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4. 열대야
오랜만에 취조실을 찾은 정영수가 히죽 웃으며 투명한 유리 벽을 보았다. 그 너머에 누가 있는지 모두 안다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앉아있는 그.
하얀 턱시도에 붉은 보타이. 포마드로 정돈된 헤어스타일은 누아르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배우 같았지만, 실상은 그저 돈 많은 깡패 새끼일 뿐.
“뭘 해도 입을 열진 않을 거고. 변호사 올 때가 됐는데….”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유리 너머의 정영수를 관찰하던 이 형사가 말했다.
“어차피 미끼잖습니까. 저놈이 대가리일지, 몸통일지, 곁다리일지는 변호사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자자, 살릴 것이냐 버릴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형사들은 낄낄대며 시간을 확인했다. 뭔가를 알아내야 하는 거라면 체포와 동시에 취조가 이루어졌겠지만, 그들의 목적은 48시간을 꽉 채워 정영수를 가둬놓는 것이었다.
그럼 최이겸이 고용한 해커들이 사이트를 장악해 모든 자료를 뽑아낼 터.
순간,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한 이 형사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대박. 허명재 변호사 들어갑니다. 법무법인 명재가 붙었네요.]
“나이스. 그럴 줄 알았지. 좋아,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려.”
[예.]
정영수의 자료가 담긴 서류철을 든 이 형사는 문을 열고 취조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삐딱하게 앉아있던 정영수가 고개를 젖히곤 능글맞게 웃는다.
“어차피 풀려날 거, 수갑이나 좀 풀어주시지?”
그에 이 형사는 짐짓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정 사장 주먹이 좀 매워야지. 날 때리고 정당방위 행세할 텐데, 그럼 둘 다 골치 아파져서 안 돼.”
“변호사 올 겁니다.”
“아, 왔어. 법무법인 명재의 허명재 대표가 직접.”
“뭐요?”
허명재의 이름을 들은 정영수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 반응으로 예상해보건대, 역시 이놈은 대가리도 몸통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잘라내면 그만인 꼬리에 불과한 놈.
“왜, 직접 선임한 게 아닌가 보지?”
묵비권이라도 행사할 요량인 양 입을 다물어버린 정영수.
그의 죄목을 나열해보면 A4용지를 가득 채울 만큼 넘쳤다. 하지만 하나같이 공소권 없음, 혹은 혐의 불충분으로 사건이 종결되었고 합의가 필요한 경우는 합의금으로 사건을 무마시켰다.
이번에도 분명 48시간 안에 정영수를 풀어주란 상부의 지시가 내려오겠지.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형사는 그 몸통이 궁금했다. 더구나 허명재가 왔다는 건, 제대로 한판 해보자는 뜻.
“형사님,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동료 형사가 취조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엔 얇은 은테안경을 쓴 허명재가 서류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이 형사가 일어나려 하자, 마치 윗사람인양 손짓한 허명재가 들어와 정영수 앞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관련 서류 확인해보시고. 형사님, 제 의뢰인과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구석에 놓인 카메라를 가리키는 허명재.
“이번 사건은 꽤 여러 가지가 얽혀있어서 골치 좀 썩으실 겁니다.”
이 형사의 빈정거림에 허명재가 차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의뢰인에게 죄가 있다면, 달게 벌을 받아야죠. 그러니 잠시.”
법무법인 명재는 정치권과 대기업의 대형 소송을 주로 맡는 로펌이었다. 그들은 권력이며, 정부의 일부이기도 했다. 사법부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명재를 껄끄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럼, 15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차라도?”
“괜찮습니다.”
이 형사는 심드렁하게 눈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에 잠시간 침묵이 도는 취조실.
카메라의 불이 꺼지고 난 뒤에야 한숨 쉰 허명재가 정영수의 앞에 마주 앉는다.
“난 그쪽 선임한 적 없는데.”
정영수는 독기 품은 눈으로 허명재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가방에서 서류 봉투 몇 개를 꺼낸 허명재가 펜을 굴리며 양손을 모은다.
“그건 그쪽 생각이고. 이미 선임되었으니 불평은 하지 말지요.”
“왜. 내 입막음하러 오셨나? 압수수색 한다니까 겁먹고 쫄았습니까?”
“예, 쫄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쭉 늘인 입술을 축인 허명재가 말을 이었다.
“이번엔 풀려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보니까… 영상 수위가 꽤 높더라고.”
“뭐? 뭐라는 거야?”
“좀 살고 나와요. 특수범죄 혐의까지 더하면, 아마… 7년? 거기에 미성년자 강간혐의를 더하면 10년. 증거까지 제출하면 15년도 되겠고.”
“어이!”
의자를 박차며 벌떡 일어난 정영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허명재는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진정하라 말한 뒤, 서류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이 문서를 제출하면 아마 무기징역도 가능할 겁니다. 살인, 마약, 증거조작, 협박. 뭐, 아주 조금만 손보면 국민적 공분도 살 수 있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명재를 빤히 보던 정영수가 허릴 젖혀 웃기 시작했다. 미친놈처럼 낄낄거리더니,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다가 테이블에 머릴 박기 시작한다.
쾅쾅, 소릴 내며 자해를 시작한 정영수. 당황한 허명재가 일어나 말리려 했으나, 그의 복부를 발로 차버린 정영수는 악을 썼다.
“야, 이 개자식들아!”
뒤로 밀려나 벽에 부딪힌 허명재가 복부를 움켜쥐곤 욕지거릴 내뱉는다. 이마가 피로 범벅된 정영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압수수색 한다고 찾는 영상이 나올 줄 알아? 공생하셔야지. 이거 되게 서운하네…? 씨벌, 가서 전해. 사내놈들끼리 좆질하는 거만 찍힌 거 아니라고. 나 잘못되면, 같이 죽는 거라고.”
***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채우는 첫 손님을 마주하곤 황당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답답한 블라우스 맨 윗단추를 푼 그녀가 여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설마…. 정말 선임하러 오실 줄 몰랐어요.”
머리를 하나로 곱게 틀어 올린 여진은 이틀 새 몇 년은 늙어버린 듯 힘이 없었다.
차를 내어온 미령이 신기하단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본다. 채우는 어서 나가보라고 눈짓했다.
미령이 나간 뒤에야 찻잔을 든 여진이 고상한 어투로 말했다.
“미안하다. 엄마가… 못나서.”
그에 시선을 내리깐 채 사건 파일을 살피던 채우가 눈을 치켜떴다.
“미안한 게 한두 개가 아닐 텐데…. 어떤 게 미안한지 정확하게 해줘요.”
“채우야.”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감싼 여진의 얼굴에 수치심이 가득 차올랐다.
“말해요.”
“네 말, 믿어주지 않은 거 미안해. 변명의 여지없이 엄마가 잘못한 거야. 뭐에 홀렸는지, 그 남자가 아니면 다시 바닥에 나앉을 것 같고…. 그랬어.”
“그래서요.”
“경찰이 내민 증거들을 보는데…. 아는 얼굴이 가득하더라. 우리 가게 애들이었어. 내가 애들을 피해자로 만든 거야.”
“…그럼 난? 엄마는 가장 가까이에 피해자가 있는데도 모른 척했어요. 근데 이제 와서?”
냉정한 반응에 아래턱을 떨던 여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채우는 펜을 움켜쥐고 여진을 노려보았다.
이제 다신 엄마라 부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혈육의 정이 그리 쉽게 끊어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를 외할머니 호적에 올렸잖아요…. 궁금했어요. 내가 창피했어요?”
“아니야, 그게 아니라….”
“미안해하지 마요. 난 항상 엄마를 창피해했으니까.”
“채우야…. 엄마가 미안해. 응?”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일 아니에요. 나한테 정말 사과하고 싶으면, 수사에 협조하고 정영수와의 관계. 완벽하게 끊어요.”
엄마는 분명 정영수를 사랑했을 거다.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면, 누구나 아는 문제를 본인만 자각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럼, 사랑이 죄인 걸까? 어째서 사랑은 늘 죄가 되어버리고 마는 걸까.
“정영수 고소한 거 저예요. 그리고 전 합의 안 할 거고, 다른 피해자들을 모아 계속해서 고소할 거예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겠지만, 그래도 할거예요. 유사 강간까지 포함해서.”
채우는 서류를 챙겨 일어났다. 선임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제게 사죄하러 온 거라면, 더 이상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이 복잡하게 됐어요. 오늘 퇴근하는 대로 내 집무실로 와 줘요. 당신이 필요해.’
이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이미 48시간이 흘렀지만, 정영수는 풀려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혐의가 인정되었다는 것, 혹은 변호사가 방어에 실패했다는 것일 터.
“채, 채우야! 잠깐만!”
나가려는 그녀를 황급히 붙든 여진이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 든 건 오래된 휴대 전화 여러 대. 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주위를 살핀 여진이 쇼핑백을 조심스레 쥐여준다.
“10년 전부터 영수 씨가 애지중지하던 거야. 전원도 안 들어오는데 왜 이리 애지중지하는지 모르겠어서…. 이번 일 터지고 나니까 이상해 보이더라.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게 도움이 된다면, 이 엄마 좀 용서해줄래? 응?”
***
여진이 돌아간 뒤, 채우는 해랑의 동료들에게 온갖 질문을 받아야 했다.
어머님이 너무 젊은 거 아니냐는 둥, 어머닐 닮아 미인인 거냐는 둥,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냐는 둥. 하지만 채우는 ‘열일곱에 저를 낳으셨으니, 젊고 예쁜 게 당연하죠.’라는 말로 그들의 질문 공세에서 벗어났다.
열일곱에 낳은 아이.
꽤 많은 사연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한 그 수식어에 다들 어색한 표정으로 물러난다.
채우는 여진이 주고 간 휴대 전화를 하나씩 살펴보았다. 전원이 들어오는 건 두어 개뿐, 나머지는 꽤 오랫동안 방치한 듯 방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진이 의심할 정도의 물건이라면,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수십 대의 휴대 전화를 쇼핑백 안에 쓸어 담은 그녀는 차를 몰고 창하 그룹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처리할 일이 많아 퇴근이 늦어졌으나, 어차피 약속한 시각은 오후 8시.
로비로 올라간 그녀는 낯설지 않은 보안요원들의 안내를 받아 직원 게이트를 통과했다.
“27층으로 곧장 올라오시랍니다. 그리고 이거.”
채우는 보안요원이 건넨 방문객 명찰을 받아들었다. 기분이 묘하다. 퇴사 이후 첫 방문이나 마찬가지.
뒤늦게 퇴근하던 사람들이 흘금거리며 그녀를 본다. 분명 모르는 얼굴일 테지만, 어쩐지 불쑥 알은체할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승강기를 타고 27층에 도착한 채우는 상무실이었던 곳을 지나 복도 끝까지 걸었다.
“정채우 씨?”
막 전무실 쪽으로 몸을 틀던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채우의 뒤엔 엄청난 양의 서류를 든 김 실장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오랜만이에요. 혹시 오늘 오신다는 분이….”
“네. 호출하셔서요.”
뜻밖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김 실장이 데스크를 지나 전무실 문을 열어준다. 안에는 커다란 화이트보드와 그 앞에 선 최이겸이 있었다.
“전무님, 정채우 변호사님 오셨습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 부근까지 접어 올린 채 고민에 빠져있던 그가 돌아본다. 이겸은 묘하게 긴장되는 표정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며 근사하게 미소지었다.
“어서 와요, 정채우 씨.”
이전의 상무실보다 두 배는 더 큰 곳. 이겸에게 정신이 팔려 의식하지 못했지만, 집무실 안엔 이 형사와 그의 동료. 그리고 얼굴 모르는 몇몇과 원 테이블 다이닝의 주인인 신재훈이 있었다.
물감이 잔뜩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그녀에게 꾸벅 인사하는 재훈. 채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주 인사한 뒤, 이겸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 다 모였으니,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봅시다.”
그가 커다란 테이블을 양손으로 누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채우는 오래전 그와 함께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그땐 거의 이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일개 사원과 상무의 거리는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영수의 변호인으로 허명재가 붙었습니다. 그런데 딱 봐도 본인이 선임한 것 같지는 않고, 몸통이 붙인 것 같더라고요. 변호사랑 둘이 면담하면서 대가리 깨지도록 자해를 하더라니까요?”
이 형사가 당시를 떠올리며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병원으로 이송됐어요?”
채우의 질문에 이 형사는 검지를 들어 올리곤 좌우로 흔들었다.
“제가 아주 친절히 밴드 붙여줬습니다. 사나이가 살다 보면 대가리도 깨지고, 아구창도 날아가고 그러는 거죠. 이런 거로 일일이 병원 다니면, 안돼요.”
장난기가 다분한 이 형사의 말에 다들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중요한 사안인 만큼, 모두 크게 동요하진 않는 눈치였다.
입가를 살짝 가린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정면에 놓인 화이트보드였다. 꽤 많은 자료가 빼곡히 들어찬 보드. 하루아침에 마련된 자료들이 아님을 채우는 알 수 있었다.
이어 정 중앙에 붙은 한 장의 사진을 본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보드 앞으로 다가갔다.
“뭐에요? 이시윤이 왜….”
채우는 중앙에 붙은 시윤의 사진을 툭 뜯었다. 그러자 다가온 이겸이 그녀의 손에 들린 사진을 다시 보드에 붙이곤 어깨를 감싸 쥐었다.
“이시윤 변호사가 생각보다 꽤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그녀의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지은 이겸을 대신해 이 형사가 대답했다.
“이시윤 변호사가 이시현 동생이랍니다. 죽은, 이시현이요.”
머릿속 사고회로가 느리게 돌아갔다. 이시현이 누군지 차근차근 떠올리던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이시현 씨요?”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힌 이겸이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설명해줄게요.”
보드 앞으로 돌아간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좌중을 둘러본다.
“제 목표는… 짐작하셨다시피 창하 그룹의 주가가 바닥을 쳐 한방에 무너지는 겁니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지만, 다행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창하에 몸담은 사람은 김인경 실장뿐이었다. 더불어 김 실장 또한 조금의 동요 없이 최이겸의 말을 경청했다.
이겸은 테이블을 손끝으로 쓸더니 채우와 가까운 곳에 걸터앉았다.
“물론, 대책 없이 망하게 두진 않을 겁니다. M&A를 통해 일부를 흡수할 거고, 그 시점부터 대주주 명단이 바뀔 겁니다. 모두, 제 사람들로요.”
그가 보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온갖 좋은 것들이 잔뜩 든 물일지라도 말입니다. 이제 퍼낼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 우린 뭘 하면 됩니까?”
이 형사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좌중을 천천히 훑던 이겸이 일어나 한 명 한 명의 뒤에 서서 어깨를 짚는다.
“이 형사님은 지금처럼 공명정대한 수사를 해주시면 되고, 신재훈은 털어온 정영수의 서버를 파헤칠 겁니다. 그리고 김인경 실장님은 저와 함께 인수준비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렇게 한 바퀴 돌아온 그가 채우의 어깨를 지그시 움켜쥐었다.
“마지막으로 정채우 변호사님은 각종 계약서 검토와 관련자의 고소 고발을 진행할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여잡니다. 다들 흑심 집어넣으세요.”
***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요정의 조명이 희미하게 빛난다. 이전의 화려함에서 벗어나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요정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입구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경호원들이 있었고, 한쪽에선 긴장한 수행원들이 내려올 지시를 기다렸다.
그리고 더욱 깊은 곳, 별채엔 최호를 주축으로 한 여섯 명의 남자가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 허 변호사, 요즘 고생이 많아. 깡패 새끼 상대하느라.”
최호가 술 주전자를 들어 허명재의 잔에 따랐다. 양손으로 잔을 쥔 허명재가 껄껄 웃으며 받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정영수가 유치장에 있는 이상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영상은 따로 관리되고 있는지, 압수수색에도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려. 꼭 뒤통수치는 것들이 하나씩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다. 이곳에 모인 분들이 다 도와주실 텐데. 안 그렇습니까? 여기 계신 분 중, 최 회장님 덕 안 본 분이 있습니까? 제가 볼 땐, 다들 충성을 바쳐도 모자랄 것 같은데.”
허명재의 말에 모인 이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모두가 법조계와 정계, 재계를 주무르는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허명재의 말대로 크고 작은 일들로 최호의 라인이 되어 지금껏 해결해온 일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너무들 그러지 말고, 들어요. 내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아. 하하!”
술잔을 기울이던 최 회장은 말없이 앉아있는 최이서를 흘깃 보며 혀를 찼다.
“네 놈은 또 왜 이렇게 멍해?”
“예? 아뇨. 아닙니다.”
이서는 그렇게 말하곤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에 상체를 기울인 최 회장의 목소리가 은근해진다.
“요즘 이겸이가 무슨 생각하는지, 네놈은 알지?”
“아뇨, 제가 그놈 속을 어떻게 알아요. 똑똑하니 알아서 잘….”
“쯧, 시끄러워. 넌 언제까지 네 동생 그림자 안에서 살 거냐. 정신 차려, 이놈아. 이제 더 큰물에서 놀아야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예….”
이겸과 달리 최이서는 꽤 순순한 편에 속했다. 그에 만족스럽게 웃어 보인 최 회장은 기분이 좋아졌다.
점점 술자리의 흥이 오른다. 최호의 손짓에 양개문이 열리더니 가슴 부분을 아슬아슬하게 동여맨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들어왔다.
헤벌쭉 웃으며 여자들을 반긴 그들이 치마폭을 파고든다. 야살스러운 웃음과 손길에 이미 몇몇은 넥타이를 풀고 있었다.
최이서는 옆에 앉은 여자가 따르는 술을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술맛이 원래 이토록 거지 같았는지 반추하며.
***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들 수 없는 밤을 맞이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채우는 빈 옆자릴 더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궁극적 목적은 정확하지 않지만, 이시윤이 원하는 것도 분명 영상일 겁니다.’
사건 재조사를 바라는 이시현의 유가족. 그중에서도 변호사인 이시윤이 가장 열렬하게 재조사를 요구하며 관련 증거들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시윤은 최이겸이 누군지, 그날의 사건과 어느 정도의 연관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쪽같이 모른 체했던 거였다.
채우는 제게 최이겸의 상태를 묻고 상황에 관해 언질 주던 이시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게 모두, 저를 이용해 최이겸에 대해 알아보려는 수였을 수도 있다니.
괜히 이용당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겸이 말해준 건 여기까지지만, 분명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없는 침실에서 빠져나온 채우는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이겸을 발견했다. 밤빛을 받으며 앉아있던 그가 채우를 발견하곤 고개를 든다.
“왜 일어났어요.”
“그냥 깼어요. 물 좀 마시려고….”
“잠이 안 옵니까?”
“네.”
“그럼, 물 마시고 이리 와요.”
“음, 이리 오란 말이 제일 무섭더라?”
괜히 입술을 삐죽인 그녀는 피식 웃으며 주방으로 가 물을 한 병 꺼냈다. 그러곤 이겸의 옆으로 가 앉았다.
둘이 앉아도 넉넉한 크기의 피아노 의자.
“오늘 좀…. 놀랐어요. 몰랐거든요.”
물을 마신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자, 현이 끊어진 피아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채우는 건반이 드러나도록 뚜껑을 열었다. 정말로 피아노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툭툭, 나무 부딪치는 감촉이 느껴질 뿐.
“최이겸 씨가 그렇게 오랫동안 이번 일을 준비했다는 것도, 속에 있는 화를 다스리며 살아왔다는 것도….”
“손이 망가진 이유를 알게 된 그날부터 준비한 겁니다. 나는 꽤 인내심이 강하거든요. 채우 씨 앞에선 소용없는 말이긴 하지만.”
그의 말투에 웃음기가 배어난다.
“난 아버지란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에요. 증오하는 것도, 복수를 꿈꾸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 몫을 스스로 챙기는 거죠.”
그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채우는 이겸의 어깨에 툭 기댔다. 그러곤 멍하니 그가 응시하는 잿빛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엄마가 찾아와서 사과하는데, 사실 꼴도 보기 싫었어요. 근데도 끝끝내 그 손을 뿌리치진 못하겠더라고요. 난 바본가 봐요.”
“당신은 참 착해. 묘하고.”
“착한 건 진짜 아닌데.”
“아니, 착해요.”
둘은 한쪽 구석에서 충전 중인 수십 대의 휴대 전화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부러 켜보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안에 있을 자료들이 무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저 요망한 물건 때문에 잠이 안 오는 걸 수도 있겠다. 안에 들어있을 자료들이 궁금해서.
“저 안에 있겠죠…? 그 영상이라는 거요.”
“압수수색 된 서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영상들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영수가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게, 고작 그 영상 하나 때문은 아닐 거예요. 어쩌면 당신 어머니는 판도라의 상자를 우리에게 가져온 걸지도 몰라요.”
“제 영상도 있을까요…?”
작은 중얼거림에 이겸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녀의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앉은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곤 내려다보았다.
“겁납니까? 아직도?”
“네. 아마… 평생 생각날 거 같아요.”
“섬을 하나 사야겠어요. 종종 장기휴가를 떠나죠. 인터넷도 안 되고, 아는 사람도 없는 그런 곳으로.”
이겸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채우는 상처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아예 같이 살아요.”
“진심입니까?”
“지금은요.”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그녀의 뒷머리로 커다란 손이 파고들었다. 강하게 당겨지는 느낌과 함께 시작된 입맞춤. 처음부터 진하게 혀를 넣고 질척하게 얽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엉겨 붙었다.
그는 채우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안았다. 뚜껑 닫은 피아노 위에 앉힌 뒤, 원피스형 잠옷을 머리 위로 벗겨냈다.
서늘한 밤이 피부 위로 내려앉는다. 그는 그녀의 귓바퀴를 혀로 핥고 말랑한 귓불을 깨물었다. 홍조 띤 뺨을 감싼 채 다시 입술을 찾아 누르는 남자.
어쩐지 조급하고 무겁다.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채우는 그의 목덜미를 양팔로 감았다. 꼭 끌어안아 커다랗고 넓은 등을 토닥였다.
“괜찮을 거예요. 최이겸 씨 애인 변호사예요.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내가 손에 쥔 법은… 절대 이겸 씨를 상처입히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낯간지러운 소릴 한 건 아닌지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단단한 가슴을 가볍게 밀어보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끌어안긴 채 그녀의 하얀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채우는 빨개진 남자의 귀 끝을 만지작거려보았다. 부러 표정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최이겸 씨 편이라고요…. 그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열대야가 지속되었다. 일기예보에선 당분간 바람 없이 맑고 더운 날이 이어질 거라고 했다.
에어컨 없이는 한시도 견딜 수 없는 더위가 시작됐지만, 사람들은 열대야가 물러나고 찾아올 장마를 기다렸다.
더위를 식히고 가을을 끌어당길 장마를.
벌써 이틀째 텅 빈 침대에서 눈을 뜬 그녀는 서둘러 출근을 준비했다. 이겸은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한국에 없었다. 그와 함께 지낼 땐, 이 집이 이렇게 큰 줄 몰랐다. 그렇다고 이겸의 덩치가 산만 한 곰 같은 것도 아닌데….
김 실장의 복귀 이후, 이전보다 어쩐지 더 바빠진 그. 채우는 오늘도 잘 잤냐는 메시지를 보낸 뒤,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평범한 하루였다. 신기하리만치 별거 없다고 느껴지는 하루. 세 건의 소송을 위해 강북, 강남, 경기 북부 법원을 차례로 다녀왔고, 당연하게도 점심은 커피로 대신했다.
거기에 해외 법인 건을 마무리하느라 회의까지 주도한 탓에 마지막엔 살짝 당이 떨어졌다. 정신이 혼미했지만, 해외 법인 사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들어올 보너스를 생각하며 참았다.
지금도 먹고사는 덴 걱정이 없다만, 언제까지 살던 집을 비워둘 수도, 이겸의 집에 빌붙어 살 수도 없었다. 하물며 좀 더 보안이 좋은 곳으로 이사하기 위해선 보증금을 늘려야 했다.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고객 상담을 비롯해 온갖 소송자료들 검토로 저녁 식사까지 거른 그녀는 오랜만에 복길의 피아노학원을 찾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찾지 못해 마음이 쓰인 탓이다.
오후 8시 30분. 마지막 수강생의 연주를 지켜보던 복길이 문밖에 선 채우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예쁘장한 남자가 악보를 들고 일어난다. 그러곤 꽤나 친근한 표정으로 복길과 인사를 나누고 학원에서 나왔다.
채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꾸벅 인사한 뒤, 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수강생이랑 뭐 이렇게 은근해?”
채우의 너스레에 건반을 소독한 복길이 뿌듯한 표정으로 코끝을 찡긋거렸다.
“이 언니, 아직 죽지 않았다?”
“아, 뭐야. 설마… 정말 둘이 뭐 있어?”
“야! 있긴 뭐가 있어. 그냥 수강생이지. 애가 잘 웃고 참 착해. 그냥 딱 거기까지야. 나한테만 친절한 거 아니고, 남들에게도 다 친절한. 그런 애라고.”
“에이, 난 또.”
그녀는 괜히 기대했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복길이 아랑곳없이 학원 정리 정돈을 시작한다. 그에 채우는 소파에 길게 누워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평범한 하루였기에, 평범하게 피로하다. 배가 고프고, 잠이 고팠으며, 누군가의 품이 고프기도 했다.
“복길아.”
“응?”
“나, 연애해.”
“알아. 그런 거 같더라.”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근데 너, 괜찮아? 요즘 TV 시끄럽던데.”
복길이 말하는 건 정영수와 관련된 일이었다.
몸을 일으킨 채우는 헝클어진 머릴 정돈하며 말했다.
“나가자.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 그리고 대화를 하려면, 배가 불러야지.”
“너 아직 저녁 안 먹었어?”
“쫄쫄 굶었어. 진종일.”
실소한 복길이 서둘러 앞치마를 벗더니 핸드백을 챙겼다. 채우는 배시시 웃으며 복길에게 팔짱을 꼈다.
“전에 갔던 실내 포차 갈까? 술도 한잔하게. 거기 안주 맛있던데.”
“네가 사는 거지?”
“응, 내가 사는 거야.”
둘은 차를 두고 걸어서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겸은 오늘 하루 단 한 통의 연락도 해오지 않았다. 급한 일이 생겼다더니, 전화 한 통 못할 만큼 바쁜가 싶어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찾은 실내 포장마차. 두 여자가 먹기엔 많은 양의 안주를 주문하고, 술은 각 1병씩. 내일을 위해 자제하자며 술잔을 부딪친 여자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난 말이지, 네가 정말 존경스러워.”
뜬금없는 칭찬에 음식을 욱여넣던 채우가 돌연 기침을 했다. 사레들린 듯 콜록거리다 물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툭하면 사레가 들린다. 기관지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뭐가 갑자기?”
물을 거의 반 통쯤 비운 뒤에야 채우는 고개를 들었다. 빨개진 눈가를 티슈로 누르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렇잖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대기업 퇴사하고 곧장 변호사사무실에 들어가더니, 예전보다 더 잘됐어. 게다가 이젠 연애까지 한다며. 난 내 몸이 피곤해서 연애는 못 하겠더라. 게으른 거지. 연애도 부지런해야 한다던데.”
복길이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곤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술이 오르나 보다.
“나도 다른 남자였으면 안 했을 거야. 그 남자니까 연애하는 거지.”
“대체 누군데?”
“음… 나중에. 설명할 수식어가 너무 많아서. 그냥 한번 봐. 소개할 테니까.”
“사진도 없어?”
그러고 보니 정말 둘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었다. 아차 하는 채우의 표정을 본 복길이 쯧쯧 혀를 찬다.
“조심해라. 요즘 선수들은 여자랑 사진 안 찍는대. 그래야 여러 여자 만날 수 있어서.”
선수?
불쑥 치민 불쾌함에 채우가 소리쳤다.
“야! 아니거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없어.”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그래!”
“하이고. 사귀면 첫날 기념으로 찍는 거 아니었냐?”
“이게 진짜!”
채우는 복길의 옆구릴 쿡 찔렀다. 계속해서 쿡쿡 찌르자, 낄낄대며 웃던 복길이 항복을 외친다.
두 여자는 기분에 취해 추가로 생맥주를 두 잔이나 해치운 뒤에야 실내 포차에서 나왔다.
“근데…. 스물 좀 넘은 남자애인데, 피아노 칠 땐 왜 그렇게 섹시한지 몰라.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나?”
“그냥 혼자 생각하는 건데, 뭐 어때. 그리고 나도 알아. 피아노 치는 남자가 얼마나 섹시한지.”
“자고 갈 거지?”
“응.”
밤공기를 마시며 걸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덥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우거진 초목, 담벼락을 뒤덮은 담쟁이덩굴, 콘크리트 곳곳을 뚫고 올라온 야생초.
여름의 향기가 낯설다. 제가 아는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나날들이었다.
“어? 간판 불을 안 껐네?”
화들짝 놀란 복길이 먼저 학원으로 뛰어갔다. 학원과 연결된 집으로 향하는 계단 밑. 누군가 버린 담배꽁초가 가득한 자리에 그녀가 멈춰 섰다.
-자요?
순간 도착한 이겸의 메시지.
채우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제가 늦었나요.]
탁하게 갈라진 목소릴 듣자 안도감과 동시에 걱정이 밀려든다.
“바빴어요?”
[아무래도 릴레이 회의를 하다 보니…. 하도 소리를 쳐서 목도 좀 쉬었고. 집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예요?]
“귀신같긴. 저 복길이랑 있어요. 오늘은 여기서 자려고요. 오랜만에 둘이.”
[벌써부터 집에 가기 싫어하면 곤란한데.]
심상한 반응에 웃음을 참으며 대꾸했다.
“집에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최이겸 씨가 없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너무 크기도 하고…. 그래서 무섭기도 하고.”
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하고.
이제 그럴 일 없단 걸 아는데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괜히 헛기침하며 말끝을 흐린 그녀는 복길이 나오는 걸 보며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이제 친구 집에 들어갈 거예요. 언제 와요?”
[최대한 빨리 가 보려고 합니다. 어서 들어가요. 밖에 있지 말고. 시간이… 음, 너무 늦었어요.]
“그러려고요. 이겸 씨는 어디예요?”
[지금 막 호텔에 도착했어요. 시차가 크지 않아 다행이네요.]
“…푹 쉬어요. 잘 자고.”
[보고 싶습니다. 많이.]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당신과 달리, 나는 시간의 틈이 생길 때마다 당신을 생각했다고.
하지만 그 마음을 알아달라고 했다간 그가 부담스러워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채우는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나도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요. 복길은 통화가 끝나면 들어오라는 말을 남긴 채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내일이라고 했나요?]
잠시의 정적 뒤 흘러나온 그의 첫마디였다. 그가 말한 내일에 관해 생각하던 그녀가 입술을 깨물곤 대답했다.
“네, 하마터면 잊을뻔했어요. 내일 회사 근처에 있는 소고깃집이래요.”
[잘 다녀와요. 내 생각 많이 하고요.]
“그럴게요.”
가슴이 간질거려 견디기 힘들었다. 입술도, 치아도, 혀도.
헤어져 있으며 더욱 실감했다. 그와 자신은 연인이라 불리는 관계란 것을. 나와 당신이 우리가 되어버린 순간부터 서로에게 속해진 세상은 쉽게 외로움을 불러들였고, 결핍을 끌어냈다.
사랑의 가장 큰 약점이자 단점.
“너무 보고 싶어요….”
홀린 듯 읊조린 말에, 수화기 너머 한숨이 깊어진다.
[지금 갈까요.]
진지한 그의 어투에 꾹 다물었던 입을 벌려 크게 웃었다.
“그러지 마요. 그냥 해 본 소리니까.”
[나는 그냥 해 본 소리 아닌데.]
“아, 그게…. 보고 싶긴 하지만, 일을 방해하고 싶진 않아요. 잘 마치고 오세요. 기다릴 테니까.”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저 자신도 도통 가늠할 수 없었다.
결국, 2층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복길로 인해 채우는 황급히 통화를 마쳤다.
아쉬웠다. 만약 이곳이 집이었다면, 어쩌면 밤새 그의 목소릴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와?”
복길의 외침에 고개를 든 채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올라가!”
***
전화가 끊어졌다.
이겸은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술보단 물이 필요했다.
막판 투자를 끌어내는 일로 이렇게 진땀을 쏟을 줄이야. 하지만 결국 만족스러운 성과를 낸 그였다.
이겸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고 있을 때였다.
“막 김동희가 출국했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 같습니다.”
서류를 든 김 실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그에 이겸의 눈꺼풀이 들린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엘리엇 사태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겁니다. 지금은 딱히 지원해 줄 곳도 없을 테고…. 재밌겠네요.”
“서류 준비하겠습니다.”
“그래요.”
첫 번째 먹잇감인 기형 중공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세 도피를 위해 사모펀드로 자금을 돌린 김동희의 추락이었다. 그 금액은 고스란히 김 실장이 관리하는 펀드로 들어왔고, 김동희의 지분은 휴짓조각이 되기 일보 직전.
이겸은 거래의 조건으로 기형 중공업의 경영권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제 손을 망가트린 대가로 지원받은 수백억. 정확히는 780억 원 만큼의 지분으로 되돌려받을 생각이다.
만족스럽게 웃어 보인 그가 화려한 홍콩 시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일 마무리되는 대로 내일 항공권 좀 알아봐 주십시오.”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의정부지방법원에 환송한다. 상고 이유로는 첫 번째. 명예훼손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구성요소로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고의를 가지고 사람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데 충분한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는 행위를 할 것이 요구된다는 점을 든다.”
법원 판결문은 대체 왜 온점과 쉼표가 없는 것인지.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판사와 변호사들은 습관처럼 말을 길게 늘였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판사도 모르고 변호사도 모른다. 그저 지금껏 그래왔기에 이어나가는 것뿐이다.
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판사의 판결문이 이어질수록 의뢰인의 얼굴이 펴지고, 상대측 변호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고까지 가게 된 명예훼손 사건이었다. 명예훼손만큼 주관적인 잣대가 작용하는 문제는 드물다. 명예란 지극히 주관적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소송을 거는 입장에서도 과한 자의식이 가미되는 경우가 많았다.
길고 긴 판결문 낭독 뒤, 의뢰인은 결국 승소를 이끌어 낸 채우를 부둥켜안았다. 장장 2년간의 소송에서 승리한 의뢰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채우는 이 순간이 좋아 변호사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이토록 개운하고 깔끔한 일이 있을까?
사실 좋은 일보단 더럽고 끔찍한 일들이 더 많았지만, 결국 법 앞에 무죄를 인정받거나 억울함을 푸는 것만큼 속 시원한 해결법은 드물었다.
“이야, 우리 정 변! 오늘 회식?”
재판에 참여한 경일이 신난 목소리로 물었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소송을 마무리하는 덴 회식이 제격이지만, 채우는 오늘 선약이 있었다.
의뢰인과 마무리 인사까지 마친 그녀가 시간을 확인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저 오늘 선약 있어요.”
“에이, 애인이랑 데이트?”
“아뇨. 동창회요.”
동창회란 말에 의외란 표정을 지은 경일이 고개를 주억인다.
“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정 변은 가야 하니까, 우리끼리 한잔할까?”
경일은 동행한 해랑의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사무장의 지갑을 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에 다들 환호하며 한우를 외친다.
“그럼, 월요일 날 뵐게요.”
“그래, 불금 잘 보내고! 수고했어.”
“수고들 하셨어요.”
꾸벅 인사한 그녀는 차를 세워둔 주차장에 들어섰다.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묘한 시선. 대체로 이런 적의 가득한 눈빛은 패소한 상대측 변호사일 가능성이 크기에, 부러 무시하곤 당당히 걸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걸음은 앞을 막아선 검은 세단으로 인해 멈추고 말았다. 차창을 내려 얼굴을 보인 건 최이서.
“어이.”
말버릇이 더럽게 고약한 최이겸의 형이었다. 채우는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너, 여기서 뭐 해?”
얘는 어디가 좀 모자란 거 아닐까?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면 나오지 않을 질문이었다.
“변호사가 법원에 왜 왔겠어요. 소송이 있었습니다.”
“아아, 너 변호사였지?”
“네.”
“탈래?”
슬슬 기분이 언짢아진다. 아무리 최이겸의 형이라 해도, 창하 그룹의 사장이라 해도. 그녀에겐 한낱 한심한 잉여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채우가 답이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자, 뒤쪽을 가리킨 최이서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저거, 네 차 아니었어?”
그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어!”
채우는 황급히 차를 향해 달려갔다.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얌전하게 주차해놓은 차에 누군가 테러를 감행했다.
래커를 이용해 차창 전체를 칠해놓은 것도 모자라, 사이드미러를 박살 냈고 심지어 뒷문은 반쯤 뜯어져 너덜너덜했다.
내부 역시 마찬가지. 필수로 들고 다니던 서류 박스가 완전히 뒤집혀 중요 서류들이 엉망진창으로 흩어져있었다.
순간 혈압이 올라 뒷머릴 잡은 채우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 정도면 완벽한 재물손괴에 공포감 조성까지. 뭘 가져다 붙여도 유치장에 집어넣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미친놈들 많네.”
그녀는 뒤로 다가온 최이서의 목소리에 대충 반응해준 뒤, 보험회사에 연락했다. 승소로 인해 날아갈 듯했던 기분이 삽시간에 바닥을 쳤다.
“타. 어디까지 가는지 몰라도 데려다줄 테니까.”
“괜찮습니다.”
“타라고. 내가 타라잖아.”
최이서가 채우의 팔을 잡아챘다. 그녀는 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이 행위에 몇 가지 혐의를 붙일 수 있는지 모르시나 봐요. 저는 안 탄다고 했습니다.”
“하, 새끼변호사 주제에 입만 살아서. 내 동생이랑 만난다며?”
짜증스럽게 팔을 놓아준 최이서가 물었다. 그에 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나고 있습니다.”
“왜.”
“좋아서요.”
“돈 때문에? 잘생겨서?”
“돈 많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섹시한 데다, 다정하고 섹스도 잘해요. 저한테 반말도 안 하고. 존중이 기본인 남자예요. 아, 한도 끝도 없는데…. 계속할까요?”
태연자약하게 늘어놓은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최이서가 담배를 꺼내 문다.
“금연구역입니다.”
채우는 가까이에 붙은 금연구역 팻말을 가리켰다.
차갑게 냉소한 최이서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그녀의 앞에 가만히 섰다. 이어 관찰하듯 위아래로 훑고 저 혼자 생각에 잠기더니, 뒤를 지키는 수행 비서를 부른다.
“이거, 누구 짓인지 알아낼 수 있어? 좀 알아봐.”
“예.”
“그리고 만만한 새끼면 머리채 잡아서 데려와. 걸레 쥐여주고 다 닦으라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익숙한 지시인지 수행 비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물러났다. 되레 당황한 건 채우였다.
“왜 이러세요?”
최이서는 꽤나 자존심이 상한 듯, 먼 곳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해서.”
“네?”
잘 들리지 않아 되묻자, 주먹을 쥐락펴락한 그가 심드렁한 어투로 툭 던진다.
“잘 보여야 해서.”
“…왜요?”
“최이겸이 너 좋아하잖아.”
“…근데요?”
“아, 뭘 자꾸 캐물어! 내 동생이 좋아하는 여잔데. 그럼 막대해? 잘해줘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지은 죄도 있고.”
가슴 앞으로 팔짱 낀 채우는 민망해하는 최이서를 위아래로 훑었다.
지은 죄라…. 과거 저를 하대한 죄. 그리고 멋대로 지방 발령을 낸 죄 정도 되려나?
이미 과거가 된 일이어서일까? 이겨내서일까. 이전엔 힘들기만 했던 기억이 지금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근데 이건 제 일이예요. 그러니까 갈 길 가세요.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하. 진짜 성격 별로다, 너.”
“제가 사람을 좀 가려요.”
“사람이 친절을 베풀면 좀 넘어가는 것도 있어야지.”
“일방적인 친절은 사양이라.”
그렇게 말한 채우는 금세 도착한 견인차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명함을 나누어 갖고 키를 넘기자, 상태를 본 견인 기사가 황당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악질이네요. 뭐, 앙심품은 거래요?”
“모르겠어요. 아직 누구인지도. 어쨌든 근처 정식센터로 보내주세요.”
“예.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작은 경차 하나 견인하는 건 일도 아닌지, 상황은 고작 5분도 채 되지 않아 정리되었다. 견인 기사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려 휴대 전화를 꺼내던 그녀는 차가 세워져 있던 자리에 떨어진 몇 개의 꽁초를 발견했다.
갈색 필터, 강박적으로 짧게 태운 흔적.
어디선가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 기분에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가지 않고 기다리던 최이서가 재차 제안했다.
“그러지 말고 타. 어디까지 가는데. 태워 줄게.”
적어도 집요한 점은 인정.
채우는 세 번째 권유까진 거절하지 못하고 차에 올랐다.
“저거, 범인 잡을 거지?”
“네.”
“근데 안 놀라네? 다른 계집애들이면 울고불고 난리 쳤을 텐데.”
“그런 여자들만 만나셨나 봐요. 제 주변엔 저런 일로 우는 여자 한 명도 없어요.”
“그래?”
빈정대는 말이 기분 나쁘지도 않은지, 최이서는 헤드레스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의 최이서는 최이겸과 언뜻 비슷한 부분이 있긴 했다. 물론, 근본적으로 분위기가 다른 두 사람이었다.
법원을 완전히 빠져나온 후에야 시작된 떨림. 긴장이 풀린 건지, 꼭 말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떨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뺨을 두드리고 숨을 몰아쉰 그녀는 어느덧 멀리 보이는 고깃집을 가리켰다.
“저 앞에서 세워 주세요. 약속 장소가 저기라.”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최이서가 창밖을 보았다.
“고기 먹냐?”
“네. 동창회라서요.”
최이서는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고깃집 앞에 멈춰선 차에서 내리자, 입구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흔치 않은 고급차량에서 내리는 그녀를 제일 먼저 알아본 건 이시윤이었다.
시윤은 잠시 멈칫하며 최이서의 세단을 노려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채우야!”
그 말에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알은체했다. 학창시절의 얼굴이 남아있는 경우도, 완전히 못 알아볼 만큼 변해버린 경우도 있었다.
“와, 이게 누구야! 정채우, 넌 어떻게 된 게 더 예뻐졌다? 30대 맞아?”
“우리 정 변! 변호사라며? 와, 진짜 이시윤이랑 네가 제일 성공한 거 같다. 자자, 들어갈까?”
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뭐가 든 건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당황한 걸 눈치챈 이시윤이 가까이 붙어서더니 귓가에 속삭인다.
“박태은, 김종서, 이나경, 황윤지. 이제 됐어?”
“아, 맞다…. 나 기억력이 붕어인가? 고마워.”
“내 이름 안 까먹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네.”
“아니야. 정말 갑자기 생각 안 난 거였어. 이제 다 생각나.”
채우는 최대한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또다시 느껴지는 시선에 뒤돌아보았다. 에스코트하는 이시윤의 손이 등허리에 닿는다.
“가자.”
<판례 인용>
국가법령정보센터/대법원 2018. 6. 15., 선고, 2018도4200, 판결
예약해놓은 룸 안에는 밖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많은 동창들이 와 있었다. 신기했다. 10대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몇몇을 마주하자, 과거로 돌아간 기분마저 들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동창들과 마주 앉은 채우는 금세 분위기에 적응했다. 물론, 모두가 반가운 건 아니었다. 딱히 친했다고 생각지 않는 몇몇과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변호사 일, 안 힘들어?”
“당연히 힘들지.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
“돈 많이 벌지.”
“그렇지도 않아. 남들 버는 만큼 벌어. 스타 변호사도 아니고.”
“종종 나오지 그랬어.”
“주소를 자주 옮겨서.”
순차적으로 쏟아진 질문에 뭔가 취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채우는 어색한 침묵이 만들어질 때마다 먹는 일에 몰두했다.
그렇게 불판을 두 번째 교체할 때쯤, 고깃집에 걸린 티브이에서 뉴스가 방송되었다. 헤드라인으로 정영수를 A 씨로 묘사한 뉴스가 송출된다. 채우는 앵커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시윤의 표정을 살폈다.
싱글벙글 웃으며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던 시윤은 차갑게 벼려진 눈빛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 진지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몇몇이 뉴스 화면을 힐금대며 괜스레 서두를 띄웠다.
“내가 저 사건 언젠간 터질 줄 알았다. 저 사이트 유명하잖아. 근데 호텔 대표가 자기 호텔에 몰카 설치해놓고 촬영해온 건 몰랐네. 미친놈이지.”
그 말에 시윤은 피식 웃으며 불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곤 순순히 경험담을 늘어놓는 그.
“전에 저 사이트 고소한 적이 있어. 어떤 여자가 찾아와서는 본인 몰카가 돈다는 거야. 전 남친이 유포한 줄 알고 고소를 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도 모르는 일이더라고. 그래서 파보니까, 영상이 다 같은 배경이더라? 스위트룸, 디럭스룸 정도만 다르고 싹 다. 거기서 딱 느꼈지. 아, 이거 뭐 있네 하고.”
마치 영웅담을 떠들어대는 듯한 말투에 모두 관심을 보였다.
시윤은 다 구워진 고기를 채우의 접시에 올려주며 턱 끝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넌 저런 사건 없었어? 우린 두 번이나 고소했는데 합의로 끝났어. 돈 쥐여주니까, 의뢰인도 입 싹 닫고 고소 취하하더라? 와, 진짜…. 돈이 더러워.”
채우는 비스듬히 미소지으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고소 의뢰를 받아 본 적은 없고…. 정영수, 내가 처넣은 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그러곤 부러 말을 흘렸다.
시윤의 의도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형의 죽음에 분노한 피해자였고, 제 주위의 누군가는 가해자라는 원 안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시윤을 응원해야 하지만, 진실을 캐내기 위해 김동희를 이용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제 형과 같은 상처를 가진 남자. 그런 남자를 김동희라는 칼로 내리쳐 세상에 드러내려는 거다. 이시윤은.
“저게 해랑에서 한 거라고?”
“아니. 개인적으로.”
그에 이곳저곳에서 신기해하는 듯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영수의 사건은 ‘남의 일’이었다. 했기에 그들은 그저 신기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채우는 소주를 한잔 따라 마시곤 시윤을 마주 보았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이시윤의 눈빛이 가라앉고 있었다.
“시윤아, 우리 얘기 좀 할까?”
채우의 말에 애써 웃어 보인 시윤이 자릴 털고 일어났다.
“아, 또 고백하려는 거 아니지? 떨리는데. 너, 학교 다닐 때 완전 인기 많았던 거 모르지? 하긴, 모르겠지. 공부만 하느라.”
묻지도 않은 말을 부자연스럽게 늘어놓은 시윤이 주위를 둘러보곤 홱 돌아선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우가 일어서자, 바로 옆에 앉은 나경이 물었다.
“뭐야, 정말 둘이 뭐 있어?”
“응. 내가 고백을 좀 하려고.”
“꺅, 진짜?”
“근데 사랑 고백은 아니야. 금방 올게.”
믿지 않는다는 듯 짓궂은 야유가 쏟아졌다.
테이블을 돌아 나가는 채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간다. 이시윤에 관한 일을 해결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시윤은 가게 밖, 입간판 옆에 서 있었다. 담배를 꺼내 불붙이는 손이 덜덜 떨린다.
다가간 채우는 그의 라이터를 빼앗아 단번에 불을 붙여주었다. 뻐끔거리다 흰 연기를 내뱉은 시윤이 실소하며 허공을 바라본다.
“정채우, 너 뭐야. 네가 왜 정영수를 집어넣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정영수, 내 새아빠 될 새끼였거든. 결혼식장에서 그 꼴 보기 싫어서 넣어버렸어.”
“뭐? 그게 정말이야?”
“진짜야. 정영수가 내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더라. 그걸 가만 둬? 있는 대로 혐의 때려 박아서 긴급체포되게 만들었어.”
재가 떨어지는 것도 느껴지지 않는지, 시윤은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채우는 그가 들고 있던 담배를 빼앗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 너무 오랜만에 들이켠 연기에 머리가 핑 돈다. 정말이지 담배엔 익숙해지려 해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가느다란 연기를 흘린 그녀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앞머릴 쓸어넘겼다. 그러곤 두 눈을 치켜뜨자, 멍했던 시윤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넌, 할 말 없어?”
“다 알고 있나 보지?”
시윤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에 채우는 재를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이 필요해서 그랬어? 증거가 필요했던 거야?”
“…….”
“진범을 찾겠다는 의도는 좋아. 나도 응원할 수 있어. 하지만 네 방식은 틀려먹었어. 김동희는 최이겸의 미랠 박살 낸 범죄자야. 네 형처럼… 손이 망가진 피아니스트가 최이겸인 거 알잖아. 최이겸을 자극해서 대체 뭘 얻어내려고 했는데? 혹시, 그 영상을 그쪽에서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험악하게 인상을 쓴 시윤이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번에는 떨지 않고 불을 붙인 그가 눈 앞머리를 꾹 누르며 대답한다.
“아까 말한 대로 고소 건을 진행하다가 영상을 봤어. 형이 죽은 곳이랑 똑같은 호텔에서 찍힌 영상들이더라. 혹시나 했지.”
이시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능글능글했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분을 누르며 차갑게 이를 가는 남자만이 남았다.
“그래서 고소인을 통해 정영수에게 접근했어. 그 호텔에 몰카가 설치되어있는 것 같다고. 그러곤 그날의 영상이 있는지 슬쩍 떠봤더니, 개새끼가… 죽기 직전까지 나를 패더라? 내가 깡패 새끼를 어떻게 이겨. 근데 그때 확신했어. 영상이 있다고.”
채우는 꽁초를 떨어트린 뒤 발끝으로 비볐다. 그 모습을 보던 시윤이 자조적인 냉소를 지었다.
“김동희를 자극한 건 우연이었어. 정말이야. 나는 그날 우리 형이랑 같이 있던 새끼를 최이서로 알고 있었는데, 딱 잡아떼더라고. 그쪽 변호사가 그날 함께 있던 사람은 최이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 아침에 이시현 씨 혼자 죽어있는 걸 최이겸이 발견했다고 하는데.”
반박하고 싶은 마음에 주먹이 강하게 말렸다.
“실은 전에 로엠으로 최이겸 부른 거, 나야. 너까지 올 줄은 몰랐어. 그래서 묻지 못한 거고. 너도 내 계획엔 없던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거든.”
“…같이 있던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면 어쩔 건데. 죽인 사람과 함께 있던 사람이 다를 수도 있잖아.”
“글쎄. 거기까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럴 확률도 거의 없고. 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 형을 죽여. 누가. 술 처먹고 주사기 쓴 새끼가 죽인 거지!”
핏대를 세운 시윤의 눈동자가 흐려진다. 검은 물이 가득 차오르나 싶더니,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시윤…. 네 마음 이해해. 근데 너, 좌표 잘못 찍었어. 네 형 죽인 범인을 잡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날뛰어도 돼. 하지만 어쩌면…. 그 사람이 네 형이 사랑한 사람일지도 몰라. 고인을 두 번 죽이지는 마. 할 거면 존중을 기본으로, 법조인의 도리를 지켜. 갈게.”
손을 턴 그녀가 돌아서려 하자, 팔을 잡아챈 시윤이 소리쳤다.
“우리 형은 게이가 아니야!”
너무도 애달픈 외침이라 채우는 차마 받아치지 못했다. 그는 믿어달라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채우는 제 팔을 잡은 시윤의 어깨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저보다 한참이나 큰 남자지만, 지금은 작은 어린아이 같았다.
“미안해. 내가 잘 몰랐어.”
채우의 사과에 결국 시윤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러고 보니 눈물이 많은 애였다. 이시윤은.
툭하면 우는 울보. 고양이를 보고도 울고, 선생님과 헤어질 때도 가장 많이 울었던 애였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던 시윤이 한걸음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대려 할 때였다.
그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불쑥 들어온다. 시윤의 어깨를 밀어내는 손길이 단호했다.
채우는 제 뒤에 선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미안하지만, 나만 닿을 수 있는 여자라. 선을 넘는 우정은 제가 용납이 안 돼서 말입니다.”
최이겸은 당황한 시윤을 가만히 응시하다, 시선을 내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래서 동창회가 위험하다는 건가…?”
그의 혼잣말에 웃음이 터졌다. 채우는 이겸의 재킷을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오늘 온단 말 없었잖아요.”
“그건 집에 가서 얘기하도록 하고. 이시윤 씨, 괜찮습니까?”
시윤은 빨개진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손등으로 젖은 뺨을 훔쳤다.
“괜찮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단, 오늘은 우리가 오랜만에 재회한 날이라. 다음에요. 이틀 뒤.”
“아…. 예.”
고개를 꾸벅 숙인 시윤이 콧물을 훌쩍이곤 건물 뒤편으로 걸어갔다. 바람을 쐬고 들어가려는 건지 담배를 또 꺼내 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채우의 몸이 홱 돌려졌다. 그녀를 돌려세운 그가 상체를 기울이더니, 얼굴 근처에서 킁킁 냄새를 맡는다. 그러곤 양손을 잡아 올려 손바닥에 코를 묻었다.
“음…. 나는 정작 끊게 만들어놓고.”
“아…. 이게 쟤랑 대화를 좀 해야 해서, 기선제압을 하느라. 좀 세 보이고 싶어서. 헤헤….”
배시시 웃으며 머릴 긁적이는 모습에 이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끊을 거죠?”
“원래 안 핀다니까요? 아주아주 가끔이에요.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오늘 온다고 말 안 했어요?”
“보고 싶어서. 놀래 주려고.”
“그렇다고 이렇게 불쑥 나타나요?”
그는 채우를 내려다보며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 술 몇 잔에 발그레해진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 옷을 벗기고, 물고 빨고, 예뻐하고 싶어서 못 견디겠는 걸 어떻게 하라고.”
순간 숨이 꽉 막혔다. 누군가 폐부에 무거운 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더불어 엄청난 속도로 심장이 뛰어댔다.
“출장 가서는 어떻게 참았대?”
얼굴을 붉히며 되레 능청스럽게 받아치자, 한쪽 눈썹을 기울인 이겸이 상체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안 참았어요. 하루도. 당신에 관해서라면, 나는 인내심이 아주 부족한 남자라서.”
“누가 차를 엉망으로 만들어놨어요. 엉망 정도가 아니라…. 차창은 래커로 칠해놨고, 사이드미러는 부숴놓고. 뒷문을 따고 들어간 거 보니까 뭘 찾으려던 것 같기도 하고요.”
말을 끝낸 그녀의 입 안으로 두툼한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전부 빨아들일 것처럼 강하게 부딪쳐온 입술에 아래가 젖어간다. 그것을 그 또한 정확하게 느꼈다.
“아…. 좋은데요? 방금 조였어요. 키스를 좋아하네, 채우 씨.”
“하….”
말을 마친 남자가 움직였다. 꽉 맞물려있던 성기가 쑥 빠져나가다가 푹 박혀온다. 그는 부딪쳐올 때마다 음모로 음핵을 비볐다.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지만, 자극만은 견딜 수 없이 강렬했다. 누군가 몸 안에 더운물을 쏟아붓는 기분이었다.
“키스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겸 씨가 키스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리를 좀 더 벌렸다. 그러곤 제 위에 올라탄 남자의 허릴 휘감았다. 그와 섹스를 하면서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버려야 한다. 최이겸은 강했고, 몰입하게 했으며, 벅차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상체를 세운 그가 그녀의 다릴 옆으로 벌리며 허릴 움직였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드나드는 성기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겸은 욕망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아래를 응시했다. 이마에 핏대가 서고 관자놀이엔 땀이 흘렀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줄이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아!”
그가 강하게 몇 번 박아넣자, 몸을 뒤튼 그녀는 자신의 음부를 만지기 시작했다. 미숙한 손놀림으로 부푼 클리토리스를 찾아 비비며 흥분에 젖은 표정으로 변해갔다.
“이건 어디서 배운 예쁜 짓인지.”
찡그리듯 웃어 보인 그는 점점 속도를 올렸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몸이 뒤집히고, 성기가 빠져나간 구멍이 벌어졌다.
이겸은 그 안으로 가차 없이 혀를 밀어 넣었다. 조여드는 구멍에 키스하듯 입술을 붙이곤 야릇하게 빨았다. 침대에 엎드린 채 엉덩이를 치켜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꽃잎 같은 음순을 깨문 이겸은 손가락 두 개를 구멍 안에 넣고 가볍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아! 하아앙, 하, 하지 마요!”
말도 안 되는 진동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난히 긴 손가락, 강한 진동이 그녀를 미치게 했다. 그는 그녀의 등에 입 맞추며 점점 더 빠르게 손을 털었다. 예민한 살덩이가 건드려졌는지 뜨거운 물이 쏟아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나 없는 동안 즐거웠나 봅니다. 할 이야기가 많은 거 보니까.”
“하아, 아… 아니야!”
“이거 서운한데요?”
철벅대는 물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야하고 음란한 소리는 제가 내는 것이었다.
천장을 울리는 교성이 혹여 옆집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을까, 그녀는 손등을 깨물고 앓듯이 흐느꼈다.
“아니야… 하아, 아니에요. 아니라고.”
울먹이는 음성에 손가락을 뺀 그가 귀두를 밀어 넣으며 그녀의 등에 입 맞췄다. 그러곤 완전히 밀고 들어와 그녀의 위에 겹쳐진다.
커다란 남자의 품에 갇혀버렸다.
몇 시간 전,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동창들은 모두 말을 잃고 젓가락을 놓쳤다. 누군가는 최이겸을 알아보아서, 누군가는 흔치 않게 준수한 외모에 놀라서였다.
그녀를 룸 밖에 세워둔 이겸은 동창들을 훑어보곤 지나치게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채우 씨 핸드백을 좀 가져가겠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는 제가 계산할 테니, 원하는 만큼 드시고 가십시오.’
마치 상사가 내려준 법인 카드를 받드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곳엔 어떻게 된 일이냐며 재빠르게 소식을 옮기는 사람과,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식사에 열중하는 부류가 있었다.
밖으로 나온 이겸은 피식 웃으며 ‘친구분들이 참… 귀엽네요.’라고 말했다.
이제 증권가 찌라시에 어떤 소문이 돌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찌라시는 다시 이겸의 귀에 들어올 것이다.
그것이 처음으로 참석한 동창회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하, 좋은데…. 힘들어요.”
일정한 속도로 진입하던 그가 이를 악물더니 속도를 달리했다. 이겸은 그녀의 피부를 모조리 핥으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채우는 다리를 모은 채 엎어져 제 안을 드나드는 그를 느꼈다. 허벅지를 스치는 성기의 감촉에 몸속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어제는 뭐 했습니까? 말해 봐요. 당신 목소리 듣는 거 좋아요.”
“어제는…. 복길이랑, 자꾸 누가 쳐다보는 거 같았는데…. 아, 오늘 최이서 씨가.”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그도, 그녀도 서로를 갈구했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극심한 기갈을 느꼈다.
그녀를 다시 똑바로 눕힌 남자가 얼굴 양옆을 팔꿈치로 누르며 깊숙하게 파고든다. 채우는 그제야 양팔을 뻗어 그를 안았다.
“얼굴 볼 수 있어서… 이게 제일 좋아.”
달콤한 속삭임에 치받는 각도가 바뀌었다.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쾌감에 벌어진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들러붙는 내벽을 가르고 들어온 그가 혀를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덧그린다. 그러곤 입을 크게 벌려 덥석 삼켜버렸다.
“보고 싶었어요.”
***
아침 해가 침대 언저리에 빛을 뿌렸다. 그의 품에 꼭 안긴 채 잠에서 깬 그녀는 일어나다 말고 푹 엎어졌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랬던 적이 또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땐 처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헤아렸던 날이었다.
채우는 확신했다. 혹, 장기출장이라도 갔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침대 옆 나이트 테이블에 올려둔 이겸의 휴대 전화 액정이 반짝였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의 휴대 전화를 보았다.
화면을 차지한 건 제 얼굴이었다. 그것도 안경을 쓴 채 머리를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언젠가 재택근무를 하겠다며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날의.
그때의 모습을 몰래 찍었다며, 출장 내내 이 사진으로 외로움을 달랬다고 했다.
목소릴 들으면 음란하게 굴 거 같아서 참고 참다 보니, 멍하니 사진을 보며 만족하고 있었다고.
다행히 야한 짓은 안 했다며 이겸은 선을 그었다. 키스와 뽀뽀, 꼭 끌어안는 유치한 짓으로 나흘을 버텼다는 그.
그 말을 하며 얼굴을 붉히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채우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의 뺨에 입 맞췄다. 잠을 자면서도 참 반듯한 남자.
그녀의 감촉을 느낀 건지, 힘겹게 눈을 뜬 그가 여운을 음미하듯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곤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주말입니다. 조금만… 더 자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뜨거운 체온에 짙어진 체향이 풍긴다. 단단한 몸이지만, 피부는 어찌나 매끄러운지.
가슴에 입술을 누른 그녀는 품에서 빠져나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단단한 복부를 지나 반쯤 발기한 성기를 핥았다. 혀로 핏대를 훑으며 귀두를 간질이자, 시트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이 뒷머릴 움켜쥔다.
“거기까지.”
그러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위로 끌어올리더니,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끼웠다. 잠에 취한 채로 서로를 애무하는 행위에 노곤함이 밀려들 줄이야.
귀두가 젖어있는 틈새를 건드렸다. 정확히는 예민한 살점이 비벼졌다.
자극이 더해질수록 그녀는 다리를 더 오므렸다. 그의 어깨에 이를 박은 채 절정과 함께 찾아온 경련을 맞았다.
신기하게도 다시 눈을 뜬 건, 해가 중천에 뜬 뒤였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몽롱하다. 어쩌면 지금이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정신이 없었다.
근육이 살짝 떨리고 입이 마른다. 채우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시각.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지, 고소한 버터 향이 물큰 코를 찔렀다.
대충 손에 잡히는 셔츠를 챙겨입고 거실로 나가자, 바지만 갖춰 입은 이겸이 식탁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일어났어요?”
채우는 그에게로 쪼르르 다가갔다. 촉촉하게 구워진 프렌치토스트와 베이컨, 먹음직스러운 오믈렛에서 따뜻한 김이 오르고 있었다.
“뭐에요?”
“아주머니가 오셔서 청소해주고 가셨어요. 식사 준비도 함께.”
“그런 분이 계셨어요?”
“뭐, 가끔 제가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합니다. 먹죠.”
채우는 그가 빼 주는 식탁 의자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이거야말로 완벽해서 행복한 식사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충분히 허기를 채울 수 있는.
게다가 오늘은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말자고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우리 밥 먹고 영화 봐요. 요즘 재밌는 VOD 엄청 많이 나왔다던데.”
“그러죠.”
“영화 보고는 뭐하지?”
“아마 뭐든 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가 미소짓자 그녀의 귓불이 서서히 붉어졌다. 왜 자꾸 말뜻을 알아듣는 것인지.
이 머리엔 뭐가 들었기에 저 남자만 보면 야한 생각을 할까.
부끄러워진 채우는 식사에 열중했다. 그렇게 막 마지막 남은 소시지를 입에 넣을 때, 현관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
찾아올 사람은 없다. 아니, 있긴 하지만 반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인터폰을 확인한 이겸이 이맛살을 찌푸리곤 통화버튼을 누른다.
“가.”
[야, 야. 열어.]
“또 부수고 들어오려고?”
[에이, 아니지! 미안. 어쨌든 열어 봐. 오늘은 진짜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전화로 해.”
[최이겸, 지금 정채우랑 있는 거 다 알아. 알고 온 거야. 그러니까 열어.]
찾아온 사람은 최이서였다. 놀란 채우는 벌떡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잽싸게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실로 나왔다.
그제야 마뜩잖은 표정으로 문을 여는 최이겸. 웬일인지 경호원도 없이 찾아온 최이서가 두 사람을 보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밥. 먹었어?”
“형 줄 밥은 없는데.”
“야, 아침도 굶었어.”
채우는 어제와 같은 차림의 최이서를 보곤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사이 이겸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한숨 쉬며, 팬에 남아있던 오믈렛과 프렌치토스트를 대충 접시에 담아 내어주었다. 그에 환하게 웃으며 식탁에 앉은 최이서가 포크를 들더니 허겁지겁 식사를 한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이겸의 표정을 살폈다. 최이서의 맞은편에 앉아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물을 내밀며 말한다.
“이젠 수면제도 안 듣나 보지?”
그러자 움찔한 최이서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우는 최이서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소파로 가 앉았다. 그에 흘금 돌아본 최이서가 은근한 목소리로 이겸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수집 중이시다. 너희 둘. 일거수일투족.”
최이서를 빤히 보던 이겸이 실소했다.
“알아.”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이겸의 태연한 반응에 되레 당황한 최이서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남은 음식을 욱여넣었다.
“알면서 이러고 있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대체 무슨 짓을 당하려고.”
“내가 알아서 해. 그거 말하려고 온 거면, 빨리 먹고 가. 바쁘니까.”
바쁘다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곤 코웃음 치는 최이서.
“누가 봐도 오늘 아무것도 안 하게 생겼는데, 뭐가.”
“그래서 바빠. 형이랑은 아무것도 안 할 거라.”
“하, 이겸아. 아버지는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모르신다. 정영수를 빼낼 생각 없으시고, 계속 숨기려고만 하셔. 게다가 지난주엔 허명재랑 사법부 인간들 모아 놓고 제대로 노시더라.”
“로비라도 했어?”
“어. 아마 정영수는 죽을 때까지 감방에서 못 나올지도 몰라.”
“잘됐네.”
이겸이 권태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이자, 포크를 내려놓은 최이서의 눈동자가 떨렸다. 최이서는 소파에 앉은 채우를 힐금보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영상…. 그거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셨어. 근데 아무리 봐도 그 영상은 네 손에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나는 네 편을 들어볼까 하는데.”
“무능력한 편은 필요 없는데.”
“이겸아…. 나도 좀 살아야 하지 않겠냐. 1년째야. 잠을 못 자고 있는데.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해서. 나는 이시현 죽이지 않았어. 절대 죽이지 않았어. 차라리 내가 죽지, 시현이를 왜 죽여! 그래서 밝히고 싶다. 내 억울함도 밝히고, 그놈 억울함도 밝히고.”
최이서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그때 소파에 앉아 듣고 있던 채우가 다가왔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최이서의 앞에 자신의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어제 이시윤 씨랑 나눈 대화 녹취한 거예요. 듣고 싶으시면 들어보세요. 이시윤 씨가 그러는데…. 이시현 씨는 동성애자가 아니었대요.”
그 말에 최이서가 허탈하게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곤 휴대 전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앞머릴 쓸어넘긴다.
“하나 묻자. 최이겸, 넌 내가 사내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냐?”
“아니.”
대답을 들은 최이서가 채우를 빤히 쳐다보며 눈썹을 꿈틀댄다.
“그럼… 법정에서 진술해 주실 수 있으세요? 증인으로 서야 해요. 최이서 씨가 무죄라는 건 직접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참고로 전 시윤이를 도울 거예요. 단, 김동희를 버리는 조건으로.”
그에 이겸이 입꼬릴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게 우리 조건이야. 아무리 형이라도 일을 방해하면, 그대로 살인자로 만들어 줄 수 있어. 반대일 수도 있고.”
말투는 가벼웠으나, 진심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어조였다.
최이서는 두 사람의 얼굴을 황망하게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다짐한 것처럼 벌떡 일어나 이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무릎이 헤퍼.”
“할게, 진술. 아버지는… 나를 범인으로 단정하신 상태야. 이러다 성에 차지 않으면 가차 없이 팽 당하겠지. 내가 너보다 능력은 떨어져도, 도박은 좀 해. 내 승률 한 번만 믿어줘라. 나 정말… 억울하다, 이겸아.”
최이서는 다른 건 필요 없다고. 제발 수면제 없이 잠들 수 있게만 해달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뒷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겸이 채우와 시선을 맞춘다. 그녀는 고개를 한 번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너 아니고, 정채우 변호사님. 그거부터 연습하지. 각오하고 일어나.”
***
매끄러운 차체를 타고 흐르는 빛이 예술이었다. 자동차 전시장의 인공조명과 자연광이 만나, 차량 표면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유난히 더 커 보였다.
채우는 슬그머니 차량 설명서에 적힌 가격을 확인했다. 그러곤 숫자 0의 개수에 기함하며 책자를 덮었다.
이겸을 따라 방문한 이곳은 모 자동차브랜드의 전시장이었다. 부의 상징이라 불리는 차량 로고를 보며 채우는 영업 사원을 불러 조용히 물었다.
“제일 저렴한 차량은요? 작아서 주차하기 편하고 연비 좋은 거요.”
그에 싱긋 웃은 영업 사원은 그녀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곤 이겸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새로 나온 신형 스포츠카를 유난히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눈을 빛낸다.
고개를 주억이며 돌아본 이겸이 못마땅하게 서 있는 채우에게 다가왔다.
“골랐습니까?”
“가격과 연비가 낮고, 작고, 주차하기 편한 거요. 근데 굳이 여기서 살 필요는 없어요. 원래 타던 제 차를 수리해도 되고요.”
“그건 폐차할 겁니다. 사람 손을 너무 탔어요. 누가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몰라서, 신재훈에게 보냈고요.”
신재훈은 요리사이자 괴짜였다. 해킹은 기본이고 모든 기계를 분해·조립하는 것은 물론, 설계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단다. 채우는 정영수가 운영하던 서버의 해킹을 지휘한 사람이 재훈이란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한국 차가 좋은데….”
채우의 말에 다가온 영업 사원이 말했다.
“저희도 연비가 훌륭한 업무용 차량이 있습니다. 가격은 3천만 원대로 저렴하고요. 그런데 직업이….”
그에 두 사람이 동시에 영업 사원의 질문에 대답한다.
“변호삽니다.”
“변호사요.”
남자는 만들어진 듯 환한 얼굴로 ‘아!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두꺼운 팸플릿을 가져왔다. 그제야 채우는 다양한 차종을 접할 수 있었다.
“제가 살 거예요.”
“안 돼요. 내가 살 겁니다.”
“아니, 왜 제 차를 이겸 씨가 사요?”
“수임료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네?”
대체 얼마의 수임료를 주려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고급 옷과 가방, 거기에 이젠 차까지.
적어도 5천만 원. 아니…, 1억은 까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혹시 노예계약?
“머릿속으로 계산기 두드리는 거 티 납니다.”
낮게 속삭이는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흠흠, 헛기침한 그녀는 제가 고른 차의 가격을 확인한 뒤 수첩에 적었다.
“정말 수임료에서 제외할 거예요. 오늘 계약서 제대로 쓰시죠?”
“그럽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묘한 눈빛으로 경청하던 영업 사원은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계약서를 들고 왔다.
“현재 재고가 있는 차량이라 원하시는 날짜에 출고해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시트 컬러 등을 직접 선택하실 거라면 3개월 정도 소요되고요.”
“아뇨. 그냥 바로 탈 수 있게 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변호사이기에 계약서를 확인하는 속도도 빨랐고, 최이겸은 카드 한 장으로 엄청난 금액의 차를 계산했다.
채우는 알고 있었다. 그래 봤자 지난번 백화점을 털었을 때의 반도 되지 않는 금액이란 것을.
전시장에서 나와 한숨을 푹 내쉬자 이겸이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 맞췄다.
“왜요. 또 자꾸 의지하는 거 같아서 별롭니까?”
“없지 않아 그런 감이 있죠.”
“이제 그런 생각 좀 그만해요. 내가 채우 씨한테 신세 지고 있는걸 생각하면, 지금 해주는 거로도 모자라니까.”
그런 논리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채우는 그와 함께 주차해놓은 차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문을 열려 할 때, 한구석에 떨어져 있는 담배꽁초가 보였다. 적어도 다섯 개 이상. 누군지 몰라도 상대는 엄청난 골초다.
그녀의 시선이 담배꽁초에 닿아있는 걸 본 이겸이 주위를 한 번 훑곤 피식 웃었다.
“누군지 알 거 같네요. 우리 사진 찍어 나르느라 정신없을 겁니다. 무섭게 해서 미안해요.”
“누군데요?”
그는 그녀 대신 차 문을 열어주곤 운전석으로 향했다.
“윤씨라는 분입니다. 아버지의 최측근이라고 해야 하나. 회사 일이 아니라 집안일을 돕는 분이에요.”
최이서의 말대로 최호의 관심은 현재 두 사람에게 쏠려있었다. 채우는 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만약 막장 드라마의 시어머니처럼 최호가 찾아와 돈다발로 뺨을 날리면, 과연 어떤 표정으로 받아쳐야 할까.
엄청난 액수에 마음이 흔들리면 어떻게 하지? 한번 맞고… 받아?
“정채우 씨.”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두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의심스럽단 표정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상한 생각 하는 거 같은데.”
“웬일. 독심술 하세요?”
“제가 좀 합니다.”
“치…. 그냥 생각했어요. 회장님께 돈다발로 따귀를 맞으려면 과연 얼마 정도가 적당할지. 근데….”
채우는 저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 남자와 입술을 맞대며 안전벨트를 당겼다. 그의 몸을 가로지른 벨트가 철컥하며 채워진다.
“최이겸 씨보다 매력적인 제안은 없을 거 같아요.”
미친 듯이 얄밉게 키득대던 그녀의 휴대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며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뒷머리를 감싼 커다란 손이 그녀를 당겼다.
휴대 전화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전시장에서 얻어 마신 코코아 향이 나는 키스였다.
***
쾅! 소릴 내며 벽에 박은 이마가 터졌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정영수는 또다시 벽에 머릴 박았다.
쿵! 쿵! 쿵!
끔찍하단 표정으로 물러선 수감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교도관을 불렀다. 그에 달려온 교도관 둘이 철창을 열고 들어가 정영수를 제지했다.
“정영수! 뭐 하는 짓이야!”
“아악! 여진이 데려와! 신여진!”
“어이, 묶어!”
“신여진 데려와아!”
매일같이 행해지는 자해에 교도관들도 두 손 두 발을 다 든 상태였다. 혀를 깨물고 머리를 박지 않나, 정강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창살을 걷어차질 않나.
결국, 손과 발이 묶인 채 독방에 갇힌 정영수는 여전히 꿈틀대며 자해를 이어갔다.
그 모습을 짜증스럽게 내려다보던 오 과장이 박 부장에게 지시했다.
“신여진 데려와. 더러운 깡패 새끼가 지 여자는 더럽게 챙겨요.”
“그럼 상부에 허락을…. 정영수는 특별 감시대상입니다.”
“신여진이 마누라 아니야?”
“새틴이라는 술집 마담이고, 아직 결혼을 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에이씨! 청장님한테는 내가 허락받을 테니까 김여진인지, 신여진인지 데려와. 저 새끼 대가리에서 한 번만 더 피 터져 봐. 강압 수사했다고 우리만 죽어나. 알았어?”
윤씨는 현상한 사진을 들고 서 있었다. 태블릿이나 디지털기기를 쓰면 좋겠으나, 최호 회장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지금도 모든 업무를 종이로 처리하는 상전 탓에 비서실과 총무실의 프린터기는 여전히 풀가동 되었다.
윤씨가 최 회장의 서재 문을 두드리려던 때였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최이서가 윤씨의 앞을 막는다.
“아버지 지금 바쁘신 거 같던데. 그거 뭡니까?”
그제야 윤씨는 안에서 들려오는 헐떡임을 알아챘다.
“새로 온 도우미인 거 같던데. 아저씨도 알아요?”
“예.”
“그건 뭔데요.”
“보고 드릴 사진입니다.”
“뭐야…. 최이겸이네? 뭐 알아낸 거라도 있습니까? 이 개놈이 형을 병신 보듯 하던데.”
“아, 좀 묘한 모임이….”
윤씨는 손에 든 사진을 슬쩍 감추었다. 그러자 인상을 쓴 최이서가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빼앗는다.
“뭐야, 이건.”
윤씨는 당혹감을 감춘 채 설명했다.
“이건 둘째 도련님이 만나는 여자분 사진이고, 또 하나는 요즘 종종 전무실에서 모인다는 사람들의 사진입니다.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최이서는 험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쉼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개새끼부터 쓰레기, 부모 뒤통수를 치려는 버러지까지.
괜히 형제간의 불화를 만든 게 아닌가 싶어 윤씨는 헛기침을 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럼, 도련님이 직접 전해주시겠습니까? 그러셔도 될 것 같은데요.”
“아아, 안 그래도 그래야겠어요. 이것들이…!”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워낙 똘똘한 도련님이라, 호기심이 많으신 것뿐일 겁니다.”
“어쨌든 알겠어요. 가 보세요. 험한 꼴 당하지 마시고.”
윤씨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물러나자, 이서는 조용히 사진 몇 장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들려오는 교성은 새로 들어온 도우미의 소리였다. 이제는 하다 하다 집안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대?
대외적으로 사별한 아내를 잊지 못하는 순정 마초 이미지로 살아가고 있지만, 기실 지저분한 여성 편력가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까지도 의심하였다. 자신을 조금도 닮지 않은 이겸의 출생을 의심하기 시작해, 위암 말기였던 어머니를 대외적 이미지 손상을 핑계로 치료 받지 못하게 했다. 그것도 암 환자 특유의 병색이 드러나면, 건강한 회사 이미지가 망가진다는 이유로.
어렸던 이겸은 몰라도,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이서는 그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5분쯤 뒤, 벌컥 문이 열리더니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한 도우미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이서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았다. 서재 안의 아버지는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숨을 헐떡이는 중.
허벅지 사이의 축 늘어진 성기가 번들거린다. 이서는 토악질할 것 같아 그대로 돌아섰다.
“도, 도련님!”
그를 불러세운 도우미가 울 듯한 표정으로 소맷귀를 잡아챈다.
“저, 저 좀…. 저 좀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예? 못 살겠어요.”
아, 이건….
“강간당했어요?”
무심한 질문에 여자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깊은 한숨을 내쉰 이서는 지갑에 든 현금을 모두 꺼내 쥐여주며 말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그리고 법무법인 해랑에 가면 정채우 변호사라고 있어요. 그 여자한테 말해요. 그럼 해결해줄 테니까.”
뭐, 수임하나 늘려주고 증인 한 명 더 세우면 되는 거지.
안절부절못하던 여자는 주머니 안에 돈을 쑤셔 넣더니 황급히 집에서 나가버렸다.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걷자 주방에 있던 박씨가 나와 꾸벅 인사한다. 최이서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사람 한 명 다시 구하죠. 이번엔 아버지 스타일은 좀 피하고.”
“예.”
이서는 최호의 서재 방향을 돌아보았다. 혈육의 정이라는 말은 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
[여기 성수동인데. 건물이 안 보여.]
시윤의 연락에 채우는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폈다.
“여기 주소대로 온 거 맞아? 왔으면 나 보일 텐데. 엄청 좁은 곳이야.”
[와, 왜 안 보이냐? 어? 너, 손 흔들어 봐.]
시윤의 말대로 손을 흔들자, 이내 요란한 소릴 내며 바이크 한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헬멧을 벗으며 내린 시윤이 특이한 입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런 데서 장사를 한다고?”
“바이크 멋있다? 응, 들어와.”
“밥부터 먹게?”
“아니, 영상 보게.”
채우는 뒤따라오는 시윤을 흘금흘금 돌아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어정쩡한 높이의 작업실 형식인 2층 공간. 한구석에 놓인 세 대의 컴퓨터가 맹렬하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 앞에는 며칠 밤을 새운 듯한 신재훈과 산뜻한 표정의 이겸이 있었다.
이시윤을 발견한 이겸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시윤 변호사님.”
“예, 안녕하십니까.”
머쓱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들어선 시윤이 곧장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채우는 애써 웃으며 이겸의 곁에 자리했다. 그러자 다들 모였냐고 눈짓한 재훈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휴대폰에 저장된 영상만 3천 개. 그 중 손상된 영상이 한… 200개 정도 돼서, 다 복구해 옮겼어. 근데 다 봤다간 정신이 피폐해질 거 같아서, 정보에 근접한 영상들만 추렸어. 이 새끼 쓰레기야. 하아…. 정말 살인 빼고 다 한 거 같다.”
어쩌면 살인도 했을지 모른다.
채우는 재훈이 건네준 노트북을 받았다. 하지만 함부로 영상을 재생할 수는 없었다.
이건 이들에게 가족의 포르노와 같았다. 게다가 영상 말미엔 이시윤의 형이 죽어가는 모습까지 오롯하게 담겨있을 터.
그녀는 영상을 틀기 전,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감정조절 잘 해야 해요. 가능한 이미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힘들겠지만. 힘들면, 좀… 울어도 되고요.”
채우는 차마 시선을 맞출 수 없어 허공을 보았다. 하지만 되레 두 남자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도 나오나?”
이겸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 올린 재훈이 답했다.
“어. 사운드 살아있어.”
“풀 영상을 봐야 한다는 거지?”
“왜 죽었는지를 알려면, 그래야겠지…? 언제 주사기에 찔렸는지 확실히 해야 하니까.”
“넌 봤어?”
“아니.”
재훈은 동영상 3천여 개가 든 외장 하드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앉은 남자들. 채우는 이 상황이 낯설고 어색했다. 실은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틀까요.”
“그 전에….”
시윤이 말문을 열었다.
“먼저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김동희와 계약을 파기하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물론, 이 상황이 협회에 알려지면 우리 둘 다 징계감이겠지만. 저 그런 거 별로 안 무섭거든요.”
시선을 내리깐 시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그녀의 손을 꼭 붙든 최이겸이 말했다.
“그럼 채우 씨는 나가 있어요. 혹 문제 될지도 모르니.”
“아뇨. 안 나갈 거예요. 저 최이서 씨한테 수임받은 몸이에요. 진범을 밝혀달라잖아요. 경찰은 아니지만, 재수사 요청이라도 해야죠.”
“진범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건 시윤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에 아랫입술을 잘끈 깨문 시윤이 두 눈에 힘을 준다.
“살인죄로 넘겨야죠.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는 최이겸 씨는요.”
“…난 최이서의 무죄만 밝히면 자연스럽게 얻게 될 것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말이라고 생각한 건지, 시윤이 고개만 주억이곤 불쑥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아!]
이 빌어먹을 신재훈.
소리가 너무 컸다. 시작부터 남자들의 신음이 2층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채우는 황급히 소릴 줄였다. 그제야 두 사람의 대화가 제대로 들려온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소리만 듣기로 했다.
반면 두 남자는 영상 속 행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혼탁한 신음과 서로를 향한 애절한 고백이 영상 안에 그득하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 둘 사이에 고작 성욕만이 있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정신병자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들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눈물이 날 거 같다.
신음이 멎은 뒤 서서히 눈을 뜨자, 불 꺼진 어두운 공간과 함께 더욱 까만 인영이 나타났다. 바닥을 기어 다가온 누군가가 이시현의 팔을 잡아 주삿바늘을 찔러넣는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대여섯 번, 주사를 연이어 꽂았다.
고통을 느낀 이시현이 일어나 발악한다. 그에 휴대 전화가 떨어져 잠시나마 밝은 불에 남자의 얼굴이 비쳤지만, 너무 빠르게 지나가 상대를 특정할 수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이시현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다들 충격에 휩싸인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번갈아 보던 채우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상해요.”
“그래요. 이상하네요….”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이시현 씨는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떨어지고 10분 이상 영상이 녹화된 거로 보아, 사망 추정시각도 이때가 맞아요. 그런데….”
이겸의 미간이 꿈틀하며 찌푸려진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그녀는 노트북을 닫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시체는 침대 위에 있었어요. 그럼….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서 죽은 이시현 씨를 최이서 옆에 눕혔단 거죠. 아니면, 목격자들의 눈이 잘못되었던지.”
후자일 가능성은 제로.
벌떡 일어난 이겸이 1층으로 내려간 재훈을 불렀다. 지친 표정으로 올라온 재훈은 다른 영상을 찾아달란 말에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미친, 그 영상들을 또 봐야 해?”
“배경이 까만 어둠인 거로. 그리고 꽤 짧을 거야. 동영상이 여기에서 잘린 이유, 분명히 있어.”
그사이 벌떡 일어난 시윤이 눈물을 훔치며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를 따라가려는 채우를 말린 건 이겸이었다.
그녀의 손을 당겨 품 안에 끌어안은 그가 고개를 젓는다.
“내가 가겠습니다.”
“나쁜 애는 아닌데…. 충격을 받아서 그럴 거예요.”
“압니다. 저에겐 그저 가족의 포르노지만, 이시윤 씨에겐 가족이 살해되는 영상이니까요. 그리고… 어쩐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도 같고.”
이어폰을 꽂은 재훈이 컴퓨터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고개를 들이민다.
이겸은 채우의 눈을 가렸다. 그러곤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말아요. 내가 올 때까지… 귀 꽉 닫고, 절대로. 알았죠?”
비가 올 것처럼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마치 안개가 낀 듯 뿌예진 하늘. 타이머를 맞춰 놓았는지, 천막 끝에 매달린 알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이시윤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꽤 울었는지, 눈가를 시뻘겋게 붉힌 시윤이 옥상으로 올라온 이겸을 발견하곤 시선을 피한다.
“꼴사나운 모습 보였네요.”
시윤은 눈을 벅벅 비볐다. 이겸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올리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다. 그를 흘금 본 시윤이 담배를 권했지만, 거절했다.
“금연 중이라.”
단순한 거절이 아닌 사실이었다. 그녀와 몸을 맞댈수록 금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으니까. 제 더러움이 그녀에게 묻을까 염려하는 스스로가 우습고 대견하며, 재미있었다.
“최이겸 씨는 꽤 멀쩡하시네요. 그런 영상을 봤는데.”
시윤은 반항기 다분한 십 대처럼 말했다. 그에 이겸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난 내 가족이 죽는 걸 보진 않았으니까요. 형의 일은 유감입니다. 심적 고통이 심하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는 마치 공식 석상에 올라 발표하는 사람 같았다. 미리 작성해놓은 발표문을 읽듯이 건조하고 명료한.
그에 몸을 돌리며 코웃음 친 시윤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다.
“형은 살해당한 겁니다.”
“예. 압니다.”
“아까 보셨죠? 이건 철저하게 계획된 살인이에요. 그리고 호텔이었잖아요. 어떤 방법으로 침입했는지 모르지만, 정영수도 분명 엮여있을 겁니다.”
“정영수의 휴대 전화에서 영상이 나온 이상, 무사히 발 뺄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 가기도 하고.”
그 말에 담배를 떨어트린 시윤이 놀란 표정으로 이겸의 팔을 잡아챘다. 최이겸의 시선이 비스듬하게 잡힌 팔로 향했다.
“누굽니까? 누군지 안다고요? 어떻게 알아, 그쪽이.”
“미안하지만 우린 아직 공조할 수 없는 관계 아닙니까? 당신은 어제까지만 해도 김동희의 변호사로서 나를 엿 먹이려 했던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제 팔을 잡은 이시윤의 손을 지그시 떼어내는 최이겸. 아래턱을 파르르 떤 시윤이 이번엔 신경질적으로 그의 멱살을 쥐었다.
“말해! 장난해? 범인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모른척하겠다고? 하, 지금 뭐하자는 거야!”
“모른척하진 않을 겁니다. 단, 공조의 문제죠. 나는 김동희를 망가트릴 겁니다. 나를 망가트린 것처럼. 저와 공조하시겠습니까?”
“뭐?”
이겸은 제 멱살을 잡은 이시윤의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이시윤의 흔들리는 시선이 오래된 상흔이 남은 그의 손등에 닿는다. 이어 욕지거릴 입에 올리며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늘어난 목깃을 툭툭 턴 이겸은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태연히 먼 곳을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김동희가 책임자로 있는 기형 중공업의 해외 영업라인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김동희가 회삿돈을 횡령해 해외 기반의 사모펀드에 투자했는데, 그 회사가 알고 보니 페이퍼 컴퍼니였고 중간 관리자가 완벽하게 증발해 버렸거든요.”
시윤은 마치 허를 찔린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겸의 이야기에서 위화감을 느낀 듯 서서히 표정을 굳힌다.
“최이겸 씨가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글쎄요. 김동희와 관련된 일이라면 알고 싶지 않아도 정보가 들어오더군요. 뭐, 직접 정보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고.”
희미한 웃음이 묻어나는 그의 말투. 다리를 꼰 채 무릎에 양손을 올린 이겸은 이시윤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시윤이 김동희의 변호사인 이상, 사실을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증명 가능한 확신이 필요했다.
이시윤이라는 아군은 매력적인 카드지만, 그만큼 배신에 배팅될 확률이 높은 조커였으므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제안을 하는 겁니다. 미얀마에 법인을 둔 투자 회사 하나를 소개해드리죠. 이시윤 씨는 그곳을 다시 김동희에게 소개하면 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정리될 거고요.”
“기형 중공업에 투자라도 하시려고요? 이해가 잘 안 되는데….”
“담보 없는 투자는 없습니다. 특히 의심이 많은 투자자는 꽤 많은 걸 요구하겠죠. 예컨대 주식이라든지, 채권이라든지. 크게는 경영권이라든지.”
여유로운 이겸의 말투에 상황파악을 마친 이시윤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하, 미치겠네…. 설마 김동희에게 사기를 치겠다, 이겁니까?”
“김동희는 제 손을 망가트린 대가로 기형 중공업의 경영권을 얻은 거나 마찬가집니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려면, 적어도 저로 인해 얻게 된 것들을 모두 내려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입매가 단정한 호선을 그린다. 이시윤은 힘이 빠진 듯 난간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재벌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네요. 모든 걸 그렇게 계산하며 삽니까? 얼마나 망가트릴지, 어떤 사탕을 쥐여줄지. 어떻게 해야 타산이 맞는지.”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이겸은 짧게 한숨 쉬며 이시윤을 향해 두 눈을 치켜떴다.
“나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이시현은 내게도 의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일종의 은인이랄까…. 가족인 당신만큼은 아니겠지만, 도움을 받았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고.”
“망가진 피아니스트라고도 하던가요?”
직설적인 말에 면역이 없는지, 이시윤은 더 이상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 고개를 틀었다.
“…자살할 이유도, 누군가에게 원한 살 일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가정환경이 불우한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리고 부모님께 사랑받는 아들이었습니다. 마약? 무섭다고 진통제도 하루에 한 알 이상 못 먹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전과가 있다고요? 하, 말도 안 돼.”
이시윤은 고개를 저으며 난간을 잡았다. 그러곤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김동희한테 유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 좋은 편도 아니거든요. 저한텐 중요한 카드도 아니고. 하지만 별개로, 의뢰인을 엿 먹이는 건 제 밥줄이 걸린 문젭니다. 로엠의 명예와도 직결된.”
“그건 걱정 마십시오. 나는 꽤 편파적인 사람이거든요.”
“예?”
“그 밥줄, 제가 지켜드린단 소립니다. 로엠의 명예도.”
바보는 아닌지, 이시윤은 말뜻을 알아듣곤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한 방울씩 비를 뿌리기 시작하는 하늘.
시윤이 욕지거릴 입에 올리며 1층에 세워둔 바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좋습니다. 공조하죠. 저는 진범을 잡으려고 여기까지 왔고, 최이겸 씨가 다 책임지신다고 하니…. 믿는 수밖에요.”
이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시윤 변호사님.”
칭찬을 받은 사람처럼 머쓱하게 머릴 긁적인 시윤이 차양 밖으로 고개를 뺀다.
“뭐, 일단…. 우린 둘 다 피해자나 마찬가지니까요. 들어가죠. 비 오는데.”
“이 변호사님.”
느슨하게 앉아있던 이겸이 막 뛰어들어가려는 시윤을 불렀다.
“그런데 정채우 씨와는 고등학교 동창인 겁니까?”
“예.”
“혹시, 예뻤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시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만큼 예뻤습니다. 인기도 좋았고. 왜요, 궁금하십니까? 사진을 보여드릴 수도 있는데. 고1 때부터 고3 때까지 줄곧 붙어 다녔거든요.”
이겸은 천천히 차양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잠시간 여유롭게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앉아있던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부터 영양가 있는 대화를 해보도록 하죠. 진지하고 창의적이며, 생산력 있는.”
그러더니 비가 내리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이시윤은 실소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돌아본 최이겸이 한쪽 눈을 가늘게 찌푸린다.
“그 사진을 살 수도 있는 거겠죠?”
“…엄청 좋아하시나 봅니다. 채우를요.”
“예, 좋아합니다.”
“채우에 대해 잘 아십니까?”
언뜻 삐딱한 이시윤의 질문.
“적어도 지켜본 만큼은 압니다.”
이겸은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짝사랑을 꽤 오래 해서요.”
***
재훈이 찾아낸 영상은 모두가 예상했던 그 장면이었다. 세 시간여 만에 찾아낸 30초짜리 영상.
어두웠던 방에 빛의 실금이 그어지더니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 남자는 태연히 바닥에 놓인 주사기들을 트레이 위에 가지런히 올리곤, 바닥으로 떨어진 이시현을 안아 침대에 눕혔다.
이불까지 손수 덮어 준 뒤, 카메라를 정확하게 올려다보며 찡긋 윙크하는 남자는 정영수.
“미친!”
그 장면에 벌떡 일어난 채우는 두 주먹을 말아 쥔 채 분을 삭이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를 감싸 의자에 앉힌 이겸이 컴퓨터 앞에 앉은 재훈에게 다가갔다.
“아까 그 동영상, 캡쳐해서 화질복구 좀 해 봐. 떨어진 휴대 전화.”
“그거? 왜?”
“하라면 해.”
구시렁거린 재훈은 이겸이 말한 캡쳐본의 화질을 높이기 시작했다. 조각난 픽셀을 모으고 소실된 컬러를 살린 재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거였어? 네가 말한… 증거가.”
재훈이 가리킨 화면을 확인한 그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겸의 곁으로 채우와 이시윤이 다가섰다.
“뭐예요? 이게 증거라고요?”
“뭡니까? 이 사진은. 뭐… 풀 같기도 하고.”
“풀?”
확대된 화면 속 이겸이 말한 증거는 휴대 전화의 액정이었다. 보통의 카메라였다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겠지만, 정영수가 숨겨놓은 카메라는 달랐다.
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상체를 숙였다. 시윤이 말한 대로 액정을 채운 건 이름 모를 풀꽃의 사진이었다. 난초 같기도 하고 수선화 같기도 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던 그녀는 불법 사이트 상단에 깜빡이던 문구를 떠올리며 실소했다.
“초 고화질 풀 HD 영상이라더니…. 진짜였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 이 화면… 실은 내가 아는 화면이라.”
“안다고요?”
이겸은 놀란 표정의 사람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그러곤 채우의 손을 잡아 손바닥과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석란의 일종입니다. 워낙에 희귀한 종이라 기르는 사람이 몇 안 되죠. 그런데… 우리 회장님이 이걸 키우십니다. 그것도 전용 온실에서.”
여기저기서 들려온 다급한 숨소리.
채우는 근래 들어 제 주변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여있던 담배꽁초, 누군가의 시선, 수집되는 사진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이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앙에 핀 하얀 꽃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걸 관리하고 실제로 키우는 사람은 윤씨라고 불리는 아버지의 수행원입니다. 707 특수부대 출신으로 20년 넘게 수족으로 일했죠. 제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휴대 전화 화면과 같네요.”
무거운 침묵 아래, 폭탄을 던진 최이겸만이 태연했다. 높이가 애매해 조금만 실수해도 머리가 닿을 듯한 천장.
이겸은 채우의 손을 잡고 구석에 놓인 소파로 다가가 피곤한 표정으로 몸을 묻었다.
그런 이겸을 따라 이시윤의 시선이 움직였다.
“윤씨라는 사람이 왜 형을 죽입니까…? 왜요.”
“윤씨는 결코 자의로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 살인을 교사했고, 정영수는 장소를 제공했으며, 정리 정돈까지 말끔하게 끝냈죠. 왜 죽였냐고 묻는다면, 누군가 지시했기 때문에 죽인 겁니다.”
그의 옆에 서서 눈치를 살피던 채우는 순간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는 이시윤을 보았다.
최이겸은 범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을 뿐, 특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를.
“이 영상으로 윤씨는 어떻게든 잡아넣을 수 있겠지만, 그건 뱀의 꼬리만 자르는 격입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가 아무리 살인자에 괴물이라 해도, 회사의 직원들은 아무 죄가 없죠. 함부로 움직일 생각 없습니다.”
그에 숨을 고르던 시윤이 소리친다.
“하지만 시도는 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영상 속에 우리 형을 죽인 새끼가 나오잖아요!”
“할 겁니다. 시도만 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자신만만하시네…. 심증만 있고 증거가 없어요. 증거 불충분이라고요!”
“그래서 말입니다.”
나른하게 내리깔려 있던 최이겸의 두 눈이 치켜뜨인다.
“이시윤 씨는 정영수를 재차 고소해주십시오. 피해자들을 모아 이왕이면 판을 크게 벌리는 쪽으로요. 거기에 시체유기 및 살인 방조 등, 이시현과 관련한 죄목도 포함해서.”
“예?”
“정채우 씨는 이제부터 최이서를 변호하게 될 겁니다. 이시윤 씨가 최이서를 참고인으로 지목하고, 최이서를 이용해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온갖 죄목을 다 붙여서 정영수가 억울해 미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럼… 이걸 찾으려 하겠죠. 자신의 유일한 무기일 테니까.”
그가 가리킨 건 흉물스럽게 쌓여있는 정영수의 휴대 전화였다. 덩달아 모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럼 자연스럽게 아버지는 관련인들을 하나씩 처리하려 하실 겁니다. 지금껏 해 온 것처럼. 아버지의 해결법은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거니까요.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겸은 양쪽 무릎을 팔꿈치로 누르며 마른세수했다. 이어 양손을 모아 턱을 대고 말을 이어나간다.
“그때 최이서가 증거를 만들어낼 겁니다. 어떻게든 윤씨를 최이서의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면, 진짜 쇼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고요.”
마치 오랫동안 준비한 사람처럼 최이겸은 거침없이 계획을 말했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이시윤이 자조적으로 냉소하며 이겸을 노려본다.
“최이겸 씨 아버집니다. 당신 가족이라고…. 그 가족을 정말 법정에 세워서 망가트릴 수 있겠어요? 난 왜 못 믿겠지?”
“못 믿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 역시 이시윤 씨를 100% 신뢰하진 않으니까요. 단, 적이 되진 말자는 겁니다. 그리고 가족과 혈육은 좀… 다른 것 같네요. 최호 회장님은 제 혈육이지, 가족이 아닙니다.”
이시윤은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그러곤 짜증과 혼란을 참기 힘든 사람처럼 자리에서 빙빙 돌았다.
채우는 시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겸의 앞을 막아섰다. 그제야 인처럼 박여있던 미간 주름이 펴진다. 그녀는 주름이 팼던 자릴 부드럽게 만져주었다. 부러 꾹 누르고 말없이 쓰다듬자, 팔을 뻗은 그가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좋은데요?”
“괜찮아요?”
이보다 더 바보 같은 질문이 있겠나 싶지만, 그 말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 괜찮습니다.”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대꾸하는 남자.
“안 괜찮은데 왜 괜찮은척해요.”
“멋있어 보이려고요. 채우 씨의 앞이니까.”
“하나도 안 멋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이겸의 뺨을 가볍게 당기자, 그의 턱 근육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럼 곤란한데…. 벌써 콩깍지 벗겨진 겁니까?”
“음, 그건 아니고…. 가끔은 저도 최이겸 씨를 울리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할까.”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난번에 제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준 터였다. 의도를 알아챈 건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이겸이 쿡쿡 웃는다.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울려줄래요? 궁금하긴 하네요. 정채우 씨가 나를 얼마나 예뻐해 줄지. 안달 낼지. 보고 싶습니다.”
“그럼… 집으로 가야겠죠?”
숨을 크게 들이켠 그가 안도한 표정으로 그녀의 복부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요. 가죠, 우리 집으로.”
***
바위 표면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난꽃 위로 깨끗한 물이 쏟아졌다. 가는 잎을 흔든 물방울이 꽃잎을 타고 스며든다.
거대한 바위를 4톤이나 날라 온실 한 귀퉁이를 장식한 건 순전히 야생 석란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흰 꽃이 만발한 가운데, 붉은 꽃망울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봅니다. 귀한 꽃이 피었습니다.”
윤씨의 말에 물을 주던 최 회장이 상체를 세우며 인상을 찌푸렸다.
“뽑아버려.”
“예?”
“갑작스러운 변화는 좋은 게 아니야. 뭔가 잘못됐다는 징조지. 뽑아버리게. 흰 꽃 사이에 빨간 꽃이라니…. 조화롭지 못하잖아.”
“아, 예….”
아직 피지 못한 꽃망울을 보는 윤씨의 표정이 굳었다. 최호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그늘 아래 마련된 찻잔을 들었다.
“비가 올 것 같지?”
“이미 서울 곳곳에 비가 오고 있습니다.”
“그런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실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최호는 지시하듯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그에 경직된 자세로 마주 앉은 윤씨가 시선을 반쯤 내린다.
최호는 껄껄 웃으며 차를 한잔 따라 주었다.
“우리 윤 실장.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야. 내, 그래서 좋아.”
“감사합니다.”
“지금처럼만 해. 지금처럼만 하면 돼. 그럼 만사가 평온하고 탄탄할 게야.”
“예.”
조심스레 찻잔을 드는 윤씨 앞으로 손바닥만 한 메모지 하나가 놓인다. 흰 종이엔 세 명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걸 본 윤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리…해야 합니까?”
“요란하게는 말고. 적당히 해외로 보내서 그쪽에서 처리하게 해. 필리핀이 좋겠어. 거기 강서준이는 좀 깔끔하게 해야 하네.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일을 캐고 다녔다지 뭐야.”
“알겠습니다.”
“아, 그 도우미 아줌마는 다시 내 앞에 데려오고.”
“예.”
메모지에 쓰인 이름은 정영수와 강서준. 그리고 도우미 조영주였다.
윤씨는 메모를 구겨 찻물에 담갔다. 그에 피식피식 웃던 최호가 순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이제 곧 안사람 기일이야. 비가 많이 올 때 갔잖는가.”
은근한 말에 윤씨의 낯이 티 나게 창백해졌다. 무릎에 올린 주먹에 힘이 들어가 파르르 떨린다.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그래. 죽은 사람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어. 제삿밥이라도 제대로 차려줘야지. 반항 한 번을 못하고… 갔으니.”
윤씨의 고개가 좀 더 숙어졌다. 최호는 태연하고 여유롭게 먼 곳을 응시하며 찻잔을 비웠다.
“우리 이겸이는 말이야.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어서 그런지, 내 새끼 같지가 않아. 희로애락이 없는 놈 같아. 그런 놈은 좀 더 강하게 옭아매야 말을 들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놈이거든.”
“…둘째 도련님은 뭐든 잘 하시잖습니까.”
“그런 놈이 요즘은 계집애 치맛바람에 휘둘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쯧쯧, 혀를 찬 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벽하게 관리된 온실을 둘러본 그가 마무리를 부탁한다고 말하곤 온실을 빠져나간다. 그러자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박씨가 우산을 펴고 그를 부축했다.
윤씨는 뜨거운 찻물에 퉁퉁 불어 조각난 종이를 응시했다.
‘고통 없이 가고 싶은데…. 왜 다들 하루라도 더 살라고 하는 건지.’
고고한 난초 같던 여인의 피부는 시커멓게 죽었고, 뼈만 남은 몸은 앙상했다.
‘천장이 무너져서 그 아래 깔려 한 번에 죽었으면 좋겠어. 경수야…. 네가 저 천장 좀 무너트려 봐. 응?’
그럼에도 미소는 아름다웠고, 했기에 더 애처로웠다.
‘그이도 바라는 일이야. 날 좀… 편하게 해주면 안 되겠니. 푹, 잘 수 있게.’
가는 목을 움켜쥐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여인은 평온하였고 죽어가는 내내 소리 한 번을 지르지 않았다. 그녀의 숨결에선 난향이 났다. 평소의 약 냄새가 아닌, 은은한 난향이.
여인은 평온하게 눈감았지만, 그것은 평온이 아니었다. 지금껏 고통에 몸부림쳐온 여인의 한이었다. 소리 없는, 한.
그녀의 팔이 병상 밖으로 늘어졌을 때, 그의 뒤에서 악귀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가… 결국 일을 쳤군.’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미소를 띤 최호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자네가 죽인 게야. 우리 애들 엄마를. 내 아내를.’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귀가 먹을 것 같던 날이었다.
윤씨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하늘, 엉겨 붙은 먹구름이 보인다.
찻물을 바닥에 쏟아버린 그가 일어났다.
***
“제일 예쁜 옷으로 입어요.”
드레스룸 안에는 지난번 이겸이 사 준 옷들이 한가득 걸려있었다. 태그도 제거되지 않은 채 비닐에 싸인 옷들과 가방이 그녀를 맞았다.
“예쁜 건 왜요?”
“보고 싶어서요.”
이겸이 채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으로 걸린 옷들을 뒤적이던 그녀가 물었다.
“근데… 예쁜 옷을 입고 섹스하면 더 좋을까요?”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돌아보자, 새카만 눈동자로 내려다보던 그가 상체를 기울여 입술을 붙여왔다.
“일단 입어 봐요. 어떤 게 제일 좋은지… 확인해보죠, 뭐.”
“에이, 장난이에요.”
“흠.”
장난을 진담으로 받아치는 남자.
채우는 소리 내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손에 닿는 옷감의 감촉이 피부에 감겼을 때를 상상하게 한다. 그녀는 살짝 기대되는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어디 가는지 알려주면 고르기 더 쉬울 거 같은데. 우리 어디 가는데요? 말 안 해줄 거예요?”
“채우 씨.”
“네, 네.”
팔을 뻗은 그가 원피스 하나를 골라 꺼내 들었다.
“난 장난 아니었어요. 이것부터 입어보죠.”
“진심이라고요…?”
채우는 그가 내민 원피스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린 이겸이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 맞추며 속삭인다.
“울려준다면서요. 기대하겠습니다.”
채우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얇은 피부 위로 아스스 돋아난 소름.
전신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제 뒤에 서서 집요하게 응시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최이겸 씨.”
“예.”
“막 때려서 울리는 건 좀 그렇죠?”
“맞고 사는 남편 코스프레를 하란 겁니까?”
어떻게 해야 진지하면서도 저렇게 능청스러운 말을 구사할 수 있을까? 역시 최이겸은 말로 먹고사는 직업을 택했어야 한다며 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겸 씨를 울릴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생각해보죠. 근데 그건 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맷집이 좋은 편이라.”
입가를 문지른 그가 웃음을 꾹 참는 게 보였다. 결국, 다가온 이겸은 그녀가 입고 있던 헐렁한 셔츠부터 머리 위로 빼낸 뒤, 레깅스를 내리고 도톰한 양말까지 벗겼다.
색이 옅은 단정한 속옷을 가만히 응시하다, 서랍을 열어 고른 옷과 같은 색의 속옷을 찾아 내미는 그.
“이거로 갈아입죠.”
“검은색이네요. 은근 깔 맞춤 좋아해?”
“채우 씨에게 검정이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오늘은 나도 검정 슈트를 입을 예정이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커플로 보이고 싶어서.”
“아….”
그녀는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속옷을 벗으려던 채우는 이겸의 옆구릴 쿡 찌르며 저리 가라고 눈짓했다. 하지만 반대편 옷장에서 검은 정장을 꺼낸 그는 지극히 태연한 표정으로 셔츠를 벗고 벨트를 풀었다.
바지와 속옷을 차례로 벗어 알몸이 되는 남자의 뒷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채우는 잠시 숨을 참았다. 운동으로 갈라진 나비 모양의 등 근육과 긴 다리. 좋은 향기가 그녀를 긴장시켰다.
이겸을 훔쳐보던 채우는 불쑥 고개를 튼 그와 눈이 마주쳤다. 죄지은 것도 아니건만 괜히 흠칫 놀라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뒤로 붙어선 그가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나는 준비 끝났습니다.”
“네? 뭐, 뭐가요?”
“섹스할 준비. 오늘 꼬신 건 채우 씬데, 자꾸 이렇게 뺄 겁니까?”
나 오늘 무덤을 자주 팠구나….
“아님, 내가 울려버려도 되고.”
채우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창피하리만치 붉어져 도무지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짓궂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커다란 손이 브래지어를 쓸어 올리며 젖가슴을 움켜쥔다. 그가 몸을 더 붙이자 허벅지 사이로 파고든 성기의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딱 붙은 허벅지 틈으로 빠져나온 모습이 숨 막히게 외설적이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살덩이가 젖은 여성 안으로 파고들 때, 얼굴을 가렸던 손으로 거울을 짚었다. 내부를 꽉 채우는 남자. 달아오르게 만드는 애무 없이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뒤로 빠져나갔다가 느릿하게 파고든 그가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돌렸다. 그러곤 상체를 기울여 입술을 포개왔다.
“나는 정채우 씨가 어떤 모습이어도 좋아요.”
속삭이듯 말하고 그녀의 아랫입술을 잘끈 깨문다.
“그러니까… 뭐든 다 보여줘요. 아니면, 내가 직접 확인할까요?”
복부를 쓰다듬으며 내려간 손이 음순을 벌려 단단해진 음핵을 눌렀다. 부드럽게 액을 묻혀 비비다가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자, 급격한 배뇨감에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아아! 자, 잠깐!
“못 멈춰.”
목덜미를 강하게 깨문 그가 강도와 속도를 동시에 높였다. 황홀하다, 격정적이다, 혹은 미칠 것 같다 등등의 수식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내부가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이 기분은.
앞으로 기울어진 그녀의 이마가 거울에 닿는다. 더운 숨이 쏟아져 매끈한 거울 표면을 뿌옇게 만들었다.
그녀는 완전히 거울에 붙어섰다. 땀으로 범벅된 피부가 뭉개지고 시야가 흔들린다. 지나치게 가까워 어떠한 형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두려우리만치 모든 것이 희미했다.
***
간단히 짐을 챙겼다. 그는 꼭 필요한 게 있다면 속옷과 칫솔 정도라고 했지만, 남자들은 모른다. 여자들의 1박 2일과 남자들의 1박 2일은 다르다는 것을.
세안제와 화장품, 속옷과 얇은 겉옷, 비상약 같은 걸 챙기니 작은 여행 가방이 가득 찼다.
채우는 그에게 가방을 건넨 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노트북을 따로 챙겼다.
이겸은 평소와 다른 차를 준비했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차량으로, 종종 홀로 움직일 때 사용하는 차였다.
채우는 고급 차들이 줄지어 주차된 곳을 슬쩍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혹시 다….”
“드라마를 너무 보셨네요.”
“아, 그런가요.”
피식 웃으며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온 그는 곧장 김 실장에게 연락했다. 일정조율까지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여정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저도 출근 못 하는 건가요?”
“혹, 급한 일 있습니까?”
“아뇨. 어차피 주말이기도 하고…. 뭐, 서류야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혹시 모르니 해랑에 얘기해 두는 것도 좋겠네요. 남해에 도착하면 꽤 피곤할 겁니다.”
남해라는 말에 채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기도에서 거의 벗어나 본 적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남해라니….
머릿속으로 서울부터 부산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던 그녀가 실소했다.
“그래서 밤에 출발하는 거예요? 차 막힐까 봐?”
“예. 아마… 쉬지 않고 달려도 4시간은 걸릴 테니. 중간중간 휴게소에 들르겠지만, 쉴 수 있을 때마다 쉬어둬요.”
채우는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은 도심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어둠과 가로등 불빛. 그리고 도심을 수놓은 차량 후미등의 붉은 빛이 잔상처럼 번진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시티 팝의 온화한 멜로디에 잠이 쏟아졌다. 집을 나서기 전, 세 번이나 시달린 탓이다. 게다가 정액 자국을 씻는답시고 뜨거운 물에 한참이나 몸을 담근 이유로 틈만 나면 졸음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애써 눈을 부릅뜬 채 정면을 보자, 웃음을 참은 이겸이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자요. 괜찮으니까.”
“내가 자면 운전하기 힘들 텐데….”
“괜찮습니다. 자는 거 보는 거, 꽤 즐겁거든. 코 고는 것도 보고.”
순간 그를 째려보았으나, 한쪽 뺨에 콕 박힌 보조개에 또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미소에 약을 쳤나.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자신은 최이겸의 얼굴에 너무 약했다.
정신을 차리자며 양 뺨을 두드린 것도 잠시,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이 감긴다.
***
어둠에 사로잡힌 세상 같았다.
시동을 걸어둔 채 차를 세운 그는 음악 볼륨을 낮췄다. 조수석에 앉아 곤히 잠든 채우의 앞머릴 조심스레 쓸어넘겨 준 이겸은 차에서 내려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4시간 30분 만에 도착한 부산시의 요트 선착장. 야외 주차장엔 오래도록 방치된 차량 몇 대와 요트가 매달린 픽업트럭뿐이었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난간에 기대섰다.
고층 아파트의 불빛이 바다 위에 드리우고, 정박된 요트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누군가는 한국의 나폴리라 부르지만, 그에겐 어머니를 뿌린 무덤인 곳.
창하 그룹의 창업주인 최동영은 토지 개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건달이었다고 한다. 한낱 건달 주제에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회사를 설립하였고, 10여 년을 선입견과 평가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최동영은 유난히 쌓아 올린 부와 사주일가의 건재함을 내보이고 싶어 했다.
대한민국 땅의 40%를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최동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본인이 묻힐 선산을 만드는 거였다. 대대손손 제 후손들이 묻힐 씨족 묘.
하지만 재밌게도 화려하고 거대한 선산에 묻힐 수 있는 건, 최씨 성을 가진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겸의 모친은 죽은 후, 화장되어 이곳에 뿌려졌다. 연고 하나 없는 부산 바다에.
“여기는 비 안 오네요.”
상념에 잠겨있던 그는 기지개를 켜며 다가온 채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이마에 입술을 누르자, 배시시 웃으며 폭 안겨 오는 그녀.
“저 여기 알아요. 깨우지 그랬어요. 나 혼자 정줄 놓고 자버려서 미안해지잖아요.”
“미안하라고 그런 겁니다. 나 좋으라고.”
“아, 진짜. 은근 못됐단 말이야?”
“이제 알았어요?”
그녀만 보면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던 마음이 뭉툭하게 무뎌져 버리고 만다. 예전엔 그것이 당혹스럽고 곤란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더더욱.
그때 입술을 삐죽이던 채우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여긴 왜 왔어요?”
“곧, 기일이라.”
“누구… 아, 어머님이요?”
그녀가 다소 놀란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예. 이곳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
이겸은 그녀와 손깍지를 끼고 걸음을 옮겼다. 차 시동을 끄고 어둠에서 벗어나 가로등이 길을 밝힌 산책로 위로 올랐다.
“좀 놀랐어요…. 워낙 창하 그룹 선산이 유명하잖아요. 어머님의 묘가 있다면, 그쪽일 줄 알았거든요.”
“언론엔 그렇게 알려져 있죠. 어느 집이나 특별하진 않아도 비밀을 갖고 있으니.”
그녀는 그가 고른 검은 원피스의 의미를 이제 알겠다며 입꼬릴 조금 휘어 올렸다.
더운 날씨 때문에 걸친 카디건이 불편한지, 채우의 목덜미에 진땀이 맺혔다. 이겸은 그녀의 카디건을 벗겨 팔에 걸었다. 그러자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묶으며 개운하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
그의 가슴이 술렁였다.
정채우는 여름이다. 어쩌면, 소나기. 그는 우아하게 뻗은 긴 팔을 잡아 제 목에 두르고 입술을 포갰다.
밤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서울에선 맡을 수 없는 비릿한 바다 냄새. 맞붙었던 입술이 떼어지고, 그 사이로 레몬 캔디 향이 났다.
“그새 사탕을 먹었네. 그것도 혼자.”
“길에서… 자꾸 이러면 곤란하거든요?”
웃음이 나오는지 입술을 씰룩거리며 그녀가 말했다. 그에 이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주위를 살폈다. 해안 카페를 중심으로 산책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두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도 우리에겐 관심 없습니다. 뭐, 따지고 보면 연예인도 아니고. 남들이 좀 보면 어때요. 우리, 나쁜 짓 하고 있는 겁니까?”
“누가 나쁘대요? 하여튼.”
“어쩌겠어요. 내 눈엔 당신이 가만둘 수 없을 만큼 예쁜걸.”
“으… 방금 손발이 확 오그라들었어요. 봤어요?”
채우는 오만상을 지으며 그의 앞에 오그라든 손가락을 쫙쫙 펴 보였다.
이겸은 그녀의 뺨을 쭉 잡아당긴 뒤, 다시 깍지를 끼어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이제 재미없는 얘기 좀 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음, 재미있으면 더 좋긴 해요.”
“그건 절대 아니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녀의 고개가 들리고, 이겸의 차가운 시선은 먼바다를 향했다.
“멀미합니까?”
어둠 속에서 언뜻 드러난 요트는 대형 카라반 두 대 정도를 합쳐놓은 듯한 크기였다. 선착장이 아닌, 유명 호텔과 연결된 부두에 세워져 시동을 걸지 않은 요트는 어두웠다.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의 불빛이 아니었다면, 서로의 형체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채우는 샌들을 손가락에 걸고 맨발로 요트에 올랐다. 그녀로선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혹시, 운전도 직접 해요?”
아무도 없는 선실을 둘러보며 그녀가 물었다.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안 할 겁니다. 뱃멀미, 그거 꽤 고약하거든요. 멀미를 하는지, 안 하는지는 나중에 시험해보죠.”
“음, 궁금하긴 한데.”
“그래도 안 돼요.”
채우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불을 켜자 잘 꾸며진 아늑한 실내가 보였다. 미니 주방과 욕실. 그리고 침실로 이루어진 크루즈선의 객실을 닮은 곳.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건 그가 냉장고 안에 들어있던 맥주와 샴페인을 꺼내 그녀에게 내보였다.
“둘 중 뭐로 할까요.”
“더 시원한 거로요.”
“음…. 그럼 샴페인으로 하죠.”
술을 마신다는 건 이곳에서 밤을 보낸다는 뜻일까?
괜한 두근거림에 그가 내민 잔을 받는 손끝이 살짝 경직되었다. 부쩍 말수가 없어진 채우의 얼굴을 빤히 보던 이겸이 환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호텔과 정박된 요트들. 모두 창하의 소유입니다. 소유자의 이름이 다르고 사명이 다르지만, 2011년. 아버지는 기업 가치 평가에서 바닥을 쳤던 이곳을 약 4배 값에 인수하셨죠. 이 호텔은 당시, 기형 중공업의 소유였던 곳입니다. 어디서 나온 돈이었을까요. 압니까?”
비자금.
그녀는 로제와인의 옅은 분홍빛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최이겸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시 일에 얽혀있는 금융 기관과 정부 및 사법부 인사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대대적인 금융 사기극이나 다름없었다.
채우는 잔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기억나요. 뉴스에서 크게 다뤘던 거요. 교수님이 그 일을 주제로 과제를 내주셨었거든요. 과연 그 인수합병에서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은 누구이며, 법적인 문제를 꼬집자면 무엇인가로요.”
“답을 냈습니까?”
“대부분이 아직 상무였던 최이서를 지목했어요. 그리고 당시에 법무법인 명재를 최대 수혜 대상으로 꼽았고요. 인수합병의 승패 여부는 변호사의 역량에 따른 것이라는 답이 나왔어요. 사기, 거짓말, 합리화를 하는 것. 더럽지만 설득의 힘을 가진 일. 너희가 변호사가 된다면 종종 마주할 일이다, 라고요. 그게 싫으면 검사를 하라셨어요. 판사를 하든지.”
능력대로 살라는 거죠, 라며 그녀는 웃었다. 그러곤 그의 표정을 살폈다.
당시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던 가장 큰 피해자. 그건 꿈을 절단당한 최이겸이었다. 누구도 몰랐던 사각지대에서 그는 토막 난 꿈을 버리고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래서인지 빛이 닿은 옆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떤 분이셨어요? 어머님이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묻자, 이겸이 그녀의 빈 잔을 채워 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평범한 분이셨습니다. 성악을 하셨고요.”
“몇 살 때 돌아가셨죠?”
“11살.”
생각보다 어렸다. 열한 살 때의 저는 어떤 아이였는지 상기해보던 그녀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고개를 저었다.
“까마득하네요.”
“대부분 그렇지만…. 알다시피 저는 당시 초등학교 수업을 조기 이수했고, 12살에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평범하지 않았죠.”
회사 입사 후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최 회장의 둘째 아들. 천재라 불리던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렇다는 건 저와 달리, 그는 좀 더 많은 유년 시절을 기억한다는 뜻이기도 한 걸까?
“그 시절이 다 기억… 나요?”
“음…. 생각보다 너무 많은 걸 기억합니다. 당시엔 제가 아는 것들을 숨기기 급급했어요. 너무 많이 알아도 힘들었거든요. 내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얻은 것보다 결여된 것이 더 많았지만,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저도 몰랐고요.”
“상상이 안 돼요. 고작 어제 있던 일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잖아요.”
“그런가요.”
“힘들었어요…? 하긴. 고작 10살 어린애인데 사람들의 기대치가 성인 못지않다면, 억울할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곤 샴페인을 음료처럼 삼켰다.
술은 달았다. 그의 목소리도.
“어머니께 딱히 깊은 애정을 가진 건 아니었습니다. 생물학적인 나의 모친 정도랄까. 하지만 좋았던 기억 대부분이 어머니와 연관되어 있어요. 성악을 하시던 어머니와 반주가. 건반 음과 어우러진 노랫소리가 좋았습니다. 어쩌면 마음만은 평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애정이에요. 그리고 최이겸 씨는 은근 정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고.”
그에 양손을 꽉 움켜쥔 그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어머니가 교살당한 걸 알게 된 순간은 염을 할 때였죠. 그런데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요. 저도 평범한 아이처럼 어른이 두려웠습니다. 알면 안 되는 위험한 것을 훔쳐본 기분이랄까.”
손에 힘이 풀려 잔을 놓칠뻔했다. 목이 가는 샴페인 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채우는 못 들을 소릴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던 그가 고개를 주억이며 피식 웃는다.
“교살이란 단어가 좀 자극적이었습니까? 물론, 어머니는 암 환자였고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태가 좋지 않으셨어요. 죽음 뒤에 목이 졸린 건지, 목이 졸려 돌아가신 건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가 살던 세계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법도 질서도 없는, 권력과 힘으로 움직이는 세계.”
그녀는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끝에 힘을 준 상태로 이야기가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상한 기분이다. 듣고 싶으면서도 귀를 틀어막고 싶고, 그를 안아주고 싶다가도 제가 안기고 싶은.
“어머니를 화장한 뒤, 이곳에 뿌리고 형과 함께 빈 요트에 올랐습니다. 형은 어머니를 아주 좋아했거든요. 형은 많이 울었지만, 저는 위패를 보면서 그저 나무 재질에 관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겁이 많았던 형은 혼자 숨지 못하고 저를 끌어들인 거였어요. 같이 울어줄 줄 알았는지, 담담한 제게 화를 내더군요. 유년시절 가장 가까이에서 본 지극히 다채로운 성격의 소유자가 형이었습니다. 제게 많은 감정을 가르쳐주기도 했고요.”
“최이서 씨는… 어릴 때도 다혈질이었나 보네요.”
“예. 제가 최이서를 돕는 이유는 여전히 바보 같고 한심한, 하등 쓸모없는 인간일지라도….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든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에요.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어서 여기로 온 겁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처음으로 배운 곳이, 여기라서.”
어린아이가 인생의 희로애락을 배웠단다. 고작해야 열 살짜리 꼬맹이가. 그가 배운 희로애락은 과연 어떤 색이었을까.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가도 돼요?”
그 말에 이겸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의미전달이 잘못되었는가 싶어 그녀는 이내 정정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그쪽으로… 가도 되냐고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그가 손을 내민다. 채우는 내민 손을 잡은 채 테이블을 돌아 그의 곁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슬쩍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힌 그가 허리춤을 꼭 끌어안고는 어리광부리듯 머리를 기대왔다.
커다란 남자를 품에 안은 꼴이었다. 그의 머리와 목덜미를 끌어안고 긴 한숨을 내쉬며 쓰다듬었다.
“내 애인 너어무 똑똑하고 잘나서, 어릴 때부터 고생이 많았네요.”
“그럼 이제 정채우 씨 이야기를 들어보죠. 나만 너무 벌거벗은 기분인데.”
“그래서. 같이 벗자고요?”
“그럴까요?”
그는 제 말을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든 뒤, 셔츠 윗단추를 풀었다. 그러곤 그녀의 머리 뒤로 손을 넣어 하나로 올려묶었던 고무줄을 당겼다.
부드럽게 풀린 머리끈이 남자의 손끝에 매달린다. 어깨와 등을 가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손이 움직였다.
이겸은 등 쪽에 달린 지퍼를 내려 원피스를 헐렁하게 만들었다. 선이 고운 어깨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자, 채우는 얼굴을 붉히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우리 둘뿐인 거죠?”
“왜요. 누가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귓가를 울리는 웃음소리에 몸이 젖어 드는 기분이다. 채우는 파고드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어깨를 짚었다.
“내 얘기 해 보라면서요.”
“해 봐요. 들을 준비 끝냈으니.”
“음….”
그녀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던 이겸은 어깨를 짚은 손을 살짝 깨물었다.
“채우 씨의 유년시절이 궁금해요.”
거짓말.
왠지 이 남자라면, 모든 걸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쩌면 제가 모르는 과거의 이면까지도.
이겸은 그녀의 손목에서 시작해 팔 안쪽과 겨드랑이. 그리고 어깨 쪽을 야릇하게 깨물며 재촉했다.
“어서요.”
치마 속으로 들어온 손이 부드러운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파고들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채우는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나는… 별거 없었어요. 특별하지도 않고 독특한 편도 아니었고. 좀 불쌍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엄청 불쌍한 것도 아니었어요.”
“음, 정채우 씨는 누가 봐도 평범하지 않은데요.”
“그쵸. 평범은 또 아니죠. 저희 엄마는 열일곱에 절 낳으셨거든요. 물론 미혼모로. 초등학교 입학식 날 엄마가 왔는데, 20대 초반인 거예요. 그것도 새빨간 머리를 하고요. 다들 태연한 척하려고 어찌나 애를 쓰던지. 그 시선이 잊히질 않아요.”
채우는 웃음을 참으며 그와 입술을 여러 번 포갰다. 당시엔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동정과 연민, 멸시로 점철된 눈빛들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당시엔 죽을 만큼 힘들었을지라도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그래서… 슬펐습니까?”
“그때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매일 투정을 부렸어요. 근데 학교에 안 가면 엄마처럼 될 거란 말에 정신 차리고 다녔죠. 씁쓸했을 거예요.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엄마를 부정했다는 뜻이니까.”
숨결이 닿아 간질거리는 입술을 혀로 덧그리다 강하게 빨아들인 이겸은 거치적거리는 원피스를 그녀의 머리 위로 빼냈다. 정전기로 인해 머리카락이 부스스 일어난다.
채우는 울상을 지으며 허공에 뜬 머리카락을 잡아 내렸다. 그러자 소리 내 웃은 이겸이 다시금 그녀에게 키스해왔다.
몇 번이고 혀를 얽은 그가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속삭였다.
“그럼, 이제 우리 뭐 할까요. 말해줘요, 채우 씨가.”
적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에어컨이 가동되었다. 이겸은 희미하게 들이치는 새벽빛에 블라인드를 기울이곤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어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느덧 보송보송하게 마른 뒤.
채우의 이마와 뺨에 입 맞춘 그는 꽉 안고 있던 그녀를 놓아준 후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세안을 마친 뒤, 지난밤 입었던 슈트 대신 그녀가 준비해 온 편안한 트레이닝복을 걸쳤다.
적당히 준비하라고 했더니, 센스까지 좋아서는.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얇은 후드 셔츠를 챙긴 여자.
그는 선실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그녀에게 입 맞췄다. 그녀에게선 은은한 베이비파우더 향이 났다. 집에서 함께 사용하던 것과는 다른.
코끝으로 귀 뒤를 훑고 향을 음미한 뒤 자그마한 귓불을 깨물자, 뒤척인 그녀가 손을 뻗어 목덜미를 안는다. 하지만 잠에서 깬 건 아닌지 옹알이 같은 소릴 내곤 다시 축 늘어졌다.
그녀의 뺨에 오래도록 입술을 누른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겼다. 새벽의 서늘함이 피부에 들러붙는다.
선실을 나와 아침이슬에 축축하게 젖은 갑판을 걸었다. 요트가 정박된 선착장 앞, 밤새 자리를 지킨 네 명의 경호원이 그를 발견하곤 허리를 꾸벅 숙인다.
“이 시간부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접근하지 못하게 하세요. 남녀노소 불문합니다. 부탁드리죠.”
“예, 그러겠습니다.”
이겸은 고개를 끄덕인 뒤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그러곤 축축한 공기를 가르며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의도대로 흘렀다. 제가 오래도록 인내하며 던져 놓은 그물에 하나둘 걸려들어 비늘이 뜯기고 피부가 베이는 것도 모른 채 유유자적 꼬리를 흔든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이겸은 느긋한 걸음으로 2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약속 시간 30초 전. 하지만 그는 3분 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상대는 1분 1초가 아쉽겠지만, 그에겐 아니었으니까.
호텔 내에 마련된 거대한 콘퍼런스 홀. 앞을 지키던 남자 둘이 뒤늦게 최이겸을 알아보곤 서둘러 문을 연다. 이겸을 기다리던 상대는 김동희였다.
초조한 듯 단상 근처를 배회하던 김동희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돌아선다. 최이겸을 발견한 김동희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와 멱살을 잡았다.
“최이겸! 무슨 짓이야, 이게.”
이겸은 가만히 김동희의 손목을 잡아떼었다. 그러곤 구겨진 옷깃을 털며 뒤집어썼던 후드를 벗었다.
“귀국을 부산으로 할 만큼, 급했나 보지?”
“웃지 마, 이 쓰레기 새끼야. 그 장부…! 어떻게 된 거냐. 네가 뭔데 내 회사를 뒤집어엎어!”
“걱정 마. 아직 검찰에 넘긴 건 아니니까.”
“이런 미친!”
김동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자신은 이시윤을 통해 미끼를 던졌고, 동시에 채찍까지 후려쳤다.
아마 꽤 아팠을 텐데….
피식 조소를 흘린 이겸은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씩씩거리며 주위를 맴도는 김동희의 낯빛이 창백하다.
“비자금? 하, 비자금. 말이 안 되잖아, 최이겸. 만약 그 돈이 VIP의 비자금이란 걸 알았다면, 나는 절대 건드리지 않았을 거야. 절대.”
마치 스스로 자문자답하듯 읊조리는 김동희. 이겸은 차분하게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며 꼬아 올린 다리를 까딱였다.
9년 전, 말도 안 되는 자금이 기형 중공업으로 대거 흘러 들어갔다. 당시엔 엘리엇이라는 미국발 사모펀드의 공격이 워낙 충격적이라 집중 받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기형을 응원했고, 여타 기업들이 기형 중공업에 자금을 대는 걸 당연시했다.
국민의 애국심을 이용한 대대적인 사기극. 차명 계좌를 이용한 대규모 자금세탁이 당시 정·재계 전체에서 벌어졌다.
여타 기업들과 투자자들을 거쳐 창하로 흘러들어 온 자금은 다시 기형으로.
그리고 재투자의 시기와 기회를 엿보던 VIP의 자금줄이 기형에 묶여있는 시점, 김동희가 사고를 쳤다. 자금 일부를 해외 도박과 무리한 자금 유동에 사용했고 큰 손해를 보았다. 그것은 엄연한 횡령이기도 했다.
지배 계층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노조의 잦은 파업과 태업이 이어진 결과, 기형 중공업의 가동률은 70%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엘리엇 사태보다 더욱 심각한 도산 위기.
최이겸은 두 개의 덫을 놓았다. 그중 하나가 17시간 전, 김동희에게 보낸 비자금 관련 장부였다. 열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판도라의 상자.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든 이겸이 비스듬히 웃으며 말했다.
“너는 쓸모없는 제안을 받아들인 거로 내 아버지의 덫에 걸린 거야. 결국, 얻는 것 하나 없이.”
마치 확인 사살을 당한 사람처럼 헛바람을 삼킨 김동희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김동희는 떨리는 무릎을 짚으며 실소를 흘렸다.
“하, 아니야. 차명 계좌? 비자금? 자금 세탁? 그래…. 그렇다 쳐. 창하 그룹은. 지금 같이 죽자는 거냐? 그 장부 공개되면, 나만 죽는지 알아? 제일 먼저 칼 맞는 게 누군 줄 알고!”
“글쎄. 적어도 나는 아니겠지.”
“최 회장도 죽어…. 같이 얽힌 모든 기업이 다! 그걸 가만두고 볼 거 같아? 최이겸. 이건 줄다리기나 다름없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면…. 아무리 너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수밖에 없고.”
김동희의 발악에도 최이겸은 태연했다. 되레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김동희는 안개 속을 헤매는 심정으로 조급하게 떠오른 추론을 붙들었다.
“최이겸, 너…!”
“계속해.”
“정말… 망하게 하려고? 창하를?”
그 말에 최이겸의 매력적인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는 팔걸이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린 뒤, 몸을 일으켰다.
“나는 내 직원들을 나앉게 하진 않아. 너처럼.”
“너, 나한테 왜 이래…. 손 때문에 그래? 내가 무릎 꿇고 빌까? 너는 그따위 피아노 없어도 떵떵거리며 평생을 살 수 있잖아!”
소리친 김동희가 거리낌 없이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절박한 표정이었지만, 조금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도와줘, 최이겸. 그만둬. 제발 부탁이다. 내가 어떻게든… 정상화 시켜 놓을 수 있어. 그러니까….”
“두 가지 제안을 하지. 아니… 선택권을 줄게.”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최이겸을 올려다보는 김동희. 그의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첫 번째, 자금을 유동시켜 주는 것. 회복할 수 있는 전체를 투자 개념으로. 물론, 경영주가 바뀌어야 할 테지만.”
“너 설마, 흡수 합병되라는 거야…? 네 밑으로?”
“싫으면 두 번째….”
이겸은 얼굴에서 여유를 지웠다. 그러곤 상체를 기울여 무릎 꿇은 김동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증인으로 출석해. 사업에 관한 건 일절 건드리지 않을 테니, 출석해서 증언해. 내 아버지가 행한 짓. 전부를.”
순간 김동희의 낯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분노를 느낀 것인지, 혹은 공포일지. 김동희의 몸은 경련하듯 떨렸다.
그 겁먹은 얼굴에 조소를 던져 주고 싶었지만, 이겸은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준 뒤 돌아섰다.
“순순히 먹히든, 몸부림치다 만신창이가 되든. 아니면 팔을 하나 내주고 몸통을 지키든. 결정은 변호사와 동석한 자리에서 듣지.”
***
무언가 부딪치는 소릴 들으며 번쩍 눈을 떴다. 새벽 느지막이 잠들어서인지, 숙면을 취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기지개를 켠 채우는 아무도 없는 선실을 둘러보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실내. 욕실에서도, 주방 쪽에서도 최이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산책이라도 간 건지.
당황한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옷 가방을 열었다. 편안한 옷을 꺼내입는데, 함께 챙겨 온 그의 옷이 사라진 게 보였다.
채우는 피식거리며 얇은 셔츠에 몸을 꿰었다. 그러곤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컵에 따를 때였다.
“일어났습니까?”
땀에 흠뻑 젖은 최이겸이 들어서며 싱긋 웃는다. 큰 키 탓에 상체를 살짝 숙인 그는 곧장 그녀에게 다가와 들고 있던 컵에 입을 댔다.
채우는 키득대며 컵을 기울였다. 강해 보이는 목울대가 움직이고 입가를 타고 흐른 레모네이드가 땀에 젖은 셔츠를 적신다. 묘하게 야릇한 땀 냄새가 훅 끼쳤다.
“씻어야겠어요. 아침 운동을 얼마나 거하게 한 거예요?”
“아침부터 좀 거슬리는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이요?”
“김동희를 만났습니다. 호텔 안에서.”
“정말?”
“예.”
황당한 마음에 입을 헤 벌린 그녀에게 입 맞춘 그가 셔츠를 벗어 떨어트리며 말했다.
“바다 수영, 해 봤습니까?”
“…아뇨.”
“해 보죠.”
그러곤 곧장 선미로 가 요트에 시동을 거는 그.
최이겸은 묘하게 들떠 보였다. 좋지 않은 징조다.
채우는 묵직한 엔진음을 들으며 가까이에 있는 안전바를 잡았다. 그러자 돌아본 그가 요트를 움직였다.
순간 몸이 뒤로 젖혀지는가 싶더니,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며 깊은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여름의 막바지. 미루고 미뤘던 휴가를 온 기분이었다.
산란하는 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그가 돛을 올렸다. 흰 돛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펴진다.
시동을 끈 그가 갑판 위로 올라가더니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피차 수영복은 없고…. 벗죠, 그냥.”
그러곤 피식 웃으며 바다로 뛰어드는 남자.
“어어!”
그녀가 손을 뻗었지만, 그는 거침없이 물살을 갈랐다. 마치 분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마라톤을 할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넘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는 전신으로 표현하는 중이었다. 짜증과 분노 따위를.
두 사람의 요트와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춰 서는 한 대의 요트. 그 위로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자리하는 게 보인다.
깊이 잠수했던 그가 고개를 털며 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손을 뻗는다.
“뛰어요. 구명조끼 입고.”
마른 입술을 축인 그녀는 셔츠와 바지를 벗고 구명조끼를 챙겨 입었다. 속옷 차림이라는 게 조금 걸렸지만, 따지고 보면 수영복 차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긴장한 채우가 사다리 끝에 앉아 손을 내밀자, 헤엄쳐 온 그가 그녀를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발끝부터 차갑게 가라앉는다. 바닷속으로 잠겨 들었다. 뜨겁게 데워졌던 몸이 차가워지는가 싶더니 숨이 탁 트인다.
“하아!”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그녀의 입술에 닿은 그의 입술. 짠맛이 나는 키스였다.
목덜미를 끌어안고 격렬하게 입술을 뭉갰다. 매끄럽게 젖은 혀를 깨물고 빨아들이며 샅샅이 핥고 삼켰다. 이대로 숨이 멎는다 하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람이, 향기가. 그의 체온과 심장 박동이 좋아서.
“이제… 살 거 같아.”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맞댄 그가 꽉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자, 빨갛게 충혈된 이겸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입술을 달싹인 그녀는 말없이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곤 재차 입술을 비비다가 윗입술을 깨물었다.
“살아야죠. 오래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