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여름-6화 (6/6)

Chapter 06. 낯선여름

엄마는 많이 울었다.

약에 취해있던 상황이라 잘 기억나진 않지만, 휠체어를 타고 와 엉엉 울기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이 병문안을 왔으나,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최이겸에게 쫓겨났다.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뼈 마디마디가 굳어 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고, 팔에 꽂힌 링거액은 무려 네 종류였다. 게다가 가슴과 골반엔 이상한 보호대가 채워졌는데, 이겸은 하루 세 번 직접 보호대를 풀고 긴장한 근육을 주물러 주었다.

극진한 간호 덕분인지 거동에 불편함이 없어진 그녀는 장장 2주 만에 그리웠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안 잤어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진 건 삭막함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집의 모습을 모두 기억하진 못해도, 식탁 의자가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는 건 안다.

그리고 그 의자는 여전히 반대편에 놓여 있었다.

“잤습니다. 잠만. 씻고, 자고, 출근하고. 당신 병원으로 갔죠.”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더니 두툼한 코트를 벗겨 소파 등받이에 걸쳤다.

채우는 핸드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막 정오를 지난 시각. 기울여 둔 블라인드 사이로 한낮의 햇살이 길게 밀려든다. 그녀는 사고 이후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무언가를 참는다기보단, 모든 것에 초연해진 사람처럼 말을 아꼈다.

“좀 쉴까요?”

채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침실로 들어갔다. 병원에선 제대로 씻지 못해 불편했다. 아무리 좋은 병실이어도 마찬가지.

물기 없는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자 투명한 물방울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이어 펌프를 누르니 익숙한 샴푸 향이 사위를 가득 채웠다. 아직 멍이 남은 피부 위에도, 피딱지가 떨어지지 않은 상처에도 흰 거품이 맺혔다.

긴 머리카락을 꾹꾹 짠 후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서자, 침실 창가에 마련된 테이블 위에 차려진 식사가 보였다.

위에 부담스럽지 않은 한식 위주의 차림.

혹, 이겸이 식사를 차린 건가 싶어 거실로 나간 그녀는 망고를 앞에 둔 채 고민 중인 남자를 발견했다. 그는 과도를 들고 있었는데, 망고 자르는 법을 몰라 당황한 눈치였다.

“뭐해요…? 방에 있는 식사, 이겸 씨가 차렸어요?”

“아, 도움을 좀 받은 겁니다. 그릇에 담고 데운 것밖에 한 거 없어요.”

“그래도…. 호텔 플레이팅이던데.”

“보고 배운 게 그런 것뿐이라.”

다가간 채우는 과도를 뺏어 들곤 능숙하게 망고를 잘랐다. 노란 과육이 날카로운 과도에 썰려 나간다. 격자 모양으로 칼집을 내어 껍질을 뒤집으니 익숙한 모양의 디저트가 완성되었다.

“아… 이렇게 하는 거였군요.”

어쩐지 칭찬이라도 받은 것 같아 씩 웃으며 과도를 내려놓자, 과즙에 흠뻑 젖은 손등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말랑한 혀가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손끝 방향으로 움직인다. 부드럽고 뜨거운 감촉에 그녀의 손이 떨렸다.

한걸음 물러나 아일랜드 식탁에 기댄 채우는 제 손바닥을 핥는 이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콧날과 내리깔린 긴 속눈썹. 단물을 핥느라 내민 빨간 혀가 선정적이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팔꿈치 방향으로 핥아 내려갔다.

채우는 끈적한 손을 어찌하지 못한 채 허공을 짚었다. 어느새 느슨하게 풀어진 가운 사이에 닿은 그의 입술.

이겸은 가는 양쪽 손목을 움켜쥔 채 입술만을 이용해 그녀를 더듬었다. 멍이 남은 가슴팍, 뽀얀 젖가슴의 분홍빛 정점이 타액에 젖어 아름답다.

몸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채우는 흰 허벅지를 꼭 모았다. 그러자 가슴을 빨던 그가 그녀의 허릴 안아 식탁에 앉혔다.

“나도 만지고 싶은데, 손이 끈적거려요.”

칭얼거리는 말투에 이겸의 웃음이 짙어진다.

“그럼, 잘 버텨 봐요.”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가운을 어깨 뒤로 넘겨 팔꿈치에 건 그는 서서히 몸을 낮췄다. 오목하게 들어간 배꼽 언저리를 핥자,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 떨린다. 혀끝으로 덧그리는 감각에 긴장한 듯했다.

이어 힘주어 모은 그녀의 다릴 벌렸다. 조금만 강하게 움켜쥐어도 쉽게 붉어지는 피부가 숨겨져 있던 가학성을 자극한다.

채우는 전율했다. 그의 단단한 이가 허벅지 안쪽에 닿는가 싶더니 끈적하게 핥는다.

남자는 가볍게 그녀의 다리를 어깨에 걸고 엉덩이를 움켜쥐어 당겼다.

“아!”

너무 오랜만이었다. 예고 없이 닿은 혀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음순을 벌리며 들러붙은 축축한 감촉.

놀란 그녀는 끈적이는 손으로 그의 어깰 짚었다. 자연스럽게 몸이 숙어지자 남자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그녀는 허리를 뒤로 젖혀 식탁에 누워버렸다. 야하고 은밀한 행위에 벌어진 다리가 경련하듯 파드득 튄다.

입원 내내 그와의 관계는 가까운 듯,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것 같았다. 최이겸이 제게 품은 죄책감이 애정을 넘어섰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그는 여전히 다정했으나, 그만큼 알기 힘든 남자가 되어버렸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우는 달뜬 신음을 흘리며 허릴 틀었다. 그러자 젖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상체를 세운 그가 흥분으로 꼿꼿해진 젖가슴으로 타깃을 바꾼다.

“휴가를 떠날까 하는데.”

“휴가요?”

간신히 소릴 낸 그녀의 몸이 식탁 가장자리로 당겨졌다. 단단해진 성기가 부드러운 점막을 가르며 들어온다. 그녀의 몸은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이며 수축했다.

“하…. 너무 오랜만이라 자신 없는데요?”

“거짓말.”

그의 입꼬리가 위험하게 휘어 올라간다.

허릴 움직이며 내벽을 가르자, 농도 짙은 점액질이 엉기는 선정적인 소리가 난다. 탁해진 그의 숨결에 눈을 뜬 채우는 저를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시선과 부딪쳤다.

“같이 가죠. 한 달 정도… 장기 휴가.”

“한 달이나?”

“당장은 아니고, 11월쯤. 이후엔 좀 바빠질 것 같아서.”

이유를 알고 있지만,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병문안을 왔던 시윤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최 회장이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고, 의식불명 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최이서의 출국 사실이 확인된 상황, 불만에 휩싸인 주주들을 통제하는 건 최이겸의 몫이었다. 게다가 힘없는 계열사들은 김 실장이 운영하는 사모 펀드에 모두 잡아먹힌 지 오래.

퇴로의 길 위에서 이겸은 선택을 해야 했다.

주가 조작, 불법 펀드 운용 등 그를 향한 혐의를 소명해야 한다. 그것은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라며 시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더불어 최이겸 덕분에 제 형의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시현을 죽인 남자와 사랑한 남자, 그 억울함을 풀어 줄 남자가 한 핏줄이라는 것은. 하여, 결국 분노는 그녀의 몫이었다.

광증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무책임한 형, 줏대 없는 법에 그녀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이겸은 느리지만 강하게 허릴 움직였다. 채우는 식탁 가장자릴 움켜쥔 채 다릴 벌려 그의 허릴 감쌌다. 하지만 그마저도 잡아 어깨에 걸쳐 버리는 남자.

깊어진 삽입감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겸의 눈빛이 점점 서늘해진다. 열에 달뜬 사람답지 않게 어둡고 차가웠다.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울컥한 표정을 지은 그가 이를 악물곤 상체를 숙여 가슴팍에 입 맞춘다. 시퍼런 멍 자국이 남은 부위였다.

상처를 핥는 개처럼 그녀의 상체 곳곳에 입 맞춘 그가 허릴 뒤로 빼더니, 이내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침실로 들어가 푹신한 시트에 그녀를 눕혔다.

채우는 엉덩이를 높이 든 채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우묵하게 팬 허리에 입 맞춘 그가 다시 깊숙하게 박아 왔다.

가장 약하고 쾌감이 짙은 체위였다.

그녀는 앓는 듯 신음하며 허벅지를 달달 떨었다.

골반을 잡아 고정한 그가 깊은 곳을 비비며 어깨를 잘근 깨문다.

“아아!”

몸이 흔들릴 때마다 진창 같은 쾌감이 두 사람을 잠식했다. 뜨겁고 완강한 손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겸은 마치 전신에 입 맞추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침실에 드리운 햇살이 그녀의 몸을 가로지른다. 그의 숨 또한 흐트러지고 있었다.

사납게 부딪치다 부드럽게 어르기를 반복하던 남자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러곤 자신을 보게 했다.

여린 몸을 완전히 침대에 짓누르며 키스해 오는 그.

망고의 잔향이 남은 키스에 흐느낌이 더해졌다. 남자의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이 그녀의 뺨으로 떨어진다. 그에 아랑곳없이 서로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 빨아들이고 깨물며 타액을 퍼 날랐다.

“같이, 휴가 가 줄 거죠.”

애달픈 그의 부탁에 그녀는 조용한 웃음을 흘리며 끄덕였다.

“당연하죠.”

곳곳에 멍이 들었지만, 흰 피부는 숨겨지지 않았다. 상아처럼 하얀 피부에 들러붙은 머리카락. 그리고 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목덜미의 땀은 계절을 역류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뜨겁게 신음하고 욕망을 쏟아내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피부에선 격한 박동이 고스란히 넘어왔다.

채우는 납작 엎드린 채,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다.

한낮의 정사는 타들어 가는 가을볕보다도 뜨거웠고, 차려놓은 음식은 차게 식었다.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

눈을 감았다.

그러자 심해의 시퍼런 기운에 휩싸이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두려울 만큼 몸이 쑥 가라앉는가 싶더니, 청량한 바람에 숨통이 트인다.

눈을 떴다.

나뭇가지 사이로 뻗쳐 들어 온 햇발에 시야가 하얗게 질렸다.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몸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어쩐지 쉽지 않다.

세상의 소음 대신 귀를 간질이는 새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현실 같지 않은 맑은 하늘. 바람에 휩쓸린 구름이 긴 자국을 남긴다. 채우는 제 몸을 휘감은 것이 해먹이라는 것을 뒤늦게 상기해냈다.

막 낮잠에서 깨어나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휘청이며 맨발로 뛰어내린 그녀는 보들보들한 흙의 감촉에 환하게 웃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이름 모를 숲. 그 안에 자리한 작지만 근사한 목조 주택이 두 사람의 휴가지였다.

향 좋은 삼나무가 빼곡하게 자라나 장관을 이루는 숲. 강과 이어진다는 호수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맑아 그녀를 감동시켰다.

채우는 칠이 벗겨진 목조 주택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호수를 향해 걸었다.

‘또 수영 중인가?’

한 달이란 휴가를 낸 이겸과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한시도 그녀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밤과 낮의 구분 없이 엉겨 붙었고, 자꾸만 무언가를 확인하려 했다.

이겸은 무언가를 계속해서 두려워했다. 마치 제가 그의 곁을 떠나기라도 할 것처럼 들러붙어 계속 몸을 맞댔다.

하지만 식재료를 구하러 시내로 나갈 때를 제외하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지금, 자연스럽게 평온이 찾아왔다.

그에 이겸은 하루에도 몇 번씩 호수로 향했다.

이곳은 완벽한 휴식처이자 도피처였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도망친 두 사람에겐, 어쩌면 유토피아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갈이 깔린 호숫가에서 채우는 어렵지 않게 그를 발견했다. 빛을 받으며 둥둥 떠 있던 남자가 기척을 느끼곤 눈을 뜬다.

그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채우는 셔츠와 바지를 벗은 뒤, 거리낌 없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일어선 그가 팔을 벌려 그녀를 맞는다.

시원하다 못해 온몸이 달달 떨릴 만큼 서늘한 수온. 채우는 이겸에게 안겨 바들바들 떨었다.

차가워졌던 그의 피부가 그녀의 온기를 받아 따뜻하게 데워진다.

“깨우러 가려고 했는데.”

“깨우지 그랬어요. 여기 있으니까 계속 잠만 늘어요.”

“그만큼 피곤했다는 거니까.”

“아녜요, 잠은 습관이랬어요. 근데… 한국엔 첫눈 내렸다던데. 여긴 여름이네요.”

채우는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완벽하게 밀착했다. 그러자 젖은 입술이 둥근 이마로 내려와 맞붙는다.

“서핑하며 크리스마스를 보낸다잖습니까. 기왕이면 바다로 갈 걸 그랬나?”

그의 읊조림에 채우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 많은 건 싫어요. 게다가… 호주는 유난히 한국인이 많잖아요. 여기가 조용해서 좋아요.”

싱긋 웃는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던 그가 벅찬 미소를 지으며 키스했다. 뜨거운 손이 속옷 안으로 들어왔지만, 이젠 창피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곳엔 두 사람뿐이었다. 차가운 물과 뜨거운 손, 점도 높은 액체가 엉긴다. 채우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길에 몸을 떨었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음핵을 비비는 그로 인해 제 귀로 듣기 민망한 신음을 흘리기 시작할 때였다.

별장 근처에서 들려온 차 소리.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숲을 쩌렁쩌렁 울린다.

“최이겸! 정 변! 아이씨, 어디 있어!”

이겸은 해먹 앞에 서서 선글라스를 벗는 최이서의 모습에 실소했다. 탈색되어 맑은 볕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젖은 머릴 대충 털어낸 그가 최이서에게 손짓했다.

“돌아.”

“뭐?”

“돌아서서 눈 감아. 지금 채우가 벗은 상태거든.”

최이서는 최이겸이 어디에서 걸어 나온 건지 상기하며 홱 돌아섰다. 그러곤 대체 볼 게 어디 있다고 그러냐며 구시렁거리다, 젖은 수건에 뒤통수를 맞았다.

“볼 게 왜 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예쁜 곳이 어디 있다고.

이겸은 보송보송한 타월을 들고 물가에 앉아있는 채우에게 다가갔다. 푹 젖은 채 호수를 응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튼다. 투명하게 젖은 여자는 눈부시게 예뻤다.

“최이서가 왔어요. 젖은 채로 있으면 안 되니까 먼저 샤워해요.”

어깨에 타월을 걸쳐 준 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드는 그. 놀란 표정의 채우가 타월로 몸을 가리며 일어섰다.

“최이서 씨가 여기까지 왜요?”

“글쎄요. 이유는 이제부터 들어 봐야죠.”

이겸은 채우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최이서는 그녀에게 고개를 한 번 까딱였을 뿐, 딱히 알은체하진 않았다. 작은 발끝을 타고 흐른 물이 바닥에 짙은 자국을 남긴다.

이겸은 채우를 욕실로 보내기 전, 다정하게 키스했다. 그에 그녀의 양 뺨의 붉은빛이 우련하다.

“저쪽으로 가지.”

두 사람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최이서는 군소리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이겸은 아이스박스가 있는 테이블로 최이서를 안내했다. 그러곤 그 안에 든 음료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뭐든 마셔.”

최이서는 대충 아무거나 집어 들곤 담배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린 이겸이 고개를 젓는다.

“금연이야.”

“뭐?”

“숲은 금연이라고.”

“하, 돌겠네.”

오랜만에 본 최이서는 꽤 살이 내린 상태였다. 그를 스페인으로 보낸 지 한 달. 아무래도 타지 생활이 퍽 고달팠던 것 같다.

이겸은 병맥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여기까지 온 거 보니, 스페인 생활은 아예 접은 건가?”

웃음기가 묻어나는 질문에 최이서가 한숨 쉬며 캔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스페인에 있다가 여기로 오니 죽을 거 같아. 여긴 왜 여름인 건데?”

“남반구니까. 더위 타령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너, 왜 안 놀라. 내가 올 줄 알았나 보지?”

송골송골 맺힌 땀이 이겸의 벗은 상체를 타고 흐른다. 그는 최이서의 질문에 빙글거리며 답했다.

“글쎄. 굳이 놀라야 하나? 난 휴가를 온 거지 잠적한 건 아니라서.”

“그런 놈이 전파도 제대로 안 터지는 숲으로 와? 그것도 한 달씩이나?”

이제 일주일 뒤면 휴가를 온 지 한 달 차였다. 아직 한 달을 꽉 채우진 못했지만, 종종 그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겸이 먼 숲을 응시하며 침묵하자, 라이터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최이서가 마른세수하며 말문을 열었다.

“너…, 여기까지만 하고 빠져.”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상황이 심각해. 미친 너 대신에 내가 다 해결하겠다고. 넌 매뉴얼만 짜. 움직이는 건 내가 할 테니.”

최이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최이서를 응시했다. 그는 태고의 자연에 가까운 숲에서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업가의 눈빛을 했다.

“알아듣게 설명해.”

삐딱하게 앉아 서양식 목조 주택을 훑는 최이서는 어쩐지 쑥스러운 기색이었다. 이겸은 최이서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너 혼자 다 책임질 필요 없단 소리야. 아버지 저렇게 되신 마당에, 그것마저도 네가 다 뒤집어쓰게 생겼잖아. 너 구속되면 저 여자는…. 회사는?”

“그래서?”

“지금 이 시간부로 LC 파이낸셜과 일환 투자 운용. 다 내가 주도한 거다. 넌 내 지시에 따른 것뿐이고.”

“최이서.”

이겸은 형형한 눈빛으로 테이블을 짚었다.

“최이겸, 끝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 셈이야? 회사를 넘겨서 얻는 게 뭔데. 복수를 하고 싶었던 거라면 이거로 충분해. 아버지는 회장직에서 해임될 테고, 손실액 4조는…. 기존 보유주로 해결할 수 있을 테니. 결국, 아버지는 빈손이 되실 거야.”

평온했던 숲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호수엔 빛 대신 그림자가 드리웠고, 심상치 않게 바람이 불었다.

이제 이곳에 평온은 없었다.

“그렇게 하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형 노릇 한 적 없으니 이번엔 네가 양보해.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나 죄책감으로 죽어. 최이겸.”

***

채우는 일부러 오래도록 욕실에 있었다. 욕실엔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할리퀸 소설이 잔뜩 있었고, 지난밤 마시다 남은 와인도 반병쯤 있었다.

욕실에 비치된 얇은 가운을 걸친 그녀는 젖은 머릴 꾹꾹 누르며 와인을 따랐다. 그러곤 벽에 걸린 CD 플레이어를 튼 뒤, 비치된 라탄 소파에 앉아 소설책을 꺼내 들었다.

최이서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알진 못하지만, 급박한 일 때문이란 건 짐작 할 수 있었다.

채우는 더욱 소파 깊이 몸을 묻었다. 와인 몇 모금에 찾아온 적당한 취기. 거기에 극악하리만치 작은 활자에 그녀는 몸이 녹는 기분을 느꼈다.

연이어 하품하며 눈물을 찔끔대던 채우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저을 때였다.

노크와 함께 열린 욕실 문.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들어온 이겸이 그녀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합니까?”

채우는 와인 잔을 든 채 기지개를 켰다.

“손님이랑 대화 중일까 봐요. 최이서 씨는요?”

“호텔로 갔습니다.”

그는 손을 뻗어 몸을 끌어당겼다. 이끌리듯 몸을 일으킨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뒤따른다. 이겸의 몸은 햇볕에 그을려 보기 좋은 구릿빛이었다.

채우는 기습적으로 넓은 등에 입 맞췄다. 그러자 2층 계단을 오르던 그가 돌아보며 상체를 숙여온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달콤한 혀가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가며 그녀도 함께 당겨졌다.

“아까 하던 거 마저 하죠.”

“아까 하던 게 뭔지 모르겠는데….”

그의 맛이 나는 입술을 핥은 그녀가 얄밉게 대꾸하자, 근사하게 호선을 그리는 남자의 입술.

“모르면 알려 줄게요.”

2층엔 박공 형태의 지붕으로 마감된 다락방이 있었다. 다락이라지만, 3미터가 넘는 천장과 세 개의 창 덕분에 조금도 좁아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른 그녀는 둥근 창가에 놓인 피아노로 다가갔다. 오랜 시간 방치되었음에도 표면이 매끈하고 먼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관리가 잘 된 거 같아요. 먼지도 없고.”

“아뇨, 아주 오래전부터 방치된 피아노라네요. 연주를 해보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소리가 나진 않을 겁니다. 악기도 사람도, 오래도록 방치되면 건강이 상하기 마련이니까요.”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인 채우는 긴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신기하단 표정으로 피아노 뚜껑을 열어 건반을 두드려 보았다.

그의 말대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피아노.

“진짜네…?”

채우의 중얼거림에 피식 웃은 그가 뺨에 입 맞추며 뒤로 다가와 앉았다.

“거짓말 안 합니다.”

그러곤 나른하게 속삭이며 젖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손이 가슴께를 간질이다 한 손 가득 움켜쥔다. 채우는 그에게 기대어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귓불을 간질이는 숨결에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한낮의 햇살이 창을 지나 크림색 커튼으로 스며든다. 그 온후한 색이 다락 전체를 물들였다. 열어놓은 정면 창 너머, 불어든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고 어루만지는 손길엔 열이 실렸다.

바닥에 세운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을 넣은 이겸이 젖은 틈새로 파고들었다. 제법 야한 짓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제 몸을 만지는 건 볼 수 없었다.

숨을 고르며 단단한 어깨에 뒷머릴 기댄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남자. 잔 흥분으로 붉어진 그녀의 눈가에 그의 입술이 눌렸다.

“최이서 씨랑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최이겸은 대답 대신 그녀를 안아 돌려 앉혔다. 채우는 다리를 벌려 두꺼운 허벅지 위로 올라갔다. 가운을 벗긴 그가 상체를 숙여 뽀얀 젖가슴을 베어 문다. 물컹한 혀가 젖꼭지를 핥는 느낌에 아스스 소름이 돋았다.

채우는 그에게 몸을 밀착하며 뒤편에 난 창문을 짚어 보았다.

뜨겁다. 한국은 눈 내리는 겨울이지만, 이곳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운 여름이었다.

“최이서가 나 대신 일을 해결하겠다고 헛소릴 하고 갔어요. 다 뒤집어쓰고 못 했던 형 노릇을 하겠다나. 그래서 마음껏 비웃어 줬습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서.”

경멸하는 어투였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씁쓸함은 숨겨지지 않았다.

“근데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예전에 채우 씨가 내 편이 되어주겠단 말을 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음…. 좋았겠네요.”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몰라도….”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남자가 빗장뼈 부근에 입 맞추며 고개를 들었다.

“예, 좋았습니다.”

꽃물이 든 듯 불그스름한 그녀의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어 희롱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녀는 가슴이 붕 뜨는 걸 느꼈다.

그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라지만, 모든 일엔 시작이 있듯 끝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시작과 동시에 끝을 내야 하는 시기란 것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였다.

“최이겸 씨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얻은 만큼 잃어야겠죠.”

그의 목소리는 꿀을 탄 술처럼 뜨겁고 달았다. 얻는다는 단어보다 잃는다는 단어가 더 녹진하고 듣기 좋았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자유를 얻었으니, 나머지는 버릴 생각입니다. 감당해야죠.”

“그럼 돌아가요. 그 바보 형이 한국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혼자 둬요….”

부끄러운 말을 한 것 같아 빨개진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자, 내리 깔려있던 시선이 들린다.

“기다리는 거 쉽지 않을 겁니다.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거고요.”

“처음에 그러려고 나 스페인으로 보내려던 거 아니었어요?”

“결국엔 후회했죠.”

후회란 말이 이토록 가슴 떨렸던가?

채우는 고민하는 기색 없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에도 후회해 봐요.”

이겸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주저 없이 혀를 넣었다. 쌉싸래한 포도 향을 머금은 숨결에 머릿속이 몽롱하다.

이윽고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어 벌린 그가 위협적으로 발기한 성기를 입구에 맞췄다. 그러곤 작은 입술을 깨물며 허릴 잡아 내렸다.

조급히 들어온 남자로 인해 결합부가 경련했다.

채우는 키스를 받으며 그의 뒷머릴 움켜쥐었다. 이겸은 점도 높은 물소리를 내며 허릴 움직였다. 예민해진 정점이 위아래로 치대어지며 미칠 것 같은 쾌감을 가져왔다.

“꽉….”

그녀는 끊어질 듯 숨을 몰아쉬었다.

“안아요.”

이겸은 둥근 어깨를 강하게 깨물며 속도를 올렸다.

낡은 의자의 가죽이 짓쳐지고 삐걱거리는 소리에 귀가 먹을 것 같았다. 반대편 창문을 열어놓지 않았다면, 이 열기에 잠식되어 숨도 쉬지 못했을 것이다.

채우는 그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배어 나온 땀방울에 미끄러질까, 혹여 이 손이 풀릴까. 두려워하듯 악착같이 매달려 그를 새겨넣었다.

두 사람이 들썩일 때마다 뽀얀 먼지가 표표하게 떠올라 보석처럼 반짝인다. 밀가루 같은 햇살에 휘감겨 천국에 온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절정의 순간 고개를 젖혔다. 불어온 바람에 기어이 커튼이 붕 떠오른다.

새파란 하늘과 울창한 녹음, 막 날아오른 새들의 날갯짓까지.

낯선, 여름의 바람이 불었다.

더위를 이기지 못해 흐른 땀이 시트에 스며든다. 그 끈적하고 기분 나쁜 감촉에도 채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한국은 위험합니다. 난 정채우 씨가 위험해지는 거, 이젠 못 볼 것 같은데.’

가지 말라고 할걸.

‘혼자는 싫어요. 여기서 나 혼자 있으라고…?’

‘혼자 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자유를 만끽해요. 내가 다시 돌아오면, 이 자유도 끝일 테니까.’

보고 싶어서 참지 못할 거라고 할 걸 그랬다.

‘그러니까 조금만… 안전하게 있어 줘요.’

그는 여름이 오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여름이 어떤 여름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른 새벽. 차를 끌고 찾아온 최이서는 이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 손을 잡았다. 두 남자는 그제야 진짜 형제처럼 보였다.

채우는 창가에 걸터앉아 최이서의 차에 오르는 이겸을 응시했다. 조금 전 나눈 입맞춤의 달콤함이 여전히 입술에 남아있었다. 그 간질거리는 감각에 입술을 어루만지다, 돌아보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었으니까. 실은 숨 쉴 수 없을 만큼 괴로웠지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지난 새벽, 잠결에 속삭인 말을 곱씹었다. 제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며 속삭였던 그 농밀한 밀어를.

‘사랑해요.’

그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를 스칠 때, 채우는 눈을 떴다.

오전의 환한 햇살이 밀려드는 침실. 그가 떠난 지 세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낯선 차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호숫가에 도착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그녀가 의아한 마음에 밖으로 나가자, 반가운 두 명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채우야!”

***

이른 오전, 5시 40분. 인천 공항 입국장에 도착한 김 실장은 양손을 모은 채 대기했다. 꼿꼿하게 선 그녀의 주위로 스무 명의 경호원들이 하나둘 자리한다.

새벽 비행을 마친 사람들은 이 기묘한 장관을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하지만 김 실장은 어떠한 동요도 드러내지 않은 채 정면을 응시했다. 재밌게도 긴장은 타인의 몫이었다.

폭풍전야와 같은 시간. 김 실장은 이른 아침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온 아들을 떠올렸다.

남편의 폭행을 증명했고, 그녀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양육권을 되찾은 지 일주일. 행복에 겨운 날들을 보내던 차라 이 순간이 영영 오지 않기를 은연중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긴 휴가를 마친 최이겸이 24시간 전 메시지를 보내왔다.

-휴가 끝났습니다.

그의 연락을 떠올리자 잊고 있던 긴장이 서서히 차올랐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말끔한 슈트 차림의 이시윤이 다가선다. 그리고 이 형사와 윤강재 차장 검사가 눈인사하며 다가와 시간을 확인했다.

김 실장은 고개만 돌려 경찰들을 보았다.

다들 각자의 생각에 빠진 채 게이트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어느덧 하나둘 냄새를 맡고 도착한 기자들이 곳곳에 포진한다. 그들은 일명 최이겸 라인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발견하곤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이어 공항에서 지원 나온 보안 요원들이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입국장을 에워싼다. 찰나 전광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김 실장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이시윤이 한발 나서며 중얼거렸다.

“열립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린 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여행 가방을 든 사람들은 피로가 가득한 표정으로 잽싸게 그 앞을 벗어났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최이겸은 없었다. 우르르 빠져나온 사람들이 대치 중인 이들을 보며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수록, 손바닥에 고이는 땀의 양이 많아진다. 마른침을 삼킨 김 실장이 주먹을 꽉 움켜쥘 때였다.

한참이나 닫혀있던 게이트가 열리더니, 롱코트를 걸친 두 남자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 모델 같은 사내가 마중 나온 이들을 보며 지긋이 미소 짓는다.

“최이겸 전무다!”

“최이서 사장도!”

누군가의 외침으로 시작된 아수라장. 경찰들이 뛰어듦과 동시에 두 남자는 검은 머리의 파도 속에 갇혀버렸다.

소용돌이치듯 중심을 향해 모여드는 사람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최이겸과 최이서를 에워싼 경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길을 낸다. 그제야 두 남자는 담담히 걸음을 내디뎠다.

약속이라도 한 듯 공항을 빠져나가자마자 윤 검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두 사람과 마주 선다.

“자, 이제부터 제대로 된 일을 해보죠. 장부, 최이겸 전무가 갖고 있는 거 맞습니까?”

***

시내 유명한 숍에서 사 온 조각 케이크가 테이블 가득 펼쳐졌다. 케이크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와 각종 반찬 역시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채우는 신이 난 여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다 나은 거야?”

“어휴, 당연하지. 퇴원하자마자 여기로 날아온 거야. 엄마, 이제 멀쩡해.”

그러자 얼음이 든 잔에 커피를 내리던 복길이 눈을 흘기며 맞장구친다.

“그나저나,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나한테 말도 없이 어디 갔나 했더니, 이렇게 좋은 데서 호의호식하고 있냐? 나만 빼고?”

“그래, 말 잘했다. 너, 학원은 어쩌고.”

“아아… 결국 뺐어. 개인 과외로 전향하려고. 더는 안 되겠더라. 그리고 그 전에 어학연수 하는 셈 치고 여기 오래오래 있으려고.”

결국, 주인과의 불화가 해소되지 않았던 것 같다. 채우는 신경 써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네 애인. 아니지, 애인의 비서가 직접 와서 티켓 주고 가던데? 너한테 필요할 거라고. 설마… 몰랐어?”

채우는 멍하니 두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고 너스레를 떤 둘은 하던 일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적막했던 공간을 채운 여자들의 재잘거림.

혼자 두지 않겠다더니, 여자를 둘이나 보냈다. 그 남자는 대체 얼마나 더 치밀해질 예정인지. 이젠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채우는 마치 관객이 된 것처럼 부산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을 보았다. 부엌을 정리하고 짐을 풀고, 케이크와 커피를 마시다 세탁기 소리에 놀라 후다닥 뛰어들어가는 평범한 모습들을.

외롭지 않다.

“채우야, 수영할까? 여기 호수 장난 아니던데. 수영복 입어야 하나?”

외롭지 않았다.

“저녁엔 한식 먹자. 된장찌개 끓일까?”

조금도, 외로울 리 없다.

“세상에. 눈 내리는 거 보면서 비행기 탔는데, 여긴 어쩜 한여름이니?”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 움직이던 여진이 말없이 앉아있는 채우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를 본 여진의 눈동자가 떨린다. 두 손을 모은 채 어찌할 줄 모르다, 양팔을 벌리며 다가와 채우를 꽉 끌어안았다.

“왜 울고 그래. 응? 최 전무가 걱정돼서 그래?”

“…네?”

“왜 우냐고. 불쌍하게, 이것아.”

그녀는 자신의 뺨을 더듬어 보았다. 그제야 양 뺨이 젖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바보같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어머니. 저, 얘 우는 거 처음 봐요. 아니, 얘는 뭐 울어도 예뻐?”

그렇게 말하며 콧물을 훌쩍인 복길이 휴지를 뽑아 내밀었다.

“다 빤한데 숨기고 삭이지 말고, 그냥 울고 싶을 땐 울어. 마라톤 같은 거 하면서 풀지 말고.”

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잊었던 품이다. 향수 냄새에 찌들어 다신 맡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엄마의 체향이 코끝을 스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진짜 향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억지 부려봤자 손 닿지 않는 곳에.

“나… 벌써 보고 싶어, 그 남자.”

***

시간은 빠른 듯도 느린 듯도 하여 그녀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겸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 채우는 의도적으로 관련 기사를 확인하지 않았다. 하나 포털 사이트에 접속만 해도 온갖 언론사의 헤드라인에 최이겸, 또는 최이서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애써 그의 소식을 멀리하며, 밤에는 법률 자문 카페에 접속해 사람들의 물음에 답해 주었고, 낮에는 복길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재밌게도 피아노는 복길의 손길 몇 번에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새것처럼 맑은 소릴 내진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방치된 것치곤 훌륭하다며 웃는다.

“손은 달걀을 쥐듯이, 좀 더 힘을 빼.”

채우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역시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었다. 복길의 손끝에서 유려하게 노래하던 피아노가 그녀에겐 무뚝뚝한 소릴 내며 반항했다.

“그래도 재능이 아주 없진 않아. 또, 네가 고른 곡 코드가 단순한 편이라 금방 외워질 거야. 너 외우는 건 끝내주게 하잖아.”

“근데… 머리랑 손이 따로 놀아.”

“인간 승리 급의 기적이 필요하긴 하지.”

채우는 하도 움직여 굳어 버린 손을 다시 건반 위에 올렸다. 복길의 말대로 외우는 건 끝내주는 편이라 악보 읽는 법은 금방 배웠다. 하지만 문제는 실전.

안경까지 쓰곤 악보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건반을 누르는 그녀의 뒤로, 매콤한 냄새가 밀려든다.

“밥 먹고 해, 밥!”

그에 채우는 피아노 뚜껑을 덮으며 일어났다. 가는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가 말간 햇살에 반사되어 빛을 낸다. 이 목걸이를 볼 때마다 감정이 북받쳤지만, 오늘도 씩씩하게 참아냈다.

푸르렀던 녹음의 숲이 점점 알록달록한 단풍으로 물든다.

어느새 또 하나의 계절이 성큼 찾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

<질문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보증을 서셨는데, 채권자들이 저희 집을 찾아옵니다. 마당에서 나흘간 텐트 치고 잠을 자고 물건도 부숩니다. 그런데 아버지 말로는 보증을 서긴 했는데, 시골이다 보니 문서나 도장 같은 계약 절차 없이 말로만 진행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본인 잘못이라고 하시는데, 너무 답답합니다. 이 사람들을 벌주고 싶어요. 왜 죄 없는 울 아버지를 괴롭히는지….>

화면을 응시하던 그녀의 고개가 뒤로 훅 꺾인다. 잠시 졸았던 채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밤낮으로 바쁘게 움직여서인가? 아직 잠들 시간도 아니건만, 졸음이 쏟아졌다.

<답변은 꼭 정채우 변호사님께 듣고 싶습니다.>

이번에도 자문변호사 지목. 고작 몇 개월 만에 그녀는 카페에서 가장 많은 수의 자문을 한 변호사가 되었다. 그 때문인지 요즘 들어 지목이 빈번하다.

구두 계약의 경우 법적인 해결은 간단하지만, 시골이란 특성상 주민 간의 마찰이 심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매일 얼굴 보고 살면서 그들을 주거 침입, 불법 점유, 기물 파손 및 위화감 조성 등으로 신고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보통 변호사의 입장에선 신고를 추천하겠지만…. 가장 좋은 건 채권자들을 설득해 진짜 채무자를 찾아내는 것.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답변을 생각하며 기지개를 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계절이 또 바뀌려는지 불어온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린다.

며칠 전, 여진과 복길은 잠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국에 들어가 무언가를 잔뜩 들고 돌아왔다.

처음엔 두 사람이 사라진 집안이 적막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럴 때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애써 외면하던 최이겸과 관련된 기사들을 읽었다.

클릭하는 것조차 겁이 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경제 범죄 형사부, 피고발인 신분으로 최이겸 전무 소환 조사. 20시간 만에 귀가.>

<경영권 승계를 위한 분식 회계, 싸움을 위한 준비였던가.>

<불법 자금 조달 혐의, 최이서 사장 불구속 입건.>

대한민국이 들끓는 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20시간? 너무한 거 아니야?”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볼멘소릴 내뱉었다. 그러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사를 닫아 버렸다.

어디에도 속 시원한 내용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법정에 출석하는 모습과 나서는 모습, 검찰청에 들어가는 모습과 나오는 모습만을 찍어 기사를 쏟아낼 뿐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러는 편이 더 낫다. 더 막장인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최이겸의 이야기를 읽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화면을 스크롤 하며 지목된 질문 몇 개를 추리려던 그녀는 눈에 띄는 묘한 게시글 하나를 클릭했다.

<한여름에 눈이 내린답니다. 거짓말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치 장난을 치는 듯한 질문. 채우는 실소하며 댓글을 달았다.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거짓말이면…, 딱밤 10대 정도가 딱 좋겠네요. 그리고 제가 있는 곳도 한여름에 눈이 내린답니다. 질문자분, 이마 준비하세요.>

농담엔 농담으로. 가볍게 단 댓글에 기다렸다는 듯 댓글이 입력되었다.

<못 때릴 겁니다. 제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요.>

채우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곤 고개를 기울였다. 말장난은 사양이지만, 왠지 자꾸 시선이 가는 게시물.

블랭킷으로 어깨를 감싼 그녀는 노트북을 닫은 뒤,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러곤 집안의 모든 불을 끄자 이내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달빛이 환하게 들이치는 침실. 그 빛이 묘하게 거슬려 채우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여전히 복잡한 머릿속엔 최이겸의 기사들이 둥둥 떠다녔다.

자문과 고문 변호사를 다섯이나 두고도 어째서 반년 넘게 소환 조사가 되풀이되는 건지.

그에 점점 부아가 오른다. 제가 한국에 있었다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지도. 언론과 정부 기관의 괴롭힘이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를 매일 볼 수는 있을 테니까.

그가 없는 곳에서 저 혼자만 안온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이 아름다운 자연 환경도, 고요한 평온도 더는 필요치 않았다.

그는 안전한 곳에서 기다려달라고 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다.

눈을 감은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침대 머리맡에 난 창문 너머, 하얗게 흩날리기 시작한 눈송이.

첫눈이 내린다.

채우는 황당한 웃음을 흘리며 블랭킷을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별빛이 쏟아질 듯 맑았던 하늘에 드리운 눈구름.

그녀는 멍하니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두 눈을 감았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도, 그 안에 섞인 호수의 비릿한 냄새도. 어느덧 삶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한국은 한여름인데….”

이곳은 한겨울이라니.

채우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곤 안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걸려 온 전화에 순간 걸음이 멎었다. 발신자는 최이겸.

이따금 비서의 휴대 전화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다. 통화 내용이 감시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주는 아니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대체로 떠드는 건 제 쪽이었다.

이렇게 그의 이름이 휴대 전화에 찍힌 것은 이겸이 한국으로 떠나고 처음이었다.

고요한 숲과는 어울리지 않는 휴대 전화 벨 소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혹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겨울바람에 일렁이는 호수처럼 그녀의 마음도 사정없이 흔들렸다.

“여보세요?”

[한여름에 눈이 내린다는 말 안 믿었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그 음성. 하지만 달랐다.

“어디예요.”

확신이 생긴 그녀는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진짜였네요. 이마는 내가 내어 줘야겠습니다.]

하나뿐인 야외 등에 의지해 채우는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심장이 뛰어서인지, 눈앞이 흐려져서인지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에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포치 밖으로 뛰어나갔다.

[뛰지 마요. 막 내린 눈은 미끄럽습니다.]

“어디냐니까요!”

전화가 끊어졌다. 휴대 전화를 움켜쥔 채우가 쌀알이 흩어진 듯한 사방을 둘러보며 어둠 속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였다.

따뜻하고 커다란 손에 그녀의 손목이 잡힌다. 몸이 돌아가는가 싶더니, 온기 가득한 품 안으로 당겨졌다.

코트 깃을 벌려 온몸을 감싼 그가 차가운 뺨을 맞대 왔다.

“미끄럽다니까.”

묵직하면서도 산뜻한 체향.

머릿속이 탈색되어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 여기에 있었다고. 음식 하는 법을 배웠고, 나무 타는 법을 익혔으며, 외국어에 더욱 능숙해졌다고.

당신을 기다리며 배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이젠 피아노도 제법 칠 수 있다는. 요란하게 떠들어대고 싶었던 말들이 모두 삼켜졌다.

벅찬 감정에 미어진 가슴이 아팠다.

그러자 굳어진 그녀의 뺨을 지나 입술을 찾아 포갠 그가 미소 띤 얼굴로 속삭인다.

“왜 말이 없어요. 나, 안 보고 싶었습니까?”

채우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럴 리 없다. 단 하루도 그립지 않았던 적 없었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더….”

뭔가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단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세상 가장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보였다. 여전히 아름답고, 근사한 남자가.

“알았어요. 채우 씨가 나를 더 보고 싶어 했다고 치죠.”

결국, 반박하지 못하고 그를 꼭 힘주어 끌어안았다. 다정한 남자의 박동이 그녀를 감싼다.

기억하는 전부를 오롯이 품고, 그가 돌아왔다.

***

스토브 안에서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가 타닥타닥 울린다. 그 위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수증기가 카펫 주위를 습하게 만들었다.

붉은빛이 도는 카펫 위, 부드러운 짜임의 블랭킷으로 몸을 감싼 채우가 서서히 전신의 힘을 푼다.

그러자 그녀 아래 깔려있던 이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직이에요. 나는 아직 안 쌌거든.”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입술 새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군대 간… 애인 기다리는 심정이 이럴까요?”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웃음을 터트린 그가 그녀를 바닥에 눕히곤 짓쳐 들어왔다. 그러곤 죄어드는 내벽을 음미하듯 허릴 움직인다.

“다신 가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연한 붉은빛을 띠는 음순 사이로 귀두가 파고들 때마다 작은 구멍이 벌어진다. 선단이 깊고 뜨거운 곳을 찌를 땐 미끄러운 액이 딸려 나와 카펫 위에 흘렀다.

그는 흥분으로 벌벌 떠는 채우의 발목을 잡아 나비의 날개처럼 넓게 벌렸다. 그러곤 시선을 내려 제가 드나드는 모습을 지긋이 응시했다.

부끄러운지 작은 손으로 음부를 가리는 그녀. 그에 아랑곳없이 이겸은 속도를 올렸다.

붉은 카펫과 대조적인 흰색.

그녀는 마치 눈 같았다. 뜨거운 온기를 가진 눈.

뿌리 끝까지 박아 넣고 문지를 때마다 그녀의 경련이 격해진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며 상체를 숙여 키스했다. 퉁퉁 부어오른 입술을 깨물고 혀로 핥으며 삼켜 버리고 싶은 욕망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격렬한 키스에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휜다. 혀가 빨리는 행위가 절정에 힘을 보탰다.

그는 미친 듯이 요동치며 수축하는 느낌에 진창 같은 쾌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피가 끓어오르는 흥분에 그녀를 망가트릴 것처럼 몰아붙였다. 신음이 교성이 되고, 이어 비명처럼 응접실을 가득 채운다.

절정의 순간, 둘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벗은 등 위로 눈 그림자가 흩어진다.

점점이 쌓여 갔다.

***

흰 건반을 누르는 손끝이 떨린다. 연주가 자신 없다기보단, 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남자 때문에 긴장했다.

처음 피아노를 마주했을 땐 겁이 나 건반을 제대로 누르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복길과 함께한 6개월간의 개인 교습은 채우의 실력을 꽤 괜찮은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이겸은 그녀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숨소리 한 번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채우의 손끝에서 연주되는 곡은 그의 데뷔곡인 SUMMER`R.

그녀는 예전에 읽었던 인터뷰 내용을 기억해냈다. 수많은 작·편곡에 참여하고 앨범을 냈으나, SUMMER`R 만큼 자신의 가슴을 흔드는 곡은 없다고.

단순한 오기였다. 그에게 가장 뜻깊은 곡을 연주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저를 떠올려주지 않을까 하여. 물론, 곡이 가장 단순하다는 것도 한몫했고.

그녀는 마지막 건반을 꾹 누르며 숨을 참았다. 그의 평가가 궁금하면서도 조금 무서웠다. 생각해보니 피아노 천재라 불리던 남자 앞에서 6개월짜리 햇병아리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호기로운 시작에 비해 그 끝은 퍽 위축되었다. 채우는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려 보았다.

“…이상한 거 아니까, 말 좀 해 봐요. 나 정말 피아노에 소질 없어요?”

“음…. 거짓말은 못 하겠는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온몸이 빨개졌다. 그녀가 눈을 흘기자, 킥킥대며 웃던 그가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야하잖습니까. 이렇게 다 벗고 내 앞에 앉아서 피아노까지 예쁘게 치면…. 나더러 어떻게 하란 건지.”

“뭐야…. 그런 뜻이었어요?”

“음악이 제대로 들릴 리 없잖아요. 연습 열심히 한 건 인정하겠습니다. 나쁘지 않았어요. 나중에 더 제대로 듣죠.”

채우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웃음이 나와 입술을 깨물고 마른 얼굴을 비볐다.

이겸은 얼굴을 가린 그녀의 손을 내린 뒤, 고개를 돌리게 했다. 과일의 속살처럼 부드러운 입술에 키스하자, 그녀가 돌아앉으며 혀를 넣어 온다.

그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너무 좋아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위안을 얻은 것 같았다.

“목걸이, 한 번도 안 뺐어요?”

그 질문에 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번도요.”

“취향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았어요.”

“카페 활동은 왜 그렇게 한 겁니까?”

“심심풀이…?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멈추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최이겸 씨처럼. 그 끝에 뭐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변호사라는 걸 잊고 싶지 않아서.”

제게는 좀 오글거리는 대답이었으나, 그에겐 만족스러운 답이었던 것 같다.

이겸은 아주 깊은 한숨을 흘렸다.

정채우 앞에선 감정을 자제할 필요도, 대립할 이유도 없었다. 맥이 풀릴 만큼 솔직해졌고, 누군가에게 보이기 부끄러울 만큼 비겁했다.

그녀의 앞에서만 그러했다.

한국에 도착하고 매일같이 소환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모든 혐의가 인정된 건 아니었다. 김동희를 무너트리기 위한 사모 펀드는 합법적이었으며, 조사 과정에서 조금의 비리도 드러나지 않았다.

조작 또한 없었다.

기형 중공업이 도산한 이유는 김동희가 부린 욕심 탓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부도를 해결하려 했지만, 혐의 없음이 인정된 이후 김동희는 스스로 재판장에 들어섰다.

흉물스럽게 타 버린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서재였던 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 귀한 책들이 까맣게 타 버려 모두 소실되었다.

아깝다는 생각도 잠시, 어쩌면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것이 없어야 미련도 없을 테니까.

‘넌… 이제 내 아들 아니다.’

아버지의 절연 선언에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모른다.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되레 추악한 노인의 비루한 결말을 연민했을 뿐.

건강 악화를 핑계로 출석을 미루고 있지만, 여생을 구치소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어째서 당연하다는 듯 미소 지을 수 있었을까.

누군가 말한 것처럼, 제가 괴물이 된 건 아닐까 두려웠다. 증오조차 남기지 않은 채 누군가를 버릴 수 있는 제가.

하지만 그 고민과 괴로움은 정채우를 마주함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녀를 보면 괴롭다. 어찌할 수 없어서 힘들고 가슴이 벅찼다. 이런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녀를 통해 배웠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다신… 힘들게 하지 않을게요.”

멍하니 이겸을 응시하던 그녀가 봄꽃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그의 이마를 딱, 때린다.

“여름에 눈 내린다니까. 안 믿은 벌이에요.”

“그 벌, 얼마든지 받을 테니… 사랑한다고 해 줘요. 듣고 싶어.”

채우는 그의 뺨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탓에 2층은 냉골에 가까웠지만, 어쩐지 조금도 춥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그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해요.”

이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사랑한다고요, 최이겸 씨.”

반복된 말에 그의 두 눈이 처음 보는 빛을 띠었다. 투명하게 물드는가 싶더니, 어금니를 꽉 깨문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옭아맸다. 그러곤 거침없이 입술을 부딪쳤다.

가시처럼 남아있던 무언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리엔 안도의 열기가 스며들었다.

그녀의 몸이 뒤로 젖혀진다.

사정없이 짓눌린 건반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내가 더… 사랑해요.”

여전히 그와의 여름은 낯설고 아름다웠다.

『낯선여름』 마침.

번외편

그녀를 처음 본건, 새틴의 무대 위에서였다.

누구도 제 연주에 신경 쓰지 않는 몇 안 되는 자유로운 곳이었다. 피아노 연주가 즐겁냐고 묻는다면, 글쎄라고 대답할 것이다. 예전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손에 스스로를 향한 연민보다 분노가 먼저 치밀어 올랐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인생의 한 단락을 차지했던 음악을 그만두는 건 힘든 일이었다. 아마 담배와 술, 마약 따위를 끊는 것보다 더.

‘이런….’

잠시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반음이 이탈했다. 제대로 누르지 못한 음계 하나가 곡 전체를 망치는 순간이었다.

정식 무대였다면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했겠지만, 새틴에 그 정도의 섬세한 귀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여유롭게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훑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화사하게 치장한 새틴의 여종업원들과는 다른 부류의 여자였다. 청바지에 헐렁한 셔츠를 걸치고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그런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잊히질 않았다.

그 빤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치 조금 전의 실수를 들킨 것처럼 가슴속 어딘가가 선득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감흥 없는 표정으로 일어났을 때, 두 번째 음 이탈이 일어났다.

멈춰 선 여자가 고개를 튼다. 멀리서도 그녀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였다.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

그날 이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연주를 하다가도 그녀가 있던 자릴 돌아보았으나, 텅 빈 소파. 혹은 다른 얼굴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묘한 실망감과 허탈함을 느꼈다. 그는 그것조차 신기하게 생각했다.

사고를 당한 뒤 감정을 거세당한 것처럼 살아왔다. 그런데 얼굴밖에 모르는 여자를 상대로 기대와 실망, 설렘과 허탈함. 그리고 미약한 짜증까지 동시에 느끼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비가 오니까 우산 빌려드릴게요. 쓰고 가세요.’

사실 우산은 필요 없었다. 곧장 호텔과 연결된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부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날은 우산을 받아 들었을까.

그렇게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왔을 때, 비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포치 아래 몸을 웅크린 여자가 있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담배를 피우는 여자가.

어찌나 맛없게 담배를 태우던지, 반가운 마음보다 실소가 먼저 튀어나왔다.

제 가슴이 얼마나 세차게 뛰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고동이 뇌를 울리다 못해 몸 전체를 뜨겁게 달굴 정도로 여자에게 몰입해 버렸다.

그 날은 처음으로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들른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자리에 여자는 없었다. 태우다가 만 담배꽁초만이 그를 기다렸다.

대체 왜 담배까지 사 들고 되돌아온 걸까. 말이라도 걸어보려 했던 건가?

여자가 쪼그려 앉아 있던 자리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날 배운 담배는 정말이지 지독했다.

***

‘정채우.’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건,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그날은 이시현이 죽기 하루 전이기도 했다.

피아노를 조율하던 시현이 누군가를 발견하곤 작게 코웃음 쳤다. 약한 경멸이 섞인 미소였다.

‘마담 딸이야. 법대 졸업해서 그쪽 일 한다던데. 우리 같은 놈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건지, 한 번도 얘길 나눠 본 적이 없어.’

이시현은 그녀를 싫어하는 것치고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마담이 제 딸을 끔찍하게 아끼는데, 종종 손님들이 착각해 그녀를 룸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며 혀를 찼다.

‘너, 쟤한테 관심 있어?’

자신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최이서만 아니었어도, 좀 더 오래 새틴에서 일하며 그녀를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본 거야.’

‘그냥이 아닌데?’

‘마담이랑 닮아서.’

‘거짓말 진짜 못해, 최이겸.’

최이서와 웃어 본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날, 이시현이 죽었고 최이서는 망가졌다.

그리고 얼마 후, 자신의 집무실에서 정채우와 만났다. 그것도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인사하는 그녀와.

***

뜨거운 볕이 유리창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 품 안에서 곤히 잠든 여자와 그녀의 체향에 이겸은 눈을 떴다. 처음 보인 건 잔머리가 흐트러진 둥근 이마였다.

‘꿈인가…?’

우아한 곡선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동그랗게 솟은 콧날과 굳게 잠긴 눈꺼풀, 제 가슴팍에 닿은 입술이 보인다.

현실이었다. 지난밤, 2층에서 그녀의 연주를 듣다 말고 관계를 가졌다는 걸 상기했다. 잠시도 참을 수 없어 눈만 마주쳐도 흥분해 달려들었던 것을.

인간에게도 발정기가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일어난 그는 발가벗은 그녀를 블랭킷으로 감싸 안아 들었다. 흔들리는 감각에 눈을 뜬 그녀가 비몽사몽간에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침실로 가죠. 더 자요.”

“우리 2층에서 잔 거예요?”

“난방도 안 되는 곳에서, 미친 짓을 한 거죠.”

쿡쿡대며 웃기 시작한 그녀를 안은 채 계단을 내려가자, 2층과 다른 훈기가 얼어 버린 피부를 녹였다.

이겸은 난로와 가까운 침대로 가 그녀를 눕히곤 블랭킷 대신 두툼한 이불을 뒤집어썼다. 낯선 감촉에 놀란 그녀가 몸을 웅크린다.

이겸은 양팔 사이에 그녀를 가둔 채 밤새도록 품었던 몸을 내려다보았다. 허벅지와 복부, 젖가슴까지 이어진 흔적들은 모두 제가 만든 것이었다.

그는 솜털이 곤두선 그녀의 살갗을 따라 입술을 눌렀다. 동그랗게 곤두선 젖꼭지를 입에 물고 음부를 문지르자, 바르르 떨며 벌어지는 허벅지 안쪽이 젖어갔다.

봉긋하게 솟은 정점을 핥을 때마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하반신을 꽉 채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지만, 잠에 취한 그녀를 좀 더 오래 음미하고 싶기도 했다.

이겸은 풀어진 구멍 안으로 중지를 밀어 넣었다. 그녀의 허리가 살짝 들리더니 무릎을 모으려 했다. 이겸은 이를 세워 정점을 깨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벌려요.”

힘이 들어간 무릎을 벌려 깊은 곳에 있는 열점을 찾아 문지르자, 내벽이 움찔대며 죄어든다. 미끄러운 액이 그의 손가락을 밀어낼 때마다 작은 엉덩이엔 힘이 들어갔다.

“으으….”

분명 흠뻑 젖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빠듯했다. 허리를 뒤틀며 달뜬 숨을 쏟아 낸 그녀가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는다. 이겸은 선선히 웃으며 손가락을 뺐다. 대신에 아까부터 그를 괴롭혔던 성기를 쑥, 밀어 넣었다.

꽉 채워진 압박감. 제 머리채를 움켜쥐는 손아귀에 힘이 실린다. 그녀의 발끝이 경직되어 뾰족하게 서는 게 보였다. 품 안에서 씩씩거리며 그를 받아들이는 채우의 눈동자에 깃든 흥분감.

“좋아요?”

“응… 좋아요.”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이겸은 그녀의 한쪽 손을 떼어 내 검지와 중지를 입에 넣고 빨았다. 혀로 핥고 깨물자 울먹이는 모습이 숨 막히게 색정적이었다.

그는 적신 손가락을 아래로 끌어 내려 그녀의 음부를 문지르게 했다. 꽃잎처럼 벌어진 속살에 숨어 도톰하게 부어 있던 음핵에 손이 닿자, 그녀의 안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수축했다.

“하.”

그는 기분 좋게 한숨 쉬며 허리를 움직였다. 틈 하나 없이 꽉 차버린 그녀의 안은 끓어오르는 크림 같았다. 척추가 지끈거릴 만큼 날것의 쾌감이 이성을 날려 버렸다.

음핵을 문지르던 그녀가 울음을 삼키며 다리를 든다. 이겸은 그녀의 양쪽 다리를 잡아 자신의 어깨에 걸고 위에서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성기가 반쯤 빠질 때마다 딸려 나온 액이 엉덩이 골을 타고 흘렀다. 깊은 곳을 귀두로 찌를 때면 그녀의 몸이 굳고 눈가가 붉어졌다.

입술이 닿는 족족 울혈이 생기는 피부. 뜨겁게 데워진 피부가 마치 질척하게 물먹은 찰흙처럼 손안에서 일그러진다. 조금만 방심해도 사정해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발끝과 무릎으로 시트를 밀어 그녀의 안으로 더욱 깊게 박아 넣었다.

“싸고 싶어.”

“흐으…. 힘들…어요.”

“참아, 채우야.”

힘겹게 그를 받아들이던 그녀의 눈꺼풀이 들렸다.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깃든 이질감.

입술을 달싹이며 신음하던 그녀가 물었다.

“나한테 반말했어, 최이겸?”

어울리지 않게 반항적으로 치켜뜬 눈이 금세 욕망에 흐트러졌다.

이겸은 피식피식 웃으며 상체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자그마한 입술이 벌어지고 단맛이 나는 혀가 엉긴다.

빠르게 치받을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다.

왜 정채우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야해 빠진 건지.

“아아, 그만! 그만, 최이겸…! 으흣.”

너무 느껴 버린 듯 그녀의 애원이 점점 더 다급해졌다. 그에 박아 넣던 속도가 더욱 빠르고 격렬해진다.

결국, 허리를 뒤로 젖힌 채우는 경련하며 절정에 올랐다. 뜨거운 체액이 그의 음모와 시트를 푹 적시는 순간, 그 역시 울컥거리며 사정했다.

남은 흥분감에 움찔거릴 때마다 정액과 함께 투명한 액이 흘러나온다.

그는 땀으로 젖은 앞머릴 쓸어 넘기며 그녀의 위로 무너졌다. 그러곤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여자의 뺨과 귓불, 목덜미에 차례로 입 맞추며 몸을 웅크려 안았다.

“점점 더 못 참게 되잖아요. 이렇게 야하고 예쁘면 어쩌라는 건지.”

빨아주고 싶다. 제 손이 닿은 몸 전체를.

그동안 헤어져 있던 탓일까? 채우를 알고 난 뒤, 가장 오래도록 인내한 날들이 무성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검찰 수사를 받으며 잠도 못 잘 정도로 바쁘게 살아야 했다. 해외와 국내를 초 단위로 오가며 릴레이 회의를 하다 쓰러질 지경에까지 이르렀었건만, 오롯이 남은 기억은 정채우 없는 삶의 외로움이었다.

외로웠다. 그녀가 없는 삶이.

이겸은 웃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럽게 터져 버린 웃음은 바짝 마른 세탁물처럼 기분 좋고 산뜻했다. 얼음 결정을 탁, 깨트린듯한 그의 웃음소리에 채우의 표정이 멍해진다.

그녀는 이겸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봐요.”

“나도 처음이에요. 이렇게 웃어 보는 거.”

제 뺨을 어루만지는 채우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 맞춘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호선을 그린 입술이 그의 표정을 더욱 편안해 보이게 만들었다.

“나 지금… 무서울 만큼 행복해, 채우야.”

최고의 아침이었다.

『낯선여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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