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5. 장마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잠 못 들던 열대야의 끝은 역시 장마였다. 전국적인 장마 소식에 사람들은 작은 우산을 챙겼고 묵혀 둔 장화를 꺼냈다.
비는 서울 곳곳에 뿌려졌다.
서초 법원에서 나온 채우는 우산을 쓰곤 주차장으로 향했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차에 오르는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변호사님~ 대박이에요. 성과급으로 3천만 원 입금하셨대요. 한턱 쏘실 거죠?
은행 알람보다 빠른 미령의 메시지에 채우는 소리 내 웃었다.
-내일이요. 오늘은 곧장 의뢰인 만나 뵈러 가야 해서요. 먹고 싶은 거 골라놔요. 간만에 여자들끼리 뭉쳐요.
-저희는 무조건 좋습니다!
미령이 보낸 방정맞은 이모티콘이 메시지창을 빠르게 채웠다. 채우는 이어 도착한 은행 알람을 보며 손톱 끝을 깨물었다.
정영수가 수감된 이후, 비워 둔 집이 신경 쓰이던 차였다. 이젠 그럴 리 없겠지만, 이미 집에 오만 정이 떨어진 상황. 멀지 않은 곳에 새집을 얻을 수 있을 만큼의 돈도 모았다.
마음 같아선 복길에게 자랑을 늘어놓고 싶었으나, 아직 더 큰 수임이 하나 남아있었다. 그것도 성과급과 수임료가 정해지지 않은 제 인생 최고액의 소송이.
채우는 내비게이션에 등록되어있지 않은 주소 하나를 입력했다.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은밀하고 의뭉스러워진다더니.
입술을 가볍게 깨문 그녀가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와이퍼가 움직여 앞 유리를 닦아낸다. 요즘 유행한다는 90년대 후반 히트곡들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점심 대신 준비해 둔 초코바로 허기를 채운 그녀는 오래 달리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서히 속도를 줄여 차를 세우자, 입구를 지키던 경비원이 우비를 입은 채 차창을 두드린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창문을 연 그녀가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변호사 정채우라고 합니다. 최이서 사장님과 약속되어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명함을 갖고 초소 안으로 들어간 경비원은 곧장 안채에 연락을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온 경비원이 출입 허가증을 내민다.
“안내해주실 분이 나올 겁니다. 우산 필요하십니까?”
“아뇨. 있습니다.”
시동을 끈 채우는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창하 그룹 회장인 최호의 자택이었다. 어지간해선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곳.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최이서는 이맘때가 되면 유난히 수면장애에 시달렸고, 외부 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좋아하는 유흥까지 모두 미루곤 칩거를 시작하는 시기.
채우는 동영상 속 최이서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세상엔 여러 형태의 사랑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최이서의 사랑은 어려웠다.
그녀는 손에 든 커다란 숄더백 끈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어 짧은 기계음과 함께 대문이 열리더니, 검은 우산을 쓴 중년 남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채우는 놀란 마음을 숨기며 남자에게 꾸벅 인사했다.
“변호사 정채우라고 합니다.”
“예. 들어오십시오.”
남자는 분명 이겸이 말한 윤씨였다. 잔인하게 이시현의 팔에 주사를 놓은 인물.
남자의 뒤를 따르며 채우는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 최이겸이 증거로 제시했던 석란과 희귀식물로 가득한 온실이 보여 등줄기가 선득하였다.
그는 이런 곳에서 살아온 것일까?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을까. 지금 제가 보는 것처럼 회색일까.
사람 사는 냄새라고는 조금도 맡을 수 없는 곳에서, 그는 과연 어떤 기억을 품고 버텨 냈을까.
“안으로 들어가면 안내해주시는 분이 나오실 겁니다. 그리고 모든 소지품은 입구에 맡겨주시면 됩니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제 소지품이 필요한데요.”
“그럼, 필요한 것만 추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더는 말 붙일 수 없는 음울함에 짓눌리는 기분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윤씨가 말한 대로 들고 온 소지품을 모두 꺼내놓았다. 그러자 가사를 돕는 여자 둘과 남자가 나와 추린 소지품을 확인한 뒤 돌려준다.
정말이지 피곤하게들 산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런 짓까지 할까 싶기도 했다.
“2층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수면 중이시라 언질을 주었으니, 손님방에서 기다리시면 연락 넣겠습니다.”
“네.”
사람을 불러놓고 취침 중이라니.
채우는 여자가 안내하는 2층 손님용 공간으로 들어섰다. 창 너머, 푸른 초목이 비바람에 흔들린다. 마치 숲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커피를 내온 여자에게 꾸벅 인사한 그녀는 창문 앞에 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낯설고 어색하다. 눈앞에 용의자가 있음에도 모른 척해야 하는 심경은 꽤 복잡했다.
“여기, 이겸이 방이었어.”
문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건만, 두툼한 블랭킷을 어깨에 두른 최이서가 파랗게 질려 터덜터덜 걸어들어왔다. 그러곤 채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앉아.”
그를 따라 들어온 여자가 시원한 음료를 내려놓은 후 곁에 서자, 최이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 끝을 움직였다.
그에 살짝 경직된 낯으로 꾸벅 인사한 여자가 나간다. 문이 닫힌 뒤에야 최이서는 상체를 바로 세웠다.
나른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단단하게 똬리 튼다.
“앉으라고요, 정 변호사님.”
“수면제 드셨습니까?”
“예.”
“다른 건요.”
“약, 안 해요. 날 얼마나 버러지로 보는 거야?”
“버러지로 보는 게 아니라, 대화가 가능한 상태인지 확인하는 겁니다.”
최이겸의 형이 아니었다면, 곧 죽어도 최이서의 수임은 맡지 않았을 것이다. 이 복잡하게 얽힌 미로에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니까.
채우는 챙겨온 서류를 최이서 앞에 내밀고는 자리에 앉았다.
“로엠의 이시윤 변호사가 정영수를 고소했습니다. 시체유기 및 살인 방조. 그리고 범죄 은닉죄로요. 티브이 안 보실 것 같아서요.”
“그건 봤어…요. 당당히 여자들 대동하고 단체 소송한다며 걸어 들어가더라고. 이시현이랑 닮았던데?”
“…어쨌든 이시윤 변호사는 최이서 씨를 증인으로 지목할 겁니다. 최이서 씨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언론이 들끓고 주가가 폭락하겠죠. 놀라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던 최이서가 두 눈을 치켜떴다.
“안 무서워요? 우리 변호사님, 눈 하나 깜짝 안 해. 창하가 무너지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요?”
“압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담담해?”
“창하 주식은 사 둔 적이 없어서요.”
몸을 웅크린 최이서가 큭큭대며 웃었다. 그러곤 차가운 음료를 마셨다.
“그럼… 이 서류에 내가 할 증언들이 담겨있겠네.”
“잘 살펴봐 주십시오.”
채우는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방에서 나왔다.
이제 곧 서류 속에 든 영상 관련 자료를 보겠지. 통화는 도청되었고 메일은 감시대상이므로 이렇게 만나는 편이 위험성이 적었다. 또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것들도 있고.
‘힘들겠지… 최이서도.’
채우는 입구에 남겨둔 소지품을 챙겼다. 현관 밖에 서서 담배를 태우던 윤씨가 문소릴 듣고 돌아본다.
갈색 필터 앞까지 짧게 타들어 간 담배. 그것을 다급히 비벼끈 윤씨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수임 동의 때문에 온 거라서요. 근데… 이 정원, 근사하네요. 관리자분이 따로 계신 거죠?”
그녀는 부러 말을 흘렸다. 그러자 희미하게나마 남자의 낯빛이 밝아졌다.
“그게….”
“아, 여쭈면 안 되는 거였나요? 저는 화초를 제대로 못 키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잘 자란 식물들을 보면 신기하고 예뻐 보여서요.”
머쓱한 얼굴로 웃으며 우산을 기울이자 씁쓸한 표정으로 윤씨가 말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키우기 힘들 겁니다. 식물들도 생명이다 보니, 외로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거든요.”
“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그런데 유난히 신기한 식물들이 많이 보이는 것 같아요.”
“저 온실에 가면 더 많지요.”
채우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내 포기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구경해보고 싶은데요?”
그에 난감한 표정을 지은 윤씨가 멋쩍게 웃는다. 채우는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돌아섰다.
뒤따라 오는 남자의 발소리가 무겁다. 젖은 바닥을 딛는 소리가 이어지고, 대문을 열기 전. 윤씨가 그녀를 불렀다.
“온실에서 자라는 건 대부분이 석란 종입니다. 대체로 이런 녀석들이지요.”
채우는 남자가 내민 휴대 전화 화면을 보았다.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하얀 꽃잎이 유난히 멋들어진.
“꽃을 잘 피우지 않는 녀석이라, 20년 만에 꽃을 피운 게 작년입니다. 이런 귀한 것들이 흐드러집니다. 다음에 꼭 보러오세요. 날 좋을 때.”
그녀의 놀란 표정을 멋대로 곡해한 윤씨가 뿌듯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집어넣었다. 영상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화면이었다.
윤씨는 밖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분명 자신이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얼굴엔 일말의 의심조차 없었다.
차에 오른 그녀는 끝까지 환한 얼굴로 자택 앞을 벗어났다. 아마 머리털 빠지게 고민하고 있을 테다. 갑작스럽게 제가 등장한 이유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겠지. 하지만 어쩐지 초연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한남동 언덕을 내려와 삼거리 앞에 정차한 그녀는 쥐가 나는 머리를 움켜쥐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이시윤에게 연락했다.
-수임 동의 완료했어. 움직여.
***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정영수가 문 열리는 소릴 들으며 입꼬리를 떨었다. 독방이나 다름없는 접견실에 들어선 건 검사를 대동한 신여진이었다.
이번 사건을 맡은 검사의 얼굴을 보는데 확, 열이 솟구쳤다.
이어 겁먹은 얼굴의 여진이 내어 준 의자에 마주 앉았다. 정영수는 보란 듯 수갑이 채워진 손을 테이블에 올렸다.
“검사님은 좀 나가주시지요. 가족끼리 할 말이 많은데.”
“정영수 씨, 살인을 포함한 범죄 행위 방조, 은닉부터 현장 훼손까지. 너무 많은 혐의로 고소당하신 거 압니까?”
“하, 장난해요? 내가? 이봐요. 최근에 좆물은 묻혀봤지만, 피는 안 묻힌 지 오래됐어요. 헛소리하지 말고 볼일 보세요.”
“그럼 증명하셔야겠네. 신여진 씨, 두 분 대화 나누시고 따로 뵙죠.”
검사는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하곤 대기 중이던 형사들과 접견실을 나갔다. 이어 정영수가 다급히 여진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장난해? 왜 이렇게 늦었어!”
목소릴 최대한 낮췄지만, 위협적으로 들리기엔 충분했다. 입을 꾹 다문 채 정영수를 노려보던 여진의 입술이 비틀렸다.
“내가… 쓰레기니까. 너 같은 쓰레기를 안고 가도 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뭐? 영상을 찍어? 어디까지 썩어빠졌니? 너.”
“하, 그래. 쓰레기끼리 깊고 어두운 대화 좀 해보자. 새틴 지하 창고에 가면, 휴대 전화가 잔뜩 든 박스가 있어. 그거 기정이한테 줘. 내 비서 알지? 그럼 돼. 지금 새틴에 드나들 수 있는 거 너뿐이잖아. 찾아와. 그래야 내가 살아.”
“내가 왜? 싫어. 죗값 치르고 나와. 나는 네 편 들어줄 생각 없어.”
“신여진!”
양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친 정영수가 험악하게 이를 드러낸다. 여진은 되레 꼿꼿하게 앉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씨근덕거리며 대치하던 정영수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네 딸 영상 유포되는 거 싫으면, 가져와. 알잖아…. 네 딸도 너처럼 만들어버리기 전에… 가져와.”
“너!”
순간 창백해진 여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영수의 뺨을 쳤다. 날카로운 소릴 내며 돌아간 정영수의 얼굴.
“미친 새끼,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그에 히죽대며 고개를 튼 정영수가 핏방울 맺힌 입술을 핥으며 분에 떠는 여진을 올려다본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져오세요, 누님. 예?”
드디어 기사가 터졌다. 익명으로 기재되었지만, 실상은 실명이나 다름없었다.
덩달아 요동치기 시작한 창하의 모든 주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김 실장에게 태블릿을 돌려준 이겸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의 위패를 모신 절 앞엔 이미 최 회장과 최이서의 차가 도착해있었다.
“김동희 쪽도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일 겁니다. 기업 재무평가 실시하고, 회수하죠. 슬슬.”
“전액 말입니까.”
“발행했던 채권 전액 회수하세요. 재판 도중 파산절차 밟도록.”
한마디로 서서히 목을 졸라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최이겸은 모든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김 실장은 처음으로 최이겸이 무서웠다. 대단하다거나, 존경스럽다거나, 천재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이 엄습했다.
절대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랄까. 대립하고 싶지 않은 상대랄까.
김 실장은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 걸 느끼며 이겸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조용한 입구, 창하 소속의 경호원들이 무전을 주고받으며 외부의 접근을 제한했다.
이겸의 접근에 꾸벅 인사하곤 길을 내는 경호원들.
재킷 단추를 여민 그는 담담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거대한 일주문과 금강문을 통과해 곧장 대웅전 앞에 다다른 그가 주위를 둘러본다.
흔한 목탁 소리나, 염불 외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곳. 산새의 지저귐만이 간간이 귓전을 스치고, 바람에 깃든 짓이겨진 풀냄새가 짙다.
제가 기억하던 그 냄새였다. 어머니를 바다에 뿌리고 서울로 올라와 위패를 모셨던 그날의 냄새.
“왔냐.”
사당 앞에 다다르자, 앞에 서 있던 최호가 고개를 틀어 이겸을 맞았다. 곁에 선 최이서가 까딱 목인사를 한다.
“20주기에도 네 놈은 지각이구나. 이미 향 피웠다.”
“보고 받을 일이 많았습니다.”
“하긴. 이맘때만 되면 꼭 일이 하나씩 터지지.”
그렇게 말하며 최이서를 노려보는 눈빛에 화가 가득하다. 일반 직원도, 임원도, 일가친척들도 아닌 후계 1순위인 최이서였다.
최이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경제지 기자들은 마치 마녀사냥에 나선 것처럼 과거사를 캐기 시작했다.
그에 주가가 요동치는 것은 당연지사. 최 회장의 심기는 바닥을 쳤다.
“울산 3공장에서 노조들이 들고 일어섰다더라. 이겸이 네가 그곳 맡아서 해결하고. 이서 너는 재판에 성실하게 임해. 떳떳하게 굴어야 더 책잡히지 않는 법이야.”
최이서는 대답 대신 고개만 한 번 깊게 숙였다.
이겸은 반쯤 타들어 간 향 앞에서 짧은 묵례를 했다. 20주기라고 하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절차.
눅눅한 정적이 주위를 감싸고 어금니를 눌러 문 최호가 말문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뭐 하는 짓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들이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나 그렇게 쉽게 안 무너진다.”
이겸은 내리깔았던 두 눈을 치켜떴다.
“허명재를 두고 그 계집애를 변호사로 둔 점. 이겸이 네놈이 비서실 내사에 들어간 것도 그렇고…. 네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아직은 회장인 내 눈과 귀가 더 밝은 법이야.”
그렇게 말하며 돌아선 최호는 두 사람을 지나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더니, 초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무너지면, 대한민국 경제 기반이 흔들릴 거다. 그걸 과연 누가 가만히 둘까. 그러니 힘 빼지 말고 적당히 해.”
“그럼…. 하나만 답해주세요, 아버지.”
“그래, 그렇게 직접 물어봐.”
언뜻 호방한 어투로 대답하는 최호. 이겸은 먼지 한 톨 없는 어머니의 위패를 응시하며 물었다.
“어머니를 교살한 사람이 누굽니까.”
순간 무릎을 쓸던 최호의 손이 멎고, 최이서의 어깨가 굳었다. 최 회장의 가까이에 서 있던 윤씨가 딱딱한 표정으로 이겸을 향해 선다.
“무슨 소리야, 그게. 병으로 죽은 사람더러 교살이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미소를 띤 최호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가뜩이나 네 형 때문에 회사 이미지 엉망인데, 너까지 이상한 데 꽂혀서 헛짓거리하지 마라. 감사히 생각해. 네놈들이 배 안 곯고 부족함 없이 자란 거. 다 내 아들로 태어난 덕분이니까.”
이겸은 곁을 지나치는 최호를 따라 돌아섰다.
“그럼…. 이번에도 회사가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의 지분을 좀 이용해야겠습니다. 두바이 플랜트에 들어간 지분, 매각절차 시작합니다.”
“뭐? 너!”
이겸은 시퍼렇게 변한 최호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해야죠. 기사가 나갈 겁니다. 이번엔 살인 및 교사. 일 커져서 급락하기 전에 매각하는 게 현명한 길이고요.”
“그 언론사 어디야! 어디 감히, 허락도 없이!”
“이미 언론은 통제에서 벗어난 지 오래됐습니다. 아버지께서 종이로 된 보고를 받으시는 동안,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죠. 저도, 형도. 위패 끌어안고 질질 짤 나이는 지났다는 뜻입니다.”
이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최호의 말대로 그의 핏줄이 아니었다면, 최이겸으로 살아가지도,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최호의 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모든 것을 가졌고, 인생의 목표는 누구보다 높았다.
그렇다고 타인을 깔아뭉개거나 그들의 삶을 하찮게 여긴 것은 아니다. 타인과 다르다는 걸 어린 나이에 인정했고, 굳이 그들과 어우러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정채우는 어떤 의미에서 제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을까.
평범하지 않아서? 그녀의 삶이 저와 같기에?
그녀는 욕망의 대체재일까. 아니면, 욕망 그 자체일까.
“그 지분을 매각하면, 내 입지가 어찌 될 거 같으냐!”
“그렇다고 최이서를 팔아넘길 수는 없잖습니까. 성의를 보이셔야죠. 중소기업에 사업권을 넘기는 것으로 여론을 설득할 여지를 만들 겁니다. 매도에 나설 기업은 이미 손 써뒀으니, 걱정 마시고요.”
최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것을 두고 보는 심정일 것이다.
꾸벅 인사한 이겸은 여전히 굳어있는 윤씨를 스쳐 지났다. 그러곤 절에서 빠져나와 대기 중인 차에 올랐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김 실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곤 손에 든 것을 넘겼다.
“정영수가 법무법인 명재를 사건에서 배제한다고 밝혔습니다. 증거가 있다며 언론사 인터뷰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입질을… 시작했습니다. 당길까요?”
이겸은 화면 속 활자를 응시하며 꼬아 올린 무릎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다 절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윤씨를 발견했다.
둘은 말없이 눈을 맞췄다.
이겸은 김 실장에게 태블릿을 건네주며 한쪽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당깁시다. 제대로.”
***
[영수한테 네 영상이 있다더라. 채우야. 그 자식, 무서울 게 없는 놈이야. 휴대 전화… 돌려주는 게 어떠니.]
여진의 목소리가 겁에 질린 듯 벌벌 떨렸다. 그에 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앞머릴 쓸어넘겼다.
“영상 없어요. 있어봤자 나 혼자 옷 갈아입고 자고, 밥 먹고, 출근하는 영상뿐이에요.”
[정말이니? 정말이야? 너….]
“없다니까? 그 집에 들어가 사는 동안 연애한 적도, 남자를 끌어들인 적도 없어요. 하물며 데이트한 적도 없는데 무슨 영상이 있겠어. 그거 뻥이야.”
[채우야, 엄마는 걱정돼. 너 걱정돼 미치겠어. 법이면 다 되는 줄 알아? 걔넨 법도, 겁도 없는 놈들이야. 개똥 같은 의리인지 뭔지로 똘똘 뭉쳐서 나랑 너부터 어떻게 할 놈들이라고!]
“그럼 가져가요. 괜찮으니까. 가져가서 줘요.”
채우는 힘없이 말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러자 젖은 머릴 털며 욕실에서 나온 이겸이 그녀의 휴대 전화를 받아 귀에 댄다.
“제가 직접 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영상은 없습니다.”
[누구….]
“최이겸입니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떨어져 그녀의 어깨를 적신다. 채우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들어 이겸의 표정을 살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인 그가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움켜쥔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우리 채우랑….]
“진지하게 만나는 중입니다.”
이겸은 태연한 얼굴로 여진과의 통화를 마쳤다. 그에 채우가 굳었던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리며 웃었다.
“제 영상이 있대요. 엄마를 그거로 협박한 것 같아요.”
“가진 패가 그것뿐이니까요. 걱정 마요. 영상은 진짜 없으니까.”
그의 말에도 그녀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소파를 빙 둘러 온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운 뒤 걸터앉는다. 그러곤 상체를 굽혀 그녀의 손을 당겼다.
“그건 그렇고…. 식탁에 부동산 중개인 명함이 꽤 있던데.”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채우는 요 며칠 대충 던져놓은 명함들을 떠올리며 실없이 미소지었다.
“아…. 그냥 근처 몇 군데 둘러봤어요. 시세가 궁금해서.”
“왜?”
“음…. 이사를 해야 해서?”
“그러니까 왜.”
어쩐지 몹시 언짢아 보이는 그의 표정.
채우는 꾹 다물었던 입술을 달싹였다.
“여긴… 이겸 씨 집이잖아요. 제집이 아니라.”
이겸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의 입술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도톰한 입술을 엄지로 꾹 누르고 길게 문지르자 색이 옅은 립스틱이 입가에 번진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집은 구했습니까?”
“아뇨. 타산이 안 맞아요. 이 동네 집값, 정말 끔찍하게 비싸더라고요.”
그는 채우의 양 뺨을 힘주어 감쌌다. 그러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입술에 가만히 입 맞췄다. 몇 번 입술을 누르다가 가는 목을 깨물며 단정한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채우는 블라우스에서 양팔을 빼내며 소파에 기댔다.
“혹시 제가 미리 말하지 않아서 서운했어요…?”
“예, 서운했습니다. 다음 집은 우리 집이 될 줄 알았거든요.”
“네…?”
“여긴 우리 집이 아니니까. 다음 집은 우리 집이어야죠. 우리 집은 함께 구해야 하는 게 맞고.”
그녀는 멍하니 제 위에 올라타는 이겸을 바라보았다. 순간 몸이 소파 위에 눕혀지는가 싶더니, 바지가 확 벗겨졌다. 그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다급히 발버둥 치며 몸을 일으켰다.
털썩 마주 앉은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곤 채우의 발을 움켜쥔다. 오랜 마라톤으로 굳은살이 박인 발을 만지작거리며 키스하려는 듯 상체를 기울였다.
“왜요. 부담스럽습니까?”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부담스러운 게 아니에요. 최이겸 씨에게 강남의 집 몇 채쯤은 거뜬할 테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아니라?”
“나랑… 어디까지 갈 수 있어요…?”
“어디든.”
지나치게 단호하고 빠른 대답에 채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곤 쏟아내듯 말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에요. 난… 송서영 씨처럼 회사를 안겨주지도 못하고, 자금줄이 되어 주지도 못해요. 근데도 나랑 어디든… 가겠다고요? 그게 무슨….”
“사랑해요.”
무릎에 턱을 괸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질문과 대답의 심각한 괴리에 심장에 몰려있던 피가 전신으로 급격히 퍼지는 것만 같았다. 숨이 벅차고 들뜬다.
붉어진 그녀의 뺨을 말없이 어루만지며 입 맞춘 그가 재차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한다고요. 정채우 씨.”
뜬금없기로는 세계 최고일 것이다. 싱글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던 그녀가 다급히 목덜미를 당겼다.
입술이 뭉개지고 이가 부딪쳤다. 비벼지며 파고든 혀가 입천장을 훑으며 빠져나간다. 그러다 다시금 서로를 정신없이 갈구했다. 한입씩 베어 물듯 여린 살을 깨물고 빨아들이며 서서히 그와 맞붙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허리 뒤를 감싸 당겼다. 자연스럽게 허벅지 위에 올라간 그녀는 매끄러운 뺨을 지나 귓바퀴를 감싸며 키스했다.
시원한 물로 샤워한 건지, 서늘했던 피부가 서서히 데워진다. 그의 손이 등 뒤를 더듬어 브래지어 후크를 풀었다.
이어 이겸은 그녀의 피부 위로 배어나는 땀을 혀로 핥았다. 어깨와 빗장뼈를 지나 한 손에 가득 차는 젖가슴을 움켜쥐며 상체를 숙이는 남자.
선홍빛 유두를 혀끝으로 간질이던 그가 이로 깨물어 당겼다. 숨결이 뭉개지는 족족 솜털이 곤두서고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저릿했다.
상체를 뒤로 젖힌 그녀는 쌓여있던 서류 더미를 힘주어 짚었다. 그에 미끄러진 서류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종이에 베인 듯 따가웠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겸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목덜미에 두르게 만든 뒤,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가까이에 있는 피아노에 앉히며 속삭였다.
“오랜만에 어때요. 여기서 할까요?”
“여긴 좀 힘들어요. 균형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그럼… 식탁으로?”
“평범하게 침대에서 하면 안 될까요?”
“한 세 번째쯤 할 때, 침대에서 하는 거로 하고….”
입꼬릴 비틀어 올린 그가 그녀를 안고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채우도 그의 결정에 만족했다.
속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함께 욕조 안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채우는 그에게 입 맞추며 푹 젖은 트레이닝복 안으로 손을 넣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만져졌다. 맞닿은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서서히 차오르는 욕조 안의 물.
그녀는 짓궂게 움켜쥔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부러 음미하듯 나른한 표정으로 콧등을 찡그리자, 뾰족한 턱 끝에 남자의 이가 닿는다. 그러곤 꽉 깨물어버린 그.
“아!”
“장난치지 말고 빨리 벗겨 줘요. 물, 더 차오르기 전에.”
아픈 턱을 비빈 그녀는 물에 젖어 들러붙은 그의 바지를 벗겼다. 욕조 안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남자가 꼿꼿하게 휘어 오른 성기를 쓸어올리며 그녀의 손을 당긴다.
채우는 천천히 그 위에 앉았다.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온전히 그를 품고 아찔하게 치밀어오른 감각을 느꼈다.
커다란 손이 젖은 피부에 들러붙은 듯 끈적하게 어루만진다. 매끈한 등을 쓸어 올리며 어깨를 감싸 누르는 그. 몸의 무게중심이 아래로 쏠리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채우는 앓는 소릴 내며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정신없이 몰아치는 키스를 받았다.
종이 인형이 된 것만 같다. 조금만 힘을 줘도 이리저리 구겨지고 펼쳐지는.
그녀는 어쩐지 얄미운 마음에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반듯한 이마와 콧등을 가리며 떨어진 앞머리 사이로 선명한 눈빛이 흔들린다. 일순 번뜩이는가 싶더니, 유하게 휘었다.
채우는 목구멍을 간질이며 튀어나온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그의 뺨을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남자를 어쩔 줄 모르겠다는 것처럼 조급하게 키스했다.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듯, 앓았다.
***
서초경찰서 앞에 선 채우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곤 어깨를 폈다.
현재 시각 오전 5시. 법원과 경찰서를 제집 드나들 듯하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긴장이 되었다.
땀이 고인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의 곁으로 하품을 길게 한 최이서가 다가와 섰다.
“일찍 왔네, 정 변호사.”
“아, 오셨습니까.”
채우는 공손하게 인사한 뒤, 이 형사에게 연락을 넣었다.
최이서의 낯빛은 썩 좋지 않았다. 혈색 없이 창백한 피부가 푸석해진 걸 보니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기자들이 들러붙는 것보단 새벽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시간을 정했습니다. 커피라도….”
“괜찮아. 요즘 좀 시달려서. 들어가지? 이 형사 나왔는데.”
최이서의 말대로 사우나라도 다녀온 듯 번듯한 차림의 이 형사가 문을 연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경호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채우는 최이서와 함께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취조실에 들어가시는 순간부터 영상녹화 시작됩니다. 모든 말은 진술이 될 거고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요. 혹, 제게 따로 하실 말씀 있으세요?”
“없어.”
“최이서 사장님.”
여상하지 못한 최이서의 태도에 그를 불러세우자, 돌아본 최이서가 피식대며 웃었다.
“정 변호사. 걱정 마. 나만큼 어이없고, 황당하고, 비참하고, 열 받는 놈…. 또 있을까 싶네.”
나른한 표정과 달리 최이서의 말투엔 가시가 돋아있었다.
며칠 전, 최이서는 홀로 이겸이 보낸 영상을 보았다. 견뎌내기 힘들었을 테지만, 뒤늦게 방에서 나온 최이서의 얼굴은 담담했다고 한다.
이겸은 최이서에게서 의외의 면을 보았다며 즐거워했다.
충격에 무너질 줄 알았던 최이서는 그날 진종일 술을 퍼마시는 것으로 대견하게 화를 참아냈다고.
조금,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채우는 취조실 안으로 들어가는 최이서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어 편의점에서 사 온 캔커피를 든 형사 한 명이 그녀에게 꾸벅 인사하곤 안으로 사라진다.
-이제 취조 시작해요. 잘 다녀오세요.
채우는 이겸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형을 잘 부탁해요.
짧은 메시지에서 그의 긴장이 읽혔다.
커다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은 최이서의 옆자리에 착석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헛기침한 이 형사가 취조를 시작한다.
“그럼, 오전 5시 20분. 참고인 진술 녹화 시작합니다.”
이 형사는 최이겸의 사람이지만, 그건 최이겸에게 죄가 없을 때였다. 또한, 이 형사가 돕는 건 최이겸이지. 최이서 혹은 창하 그룹이 아니었다.
단언컨대 이 형사는 최이서에게 죄가 있다면, 일말의 고민 없이 수갑을 채울 것이다.
“뻔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시현 씨 사망 당일, 기억나는 것 전부. 시간순으로 듣겠습니다. 몇 시에 호텔에 입실하셨죠?”
“기억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해있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퍼마신 것도 아니었어요. 새틴에서 그토록 취해본 것도 처음이고. 그런 싸구려 호텔에서 묵은 일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럼 이시현 씨가 최이서 씨를 방으로 부축했다?”
“그랬겠죠. 난 이시현을 기다리면서 술을 마신 거거든요. 이시현은 새틴에서 일했고, 그날따라 연주가 길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시현은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최이서는 이 형사의 질문에 상상 이상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딱히 무언가를 감추려 하지도, 기 싸움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물로 목을 축여가며 꽤 오랜 시간 문답을 이어나갔다.
평소와 같은 위스키를 주문했고 주량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고작 몇 잔을 비운 뒤 취기가 올랐는데, 이후로는 거의 기억이 없이 희미하다며 무언가를 암시했다.
“그럼… 왜 번복하시는 겁니까. 1년 전, 이 자리에서 최이서 씨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셨습니다. 새틴에 간 목적부터, 이시현과의 관계까지. 일면식 없는 관계라고 하셨고, 당시… 법무실 직원들과 술자릴 가지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건…. 제가 직접 지시 내려 조작한 서류입니다.”
그 순간 채우가 나서 최이서의 말을 막았다.
“지금 것은 진술 아닙니다. 사실도 아니고요. 해당 건은 창하 그룹과 관련된 일이지, 이시현 씨 일과는 관련 없습니다.”
이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기울여 거리를 좁혔다.
“그럼, 왜 그러신 겁니까.”
혀를 찬 최이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채우를 흘겨보곤 말했다.
“사내놈들끼리 붙어먹는 꼴을 누구한테 들켰거든요. 수습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이시현이 약물 과다 투여로 사망했다는 걸 믿었으니까.”
“근데 유가족분들 말은 다릅니다. 진통제도 한 알 이상 못 먹었다던데요.”
“못 먹었죠. 혹시라도 잘못될까 봐….”
말끝을 흐린 최이서가 대각선에 놓인 캐비닛을 응시하며 진술을 이었다.
“이시현은 종종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SNRI 계열의 약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다른 걸 하기도 했고. 그건 조사기록에 나온 그대롭니다. 가족들은 모르는 것 같지만.”
더욱 담담해진 말투와는 달리, 최이서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한이 난 것처럼 미세하게 떠는 턱에 힘이 들어간다.
두려워하는 건지, 기억해낸 것들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건지.
떨리는 최이서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채우는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났다.
“잠시만 쉬죠. 밖에 슬슬 기자들이 몰려들고 있을 거거든요. 최이서 씨가 조사받는 중인 거, 이제 소문 다 난 것 같은데…. 형식적인 거 여기까지 하고, 이제부턴 비공식적인 거 할까요?”
그러자 이어 몸을 일으킨 이 형사가 기지개를 쭉 켜며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그럼… 식사부터 하실까요? 이런 자리, 자주 있는 거 아닌데. 순댓국? 아니면 설렁탕이나 육개장도 되는데. 뭐로 하실래요?”
***
식사 중이던 최호의 곁으로 다가선 비서실장이 귓속말을 하며 조급한 표정을 지었다. 맑은 뭇국에 수저를 담근 이겸은 느긋하게 최호의 얼굴을 응시했다.
최 회장의 얼굴에 미세한 실금이 그어진다. 식욕이 떨어졌다는 듯,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호를 이겸이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돌아본 최호가 노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침부터 찾아왔나 했더니. 네 형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밥이 넘어가는 게야!”
“아… 그 얘기였습니까? 늦긴 했지만 들었습니다. 오늘 참고인 조사가 있었다고. 아버지도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삐딱하지도, 마뜩잖음이 묻어나지도 않은 어투였다. 속을 알 수 없는 듯하지만, 그 이면이 얼마나 치밀하고 잔인한지 최호는 알고 있었다.
저를 빼닮지 않았다며 홀로 단언하여도, 본능적으로 안다. 유약하고 정에 약한 어미의 성격을 물려받은 게 최이서라면, 최이겸의 잔혹한 성정은 저를 닮은 것이란 걸.
거울을 보는 기분이라 최호는 아들이 싫었다. 아들의 곁에 서면 제 추한 점이 낱낱이 드러나는 기분이라, 제일 먼저 이겸을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체 핏줄이 뭐기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아들을 결국 온전히 놓지도 못하였다.
이겸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최호는 길들이기에 실패하였음을. 최이겸은 길들일 수 없는 야생종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윤씨, 나 좀 보지. 이겸이 넌… 식사 마치는 대로 네 형 대신 기자 회견 준비해라. 네 형은 이제 가망이 없겠어. 네놈이 만든 판, 네놈이 수습해.”
기가 막히게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뭇국 안에 든 소고기는 부드러웠고 간은 적당했다. 어쩌면 아버지와 함께한 식사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순간이 아닌가 싶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깍듯한 윤씨의 인사를 받은 이겸은 열린 뒷문 앞에 멈춰섰다. 예를 갖추는 윤씨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느긋하게 차에 올라 고개를 틀었다. 등받이에 기댄 최이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막 문을 닫으려던 윤씨의 시선이 조금 들렸다. 하지만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바라던 반응 또한 아니었다.
“사모님이 좋아하셨을 겁니다. 워낙 작은 도련님을 예뻐하셨잖습니까.”
“그런가요. 모래 놀이를 했던… 어렴풋한 기억이 나긴 하네요.”
“오래전엔 마당 한쪽에 모래 놀이터가 있었지요. 나무로 된 배는 제가 만들었던 겁니다.”
“아저씨는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아버지는 요즘 사소한 것들도 종종 잊으시는 것 같던데.”
“적어도 사모님과 도련님에 관한 건 잊지 않으려 노력 중입니다.”
이겸은 매끈한 입술을 끌어올려 웃었다. 영상 속 윤경수는 망설임 없이 이시현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 그 양이 치사량이었는지, 혹은 정말로 이시현이 운이 나빠 목숨을 잃은 것인지 몰라도…. 분명 윤경수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다. 목숨을 잃었다.
‘자의일까?’
고민하던 이겸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윤경수가 언제부터 최씨 집안에 뿌리내린 건지 몰라도, 제가 기억하는 남자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어머니가 교살당한 사실을 정말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겸은 그를 자극해보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사람이자,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윤경수를.
“다른 것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가 기뻐하실 테니까.”
“제가 뭐라고요….”
“중요한 사람.”
순간 윤씨의 눈이 커다래진다. 이겸은 고개를 까딱인 뒤, 차 문을 닫았다. 김 실장은 수행 기사에게 눈짓해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곤 룸미러로 이겸의 표정을 살폈다.
최이겸은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심히 눈을 감았다.
철옹성처럼 위압적인 건물 앞을 벗어나 시내로 들어선 후에야 돌아본 김 실장이 목적지를 물었다.
“곧장 서초로 가시겠습니까?”
“아뇨.”
손목시계에 시선을 준 이겸이 말한다.
“새틴으로 갑니다.”
“지금 시간엔….”
“약속되어있습니다. 돌려줄 게 있어서.”
이겸의 눈빛이 서서히 서늘해진다. 쇼핑백에 담겨 바닥에 놓인 휴대 전화 더미로 시선이 움직였다.
채우에겐 순순히 휴대 전화를 넘겨주라고 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모든 것엔 대가가 따르는 법. 저 역시도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를 생각이었다.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결국엔 제자리를 찾을 테니까.
답답한 마음이 들어 창문을 조금 열었다.
며칠 전보다 눈에 띄게 내려간 기온. 적당히 서늘해진 바람이 분다.
얼마쯤 달려 도착한 새틴 앞, 그의 얼굴에 미미하게 남아 있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
양손에 움켜쥔 손수건이 젖어간다.
신여진은 앞에 놓인 쇼핑백을 보며 몇 번이고 땀이 나는 손바닥을 닦았다. 마주 앉은 최이겸의 앞에 차가 놓였지만, 그는 손대지 않았다.
“음료는 괜찮습니다. 확인부터 하시죠.”
연주를 하겠다며 찾아왔던 예쁘장한 피아니스트. 그런데 오늘 찾아온 최이겸의 모습은 여진이 지금껏 알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떨리는 손으로 쇼핑백을 무릎에 올린 여진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그저 평범한… 피아니스트인 줄 알았는데.”
그에 이겸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미소를 머금었다.
“피아니스트면 어떻고 사업하는 사람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따님과 진지하게 만나는 관계라는 거겠죠.”
여진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새틴에서 고용한 피아니스트. 죽은 이시현이 소개한 남자가 제 딸의 연인이자 창하의 총괄전무라니.
신여진은 그간의 제 행동을 검열하다,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미안해요. 문득 내가 속물 같다는 생각을 해서. 혹시 이 휴대 전화에서 뭐 나왔어요? 정영수는 이걸 구명줄 삼으려 하던데.”
“글쎄요. 신여진 씨가 하실 일은 이걸 정영수의 사람에게 전해 주는 겁니다. 그저 물건만 전하시면, 역할은 끝날 겁니다.”
“우리… 우리 채우 영상은. 정말 없어요?”
채우의 이름이 불리자 최이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세를 달리해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있어도 없는 겁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뒷말을 부드럽게 삼킨 남자가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고 턱 끝을 만지작거린다. 그러곤 흘러내린 앞머릴 쓸어넘겼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여진은 이겸과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예의 차분한 어투에서 묻어나는 기묘한 노기. 딸의 애인은 지금 그녀에게 고요한 분노를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자존심이 상하는가 싶다가도, 저보다 훨씬 나은 상대를 찾은 채우가 대견하기도 했다.
복잡 미묘한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시선을 내리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처리한 뒤, 잠시 나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러니 채우 씨를 불편하게 하실 생각이라면,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죠. 부모의 역할을 하실 건지, 남으로 남을 건지. 결정하시란 뜻입니다.”
재킷 단추를 여미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섬세함.
여진은 몇 번이고 손수건을 잡은 손을 쥐었다가 폈다.
“아무리 밉고 한심해도 부모 자식 사이인데….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는지. 그게 쉬운가요?”
“그럼 신여진 씨도 쉬운 대답을 하시면 됩니다. 지금 신여진 씨에게 남은 건 똑똑하고 똑 부러지는 자식 하나,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심상한 표정으로 주위를 훑었다. 그러곤 다시 여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라면… 못 볼 것 같은데. 정채우가 펑펑 우는 거. 어쨌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슬슬 시간이 돼서요.”
최이겸의 눈빛엔 얼마쯤의 멸시가 섞여 있었다. 그에 여진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뻔뻔해 보이겠지만, 우리 채우… 잘 부탁해요. 그쪽 집안이 어떤지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좀 무섭네. 내 새끼 걱정할 깜냥이나 되겠느냐마는. 그래도 나는 채우를 많이 좋아하니까….”
여진은 굳은 표정으로 쇼핑백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들었다.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지만, 채우 친부를 만났을 때와 상황이 너무 비슷하잖아. 그래서… 화가 나네.”
입가에 가벼운 조소가 스쳤다.
“다릅니다. 완전히.”
예의 단정한 얼굴로 인사한 그가 돌아선다. 멀리 서서 최이겸을 기다리던 비서들이 자석처럼 그를 따랐다.
여진은 흉물스럽게 느껴지는 휴대 전화를 하나 꺼내어 이리저리 살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영수의 구속 이후 호텔은 압수수색에 들어갔고 새틴은 영업자제 권고를 받았다. 하지만 재개장 할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었다.
그럼 최이겸의 말마따나 제게 남은 건, 똑똑하고 똑 부러진 딸 하나뿐 아니던가?
여진은 채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이는 제 생각보다 너무 빨리 철이 들었고 지나치게 똑똑했다. 하여, 종국엔 어미를 손가락질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창피한 어미였기에 피해 주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여진은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구원자라도 되는 양 제게 손을 내민 정영수, 제게 손가락질하며 경멸하던 오래전 그 여자들. 아주 오랜 옛날, 꿈 많던 소녀의 미래를 지르밟고 사라져버린 그 남자를.
무거운 적막으로 가득한 홀. 먼지 쌓인 피아노 한 대만 덩그러니 놓인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힘주어 쇼핑백을 움켜쥐었다.
얇은 종이 끝이 구겨진다.
***
위로를 해야 하는 순간마다 진심이 전해지기를. 한낱 가볍게 던지는 위로의 말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로는 어렵다.
채우는 축 늘어져 앉아 있는 최이서의 곁에 자리했다.
“힘드셨을 텐데….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곤 경찰서 내에 자리한 카페에서 산 커피를 건넸다. 제 취향대로 설탕 시럽을 듬뿍 넣어 달콤한 라테를.
그것을 받아 든 최이서가 뻐근한 눈을 몇 번 비비곤 몸을 일으킨다.
“가지. 밖에 기자들 많던데. 뒤로 나갈까?”
“아뇨. 이미 최이서 씨 경호원들과 비서실 직원들이 나와 통제 중입니다. 뒤로 나가면 더 의심할 거예요.”
“그래…. 근데 정 변.”
“예.”
“이시윤이랑 만날 수 있나?”
“글쎄요.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렇게 하면 상대측에 불리한 상황이 연출 될 수도 있어서요.”
“변호사로서 말고. 피해자의 가족으로서.”
정문 앞에 선 최이서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는다. 한숨 쉰 그는 이 형사와 눈인사를 했다.
“사과하고 싶어서 그래.”
그러곤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세례. 뛰어온 기자들은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혔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하지만 최이서는 담담하게 그들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살인하셨습니까!”
“조사 중 강압적인 부분은 없었습니까?”
“두 분, 어떤 관계십니까!”
“최이서 씨! 대답해 주세요, 최이서 씨!”
커다란 최이서를 뒤따르던 채우는 엄청난 힘에 밀렸다. 몸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 실례하겠다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건지.
압박된 그녀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때였다.
“어이, 어이. 밀지 마! 나도 취재를…!”
누군가 어깨를 잡아당기는 상대에게 소리치다 말고 입을 떡 벌렸다. 그 틈에 다가온 남자가 채우의 허리를 감쌌다.
“최이겸이다!”
“창하 총괄전무!”
어깨를 잡혔던 기자의 외침에 이분화된 취재 열기.
채우는 싱긋 웃으며 내려다보는 이겸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쪽을 돌아본 최이서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차에 오른다.
“우리 차는 저쪽에 있습니다.”
이겸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채우는 실소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경호원들이 낸 길을 따라 빠르게 차에 오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가 먹을 지경이다. 이어 보조석에 오른 김 실장이 곧장 차를 출발시키라고 지시했다.
기사가 경적을 몇 번이나 울린 뒤에야 길이 난다.
“하, 미쳤어…. 기자들이 너무 빨리 냄새 맡은 거 아니에요?”
“일부러 흘린 것들이 있거든요.”
채우는 차 안 가득한 향기를 삼킨 후에야 안도했다. 익숙한 향이다. 이른 아침 최이겸의 품에서 맡았던 침실과 욕실, 그 집의 향기.
경찰서 정문을 완벽히 빠져나온 뒤, 긴 숨을 내쉰 그녀가 이겸의 어깨에 툭 기댔다.
“참, 긴…. 하루였어요.”
그러자 그녀의 정수리에 머릴 기댄 그가 속삭였다.
“저도요.”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채우는 양손으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돈한 뒤 멍하니 어둠을 응시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취조를 끝낸 뒤, 절대 잠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책상 앞에 앉았건만 결국 잠들어버렸다. 하지만 분명 책상 앞에서 잠들었던 것과 달리, 눈을 뜬 곳은 침대였다.
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카디건을 걸친 후 거실로 나갔다. 여전히 비몽사몽 해 다리에 힘이 풀린다.
하품을 크게 한 채우는 소파에 앉아있는 이겸에게로 다가갔다. 무릎에 올려 둔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딱 맞춰 일어났네요. 잘 잤어요?”
저건 분명 거짓말이다. 제가 일어날 시간까지 예상했단 태도에 괜히 멋쩍어진 그녀였다.
“어디 다녀온다면서요. 벌써 나갔다가 온 거예요?”
“아뇨. 이제 나가 볼 겁니다.”
채우는 그의 뒤로 다가가며 물었다.
이겸이 보는 건 대형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터트린 최이서와 관련된 기사였다. 경제 사범으로서가 아닌, 살해 용의자로서 조사.
자극적인 제목에 낚인 사람들이 쏟아낸 댓글로 기사 페이지는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그에 눈살을 찌푸린 그녀가 이겸의 어깨를 짚었다.
“오래 걸려요?”
“같이 가도 괜찮은데. 내가 직접 운전할 거라.”
가족을 살인자로 만들어 버린 지독한 글을 보면서도 이겸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깨를 잡은 그녀의 손을 당겨 손등에 키스한 그가 웃는 얼굴로 돌아본다.
“같이 가죠.”
“…어디 가는데요?”
“누굴 만나는 건 아니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게 있어서요.”
채우는 거절 없이 곧장 준비를 시작했다. 쌀쌀해진 날씨 탓에 제법 도톰한 점퍼를 챙겨 입고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어딜 가냐는 질문에 그는 말없이 손을 맞잡았다. 그러곤 지하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그녀를 태웠다.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는 건 부산에 갔던 이후 처음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하러 움직인다는 것.
채우는 이동하는 동안 고민했다. 실은 최이서보다 최이겸의 상황이 더 좋지 않았으니까.
최이서가 의혹을 벗으면 회복할 수 있는 선에 서 있었다면, 최이겸은 주가 조작 및 자사주 매각을 주도한 경제사범 혐의를 벗지 못할 터.
그의 복수는 치밀했지만 그만큼 위험하며, 무저갱처럼 어두웠다. 그럼 최이겸은 본인에게 돌아올 위험까지 계산한 수를 내던진 걸까?
아니면….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서서히 차가 멈추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새틴의 지하 주차장. 호텔과는 별개로 운영되는 곳이었고, 낯익은 얼굴이 멀리 보였다.
“…우리 엄마잖아요.”
한구석에 차를 세운 그는 시동을 끄곤 가만히 입꼬릴 끌어올렸다.
“확인할 게 있었습니다. 오늘 휴대 전화를 건넸거든요.”
“휴대 전화요? 그걸 다요? 자료는요?”
“물론, 처음 상태 그대롭니다.”
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숨을 내뱉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여진을 보았다.
정영수는 깡패다. 아무리 엄마가 이 바닥에서 중요한 사람일지라도, 배신자나 다름없는데. 무사할 수 있을까?
멀리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진의 앞에 차가 멈춰선다. 내린 사람은 정영수의 뒤를 그림자처럼 지키던 아무개였다. 이어 여진이 표독스러운 얼굴로 쇼핑백을 넘겼다. 남자는 그 안을 흘금 들여다보곤 여진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큰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채우의 마음을 알아챈 이겸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건 증겁니다. 그리고 증거는 제대로 된 곳에서 회수해야죠.”
그게 무슨 말이냐 물으려 할 때였다. 여진이 사라지고 남자가 차에 오르자마자 요란한 바퀴 소릴 내며 도착한 승용차와 승합차 여러 대. 마치 짠듯한 타이밍이었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형사들이 남자의 주변을 에워싼다. 위협하듯 액셀을 밟으며 앞으로 튀어나가려던 남자는 결국, 자신에게 겨눠진 총을 마주한 뒤에야 손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남자가 체포되는 모습을 끝으로 유유히 시동을 거는 그.
채우는 요란한 현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겸은 그런 그녀를 똑바로 앉힌 뒤,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신여진 씨는 무사합니다. 연관 없는 것으로 끝낼 예정이고요.”
“지금 그럼 표적 수사라도 하는 거예요? 정영수를?”
“이미 구속된 상황, 추가 수사는 당연한 겁니다. 늦은 시간이지만, 바람 쐬며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채우는 실소 하며 손을 빼냈다. 그에 최이겸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왜요. 말해 주지 않아서 서운해요?”
“뭐든 혼자 결정하고 해결하려는 거 알아요. 아는데…. 매일 한집에서 지내는 사이에 좀 서운하긴 해요. 게다가 우리 엄마 일이었잖아요.”
두 사람의 눈앞으로 형사들을 태운 차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채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
완벽하게 찾아온 정적. 차가운 느낌을 주는 주차장 불빛이 꽉 모아 쥔 손을 비췄다.
“오전에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휴대 전화를 건네준 뒤, 곧장 서초로 간 거고요. 제가 덫을 놓고 경찰이 검거한 거로 해두죠.”
“엄마는요. 엄마는 죄가 없나요? 혹여라도 잘못되었으면요?”
다그치는 그녀에 이겸은 의아한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미안합니다. 아직 사과할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솔직히 말하면 정채우 씨는 제 계획에 없던 사람이라.”
그는 핸들 위에 한쪽 손을 올리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끼어있는 일엔 도무지 이성적일 수 없다고 할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연민이나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면 일을 그르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내가 방해되나요?”
“아닙니다. 방해라니, 그런 소리 마요. 속상하게.”
“그럼 왜요. 왜 뭐든 먼저 말해 주지 않아요…?”
“이번 일에 제가 끌어들인 사람들이 몇인지 알면, 놀랄 겁니다. 불법적인 것도 합법적인 것도. 침범 불가능한 권역이에요. 이후로는 사실, 운에 맡겨야 할지도….”
말끝을 흐린 그가 시선을 내리뜨며 얘길 이어나간다.
“그러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잠시 해외로 나가 있어 주겠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당신 걱정 없이 끝마칠 수가 있어요.”
그녀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모든 것에서 배제되는 것.
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잘못될까 봐? 아니면…. 최이겸 씨가 잘못될까 봐요?”
“둘 다.”
그는 대답을 종용하지 않고 평소보다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차를 몰았다.
최근 이름을 떨친다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둘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콘크리트 벽과 철골을 기괴하게 드러낸 인테리어를 살펴보며 취향의 다양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커피콩의 원산지에 관해 떠들었다. 하지만 수많은 화제 중, 오늘 일어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어쩌면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소한 것으로 다투고, 금세 화해하고. 미워하다가 또 사랑하는. 각자의 세상이 복잡하고 미묘할지라도, 둘의 세상만은 평범하기를.
외부의 그 어떤 것도 끼어들지 않기를.
그날 밤, 속보가 떴다. 영상 천여 개를 확보했다는 경찰 측 브리핑이 담긴.
채우는 굳이 내용 확인을 하지 않았다. 영상을 확인하면 윤씨가 범인으로 지목될 것이다. 그리고 긴급 구속 영장이 발부될 것이고.
윤씨는 잡혀 들어가겠지만, 교살에 관한 증언은 하지 않을 테다.
꽃 이야기를 할 때면 수더분한 얼굴로 돌아가던 윤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채우는 이겸이 내어준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열었다. 머리를 질끈 올려묶고 밀린 업무를 시작했다.
***
오전 7시. 모자를 푹 눌러쓴 강서준은 주위를 불안한 듯 둘러본 뒤 밖으로 나왔다.
얼마 전부터 누군가 계속 주시하는 느낌이 들어 칩거를 선택한 그였다.
통장에 거액의 퇴직금이 입금되어 있지만, 인생을 걸기엔 부족한 돈이었다.
해외로 나가 몇 년 지내볼까도 생각했지만, 강서준은 평범하게 회사 생활을 하며 높은 자리까지 수순을 밟아 오르고 싶었다.
물론, 줄을 잘 타야 한다는 강박감에 최이서가 내민 손을 잡았지만. 그것조차 지금은 후회였다.
주상 복합 아파트 1층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그는 맥주와 안주로 삼을 과자 몇 봉지를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꽤 넓은 편의점 안엔 고등학생 몇 명이 컵라면과 간식거리 등을 고르는 중이었다. 아마 등교 전에 배를 채우려는 건지도. 반대로 본인은 게임으로 밤을 지새운 뒤 배를 채우려는 거였고.
“2만 5천 7백 원입니다.”
카드를 내밀며 아이스크림 봉지를 북 찢은 강서준이 그것을 입에 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감시하는 듯한 불편한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작은 것 하나에도 소심해져, 지금껏 성공한 면접이 없었다. 그나마 해랑의 조직 구도가 마음에 들어 기대했던 차였건만, 그곳을 꽉 잡은 게 정채우일 줄이야.
“안녕히 가세요.”
편의점 봉지를 든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눈앞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불쑥 다가섰다.
“저, 정채우?”
“오랜만이에요.”
“뭐, 뭐야?”
어찌나 당황했는지 입에 문 아이스크림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그녀가 발치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줍더니 쓰레기통에 넣는다.
출근 도중 잠시 들른 건지 항상 들고 다니는 서류가방이 무거워 보였다. 강서준은 완벽한 차림의 정채우를 보며 괜스레 제가 입은 점퍼를 여몄다. 그러곤 손에 든 맥주 봉지를 뒤로 숨기며 고개를 들자, 담담히 웃어 보인 그녀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길게 얘기할 시간은 없고…. 절대 혼자 다니지 마세요. 창하 비서실에서 움직였어요. 관련된 사람들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할 텐데, 그 시작이 선배예요. 그러니까 조심하시라고요.”
강서준은 오싹함에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지금껏 느꼈던 집요한 시선의 정체를 알게 된 그는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반면 채우는 아침 인사를 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돌아서서 정차 중인 차로 향했다.
“정채우!”
서준은 막 운전석 문을 여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러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가 물었다.
“그거 말하려고 찾아온 거야?”
“네.”
“왜?”
왜냐는 질문이 우스웠지만, 묻고 싶었다. 우리가 이렇게 조심하라고 언질 줄 관계는 아니지 않냐고.
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가 피식 웃으며 한숨을 크게 내쉰다. 아침을 닮은 미소였다.
“다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리고 실은… 그 일 아니었으면, 꽤 좋은 동료로 남았을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다치지 마세요. 범인 잡힐 때까지는.”
강서준은 멍하니 차에 올라 사라지는 채우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다 축 늘어트린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에 들린 맥주 봉지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유 없는 패배감에 폐부가 꽉 죄어들었다.
최이겸을 태운 차가 정문 앞에 멈춰섰다. 검은 세단의 뒷문이 열리고, 인사를 받으며 내리는 최이겸. 이어 먼 곳에서부터 시작된 셔터음이 빠르게 들려온다.
그들은 최이서의 모습을 담으려 창하 그룹 본사 주위를 에워싼 기자들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기자들의 외침. 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이 없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시선을 뒤로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선 이겸은 대기 중이던 수행원들과 함께 승강기 앞에 섰다.
이미 회사 내에도 최이서의 소문은 널리 퍼져있었다.
살인사건의 참고인이라는 타이틀만으로 벌써 몇몇 종목이 휘청이기 시작했고, 최이서가 관리하던 계열사들의 주가가 흔들림과 동시에 최이겸의 일은 배 이상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미 각오한 일. 업무적인 문제 정도는 충분히 소화해낼 자신이 있었다.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그는 바닥까지 내려간 기분을 경험했다.
곧장 출근한 줄 알았던 채우가 신촌에 들러 강서준을 만났다는 보고.
그녀는 강서준에게 무언가를 얘기했고 대략 2분 정도 자리에 머물렀다고 한다. 짧지만 충고, 혹은 경고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것은 제게 한마디의 언질도 없이 독단적으로 벌인 행동이었다.
혹, 지난날의 복수인가?
주머니 안에 찔러넣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별것 아닌 것에 화가 나고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그 감정은 소리 내어 뱉기도 졸렬한 무엇이었다. 이름이나 형태를 정의 내리지 못한 기분 나쁜 무언가.
차라리 명확한 무언가였으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을 것이다. 채우에 관한 보고를 받은 순간에도 싫은 내색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를 화나게 했다.
27층에 도착하자마자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이겸은 답답한 재킷을 벗고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훑었다. 하지만 도통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없었다.
“젠장….”
와중에도 거지 같은 보고서 몇 개를 추려 바닥으로 던져 버린 그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뻐근한 눈가를 눌렀다.
항상 사람을 붙여놓긴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직은 윤경수의 구속 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상황.
경찰은 부러 때를 노렸다. 중요한 증거 영상을 확보했단 기사가 나갔으니, 윤씨는 더 이상 시간 끌지 않고 움직일 것이다. 영상 속 인물이 윤씨라는 걸 확신 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몇 없을 터.
경찰은 윤경수가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겸은 강서준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강서준은 회사 문서를 조작했고, 그 배후엔 최이서와 허명재. 그리고 최이겸. 자신이 있었으니까.
“전무님.”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이겸은 김 실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책상 앞에 선 김 실장이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는다.
“미안합니다. 노크 소릴 못 들었네요.”
“아닙니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뭡니까.”
“스페인 쪽에 믿을만한 곳이 있습니다. 물론 한인 주거 지역이 아닌 데다가 다소 고립된 곳입니다. 듣기로 현지인들의 고급 휴양지라는데…. 그쪽으로 가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스페인이라…. 유럽지역은 치안이 불안한데, 정말 믿을만합니까?”
“예. 믿으셔도 됩니다. 치안도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몇 곳 더 추려주시고. 저는 일단 채우 씨와 상의해 보도록 하죠.”
“네.”
산뜻하게 대답한 김 실장은 집무실을 나가는 대신,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이겸의 눈치를 살폈다. 막 커피잔을 든 그가 두 눈을 치켜떴다.
“할 말이 남았습니까?”
“조금… 걱정이 돼서요.”
이겸은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김 실장을 올려다보았다.
“걱정이라면?”
“정채우 씨는 아직 제대로 모르고 계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 겁니까? 썩 달가워하지 않으실 텐데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곡을 찔린 것처럼 입 안이 썼다. 그래서 묻기로 했다. 채우를 위해 내린 결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실장님 말처럼, 화가 좀 난 것 같습니다. 확실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결정한 모든 것에 화가 났을지도요.”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그 모습에 김 실장이 의외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무님도 모르는 게 있으시네요. 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
“모르겠습니다.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갔고, 식사를 했고…. 아무 문제 없었어요. 그리고 신여진 씨도 무사히 수사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문제는 출국 이야기 다음인데….”
“전무님.”
김 실장은 이겸의 말을 끊었다. 어울리지 않게 주절주절 말을 이어나가던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섬세하고 약한 면이 있습니다. 제 경우 아들이 약한 면이었고요. 제가 봤을 때 정채우 씨는 혼자 힘으로 그 자리까지 오르신 분인 거 같은데…. 커리어가 무너지는 거, 버티실 수 있을까요?”
“그 말뜻은, 일이 우선이다? 자존심의 문제입니까?”
“아뇨. 좀 다른 문젭니다. 가장 믿었던 누군가에게 나의 능력을 무시당할 때. 혹은 본인이 짐이라고 여겨질 때. 견뎌내기 힘드실 겁니다.”
“무시한 게 아니라…. 걱정한 건데도요?”
“두 분은 연인… 이잖습니까. 그럼 더하죠. 남녀 사이인데. 차라리 남이면 더 나을 지도요.”
구겨졌던 이겸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김 실장은 그제야 최이겸이 오전 내내 저기압이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최이겸이 사랑 때문에 고민하게 되다니. 재밌고 안타까우며, 드물게 인간미가 느껴졌다.
그녀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그에게 꾸벅 인사한 뒤 집무실을 나갔다.
이겸은 문 닫히는 소리가 난 뒤에야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치 시끄러운 알람이 멎은 것처럼 순식간에 찾아온 고요.
책상에 양손을 모아 올린 그가 진중해진 시선으로 움켜쥔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
“맛있게 드세요.”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는 순댓국집 안. 뽀얀 국물에 부추겉절이와 새우젓으로 간을 한 채우는 공깃밥까지 한 그릇 몽땅 말았다.
워낙 뜨거운 탓에 호호 불어가며 커다란 순대를 입에 넣자, 헐레벌떡 뛰어온 이시윤이 가게로 들어선다.
좁고 남루한 식당 안, 시윤은 대번에 그녀를 발견하곤 다가와 앉았다. 묵직한 서류 가방을 내려놓은 시윤의 얼굴에 번진 미소.
“오랜만이네, 정 변?”
“밥 시켜.”
“아, 사장님! 여기 순댓국 특으로 하나요.”
음식은 주문과 거의 동시에 서빙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메뉴판엔 수육과 순댓국이 전부였다.
야무지게 수저를 움직이는 채우를 보며 피식 웃은 시윤이 가져온 서류 봉투를 내민다.
“김동희 씨의 소 취하서입니다. 정 변호사님.”
이시윤이 장난치듯 짓궂게 빙글거렸다.
“각서는?”
“그 안에 들었어.”
“아아.”
서류 봉투를 받아 대충 가방에 쑤셔 넣은 채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식사에 열중했다. 그제야 그녀의 심기가 썩 좋지 않음을 눈치챈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일 있어?”
그에 채우는 담담히 물었다.
“쓸만한 정보 없어? 소송은 어차피 취하될 거였잖아.”
“정보는 너희가 더 많이 갖고 있지 않아?”
“글쎄. 나는 항상 뭔가 예외라.”
어깨를 으쓱 올리는 그녀. 시윤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뭐야. 뭐 있구만?”
“말해 봐. 네가 아는 거.”
“뭐, 별거 없어. 정영수는 결국 증거 없이 구속 유지 결정될 거고, 판사만 배정되면 재판 시작이야. 아마 오늘쯤 윤경수의 구속 영장이 발부될 텐데, 늑장 부리는 이유는 아마 네 쪽이 더 잘 알걸?”
결국, 제자리다.
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윤이 말한 것들은 모두 아는 내용이었고, 확실히 제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최이겸이 비단 저 혼자만을 따돌린 건 아니었다는 소리지. 그렇게 생각하니 재밌게도 밥맛이 좀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시윤아.”
“응?”
커다란 깍두기를 통째로 입에 넣은 그가 우물거리며 두 눈을 치켜뜬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뭐?”
“저스티스라는 책 속에 갇힌 기분이야. 계속 그래. 넌 안 그래?”
“뭐, 책? 뜬금없이 무슨 책이야.”
“그냥… 모르겠어서. 법은 정말 정의일까?”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어색하게 헛기침한 그가 머릴 긁적이며 대꾸했다.
“아니, 뭐가 그렇게 심오해? 어차피 그 책에 쓰인 내용은 답이 없는 질문들뿐이고, 우린 적시된 법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인 거야. 악법도 법이라잖냐. 변호사가 다 그런 거지.”
“악법은 무슨. 소크라테스 골 때리는 소리하고 하고 있네.”
그에 시윤이 짐짓 단호하게 목소릴 깐다.
“내 우상이야, 인마. 어디 소크라테스 형님을.”
“됐고. 밥이나 먹어.”
“안 그래도 먹고 있어. 엄청 바빠, 바로 이동해야 해.”
그녀가 잠시 숟가락을 놓은 사이, 이시윤은 허겁지겁 식사를 마쳤다. 밥맛은 좋아진 반면 식욕이 사라졌다.
퉁퉁 불어 버린 그녀의 뚝배기를 가리키며 혀를 찬 시윤이 가방을 챙겨 일어난다.
“나 고양지원 들어갈 건데, 넌?”
“난 오늘 프리. 당분간 법원 드나들 일 없어.”
“그래? 웬일?”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코끝을 찡그리며 웃어 보인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시윤이 조만간 제대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곤 밖으로 뛰어나간다.
불어터진 순댓국을 내려다보던 채우는 조금 전 시윤이 주고 간 서류 봉투를 꺼냈다.
안에 든 건 김동희의 각서와 소 취하서 사본이었다. 각서는 안전 봉투에 따로 들어있었기에, 꺼내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안전 봉투처럼 두꺼운 세상에 꽁꽁 싸매진 남자. 그를 떠올리자 음식물을 삼킨 식도가 뜨거워졌다.
괜한 투정을 부린 걸까? 차라리 속 시원하게 서운하다는 티를 내는 게 좋았을까?
해외에 나가 있으란 말에 화가 났고, 처음부터 자신은 계획에 없었다는 것에 서운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을 수단 삼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왜 자꾸 반항심이 드는 건지. 게다가 세상 쿨한 척 강서준을 찾아가 경고까지 하고.
“나이를 덜 먹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철없는 어린애가 된 기분인 걸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입술을 잘끈 깨문 그녀의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처음엔 시윤이 무언가를 놓고 가 다시 찾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의자를 빼 앉은 건 이시윤이 아닌, 최이겸이었다. 그것도 아침에 출근한 슈트 차림 그대로.
시윤의 빈 뚝배기를 내려다보던 그가 손을 든다. 그러자 후다닥 달려온 주인아저씨가 빈 뚝배기를 치우곤 테이블을 닦았다.
“뭐예요…?”
채우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정한 자세로 냅킨을 깔고 그 위에 수저를 놓은 그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전화, 꽤 했는데.”
채우는 흠칫 놀라 가방 안에 넣어 둔 휴대 전화를 찾아 꺼냈다. 그의 말대로 정말 이겸에게 걸려온 부재중 전화 표시가 3건, 메시지 2건이 화면에 떠 있었다.
“몰랐어요. 진동으로 해놔서. 미안해요.”
“찾아냈으니 괜찮아요. 별일 없다는 것도 확인했고. 식사 다했습니까?”
“뭐, 하다 말았는데…. 순댓국 먹을 줄 알아요?”
“이번에 도전해보죠.”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주인아저씨가 내온 뚝배기를 마주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걸 보는 남자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채우는 내심 당황한 이겸의 반응을 즐기며 부추와 고명을 슬쩍 올려 주었다.
“섞어서 드시면 돼요.”
“곰탕 같은 거겠죠?”
“그렇죠. 저는 곰탕은 심심해서 별로고, 이렇게 푸짐한 게 좋아요.”
“그럼 배워둬야겠네요. 자주 와야 하니까.”
그는 단정한 자세로 식사를 시작했다. 순댓국을 마치 최고급 수프처럼 먹는 남자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지사.
턱을 괸 그녀가 물었다.
“왜 왔어요?”
“보고 싶어서.”
“집에서 보면 되잖아.”
“밖에서도 보고 싶던데요?”
그는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녀를 직시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한시도 빠짐없이 채우 씨가 보고 싶어요. 미리 말해두는 겁니다. 난 10분 뒤에도 당신이 보고 싶을 거예요.”
연인 관계엔 역시 말로는 정의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10분에 한 번꼴로, 혹은 그보다 더 잦게 저를 보고 싶어 했다는 남자의 말에 웃음이 튀어나온 걸 보면.
하지만 그녀가 웃거나 말거나, 이겸은 지극히 태연하게 뚝배기를 비워나갔다.
채우는 손톱 끝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를 관찰했다. 얄밉고 서운해서 미치겠는데, 반면 왜 당장에 끌어안아 주고 싶은 건지.
극악하리만큼 짧은 점심시간, 이 말을 하기 위해 저를 찾아온 것일까? 태연해 보였던 건 애써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낸 걸까? 밤잠도 미루고 일에 매달려 있는 남자 아니었던가?
이미 도출된 답을 읊조리는 입술이 간질거리고 발가락이 곱아든다.
순댓국집 한쪽, 커다란 가마솥에서 김이 뽀얗게 피어오른다.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와 주인이 틀어놓은 스포츠 뉴스 소리가 들려오는 가게 안.
뚝배기를 말끔하게 비운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곤 차가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네모반듯한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고개를 든 그가 채우를 보며 생긋 웃는다.
“왜 그렇게 봅니까.”
“신기해서요.”
“이런 음식 못 먹을 줄 알았어요?”
“아뇨.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한가 싶어서요.”
그는 한쪽 눈을 비스듬히 가라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최이겸 씨, 나랑 잘래요?”
순간,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진 이겸의 표정. 그 모습에 피식피식 웃어 보인 그녀가 서류 가방을 챙겨 일어나며 말했다.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나랑 자러 가요. 싫어요? 그럼 말고요.”
최이겸의 붉은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다. 한참 자리에 앉아 키득대던 그는 계산대 앞에 선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잘 먹었어요.”
그런 말을 왜 이렇게 야릇하게 하는 건지.
채우는 어깨를 한 번 파르르 떨었다. 그러자 휘파람 같은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계산을 마친 뒤, 카드를 돌려받아 순댓국집을 나선 그녀는 보닛에 기대어 서 있는 이겸을 발견하곤 헛웃음 지었다.
자러 가자는 말은 반은 농담이었고 반은 진담이었다. 너무나 태연한 그를 난감하게 만들어보고 싶어 던진 말이었건만, 어쩐지 제가 휘말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늘 채우 씨 겁니다. 마음대로 해요.”
“쳇, 그런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요. 이번 일은 최이겸 씨가 너무 앞서 나간 탓이에요. 점수 왕창 깎아 먹은 거라고요.”
운전석 손잡이를 당기자 잠금 풀어지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그 점수… 오늘 안에 회복하죠.”
그녀를 따라 차에 오른 이겸이 벨트를 채우며 피식 웃는다. 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건 그가 말했다.
“낮잠이 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오후 일정 모두 취소하세요.”
***
희미한 기계음을 내며 문이 열린다. 슬롯에 카드키를 꽂아 넣기 무섭게 그녀의 몸이 벽에 부딪혔다. 이어 입술과 입술이 짓이겨지고 단정했던 옷은 바닥을 뒹굴었다.
코끝을 스치듯 입술을 포개 정신없이 탐닉했다. 점막을 훑듯이 핥고 단단한 그의 가슴팍을 짚어 침대 위에 밀어 눕혔다.
속옷 위에 남은 건 색이 옅은 스타킹뿐.
상체를 세운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잘근 깨물었다. 그에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커다란 손이 스타킹을 벗지 않은 허벅지 위를 쓰다듬는 느낌에 절로 몸이 들썩였다.
채우는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 이겸의 벨트를 풀고 그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미 단단하게 발기해 액이 맺힌 성기가 잡혔다. 뜨겁고 묵직하며 건조한 피부가 한 손 가득 채워진다.
탁한 숨을 내쉰 그가 한숨 쉬듯 속삭였다.
“벗기고 싶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데요? 중독성 있네요.”
“찢고 싶단 말은 하지 마요. 하나밖에 없단 말이야.”
“그런 패티시는 없습니다. 채우 씨의 일그러지는 표정은 꽤 흥분되지만, 그 이상은 내가 더 곤란해서.”
다시 목을 강하게 깨문 그가 단번에 자세를 바꿨다. 그녀를 아래에 눕힌 채 바지를 완전히 벗고, 가는 다리를 어깨에 걸었다.
발가벗은 남자에 비해 아직 속옷도 제대로 벗지 않은 그녀였다.
이겸은 그녀의 빨개진 얼굴을 짓궂게 내려다보다, 곧장 팬티 위로 고개를 숙였다. 허벅지를 강하게 벌려 음부를 깨물다가 가볍게 숨을 들이켜더니, 스타킹의 솔기를 간단히 찢어버렸다.
구멍 사이로 볼록 튀어나온 살에 입 맞추며 이번엔 반대편을 찢어버리는 남자.
채우는 바동거리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웃어야 할지, 순순히 흥분을 받아들여야 할지. 찢은 건 그였지만, 어쩐지 달뜨는 건 저였다.
“귀여워요.”
그는 재미라도 들린 듯 몇 개의 구멍을 더 낸 뒤, 튀어나온 살들을 모두 깨물고 핥았다.
채우는 허리를 살짝 들었다. 아래가 저려 차라리 입고 있는 것들을 전부 벗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벗겨 줄까요?”
나른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가는 다리를 큰 손으로 쓸어올린 그가 스타킹 밴드 부분을 돌돌 말아 벗기기 시작했다.
“젖었네.”
그 말에 절로 시선이 제 속옷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손끝으로 턱을 잡아든 그가 입술을 포개며 속옷을 젖힌다.
그의 손이 닿은 후에야 제가 얼마나 흥분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젖은 틈새를 길게 문지르다 구멍으로 깊숙하게 들어왔다.
흠칫 놀란 허리가 튀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조심스럽게 내벽을 비볐다. 도톰하게 부어오른 살이 자꾸만 남자의 손가락을 움켜쥐듯 죈다. 하지만 부족했다.
채우는 그의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허벅지를 모아 비볐다. 마치 들어온 손을 잡아먹은 모양새였다.
뭉쳐진 타액을 삼키고 빨아들이며 허리를 들썩이자, 못 참겠는지 손을 뺀 그가 엉덩이를 벌려 단박에 귀두를 밀어 넣었다.
“아!”
충분히 젖은 듯했음에도 삽입과 동시에 질금질금 물이 샜다. 틈 없이 빠듯하게 맞물린 순간 찾아온 가벼운 절정.
“흐으… 너무….”
“좋은데요? 매일 해도 좋아요. 10분마다 보고 싶은 것처럼.”
채우는 탄성 어린 신음을 흘리며 가쁜 숨을 눌러 삼켰다. 그러곤 저를 내려다보며 강하게 밀어 넣는 그를 응시했다. 핏대 오른 이마와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 땀에 젖은 머리카락.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그녀는 다리를 더욱 넓게 벌렸다. 그러자 꽃잎처럼 벌어진 틈새, 불거진 클리토리스가 부딪쳐오는 자극을 이기지 못해 움찔거렸다.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운 내벽이 경련한다. 지속된 자극에 몸을 달달 떨자, 그는 더욱 강하고 빠르게 허리를 놀렸다.
아직 한낮이다. 빛 때문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무서우리만치 만족스러운 쾌감이 찾아왔다. 하얗게 타들어 간 재처럼 탈색된 절정.
채우는 빛이 고인 시트를 움켜쥐며 흐느꼈다.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뺨에 떨어진다. 이겸은 고개를 숙여 채우의 얼굴을 핥았다.
땀으로 촉촉한 살갗을 쓰다듬고 한계까지 파고들었다. 맞닿은 피부가 쓸릴 때마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어쩌면 기쁨과 슬픔, 쾌감과 고통은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 예민한 곳을 강하게 자극한 그로 인해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이어나가지 못했다.
시트를 움켜쥐었던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당겨 안았다. 평소보다 뜨거워진 체온이 겹쳐지는 순간 느껴진 건, 그가 여전히 제 곁에 있다는 안도감이었다.
***
“이거…. 담배 케이스 아니었어요?”
그녀는 독특한 무늬가 새겨진 우드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이겸이 케이스를 열어 안을 확인시켜 준다.
“지금은 콘돔 케이스죠. 담배는 끊었습니다.”
“그게 쉬워요? 그리고 이상해. 콘돔이 담배 케이스에서 나오는 거.”
키득거리며 케이스를 닫은 그녀는 라탄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호텔 방에 딸려 있는 꽤 큰 야외 테라스. 바람은 조금 차지만, 뜨거운 물에 오래도록 몸을 담가서인지 열을 식히기 좋았다.
“이상해도 항상 준비해야 하니까. 말했잖아요. 10분에 한 번꼴로 당신 생각을 한다고. 그러니 늘 준비해야죠.”
그렇게 말하곤 그가 입술을 맞대왔다. 채우는 싱글거리며 이겸의 키스를 받았다.
가운 안으로 들어온 손이 부드러운 젖가슴을 어루만지다 잘록한 허리 아래로 내려간다. 두 사람의 체중이 한곳에 쏠리며 쿠션이 더욱 내려앉았다.
“하아….”
채우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잘 만든 조각 같은 그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지는 순간을 눈동자에 담았다.
다리를 조금 벌려 주자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질구 주위를 만지작거리며 찌걱거리는 소릴 낸다.
“왜 이렇게 부드러울까요. 정채우 씨는.”
“여자는 다 부드러워요.”
“아닐 것 같은데.”
속삭인 둘은 서로의 입술을 계속해서 베어 물며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붙는가 싶더니, 혀가 비벼지고 떼어졌다가 뭉개지기를 반복한다.
바람이 불어와 젖은 머리카락 틈새로 파고들었다. 서늘함과 뜨거움이 동시에 찾아든다.
그녀의 뺨을 이로 깨물며 그가 물었다.
“강서준은 왜 만난 겁니까. 걱정됐어요?”
역시, 알고 있을 줄 알았지.
채우는 그의 가운 안으로 손을 넣어 단단한 피부를 어루만졌다.
“걱정이라기보다는 착한 사람 병이 도졌거든요. 치사해지고 싶지 않아서요.”
“치사한 건 강서준 쪽인데.”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그의 표정이 풀어진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아마 전략가 쪽 체질은 아닌가 봐요. 반칙을 못 하겠어.”
가만히 웃음 지은 그가 계속해서 그녀에게 입 맞췄다. 그 간질거리는 입맞춤에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몸을 웅크리자, 커다란 품에 갇힌 것 같은 모양이 되어버렸다.
그것조차도 사랑스럽다는 듯 꽉 끌어안아 제 위에 앉혀 버린 그.
가운 아래 꼿꼿하게 선 성기가 틈새를 비집으려 했다.
“아, 아파….”
“빨아 줄까요? 아프면.”
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꽉 끌어안고 싶었다. 그래서 틈새에 성기를 문지르며 이겸의 목덜미를 당겨 안았다.
그러자 귓가에 낮고 더운 숨이 흩어진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을 거면서, 날 해외로 보내려 했어요? 서운했어요.”
“압니다. 하지만 보고 싶은 걸 참는 게, 다치는 걸 보는 것보다 나아서 그랬어요.”
그가 고개를 든다. 채우는 이겸의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 넘겨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쩌겠어요. 서운하고 괘씸하고, 방해물이 된 것 같고. 속상한걸.”
“미안해요. 혼자 생각하고 결정해서.”
마음이 붕 뜬다. 홀로 머리 싸매고 고민했던 일이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니.
연애란 이토록 사람을 당혹스럽게 휘두른다.
그가 채우의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 맞추며 뺨을 비볐다. 이미 해는 저물었고, 이 남자는 오늘 제 것이었다.
긴 낮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켤 시간.
그녀가 속삭였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랑 있어요.”
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 서 있더라도 상대의 얼굴과 기세는 숨겨지지 않았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 아래,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윤씨가 돌아서자 모자를 벗으며 다가선 남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의료 과장에게 전해놨습니다. 오늘 움직일까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정영수 같은 작자의 혀끝에서 윗분들이 놀아나시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어차피 종신형이나 다름없을 텐데. 깔끔하게 처리하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입금은….”
두 눈을 치켜뜬 남자의 눈동자가 욕망에 번들거린다. 윤씨는 재킷 안에서 현금이 든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지난번과 같은 금액입니다. 그리고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나머지를 드리지요.”
“예예. 아이구, 감사합니다.”
입꼬릴 휘어 올린 남자는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당장에라도 봉투를 열어 금액을 세어보고 싶은 티가 역력하다.
윤씨의 눈초리가 서늘하게 벼려졌다. 남자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 언뜻 경멸의 빛이 스쳤지만, 이내 그는 자조하듯 웃으며 돌아섰다.
두툼한 봉투를 점퍼 깊숙하게 숨긴 남자는 윤씨가 어둠 속으로 완벽하게 사라진 후에야 구치소로 돌아왔다. 그러곤 막 교대하는 교도관들의 인사를 받으며 태연하게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눈치 없이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낸 뒤, 캐비닛 안에 점퍼를 구겨 넣은 남자는 의료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데요, 지금 정영수를 부르죠.”
[지금이요?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오늘내일 안에 끝내야 해요. 그게 지시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약은요.”
[용량대로 맞춰놨으니 걱정 마세요.]
남자는 전화를 끊은 뒤 딱딱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오늘, 사회악이자 쓰레기 같은 죄수 한 명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어차피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종신형을 선고받을 범죄자였다.
죄의 죽음에 죄책감 따윈 갖지 않을 것이다.
나직하게 욕설을 흘린 남자는 20인치 티브이를 틀었다. 세간을 정신 사납게 만든 뉴스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대는 그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주룩 흐른다.
***
“이 밤에 커피를 마시자고? 뭔 꿍꿍이야?”
정영수는 투덜거리며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직접 내린 커피를 내려놓은 의료 과장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차트 하나를 내보인다.
“지난번 혈액검사 결과인데, 마약 성분 검출됐어요. 이거 제출하기 전에 알려 줘야 할 거 같아서.”
그 말에 커피잔을 들던 정영수의 표정이 굳는다. 정영수는 입 대지도 않은 잔을 내려놓곤 의료 과장이 내민 차트를 받아들었다.
“이시현의 혈액에서 나온 마약이랑 같은 성분인 것 같은데. 정말 안 했어요?”
대답 대신 눈을 치켜뜨곤 빙글거리는 의료 과장의 얼굴을 노려보는 정영수. 그에 살짝 긴장한 남자가 커피잔을 재차 밀더니 양손을 모았다.
“이거 넘어가면 정영수 씨 큰일 나요. 자칫 잘못했다간 살인죄까지 더해질 텐데.”
“뭘 원하는 겁니까? 어차피 영상 넘어갔고, 그거 공개되면 끝인데.”
“그거 화질이 별로라 특정하기 어려운 거 아니었어요? 내가 듣기론 그런데.”
“화질은 무슨. 우리 호텔 카메라가 얼마나 좋은 건데요. 그래도 의외로 정보에 빠삭하네?”
친절하게 설명을 마친 정영수가 선득한 미소를 띠며 의료 과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차트를 내려놓더니 커피잔을 들어 향을 음미한다.
느리고 은근하며 시간을 끄는 듯한 행동에 의료 과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커피 안에 든 건 급성으로 죽을 정도의 치사량은 아니었다. 서서히 사지가 마비되기 시작해, 내일 오전쯤엔 침을 질질 흘리다가 광증을 보이며 숨이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10년째 제자리걸음인 대출금이 해결될 것이고, 이곳을 나가 개인 병원을 차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손에 쥐어질 터.
“얼마 받았나?”
생각에 잠겨있던 의료 과장은 고개를 들었다. 모아 쥔 손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지만, 이미 정영수는 위험을 확신했는지 화분 위로 커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졸졸 흘러내린 검은 액체가 흙에 스며들어 흔적 없이 사라진다. 남은 건 미미하게 맴도는 원두의 향기뿐.
혹, 눈치챈 걸까?
머릿속에 온갖 것들이 떠다녔지만, 의료 과장은 태연한척했다.
“아직 받은 거 없습니다. 단, 제안을 할 수는 있죠.”
“제안?”
“정영수 씨, 얼마 줄 수 있습니까?”
위악을 부리듯 미소 짓자 피식거리던 정영수가 삽시간에 표정을 바꿨다. 그러곤 단번에 테이블을 넘어와 의료 과장의 목을 졸랐다.
“커컥! 왜, 왜!”
소파 위에 짓누르며 짐승처럼 이를 드러낸 정영수. 시뻘게진 의료 과장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을 부라린 그가 협박 조로 말한다.
“어떤 새끼가 나 죽이라고 했는지 알 거 같네. 이 씨발것들, 다 뒤졌어. 그리고 당신도…. 당신 와이프가 초등학교 교사라며? 애새끼는 이제 곧 제대라고 했나? 재밌네. 쑤시기 딱 좋아. 이 개새끼가 겁도 없이 누굴!”
“오, 오해예요! 난 그냥 돈 때문에…!”
“그래서, 이중으로 뜯어내시겠다?”
“그게 아니라…! 이것 좀, 컥, 놓고!”
목 졸린 의료 과장의 말이 띄엄띄엄 끊어진다.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 목에서 손을 뗀 정영수는 테이블에 던져놓은 차트를 벅벅 찢었다. 그러곤 씩씩대며 섬뜩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잘 판단하고 행동해. 뒤지기 전에.”
의료 과장은 목을 움켜쥔 채 콜록거렸다. 입에선 침이 줄줄 샜고 폐부엔 급격하게 숨이 들어차 고통스러웠다.
손을 턴 정영수가 문을 열자, 밖을 지키던 교도관이 안쪽을 힐끔 보곤 곤봉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에 양손을 들어 올린 정영수는 고개를 저었다.
“사레들려 저럽니다. 물어봐요. 아무 짓도 안 했으니.”
***
회전문을 통과해 들어온 최이겸의 표정은 어제와 달리 지나치게 밝고 달았다. 달콤하다 못해 녹아내리는 미소로 사원들의 인사를 받은 그가 승강기에 오른다. 수행원들은 오늘 또 바뀐 상사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유일하게 태연한 김 실장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어제 미룬 회의들, 모두 오전에 잡아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건가요?”
“예. 외부 일정은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참, 기형 중공업 주총이 언제라고 했죠?”
“다음 주입니다. 도산은 막아낼 것 같습니다만, 김동희 부친의 사장직은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이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을 표했다. 기형이 무너지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 김동희가 모든 걸 잃기를 바랐다. 이제 그 고지가 눈앞이다.
그는 답지 않게 피식거리며 웃다가 입가를 문질렀다.
호텔에서 곧장 출근한 이겸은 제 몸에서 나는 그녀의 향기에 미칠 것만 같았다. 숫자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그녀를 가졌고, 함께 샤워를 했다. 녹초가 되도록 침대에서 구르고 식사는 룸서비스로 대신했다.
그가 잠시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두운 테라스에 나가 있었다. 집에서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광경일 텐데, 어쩐지 즐거워 보이던 그녀.
그 모습을 도둑처럼 훔쳐보다 끌림을 이기지 못해 또다시 다가섰다. 뒤에서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입 맞추자 간질거리는 미소로 화답하던 여자.
키스의 시작은 달콤했고 끝은 은밀했다. 그녀를 난간에 기대게 한 뒤, 가운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벌렸다. 달아오른 그녀의 안으로 밀고 들어갈 때, 작은 엉덩이가 놀라 경련했다. 꽉 죄어드는 감각에 제가 되레 미쳐 날뛰었다.
하얀 등에 잇자국을 남기고 수치를 외면한 채 테라스에서 그녀를 가졌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저를 가진 걸지도.
“전무님.”
생각에 빠져있던 이겸은 열린 문을 보며 흠칫 놀랐다. 언제 다다른 건지, 승강기 문을 연 채 대기 중인 수행원들이 그의 표정을 살핀다.
“미안합니다. 딴생각을 좀 하느라.”
이겸은 김 실장에게 태블릿을 돌려주곤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러자 뒤따르는 발소리가 묵직하게 이어진다.
“김 실장님.”
이겸은 가까이서 걷는 김 실장을 불렀다.
“예.”
“아무래도 스페인은 너무 멉니다. 국내로 다시 알아보죠.”
“국내는 위험이 클 텐데요.”
“그럼 리스크를 최소로 줄여보는 건 어떨까요.”
어울리지 않는 고집을 부려서인지, 김 실장은 아연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역시 정채우 씨가 싫다고 하셨습니까?”
웃음을 머금은 김 실장의 질문.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던 그가 고개를 튼다.
“아뇨. 내가 싫어서. 그 여자 그렇게 멀리 보내 놓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아서요.”
목소리에 묻어나는 진심에 김 실장은 많은 생각이 드는 표정으로 꾸벅 고개 숙였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예.”
그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호텔에서 곧장 출근한 저와 달리,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고 했던가.
제가 찢어버린 스타킹을 동그랗게 말아 휴지통으로 툭 던져 넣으며 눈을 흘기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또 잊어버린 건가?’
오늘도 휴대 전화를 멀리하고 있는 건지 연락은 오지 않았고, 시간은 흘렀다. 어제 하루를 통으로 그녀에게 내어준 탓에 그를 기다리는 건 끝도 없는 마라톤 회의.
그는 4차 산업 혁신안 보고 따위를 들으면서도 휴대 전화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답장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끝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점점 조바심이 난다. 평소에도 연락이 잘 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나쁜 예감이 그를 괴롭혔다.
“전무님, 잠시.”
피곤한 얼굴로 회의실에서 나온 이겸은 파랗게 질린 김 실장을 보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신여진 씨가 크게 다치셨답니다. 복부에 깊은 자상을 입어 오늘 새벽 응급실로 실려 갔답니다. 정영수 패거리에게 보복당한 것 같다고 형사님께서….”
크게 뜨인 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시리게 변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무리 정영수가 쓰레기일지라도 신여진은 건드리진 않을 거라 믿었건만, 틀렸다.
그리고 유일하게 진심으로 아끼는 듯했던 신여진을 처리하려 했다는 건, 누군가가 정영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뜻.
“병원이 어딥니까.”
“한국대학병원입니다.”
“정채우 씨는 그곳에 있는 겁니까?”
“예.”
이겸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다음 회의가 이어질 4팀 구역이었다. 당장 병원으로 향할 줄 알았는지, 김 실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멈춰 섰다.
이겸의 꽉 눌러 문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굳게 맞물려 강하게 응집된다.
“신여진 씨 병실 주위로 사람 붙여요. 개미 새끼 한 마리 출입하지 못하게 하시고, 간병인도 믿을만한 사람으로. 정채우 씨는 내가 직접 데리러 갑니다.”
이겸은 답답한 넥타이를 당겨 풀었다. 그것을 김 실장에게 넘긴 뒤, 4팀 회의실로 들어서며 단추까지 하나 풀어버린 그.
“회의 시작하죠. 최대한 간결하게, 핵심만 듣겠습니다.”
힘없이 누워 있는 엄마는 본 적이 없었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몰골이 낯설고 두렵다.
지난 새벽, 아파트 관리인의 신고로 지하 주차장에 피 흘리며 쓰러져있던 엄마가 응급실로 실려 왔다.
끔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누가, 왜, 어떠한 이유로 힘없는 여자를 무자비하게 살해하려 한 건지.
정영수가 배후일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엄마는 정영수를 사랑했다. 그 사랑의 끝이 지금 이런 상황이라면, 그 비참함을 감당할 사람은 상처 입고 누워 있는 눈앞의 여자였다.
“팔자가… 있긴 한가 봐. 대체 그 아파트는 왜 찾아갔어? 내가 그 집에서 나온 지가 언젠데….”
여진이 당한 곳은 채우가 살던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저를 찾아온 건지…. 그리고 상대는 어떻게 여진이 그곳을 찾을 줄 알고 기다린 건지.
“왜 그랬어….”
작은 혼잣말에 감겨있던 여진의 눈꺼풀이 들린다.
채우는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힘겹게 돌리는 여진.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았는지 여진의 얼굴에서 고통은 엿보이지 않았다.
“채우 왔니…? 여기 어디니.”
잔뜩 갈라진 목소릴 듣자 가슴 어딘가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추를 달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처럼 폐부가 짓눌렸다.
“병원이에요. 수술도 했고, 의사 말로는 수혈도 꽤 받았대. 그래도 문제없이 잘 됐다니까, 마음 놔요.”
여진의 미간이 구겨진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의자를 밀어내며 다가간 채우는 흘러내린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마취에서 깰 때쯤이면 몸도 떨리고 오한도 느껴지고…. 막 그럴 거래요.”
“몇 시인데, 너 여기 있어. 회사는?”
커튼 너머의 밝은 볕이 신경 쓰이는지, 와중에도 제 회사 걱정을 한다.
채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여진의 앞머릴 쓸어 넘겨 주었다.
“엄마가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딜 가.”
채우를 빤히 올려다보던 여진의 눈동자에 더해지는 습기. 사람이 아프면 약해진다더니. 그게 정말 사실이었다.
“언제는 엄마도 아니라며….”
“그건 화가 나서 그랬던 거고.”
“미안하다. 폐 안 끼치려고 했는데. 또 이런 일로 너 곤란하게 한 건 아닌지….”
“내가 왜 곤란해. 이런 건 하나도 곤란하지 않아.”
단 한 번도 살갑게 대해 본 적 없어서인지, 말이 퉁명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래놓고 아픈 사람에게 너무한 건가 싶어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러니까… 빨리 나아. 내 걱정하지 말고 엄마 몸이나 걱정해.”
“그래…. 근데 채우야.”
“응?”
“누가 그런 거라니. 범인은…. 잡았고?”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에 시선을 고정하던 여진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혹시, 얼굴 못 봤어요?”
“응.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거든. 키가 아주 컸는데…. 잘 모르겠다.”
정영수와 10년을 함께 지내며 그가 거느리는 부하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접한 여진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공격한 상대를 가늠조차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내가 경찰을 만나 볼게요. 범인에 대해 확실하게 알아보고, 내가 엄마 변호할 거야. 범인 잡아서 제대로 된 콩밥 먹일 테니까…. 차라리 이참에 푹 쉬어요. 뱉고 나니 말이 좀 이상하네….”
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여진의 손등을 감쌌다. 그러자 힘없이 쌕쌕대던 여진이 스르륵 잠든다. 아직 마취에서 제대로 깨지 못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잠든 것이었다.
다시금 조용해진 병실. 울고 싶지 않지만, 여진의 젖은 눈가를 보자 괜히 코가 시큰해졌다.
“엄마, 나랑 멀리 도망쳐서 살까? 엄마 괴롭히는 것들 없는 곳으로. 우리 돈 많잖아. 이쪽 생활 깨끗하게 정리하고 우리 이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반응이라도 하듯 여진이 희미하게 웃는다. 그러곤 ‘그래.’라고 대답까지 했다.
그 지친 음성을 듣는데 죄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저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처럼 엄마를 경멸했고 창피해했으며, 피하려고만 했다.
아무리 멸시당하고 흙물을 뒤집어써도 태연하게 웃던 엄마 때문이었다.
저를 낳은 피붙이는 그 어떤 칼날에도 상처 받지 않을 줄 알았다. 그렇게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과 비참함을 견뎌야 했을지, 알면서도 외면했다.
엄마라는 이유로. 엄마도 사람이고 여자라는 걸 간과한 채 저 혼자만 상처 받고 힘든 척 등을 돌렸다.
저와 닮은 그 외로움을 모른척했다.
턱에 맺힌 눈물이 떨어지기 전, 채우는 몸을 돌렸다. 이어 턱을 닦는 눈빛에 독기가 서린다.
힘이 풀리는 다리에 힘주어 병실 문을 열자,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쳤다.
그에 앞을 지키던 남자 둘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리고 사건 담당 형사님도 뵙고 싶고요. 부탁 좀 할게요.”
채우는 빨개진 눈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변호사님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저는 의사를 좀 만나러 다녀올게요.”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남자는 경찰이 아니었던 걸까?
채우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차림새를 살폈다. 멀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의 귀에 꽂힌 리시버를 보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최이겸이 붙인 사설 경호원이었다.
“내가 동행하죠.”
복도를 울리는 나직하고 익숙한 목소리.
최이겸을 발견한 남자가 깍듯하게 인사하곤 제자리로 돌아간다.
채우는 이겸을 피해 고갤 틀었다. 그러자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울음이 터질까 봐 복도 끝, 한낮의 도심을 응시하던 채우는 결국 그의 품을 찾아 안겼다.
“내가 왔으니까, 안심해요.”
꽉 끌어안고 다독이는 다정한 손길에 결국 눈물이 터져 버렸다. 이 품이 없었더라면 혼자 벽에 기대 눈물을 참았을 거라고 생각하자 서러움이 그녀를 짓눌렀다.
***
“정영수는 극구 부인 중입니다. 아니, 반쯤 미치려고 하던데요? 자기는 그런 명령 내린 적 없다고. 대체 누가 신여진을 건드린 거냐며… 지금 살짝 돌았어요.”
이 형사의 옆에 앉은 또 다른 남자는 이번 사건을 맡은 강 수사관이라고 했다.
이겸은 오랜만에 담배 생각이 절실해졌다.
정영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만다. 경찰은 CCTV 영상을 참고해 수사하는 중이라고 했지만, 신여진의 얼굴조차도 뭉개진 영상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철저하게 수사해 주시고, 기사 나가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그게…. 기사가 나가긴 했는데, 워낙 작게 나가서 관심 갖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은 기형 중공업 때문에 지면이 들썩이잖아요. 김동희가 대체 회삿돈을 얼마나 해 먹은 건지. 사모펀드에서 회수한 돈을 원정 도박에 사용했다는 제보까지 들어와서, 이쪽에 관심 갖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워댔다.
이겸은 둘에게 인사한 뒤, 차에서 웅크리고 잠든 채우에게 돌아왔다. 모친의 상태에 꽤 충격을 받은 건지, 그녀는 한참을 운 뒤에야 차에 올랐다.
이겸은 뒷자리에 비스듬히 기대 잠든 채우의 옆에 앉았다. 그러곤 목 뒤로 팔을 넣어 당기자, 잠에서 깬 그녀가 흠칫 놀라 멍한 눈을 깜빡인다. 그러더니 이내 안도한 듯 가슴팍에 이마를 댔다.
“어제 너무 괴롭혔습니까?”
“그런 거 같아요. 좀 적당히 해야겠어요.”
“음…. 어차피 나이 들면 정력이 떨어진다던데, 하루라도 더 젊을 때 즐기는 게 어때서요. 나중에 칭얼대도 모릅니다?”
고개를 들어 가슴을 누른 그녀가 빨갛게 부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겸은 그런 채우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왜 그렇게 봅니까? 떨리게.”
“있잖아요. 저…, 멀리 갈까 봐요. 이겸 씨가 말한 대로 스페인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그는 여전히 촉촉한 뺨을 가만히 감쌌다. 변덕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진지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던 여자가 겁먹고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잠시 몸을 숨겨준다면….
물론 처음 세웠던 계획대로 일 처리를 하겠지만, 이미 그는 정채우 없인 버티기 힘든 상황을 경험한 뒤였다.
“채우 씨.”
“엄마를 살리고 싶어요. 엄마의 잘못은 나를 낳은 거예요. 나를 낳기 위해 평범했던 삶을 버린 거고, 나 때문에 돈이 필요했고…. 날 키우려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한 것뿐이에요.”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채우의 눈에 다시금 물기가 어린다.
항상 꼿꼿하여 구부러지거나 꺾이지 않던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은 왜 이리 말랑하게 사람 마음을 갖고 노시는 건지.
“나는… 안 보내 주고 싶은데.”
그녀의 갸름한 턱을 어루만지며 속삭이자, 달싹이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태연한 척했으나 이겸은 동요하고 있었다. 부정의 감정이 내면 깊숙하게 똬리를 튼다. 하지만 그녀를 안전한 새장에 가두어 버린다면? 정채우는 정채우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칼을 어루만지던 그가 은은하게 홍조를 띤 뺨에 입 맞추곤 재차 속삭였다.
“안 보내고 싶어요. 평생.”
***
성수동, 재훈의 다이닝 옥상엔 정성껏 준비한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하지만 음식에 손대는 사람은 조금 전 열변을 토해 낸 이시윤 하나였다.
채우와 이겸, 김 실장과 신재훈까지. 전부 심각한 표정으로 음식상을 노려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자 시윤이 주위를 훑으며 입에 든 음식을 꿀꺽 삼켰다.
“초상집이야? 왜 이래요, 다들. 정채우 어머니 무사하시잖아. 그러니까 걱정 그만하고…. 최이겸 씨는 기형 중공업 먼지 되기 직전인데,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대꾸한 건 채우였다.
“말이 참 쉽네. 정영수가 본인은 극구 아니라잖아. 수사 엉망 되게 생겼어.”
“근데 내가 생각해도 그래. 너희 어머니한테 복수를 하려고 한 거면 칼을 그렇게 쓰지 않았겠지. 나도 들었는데, 기적이라기보단 영리하게 피해서 찌른 거라더라.”
“그러니까… 왜? 왜 엄마를 건드렸냐고. 왜.”
“그거야…. 첫째, 정영수의 혐의를 늘리고. 둘째, 수사에 혼선을 빚으며. 셋째, 널 건드릴 수는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그 새끼가 범인이라고 본다. 윤경수.”
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는 상황.
‘결국, 제대로 된 수사가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말없이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 이겸을 힐금 본 채우의 휴대 전화가 울린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그에 이겸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전화를 받아 갔다.
“전화 받았습니다. 정채우 씨 핸드폰입니다.”
하지만 상대는 다소 당황했는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저…. 강서준입니다. 정채우와 할 말이 있어서요. 자리에 없습니까?]
“강서준 씨?”
놀란 채우가 고개를 돌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이겸이 기다리라고 손짓한 뒤 옥상을 빠져나갔다. 반쯤 엉덩이를 들었던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잘 졸여 낸 무를 크게 잘라 입에 넣은 시윤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강서준이 누군데 네 전화를 최이겸 씨가 받아?”
“있어. 전에 일하던 회사 과장님.”
“창하?”
“응. 지금은 아니고.”
대체 강서준이 무슨 일로 제게 연락한 걸까. 해랑에서 일한다는 걸 아는 이상, 연락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이 시간에 통화할 만큼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안 되겠다. 나, 내려갔다 올게.”
고민하던 그녀가 일어나려 할 때였다. 옥상 문을 열고 들어온 이겸이 얼굴에 떠오른 마뜩잖은 기색을 애써 숨기며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강서준 씨가 할 말이 있다네요.”
잔뜩 긴장한 채 따라 올라온 강서준은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며 멋쩍게 인사했다.
“정 대…. 아니, 채우 씨. 또 보네.”
착착 정리한 두툼한 서류를 봉투에 넣고 단추에 끈을 감아 봉인했다.
이틀 밤을 지새워 만들어 낸 고소장 안엔 각종 범죄의 증거들이 가득했다.
눈이 빠지게 판례를 찾아온 미령은 채우의 손에 들린 봉투를 보며 엄지를 세웠다.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데 사무장 경일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긴 소송이 될 테니 각오하고 임하라는 뜻.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만간 한잔하자고.”
“네.”
지금껏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동료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내밀곤 파이팅을 외친다.
신여진이 상해를 입었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세상에 크게 알려지진 않았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은 결국 법조계에까지 흘러들어 왔다.
채우는 한껏 연민하는 동료들을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승강기를 타고 1층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뒤따른다.
이겸이 붙인 경호원은 한시도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기형 중공업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 하는 최이겸 대신이었다.
남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서초 법원에 도착한 채우를 기다리는 건, 오늘따라 한껏 힘을 준 이시윤이었다.
“안녕, 정 변호사.”
산뜻하게 인사하는 모습에 피식 웃은 그녀는 들고 온 소장 봉투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틀 밤을 꼬박 지새웠어. 이거 제출하자마자 집에 가서 뻗을 거야.”
“그래도 화장은 좀 했는데?”
“다크서클이 워낙 심해서.”
지난번보다 꽤 편해진 듯한 채우의 표정. 그제야 시윤도 어깨에 힘을 풀곤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내 고소장. 우리 형 죽인 놈, 이제 족쳐야지.”
정영수로 시작해 윤경수까지. 결말에 이르는 길은 험난했다. 하지만 이틀 전, 성수동을 찾아온 강서준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지름길이 생겨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봤다고. 너 어디 사는지 알고 있었어. 나한테 충고하고 간 거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갔는데…. 내가 봤어.’
‘엄마를 찌른 사람을 봤단 거예요? 아니면 도망치는걸?’
‘둘 다.’
‘어떻게….’
‘하필 신여진 씨가 내 차 옆에 차를 댔어. 근데 내리자마자 반대편에서 온 남자가 그대로 신여진 씨를 끌어다 차에 태우더라. 그 차에서 당한 거야.’
‘마스크에 모자까지 썼다던데, 어떻게 알아봤어요? 어떻게 알아봐? 면식범이에요?’
제 질문에 강서준은 최이겸의 눈치를 보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곤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게…. 나도 모르게 따라갔어. 신고부터 해야 했는데…. 미안하다.’
‘그러니까…! 어, 어떻게요!’
‘차 끌고 따라갔더니 그 새끼가 내 오피스텔로 들어가더라. 지하 주차장에 차 대고 내리는데, 1년 전 허명재랑 같이 만났던 그 남자였어. 윤경수인가 뭔가 하는….’
채우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시윤은 소리를 질렀다. 이어 이겸의 지시를 받은 김 실장이 1층으로 내려가 건물을 빠져나갔다.
강서준은 두려움에 떨며 파일을 전송했다. 그것은 윤씨의 차량이 이동하는 내내 찍은 것으로,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 낸 촬영물이었다.
거기에 더해 선명한 블랙박스 화면까지.
‘그 남자, 분명 날 봤을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숨으려 하지 않더라. 무슨 자신감인지, 소름이 쫙 돋았어. 본능적으로 알겠더라고. 네가 왜 나한테 경고했는지…. 고맙고 미안하다.’
증인이 되어주겠다고 다짐한 서준은 최이겸에게도 허리를 깊게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이겸은 그저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을 뿐, 마치 일면식 없는 사람처럼 강서준을 보냈다.
나름의 죄책감인지 건네받은 돈 한 푼을 쓰지 못한 강서준. 권력에 휩쓸려 상승 기류를 타려다가 실패한 법조인의 양심 고백이었다.
물론 강서준이 뜻한 바를 이루었다면 제 편이 되어주진 않았을 것이다. 의도를 곡해하고 싶지 않지만, 복잡한 일들을 겪을수록 사람을 믿을 수 없어진다.
“가자.”
법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둘에게로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선다. 기자들이었다. 최이서의 법률 대리인이란 걸 알아본 이들이 관심을 갖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 채우는 걸음을 빨리했다.
검색대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가 발견한 건 허명재 변호사였다.
사람들을 잔뜩 거느린 그가 근엄한 표정으로 채우를 노려보며 침묵의 압박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시선을 외면한 채우는 피식 웃으며 승강기에 올랐다.
“어이, 정채우 변호사!”
분 오른 허명재의 고함이 법원 복도를 쩌렁쩌렁 울린다. 그에 너도나도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채우는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승강기 문을 닫았다.
허명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이 판에서 끌어내리려 할 것이다. 이후 최이겸, 이시윤과 관련된 모든 걸 알아내겠지.
어떠한 징계를 받는다 해도 상관없다. 변호사 협회의 압박에 굴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게 바로 믿는 구석이라고 생각하자 세상이 만만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서류 봉투를 움켜쥔 손이 조금 떨렸다.
***
“사과는 못 먹으니까 주스로 가져왔어요.”
여진은 유난히 사과를 좋아했다. 물론, 아주 오래전 기억이 그렇게 말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여진을 꼭 붙잡고 시장을 거닐다, 아주 새빨간 홍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빨강이 얼마나 예쁜 색인지 처음 알았던 순간. 하지만 시선을 빼앗긴 이유는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색이 예뻐서였다.
제가 사과 앞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자, 엄마는 두 알에 만 원이나 하던 그것을 사서 깎아 주었다.
만 원.
당시엔 너무도 큰 금액이었다.
그럼 사과를 좋아했던 건 저였을까, 엄마였을까.
“벌써 사과 철이네. 넌 잠 좀 자는 거야? 얼굴빛이 영 안 좋아.”
이제 제법 몸을 일으켜 앉기도 하지만, 음식물을 제대로 섭취하진 못했다. 상태는 본인이 더 안 좋으면서 끝끝내 자식 걱정을 한다.
“요즘 소송이 좀 많아서 그래. 괜찮아요. 아, 그리고…. 범인 잡힐 거 같아. 증인이 나타났거든.”
“…그래? 누구니. 혹시, 영수 씨가 보낸 애들이니?”
여진의 갈색 눈동자가 티 나게 흔들렸다. 궁금해하면서도 답을 듣기 두려운 눈치였다.
채우는 사과 주스를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정영수한테 뒤집어씌우려던 인물. 엄마가 아저씨한테 중요한 사람이긴 한가 봐.”
“…그래?”
“그래도 정영수는 쓰레기야, 엄마. 바뀌는 거 없어. 더는 미련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지.”
주스가 든 컵을 만지작거리는 여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증인이 나타나 윤씨는 용의 선상에 올랐고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리고 최호 회장의 별장 지하에서 발견된 범죄에 사용된 차량. 이어 나온 혈흔 반응과 여진의 DNA까지, 모든 증거가 윤경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윤경수가 긴급 체포된 지 일주일. 윤씨는 여전히 취조실에 있었지만, 그 어떤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답답해 죽겠다던 이 형사의 투덜거림이 떠올랐다.
“자, 그럼 난 이제 가야지.”
“그래, 조심히 가.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응. 알겠어요.”
여진이 좋아하는 드라마를 틀어 준 뒤, 간병인과 교대한 채우는 이겸과 통화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야근 당첨인데, 밥 먹었습니까?]
“아직이요. 사과 한 알 먹었어요. 괜찮으면 도시락 좀 사 갈까요?”
[그럼 회사로 와요. 같이 퇴근하죠. 기다릴게요.]
“알았어요. 기다려요. 엄청 맛있는 거로 사 갈게요.”
[맛있는 거… 기대해도 됩니까?]
장난기가 묻어나는 짓궂은 말투. 그녀는 웃음을 꾹 참으며 전화를 끊은 후,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경호원을 찾아 로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담배라도 태우고 있는 건지.
남자가 차를 세운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그녀의 앞에 낯선 세단 한 대가 멈춰 선다.
채우는 놀란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굳었다.
“누구….”
인상을 쓰며 선팅된 창문을 노려보자, 차창이 열리고 정면을 응시하는 최 회장이 나타났다.
“초면인가, 우리.”
“안녕하세요. 초면입니다.”
서늘하게 코웃음 친 최 회장이 그제야 채우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위아래로 훑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제 옆자릴 두드린다.
“여기 타지. 보는 눈도 많은데.”
채우는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얼굴을 살핀 뒤,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러자 멀리 차에 있던 경호원이 놀라 다가오는 게 보인다.
“죄송합니다만, 선약이 있어서요. 말씀 나누고 싶으시면 미리 연락을 주고 찾아오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변호사라 시간이 돈이거든요.”
채우는 경호원에게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최호가 경호원의 존재를 확인하곤 험악한 욕설을 입에 올렸다.
“버러지 같은 새끼가. 자식도 아니지, 그건. 정 변호사. 우리 최 사장 법률 대리인인 만큼, 이 사건 철저하게 파헤쳐. 아주 놀랍네. 놀라워. 내 밑에서 30년이나 있던 놈이 살인이나 저지르고 다니는 범죄자였을 줄은.”
거짓말.
실소가 나왔지만, 꾹 참았다. 이런 식으로 먹이 사슬 꼭대기에 오른 최호다. 게다가 그는 지금 제 배에 칼을 찔러 넣고도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 이만.”
“자네…. 목숨 아까운 줄 알고 살아. 이겸이는 내가 잘 알아. 내 아들이니까. 그리고 난 금쪽같은 내 아들 너 같은 거한테 보내 줄 생각도 없고.”
이게 바로 엄마가 받아 온 경멸의 눈빛 같은 건가?
저를 쓰레기 보듯 훑는 최호의 시선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자존심이 상했다.
너 같은 거.
금쪽같은 내 아들.
‘그게 다 뭔데.’
채우는 막 올라가기 시작한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반쯤 열린 창밖으로 눈을 내보인 최호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란 듯 노려본다.
“…회장님은 금쪽같은 아드님을 위해 뭐든 해 주실 수 있으세요?”
“돈이라도 달라는 거야? 전에 받은 게 부족했어?”
“아드님들이 그렇게 금쪽같아서, 손을 망가트리거나 연인을 죽이라고 지시하신 겁니까? 하지만 이번엔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 금쪽같은 아드님들이 다 제 편이라.”
“어이.”
“어이 아니고, 정채우 변호삽니다. 시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분이라 봐 드리고 싶지만, 아드님들이 회장님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정에 이끌리기보단 법대로 하려 합니다. 조만간 법정에서 뵙죠.”
“야!”
최 회장의 고함이 차량 밖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난처해하던 경호원이 다가와 안위부터 살핀다.
“최 회장이 접근했습니다, 전무님.”
혹, 이겸과 통화 중이었던 걸까?
채우는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날 선 이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남자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곤 최 회장의 차를 죽일 듯 노려보며 그녀를 뒷좌석에 태웠다.
“도시락은 됐으니 회사로 오시랍니다. 27층까지 모시겠습니다.”
“이겸 씨한테 말하지 말지 그랬어요. 제 선에서 끝낼 수 있는데.”
“안됩니다. 회장님의 접근은 무조건 막으라고 하셨습니다.”
걱정도 참 많지.
채우는 차가 출발한 뒤에야 떨리는 손을 감싸 쥐었다.
실은 최호와 대거리하는 내내 두려움을 감춰야 했다. 식은땀이 흘러 등이 푹 젖을 만큼 긴장한 탓에, 제가 무슨 소릴 했는지도 어렴풋했다.
태풍의 중심에 서 있는 기분. 머릿속은 미친 듯이 복잡했지만, 되레 태도는 침착해져 간달까? 엉망이다.
병원 앞을 벗어난 차가 로터리를 돌아 반대편 차선에 합류할 때였다.
“어? 어어어!”
운전대를 잡은 남자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대각선에서 달려온 차가 그대로 그녀의 차로 돌진했다. 채우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충돌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바라보았다.
쾅!
엄청난 충격과 함께 차량이 밀려나고 몸이 앞으로 튕긴다. 앞좌석 시트에 몸을 부딪친 뒤에야 터진 에어백.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통증이 이는 가슴을 움켜쥔 그녀가 뒷좌석 시트에 스르륵 무너졌다.
이어 문이 열리고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를 끌어냈다.
하던 일을 멈춘 이겸은 마른 입가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 통화를 마쳤으니, 30분 이내에 도착할 가능성이 컸다.
일을 좀 더 해볼까 했지만, 채우가 온다고 생각하자 일이 손에 안 잡혔다. 그는 아직 데스크에 있을 김 실장을 퇴근시키기로 했다.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테니까.
기분 좋은 콧노래까지 속으로 흥얼거리며 집무실 문을 열 때였다. 창백한 낯빛의 김 실장이 막 전화를 끊으며 자릴 박찼다.
항상 냉정하며 어지간한 기업 간부보다 배포가 큰 여자가 김인경이다. 여자의 잠재력을 알아본 건 신의 한 수였고, 했기에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게 도왔다.
그런 김 실장이 저 정도의 패닉 상태에 빠진다는 건,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든지….
“사고가 났답니다.”
제게 몹쓸 말을 해야 할 때뿐이다.
“전무님, 사고가 났습니다. 정채우 씨가 사라졌고요.”
***
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경찰관과 구급 대원들은 사방에서 나타난 수상한 남자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트럭 운전기사는 졸음운전을 주장했으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게다가 이곳은 고속도로도, 한적하여 잠이 쏟아질 만큼 조용한 곳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리시버를 낀 남자들은 마치 VIP가 사라지기라도 한 듯 사색이 되어 현장을 뛰어다녔다.
“뒷좌석에 분명 여성분이 타고 계셨을 겁니다.”
“없었다니까 그러네요. 보세요. 정말 없다니까요?”
“아니라고 분명 말했습니다!”
“운전하신 분이 의식이 없으셔서… 일단 진정하시고. 차주와는 어떤 관계이신데 이러십니까?”
“동료입니다, 동료!”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며 반파된 차를 계속해 뒤졌다. 경찰들의 만류에도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업무방해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하는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타이어 짓치는 소릴 내며 멈춰 선 세단.
문을 열고 튀어나온 남자는 최이겸이었다. 그는 여전히 수습 중인 현장을 보며 서슬 퍼런 눈빛을 했다.
그에 한숨 쉰 경찰이 다가서는 이겸을 막아섰다.
“그쪽은 또 누구십니까. 관계자세요?”
경찰의 얼굴로 시선을 옮긴 이겸이 흥분을 누르며 말했다.
“창하 그룹 전무 최이겸입니다. 이 차의 주인이기도 하고요. 이 안에 여성분이 타고 있었습니다만.”
“하아, 또 여자? 아니라니까요? 없어요, 없어. 뭘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은데요.”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이름 정채우, 실종 신고해 주시죠. 그리고 트럭 운전사는 어디 있습니까.”
부탁이 아니라 압박에 가까운 말에 경찰은 뒤를 슬쩍 가리켰다. 트럭 운전사는 입술을 깨물어 낸 상처 외엔 멀쩡했다.
이겸이 다가가려 하자 경찰이 앞을 막는다.
“신분증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다들 여성분이 계셨다고 하는데… 블랙박스나 CCTV를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차에는 운전자 외엔 아무도 없었어요.”
더는 실랑이할 시간이 없었다. 뒤늦게 등장한 김 실장이 그를 대신해 경찰을 상대했고, 그사이 이겸은 트럭 기사에게 다가갔다.
멀리서부터 그를 알아본 남자의 표정이 굳는다. 겁에 질리진 않았지만,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저, 저 좀 빨리 병원으로….”
트럭 기사가 구급 대원을 재촉했다.
“나 아파 죽겠어요. 그러니까 병원으로 갑시다. 예?”
“원하시는 병원으로 이동할게요. 상태가 괜찮으신 거 같으니, 댁이랑 가까운 곳에서 치료받으시는 게 나을 거예요.”
“예예, 그러니까 빨리….”
말을 이어나가던 트럭 운전기사는 길게 드리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없어 더욱 두려운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이겸은 그런 남자의 불안을 읽어내곤 주머니 안에 꽂아 넣은 손을 말아 쥐었다.
“뭐, 뭡니까…?”
“얼마 받았습니까.”
“…예?”
“금액에 관해 묻는 겁니다. 얼마 받았습니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목을 졸라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트럭 기사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마구 저었다.
“모, 모모, 모르는 일이에요. 뭐라는 거야, 이 사람이!”
되레 소리를 버럭 지른 남자가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들썩일 때였다. 최이겸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곤 상체를 기울여 남자의 얼굴 바로 앞에서 우아하게 입술을 열었다.
“내가 뭐라는 거냐면….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여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트럭 기사는 황망히 입을 벌렸다. 특유의 위압감에 숨이 막혔지만, 에워싼 사람들로 인해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졸음운전을 했다든지, 실수로 핸들을 잘못 꺾었다든지 하는…. 미친 소리 지껄이지 말고, 말해요. 누구에게 얼마 받았습니다. 내가 그 배로 줄 수 있어요. 죽여 버리는 대신에.”
이겸의 목소린 사이코 새끼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음험하며 선득했다.
“지, 진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니까! 경찰 아저씨! 이봐요!”
끝끝내 부정하는 남자를 차갑게 응시하던 이겸이 피식 웃으며 상체를 세웠다.
두 배라는 말에도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충성스러운 모습이 누군가를 닮았다. 분노가 들어찬 가슴이 답답해 폭력적인 충동이 솟았다.
경호원들에게 눈짓한 그는 사고 현장을 벗어나며 재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밥 달라고?]
“아니. 한국병원 로터리 근처 CCTV 자료 전부 찾아 줘. 사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부 다.”
[뭐?]
“지금 가.”
황당해하는 재훈에게 사정 설명 따위를 할 여유가 없었다. CCTV 확인이 끝나면 무슨 일인지 직접 알게 될 터.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녀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이겸은 차에 올랐다. 그러곤 거칠게 핸들을 꺾으며 바닥을 짓쳤다.
***
멍하니 눈만 깜빡이며 낯선 풍경을 담았다. 움직이고 싶지만 쉽지 않았고, 실은 머릿속도 엉망이었다.
사고가 나던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으나 충격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채우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정리해 보려 애썼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병원이 아니었다. 아이보리색 갓이 씌워진 테이블 램프의 노란 빛이 그녀가 누운 침대 주변을 에워쌌다.
침대. 그래, 침대다.
병원 침대가 아닌, 고급 원단으로 마감된 침대.
“저기요….”
채우는 저를 끌어내리던 우악스러운 손길을 기억해내곤 미간을 찌푸렸다. 현실감이 돌아오며 통증 또한 강해져 갔다.
‘왼쪽 어깨와 등 쪽을 다친 건가?’
가슴 앞도 뻐근하니 숨쉬기가 힘들다. 그래도 어디가 부러지거나 피를 흘린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팔에는 링거까지 꽂힌 상황.
두려운 마음에 채우는 다급히 링거를 빼냈다. 거칠게 뽑아낸 탓에 팔꿈치 안쪽 살이 뜯겨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아!”
나이트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티슈로 다급히 상처를 누른 그녀는 패닉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와 테이블, 작은 반창과 거대한 피아노를 제외하곤 정체 모를 그림 몇 점만이 전부인 곳.
채우는 욱신거리는 통증도 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나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스로 창문 가까이 걸어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어느 정원의 바닥이었다. 한마디로 여긴 반지하. 정원이 딸린 건물의 지하라는 뜻이다.
자신이 대체 왜 이런 곳에 와있는지, 사고는 어떻게 된 건지 상황 정리를 할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쟁반에 물컵을 챙겨 들어온 중년 여자가 놀라 멈춰 선다.
“일어나셨네요?”
“어디예요, 여기.”
“그게…. 저는 몰라요. 이거 드세요. 그리고 누워 계시지. 많이 다치셨던데….”
“어디냐고요.”
채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여자의 얼굴에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부림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할 줄 모르겠단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 여자는 물컵을 내려놓곤 후다닥 물러났다.
“저기요! 아주머니!”
“나는 몰라요! 나는 그냥, 아가씨가 깨어나는지 잘 보라고만… 여기서 나가시면 안 돼요. 저 죽어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좀 바빠서….”
그렇게 말한 여자가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막아보려 했으나 아픈 몸은 제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앓는 소릴 삼키며 간신히 다가선 문밖에서 들려온 자물쇠 소리.
“하…, 뭐야. 감금이야?”
주먹으로 나무 문을 몇 번 두드린 그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실은 너무 아팠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게 꿈일 것도 같았다.
어딘가에 갇혔다는 두려움과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몸이 벌벌 떨린다.
한참을 주저앉아있던 채우는 벽을 짚으며 일어났다. 어깨 쪽의 감각이 점점 무뎌진다. 좋지 않은 징조.
하지만 이곳에 제 편은 없을 것이다. 소리 질러 봤자 밖으로 흘러나갈 리도 없겠지.
채우는 숨을 고르며 커다란 피아노 앞에 섰다. 제가 가장 잘 하는 건 결과 도출과 합리화.
이겸의 집에 있던 것과 같은 브랜드란 걸 알아본 그녀는 피아노 표면을 어루만지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다시 주저앉았다.
“…있다.”
피아노 아래 서툴게 각인된 익숙한 이름.
‘최이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여긴 최 회장의 거처. 이겸의 본가였다.
제게 동승을 제안했던 최 회장의 모습과 사고 당시의 장면이 겹쳐지고, 그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있던 그녀는 여자가 두고 간 물컵으로 시선을 옮겼다.
매끄러운 유리잔 표면이 램프 빛을 받아 반짝인다.
***
이상하게 목이 말라 잠에서 깬 최이서는 부스스한 머릴 긁적이며 1층으로 내려왔다.
요즘엔 수면제가 없어도 곧잘 잠들었고, 숙면을 취하는 날도 있었다. 그 이유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어쩐지 가슴속이 개운하기도 했다.
막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돌아서는데, 지하실 문을 열고 허겁지겁 뛰어나오는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는 분명 집을 나갔던 도우미였다.
“뭡니까.”
최이서가 서 있는 걸 몰랐는지, 조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트렸다.
그에 최이서의 이맛살이 더욱 찌푸려진다. 그는 여자를 위아래로 훑으며 쟁반을 주워 들었다.
“뭐냐고요, 이 시간에. 쟁반까지 들고 창고는 왜 갔어요?”
“아, 그게…. 와인을 좀 가져다 두려고.”
“집에서 나간 거 아니었습니까? 내 돈까지 받아먹고 다시 기어들어 온 거예요?”
“아니, 아니에요. 윤경수 실장이 찾아와서 남편한테 알린다고…. 저, 변호사도 찾아가지 않았어요. 그냥 묻으려고 했는데….”
“협박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네….”
여자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신고할 생각은 왜 안 했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았다. 신고해봤자 최 회장이 곤란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되레 여자의 가정과 삶이 모두 박살 났겠지.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보라고 말한 최이서는 다 마신 물컵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여자는 주방을 서성이며 괜히 행주를 빨고 쓰레기통을 들췄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 태연한 척하듯이.
2층으로 올라가려던 최이서는 여자가 나온 지하실 방향을 노려보았다.
“와인 가져다 놓으셨다고요?”
“예? 예.”
아직 아버지가 귀가하지도 않으셨는데, 와인을 가져다 놓으려 다녀왔다?
이상했다.
‘혹시 모르지, 영화에서처럼 지하에 제 남편을 숨겨 둔 괴이한 여자일지도.’
아니란 걸 알면서도, 최이서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따라 집안 분위기가 묘하게 들떠있었다. 평소 상주하는 아버지의 수족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더욱 큰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와인 한잔하게, 간단히 먹을 것 좀 챙겨 줘요. 허기가 지네.”
“네?”
“와인 한잔한다고.”
여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멍하니 행주를 움켜쥐었다. 그에 확신이 든 최이서는 지하의 불을 모조리 켜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곤 마호가니 색의 나무계단을 지나 아버지가 공들여 만든 와인 창고 앞에 섰다.
지하라고는 하지만, 마치 잘 꾸며진 별채처럼 아늑한 곳.
와인이 가득한 선반 장 사이를 누비던 그는 화목 난로 옆의 창고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끼기긱….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괴이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괴한 소리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른다.
최이서가 기묘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계단 위에서 들려온 발소리가 주의를 환기했다. 지하실로 내려온 남자는 윤경수와 함께 최 회장의 곁을 지키는 수족 중 한 명으로,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회장님 오셨어요.”
남자의 말에 최이서는 여전히 피아노 소리가 나는 창고를 가리켰다.
“저거 누구야.”
하지만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방향을 틀었다. 에스코트하듯 계단을 가리키는 건방진 태도에 최이서가 실소했다.
“누구냐고.”
“처리해야 할 사람이 좀 있어서요.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고….”
“미친놈처럼 피아노를 치는데?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러게요. 정말 미쳤나 본데요.”
감정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미소에 최이서는 창고 문을 한 번 노려보곤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반이 잘려 나간 귀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건 아니지만,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비자금을 들고 튀었던 놈, 검사와 붙어먹고 내부 정보를 흘린 놈, 회장의 뒷조사를 하다가 엄한 걸 건드린 놈….
그들은 요란하게 끌려와 다음날이면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를 두려워했고 직시하느니 돌아섰다.
반면 동생인 최이겸은 달랐다. 그놈의 세상에 아버지란 존재는 처음부터 자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개념이며, 주어진 부를 영위하게 도울 도구 정도?
천재란 말이 무색하게 제 감정 정의엔 영 소질 없던 동생은 피아노를 그만둔 이후, 180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는 최이겸의 세상에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못했다.
자식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는 아비라니. 이토록 한심할 수 있을까?
“이 시간에 무슨 와인을 마시겠다고.”
거실에 다다르자 재킷을 벗으며 혀를 찬 최호가 한심하다는 듯 최이서를 돌아본다. 최호는 재킷을 조씨에게 던지듯 내밀곤 푹신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어 내리는 모습을 보는데, 어째서 하찮은 건달의 모습이 겹쳐지는 건지.
신기한 일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와인은 핑계고. 아래, 뭡니까.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깬 거예요.”
“아아, 저거? 신경 꺼. 그건 됐고… 좀 앉아 봐.”
최이서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반항기가 느껴지는 아들의 태도에 최 회장의 표정이 굳는다.
“앉아.”
“무슨 일인데요. 회사에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특별히 보고받은 건 없는데요.’라고 말을 덧붙이는 최이서.
최호는 술을 가져오라 한 뒤, 맞은편에 앉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네 동생 놈이 회사를 말아먹으려 작정했어. 감히 날 끌어내리려고 두바이 사업권을 가져가? 그것도 모자라 해외펀드에 계열사를 네 개나 팔아넘겼어! 넌 사장이라는 놈이 대체 뭐 한 거야!”
이서는 실소가 나오려는 걸 참았다.
최이겸은 몇 년간 티 나지 않는 계열사들을 차례차례 흡수했다. 그땐 보잘것없는 신생 계열사나 마찬가지였다. 상장조차 무의미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모래폭풍을 일으킬 거라고, 두고 보라며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말마따나, 기다렸다는 듯 계열사의 주가가 폭등했다.
“모르셨어요? 보고 못 받으셨나 봐요?”
“뭐?”
“요즘 애들이 이런 말을 씁니다. 고인물이라나 뭐라나. 뭐, 여러 의미가 있긴 하지만…. 고인 물은 썩어요, 아버지.”
최 회장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아들 둘이 똘똘 뭉쳐 뒷공작을 펼쳤다는 것에 몸이 떨리도록 분노했다.
조 단위의 손실을 두 눈으로 확인한 오늘, 그 분노는 극에 달했다.
“네놈들이…! 믿고 회사 일 맡겨 뒀더니, 이게 무슨 짓이야!”
“제가 볼 땐, 최 전무가 회사를 더 키울 것 같은데요. 이제 그만하고 휠체어 타시죠?”
“뭐?”
“윤씨까지 구속된 마당에…. 못 막아요. 이미 둑이 터졌다는 거예요, 아버지…. 저는 이겸이랑 달라서 이런 경고라도 해드리는 겁니다.”
최호의 지시로 윤씨가 이시현을 죽였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이서는 최 회장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삐뚤어진 부성애로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연자약한 아버지를 경멸했다.
그놈의 핏줄이 뭔지.
최이서는 갈리려는 이를 악물었다.
“네놈들 뜻 대론 안 돼…!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다! 내 그렇게 두지 않아!”
부들부들 떨며 고함친 최호는 조씨가 가져온 술병을 내던졌다.
최이서의 곁을 스쳐 벽에 부딪친 술병이 산산이 조각난다. 벌꿀 색 액체의 싸한 향기가 훅 번졌다.
“진정하고 한잔하세요. 푹 주무시는 데 술이 좋잖아요.”
최이서는 태연히 일어났다. 그러곤 지하로 향하는 문을 노려보며 계단을 올랐다.
어쩐지 저 안에 누가 있는지 알 것 같다.
아버지가 쥐고 흔들려는 최이겸의 최대 약점. 음악을 잃은 최이겸을 자극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정채우 뿐이니까.
하지만 모른척하기로 했다.
당장은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이 일을 조심스럽게 동생에게 알려주면 될 터였다.
걸음은 느긋했으나, 마음이 급히 요동친다.
***
“갔나…?”
분명 최이서였다. 어떻게든 제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되는 대로 피아노를 두드렸다. 연주가 아니라 소리를 내려 애썼다는 게 정확하다.
하지만 기척은 이내 사라졌고, 두려운 정적이 찾아왔다.
채우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재차 감싸 쥐었다. 입고 있던 셔츠를 반쯤 뜯어 둘둘 말아 움켜쥐었지만, 매끈하지 않은 표면 탓에 손바닥 곳곳이 피범벅이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과연 그들이 고작 유리 조각을 무서워하기라도 할까?
망연자실한 그녀가 쑤시는 몸을 침대 끝에 걸칠 때였다. 요란한 발소리가 나더니 느릿하고 근엄한 소리가 이어졌다.
채우는 긴장감에 몸을 굳히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곤 커다란 유리 조각을 문 방향으로 든 채 눈을 부릅떴다.
이어 자물쇠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수행원들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최호였다.
“어허, 그런 걸 들고 뭐 하는 게야. 천박하게.”
혀를 차는 최호를 죽일 듯 노려보며 채우는 수행원들의 얼굴을 훑었다.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왜 회장님이 여기 계신지. 뭐 하는 짓인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짓?”
“이게 짓이 아니면 뭔데요. 납치, 감금, 폭행입니다.”
“시끄럽고. 앉아, 얘기나 하게. 그러게 내가 타라고 할 때 얌전히 탔으면 이런 일 없잖아.”
최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를 가둔 창고는 남자 다섯이 들어오긴 좁았다.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은 최호가 채우를 지긋이 훑으며 연기를 흘린다.
“싸구려 신파를 찍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씩이나 돼서 뭐 하는 짓이야. 뭘 원해서 내 뒤를 캐. 이겸이가 시켰나?”
싸구려 신파를 찍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채우는 겨눈 유리 조각을 회수하지 않았다. 위협하듯 휘두르며 다가오려는 수행원들을 막았다.
“당장 풀어 주세요. 안 그러면 아까 말한 대로 납치, 감금, 폭행으로 고소할 겁니다.”
“고소? 뭐, 하고 싶으면 해. 아니지. 할 수 있다면, 이겠지. 자네… 자꾸 나 시험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서 진지하게 듣지그래.”
“말씀하세요. 듣고 있습니다.”
“이겸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말해 봐.”
황당한 질문이자 어처구니없는 물음이었다.
그에 채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최이겸 씨가 무슨 짓을 하다뇨.”
“그놈이 지금 나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거 알고 있어. 근데 그게 실현 가능하다고 보나? 어이, 정 변호사. 나를 치면 이겸이도 같이 죽어. 그리고 몇만 명의 직원들도 하루아침에 나앉고 말아. 내가 왜 이런 짓거리까지 해가면서 자릴 지키려 하는지, 정말 모르나?”
돈 때문이겠지.
권력과 돈.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을 위해서.
채우가 피식대며 대꾸를 하지 않자, 자존심에 금이 간 최호가 이를 드러냈다.
“아들놈이 겁도 없이 날뛰는데, 어떤 부모가 손 놓고 있어! 안 그래?”
“놓으시죠, 그냥.”
“허, 입만 살아선. 나는 못하네. 나는 내 새끼를 말려야겠어. 이건 자살 테러나 마찬가지야!”
소리치는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채우는 반박하지 못했다. 제가 생각해도 최이겸의 계획은 무모하고 위험했으니까. 완벽한 승자는 없는 치킨게임.
얼굴을 붉히며 씩씩대던 최호가 숨을 고르곤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니 며칠만 얌전히 있어. 그놈은 아쉬운 것도, 원하는 것도 없거든. 어떤 협박을 해도 통하질 않아. 근데 넌 좀 다를 거 같네. 넌… 좀 다를 거 같아.”
마치 최면을 걸듯 중얼거린 최호가 일어났다. 그러곤 턱짓하자, 얌전히 대기 중이던 수행원 셋이 달려들어 채우의 양팔을 잡았다. 갑작스럽게 몸을 포박 당한 그녀가 악을 썼다.
“놔! 당장 놔! 당신들 싹 다 집어넣어 버리기 전에!”
온 힘을 다해 바동거렸지만, 돌아온 건 날카로운 통증뿐이었다. 한쪽 귀의 반이 없는 남자가 무감각한 표정으로 유리 조각을 뺏어 그녀의 뺨을 그었다.
그 선뜩한 통증과 뜨끈한 느낌에 채우는 할 말을 잃었다. 유리 조각 쥔 채 뒷짐 진 남자가 채우를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다음엔 좀 더 깊을 거요.”
조선족이다. 말투에서 드러나는 남자의 정체에 온몸의 피가 발끝을 타고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몸 사리기요.”
옭아매던 힘이 사라지자 몸이 바닥을 향해 푹 꺼진다.
털썩 주저앉은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더니, 금세 눈물이 고였다. 채우는 상처 난 뺨을 손등으로 훔쳤다.
피다.
이토록 무력하게 짓이겨진 적이 있을까?
두려움을 넘어선 무언가가 강렬하게 그녀를 흔들었다. 그가 보고 싶었고,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릎을 세워 몸을 웅크린 그녀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
이겸은 휴대 전화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쩌면 이대로 휴대 전화가 으스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지하야. 어떻게 할까. 당장 와야 할 것 같은데, 이겸아.]
최이서의 목소리가 귓전을 떠다닌다.
이겸의 눈앞엔 재훈이 찾아낸 화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모자를 유난히 깊게 눌러쓴 남자가 기절한 채우를 끌어내리는 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이었다.
“최이서….”
그 모습에 마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질척한 분노가 그를 휘감았다.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할지 몰….]
“잘 들어.”
이겸의 입술 끝에 힘이 들어갔다. 선명한 노기를 품은 눈동자엔 한 치의 흔들림도 섞이지 않았다. 오히려 결연하고 깊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분노를 읽었는지, 최이서는 말없이 경청했다.
“3일만 지켜. 목숨 걸고 지켜….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해. 만약 정채우 찾았을 때 몸에 상처라도 있으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3일? 왜 3일이야. 지금 당장….]
“이대로 데리고 나오면?”
단호한 반문에 최이서는 당황해 숨을 죽였다. 이겸은 떨리는 손으로 단정했던 머릴 흩트리며 벽에 기댔다.
“그럼 정채우는 기어이 떠날 거야. 그 꼴, 못 봐. 내가 절실히 깨달은 게 있어서…. 그러니 형이 지켜. 완벽하게 보호해. 그래야 내가 미치지 않지. 3일이야. 3일….”
하늘은 당장에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어두웠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최이서는 오전 6시 30분이 되자마자 1층으로 내려갔다.
도톰한 카디건을 걸쳤지만, 느슨한 짜임 사이로 찬기가 파고든다.
곧장 응접실로 향하는 대신 지하실 문을 연 최이서는 음식이 든 쟁반을 든 채 서 있는 조씨를 발견했다.
“뭐합니까.”
“그게…. 식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이분들이 못하게 하네요.”
여자의 말대로 와인 창고 안엔 아버지의 수행원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테이블로 문을 막은 채 당황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났다.
식사조차 막는다 이건가?
“이것들이…. 비켜.”
조씨가 들고 있던 쟁반을 낚아챈 최이서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다가섰다. 그러자 난처한 표정의 남자가 이서의 쟁반을 대신 받아 들려 한다.
“식사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돌았어? 어제부터 쫄쫄 굶은 여자야. 이번엔 굶겨 죽이려고?”
“죽이지는 않으실 거라고….”
“장담해?”
최이서는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문 앞의 테이블을 발로 밀었다. 그에 식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자, 당황한 남자들이 재차 최이서의 앞을 막았다.
“어차피 잠겨있습니다. 못 들어가세요. 왜 이러십니까. 저 죽습니다. 예?”
하필 상대가 최 회장의 후계자인 최이서인지라, 이번엔 회유를 시도하는 남자. 하지만 이서는 남자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반대편 손을 내밀었다.
“키.”
“사장님.”
“키.”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말은 내가 해, 책임도 내가 져. 언제 죽을지 모를 노인네 옆에서 얼마나 붙어먹으려고 이따위야…? 미래를 좀 생각하고 행동하지그래?”
제때 나오는 월급에 성과급, 추가 수당에 만족하며 충성을 바치기엔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 ‘나’라는 존재가 위험해져도 감수할 만큼의 충성은 이제 없다. 이들도 마찬가지.
최이서는 남자들의 동요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남자들은 조씨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조씨가 망을 보듯 계단 위로 고개를 뺀다.
“저희는 그저 지시하신 일을 하는 겁니다.”
남자는 못 이기는 척 키를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주위를 살피는 게, 교대 시간을 의식하는 듯했다.
“10분밖에 못 드립니다. 20분 뒤에 교대라….”
“내 집에서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어쨌든 내놔.”
최이서는 열쇠를 낚아채곤 남자를 밀어냈다. 솔직한 심정으론 이 안에 정채우가 없기를 바랐다. 제가 착각하는 것이기를, 기우이기를. 정채우완 아무 상관 없는 남이 있기를.
하지만 문을 열고 한걸음 내디딘 최이서는 침대 끝에 앉아있는 채우를 발견하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누구야….”
“예?”
“어떤 새끼가 내 변호사 얼굴에 상처 냈어!”
최이서는 넋 나간 그녀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에 따라 들리는 채우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창백한 낯빛하며, 뺨에 난 긴 상처. 구부정한 자세까지. 분명 어딘가 몹시 불편한 모습이었다.
“최이서 씨…?”
“너,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왜 이래!”
급히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채우는 두려운 듯 뒤로 물러났다.
“누구긴. 당신 아버지 부하인지 뭔지가 그랬죠.”
“귀 잘린 새끼?”
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입술을 달싹이며 문밖을 노려본다.
“어쨌든 나가게 해 줘요. 나가야 해.”
“안 돼. 일단 약 챙겨올 테니까, 이것부터 먹어.”
그가 쟁반이 놓인 테이블을 앞으로 당겨 놓으려 했지만, 채우는 거칠게 거절했다.
“나가야 한다고! 최이겸 씨는요? 알아요?”
“알고 있어. 그리고 나한테 3일만 지키라고 부탁했고. 그러니까 3일만….”
“3일?”
피딱지가 앉은 채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3일이란 단어에 막막함만 느꼈던 최이서와 달리,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흐릿하던 눈에 힘을 주었다.
“진짜 3일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니까. 그러니 뭐라도 먹고 기운을 내야….”
입술을 달싹이던 채우가 돌연 단호하게 말했다.
“최이서 씨는 나 본 적 없는 거예요.”
갑작스레 부산해진 그녀가 막무가내로 그를 밀어낸다. 황당하다는 듯 양손을 든 최이서는 대찬 거부에 한 걸음씩 물러났다.
“정채우, 지금 뭐 하는….”
“실종 처리하려는 거예요. 적법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 경찰들만 이끌고 여길 찾아오진 않겠지. 최이겸인데….”
그녀는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최이서는 말문이 막혀 실소했다.
지금 이 상황에 적법 절차? 생사의 기로에 서서 법을 따지겠다고? 대체 이 커플의 머릿속에 든 건 뭔지….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채우는 최이서가 가져온 쟁반을 끌어당겼다. 팟 뚜껑을 열자 미지근해진 소고기 죽의 고소한 냄새가 훅 번졌다.
그제야 식욕이 도는지 하얗게 튼 입술을 잘끈 깨무는 여자.
“그러니까 최이서 씨는 지금부터 상관하지 마요. 나 못 본 거고, 난 여기 없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해. 내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는지 몰라? 뭘 어쩌려고.”
최이서가 목소릴 낮추자 묽은 죽을 뜬 그녀가 두 눈을 치켜뜬다.
“기다려야죠. 나가고 싶어도 자물쇠가 걸려있고, 남자들은 5시간에 한 번씩 교대를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자해뿐인데…. 그건 싫어요.”
“자해? 미쳤어? 부탁인데, 제발 하지 마라. 네 몸에 상처 하나라도 더 늘면, 나 죽어. 최이겸은 그러고도 남아. 그게 그 새끼 진심이고.”
애원하는 듯한 말에 처음으로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그에 하얀 뺨에 난 상처가 더욱 도드라진다.
“지금 이 시간부로 철저한 피해자가 돼야 해요. 그러니까… 계속 있을 거면, 기미 좀 해줄래요? 독 들었는지만.”
여자의 손에 들린 수저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
[이게 다 뭡니까, 최이겸 씨.]
이 형사의 목소리가 막막함에 떨렸다. 이겸은 마주 앉은 남자에게 잠시 실례하겠다는 듯 턱을 까딱한 뒤, 일어났다.
“어제 사고가 났고, 자정이 지나면 3일째가 됩니다. 실종 처리에 문제없다고 보는데요.”
[그게 아니라, 보내신 영상이 뭐냐고요. 정채우 씨가 납치됐다는 겁니까? 이거 지금….]
“예. 고의성은 입증해야겠지만, 납치당한 거 맞습니다. 그리고 향한 곳은 좌표 찍어드린 그곳이고요.”
최 회장이 만들어 낸 철옹성.
신재훈은 납치된 순간부터 그녀가 저택으로 옮겨지기까지의 모습을 면밀하게 추적했다. 영리하게도 범인들은 곧장 본가로 향하지 않았다.
외곽을 돌고 돌아 사각지대에서 번호판을 갈아치웠고, 중간에 두 번 차를 바꿔탔다.
그렇게 장장 네 시간 뒤, 저택 앞에 다다른 차량에서 내린 정채우. 그것도 남자의 등에 업힌 채 안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확실히 경험했다.
[미치겠네…. 정채우 씨, 위험한 거 아닙니까?]
“문제가 생기면 연락이 올 겁니다. 최이서가 지키고 있어요.”
[그래도 이건 중대 사안입니다. 정말 납치·감금 건이라면, 크게 터질 지도요. 게다가 어설픈 영장으론 담벼락도 못 넘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지금 윤 검사님과 식사 중인 겁니다, 이 형사님. 나머지는 김인경 실장과 이야기 나누도록 하시죠.”
[예? 차장 검사님이요?]
“예.”
이겸은 전화를 끊은 뒤, 다시 룸 안으로 들어섰다.
막 서류 검토를 끝낸 차장 검사 윤강재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앞에 놓인 음식들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최이겸은 윤강재가 내려놓은 서류에 잠시 눈길을 준 후, 컵에 물을 가득 따랐다.
윤 검사의 앞에 놓인 건 술이지만, 이겸의 잔을 채운 건 물이었다. 그 모습에 애써 웃어 보인 윤강재가 말한다.
“최 전무는 낮술 안 하십니까? 여기 점심 특선 19,800원인 것치고 괜찮은 한정식집인데.”
“근무 중 술은 안 마십니다. 그리고 접대하러 나온 자리가 아니라.”
“하긴. 술자리였다면, 내가 나오지 않았겠죠.”
이겸은 말없이 물로 입을 축였다.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제공했으니, 윤 검사의 결정만이 남은 상황.
후계 싸움에서 밀려나 복수를 꿈꾸는 게 아닌 이상, 최이겸의 행위는 자살 테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아는 것도 최이겸 뿐.
윤 검사는 진땀이 배어난 손을 물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이건 양날의 검입니다. 최 전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이 정도면 창하는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칠 수 있어요. 정말 그러길 바랍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검사님이 결정하실 몫입니다. 만약 저까지 치시겠다면, 성실히 조사받아야겠지요.”
“점점 모르겠네. 뭘 원하는 건지.”
“원하는 건 하납니다. 명일 자정, 본가 압수 수색에 들어가는 것. 그거면 됩니다.”
“허, 참…. 명일 자정에 당장?”
최 회장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유통 라인의 자금 세탁, 비자금, 주가 조작 및 무수한 불법 행위들이 기록된 장부는 매혹적인 덫이었다. 하여, 위험했다.
자칫 잘못 건드리기라도 했다간 차장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 게다가 긴급 수색 영장을 발부받으려면 결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굳게 닫힌 철문을 강제로 열 만한 강한 임팩트가.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압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윤 검사의 날카로운 눈빛이 이겸에게 향했다. 다시 한번 물로 입을 축인 이겸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비틀린다.
“저택 지하에 변호사가 납치당해 감금됐습니다.”
“뭐요?”
“최이서의 법률 대리인이자 신여진의 딸로, 보여드린 장부의 모든 내용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삼청동 지하에 감금되어있습니다. 이 정도면 개연성까지 충분한 거 아닙니까?”
윤 검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술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엔 의심이 완전히 걷혔다.
최이겸은 모래처럼 씹히는 음식을 간신히 삼키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모든 걸 동원해서, 시민의 안전과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채우가 납치된 이후, 하루가 1년처럼 흘러갔다. 마음이 급할수록 머릿속은 차가워지고, 행위 사이사이엔 쉼표가 그려졌다. 의도적으로 그리하였다.
“최 전무, 아직 피아노 칩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이겸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손대지 않은 지 오랩니다.”
“그럼 나중에… 우리 모임에 한 번 나와요. 아마추어 클래식 음악단인데, 피아니스트가 영 시원찮아서.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요?”
윤 검사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가라앉았다. 이겸이 대꾸를 하지 않자 피식 웃어 보인 남자가 고개를 주억인다.
“물론, 조사를 받으러 검찰청 드나들려면 조언해 줄 시간이 없겠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내가 최선을 다해야지.”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한 최이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다.
“최고의 조언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사위가 유리로 마감되어 사각지대 따윈 없는 면회실 안으로 수갑을 찬 정영수가 들어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남자 둘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한다.
“형님, 건강하십니까.”
“앉아.”
“이쪽이 새로 선임한 변호사님입니다.”
정영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곧장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려 주었다. 불까지 붙이니 환기 시스템이 돌아가며 요란한 소릴 낸다.
정영수는 담배 한 대가 짧아질 때까지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새로 선임했다는 변호사가 눈치를 보며 주위를 살핀다. 변호사 선임 건을 핑계로 동행하긴 했지만, 정영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테이블에 담배를 비벼끈 정영수가 움푹 팬 두 눈을 치켜뜨며 턱을 괸다.
“여진이는.”
“무사하십니다. 수술도 잘 되셨고, 조금씩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기철아.”
“예, 형님.”
“담근 놈이 입 다물고 있다던데…. 그럼, 내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냐. 졸지에 조강지처 쑤셔버린 개새끼가 됐는데 말이야.”
거친 바닥을 긁는 듯한 음성에 기철이라 불린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형님 나오실 때, 눈깔 이상한 것들 걸리적거리지 않게 하겠습니다.”
“눈까리가 뭐가 대수냐. 아예 눈에 안 띄게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 억울해서 어떻게 같은 하늘 아래 살아.”
“맞습니다, 형님!”
“그러니 큰형님한테도 잘 전해. 나 여기서 하도 잘 먹어서 오래오래 있다가 나갈 거라고.”
“형님…!”
고개를 든 기철이 어깨를 떤다. 어쩐지 변호사 같은 건 대충 구하라며 심드렁하게 굴더라니.
그에겐 항변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반성문 제출하신 후, 소명에 집중하시는 게….”
보다 못한 변호사가 나섰다. 하지만 정영수는 담배를 한 대 더 입에 물곤 시커멓게 죽어버린 눈빛으로 웃었다.
“거, 변호사님은 수임료 받은 만큼만 입 털어요. 시끄러운 건 질색이니까.”
희게 타들어 간 재가 툭 떨어진다. 기철은 무릎에 올린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 그럼 면회 끝내자. 기철아.”
“형님.”
마치 다신 보지 못할 사람처럼 구는 기철을 내려다보며 정영수가 일어났다. 그러곤 마지막 담배를 끈질기게 빨아들인 뒤, 면회실의 문을 열었다.
밖에 대기 중이던 교도관에게 꽁초를 건넨 정영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에 타들어 가는 눈빛으로 테이블을 노려보던 기철이 무릎을 짚으며 일어난다.
뒷마무리를 하겠다며 눈빛을 보내는 변호사를 뒤로한 기철은 밖으로 나와 대기 중이던 차에 올랐다.
“우리 형님이 이렇게 희생하시는데, 사람 된 도리는 해야지. 잡것들…. 오늘 다 담가버리라고 하신다.”
“예? 정말입니까?”
운전석에 앉아있던 까까머리 덩치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다.
기철은 은색 라이터를 손안에서 굴리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다들 모여야겠다. 연락 돌려라. 얼굴이나 보고 살아야지.”
***
윤 검사와의 식사를 마친 이겸은 더부룩한 속을 게워냈다. 음식물을 억지로 밀어 넣은 탓이었다.
세면대 모서리를 움켜쥐고 거울을 노려보다, 확 열이 올라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그제야 흐려졌던 초점이 돌아온다.
젖은 앞머릴 쓸어넘긴 그는 또렷해진 눈빛으로 제 얼굴을 노려보았다.
하루 새 꽤 아이러니한 감정 기복을 경험했다. 분노와 걱정부터 안도감과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감까지.
이겸은 손목시계로 시선을 내렸다. 윤 검사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고 이 형사는 곧장 팀을 꾸렸다. 아버지라 해도 검찰의 압수 수색에 대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10시간.
모든 것이 순조롭다.
식당에서 나온 이겸은 길 잃은 아이처럼 자리에 멈춰 서서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가 눈치를 보며 뒷문을 열어 주었다.
“아뇨, 좀 걷죠.”
“그럼 코트라도….”
“예.”
기사가 건네준 코트를 걸친 이겸은 가회동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라도 숨을 돌리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것 같았다.
키 낮은 건물이 이어진 개성 강한 노점을 지나, 고운 담벼락과 이어진 언덕을 올랐다.
관광을 나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 그를 보고 알은체를 하려는지 다가왔다. 하지만 초점 없는 눈빛에 차마 말을 걸지 못한 채 멀어진다.
높이 오를수록, 언덕이 가파를수록 숨이 가빠질 법한데 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누가 사는지도 알지 못하는 검은 대문집 담벼락 앞, 멈춰 선 이겸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기대섰다.
채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는 여전히 죽어있었다.
이겸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너편 담벼락을 응시했다.
***
최 회장의 집 앞을 지키던 보안 요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곳에 절대 나타나선 안 될 사람이 나타났다.
남자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앞에 멈춰 선 차 문을 열었다. 그러자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이겸이 까딱 인사하며 차에서 내린다.
“회장님은 아직 퇴근 전이십니다.”
“압니다. 곧 오시겠죠. 난 형을 보러 온 거니까요. 문 열어요.”
“네.”
안쪽에 무전을 넣은 남자가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후다닥 뛰어온 사람들이 깍듯이 인사하며 그를 맞았다.
이겸은 고개만 끄덕여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윤씨가 구속된 이후 방치된 정원은 주인의 심정을 닮아 엉망이었다. 눅눅하게 뭉친 낙엽들과 제때 꽃대를 잘라주지 않아 고개를 떨군 꽃들이 흉하게 정원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장된 시선이 따라붙는다. 곧장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이겸은 정원으로 향했다.
이 안에 채우가 있다. 최이서가 말한 대로라면 와인 보관고와 연결된 창고 안에 그녀가 있을 것이다. 채우가 지척에 있다고 생각하자 절로 걸음에 힘이 실렸다.
“저, 안으로 드시죠. 사장님께도 언질 넣었습니다.”
뒤따르던 박 실장의 말에 이겸은 버석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아저씨가 안 계신다고 정원이 엉망이네요. 사람을 좀 쓰죠.”
“예, 그러겠습니다.”
“소문이 도는데. 이틀 전, 중요한 손님을 들이셨다고요.”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창고와 연결된 반창 앞. 표정 관리에 능숙한 박 실장은 가증스러운 미소를 띤 채 이겸의 앞을 막아섰다.
“윤 실장님의 재판 때문에 소홀하였습니다.”
“그러셨군요. 빨리 사람을 써야겠습니다. 여긴 아버지의 정원이 아니라, 어머니의 정원이니까요.”
박 실장은 당혹스러움을 숨기려 애썼다.
최이겸과 가족애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게 최씨 집안 사람들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존재였고, 기억이 희미한 모친에 관해선 더더욱 그러하였다.
곱게 칠한 입술 끝을 말아 올린 박 실장은 먼저 에스코트하듯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잠시간, 건물 하단으로 향한 이겸의 시선. 그곳엔 창살이 설치된 반창이 있었다. 하지만 굳게 닫힌 듯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최이겸.”
태연히 집안으로 들어온 이겸을 마주한 최이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색의 단단한 소파에 몸을 묻은 이겸이 재킷 단추를 풀고 넥타이 매듭마저 느슨하게 만든 뒤,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요즘 잠 좀 자나 보지? 혈색이 좋아졌는데?”
박 실장이 가져온 찻잔을 든 그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최이서를 바라보았다.
그에 최이서는 사람들을 물린 후, 남자 둘이 지키고 선 지하를 가리켰다.
“잘 자다가 저 안에 자리 잡은 VVIP 덕분에 다시 불면증 모드야.”
“까다로우신가 보지?”
“식사 기미까지 해 드리는 중이라.”
적선하듯 툭 던진 이겸의 미소에 최이서는 상체를 기울여 양손을 모은 채 턱을 괴었다.
“어쩔 거야.”
은은한 차향이 코끝을 맴돌다가 그윽하게 퍼졌다.
“경우의 수를 딱 다섯 개만 만들어 봐. 그럼 답이 나올 거야.”
“네가 딴마음 먹은 거 눈치챈 쪽에서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어. 게다가 김동희도 구속 수사 중이고. 이러다 혹시라도…. 불똥이 이쪽으로 튀면 창하는 자폭밖엔 답이 없어.”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그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얻는 거야?”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얼굴을 붉힌 최이서가 욕설을 내뱉는다.
“원래 나 같은 것들이 정보에 더 빠른 법이야. 쓰레기는 쓰레기를 알아보거든. 내 쪽이 지라시보다 정보가 빠른 건 아냐?”
“아니. 흠…. 사장님이 그런 쪽에 너무 귀가 밝으면 곤란한데.”
“그러니까 공유해.”
“뭘.”
“정채우를 지척에 두고도 네놈이 이렇게 여유 부리는 이유. 내가 모를 줄 아냐? 네 속이 지금 얼마나 시커먼지 훤히 보여.”
소서와 찻잔이 부딪치는 청아한 소리.
최이겸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고였다. 그는 긍정하듯 고개까지 끄덕이며 소파에 기댔다.
“그냥 시커멓기만 할까.”
“최이겸.”
“글쎄, 이런 건 내 프로세스에 없는 감정이라.”
완벽하다는 찬사를 받으며 살아왔다. 최이겸은 태생적인 천재였고, 그의 이름에 실패를 대입할 수도 없었다. 모든 행위엔 적절한 근거가 뒷받침되어있었다.
충동과는 거리가 먼 예술가.
음악은 그가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을 쏟아 내던 분출구였다. 하지만 음악을 그만둔 뒤, 퇴적된 감정들은 배출되지 못한 채 쌓이고 쌓여 엉망으로 썩어 문드러졌다.
그로부터 10여 년 만에 찾아낸 감정의 탈출구. 빠져나갈 곳 없던 감정들을 모조리 쏟아 낸 사람이 바로 정채우였다.
충동으로 시작해 호기심, 경멸, 혼란, 안도, 애틋함, 소유욕과 집착. 그리고 사랑까지. 음악에 쏟았던 애정과는 결이 다른 사랑을 모두 퍼부었다. 삶의 밸런스가 무너진다 해도 괜찮을 만큼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생각에 잠긴 그의 손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번진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혹, 시간 있으면 지금이라도 해외로 나가지그래. 7시간 안에 한국을 뜨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데.”
“뭐?”
“지금부터…. 여덟 시간 뒤에 기자회견이 열려. 기자회견 끝나면 꽤나 시끄러워질 테니, 급한 스케줄 같은 거 만들어서. 남프랑스나 그리스 쪽 어때.”
권태롭게 말을 마친 이겸은 다시 찻잔을 쥐었다.
지하에 정채우가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최이겸은 예의 단정한 모습 그대로였다.
최이서는 질린 눈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최이겸이 아무 이유 없이 출국 카드를 꺼내 들진 않았을 터. 그에 마음이 급해졌다.
굳어버린 머릴 굴려 가며 느긋한 최이겸을 노려보던 최이서의 휴대 전화가 울린다.
“…내 비서가 너무 딱 맞춰 연락하는 것 같은데. 나, 이거 받아도 되냐?”
이겸은 어깨만 가볍게 들썩이며 웃었다.
“뜻대로.”
“위험해 보이는데….”
“글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전화를 받은 최이서는 멍하니 이겸의 얼굴을 응시했다. 수화기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낯빛은 희게 질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 압수 수색? 다 같이 죽자, 이거냐?”
“그러니 도망쳐.”
최이서는 험악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 모습을 돌아보던 이겸은 다시금 단정한 자세로 찻잔을 기울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견 평온해 보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의 모든 신경이 지하 창고를 향해있었다.
찻물을 머금은 그의 눈빛이 차고 시리다.
최이겸은 마치 할 일을 마친 사람처럼 몸을 일으켜 지하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섰다.
집안을 부산하게 맴도는 시선들이 회오리치듯 최이겸의 앞에 멎는다. 그는 어두운 지하를 내려다보며 숨을 길게 흘렸다.
한 계단씩 밟아 아래로 내려가는데, 누군가 잰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자동으로 켜지는 센서 등. 와인 창고 전체에 불이 들어오고 안을 지키던 귀 잘린 남자가 돌아본다.
한쪽 귀가 반밖에 없어 모자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던, 영상 속 그 남자였다.
“여긴 어인 일로 오셨씀까. 작은 도련님이.”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내 것이, 여기 있다고.”
“와인이요? 아이고, 여기 귀한 거 따로 모아두시더니. 도련님 거였나 봄다. 저짝으로 가보시기요.”
남자는 먼 곳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히죽 웃었다. 그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그가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잠겨있는 창고 문을 노려본다. 남자를 사이에 두고 문과 마주 선 모양새였다.
“내건, 여기.”
최이겸이 문을 짚자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귀한 것일수록 꼭꼭 숨겨두는 법이거든요. 비켜 주지 않겠습니까?”
흉터 가득한 손으로 마른세수한 남자가 슬쩍 비켜서며 자물쇠가 채워진 걸쇠를 가리켰다.
“아침나절에 큰 도련님이 강짜를 부리셔서 열쇠 뺏겼슴다. 못 들어가실 건데, 그래도 비킴까?”
“키를 달라고는 안 했는데.”
“뭐, 그럼 일 보시기요. 저는 저짝에 가 있을 테니.”
남자는 끝끝내 불량스럽게 말하며 슬쩍 비켜섰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더니. 윤경수가 구속되기 전엔 그 뒤에 서서 눈 한 번을 제대로 못 맞추던 치였다. 그런데 앞을 가로막는 벽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는 의기양양해졌다.
이겸은 매끈한 입꼬릴 가볍게 휘어 올리며 남자의 실루엣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남자가 꽤 멀찍이 떨어져선 선심이라도 쓰듯 와인 한 병을 집어 들곤 피식 웃어 보인다.
“정채우.”
문을 짚은 채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안에서 부산한 소리가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일정하지 못한 걸 보니, 다리가 불편한 건가?’
그녀의 상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터라, 이겸은 치미는 분노를 누르며 한 번 더 채우를 불렀다.
“채우 씨, 거기 있어요?”
하지만 문 너머에선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두꺼운 창고 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뿐.
문 너머에 그녀가 있다고 생각하자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안에 침대와 피아노, 꽤 고가에 낙찰받은 그림 말고는 없을 텐데…. 심심하지 않습니까?”
마치 안부를 묻는 듯한 부드러운 말투.
귀 잘린 남자의 의문 가득한 눈빛이 이겸에게 들러붙었다.
“너무 겁먹지 말아요. 가끔, 나도 갇혔던 곳이거든요. 그러니 못 견디게 심심하면 피아노 의자를 열어 봐요. 내가 숨겨놓은 앨범이 있을 겁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잘생긴 얼굴은 찾을 수 없겠지만, 나름 볼만할 겁니다.”
그녀가 답을 하지 않는 이유는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따라 주지 않는다.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확인하고 싶었다.
반파된 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진 여자의 상태와 겁에 질려있을 표정 같은 것들을.
차라리 울며불며 살려달라 애원해 주었으면. 제 안위를 앞에 두고 계획 따윌 들먹이는 거냐며 악이라도 써 주었으면. 그럼 마음껏 분노할 수 있을 텐데….
정채우를 떠올리며 무너지기 직전인 속내와 달리, 그의 시선과 숨소린 변함없이 고요했다.
이겸은 돌아섰다. 남자의 묘한 시선을 받아치며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겨 앉는 그. 이어 다리를 꼬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도련님, 거긴 내 자림다. 위에 가서 편히 쉬시기요.”
이겸은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들었다.
“거기까지. 우리의 거리는 이 정도가 딱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어디에 어떻게 있을지는 내가 결정합니다. 여긴, 내 집이니까요.”
남자의 입술이 비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둘째 도련님으로 보였던 어린놈이 순식간에 먹이 사슬 꼭대기에 올라앉은 포식자처럼 느껴졌다.
네 위치는 거기라고, 다정하면서도 잔인하게 어깨를 짓밟는 느낌.
“거, 나는 잘 모르겠씀다. 똑똑한 도련님이 뭐 하려는 건지. 아, 회장님껜 연락 드렸슴다. 출가한 자식은 부모 걱정에 잠 못 든다던데, 이 집은 뭐 이리 복잡한지. 마음대로 하시기요. 내 심심했는데 마츰 잘 됐지.”
남자가 의자를 빼내 이겸과 마주 앉는다.
이 미터 남짓.
이겸이 말한 적당한 거리였다.
***
채우는 차가운 문에 기댔다. 너머에 최이겸이 있다. 그 사실만으로 안도감에 눈물이 날뻔했다.
삶과 죽음, 공포와 맞서는 동안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감정이었다.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은 그녀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제 얼굴에 상처를 낸 남자의 목소리가 언뜻 들린다.
피아노가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 방은 방음이 꽤나 잘 되는 곳이었다.
어지간한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 반대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에 채우는 드문드문 들렸던 그의 말을 곱씹었다. 힘주어 움켜쥔 손에 통증이 인다. 피가 배어나는 손바닥을 응시하다 시선을 옮긴 곳은 이겸이 말한 피아노 의자였다.
그녀는 바닥을 기어가 묵직한 의자 뚜껑을 열었다. 묵은 냄새가 나는 의자 안엔 오래되어 낡은 악보와 노트로 보이는 게 가득했다.
대부분 복길의 학원에서도 종종 보았던 유명 음악가들의 악보였다.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지, 악보는 거의 너덜너덜한 수준이었다.
마치 제가 들여다보던 법전 같다.
채우는 안에 든 것들을 모조리 꺼냈다. 손때묻은 모차르트의 악보를 넘기는데, 고사리 같은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최이겸의 모습이 떠오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알 수 있었다. 천재라고 치켜세워지던 남자도 노력 없인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했을 거란 것을.
그럼, 과연 그는 이곳에서 행복했을까…?
이겸의 흔적으로 가득한 피아노 의자는 보물창고였다. 고민이 담긴 낙서장과 직접 작곡한 듯한 손 그림 악보, 이탈리아어로 추정되는 단어들이 적힌 노트가 안을 가득 채웠다.
제가 사랑하는 남자를 떠올리며 보물 같은 것들을 조심스럽게 정리하던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건조한 가죽 바인더 하나를 발견했다.
오래된 것들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돋보이는 가죽표지. 손에 닿은 느낌만으로 이것이 이겸이 말한 앨범이란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옛 모습이 담겨있다기에 앨범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의아한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긴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래지고, 이어진 내용에 가뜩이나 핏기없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채우는 헛숨을 쉬며 입을 가렸다.
이것은 치밀하게 정리된 이중장부였다. 그것도 날짜와 시간, 은밀한 접대를 받은 대상이 찍힌 사진까지 친절하게 삽입된.
채우는 빠르게 장부를 넘겼다. 전문 회계사가 필요한 부분을 차치하고도 전대 VIP들부터 현직 장관,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엄청난 비밀이 가득했다.
그중 가장 최근 사진이 찍힌 곳은 기생방 같은 곳으로, 소문으로만 도는 바로 그 기루였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현직 판사와 허명재 변호사, 최근 상속세법 개정안을 들고 날뛰던 국회의원 네 명이 찍힌 사진.
이게 바로 최이겸이 손에 쥔 조커였나? 대체 그는 몇 수를 앞서간 걸까.
그녀는 힘없이 침대 모서리에 기댔다. 여러 의미로 꽤나 충격적이었다.
연애를 시작한 이후, 이겸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란 걸 종종 잊곤 했다. 그는 저와 음식 취향이 비슷했고, 재벌가 자제들에게서 보았던 방종의 흔적도 없었다.
최이겸은 평범하지 않았지만, 평범했다. 그것은 만들어낸 모습일 수도, 노력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둘 다 아니라면, 제 앞에서만 보이는 또 다른 모습일지도.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는 꺼내놓은 것들을 의자에 다시 넣은 뒤, 장부만 따로 챙겼다.
최이겸이 경찰들을 이끌고 이곳에 들이닥치면, 제 역할은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구출되며 장부를 빼돌리는 것일 테다. 그것이 그가 저를 3일간 이곳에 둔 이유이기도 하겠지.
힘을 내고 싶지만, 되레 기운이 빠져 고개가 숙어졌다.
그 빈틈없는 계획에 어째서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지.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저부터 챙기길 바라는 것도 아니면서.
채우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뺨에 난 상처가 벌어지며 다시 핏방울이 맺힌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펑펑 울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을 거란 걸.
그녀는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얼굴을 비볐다. 그러곤 다시 바닥을 기어 창고 문에 기댔다. 조금의 온기라도 나누어 받고 싶어서. 이 너머에는 여전히 최이겸이 있을 테니까.
태연한 척하는 것일 뿐, 괜찮은 건 아닐 테니까.
***
-압수 수색 영장 발부됐다는 정보입니다.
김 실장의 메시지를 받은 이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에 마주 앉아 하품을 쩍 하던 남자가 은근슬쩍 일어나 계단을 올라간다.
벌써 3시간째. 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하나 이겸은 그녀가 장부를 발견했을 거라고 믿었다. 똑똑한 정채우라면 절대 제 말을 흘려듣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여 걸쇠에 걸린 커다란 자물쇠를 내려다보았다.
“정채우.”
적요를 깨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안쪽에서 반응이 왔다. 창고 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그 반응이었다.
이겸은 양손으로 눈두덩을 누르며 상체를 굽혔다. 차라리 빛보다 어둠이 나았다.
“미안합니다.”
기껏 튀어나온 말은 사과였다. 하지만 모든 일이 저에게서 기인하였기에 사과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과조차도 변명이다. 그녀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끔찍한 사고였으니까.
-비서실이 움직였습니다.
이어 도착한 김 실장의 메시지.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그는 창고 문에 뒷머릴 기댔다.
“미친놈이라고 욕해요. 때리면 맞아도 주고, 정채우 씨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 이름을 걸고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습니다.”
-최 회장 이동합니다.
“그러니까 도망치지만 마요…. 이 문 열었을 때, 당신이 날 뿌리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목적지 삼청동입니다.
마지막 메시지를 받은 이겸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에 막 계단을 내려오던 최이서가 황망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최이서는 모든 걸 전해 들었는지, 복잡한 표정으로 이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쩐지 태연하더라니. 3일? 하, 자정 지나면 3일이란 걸 왜 난 몰랐지.”
“1분 1초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거든. 그러니 빨리 여길 뜨기나 해. 이쪽은 윤 검사보다 무서운 사람이 올 거라.”
“…설마, 이 형사가 직접 와?”
“아마도. 이 형사님이 납치 및 실종 전문가이기도 하고.”
부러 말에 장난기를 섞어 흘렸다. 그러자 어깨를 부르르 떤 최이서가 한 걸음씩 거꾸로 올라간다. 최이서의 뒤로 땅거미가 진 창문 너머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미친 짓의 결말이 눈앞에 있었다.
***
“지금까지 뭐했어!”
비서실장의 뺨을 후려친 최호가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낮이 짧아진 탓에 벌써부터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다 태워! 하나도 남김없이 태우고, 당장 출국 경로 알아봐!”
수행비서들을 이끌고 본가로 돌아온 최 회장은 부수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뛰어들어 온 수행비서들이 곧장 서재로 들어가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다릴 여유 따윈 없었다. 비서실 직원들이 중요한 정보들을 골라 빼돌리는 동안, 그는 인천공항으로 출발할 참이었다.
검찰에 정보를 흘린 치가 누구인지 몰라도, 이렇게 갑자기 뒤통수를 칠 수는 없는 일.
최호는 이를 갈았다.
이번 압수 수색만 잘 넘기면 된다. 그럼 다시 사태는 잠잠해질 테고, 위에서 움직일 터였다.
히죽거리다 불같이 화를 내며 정신이상자처럼 굴던 그가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그곳엔 조선족 남자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제야 최호는 바쁜 와중 흘려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이겸이 찾아왔다는 보고를.
“뭐야!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감히 제 침실에까지 들어오려는 남자를 보며 최호가 소릴 내질렀다. 그러자 머릴 긁적인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연락 못 받으셨슴까.”
“내 새끼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어디 감히 발을 들여!”
“아직 문지방은 넘지 않았슴다. 지하에 둘째 도련님 지쎄고 계신데, 어찌할까요.”
“어쩌긴 뭘 어째. 내 새끼 털끝이라도 건드려 봐! 네놈 남은 귀때기도 잘라버릴 줄 알아!”
정원에 놓인 드럼통. 그 안에 불이 피어오르고 최호의 눈빛도 타올랐다.
남자는 최호를 잠시 노려보곤 돌아섰다. 윤씨와는 모든 걸 공유하면서 자신은 쓰레기 취급하는 최호를 죽이고 싶었다.
회사 일은 잘 몰라도 저리 미친놈처럼 구는 걸 보니…. 굳이 제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끝이 보이는 노인네였다.
그에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남자는 지하가 아닌 후원으로 나갔다. 이어 어딘가에서 나타난 기묘한 그림자들이 저택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오늘도 취조실 안으로 들어선 윤씨는 이 형사가 아닌 다른 남자를 보며 표정을 굳혔다.
“오늘은 제가 취조합니다. 우리 이 형사님은 바쁜 일이 생기셔서.”
여전히 윤씨는 입을 열지 않았다. 독방에 갇힌 채 사회와 단절된 그에게 경찰은 어떠한 정보도 전해 주지 않았다. 특히나 최호와 관련된 정보는 더더욱.
윤씨가 의자를 당겨 앉은 뒤, 공 형사는 수갑을 풀어 주었다. 음식을 거부하지도, 잠을 설치지도 않는 남자. 마치 모든 걸 감내하겠다는 듯, 혹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윤씨는 태연히 조사에 임했다.
죄인이지만 죄인 같지 않은 태도에 경찰들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좋은 미끼가 도착했다.
“자, 그럼 어제 했던 질문 다시 이어나가기 전에…. 혹시, 정채우 변호사 납치 사건도 윤경수 씨가 사주한 겁니까?”
그제야 윤씨가 반응을 보였다. 의지라곤 없는 듯 앉아있던 그가 고개를 든다. 그러곤 구속 수사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납치… 라뇨.”
공 형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최 회장이 윤경수의 약점이었다. 어째서 최호에게 충성하는지 모르나, 돈 때문이라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경찰이 바라는 건, 범죄를 사주한 최 회장의 이름이 윤씨의 입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어도 많은 것들을 엮을 수 있을 터.
“사주, 안 했습니까?”
“언제 그랬죠.”
“자정 지나면 3일째 되겠네요.”
윤씨는 꾹 다문 입술을 떨었다. 공 형사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롭게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지그시 눈을 감은 윤씨가 테이블 위에 모은 손을 꽉 움켜쥔다.
“변호사님은 무사하십니까.”
“무사하길 바랄 뿐입니다. 납치, 감금, 폭행의 죄는 꽤 무겁잖아요. 게다가 상대가 변호사라니…. 윤경수 씨가 지키려는 최 회장의 명줄도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살인은… 제가 저지른 겁니다.”
“이봐요, 윤경수 씨.”
파일로 테이블을 내리친 공 형사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눈을 부릅뜬 윤씨가 가만히 들으라는 듯 목소리에 힘을 준다.
“살인만. 제가… 저지른 겁니다.”
***
최 회장이 끌고 온 비서들은 온 집안을 헤집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2층과 3층에서 문서를 던지면, 1층에 대기 중인 비서들이 그것들을 불에 태우는 행위를 이어나갔다.
하필 디지털과는 거리가 먼 취향 탓에 직접 필기한 자료들은 끝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최호는 중요한 자료들을 저택에 보관했고, 해외 금고와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기밀 서버를 이용했다.
압수 수색은 자정부터 오전까지 이어질 테지만, 그마저도 창하 그룹 전체를 뒤집어엎기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최호에겐 그것만이 희망이었다. 공무 집행을 방해해서라도 들이닥치는 것만 막아내면, 항공편이 아닌 배편을 이용해서라도 잠시 몸을 피할 수 있을 터.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대단한 놈은 없다고 자화자찬하며 살아온 최 회장에게 지금의 상황은 치욕에 가까웠다.
부들부들 떨며 문서들이 타들어 가는 걸 지켜보던 최호는 붉어진 얼굴을 하고 지하실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보인 건, 의자에 앉아 태연히 눈을 감은 이겸이었다. 제 핏줄이자, 저를 지나치게 닮아 증오스러운 피조물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든다.
“또 뵙네요, 아버지.”
최호는 가증스러우리만치 여유로운 이겸의 태도에 이를 갈며 말했다.
“네놈이 이런다고 내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최 회장의 노호에도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당황하거나 난처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 당당한 모습에 되레 불안한 건 최호였다.
여자를 가둔 창고 앞을 지키고 앉은 아들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도대체 왜! 고작해야 계집애 하나 때문에, 왜!’
최호는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성큼성큼 다가가 이겸의 뺨을 후려쳤다. 매끈했던 최이겸의 뺨에 남은 붉은 손자국. 하지만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최호를 응시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최호를 더욱 분노케 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회사를 더 키워내도 모자랄 판에, 어디 이상한 곳에 꽂혀서 내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이겸이 몸을 일으키자, 조금 전까지 그를 내려다보던 최호가 한걸음 물러났다. 성인이 된 아들은 이제 자신을 훌쩍 넘어섰다.
최호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이 권위는 유지되어야 하며, 무너져서는 안 된다.
이겸의 무심해 보였던 눈가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러게 그 고귀한 아버지의 세상에 왜 저를 끌어들이셨습니까. 저는 바란 적도 없었는데.”
“바란 적이 없어? 내 아들로 태어난 이상, 바라지 않아도 가져야 하는 거야!”
“그럼 아버지 뜻대로 가졌으니, 버리는 건 제 뜻대로 하죠.”
검찰에 심어 둔 모사꾼이 아니었다면, 게릴라 같은 압수 수색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최호는 태연자약한 이겸을 보며, 윤 검사를 들쑤신 놈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네놈이 계속 이러면 아비 죽는다. 네놈이 죽이는 거야. 그러니까… 그만하고 정상화시켜.”
“정상화라면.”
“몰라서 묻는 게야? 윤 검사에게 적당히 쥐여주고 끝내. 그럼 내 다시는 저 아이 안 건드리마.”
최호는 숨을 고르며 회유하듯 말했다.
아들이 미쳐 버린 게 여자 때문이라면, 손에 쥐여주면 되는 거였다. 차라리 돈도 명예도 싫다는 녀석을 끌어내리고 자유를 보장해 주면 끝날 일.
“이겸아. 제발, 네 형 생각도 해야지!”
“우습네요. 정채우 씨를 다시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로 끝낼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뭐? 그럼 뭘 더해. 뭘 더 하란 말이야!”
“무릎이라도 꿇으시든지.”
“무, 무릎을 꿇어? 네놈이 아주 미쳤구나. 오냐! 내 꿇어주마!”
악에 받쳐 소리친 최호가 무릎을 바닥에 찍었다. 지금이라도 아들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었다. 여긴 보는 눈도 없지 않은가.
최호가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자, 그는 한걸음 비켜서며 굳게 닫힌 창고 문을 가리켰다.
“저 말고, 이 안에 가둬 둔 피해자에게 하셔야지요.”
자정. 저택 내의 괘종시계에서 느릿한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분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던 최호는 욕설을 내뱉으며 일어나 위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계단을 뛰어 내려온 경호원들이 이겸을 발견하곤 허리를 꾸벅 숙인다.
그 모습에 최 회장은 그들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고함쳤다.
“최 전무 잡아! 잡아서 2층으로 데려가!”
“예?”
“전무 잡으라고, 이 자식들아!”
경호원들은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아무리 최호의 명령이라곤 하나 최이겸도 그들에겐 고용주나 마찬가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전무님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최호는 결국 폭주하고 말았다. 화풀이하듯 경호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주먹과 발길질을 묵묵히 견뎌 내는 경호원의 입가에 선혈이 맺히고, 얼굴은 치욕으로 일그러졌다.
결국, 남자의 무릎이 바닥을 찍은 뒤에야 멈춘 폭행.
최 회장은 경호원의 뺨을 후려친 후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주먹이 퉁퉁 붓고 실핏줄이 터진 눈은 붉었다.
그를 발견한 비서실장은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훔치며 말했다.
“준비 끝냈습니다. 가셔야 합니다.”
“이것들 다 쓸어버려!”
“예?”
“태워!”
악마 같았다. 하나 비서실장은 마지막 남은 인간성마저 버릴 순 없었다. 최 회장이 해외로 도피하면, 뒤처리는 어차피 비서실의 몫.
비서실장은 처자식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어 수행 비서들을 불러 회장의 짐을 차에 싣게 한 뒤, 다짐이라도 한 듯 결연한 얼굴로 돌아섰다.
“시스템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씩씩거리며 허리에 손을 얹은 최 회장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대의 선대 때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부를 축적해왔다. 제 업보가 무언지 모르나, 그는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모든 행위는 몇만의 직원들과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위해서였고, 그에 따른 정당한 이득을 취한 것뿐이다.
‘이곳은 나의 요새다.’
타오르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최호는 귀 잘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건방진 남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퍽 의뭉스러웠지만, 최호는 무시하곤 걸음을 내디뎠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 그는 아내가 요양하던 별채를 허물고 지은 온실에 마지막으로 발을 들여 보기로 했다.
일말의 죄책감이 있다면, 그것은 목이 졸려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막지 않은 것뿐이었다.
고작 며칠 새 황폐해진 온실의 잔디가 버석하게 밟힌다. 그는 뒤따르는 발소릴 의식하며 근엄하게 뒷짐을 졌다.
“여긴, 내 추억이 가장 많은 곳이야. 그러니… 태우라는 건 내 화가 나서 한 말이고, 나 없는 동안 이곳만큼은 제대로 관리하라고 전해.”
“자식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회장님.”
낯선 목소리에 놀란 최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볼 때였다. 제 경호원들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남자가 리시버를 툭 빼더니 섬뜩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그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너, 너 어디 소속이야!”
“그건 굳이 몰라도 될 것 같고. 참으로 못되게 사셨습니다.”
남자의 손에 쥐어진 건 신문지로 둘둘 만 칼이었다.
최호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뒤로 물러나면서 악을 썼지만, 누구도 온실 문을 열지 않았다.
눅눅하게 고개 숙인 귀하디귀한 난초가 구둣발에 짓밟힌다. 다가오는 남자를 보는 최호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오, 오지 마! 이놈!”
저택 중앙에서 메케한 연기가 치솟더니, 멀리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다.
***
아버지에게 맞은 뺨을 감싼 이겸은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릴 들었다.
이제 경찰들이 들이닥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비서실장의 모습이 어렴풋이 계단 위를 스쳐 지나간 걸 보았으니, 아직 저택을 떠나진 못했을 터.
이겸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곧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혈액이 한곳으로 쏠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심상찮은 기류가 느껴지는 1층.
“불이야!”
1층에서 들려온 거친 외침. 이어 엄청난 연기가 계단 아래로 자욱하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집안 곳곳에 설치된 화재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하지만 스프링클러는 돌아가지 않았다. 고의로 스프링클러의 전원을 차단한 것처럼, 애먼 기계음만 들릴 뿐.
이겸은 상황 파악을 마친 뒤, 계단을 뛰어올랐다.
1층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연기는 물론이거니와 불붙은 커튼들이 펄럭이며 사방으로 화마를 옮기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멀고 가늘다.
당황한 사람들이 최 회장을 찾으며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최 회장 또한 저택 안에 있다는 뜻.
‘아버지, 정녕 미쳐 버리신 겁니까?’
움켜쥔 주먹이 하얗게 질려 뼈마디가 도드라진다. 분노로 몸을 떨던 이겸은 막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귀 잘린 남자,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상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 비명을 지르기 바빴다.
남자의 멱살을 놓아 버린 이겸은 다시 지하로 뛰어 내려가 연기 속을 헤치며 골프 가방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대로 문을 부수면 방염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어쩌면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 불길은 점점 거세져 1층의 반 이상을 잡아먹은 뒤.
“젠장!”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골프채를 바닥으로 내팽개친 이겸의 뒤로, 기침 소리와 함께 귀 잘린 사내가 나타났다.
“에이, 씨벌! 이거 받으라! 이 집안 미친 거 아이니? 나는 모르는 일이다. 그, 그러니 같이 디지든 살든 알아서 하라!”
남자가 던진 건 열쇠였다. 이겸은 연기가 가득한 와중에도 그것을 집어 들고 창고로 뛰었다.
경찰도 화재가 일어난 걸 알고 있을 테니, 이미 신고는 들어갔을 터.
아무리 침착하려 해도 손이 떨리고 두 눈에 핏발이 섰다. 1층은 어느덧 완전한 불바다가 되었다. 유난히 책과 종이가 많은 집이기에 화재에 취약했다.
순간, 작은 구멍 안으로 쑥 들어간 열쇠. 이어 뻑뻑한 문고리가 돌아갔다. 그는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창고 안으로 밀려드는 연기. 놀란 그녀가 침대에 앉아 고개를 든다.
이겸은 거칠게 문을 닫았다. 묵직한 압력과 함께 차단된 소음.
그는 세차게 뛰어대는 가슴을 누르며 돌아섰다. 그러곤 그녀를 응시했다. 터질 듯 뛰어대는 탓에 숨이 가쁘다.
창백한 얼굴에 난 생채기, 구부정한 자세. 더불어 3일 만에 부쩍 수척해진 얼굴까지.
그는 어금니를 강하게 눌러 물며 숨을 골랐다. 그러곤 굳은 듯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초점 없던 채우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반들거린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지 않은 순간이었다.
채우는 제 눈을 의심하듯 몇 번 비빈 뒤, 침대에서 내려가 이겸을 향해 뛰었다. 실은 뛰었다기보단,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녀를 그가 안아 든 것에 가까웠다.
채우는 이겸의 목덜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잔 떨림이 어느덧 흐느낌이 되고 오열로 바뀌었다. 그를 마주하자마자 잠시 잊고 있던 사고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선득한 유리 조각이 뺨을 그을 때 느꼈던 고통이 재생되었다.
“이렇게… 많이 다쳤을 줄 몰랐습니다.”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에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뺨에 닿은 그의 손.
간신히 울음을 그친 채우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드러난 상처보다 보이지 않는 상처가 더욱 심각했지만, 어쩐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참 이상하다. 그를 보는 순간 안도했으면서 미웠고, 두려움 속에서도 그리움이 우세했다.
사랑하지만, 무섭다.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3일이란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던 그가.
“채우 씨.”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낮아졌다.
채우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푹신한 곳에 그녀를 앉힌 채 입은 옷을 하나씩 들추는 그.
채우는 고개를 다급히 저으며 괜찮다는 말로 이겸을 밀어냈다.
“하지 마요. 흉해…. 그리고 더러워요. 3일간 씻지 못해서.”
“내가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빠른 처치를 받죠.”
“어디 부러졌으면, 이렇게 움직이지도 못했겠죠.”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놓아 보아도 그는 단호했다. 그래놓고 상처를 하나씩 확인할 때마다 그의 표정은 참담해져 갔다.
태연했던 최이겸은 완전하게 사라졌다.
“나 때문입니다….”
전신의 상처를 확인한 뒤, 생채기 가득한 손바닥에 입 맞추는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
“왜 맨날 자책만 해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커다란 남자가 몸을 웅크린 채 시선을 들었다. 소방차가 도착했는지 방음벽 안으로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숨결과 목소리에만 집중할 뿐.
바깥세상 따윈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바깥세상 따윈. 그 어떤 풍파에 휩쓸려도 우리의 세상만 견고하다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우리만이 영원하고, 우리만이 소중한. 연인 간의 그 내밀한 감정이 우선시 될 거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무서웠어요. 살면서 이렇게 무서웠던 적 없었을 거예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이겸은 그녀를 잡은 손에 힘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내가, 미쳐 버린 줄 알았습니까?”
“네, 미친 줄 알았어요. 3일이라니…. 적법 절차, 납치, 감금. 다 좋아…. 그래도 3일이라뇨. 3일을 버티라뇨.”
그의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 피가 묻어 엉겨 버린 머리카락 끝. 거울이 없어 제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얼마나 엉망일지는 짐작이 갔다.
이겸은 자꾸만 몸을 빼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주춤거리며 침대 끝으로 물러난 여자가 야속하단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요…. 최이겸 씨가 무서워요. 좋은데 두렵고, 너무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밉고 야속한지 모르겠어.”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온다. 커다란 눈에서 따뜻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젠 창피하지도 않았다. 땟국물이 흐르든, 퉁퉁 부은 눈이 흉하든 상관없었다.
그에 젖은 두 눈을 응시하던 그의 턱 근육이 불거진다. 채우는 이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나…. 당신 앞에선 변호사 정채우 말고, 그냥 여자 하고 싶어요.”
똑똑한 정채우, 예쁜 정채우, 똑 부러지는 정채우, 상냥한 정채우,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정채우.
제가 바라던 모습들은 역시나 거짓이었다. 그저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던 속물적인 껍데기였을 뿐.
진정으로 바랐던 건, 감정에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그런 평범한 여자가 되는 것이었나 보다.
속이 울렁거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비틀대자 조금 떨어져 있던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의 시선이 닿은 건 그녀의 뺨이었다. 손바닥이었고, 멍이 올라온 팔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여린 몸을 조심스레 당긴다. 그러곤 다시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무릎 위에 앉혔다.
“당신은 내 인생에 유일한 여자예요.”
믿기 어렵게도 그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채우는 제 어깨에 이마를 댄 남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그러곤 부드럽게 누르자, 고개를 틀어 목덜미에 입 맞추는 그.
구애하듯 이어진 감미로운 입맞춤에 또다시 서러운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어차피 용서할 수밖에 없으면서 한껏 투정 부린 마음이 콕콕 찔린다.
“걱정이 돼서…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나.”
“그걸 말이라고…!”
“그래도 용서해 줘요. 내가 미안합니다.”
그는 너무도 많은 감정을 알려 주었다. 제가 그에게 알려 준 것보다 어쩌면 더 많은 것들을.
다정하게 다독이며 울 수 있는 자릴 만들어 주는 남자. 할 수 없는 말을 하게 하고, 보인 적 없던 모습을 끌어내는 유일한 남자.
제 인생에 유일한 남자, 최이겸.
채우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서서히 의식을 놓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확신했다. 이 다정한 위로에 중독되어, 분명 또다시 그에게 투정을 부리고 말 것이란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처럼 사랑해 줄 거란 것도.
***
불은 다섯 시간 만에 진화되었다. 소방차 다섯대가 번갈아 가며 물을 뿌렸으며, 소방 헬기까지 동원되어 화재를 진압했다.
소방대원들이 큰불을 잡자마자 한 일은, 지하 창고에 갇혀있던 두 사람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저택이 잿더미가 되어가던 와중에도 두 사람이 몸을 숨긴 창고는 무사했다.
이유는 수장고로 사용하기 위해 특수 공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라는데, 이 형사는 그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기절해 버린 정채우.
소방대원들이 창고 문을 열자마자, 최이겸은 그녀를 안고 뛰쳐나왔다. 반쯤 미친 사람처럼 구급차에 오르는 그 모습에 이 형사는 등줄기가 선득해지는 걸 느꼈다.
혹여라도 정채우가 잘못되었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면?
온갖 가능성이 그를 괴롭혔고, 처음 보는 최이겸의 모습에 긴장했다. 이러다 혹시라도 정채우에게 문제가 생기면, 최이겸은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이 형사는 시커멓게 그을린 저택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였다. 사상자 확인차 저택 주변을 수색하던 구급대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날카롭게 외친다.
“들것! 생존자 발견했습니다!”
***
최이겸은 정신을 잃은 그녀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채우는 단순 탈수로 인해 실신한 것이 아니었다. 교통사고 당시 부딪친 갈비뼈엔 금이 갔고, 놀란 근육은 내장을 압박했다. 고관절이 비틀어졌으며, 뒤늦게 몰아친 통증에 정신이 견디질 못했다.
“일부러 깨우지 않는 거라고 했습니까…?”
“예. 그래야 통증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요. 최대한 오래 주무시게 해야 합니다.”
“그 정도입니까…?”
응급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이 지긋한 교수가 직접 찾아와 그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겸은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이어 응급실에서 병실로 올라온 그는 죽은 듯 잠든 채우를 내려다보며 섰다.
통증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겁먹었던 여자.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제가 제시한 3일을 받아들이고, 앓는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는 저 자신에게 화가 났다. 참을 수 없는 자괴감에 분노가 치솟았다.
‘나요…. 최이겸 씨가 무서워요. 좋은데 두렵고, 너무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밉고 야속한지 모르겠어.’
그것은 투정이 아닌,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녀에게만은 결코 괴물로 보이고 싶지 않았건만, 믿음이란 명목하에 저열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기회를 빌미 삼아 사랑하는 여자를 사지로 밀어 넣은 괴물이 자신이었다.
이겸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린 앞머릴 쓸어넘겼다.
그때였다.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리더니 이 형사와 이시윤, 김 실장이 들어왔다.
그들은 소리 없이 고개만 꾸벅 숙여 채우의 앞에 서 있는 이겸에게 인사했다. 그도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인 뒤, 이불을 정돈해 주곤 병상 앞을 벗어났다.
“새벽인데, 다들 미안합니다.”
피로가 잔뜩 묻어나는 이겸의 말투. 김 실장은 고개를 숙였고, 이시윤은 채우가 걱정되는지 계속해서 병상 쪽을 살폈다.
“자책하지 마십쇼.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모르셨잖습니까. 방화랍디다. 증인들 다 데려다가 수사 중인데, 최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증언이 다수입니다.”
이 형사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체포하셨습니까?”
“아… 그 소식을 안 전해드렸네. 내 정신 좀 봐.”
“뭡니까.”
이겸은 마른세수한 뒤, 손가락 사이로 두 눈을 치켜떴다.
최 회장을 덫으로 밀어 넣기 위해 벌인 일이다. 화재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계획이 틀어져선 안 되었다.
“그러니까…. 아버님께선 지금 수술실에 계실 겁니다.”
“수술이라뇨.”
눈살을 찌푸린 이겸이 제 눈치를 보는 이 형사와 김 실장, 이시윤을 차례로 돌아보며 재차 물었다.
“수술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칼에 찔리셨습니다. 몇 방을 찔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보복형 범죄 같습니다. 상대는 당연히 정영수 패거리고요. 지난번 신여진 씨 일에 대한 복수 아닐까… 싶습니다.”
이겸은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그러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투로 물었다.
“살 수 있습니까?”
“글쎄요. 의사 말로는 심각하다던데….”
“살리셔야 합니다.”
“예?”
이 형사는 차라리 잘된 일 아니냐고 물을 뻔했다. 법이 내리지 못한 벌을 하늘이 내린 거 아니냐고.
“꼭 살려서 법의 심판대에 세워야 합니다.”
깊은 호수처럼 고요한 어조가 이어졌다.
“아버지에겐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일 테니까요.”
이 형사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몇 번 주억였다. 그의 말이 맞다. 윤씨에게 살인을 교사하면서도 표정 한 번 바뀐 적 없다던 최호였다. 제 아들을 억압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납치·감금한 남자는 아버지의 자격 또한 없었다.
권력의 광기에 젖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미치광이에겐 죽음마저 사치일 테다.
“수술실 앞에 가서 살려달라고 기도라도 하고 와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정 변호사님이 억울하지 않지.”
이 형사의 너스레에 작게나마 웃음이 터졌다. 그때 소파 끝에 앉아 시종일관 긴장한 표정이던 김 실장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형사님이 계셔서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전무님, 잠시 나가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 이 형사가 입을 다물었다. 이겸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흐트러진 앞머릴 쓸어넘겼다.
“소환 조사는 언제부터죠.”
“아직 압수 수색 단계라 시간이 있습니다. 정식 절차를 밟으려면 최소 6개월은 걸릴 테니, 그동안만이라도 나가계시는 게 어떨까요.”
“휴가, 주는 겁니까?”
능청스러운 질문에 김 실장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겸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휴대 전화를 꺼냈다. 최이서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무려 스무 건. 하지만 단 한 건도 받지 못했다.
“최이서는 찾지 마십시오. 이번 주 안으로 긴급 주총을 엽니다. 안건은 회장 해임안과 사외 이사제 도입안. 그리고 후계 경영 포기 건으로 하죠.”
엄청난 내용을 무미건조하게 쏟아낸 그가 다시 병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 아슬아슬한 뒷모습에 다들 침묵한 채 병실을 나섰다.
다시 찾아온 적요.
살짝 찌푸려진 채우의 미간을 누른 그가 피식 웃었다.
“꿈속에서 맛있는 거라도 먹는 겁니까.”
대답 없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다, 상체를 숙여 이마에 키스했다.
익숙한 체온이 느껴진다. 몸을 데우는 온기와 설레게 만들던 맥박 모두 그대로였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살아있다.
따뜻한 이마에 닿은 입술이 떨리고, 자잘한 전율이 전신으로 번져갔다. 팔꿈치로 체중을 지탱한 그는 결국 그녀의 가슴팍에 다시 얼굴을 묻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