 서명한 시점부터 효력을 발한다.〉

그가 화면 창의 돋보기를 두어 번 클릭했다. 서류 맨 아래 사인란에서 이현의 마우스가 멈췄다.

선명하게 그려진 ‘이선아’라는 이름에 그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친다. 뱃속이 불편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환각제를 흡입한 사람처럼 주변의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세이프 워드, 데 로사….

식은땀 맺힌 이마를 짚은 그가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고 집무실을 빠져나와 서둘러 주차된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거는 동안 본능처럼 터져 나온 욕설을 삼키고 핸들을 내리쳤다. 핸들을 쥔 커다란 손에 뼈마디가 하얗게 곤두선다.

오후 8시 40분. 마감을 20분 앞둔 꽃가게 앞, 막 한 아름의 꽃다발을 품에 안은 손님이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이현은 건물 외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룸미러에 비치는 제 표정을 확인했다.

술이라도 한잔 한 사람처럼 붉게 변한 눈자위, 흐트러진 목깃. 핏대 오른 이마엔 한 방울의 땀이 흘렀다. 그는 비치되어있던 티슈를 뽑아 땀을 닦고 흐트러진 매무시를 정돈했다. 달뜬 호흡을 가라앉히고 운전석 문을 연다.

아내의 사진이었다. 그것도 제가 모르는 과거를 암시하는 치명적인 사진. 이현은 소리 없이 보도블록을 밟았다.

외부 데크에 진열해두었던 꽃 화분들을 안으로 옮기는 아내가 보였다.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미소를 띤 그녀의 고운 얼굴에 치밀어오른 분기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얇은 셔츠에 검은색 앞치마를 한 그녀가 막 주차장에서 나온 이현을 발견하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감각적으로 디자인된 꽃집의 간판. 연분홍색으로 빛을 내던 간판불이 일순 깜빡였다.

〈de Rosa〉의 S가 위험하게 깜빡이다 완전히 꺼져버린다.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던 세이프 워드가 바로 그녀의 숍 이름이었다니….

“이현 씨, 이 시간이 웬일이에요?”

얼마나 반가운지 얼굴에 모두 드러나는 여자. 그녀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작은 뺨을 손으로 감싸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두 눈을 가라 떴다.

“보고 싶어서…. 도와줄 테니 오늘은 좀 일찍 끝내죠.”

“그럴까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것만 안에 넣으면 돼요.”

씩씩하게 말하며 마른 꽃이 들어있는 상자를 드는 그녀의 뒤로 이현이 다가섰다. 이현은 가만히 그녀를 관찰했다. 살짝 굽었던 등을 반듯하게 펴고 차분하게 상자를 옮긴다. 정해진 수순처럼 움직이는 그녀. 바닥에 무릎 꿇고 널려있던 작은 포트를 하나씩 집어 담던 그녀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는 그와 얼마간 시선이 교차하고, 이현은 천천히 재킷 단추를 풀었다. 긴 머릴 하나로 모아 묶은 그녀의 개암 색 눈동자가 기이하게 흔들린다. 갸름한 얼굴 아래 뽀얀 목덜미가 언뜻 붉어졌다.

비가 내릴 듯 축축한 바람이 둘 사이를 휘감는다.

“선아 씨, 우리 영화 볼까요?”

다가온 그가 무거워 보이는 화분 하나를 가뿐하게 들어 올렸다.

“…그럴까요?”

어쩐 이유인지 그녀의 표정에 약간의 혼란이 맺혔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녀를 스친 이현의 얼굴에 미소가 흐려졌다. 조용히 뒤따라 들어온 선아의 기척에 화분을 내려놓은 그가 손목에 채운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돌아섰다.

“정정. 나 지금 선아 씨가 굉장히 필요한데…. 커튼 쳐요. 그래 줄 수 있죠?”

거대한 아레카야자 사이에 서서 그를 응시하던 그녀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재킷을 벗었다.

de Rosa의 간판불이 꺼지고, 커다란 전면 유리는 커튼에 가려졌다. 은은한 빛을 투과시키는 커튼 너머, 스쳐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길게 늘어지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재킷을 벗은 이현은 작은 세면대에 서서 손을 닦는 선아를 가만히 관찰했다.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호감을 느끼고 상대의 매력과 성향, 그리고 취향이 맞을 때 생기는 순차적 감정이 아니다. 선아에겐 지금껏 그가 지켜온 모든 순서가 부질없는 짓이었다.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는 건, 가장 어처구니없고 바보 같은. 혹은 미련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헤어 나오는 방법 따윈 없었다.

그런 여자를 제가 못 알아볼 리 없다. 제 인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 아내를.

아무리 눈을 가리고 손을 묶었다 한들, 사진 속 여자는 이선아. 바로 그의 아내였다.

손을 닦은 선아가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이현에게 다가왔다. 불 꺼진 실내, 팔고 남은 꽃들로 가득한 쇼케이스에서 새어 나온 분홍빛이 언뜻 그녀의 얼굴을 외설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현은 평소 그녀가 작업하는 가죽 의자에 앉아 손을 뻗었다.

“이리 와요.”

“오늘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급해요?”

“발정기일 수도 있고, 선아 씨가 너무 예뻐서 일수도 있고.”

“에이, 이제 안 속아요. 저는 그렇게 예쁘지 않아요.”

“내 눈엔 선아 씨가 가장 예뻐요.”

그에게 존대어란, 자신을 억누르는 방어기제 같은 거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중해 미칠 것만 같은 그녀를 다치게 할 것 같아서 그는 존대를 고집했다.

앞치마를 벗으며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당겨 입술을 포갰다.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촉촉한 혀가 감미롭게 그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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