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낯선여름-3화 (3/6)

Chapter 03. 낙우

30층에서 멈췄어야 할 승강기는 27층에서 멈춰섰다. 최 회장이 27층에 내려서자마자 수행원들은 서둘러 비서실에 연락을 넣었다.

그러자 각 임원실 앞을 지키던 비서들이 뛰어나와 일렬로 늘어선다. 최호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전무실 앞에 섰다. 그러곤 공석인 비서 자릴 노려보며 쯧, 혀를 찬다.

“하루빨리 수행 비서부터 배정해. 이게 무슨 꼴이야. 전무 직위 단 놈이, 남부끄럽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출근 안 했으면 실종신고 내버려. 경찰에 신고해. 알았냐.”

“예, 회장님.”

수족처럼 부리는 비서실장이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답하곤 집무실 문을 두드린다. 최이겸 전무의 방이었다.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최이겸을 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역시 최이겸답게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진행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일 처리를 보여주었다. 지나치게 완벽하여 소름이 끼칠 지경.

비서실장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뒤늦게 뛰어온 비서실 윤 과장이 황급히 그들 앞을 막아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전무님은 오전 회의 후, 잠시 휴식 중이십니다.”

“그래? 출근은 했다, 이거야?”

“예. 열겠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윤 과장이 노크한 뒤, 집무실 문을 열었다. 최 회장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집무실에 딸린 욕실에서 막 세수를 마친 이겸이 나왔다.

젖은 앞머릴 타월로 털며 나온 그가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뭡니까? 이 시간에.”

최이겸은 태연했다. 연락도 없이 일주일 만에 출근한 주제에 되레 최 회장을 불청객 보듯 했다.

“네놈이야말로 어떻게 된 거냐.”

“좀 쉬었습니다. 피로가 쌓여서.”

“그래서. 어디에 있었어.”

“쉴 수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적어도 인터넷은 터지는 곳에요. 고작 제가 어디 있었는지가 궁금해서 찾아오신 겁니까?”

삐딱한 이겸의 반응에 최 회장이 버럭 소리친다.

“그럼 안 궁금해! 나는 네놈이 안 하던 짓 할 때마다 아주 10년씩 늙는 기분이야.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어린놈들이 자꾸 치고 올라오려 하는데. 너희들이라도 정신 차려야지!”

“충분히 제정신으로 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능력껏 하는 겁니다.”

그때 윤 과장이 시키지도 않은 차를 내어왔다. 이겸은 다소 못마땅한 얼굴로 윤 과장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인 뒤, 소파로 다가갔다.

상석에 앉은 최호가 시원한 감잎차를 들이켜곤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몸은 정말 괜찮은 거고? 일간지 기자란 놈이 자꾸 너를 병원에서 봤다고 염병을 떤다더라. 여자랑 있었다면서. 사고라도 난 게야?”

“잘못 본 겁니다.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지 마세요.”

“여자가 누군데 의뭉스럽게 굴어?”

이겸은 캐묻는 아버지를 가만히 쳐다보다 상체를 세워 앉았다.

“왜 궁금해하십니까.”

“알아야 내, 움직일 수 있어서 그런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따로 만나는 사람 없으면, 여자 하나 만나 봐. 아니지. 애인이 있어도 그냥 만나.”

어쩐지 놀랍지도 않은 요구였다. 차까지 마셔가며 제 방에서 버틸 이유가 없는 최호. 평소 급하기로 소문난 성격상, 살아있는지만 확인한 뒤 바로 나가버렸을 아버지였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잡고 앉을 때부터 뜻하는 바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여자, 필요 없습니다.”

“넌 필요 없겠지만, 나는 필요해. 네가 상장시킨 엘릭. 그 대표 딸이 아주 영리하더라. 이번에 영신에서 들어가려던 면세점 사업 건도 엘릭에서 제대로 물 먹였고.”

“그렇게 마음에 드시면 형을 밀어붙이세요. 저는 됐으니까.”

“네 형은 더 큰물로 가야지, 이겸아.”

그에 입꼬리를 티 나지 않게 비틀어 올린 이겸이 생긋 웃었다.

“큰물에서 익사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비꼬는 어투. 최 회장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였다.

“재능과 욕망은 그 결이 달라. 넌 재능이 있지만 욕망이 없고, 네 형은 재능이 없어도 욕망이 넘쳐. 사업은 그런 놈이 하는 거다. 네 형, 익사하지 않게 잘 감시해. 그게 네가 할 일이다.”

이겸은 짐짓 현명한 아버지인 척하는 최 회장을 지긋이 응시했다. 지금껏 이 가면에 속아왔다. 권위적인 아버지일지라도 자식 사랑이 끔찍하여, 제게 해를 끼치진 않을 거라고.

멍청한 믿음이었다.

최이서 하나만을 믿기엔, 창하 그룹의 소유권과 지배구조가 흔들릴 게 두려웠던 걸까? 계열사와 자회사를 장악한 일가친척들에게 최이서는 휘두르기 좋은 꼭두각시일 테니까.

하여, 욕망을 끌어내기 위해 아버지는 자신의 재능을 꺾어버린 건가.

욕망은 재능을 이길 수 없다. 욕망이 승리하는 건, 노력이 뒷받침되었을 때뿐.

그런 관점에서 최이서는 노력 없는 욕망 덩어리일 뿐이다.

“아버지는 제가 참 한가해 보이시나 봅니다.”

성가신 기색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며 한숨 쉬자, 주름진 최호의 눈가가 씰룩인다.

“어쨌든 비서한테 말해둘 테니…. 그러고 보니 아직도 비서가 없더라. 오늘 당장 비서부터 배정해.”

최호의 지시를 받은 비서실장이 밖으로 나가자, 이겸은 못 봐주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향했다.

“배정도 제가 합니다. 이제 돌아가세요.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오냐. 어쨌든 네놈 무사한 거 확인했으니 가마. 실망시키지 말고 잘 해봐.”

이겸은 배웅하지 않았다. 이끌고 들어왔던 수행원들이 우르르 최호의 뒤를 따른다. 그 너머로 김 실장이 비서실 윤 과장에게 배정을 지시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에 이겸은 비서실을 호출했다.

“개인 비서를 따로 둘 예정입니다. 나중에 소개하죠.”

[네, 전무님.]

부자 사이에 끼어 곤혹스러운 건 비서실 직원들이었다. 얼마 후 최이서가 찾아왔지만, 이겸은 고민 없이 면담을 거절했다.

아버지가 저리 태연하게 구는 건 최이서가 아직 입을 놀리진 않았다는 뜻. 제가 정채우와 다시 만난 걸 안다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셨을 터.

회장과 사장이 번갈아 방문함에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윤 과장이 들어와 보고했다.

“전무님, 이번 주 토요일 오후 6시. 일화정이라고 합니다. 수행 기사 준비할까요?”

“아뇨. 제가 알아서 하죠. 회장님이 확인하려 하시면, 사실대로 말하세요. 제가 알아서 다 했다고.”

“그래도 분명….”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언뜻 깔끔한 마무리처럼 들릴지 몰라도, 윤 과장의 입장에선 최악의 답변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임원들은 한 명이라도 더 비서를 두고 기사를 부리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요청서를 제출하곤 했다. 그런데 전무는 다른 의미로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한다.

윤 과장이 애써 웃으며 돌아 나간 뒤, 숨 고르기를 하던 이겸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

가끔 ‘내 몸은 왜 하나뿐인 걸까.’, ‘엄마가 쌍둥이를 낳았다면, 번갈아 가며 업무를 수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곤 했다.

그건 지나치게 많은 양의 업무에 시달릴 때, 혹은 수면 부족으로 눈꺼풀이 감기지만 운전대를 잡아야 할 때 드는 생각이었다.

해외 법인 설립 문제로 세무서만 하루에 몇 번을 들락거렸다. 갑작스럽게 일이 몰린 탓에 일반 자문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바빴다.

그뿐인가? 김동희 쪽에서 최이겸을 고소했다. 물론 아직 소장이 날아온 건 아니지만, 동창회 이야기를 하려 운을 뗀 시윤이 흘린 정보에 의하면 그랬다.

졸음이 쏟아져 몇 번이나 급브레이크를 밟을뻔한 그녀는 결국 차를 세울만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이곳이 고속도로였다면 졸음 쉼터라도 있었을 터. 잠시의 휴식을 위해 찾은 곳은 모 건물의 지하. 조도도 만족스럽고 새 건물인지 주차된 차도 별로 없는 곳이었다.

시동을 끈 그녀는 쾌재를 부르며 시트를 뒤로 젖혔다. 몸이 쭉 펴지는 것만으로도 잠이 쏟아진다. 꿀 같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 몸을 웅크렸을 때였다.

옆좌석에 놓아둔 휴대 전화에서 긴 진동이 울린다. 채우는 불쑥 짜증이 났지만, 참았다. 손을 뻗어 집어 든 휴대 전화 액정에 뜬 이름은 최이겸.

그녀는 가볍게 무시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멈췄던 휴대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와, 이 집착남!’

하지만 이번엔 꽤 짧게 울리곤 전화가 끊어졌다. 그에 채우는 꿀처럼 달콤한 15분을 즐길 수 있었다. 왜 연락했는지 몰라도, 엄청나게 급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고말고. 그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합리화했다.

그 짧은 순간 꿈까지 꾼 채우가 웅크렸던 몸을 쭉 펴며 눈꺼풀을 들 때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뒷모습. 자신의 차에 기대있는 커다란 뒷모습에 더럭 겁이 났다. 그런데 묘하게 낯설지 않은 실루엣. 그에 핸들 방향으로 상체를 기울인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차에 비스듬히 기대어 시간을 확인하는 남자의 옆얼굴이 보인다. 의심할 여지 없이 최이겸이었다.

채우는 황당하면서도 묘하게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관찰했다. 왜 이곳에 있는지. 어째서 저런 표정으로 서 있는지는 몰라도, 새삼스럽고 신기하며 반가웠다.

나는 왜 당신이 반가운 걸까.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린다.

순간, 담담히 손목시계를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틀었다. 정확히 마주쳐버린 시선. 핸들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게 미소지은 이겸이 똑똑, 차창을 두드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건지, 펄떡 뛰어오르는 건지. 아니면 또다시 이 남자에게 반해버린 건지….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헛기침한 채우는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물었다.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대체 이곳이 어디기에.

“음, 정채우 씨야말로 여기까지 와서 낮잠을 잔 겁니까?”

볼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낸 그녀는 이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저는 정말로 너무 졸려서 여기 온 거거든요. 근데 전무님은요?”

“나는 좀 보자는 연락을 받아서요.”

“누가요?”

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이겸은 쯧, 혀를 차곤 천장을 가리켰다.

“로엠입니다.”

“로엠…? 어? 로엠에서 왜요?”

“모르죠. 난 또 연락받고 온 줄 알았는데.”

“지금 저한테 말도 없이 최이겸 씨를 불렀단 소리예요? 이시윤 변호사가?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오란다고 오실 건 또 뭐예요?”

정색하는 그녀의 반응에 이겸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정확히는 김동희가 연락한 겁니다. 로엠으로 부르기에 당연히 정 변호사님도 동행할 줄 알았고요.”

슬쩍 화가 났다. 변호사인 저를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한 채우는 서둘러 차에서 가방을 꺼낸 뒤 문을 잠갔다.

“가죠. 그리고 다음부턴 절대 이런 일에 나서지 마세요. 저한테 연락 먼저 하셨어야죠!”

“했는데.”

“네?”

뒤따르는 그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린 그녀는 순간 지은 죄를 떠올렸다.

“아, 음… 그게,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이해합니다.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채우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승강기가 지하까지 내려오는 동안, 둘은 정면을 보며 서 있었다.

“내 제안, 생각해 봤습니까?”

“하도 여러 가지 제안을 하셔서요.”

“복직.”

“아…. 그건 거절하겠습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거길 다시 기어들어 가겠어요.”

“그럼, 다른 거.”

도착한 승강기 문이 열린다. 채우는 걸음을 내디디며 이겸을 올려다보았다.

“나랑 사귑시다. 연애. 이도 저도 아닌 관계 같은 거 말고, 연인 하죠. 나하고.”

로엠은 해랑과 비슷한 규모의 법무법인으로 유난히 재벌가의 이혼소송 등에 특화된 그런 곳이었다. 모 기업 며느리가 천억을 받고 이혼 도장을 찍었다는 둥, 위자료로 강남에 건물 한 채를 받았다는 둥. 온갖 이혼 스캔들이 로엠에서 탄생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간을 확인한 채우는 조율할 일정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곤 커다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김동희와 이시윤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가만히 눈치를 보던 시윤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시윤은 최이겸과 함께 등장한 그녀를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시윤에게 채우는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그에 슬쩍 김동희를 곁눈질한 시윤이 의뢰인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며 난감하다는 뜻을 전했다.

“도청 검사 해야 합니까?”

최이겸의 말에 김동희가 껄끄러운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양손을 올린다. 시윤은 천장 모서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비밀 엄수가 생명인 직업이다 보니, 이곳에 설치된 보안카메라는 녹음이 되지 않습니다.”

그제야 건조하게 미소지은 이겸이 마주 앉은 김동희를 빤히 응시했다.

“시작하죠.”

시윤은 황급히 서류를 들췄다. 김동희가 혹여 헛소리라도 할까 봐 미칠 것 같단 표정이었다.

그녀가 김동희를 처음 본 장소는 경찰서였다. 당시 피떡이 된 김동희의 첫인상은 퉁퉁 부은 멍게였지만, 오늘은 마르고 신경질적인 이미지였다.

본인을 향한 시선을 느낀 건지, 채우를 흘긋 본 김동희가 가슴을 편다.

“나 지금 고소장 쓰는 중이다, 이겸아.”

역시 김동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사실. 그에 어금니를 꽉 깨문 시윤이 서류를 덮곤 어깨를 으쓱 올린다.

“그래.”

“예상하고 있었나 보지?”

“뭐, 어느 정도는. 변호사 선임할 때부터. 당연한 거 아닌가?”

채우는 두 사람의 불편한 대화에 집중했다. 귀와 촉을 쫑긋 세우곤 이겸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그는 그녀에게 연애를 하자고 말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더 모르겠다. 그게 진심이었는지, 단순히 떠보려 했던 건지. 물론 전자에 가까운 느낌이지만, 그녀에게 최이겸은 고차방정식 같은 존재였다.

생각에 잠겨있던 채우는 무심결에 한숨을 내쉬며 따뜻해진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러자 최이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닿는다.

“그래, 뭐. 네 말대로 당연한 거긴 해. 내 얼굴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도 멀쩡히 넘어갈 생각은 안 했겠지.”

“용건만 간단히 하지. 오후 회의가 있어서.”

“좋아…. 내가 널 폭행죄로 고소하면 잘잘못을 가리는 건 둘째치고 언론과 여론이 널 후려칠 거야. 넌 최이겸이고 창하 그룹 전무니까. 그래도 괜찮아?”

테이블에 올렸던 양손을 내린 김동희가 허릴 세우며 말을 이었다.

“재벌 3세의 갑질, 폭행. 그리고 복수.”

최이겸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그.

“그거 괜찮은 타이틀인데?”

“그날 일, 헤집고 다닌다며.”

“그래서?”

그제야 최이겸의 반응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 건지, 김동희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만해. 여기서 더 파고들어 가면 꽤 여럿이 다쳐. 나 하나로 끝날 일 아니란 거지, 이겸아.”

김동희는 유난히 자신만만했다. 그러면서도 채우의 표정을 살피며 무언가를 의식했다. 그날 일이라는 건 2011년에 일어난 사고일 것이다.

최이겸은 최호 회장을 비롯한 관련인 모두를 색출해 사과를 받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사과로 끝날 것인지, 혹은 최이겸의 큰 그림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럿이 다친다니… 다행이네. 여럿이 다쳐야 보상금도 커질 테니까.”

비틀린 미소로 응수하는 이겸을 강하게 노려보던 김동희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미친놈아, 회장님이 다쳐! 네 아버지가 엮여있는 거 몰라? 그만해.”

“내 아버지를 왜 네가 걱정하지?”

최이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불쑥 채우에게로 고개를 튼다.

“제가 부탁한 건요?”

경청하던 그녀는 마치 짠 듯이 그와 시선을 맞추곤 고개를 끄덕였다.

“2011년도 하반기 자료에서 채증 끝냈습니다.”

정확히 바라는 대답이었는지, 다시금 김동희를 보는 그의 표정에 만족스러움이 어렸다.

채우는 그가 자신을 무대 위로 끌어들였다는 걸 깨달았다. 일종의 쇼다. 김동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감정적이고 충동이 강한 편이었으니까.

이런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걸 느끼면 본색을 드러내곤 한다. 포커페이스 타입은 절대 못 된다는 뜻.

그럼 지난번에도 이런 식으로 자극했던 건가? 그래서 불필요한 부상까지 입은 거고?

김동희 같은 떨거지를 협상테이블에 올린 이유가 궁금해진 그녀는 녹취를 시작했다. 그러자 비스듬히 기대앉은 이겸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스쳤다. 마디가 고른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는 그. 고의적인 접촉이었다.

“2011년 7월, 네 아버지의 회사가 엘리엇에 흡수될 뻔했어. 하지만 방어에 성공했고 긴급자금 조달까지 마쳤지. 대단한 거야. 대형 금융사를 상대로 중소기업이 그 정도의 방어전을 펼쳤다는 건.”

언뜻 칭찬을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아니었다. 김동희는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며 동요를 숨기려는 듯했으나, 낯빛은 점점 창백해졌다.

“그런데 많이들 궁금해하지 않았나? 고작 연 매출 400억대의 중소기업이 엘리엇의 맹공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 손자병법처럼 책으로 내보지 그래? 그럼 베스트셀러가 될 텐데.”

죽일 듯 이겸을 노려보던 김동희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창하에선 경영전략을 그렇게 쉽게 오픈해?”

“못할 것 없지. 나름의 성공신화일 테니까. 원래 뒤로 숨기는 건… 구린 것들뿐이라.”

“그래서 최이서가 비밀이 많구나? 작년 이맘때였나…? 너, 아주 바빴던 것 같은데.”

비아냥거리는 김동희. 대화의 흐름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음,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왜 몰라. 똥 치우는 건 너잖아.”

최이겸은 그녀의 손으로 장난을 치며 침묵했다. 대답을 피하고 싶어 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그에 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김동희 씨의 주장은 변호사인 제가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처럼 예정에 없는 만남은 지양해주시고, 꼭 대리인인 저를 통해주세요. 전무님, 회의 전입니다.”

“알겠습니다. 일어나죠.”

“이시윤 변호사님, 연락주세요.”

그녀의 말에 이겸의 눈길이 이시윤에게 향했다. 최이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시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알았어.”

친근한 시윤의 태도에 이겸의 눈빛이 순간 거칠어졌다.

“둘이 무슨 사이?”

질문을 한 건 김동희였다.

“동창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우연히 만나게 됐고요.”

시윤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하자, 눈을 내리뜬 이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엎어놓았던 휴대 전화를 챙긴다.

“가죠, 변호사님.”

채우는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한 후 최이겸의 뒤를 따랐다. 시윤이 배웅을 나왔지만, 이겸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승강기에 올랐다.

연락하겠다는 제스처를 남기곤 올라탄 그녀의 손이 불쑥 잡힌다. 이겸은 제 뒤로 그녀를 살짝 당기곤 열려있던 문을 닫았다. 문틈으로 보이는 시윤의 당황한 표정.

“동창이었습니까?”

다소 혼란스러운 듯 그가 물었지만, 채우는 꼭 잡은 손에 집중한 채였다.

“정채우 씨.”

“나 아직 대답 안 했는데….”

나직하게 읊조린 그녀가 눈꺼풀을 들었다. 그러자 빈틈없이 날카롭던 이겸의 눈빛이 스르륵 풀어진다.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매듭 같은 것이 힘을 잃었다.

“오늘 안에 그 대답 들을 수 있는 겁니까? 성격이 급한 건 아니지만, 내가 이제 좀 한계인데.”

어느덧 지하 주차장에 다다른 승강기가 멈추었다. 채우는 말없이 내려 차로 다가갔다. 사실 뜸 들일 이유는 없었다.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연애다. 그것도 제가 먼저 마음에 품은 상대와의 연애.

심각하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지만, 쉽지 않다. 채우는 차창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최이겸과의 연애라….

의뢰인과 법률대리인이라는 관계는 둘째치고 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남자와의 연애라니.

하지만 마음은 단 한 번도 방향을 튼 적 없었다. 사랑이 애증이 되었을 뿐, 최이겸이라는 남자를 알고 난 이후. 다른 누구도 마음에 품어본 적 없었다.

차라리 시간이 흘러 싫어지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대답을 하긴 좀… 복잡해요.”

한숨 쉰 그녀가 막 차 문을 열려던 그때. 문을 잡은 이겸이 바퀴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펑크 났습니다. 타지 말아요.”

“네?”

“펑크 났다고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겸이 가리킨 앞 타이어 두 짝 모두 바람이 빠져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앉은 상태였다.

“아니, 누가…!”

작은 경차지만, 한푼 두푼 모아 장만한 애마였다. 이 지경으로 내려앉을 정도면, 누군가 고의로 해를 가한 것일 터.

화난 그녀가 차량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방방 날뛸 때, 이겸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건물 이름과 차량 번호를 말해준 그가 전화를 끊곤 가까이에 주차되어있던 자신의 차로 채우를 이끌었다.

“차는요?”

“스페어타이어가 두 짝도 아니고. 키 주면 차에 넣어두겠습니다. 제가 견인차 불렀으니, 보험회사에서 연락 올 거고요.”

“제 보험사를요?”

“알아서 했어요, 변호사 씨.”

이겸은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키를 빼앗아 경차 안에 넣어둔 뒤 돌아왔다.

“일부러 타이어에 손을 댄 것 같은데.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게다가 누가 저런 짓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한 그의 시선이 움직인 곳엔 김동희의 차가 있었다. 그 곁에 기사로 추정되는 남자가 서서 담배를 태우는 게 보인다.

채우는 차창에 딱 붙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나름 경고를 하려 한 걸지도 모르죠. 정채우 씨, 뭐 얻어낸 거 있나 본데요.”

있기야 하지만….

그사이 시동을 건 그가 핸들을 꺾으며 작은 카드를 내밀었다.

“블랙박스 SD카드입니다. 충격 파일과 영상, 제가 보내드리는 번호로 전송하세요.”

“받는 사람이 누군데요?”

“경찰입니다. 어쨌든, 지금 사무실로 돌아가야 합니까?”

“아뇨. 실은 오늘 일정이 완전히 틀어졌어요. 해외 법인 문제로 오후에 고객을 만나려 했는데, 시간이 애매해졌네요.”

채우는 미령에게 사고 사실을 알린 뒤, 답장을 기다렸다. 마음 같아선 직접 신고부터 하고 싶지만, 이겸의 말대로 모종의 음모가 느껴지는 사고였기에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일정 조율에 열을 올리는 사이, 어느덧 건물 밖으로 차를 몬 그가 말했다.

“그럼, 나랑 어디 좀 갑시다.”

“어딜요?”

“제대로 된 대답 들을 수 있는 곳.”

“네?”

“정채우 씨.”

길어져 버린 낮의 길이. 밝게 비추는 빛에 눈살을 찌푸린 채우가 고개를 틀었다.

손 그늘을 만들어 빛을 가린 그녀를 흘깃 본 그가 웃음을 꾹 참고는 묻는다.

“나 좋아하는 거 같은데. 내가 틀렸습니까?”

먼지 한 톨 없어 보이는 무대 위에 놓인 스타인웨이 피아노. 최이겸의 집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해 보이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이름 모를 피아니스트였다.

채우는 저와 최이겸을 제외하곤 텅 빈 관객석을 둘러보며 그의 옷깃을 당겼다.

“정말 여기 아무렇게나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걱정 마요.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이 남자, 너무 자신만만하다. 그러니 연주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서울에서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이곳은 경기도 외곽, 예술의 전당을 방불케 하는 무대 규모와 음향 시스템을 갖춘 건물이었다.

그는 무대가 잘 보이는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러자 아랑곳없이 연주에 빠져있던 피아니스트가 두 사람을 흘금 보곤 눈인사를 한다.

“아는 사인가 봐요.”

“뭐, 건물주라고 해두죠.”

“누가요.”

이겸은 태연하게 본인을 손가락질해 가리켰다. 채우는 새삼 이 남자가 어떤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의식했다.

그녀의 복잡미묘한 표정을 본 이겸이 부드럽게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 마요. 비자금 조성을 위한 예술사업 아니고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투자니까. 회사 명의가 아니라 제 앞으로 된 건물입니다.”

그의 말투는 단조로웠지만, 어쩐지 단단하게 느껴졌다. 함부로 깨트릴 수 없는 무언가로 견고하게 감싸진 느낌. 채우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끝이 났다. 편안한 캐주얼 차림의 남자가 여운이 남은 얼굴로 이겸을 돌아보며 웃는다. 그러곤 악보를 챙겨 무대에서 내려갔다.

거대한 홀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소리가 빠져나가자 어쩐지 더 고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저 친구랑 엇비슷한 나이일 때 사고를 당했고, 재활에 실패했어요. 당시엔 고장 난 피아노가 된 것 같았습니다. 망가져서 누구도 선뜻 손 내밀지 않으려 하는.”

그의 시선은 피아니스트가 앉았던 자리에 머물러있었다. 채우는 가만히 이겸의 미소 띤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저와 비슷한 사고를 당한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그 사람이 소개해준 곳이 새틴이었습니다. 공연장도 아니면서 스타인웨이 풀 콘서트 모델이 있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피아노 소리에 관심 갖지 않는 곳. 완벽함에서 도피하기 좋은 곳.”

한 템포 쉰 그는 자세가 불편한지 몸을 좀 더 의자에 깊게 묻었다.

“거기서 정채우 씨를 처음 본 겁니다. 회사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와의 첫 만남이 하필 새틴이었다는 것은.

“그래서 첫눈에 반하기라도 하셨어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라 되레 발칙하게 물었다.

“예, 반했습니다. 아는 건 새틴 대표가 부르던 이름뿐이었지만, 신기하게 눈이 가던데요?”

이겸의 대답에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지나치게 솔직해도 탈이랄까. 채우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양 뺨을 감쌌다. 손바닥에 닿은 뺨이 따끈따끈하다.

그녀가 얼굴만 붉힌 채 말이 없자, 한쪽 손을 가져간 그가 손등에 입술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새틴에 최이서가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살짝 마른 듯한 푹신한 입술과 고른 숨결이 손등을 간질였다.

채우는 각도를 조금 바꿔 그의 뺨을 만져보았다. 슬쩍 손을 댄 것뿐이건만 미소를 머금은 남자가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문제가 생겨버렸죠.”

지금부터 하는 말이 본론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형은 나쁜 사람이라기보단, 이따금 넘치는 게 문제인 성격이라고요. 어쨌든 나는 연주를 그만두었고, 그즈음엔 정채우 씨를 볼 수 없어서인지 애가 타더군요. 근데 만난 겁니다. 내 집무실에서.”

서 팀장 대신 상무실에 들어갔을 때, 의자에 기대앉아있던 그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소개조차 바라지 않은 채 꿰뚫어 보듯 자신을 응시했다.

그날 이후 시작된 열병은 기약 없이 지속되었다.

“미안합니다. 오해해서.”

“그 오해는 누가 만든 건데요?”

야속함이 묻어나는 말투. 손바닥에 뺨을 비빈 그가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한다.

“나를 지나치게 걱정한 누군가가. 그래서 내가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강하게 똬리 튼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채우는 적막한 무대 위 피아노에 시선을 고정했다.

드물게 솔직해졌단 느낌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를 고장 난 피아노 같다고 말했지만, 그녀에겐 아니었다. 채우에게 있어 최이겸은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 없었다. 너무 빛나 감히 손 뻗지 못했던 적이라면 몰라도….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뇨. 5분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고요.”

“겨우 5분으로 되겠어요?”

그녀의 고개가 제 어깨에 턱을 댄 그의 방향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높다란 코끝이 스치고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움직인 건 그녀였다. 가볍게 몇 번 키스한 채우는 멍하니 저를 보는 그의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나 지금…. 대답하고 있는 건데.”

그렇게 말하곤 그의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핥자, 깊게 숨을 들이켠 남자가 다급히 입술을 부딪쳐왔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온 커다란 손, 깊어지는 키스.

시선을 내리깔았던 그녀는 두 눈을 완전히 감아버렸다.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숨과 입안을 휘젓는 아찔한 혀의 감촉.

“그 대답, 제대로 다시 들을 겁니다.”

넓은 공연장을 차지한 두 사람의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주위의 공기가 달아올랐다.

조금 더 닿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꽉 끌어안고 그와 함께 푹신한 침대 위를 뒹굴고 싶었다.

결말을 아는 드라마 같은 관계가 될 것이다. 손 닿으면 델 것 같은 연애의 열기도 임계점에 다다른 이후부턴 급격하게 식어버리겠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

[타이어 펑크라니. 그럼 견인차가 끌어간 게 네 차였어?]

화가 난 듯한 시윤의 말투에 채우는 한숨 쉬며 대답했다.

“고의적 파손이야. 재물손괴와 불안감 조성 혐의로 가만 안 둘 거야.”

[블랙박스는?]

“지금 컴퓨터로 전송 중. 근데 넌, 의뢰인 앞에서 반말하면 어떻게 해? 이러면 변호하기 껄끄러워지잖아.”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근데 너 괜찮아? 최이겸 표정 별로인 거 같던데.]

“그 사람 표정이랑 내 상태가 무슨 상관인데?”

[혹시 다혈질 아닌가 해서. 알잖아, 우리 완전 의뢰인들 샌드백인 거.]

“아…. 아무 일도 없었어. 어쨌든 다음부턴 절대 내 의뢰인한테 직접 연락하지 마. 그거 불법인 거 알지?”

[김동희가 했다니까 그러네. 일단 알겠고. 시간 내는 거 잊지 마. 애들이 너 만났다니까 다 같이 보자고 난리야.]

“알겠어. 기억할게.”

전화를 끊은 채우는 저도 모르게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루가 길었다.

저를 집에 데려다준 뒤, 다시 회사로 돌아간 최이겸. 그는 야근일 가능성이 크다며 잠들지 말고 기다리라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근거리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채우는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으면서도 지나치게 그를 의식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빨개진 얼굴을 본 그녀는 서둘러 물을 틀었다.

‘근데 저 집 문은 왜 저래?’

소란이 좀 있긴 했지만, 문이 부서졌을 줄이야. 그녀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높은 확률로 그를 찾아와 문을 엉망으로 만든 건 최이서. 혹은 최호 회장일 것이다.

지나치게 그를 걱정하고 아끼는 누군가.

그는 자신의 형과 아버지를 가족이라 부르지 않았다. 제가 엄마를 찾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아들의 손을 망가트린 비정한 아버지와 동생의 그늘에 숨어 그것이 자신의 능력인 양 구는 무능한 형. 내로라하는 재벌가도 결국 복불복 사과 박스와 다르지 않았다. 그 안에 든 것이 모두 성할 수는 없는.

온갖 잡다한 생각들을 따뜻한 물에 흘려보낸 그녀가 욕실에서 나온 시각은 오후 8시였다.

훈훈한 드라이기 바람을 맞으며 개운해진 마음으로 고객과의 일정을 다시 정리하던 그때, 인터폰에서 들려온 입차 안내 멘트.

그녀의 차량이 도착했다. 그가 말해줬던 대로 보험회사 직원, 혹은 탁송기사가 직접 왔을 터였다.

채우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편안한 옷을 입고 위에 카디건을 걸쳤다. 그러곤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헛바람을 들이켠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인다. 막 초인종을 누르려던 이겸이 문을 연 채우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참았다.

“어?”

“어디 갑니까?”

“왜 벌써 오셨어요? 분명 야근이라고….”

생각보다 너무 일찍 나타난 그. 이겸은 나가려는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어디 가냐니까.”

“아, 차가 왔어요. 확인을 좀 하려고요.”

재차 나가려는 걸 요령 좋게 막아선 그가 현관문 보조키를 걸어 잠그곤 그녀의 허리 뒤로 손을 넣었다.

“제 기사가 확인할 겁니다. 꼼꼼하게 확인한 뒤, 키를 가져오기로 했으니까 나갈 생각 하지 마요.”

끌어당기는 힘에 놀란 그녀가 이겸의 가슴팍을 짚으며 말했다.

“안 아파요? 아, 아직 아프실 텐데….”

“아파요.”

“그럼 이러면 안 되지 않을까요?”

“체위가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니까. 최선을 다해 타협점을 찾아보죠.”

“아니, 저기…!”

“나는 너무 오래 참았어요. 정채우 씨.”

그의 미소가 나른하다고 느껴질 때쯤, 숨을 들이켜는 그녀의 입술이 짓눌렸다. 한걸음 물러난 채우는 본능처럼 뒤꿈치를 들었다. 까치발을 하곤 이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움직임에 맞춰 깜빡이는 센서 등. 그녀는 그의 키스를 받으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채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등을 적신다.

고작 키스일 뿐이건만 얼굴에 열이 올라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짧은 반바지 안으로 들어온 손이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버렸다.

혀를 빨고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밀어붙이던 그가 음부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러더니 색이 연한 거웃을 헤집어 틈새를 문지른다. 채우는 순간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버렸다. 아직 셔츠도 벗지 않은 채였다.

굳게 닫힌 침실 문이 그녀의 등에 닿았다. 쿵, 소릴 내며 부딪친 뒷머리. 그는 그녀의 고개를 한껏 젖히게 한 뒤, 노골적으로 틈새를 문질렀다. 부끄럽게도 그가 주는 자극에 맞춰 젖어가고 있었다.

뒤로 손을 뻗은 그녀가 방문을 열자,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가 두 사람을 맞았다. 그녀의 체향으로 가득한 침실.

“마음에 드네요. 아늑하고… 좋아요.”

잘게 입 맞추며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본 그가 한 장 남은 셔츠를 벗겨버리더니,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그녀에게 쥐여주었다.

“갈비뼈를 다친 환자는 어떻게 섹스하는지, 알아요?”

“모, 모르겠어요.”

“나는 알아봤습니다.”

채우는 좀 더 몸이 밀리는 느낌을 받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제 방에 최이겸이라니. 크지 않은 방이 가득 차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그는 밥은 먹었는지, 잠은 좀 잤는지, 김동희 쪽에서 들어온 자료는 없는지를 연이어 물었다. 질문을 이어나가며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어 어깨 뒤로 떨어트리는 그.

커다란 상체를 가로지른 붕대가 보인다. 채우는 손을 뻗어 붕대 위를 만져보았다. 그러자 버클을 가리킨 그가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눌렀다.

“벗겨줘요, 채우 씨가. 직접.”

그와의 섹스는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백이 꽤 길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떨리는 손으로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검은 드로어즈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모습에 묘한 만족감이 피어난다. 제가 이 남자를 흥분시켰다는 원초적인 만족감이었다.

채우는 바지를 발목까지 내린 뒤, 드로어즈 위에 입술을 눌렀다. 깨물고 싶을 만큼 단단한 게 이에 눌렸다. 몇 번 누른 그녀가 작은 혀로 핥아 올리며 위를 올려다보자, 욕망으로 점철된 최이겸의 얼굴이 보였다.

“빨아도 돼요?”

그는 슬쩍 입술을 휘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우는 단번에 드로어즈를 내렸다.

자신의 성욕에 대해 별달리 고민해본 적 없다. 기준점이 없기에 높은지, 낮은지. 남들보다 더한지, 덜한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탄력 좋고 단단한 피부를 만진 순간. 그가 제 안에 삽입했을 때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삽입만으로 몸이 꽉 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절정에 다다랐던 그때를.

발기한 성기에 입 맞추던 그녀는 축축하게 젖은 선단을 쪽 빨았다. 입술이 닿자 그에게서 탁한 숨이 쏟아졌다. 그는 흥분을 참듯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채우는 두툼한 선단을 입에 넣고 빨다가 깊숙하게 물며 얼굴을 내렸다. 쏟아진 머리카락을 귓바퀴에 걸어 넘기고 목구멍에 닿을 듯 삼키자, 오심 때문에 하복부가 콱 죄어들었다.

속옷을 입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아래가 미끌미끌한 액체로 젖어있을 것 같았다. 야한 여자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그녀는 커다란 성기를 몇 번 빨고 뱉어낸 뒤, 두꺼운 혈관을 혀로 핥았다. 그를 흥분시키려는 목적이라기보단, 본능 같은 거였다. 그리고 그런 욕구를 동하게 하는 사람은 최이겸 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은 그가 발기한 성기를 목구멍 끝까지 밀어 넣은 뒤,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빼냈다. 그러곤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흐른 타액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채우는 붉어진 뺨을 비비며 일어나 그를 침대 위에 앉혔다. 순순히 걸터앉은 남자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오늘은 채우 씨가 다 하려고요?”

“다쳤잖아요. 몸도 제대로 못 움직이면서.”

“나도 맛보고 싶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녀의 허리를 간질이며 내려간 손이 동그란 엉덩이를 어루만지다, 강하게 움켜쥐어 벌렸다. 채우는 이겸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리자 그의 몸이 스르륵 뒤로 넘어간다.

저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에 드러난 끓어오르는 욕망이 좋다. 이젠 부정하지 않겠다. 자신은 언제나 그를 탐했고 탐해지는 순간을 바랐다.

“빨아줄 거예요?”

상체를 숙이자 동그란 그녀의 젖꼭지가 붕대를 감은 그의 가슴팍에 밀착됐다. 발기한 성기가 그녀의 음부에 닿는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삽입될 듯 아슬아슬했다.

이겸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와 봐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은 그녀는 서서히 그의 얼굴 방향으로 움직였다.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 침대 헤드를 쥐며 허릴 내렸다. 허벅지 안쪽이 벌어지는 느낌과 함께 뜨거운 혀가 음부에 닿았다. 벌어진 구멍 주위를 꼼꼼하게 핥고 깨물던 그가 고개를 비트는가 싶더니 강하게 빨아들였다.

젖어있던 틈새로 파고든 혀. 그 적나라한 감촉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선다. 분홍빛으로 영근 클리토리스를 찾아내 혀끝으로 톡톡 두드리고 느리게 굴리는 남자.

채우는 약하게 몸을 떨며 어찌할 줄 몰랐다. 섹스와는 다른 잔 흥분감에 기분이 붕 뜨고 아래가 간지러웠다.

좀 더 강하게, 아니…. 아주 강렬한 자극을 원했다.

서서히 단단해지고 동그랗게 뭉쳐지는 감각과 함께 뜨거운 무언가가 내부에서 흘러나온다. 그녀는 놀라 몸을 세우려 했지만,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 허벅지 안쪽을 움켜쥐곤 더욱 힘주어 벌리는 이겸.

“아!”

예민해진 열점에 이가 닿았다. 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파드득 튀는 몸. 앓는 듯한 신음을 내며 고개를 숙이자, 제 아래를 빠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채우는 쪼그려 앉은 채 그의 혀에 음부를 비볐다. 더는 이성이 개입할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콧날이 은밀한 곳에 파묻히는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떤 그녀가 불쑥 상체를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뜨거워진 살덩이가 입안을 헤집는다. 제 질과 음부를 물고 빨던 그 감촉 그대로였다.

채우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 선액으로 흠뻑 젖은 성기를 틈새에 비비며 삽입을 준비 했다. 귀두에 걸린 클리토리스가 자극받을수록 여유가 사라지고 충동질 된 욕망이 날뛰었다.

그녀는 침대 맡을 더듬어 콘돔을 찾아 성기에 씌웠다.

“최이겸 씨는 준비가 철저해서 좋아요.”

“다른 것도 좋아해 주면 안 되나? 준비만 잘하는 거 아닐 텐데.”

“그건 더… 두고 볼게요.”

웃음을 머금은 채 그에게 키스했다. 비릿한 맛이 난다. 역시나 야하고 자극적인 맛이었다.

채우는 서서히 허리를 내려 그를 받아들였다.

“흣…!”

버겁다. 버거우면서도 꽉 차는 감각은 성감을 자극했다. 고작 삽입만으로 절정에 오른 그녀의 내부가 흥건해진다. 흥분으로 만들어진 애액이 기둥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제가 그의 위에 올라탄 적은 처음이었다. 복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두려움과 쾌감 사이에서 그녀는 허리를 움직였다. 어지간하게 흥분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삽입조차 불가능할 것 같았다.

힘겹게 다리를 벌려 몇 번 위아래로 움직이던 그녀는 그를 품은 채 앞뒤로 음부를 비볐다.

“하, 깊은데요. 여기… 닿았습니까?”

이겸이 따뜻한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채우는 대답할 여력이 없어 고개만 다급히 끄덕였다. 그를 품은 채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휘어진 성기가 조금씩 쑤석거리며 들락였다.

그는 흔들리는 젖가슴을 양손으로 움켜쥐다, 젖꼭지를 희롱하듯 꼬집더니 허리를 잡아 강하게 쳐올렸다.

자극이 더해질수록 우스꽝스러운 신음이 흐르고 표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분명 올라탄 건 그녀이건만, 그의 주도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아! 뭐가 나올 거 같아요…. 흐응.”

잔뇨감, 혹은 배뇨감을 닮은 지리는 듯한 느낌에 진저리치며 입을 벌렸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반면 무언가를 뜨겁게 쏟아내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가능할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다.

그는 경련하는 그녀를 거의 쪼그려 앉게 한 뒤, 제 복부에 흥건한 애액을 손에 묻혔다.

“싸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채우는 곧장 위아래로 몸을 들썩였다. 그러자 조금 전 애액을 묻힌 손으로 클리토리스를 굴리는 그.

“…아, 너무 깊어…. 미칠 것 같… 하아.”

“흥분됩니까?”

“으응…. 미치겠어요.”

“나도 미치겠어.”

나직하게 읊조린 그가 미간에 힘을 주더니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는지, 흥분으로 몸을 떠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곤 양다리를 넓게 벌렸다. 그러자 빠져나간 성기가 위협적으로 휘며 안으로 파고든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남자가 그녀의 양쪽 다리를 얼굴 옆까지 짓누른 채 강하게 치받기 시작했다. 채우는 몸이 반쯤 접힌 상태로 그를 받아들였다. 철벅거리며 부딪치는 살 소리. 그의 움직임에 맞춰 몸이 흔들렸다.

흥분한 내벽이 물결치듯 경련한다. 자연스럽게 그의 성기를 더 조였고, 이겸의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졌다.

미끄러운 결합부와 뜨거운 내벽. 그녀의 안에서 질금질금 새어 나온 액체가 시트를 적신다. 채우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간헐적으로 몸을 떨었다. 교성이 튀어나올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대고 입술이 말랐다.

그때 혼미해진 그녀의 눈가에 입 맞춘 그가 성기를 빼내더니, 단번에 몸을 뒤집었다. 힘없이 늘어지는 골반 아래로 손을 넣어 들어 올리곤 다시 구멍을 벌려 귀두를 맞추었다.

뒤로 하는 섹스가 얼마나 자극적인지 알고 있었다. 이미 절정에 올라 몸이 떨리고 있지만, 기대감은 잦아들지 않았다.

얼마나 큰 오르가슴이 찾아들지 두려우면서도 흥분되는 고양감.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러곤 쑥 밀고 들어오는 그를 느끼며 허릴 휘었다.

“아아!”

위험하리만치 자극적인 체위였다. 깊숙하게 처박은 그가 고환까지 밀어 넣으려는 듯 힘주어 파고든다. 그러곤 상체를 숙여 땀에 젖은 등에 입 맞췄다. 우묵하게 팬 척추를 혀로 핥고 이로 잘근 깨문 남자가 허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의 소강 뒤 찾아온 쾌감은 폭풍에 가까웠다. 시트를 움켜쥐었던 그녀의 손이 잡혀 뒤로 당겨진다. 그는 채우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그녀는 앞으로 고꾸라질 기회를 잃고 흔들렸다. 탁한 숨을 쏟아내며 박아올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액체.

“힘들어요. 으…. 하아, 놔줘요. 응?”

고개를 돌리며 애걸하자, 손을 놓아준 그가 뒷머릴 눌렀다. 채우는 엉덩이만 치켜든 채 베개를 끌어안았다.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감각에 신음하던 그녀는 또다시 찾아온 절정에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흥분이 두려운 적은 처음이었다. 소변을 지린 것처럼 아래가 젖어버린 적도.

그는 엉덩이를 잡아 벌리며 성기가 드나드는 구멍을 응시했다.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분홍색 속살이 딸려 움직였다.

“어떻게 해줄까요.”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남자가 물었다. 동그란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다 양쪽으로 벌리며 느릿하게 허릿짓을 하는 그.

잔물결 같은 흥분에 채우는 앓듯이 요구했다.

“끝까지… 세게요.”

비스듬히 돌아본 그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앞머리가 젖은 모습이 퇴폐적이었다.

이겸은 손을 앞으로 넣어 애액에 젖어 미끈거리는 음부를 야릇하게 비볐다.

“다음엔 속옷 채로 적셔봐야겠어요. 당신, 야하고 예뻐.”

그녀는 다리를 모으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가 강하게 치받은 순간,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손등을 깨무는 것뿐이었다.

이겸은 그녀가 몇 번의 절정에 몸부림친 뒤에야 사정했다. 이후로도 채우는 간신히 숨만 몰아쉬며 그의 품에 갇혀있었다. 여전히 안에 머물러있던 성기를 빼내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지는 그녀.

퇴근하자마자 그녀를 안았다. 땀을 얼마나 흘린 건지, 전신이 끈적끈적. 찬 바람이 필요했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며 간신히 눈을 뜨는 채우가 사랑스러워 자꾸만 입술이 달싹거린다. 제 시선을 느낀 건지 어리광 섞인 어투로 그녀가 말했다.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아무것도 하지 마요.”

거미줄처럼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던 이겸은 불쑥 그녀에게 키스했다. 단 숨을 겹쳐 부드럽게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은 그녀가 입술을 떼며 물었다.

“아프지 않아요?”

걱정이 듬뿍 묻은 말투에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간다.

“아픕니다.”

“무리한 최이겸 씨 탓이에요.”

“좋은 걸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싫었습니까?”

채우는 어깨만 으쓱 올리곤 피식 웃었다. 그에 이겸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누른 뒤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해야 했다. 정액과 애액, 땀과 타액으로 엉망인 상태이니까.

이겸은 찢긴 콘돔 비닐을 멍하니 응시하는 그녀의 손을 끌었다.

“샤워하죠. 같이.”

“같이요?”

“그래야 또 하니까.”

숨은 뜻을 알아챈 그녀의 귀 끝이 붉어졌다.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 눈에 무언가 씐 걸지도.

이겸은 빨개진 그녀의 귓바퀴를 잘근 깨물곤 욕실로 이끌었다.

정채우는 종종 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게 얼굴에 드러날 땐 정말이지 그냥 두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다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저 혼자만 아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남길 것이다.

침실에 딸린 욕실에는 그녀의 취향인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욕실용품들이 많았다. 그가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달거나 상큼한 향을 가진.

물을 튼 뒤 고민에 빠져있던 와중, 스펀지에 거품을 낸 그녀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그의 몸을 문질렀다.

“아픈 사람은 가만히 있어요.”

거품 묻은 스펀지가 피부를 간질인다. 그러더니 자그마한 그녀의 손이 복부 아래로 내려가 반쯤 발기한 성기를 움켜쥐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손길에 서서히 흥분이 차올랐다.

이겸은 벽에 기댄 채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야한 거 하자는 겁니까?”

그러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최이겸 씨를 보면 자꾸… 야한 생각이 들어요. 근데 하진 않을 거예요. 너무 힘들어.”

이겸은 채우의 뾰족한 턱에 입 맞춘 후 더운물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곤 성기를 움켜쥔 그녀의 손등을 감싸며 힘을 주었다. 살짝 놀라 긴장한 티가 묻어나는 표정.

강한 힘이 더해진 뒤에야 그의 목구멍에서 쉰 소리가 난다. 제대로 된 자극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얌전히 씻겨 재워주려 했건만, 저를 흥분시킨 건 그녀였다.

“이번엔 오래 걸릴 겁니다. 정채우 씨가, 무덤을 판 거예요.”

***

그래, 그의 말대로 무덤을 파긴 했다.

채우는 따끈따끈한 뺨을 톡톡 두드리며 침실 방향을 흘깃 보았다. 샤워를 마친 이겸은 침대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에게서 허기진 포식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충족을 모르는 사람처럼 몰아붙이고 어르기를 반복하던 남자.

채우는 잇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휘어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진짜 연애를 시작한 것 같다. 사실 온전히 체감하는 건 아니지만, 불편하게 남아있던 체기 같은 것이 사라졌다.

고작 그의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는 걸까?

대체 연애라는 단어가 뭐기에…. 이토록, 가슴속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는 건지.

주방에서 커피 두 잔을 내린 그녀는 휴대 전화에 남은 부재중 표시를 확인한 뒤, 노트북을 열었다. 의뢰인들에게서 도착한 각종 증빙서류가 가득한 메일함.

식탁에 놓인 안경을 쓴 그녀가 머리를 하나로 올려묶곤 첨부파일들을 하나하나 확인할 때였다.

현관 방향에서 들려온 차임벨 소리. 채우는 이겸의 수행 기사가 자동차 키를 가져온 거라고 생각했다.

인터폰에 비친 얼굴을 스치듯 확인한 그녀는 문을 열려다 말고 멈춰 섰다.

방문객은 수행 기사가 아니라 정영수였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재차 벨을 누른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정영수가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그가 제게 해코지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채우는 불편했다.

짜증 섞인 표정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던 정영수가 손잡이를 덜컥대며 잡아 돌린다. 그것도 모자라 대담하게 비밀번호까지 누르는 남자.

‘어떻게 비밀번호를 알아?’

어처구니없게도 경쾌한 기계음을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당황한 그녀는 문이 열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다행히 덜컥하며 걸리는 안전고리. 한 뼘 정도 열린 문틈으로 정영수와 눈이 마주쳤다.

“어?”

“뭐 하는 거예요? 지금, 무단침입하시는 거예요?”

지나치게 당황해 말이 헛나갈 것 같았다. 반면 정영수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되레 안전고리를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린다.

“집에 있으면서 왜 문을 안 열어? 열어봐.”

“제가 물었잖아요. 비밀번호 어떻게 아느냐고!”

“네 비밀번호는 뻔한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한 정영수는 현관에 놓인 이겸의 구두를 응시했다.

“뭐야, 손님이 있어?”

심장이 발작하듯 뛰어댄다. 온갖 망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이 집에 몰래 드나든 걸까.

왜 몰랐지? 대체 이 집에서 무슨 짓을….

겁에 질린 그녀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간다. 그런 채우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문을 흔들던 정영수의 시선이 움직였다.

침실에서 나온 이겸은 채우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제 뒤로 보냈다.

“뭡니까.”

“그러니까…. 엄마의 애인이요. 새아버지 될.”

그녀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린다. 겁먹은 표정을 놓칠 리 없는 그였다. 이겸은 문밖에 서 있는 정영수를 노려보며 다가갔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이겸은 지그시 현관문을 움켜쥐어 당겼다. 쿵, 소릴 내며 닫힌 문. 그러곤 안전고리를 풀었다. 그에 채우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젓는다. 열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이겸은 진중한 눈빛으로 문을 열었다.

복도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든다.

“이거, 미안합니다. 애인이랑 같이 있는지 몰랐네.”

고작 열 살 차이나 날까?

최이겸은 정영수를 위아래로 훑곤 고개를 까딱였다.

“들어오시겠습니까?”

“아뇨. 방해하면 안 되지. 근데… 우리 구면인가?”

“어쩌면 그럴 겁니다.”

“어디서 봤더라?”

“새틴에서 보셨을 텐데요.”

그제야 정영수의 표정이 굳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새틴의 고객이라면 어지간한 재력가 이상은 된다는 뜻. 이겸이 새틴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남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분이 채우랑은 무슨 사이….”

“보시다시피.”

“아, 애인.”

이겸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곤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열린 문을 가로막고선 그의 눈동자가 정영수를 훑었다. 건조하고 마뜩잖은 눈빛이었다.

“아무리 의붓딸의 집이라도 이렇게 함부로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애가 연락이 안 돼서 그랬습니다. 채우 엄마가 걱정을….”

“제가 대신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랑 같이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제집이기도 하단 뜻이니, 다신 비밀번호 누르지 마십시오.”

이겸의 정체를 정확히 알진 못해도, 특유의 분위기로 사회적 지위를 가늠한 정영수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합니다. 아!”

그렇게 말하곤 자신의 명함을 꺼내 내미는 정영수. 이겸은 호텔 대표 직인이 박힌 명함을 받아 앞뒤로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겠습니다. 정영수 씨.”

그는 끝까지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밝혀야 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나름 호텔 대표라는 타이틀로 이겸을 떠보려던 정영수의 낯빛이 열패감에 붉어졌다.

“그럼 꼭….”

전해달란 뒷말을 삼킨 정영수가 승강기에 올라 사라질 때까지, 이겸은 집 앞을 지켰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적의가 느껴진다.

승강기가 완전히 지하에 멈춘 뒤에야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비밀번호부터 바꾸죠.”

노골적인 불쾌함을 내뱉은 순간, 뛰어들듯 안겨 온 그녀. 그에 몸이 뒤로 밀린다. 이겸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현관 벽에 기대야 했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그녀의 뒷머리를 꼭 감싸 안고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다신 안 올 겁니다. 같이 지내는 줄 알 테니까.”

“정말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라면요.”

아까처럼 떨지는 않지만, 어쩐지 겁에 질린듯한 반응.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태도였다. 답지 않단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이겸은 은근히 화가 났다.

그녀가 느끼는 건 불안, 초조, 공포, 분노.

그는 가벼운 패닉상태에 접어든 채우를 꽉 안았다. 그러곤 이마와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침실로 가죠. 어두운 곳으로. 여긴… 너무 밝으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홱 돌아서더니 도망치듯 침실 안으로 들어간다. 이겸은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누군가 고의로 훼손한 타이어, 함부로 문을 열고 찾아온 의붓아버지. 접견 내내 채우의 눈치를 보던 김동희와 갑자기 튀어나온 동창 이시윤.

그녀가 들어간 침실을 응시하던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최이겸 씨.]

피곤함에 찌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일, 뵐 수 있습니까.”

[그럼요. 어디로 갈까요.]

“장소와 시간은 오전 8시에 메시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남자는 이런 대화가 익숙한 듯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꺼진 휴대 전화 액정을 톡톡 두드리다가 침실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우가 보였다.

깊은 한숨을 내쉰 이겸은 침대 위로 올라가 그녀의 팔을 당겨 제 옆에 눕혔다.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은 갈비뼈에서 통증이 일었지만, 이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이유 없이 사람이 싫은 경우도 분명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댄다. 제게 의지하듯 안겨있는 모습을 보자 가슴 어딘가가 뜨거워졌다.

“오늘은 일찍 잡시다. 채우 씨랑 자는 거, 좋더라고요. 잠꼬대하는 것도 재밌고 잠든 모습도 예뻐서.”

그제야 그녀가 소리 내 웃었다. 한숨과도 같은 웃음소리였지만, 그는 안도했다.

“연애…. 괜찮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 언저리에서 울린다.

“동감입니다.”

일기예보는 틀려먹었다.

비가 올 거라더니, 이른 아침부터 해가 쨍하게 밀려들어 천장에서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에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다.

이겸은 알람이 따로 필요 없는 남자였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온 건지, 그녀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 샤워까지 마쳤다.

반면 힘겹게 일어난 채우는 혹, 영양제가 있나 찬장을 뒤적였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밤새 그에게 시달려서일 수도 있고, 컨디션이 바닥을 쳐서일 수도 있었다.

까치발을 들고 주방 찬장을 뒤지던 그녀의 뒤로 다가온 이겸이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 맞추며 구석에 처박혀있던 종합비타민을 꺼냈다.

인상을 쓴 그가 박스에 적힌 설명을 앞뒤로 살핀다.

“종합비타민보단 따로 먹는 게 더 좋아요. 함량이 너무 낮아.”

쯧, 혀를 찬 이겸은 손에 든 박스를 내려놓고 채우를 돌려세웠다.

“근데 갑자기 영양제는 왜요.”

알면서도 묻는 것에 실소한 그녀가 비타민 하나를 꺼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안 먹으면 운전도 못 할 거 같아서요.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그는 그녀를 대신해 컵에 물을 받아 내밀었다.

“재택근무하지 그래요. 나랑 있어요.”

“출근 안 하세요?”

“토요일인데.”

그녀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법조인에게 주말이 어디 있겠어요. 주말에 되레 상담이 더 많거든요.”

“그럼 바래다줄게요. 같이 준비합시다.”

이겸은 비타민을 꼴깍 삼킨 채우의 입술에 입 맞췄다. 잘게 키스하다 장난치듯 혀를 넣자, 기다렸다는 듯 꽉 깨물어버리는 그녀.

짓궂게 서로의 입술로 장난치던 두 사람의 키스가 점점 깊어진다. 딱히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미래가 둘을 기다렸다.

시간을 확인한 채우는 불쑥 몸을 뒤로 뺐다.

“출근해야 해요. 안돼, 안돼.”

“내가 뭘 할 줄 알고.”

“야한 짓.”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올린 그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순순히 그녀를 놔준 뒤, 냉장고에 기댔다. 그에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려던 그녀가 돌아선다.

“오늘 꼭 병원 다녀와요. 혹시 모르잖아요. 금 간 곳이 잘못됐을지도.”

“통증이 있긴 하지만 잘못되진 않았을 겁니다. 은근 건강 체질이라.”

“체질이랑 뼈 붙는 건 달라요. 그리고… 문 고장 났던데. 고치셔야죠.”

“망가트린 쪽에서 알아서 고쳐놓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해봐요.”

채우는 그렇게 말하며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갔다. 옷장 문을 열고 정장 치마와 블라우스, 스타킹을 꺼내 콘솔 위에 올렸다.

“나랑 같이 지내죠. 여기 말고, 진짜 내 집에서.”

셔츠를 벗은 그녀는 서랍에서 브래지어를 꺼내며 고개를 돌렸다. 우윳빛 젖가슴이 봉긋하게 솟아 흔들린다. 마치 도자기로 빚어놓은 듯 아름다웠다.

이겸은 입술이 마르는 감각을 느끼며 매끈한 턱을 어루만졌다.

“진짜 집이라고 하면, 제가 아는 그곳이에요?”

그녀가 반바지까지 벗어 떨어트린 순간, 그는 더 이상 인내하지 않았다. 성큼 다가선 이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우를 화장대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앞에 무릎 꿇은 뒤, 스타킹을 집어 들었다.

작은 발을 제 무릎에 올리곤 정강이에 입 맞추는 남자.

“당신이 말한 곳이 우리가 처음으로 섹스한 곳이 맞다면.”

곧게 뻗은 정강이를 혀로 핥으며 상체를 세운 그는 뽀얀 젖무덤을 덥석 깨물었다. 말랑말랑한 살결을 맛보다가 앵두처럼 도드라진 젖꼭지를 빨았다. 동그란 열매를 혀로 굴리고 갈라진 틈을 간질이자 그녀의 숨소리가 서서히 탁해졌다.

팔걸이를 움켜쥔 가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진다. 한쪽 발에만 신겨진 스타킹이 허물처럼 바닥에 고이고, 그녀의 무릎은 점점 더 벌어졌다.

이겸은 속옷 위로 선명한 틈새를 비볐다. 그러자 단정한 회색 팬티의 중심이 젖어가기 시작했다. 손톱만 한 얼룩으로 시작해 동전만 한 크기로 번져간다.

채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은밀한 곳에 닿아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겸이 손끝으로 예민해진 클리토리스를 문지를 때마다 의도치 않게 몸이 튀어 올랐다.

“하지 마요…. 젖잖아.”

“너무 노렸어요, 채우 씨가.”

“평범하게 출근 준비를 한 건데요?”

“흠…. 그럼 더 안 되겠네. 혼자 두긴 위험해서, 더 졸라야겠어요. 같이 지내자고.”

그녀의 허벅지가 움찔움찔 떨렸다. 그는 젖은 속옷을 잡아 내렸다. 그러자 끈끈한 액체가 길게 늘어진다. 순간 이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다른 속옷으로 갈아입어요.”

그는 채우를 잡아 일으켜 콘솔 앞에 세웠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허벅지 중간쯤에 걸린 속옷도 미처 벗지 못한 채였다.

놀라 돌아보려던 그녀는 순간, 눈앞으로 떨어진 콘돔 비닐에 입술을 깨물며 숨을 삼켰다.

“…아아! 흣!”

골반을 잡아당긴 그는 양쪽 엄지로 엉덩이를 벌려 단번에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충분히 젖은 내벽이 자극을 받아 잔 경련을 일으킨다. 마치 그의 성기를 쥐어짜듯 조이며 질금질금 물을 흘렸다.

“출근해야 한다니까요…!”

“바래다줄게요.”

채우의 몸이 콘솔 위에 완전히 짓눌렸다.

깊어진 삽입에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린 그가 더욱 몸을 세게 묻으며 그녀의 어깨를 깨물었다.

“다른 새끼가 이 집 드나드는 꼴. 나는 못 봐요.”

“흐으, 나도 싫…어요.”

“그럼 승낙한 거로 압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줘요.”

“오늘 퇴근할 때까지.”

그녀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그의 말을 따라 한다.

“퇴근할 때까지.”

그러곤 손을 뒤로 뻗어 엉덩이를 벌리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빨리요.”

***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채우는 운전을 포기했다. 그에 이겸이 선뜻 기사를 자처했고, 그와 함께 등장한 그녀를 본 몇몇이 입을 떡 벌렸다.

그렇게 법무법인 해랑의 1층 카페. 엄청난 양의 비타민을 늘어놓은 이겸은 성분표를 유심히 살피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최이겸 씨, 이게 다 뭐에요. 저 주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이겸이 싱긋 웃으며 일어난다. 그러곤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이 형사님.”

“그러게요. 워낙 바쁘셔서 통화만 하다가 이렇게 직접 보니 반갑네요.”

악수를 나눈 둘은 음료를 주문해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본 이 형사가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그에 이겸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죠. 누군지 알아내셨습니까?”

“어제 보내주신 영상이랑 근처 CCTV 확인 결과, 조병진이라는 남성입니다. 최이겸 씨 말대로 기형 중공업 사람이고요. 증거가 명백해서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잡을까요?”

이 형사는 경찰인 걸 모르고 보면 조직폭력배, 혹은 운동선수로 착각할 만큼 커다란 몸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남자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하는 말에 이겸은 고개를 저었다.

“재물손괴로는 부족합니다. 차주가 변호사거든요. 제가 선임한.”

“예에? 뭐야, 그럼 변호사 차를 그렇게 만든 거였어요? 간이 부었네.”

이겸은 이 형사가 건네주는 사진 몇 장을 받아들었다. 블랙박스 영상을 캡처한 증거물로, 예상대로 범인은 김동희의 차 앞에 서 있던 비서였다.

그럼 왜 김동희는 굳이 정채우의 차를 망가트려야 했을까. 제 차가 아닌 변호사의 차를.

“근데 최이겸 씨. 최이서 씨, 괜찮습니까?”

뜬금없이 묻는 말에 이겸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기울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무사할 겁니다.”

“아아, 그럼 다행이고요. 요즘 어떤 미친놈이 그때 그 일을 다시 캐고 다닌다네요. 듣기로 피해자의 가족인데. 잘나가는 변호사라나 뭐라나.”

“피해자 가족이 왜요.”

“사건 종결을 반대하는 거죠. 사고가 아닌 살인이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살인이란 말에 이겸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갔다.

‘이겸아…. 이, 이겸아. 나 좀 살려줘.’

1년 전 초여름, 폭우가 쏟아지던 날. 최이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였다면 무시해버렸을 연락이지만, 그날은 달랐다.

위험한 무언가 수면 위로 불쑥 튀어 올라 제 발목을 낚아챌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무슨 일이야.’

‘숨을… 안 쉬어.’

그 한마디로 모든 불안이 설명되었다. 이겸은 최이서가 불러준 주소로 향했다. 새틴과 연결된 호텔 꼭대기 층.

최이서는 술이 떡이 되어 호텔로 들어온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누군가가 저를 부축한 느낌은 있지만, 확실한 건 모르겠다고.

그러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들려온 빗소리에 잠에서 깼고, 제 옆에 누워 잠든 남자를 발견했다고 했다.

기함할 사실은 둘 다 알몸이었다는 것. 그리고 성교의 흔적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최이서는 경악하며 남자를 흔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사후경직이 시작된 몸은 차갑고 딱딱했으며 섬뜩했다고.

충격을 받은 건 이겸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은 남자는 제게 새틴을 소개했던, 망가진 피아니스트였다.

이겸은 곧장 경찰을 불렀다. 기자들이 냄새를 맡기 전, 비공개 수사를 요구했고 그때의 담당 형사가 바로 이춘식. 눈앞의 남자였다.

“사고도 살인도 아니라, 약물 과다 투여로 인한 급성중독증 아니었습니까?”

“그랬죠.”

이 형사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사인은 약물 과다였다. 남자의 팔목엔 이미 수많은 주사 자국이 나 있었고, 부검 과정에서 다량의 약물이 검출되었다.

그런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유족이 사인을 의심한다?

“사인을 재조사하는 것엔 관여하지 않겠지만, 이건 회사의 명예가 달린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동성애 스캔들에 더 집중할 테니까요. 알아서 잘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겸은 인상을 쓰며 애써 웃었다.

“그럼 그쪽 일은 진척이 있으면 연락드리는 거로 하고. 이겁니다. 부탁하신 거.”

이 형사가 조금 전 꺼냈던 수첩을 내밀었다. 이겸은 자연스럽게 수첩의 벌어진 부분을 펼쳤다. 그 사이에 끼워져있는 건 작은 SD카드였다.

“그날 사고 차량에 있던 블랙박스 칩은 사라졌지만, 그 덕분에 주변 CCTV 기록이 박제될 수 있었더라고요.”

“그럼….”

카드를 집어 든 그는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자신만만한 표정의 이 형사가 얼음이 잔뜩 든 카페라테를 벌컥벌컥 들이켜곤 입가를 닦는다.

“김동희가 사고 차량 블랙박스에 손대는 영상이 남아있었습니다. 의심하지 않으면 이상해 보이지 않는 영상인데, 막상 의심하고 나니…. 이거 참, 이해가 안 되는 영상이더라고요. 죽어가는 사람들이 천지인데, 운전석에서 기절한 사람을 끌어내리고 차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말이 됩니까?”

“변호사님, 괜찮으세요? 차는요? 어제 연락이 너무 안 돼서 걱정했어요.”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채우를 본 미령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에 채우는 메마른 미소를 띠곤 대답했다.

“미안해요. 어제 좀 정신이 없어서 연락 못 했는데, 잘 해결했어요. 혹시 나 찾는 사람 있었어요?”

“고객분들은 변호사님이 따로 연락하셔서 괜찮았고, 사무장님이 몇 번 찾으셨어요. 그리고 어제 오후 늦게 어머님이 찾아오셨었고요. 연락이 안 된다며.”

“엄마가요?”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어투가 튀어나왔다.

“네. 변호사님이랑 굉장히 닮으셨던데….”

“…그럼 엄마 맞을 거예요. 알겠어요.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요. 주말인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요.”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채우는 핸드백을 내려놓자마자 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1년 전 강서준에게 한 방 먹은 뒤로 여진과 거리를 두었다. 그래야 했다. 제 인생이 엄마라는 존재에 휘둘리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런 심경변화를 느낀 것인지 한동안 그 거리를 유지하던 엄마는 어느 날인가부터 다시금 연락이 잦아졌다.

하지만 채우는 관계 회복을 바라지 않았다. 이대로 남이 되어 멀어진다 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만큼 지치고 힘들었다.

걸음마를 시작한 이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말. 술집 작부의 딸, 마담의 딸, 창녀의 딸, 꽃뱀의 딸.

어째서 똑똑한 정채우, 전교 1등 정채우, 운동신경 좋은 정채우, 예쁘장한 정채우로 불리지 못했을까.

과연 엄마는 정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채우니?]

꽤 오래도록 신호음이 흐른 뒤에야 전화를 받은 여진.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난밤 저를 찾아왔던 정영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 하는 짓이에요.”

그래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응? 뭐가. 넌 대체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가족끼리 정말 이럴 거야? 너, 엄마 영영 안 보고 살려고 이래?]

“알잖아요.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거. 내가 피하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주면 안 돼요?”

[아니, 어떻게 그래? 너랑 내가 남이니?]

“엄마랑 나는 남이 아니지만, 정영수는 남이잖아.”

[채우야!]

“대체 그 남자는 왜 남의 집 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오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치자 잠시간 정적이 이어졌다.

[무슨 소리야. 영수 씨가 널 찾아가? 문을 열어?]

“결혼한다며. 청첩장 주고 갔으면 됐지. 대체 우리 집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욕설을 내뱉자 혈압이 올라 말미가 부르르 떨렸다. 채우는 유리로 된 벽 너머, 저를 향한 시선들을 느끼며 블라인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엄마는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곧 네 생일이기도 하고, 네 말대로 결혼이야기도 하려고 전화한 건데….]

이번에도 역시나 엄마는 현실을 외면했다. 채우는 더는 실망감조차 들지 않는 제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 엄마란 존재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므로.

“됐어요. 둘이 제발 알콩달콩 잘 살아. 나 끌어들이지 말고. 그리고 엄마 남편 될 남자한테 꼭 전해줘요. 한 번만 더 내 집 찾아오면, 그땐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마지막 경고예요.”

[채우야, 채우야!]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는 손에 잡히는 파일을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벽에 부딪힌 파일이 요란한 소릴 내며 후드득 떨어진다. 생각보다 더 흥분해버린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설득할 가치조차 없던 일.

깡패 새끼가 경찰을 무서워할까?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녀는 힘없이 일어나 제가 던져 엉망이 된 것들을 주워들었다. 이래서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되는 거다. 결국, 힘 빠지는 건 저 혼자일 테니까.

파일을 정리해 꽂아 넣던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선 건 서류봉투를 잔뜩 든 경일이었다.

“오, 정 변! 살아있어?”

동그란 안경 너머, 경일의 눈이 크게 뜨인다.

“죄송해요. 살아있긴 해요. 상태가 별로지만.”

“대충 들었어. 차는.”

“타이어 교체로 끝났어요. 근데… 그거 다 뭐에요?”

채우가 다가가자 경일은 들고 있던 서류봉투 중 하나를 내밀었다.

“이력서들. 지금 그 친구 면접 보러 갈 건데 같이 갈까? 재밌는 친구가 지원했더라고.”

“누군데요?”

봉투를 연 그녀는 맨 앞장에 붙은 사진과 이름을 보곤 멈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왜 여길 와요? 창하 그룹 법무실 과장인데.”

“딱 알아보네. 강서준이라고 했나? 퇴사했다던데?”

“퇴사요?”

“어. 이력서상으론 퇴사한 지 한 6개월 정도 됐더라. 왜, 사이 별로였어?”

별로인 정도가 아니다. 강서준은 자다가도 이를 갈 만큼 제 인생의 발암물질이었다. 이런 인간과 다시는 한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경일에게 서류를 넘기려던 채우는 순간 마음을 바꿨다.

“사무장님, 제가 먼저 강서준 씨 만나봐도 될까요? 물어볼 게 있는데.”

“뭐, 상관은 없어.”

“그럼, 딱 10분만 주세요.”

“그래, 그럼.”

고개를 끄덕인 경일이 방향을 튼다. 심호흡한 채우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강서준은 당시에 분명 최이서 라인을 잡아 승진 가도에 올랐다. 그런데 이토록 갑작스러운 퇴사라니.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게다가 면접실에 등장하는 자신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지도.

완벽하게 다듬어진 모습으로 면접장 문을 열자, 커피를 홀짝이던 강서준이 벌떡 일어난다. 환하게 웃고 있던 그는 채우를 발견하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정…채우?”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그의 눈길이 그녀가 들고 있는 이력서 봉투에 닿았다. 탁 트인 도심을 뒤로한 강서준이 황당한 듯 실소하며 앞머릴 쓸어넘긴다.

그는 예전보다 좀 더 말랐고, 어딘지 모르게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앉으세요.”

“됐다. 너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안 왔어.”

“왜요. 죄지은 거 있으세요?”

채우의 비아냥에 주머니에 손을 넣은 강서준이 입꼬릴 씰룩이며 받아쳤다.

“이게 시비 거네? 까놓고 말해 죄는 네가 지었겠지.”

그녀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몰라요.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저 그때 회식 이후 제주도로 발령받았잖아요. 그게 싫어서 사표 낸 거고요.”

“아주 신수가 훤하네? 여기서 잘해주나 보지?”

“그럼요. 연봉 괜찮고 마인드도 잘 맞아요. 서로 밟고 올라가는 체계도 아니고.”

그녀를 노려보던 서준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며 상체를 숙였다.

삽시간에 충혈된 눈. 그리고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이 가관이다.

“까불지 마.”

“까분 적 없어요. 면접 보러 오셨다고 해서 인사하러 온 거고요.”

“위선이야, 정채우. 네가 최이겸이랑 붙어먹었으면 모를 리 없거든? 그때 그거, 살인사건 알리바이 만드는 거였다는 거.”

“무슨…. 살인사건이요?”

“쇼하네.”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낸 그가 욕지거릴 내뱉으며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준은 힘 빠진 목소리로 빈정대길 멈추지 않았다.

“넌 진짜 대단해. 남자한테 미쳐서 같은 팀원을 팔아먹고도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다니는 거 보면. 설마 아직도 최이겸이랑 붙어먹어? 아! 여기 사무장도 아나? 네가 밑구멍 영업으로 살아남은 거. 와, 알고도 일 주는 거면 그 나물에 그 밥인데.”

예전이었다면 참지 못하고 반박했겠지만, 실전으로 단련된 멘탈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고개를 기울이며 코웃음 친 그녀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여기 대기업 아니에요. 수임료 받아서 먹고사는 법무법인입니다. 돈 되면 다해요. 양심? 양심을 안 따른다고 구속되진 않잖아요. 물론, 법조인으로서의 기본은 지키죠.”

“그래서 했다고?”

“강서준 씨.”

“왜.”

“부러우면 자지 영업이라도 뛰어요.”

“…뭐?”

서준은 제 귀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이어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하지만 채우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남이 하면 뭐든 쉬운 것 같죠? 남이 이룬 건 다 불법적으로 얻은 불로소득 같고. 어린애가 좋은 차 끌고 다니면 다 부모 잘 만난 머저리 같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채우는 일그러지는 서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대체 내가 밑구멍으로 일을 따내려면, 몇 명을 동시에 만나야 한단 거예요? 해봤어요? 일대 다수.”

“야!”

서준이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그에 혀를 차곤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아니고 정채우 변호삽니다. 뭐 달린 게 유세라더니…. 해랑에선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변호사 안 뽑습니다. 그러니까 공손하게 면접 잘 보세요. 충고 기억하시고.”

돌아선 채우는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정확히 10분을 재고 있던 경일이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장 이경일입니다. 걱정 마요, 면접은 내가 직접 볼 테니까. 채우 씨는 가봐.”

그녀는 경일에게 꾸벅 인사한 뒤,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통쾌함과 뿌듯함, 미약한 불쾌함이 잔열처럼 가슴안에서 들끓는다.

‘뭐? 붙어먹어?’

사무실로 돌아온 채우는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파묻혔다. 출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퇴근이 그리웠다.

지난밤, 밤새 붙어먹은 그 남자가 보고 싶었다.

***

재밌게도 법무법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최이겸의 기사였다.

괜찮다고 극구 거절하는 그녀를 차에 태운 기사는 안전한 귀가가 목표인 양 곧장 집으로 향했다.

덕분에 신속, 정확, 안전하게 아파트에 도착하긴 했으나 집 앞에 선 순간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채우는 심호흡을 하곤 새로운 비밀번호를 눌렀다. 경쾌한 소릴 내며 열리는 문. 그녀가 가장 먼저 확인한 건 현관에 놓인 이겸의 신발이었다. 커다란 남자 구두를 보는데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왔습니까?”

소파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들자,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그가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추었다.

“네. 다녀왔어요….”

기분이 묘하다. 현관 앞에서 느낀 그 감정이 이런 거였나?

생각해보면 다녀왔다는 인사에 대답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녀가 우물쭈물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진단서와 약봉지를 든 최이겸이 불쑥 나타났다.

“이게 뭐예요?”

채우는 이겸이 내미는 진단서를 받아 내용을 살폈다. 대체로 상태가 양호하여 일상생활을 시작해도 된다는 소견이 적힌 진단서.

“이제 이 약만 다 먹으면 싹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거 봐요. 내 말이 맞죠? 나 건강 체질이라니까.”

“축하해요. 뭐, 체질과 회복력의 상관관계는 모르겠지만. 인정. 근데 정말 붙었대요?”

채우는 그의 가슴을 조심스레 짚어보았다. 그러자 최이겸의 미소가 짙어진다. 그는 팔을 둘러 그녀를 끌어안았다.

“확인해보죠.”

확인을 한다니!

놀라 숨을 들이켠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저, 저기 아직 초저녁이에요! 그리고 씻지도 않았고, 식사도 해야 하고. 그리고….”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그렇게 해놓고 또 하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한데 마음을 읽은 건지 얼굴을 붉힌 그녀를 내려다본 이겸이 쿡쿡대며 웃었다.

“걱정 마요. 지금 당장 확인해보자는 건 아니었어요.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장난이었어요?”

그녀의 고운 이마에 생겨난 주름.

“진심이었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게다가 보여줄 것도 있고.”

오늘따라 짓궂은 그. 어쩐지 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최이겸은 꽤 유머러스하며 장난스러운 사람일지도.

채우는 괜스레 열 오른 뺨을 톡톡 두드리며 핸드백을 내려놓은 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은 이겸은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녀는 오늘 찾아온 강서준을 떠올리며 그의 뒤로 가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제가 사용하는 샴푸 향이 난다. 은은하고 달콤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일 향이.

체온이 높아지자 더욱 달아진 향을 음미하며 목덜미에 입 맞춘 채우. 씩 웃은 그가 손을 뒤로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좋은데요?”

“저도요.”

“채우 씨의 몰랐던 면을 하나씩 발견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네요.”

“그러게요.”

채우의 눈길이 움직인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작은 초소형 카메라였다. 이따금 배우자의 외도현장을 수집하기 위해 설치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도 이혼소송을 진행하며 흥신소를 통해 종종 접했던 카메라였다.

그런 게 왜 여기에…?

인상을 찌푸린 채우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에요? 어디서 났어요?”

“저기서 발견했습니다.”

그는 침실과 연결된 창고 문을 가리켰다. 그곳은 에어컨 실외기를 비롯해 쓰지 않는 물건과 액자 등을 넣어둔 장소였다.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잔뜩 들러붙는다.

“어제 정영수가 다녀가고 의심이 들어서 사람을 불렀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집에 드나들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창고에 있던 액자에서 카메라가 나오더군요. 그것도 여전히 잘 돌아가는.”

이겸이 말을 멈추곤 카메라를 다시 가져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멍하니 할 말을 잃은 채 입술만 벙긋거렸다.

“꽤 오래된 것 같던데.”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를 빙 둘러 다가왔다. 여전히 채우는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무슨….”

“설치된 지 꽤 됐단 소립니다.”

입안이 비릿해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속에 든걸 모두 게워내고 싶을 만큼 메스껍다.

만화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영상송출 신호를 분석하라고 했으니, 몇 시간 뒤면 범인이 누군지 밝혀질 겁니다.”

“그 액자…. 지난번 집에선 침대 옆에 있던 거예요.”

“이 집에선 창고에 넣어뒀고요?”

“네….”

“어쩌면 카메라를 회수하러, 혹은 재설치하러 왔던 것 같네요.”

이겸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카메라를 노려보곤, 느릿하게 냉소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쓰레기였다고 중얼거린 그가 채우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1초의 영상도 남기지 않고 없앨 겁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하얗게 질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멍하니 서 있던 채우는 떨리는 주먹을 말아쥐곤 다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캐리어를 꺼내 닥치는 대로 옷가지를 채워 넣었다.

이건 범죄다. 정영수가 지금껏 저를 관찰해온 변태라고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친 듯이 물건을 쓸어 담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악!”

패닉이 찾아왔다. 지금껏 정영수가 저를 보며 했던 말과 지었던 표정, 훑는듯한 시선의 원인이 명확해졌다. 분노와 공포, 만약이라는 가설이 온몸을 짓눌렀다.

정신없이 양손으로 옷을 눌러 담던 그녀의 몸이 번쩍 들린다. 이겸은 채우를 안아 침대에 눕힌 뒤, 꽉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이겸은 긴 다리로 몸을 옭아매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후, 망연자실한 그녀의 얼굴에 입 맞췄다. 안온한 체온에 결국 참아왔던 울음이 쏟아진다. 채우는 커다란 품에 안겨 마음껏 울어버렸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급격하게 터져버린 눈물이 멈춰지질 않았다.

그에게 위로받았다. 이전에도, 오늘도. 누군가 휘두른 형체 없는 칼날에 난도질 되었을 때마다, 기어이 최이겸은 저를 위로했다.

그가 내민 손이 아니었다면….

크게 들썩이던 어깨의 떨림이 잦아든다.

***

“제 몸을 만지고 더듬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서도 태연했어요.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엄마가 막았고요. 실수였다고. 술에 취해 엄마와 나를 구분하지 못한 거라며. 그게 선처의 조건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변호사가 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진절머리나서요….”

엄마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 몸을 묻으니, 가슴 속에 숨겨둔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런데 법을 알면 알수록 더 큰 수렁에 빠지는 것 같았어요. 결국, 법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보니 정영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엄마를 연민하게 되고, 회피하기 시작했어요. 힘과 권력 앞에 저 같은 사람이 휘두르는 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돼서요.”

그녀는 긴 머릴 하나로 그러모아 올리며 허릴 움직였다. 그러자 아래에 반듯하게 누운 그가 잘록한 허리를 지나 봉긋한 젖가슴을 감싸 쥔다. 양손으로 쓸어올리듯 움켜쥐곤 허리를 조금 들었다.

그에 채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보이진 않지만, 그를 품은 내벽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그 힘과 권력 앞에 휘두를 수 있는 권리. 내가 줄게요.”

“아뇨. 스스로 할거예요. 이젠 그럴 수 있거든요. 진짜 변호사가 됐으니까요….”

“그럼 내 옆에서 해요. 내가 지켜보는 곳에서.”

채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서서히 차오르는 흥분감에 그녀의 움직임이 불규칙해진다. 쾌감을 참기 힘든지 상체를 세워 앉은 그. 이겸은 동그란 젖꼭지를 깨물더니 제 위에 올라탄 채우를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검게 펼쳐진다. 몸을 뒤로 빼 빠져나갔던 그가 그녀의 다릴 넓게 벌리며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채우는 허릴 휘며 그에 맞춰 움직였다. 조금 전 느꼈던 혼란은 온데간데없이, 또렷한 결론이 머릿속을 채웠다.

이제는 피하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란 사실이.

어둠 속에서 그는 상체를 숙여 그녀와 입술을 겹쳤다. 혀를 섞고 서로의 몸을 만졌다. 긴 입맞춤과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섹스. 그리고 다정한 품까지.

“지금이 너무 좋은데…. 배 안 고파요?”

길게 빠져나갔던 그가 피식 웃으며 강하게 치받는다. 꽉 차는 느낌에 채우는 토막 난 신음을 내뱉었다. 마치 장난을 치듯 그녀의 약한 곳을 찾아 쿡쿡 쑤시고 문지르는 이겸.

채우는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 몸을 접었다.

“장난치지 말고요. 응?”

“뭐 먹을까요.”

“뭐든. 매운 거 먹고 싶어요.”

“스트레스 해소용?”

“아마도.”

그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속도와 강도를 올렸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고양감에 그녀는 교성을 내질렀다. 높은 곳에서 밧줄 하나 없이 뛰어내리기 직전의 두근거림이 전신을 강타했다.

땀으로 범벅된 두 사람의 몸이 비벼지고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를 끌어안으려던 손이 미끄러져, 단단한 살결에 상처를 냈다. 흥분을 조절하려 일그러지는 남자의 표정에 정신을 빼앗겼다.

사납게 파고들던 그가 채우의 목덜미에 손을 넣어 당긴다. 입술이 강하게 맞붙어 짓이겨지듯 비벼졌다.

그녀는 숨을 참은 채 극도의 절정을 맞이했다.

***

“그래서 그날, 정채우 씨는 그 일에서 빠지라고 한 겁니다.”

푹 끓인 김치찌개와 부드러운 계란말이. 평범하지만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보며 채우는 입맛을 다셨다.

“일이 잘못될 줄은 알고 있었어요. 엘릭을 상장시킨 건 법무실의 성과였거든요. 누구든 알아챌 거고 책임자를 지목할 텐데…. 저는 겁이 많았어요.”

“그 일로 강서준 씨가 괴롭혔습니까?”

“제가 괴롭혔죠. 이상한 헛소리를 할 때는 똑같이 맞받아쳐 줬고요. 근데… 오늘 만나서는 좀 이상한 소릴 했어요.”

“어떤?”

그가 그릇 가득 찌개를 떠 그녀의 앞에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건물 1층에 새로 생긴 김치찌개 집을 찾았다. 외곽까지 차를 끌고 나가려던 둘은, 12층에서 맡은 김치 냄새에 이끌려 이곳에 들어섰다.

치즈가 듬뿍 든 계란말이를 크게 한입 베어 문 그녀가 우물우물 씹다가 대답했다.

“그때의 문서조작으로 감추려 한 게, 폭행 사건뿐만이 아니라고요.”

이겸은 여전히 미소짓고 있었다.

“강서준 씨가 해고당한 이유를 알겠네요. 너무… 깊게 파고들었나 봅니다. 쓸데없는 궁금증이 화를 부른 케이스랄까?”

“…정말이에요?”

“살인사건을 무마하려 했다고는 안 했습니까?”

살인이란 말에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가 다시 흩어진다. 콜록콜록, 사레들린 그녀는 차가운 물을 단숨에 들이켜곤 빨개진 눈가를 비볐다.

“그런 거 함부로 말해도 돼요? 기껏 돌려 물었더니.”

“괜찮습니다. 실은 사고가 있었던 게 맞습니다. 형은 나름 억울한 누명을 써야 했고, 알리바이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살인이라니. 식사 중에 나눌 대화는 아니었다.

채우는 그의 말을 막은 뒤, 김치찌개 냄비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얘기했다.

“여기까지만 하죠. 나머지는 새집에 가서 해요. 저, 이거 첫 끼거든요. 제대로 먹어야겠어요.”

“잘 좀 챙겨 먹어요.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먹이기 전에.”

눈살을 찌푸린 그가 고기만 잔뜩 골라 그녀의 그릇에 부었다. 고기 듬뿍 김치 조금.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런 거 좋아요. 고기에 채소 싸 먹는 거.”

“육식 파인 거 알고 있습니다.”

“최이겸 씨가 나에 대해 모르는 것도 있어요?”

그는 입을 다문 채 짧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아마 모르는 게 더 많을 겁니다. 그러니 천천히 알아가 보죠. 정채우를 관찰하는 건 내 몇 안 되는 특기 중 하나니까.”

채우는 웃음을 참으려 얼굴 근육에 힘을 주곤 꿋꿋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가 덜어준 찌개와 공깃밥을 모조리 비우고 후식으로 달콤한 자판기 커피까지 마셨다.

계산을 마친 후 밖으로 나오자 여름밤의 습한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 뒤따라 나온 이겸이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걸을까요?”

아직 초여름이지만, 호수를 품은 공원은 풀벌레 우는 소리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인도와 자전거 도로로 나뉜 초록색과 벽돌색 바닥을 요리조리 넘나들며 키득키득 웃는 그녀.

“복길이는 건물주랑 썸을 탈 줄 알았대요. 그런데 월세 인상 건으로 쌈을 하게 된 거죠.”

“친구분이 귀엽네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한다고요?”

“네. 본인 말로는 어릴 때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지역에서 꽤 유명한 피아노 신동이었대요. 그런데 대학이 사람을 버려놨다나? 맨날 엠티에 불금을 보내니 그렇죠. 어쨌든 제 인생 첫 클래식은 그 친구가 쳐준 파헬벨의 카논이었어요.”

“카논 좋죠. 그럼 혹시, 제 연주도 들어봤습니까?”

훌쩍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가 생긋 웃으며 돌아선다.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아슬아슬했다.

“당연하죠. 너무 좋아서 꿈까지 꿨어요. 피아노 연주곡이 그렇게 섹시한 건 처음이었달까. 실제로 들은 적은 없지만, 분명… 연주하는 모습도 멋있었을 거예요.”

여름밤의 공원. 은은한 빛을 내는 가로등 불빛 아래, 무엇보다 반짝이는 그녀가 있었다.

이겸은 자연스럽게 곡조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한 곡이 귓가에 울려 퍼진다. 환청이겠지만,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선명했다.

“어? 이 곡인데?”

눈을 동그랗게 뜬 채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제야 이겸은 환청이 아님을 알아채곤 그녀에게 다가갔다.

피아노 곡조는 공원 내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하필 너무 끝내주는 타이밍에 들려온 음악. 그의 손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와, 신기해!”

환하게 웃으며 가로등에 매달린 스피커 아래 서는 그녀. 까치발을 든 채 스르륵 눈을 감는 여자가 너무 예뻐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이겸은 채우의 어깨를 감싸 안아 가로등에서 떼어내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이끌리듯 안겨 제 허리를 감는 팔에 그의 가슴이 붕 떴다.

“다음엔 진짜 소릴 들어봐요. 현역 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하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새집에 가면 들을 수 있어요?”

“그 피아노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제가 현을 다 끊어버렸거든요.”

“뭐…. 피아노는 어디든 있으니까요. 다음에 꼭 들려주세요.”

배낭을 메고 세계를 돌며 길에 자리한, 혹은 식당과 바에 놓인 피아노를 마음껏 연주하는 것이 소원일 때가 있었다.

순수했고 어리석었다. 제가 음악에 몰두할수록 아버지의 비정상적인 집착과 소유욕이 끓어오르는 것도 모르고.

천재 소릴 듣던 아들의 손에 칼을 꽂아 넣으라 지시하며, 아버지는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이셨을까.

이겸은 숨을 길게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강서준이 말한 살인사건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정확히는 사망 사건이에요.”

아무도 없는 산책로. 빛이 드문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얼굴에 나뭇잎 그림자가 어린다.

“제게 새틴을 소개했다던 사람, 기억합니까?”

“네. 비슷한 사고를 당한 피아니스트. 맞나요?”

“그 남자의 이름은 이시현이었습니다. 제 또래의 피아니스트였고 새틴에서 오래 연주했죠. 어떻게 보면 은인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가 새틴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줬으니. 그가 내민 선의는 순수했어요.”

걸어 들어갈수록 바닥에 놓인 조명의 간격이 넓어져 어둠이 깊어졌다. 이겸은 그녀의 손을 깍지 끼워 잡은 뒤 걸음을 늦추었다.

“그런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약물 과다. 시신에선 마약 성분이 다량 검출되었고, 마약법 위반 전과도 있었죠. 그런데 시신을 발견한 사람이 하필 최이서였습니다. 술에 취해 호텔 방에서 눈을 뜨니 같은 침대에 죽은 이시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둠에 가려진 소실점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성관계의 흔적까지 잔뜩 남긴 채로. 최이서가 그를 강간한 건지, 합의하에 섹스를 한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건지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아버지는 사람이 죽어 나간 것보다 남자와 몸을 섞은 후계자란 타이틀을 숨기는 게 더 중요했던 사람입니다. 그 일은 강서준을 이용해 만든 알리바이 덕분에 깔끔하게 마무리됐고요. 그런데 그 유족이 사인 재조사를 요청했다네요. 살인이라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그녀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주위를 둘러본 채우는 가까이에 있는 벤치로 그를 이끌었다. 이겸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 벤치에 앉았다.

이름 모를 들꽃이 말라비틀어진 자리. 오랜 시간 누구도 찾지 않은 건지 먼지가 가득한 곳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그래서… 알리바이가 필요했던 거구나. 그때의 최이겸 씨는 상장 건 때문에 항상 법무실 직원들과 함께 있었으니까요. 서류상 이름만 바꾸면, 알리바이를 만들어줄 증인들은 법무실 직원들이 될 거고요. 그래서 이름을 바꾸라고 하신 거, 맞죠?”

“맞아요. 그리고 이용가치가 없어진 개는 가차 없이 버리는 게 아버지의 방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확률로 강서준이란 법무실 직원은 아버지께 한낱 개새끼였을 겁니다.”

개새끼를 강조하는 이겸에 진지했던 그녀가 작게 실소했다.

“뭐 하나 쉬운 게 없네요.”

“그래서… 내가 김동희를 자극하는 겁니다. 김동희가 수면으로 올라오면, 자연스럽게 기형 중공업도 같이 딸려 올라올 테니까. 나는 내 불행을 초래한 관련자들 모두에게 위자료를 받아낼 겁니다.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금액일 거예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과 나는 어쩌다 이토록 불행의 중심에 서게 된 걸까요.’라고. 그러곤 힘없이 웃는다.

“내게 남은 한 줄기 빛이 당신이라 다행입니다.”

부러 낯간지러운 단어들을 선택해 말한 이겸은 그녀의 턱을 잡아 키스했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벌어지며 그를 받아들인다.

행복의 끄트머릴 움켜쥔 기분이었다.

과거, 음악이란 도구를 이용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을 거란 꿈을 꾸었다. 그녀 역시 법이란 제도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 누구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면, 서로를 강하게 붙들어 끌어당기는 수밖에.

처음 본 순간부터 손을 내밀고 싶었다. 잠시의 머뭇거림이 몇 년의 시간을 잡아먹었고, 내민 손은 허공을 더듬었다.

이제야 강하게 맞잡은 손. 그녀는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상냥하다.

제가 상상했던 그 이상으로 다정하였다.

***

[알아봤습니다. 강간, 강도, 폭행부터 살인미수까지. 이거 완전 쓰레긴데요? 그래도 한동안 조용히 살았네요. 보니까 정영수가 몸담았던 일도파가 해체되고 뿔뿔이 흩어지며, 위세가 꺾인 것 같습니다.]

불붙인 담배의 연기가 길게 피어오른다. 끊을 수 없는 몇 가지 습관 중 하나였다. 재밌게도 그중 가장 지독한 습관이 흡연이고 그걸 가르친 건 정채우였다.

그래놓고 본인은 깔끔하게 비흡연자 노릇을 하고 있다니. 얄밉기도 하지만, 어쩐지 정채우다워서 생각할수록 귀여웠다.

“경고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호텔 세라티오의 대표직을 맡고 있는데, 어디서 돈을 불린 건지 파 볼 수 있습니까?”

[일단 호텔연관이면 정황증거로는 잡아넣기 힘들고… 수사를 좀 해야 할 겁니다. 워낙 높으신 분들이 많이 엮인 게 호텔 일이라. 뭐, 호텔 내부에 설치된 몰카 같은 게 있다면 좀 쉽겠죠.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제 사람의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뒀더군요.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런데 의도가 꽤 불순해서 건드려볼 생각입니다.”

[그게 사실이면, 분명 상습범입니다. 개가 똥을 끊지. 일단 특별반 구성 한번 해보겠습니다. 깡패 새끼 잡아넣어서 실적 올리면 우리도 좋은 거니까요.]

“특이사항이 나오면 연락주십시오. 얼마든지 도울 테니.”

[감사합니다. 연락 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이겸은 테라스에 기대 드넓은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와 산책을 마친 뒤 서초동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정영수에 관해 파보았다.

세라티오 호텔…. 그리고 불법 촬영물.

이시현이 죽은 당시에도 세라티오의 대표는 정영수였다. 알듯 말듯, 잡힐 듯 말 듯한 무언가가 날카롭게 신경을 긁는다.

이겸은 짧아진 꽁초를 비벼끈 후 집안을 돌아보았다. 소파엔 머리를 질끈 올려묶은 그녀가 졸린 눈을 비비며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꾸벅꾸벅 조는 게 귀여워 계속해 관찰하던 그는, 풀썩 고꾸라지는 채우의 모습에 놀라 뛰어 들어갔다. 간신히 테이블에 머리 박는 걸 막아낸 이겸은 실소하며 그녀를 눕혔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채우가 하품을 크게 한 뒤, 소파 구석으로 파고든다.

“잘 겁니까?”

“졸려요….”

“침대로 데려다줄게요.”

“제가 갈 수 있어요.”

“눈도 못 뜨면서. 잠시만 여기서 자고 있어요. 샤워하고 나올 테니.”

잠에 취해 고개를 끄덕끄덕. 이겸은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욕실로 들어갔다. 이젠 정말 담배를 끊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함부로 키스할 수도, 손댈 수도 없게 만드는 그것을.

샤워를 마친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그녀는 완전히 잠든 뒤였다.

이겸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고 침실로 걸어갔다. 거대한 피아노를 지나 침실 문을 열자 에어컨 바람에 식어버린 공기가 두 사람을 맞았다.

그날 이후 처음이다. 정채우와 함께 아침을 맞은 그날…. 제가 잠시 정신을 판 사이, 정채우는 사라져버렸다.

이겸은 그녀를 눕힌 뒤, 깨지 않게 키스했다. 부드러운 뺨과 콧날, 입술에 차례로 입 맞추고 양팔 사이에 가둔 채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깊은 호수 속에 가라앉아있던 일들이 하나둘 수면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일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곤 숨을 들이켤 때.

칼을 휘두를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뺨에 입 맞춘 그가 침실과 연결된 서재로 들어갔다. 컴퓨터 앞에 앉은 이겸은 아주 오랜만에 김 실장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전무님, 김 실장입니다.]

반가움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에 그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진다.

“육아는 성공적입니까?”

[고양이 생후 1년이면 성묘입니다. 육묘 시기는 지났고요.]

“그래요. 내가 너무… 늦게 찾았나?”

[괜찮습니다. 덕분에 지시하신 일들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여자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에 이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매끈한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이쪽도 시작할 준비 끝냈습니다. 그럼…. 이제 복직하세요, 김 실장님.”

그에 수화기 너머, 환해진 목소리의 김 실장이 말했다.

[기다렸습니다.]

오전 8시 30분.

가장 많은 수의 직원들이 정문을 통과해 출근을 시작한 시각이었다. 신입사원들도, 베테랑 임원들도 정해진 시간에 회사로 들어섰다.

비서실 윤 과장은 오늘도 사표를 품에 숨긴 채 출근했다.

아마 1년쯤 되었을 것이다. 상무였던 최이겸이 전무로 승진한 뒤, 기다렸다는 듯 수행 비서직이 공석이 된 게. 과장급 직원들은 실장이 비운 자릴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전무의 직속 비서 자리는 누구나 탐을 냈고, 최이겸이라는 인물의 외적인 면도 신데렐라를 꿈꾸게 하는 데 한몫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알면 알수록 사이코에 16차원 정신세계를 가진, XXX라는 게 윤 과장이 내린 답이었다.

비서도 싫다, 기사도 원할 때만 부르겠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 잠수를 타지 않나, 이젠 어디에서 지내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천재는 무슨 천재. 아니지,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좋으니 비서도 필요 없다며 모든 걸 본인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그 덕에 비서들의 일은 줄었지만, 반대로 상부의 압박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사장과 회장이 동시에 최이겸 전무의 비서 배정을 요구하며 비서실을 달달 볶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대체 왜?’

저 알아서 일 잘하고, 문제 될 거 하나도 없고, 사고 친 적도 없는 남자를 왜 이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한 번만 더 내려와서 무능력하다며 인신공격을 퍼부을 시엔, 그 얼굴에 사표를 뿌릴 거라고 다짐. 또 다짐한 윤 과장이었다. 하지만 더럽고 치사하고 짜증 나도 함부로 사표를 내던질 순 없을 것이다.

대기업 창하. 부모가 돈이 많아 강남에 건물 몇 채를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포기할 수 없는 타이틀이니까.

그런고로 윤 과장은 오늘도 힘없는 걸음으로 승강기 홀 앞에 섰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난히 주위가 시끄러웠다.

혹여 제가 고위급 임원의 기척을 놓친 건 아닌지. 놀라 주위를 둘러본 윤 과장은 다른 사람들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시야에 담았다.

“오후 8시 30분, 폐장 뒤 퍼스널 쇼퍼가 안으로 모실 겁니다.”

“그래요.”

“그럼 몇 시에 모시러 갈까요?”

“백화점에선 저 알아서 갈 테니, 김 실장님은 정시에 퇴근하세요. 오랜만의 복직인데…. 만날 사람들이 꽤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아 넣은 채 피식 웃는 최이겸 전무. 그의 대각선 뒤에 선 여자는 비서실의 전설 김인경 실장이었다.

윤 과장은 김 실장의 등장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그녀는 나이 마흔, 미혼의 몸으로 출산휴가를 써 회사를 발칵 뒤집어놓은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는 퇴사권고였고,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대화로 모두가 김 실장이 복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 과장은 차마 그들과 같은 승강기에 타지 못했다. 살아 움직이는 지하여장군. 최이겸의 사이코 짓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설적인 수행 비서로 정평이 난 그녀에겐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 같은 게 있었다.

두 사람이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에 윤 과장은 서둘러 휴대 전화를 꺼냈다. 혹시라도 단체 채팅방에 공지가 올라왔나 싶어 메신저를 연 순간, 홍수처럼 쏟아진 인증샷이 화면을 빠르게 채운다.

-김인경! 김 실장님 컴백!

-우린 살았네.

-내정자가 있다더니. 대박. 그래도 다행이에요. 저는 다시 오신 거 환영.

-난 모르겠소. 왠지 피바람이 불 거 같아. 우린 조용히 할 일들 하자고. 정신 차리고.

그래, 다행이라는 건 나도 인정. 하지만 아무개의 말마따나 피바람이 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살벌한 피바람이.

***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이겸은 제 취향에 맞춰 내린 커피를 보며 피식 웃었다.

“김 실장님이 복귀한 게 꽤 충격적인가 봅니다. 곧장 상부까지 보고 들어간 걸 보면.”

산미 높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허브향이 진한 음식도. 급할 땐 왼손 필기를 하고 은근한 아날로그 추종자로, 진공관을 통해 전해지는 소릴 좋아하는 남자.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최이겸은 장점과 단점을 반반씩 가진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끈기가 있는 거겠지만. 마음먹은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이루어내고 마는 집요함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김 실장은 그런 최이겸이 푹 빠져있는 여자가 궁금했다. 아마 결혼을 한다면, 막냇동생 장가보내는 심정일 것이다.

“제 밥그릇 챙기기 급급할 테니까요. 제가 끼어들면, 승진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것도 있고요.”

김 실장이 내려놓은 서류의 맨 앞장을 넘긴 이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 안에 쓰인 내용은 더더욱 마음에 드는지, 드물게 만족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느리게 비빈다.

“이 자료, 정확합니까?”

“투자금이 완벽하게 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시가총액은 최 회장님의 지분과 맞먹는 수준이고요. 러시아에서 꽤 큰 투자가 들어왔으니, 이제 마음껏 휘두르셔도 됩니다.”

김 실장이 이겸의 지시로 휴직 아닌 휴직을 택하고 한 일은 그가 관리해오던 사모펀드의 운영권을 일임받는 것이었다.

최이겸은 천재였다. 주식을 했다면 대한민국 금융업의 뿌리가 흔들렸을지도 모를 만큼 투자에 능했다. 하지만 그가 최이겸이고 창하 그룹에 몸담은 이상, 국가와 금융감독원의 감시를 피할 수는 없었다.

처음 그가 비밀스러운 임무를 부탁했을 땐, 혹여 금융사기에 연루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나는 보아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삼킬 건, 창하.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이고요.’

제 아버지의 회사를 잡아먹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겠다니.

‘큰일, 하셔야죠. 그래서 남편에게 뺏긴 아들 데려옵시다. 가능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여자란 이유로. 경제력이 부족하단 이유로, 가정폭력범이었던 남편에게 아이를 빼앗겼다.

그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철저하게 숨기고 이중생활을 했건만, 최이겸은 태연하게 그녀의 약점을 찾아 쩍 벌렸다.

칼을 꽂을지, 약을 발라줄지. 제 선택에 따른 거라는 듯한 그의 제안에 김 실장은 고민 없이 손을 잡았다.

김 실장은 꾸벅 인사한 뒤 집무실에서 나왔다. 자신의 명패가 놓인 테이블 모서리를 손으로 훑고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막 전무실 앞에 나타난 현 비서실장이 그녀를 발견하곤 표정을 굳힌다.

“하, 진짜네?”

“안녕하세요.”

“김인경, 이게 무슨 짓이야. 복직할 거면 먼저 인사과에 통보부터 해야지. 사람 놀라게 하는 재미라도 들렸어?”

삐딱하게 말한 비서실장이 다가와 그녀의 자릴 흘끔 살피더니 전무실을 가리켰다.

“이거, 전무님 빅 픽처야?”

“출산휴가에 이어 육아휴직 신청했고, 정확히 시일 맞춰 복직한 겁니다. 무슨 문제라도?”

“나는 못 들었다는 게 문제지. 애까지 딸려서 무슨 비서 일을 한다고 그래. 가능해? 임원 책가방 노릇 할 수 있겠냐고.”

그녀의 책상을 꾹 누르며 상체를 기울인 비서실장의 얼굴엔 밥그릇을 지키려는 절박함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상대할 가치를 못 느낀 그녀가 한숨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손가락 관절을 가볍게 푼 뒤, 비서실장을 올려다본다.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시죠. 업무 시작입니다.”

“뭐?”

“업무, 안 하세요?”

“하, 그래. 간다 가. 그리고 상사대우는 똑바로 해. 1년 전엔 동기였지만, 지금은 내가 네 상관이야.”

“네. 그러겠습니다, 실장님.”

쯧, 혀를 찬 뒤 돌아서려던 비서실장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그녀의 치마를 가리켰다.

“근데 무슨 치마가 그렇게 야해? 뱀 가죽 아니야? 비서 복장 규정 좀 지키지?”

소가죽 위에 뱀 무늬를 찍어 낸 거였지만, 문외한의 눈엔 다 똑같은 치마로 보일 터.

긴 다리를 꼬아 앉은 김 실장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게 바로 요즘 유행하는 보아뱀 패션이라고 하네요. 보아뱀, 괜찮지 않아요?”

***

[1분 뒤 퇴근으로 알고 있는데.]

이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채우는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서류를 모았다.

“맞긴 한데. 왜요? 설마, 데리러 오게요?”

[이미 와 있어요. 내려오면 됩니다.]

“정말?”

놀란 그녀가 블라인드를 벌려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정말 보도블록에 서서 전화통화 중인 최이겸이 보였다.

“집에서 보면 되지, 왜 왔어요. 알겠어요. 내려갈게요.”

전화를 끊은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타이어 펑크 사건 이후, 유난히 출퇴근에 신경 쓰는 그였다. 게다가 이겸과 같은 집에서 지낸 지 일주일. 오늘 아침 문득 쓰레기통에 버려진 빈 콘돔 박스를 세어보았다.

그는 성욕이 강한 편이지만 다른 면에선 되레 금욕적으로 굴었고, 차가워 보이지만 다정하고 상냥하다.

회사에서 보았던 이미지는 역시 만들어진 거였다.

“변호사님, 퇴근하세요?”

막 사무실을 나오는데 미령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채우는 싱긋 웃으며 미령의 자리로 다가갔다.

“네, 미령 씨도 퇴근해요.”

“아, 저는 오늘 신입 비서 면접을 봐야 해서요. 새 변호사님 오셨잖아요.”

“…혹시 강서준?”

“강서준이요? 아뇨, 그 이름 아니었어요. 아! 그때 그분? 그분은 사무장님이 이력서 파쇄기에 넣으시던데? 완전 마음에 안 든다는 뜻 같았어요.”

그럼 그렇지. 채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해랑을 나왔다.

느려터진 승강기를 타고 1층에 다다른 그녀는 정문 앞에 서 있는 이겸을 발견하곤 후다닥 뛰었다.

“저 왔어요.”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잘끈 깨물곤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에 돌아선 남자가 들여다보던 휴대 전화를 집어넣더니, 그녀의 가방을 대신 받아든다.

“오늘 어땠어요. 괴롭히는 사람 없었습니까?”

둘은 자연스럽게 정차된 그의 차에 올랐다.

“스토커를 고소하고 싶다는 의뢰인이 있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피해자가 느끼는 공포의 강도와 법원에서 규정하는 강도가 다른 거죠. 그래서 위로하느라 오전 시간을 다 보냈어요.”

“고생했어요.”

그는 그녀의 안전벨트까지 손수 채워준 뒤,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그러곤 그녀를 응시하며 가만히 무언가를 기다렸다.

채우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씩 웃으며 입을 맞췄다. 기다렸다는 듯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혀의 감촉. 그녀는 단 숨을 내쉬었다.

“최이겸 씨는 내가 그렇게 좋은가 봐요.”

“정채우 씨 생각보다 훨씬.”

“그래서 데리러 온 거예요? 이러다가 외근도 못 나가겠어요.”

“차를 바꿀 겁니다. 내가 골라주는 차로 타요.”

“…그럼 오늘 차 사러 가는 거예요?”

그녀의 놀란 눈이 커다래진다.

“그건 아니지만, 돈 지랄하러 가는 건 맞을걸요?”

“왜요?”

그를 빤히 응시하는 다갈색 눈동자에 어린 의문. 그의 손이 붉은 자국이 얼핏 남은 목덜미를 스치고 부드럽게 감쌌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최이겸과 함께 찾은 곳은 근처의 대형 백화점이었다. 이미 폐점을 한 건지, 드나드는 사람 없이 한적한 곳. 하지만 차량이 진입한 백화점 입구엔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 다섯이 두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채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쇼핑을 하러 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폐점 후 백화점을 찾아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다섯이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탓에 당혹스러웠다.

“어서 오십시오.”

정중한 인사에 채우는 선뜻 이겸의 손을 잡지 못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걸 본 그가 재차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요.”

기분이 이상했다. 최이겸의 지위에 대해 항상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이건 평범함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쇼핑을 문 닫은 백화점에서 해요?”

“가끔 중요고객들을 위해 백화점 쪽에서 배려를 해주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들 퇴근했을 텐데….”

“우린 매장을 찾는 게 아니니 걱정 마요. 필요한 건 이미 다 준비됐고, 채우 씨는 필요 없는 것만 추리면 됩니다.”

그 말이 채우는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쇼핑이란,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지고 입어보고, 마음이 동한 뒤에야 돈을 지불하는 행위 아니던가?

하지만 버텨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채우는 최이겸의 손을 잡았다.

“뭐 하려는 건지 알 거 같아요.”

그제야 두 사람의 걸음이 떼어진다. 사람들은 안도한 표정으로 둘을 맞았다.

아무도 없는 백화점은 마치 어릴 적 보았던 영화 속 한 장면을 닮았다.

“우리 둘 다 퇴근이 늦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음엔 주말이나 영업시간에 오죠.”

“네.”

채우는 사람들의 귀가 쫑긋 서 있는걸 보았다. 그들은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최근 패션 동향이라든지, 소비콘텐츠의 변화. VIP 고객들을 위한 프로그램 등을 쉼 없이 떠들었다.

2층 명품매장 사이에 마련된 호텔 로비 같은 곳을 지나자 라운지 글씨가 간결하게 박힌 곳이 나왔다. 자신을 퍼스널 쇼퍼 책임자라고 소개한 여자는 화려한 다과가 차려진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편하게 골라주시면 됩니다.”

이어진 광경은 평생의 진귀한 경험으로 남겨둘 거라 다짐해도 좋을 정도였다. 줄지어 들어오는 행거와 쇼핑백. 그리고 스무 명의 모델들이 마치 쇼를 하듯 길게 늘어섰다.

이건 최이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건 부담스러운데요. 모델까진 필요 없습니다. 준비한 물건들만 보죠.”

그의 반응에 책임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그럼 직접 착장이라도….”

“아뇨. 집에 가서 내가 입혀볼 겁니다. 식사도 해야 하니, 서두르죠.”

이겸이 자리에서 일어나 행거로 다가갔다. 그러곤 직접 옷걸이를 옆으로 밀어가며 물건을 확인했다.

채우는 웃음이 나려는 입가를 문지르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분명 선물을 해줄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낯간지러운 대우에 그도 당황한 듯했다.

이겸은 가진 걸 모두 내보여 바닥을 드러내는 부류가 아니다. 은근함을 더 즐기고 좋아하는 남자. 저와 비슷한 취향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을 재차 확인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의 옆으로 다가간 채우는 가격조차 나와 있지 않은 제품들을 보며 혀를 찼다. 변호사 월급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브랜드만 보더라도 그녀에겐 과한 것들이었다.

“여기 있는걸 다 달라고 하기 전에 필요 없는 것들 빼요. 단, 빼는 건 10개를 넘지 않아야 합니다.”

그의 통보에 직원들의 낯이 밝아졌다. 반면 채우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화려한 자수가 놓인 원피스를 꺼냈다.

그 원피스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이는 직원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한숨 쉰 직원이 그것을 행거 밖으로 뺐다.

“나 이거 다 못 사요. 물론, 최이겸 씨에게 이 정도 금액은 마트 장 보는 수준도 안 되겠지만, 나한테는 10년 치 연봉이 될 수도 있는 금액이거든요.”

“내가 마트 장 봐주는 셈 치면 되겠네요.”

“설마 이거로 수임료 퉁치려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뭐, 일부라고는 해두죠.”

“그래도 너무 과해요. 우리 둘의 재화 가치에 대해 좀 고민해봐야겠어요.”

그녀의 고집스러운 말투에 이겸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필요에 의한 소비라고 생각해요. 내가 필요해서 선물하는 겁니다.”

“…내 가치라는 게 걸친 물건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면, 인생 헛산 느낌이 들 거예요. 그리고 이런 걸 입고 갈 곳도 없고요.”

채우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옷들을 느리게 훑던 그가 상체를 기울여 속삭인다.

“그건 걱정 마요. 이건 정채우 씨의 가치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상대적 오류를 범하는 몇몇 사람에게서 당신을 방어하기 위한 거니까. 갑옷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남자의 슈트처럼.”

어떻게 변호사보다 말주변이 더 좋을 수 있지? 그의 설득력에 두 손을 든 그녀는 결국 고가로 보이는 것들을 추려냈다.

하나씩 제외할 때마다 티 나지 않게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표정. 이겸은 별다른 고민 없이 남은 제품 전체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직접 가져가는 건 단 두벌뿐.

“나머지는 매장에서 직접 댁까지 배송해드릴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배웅할 필요 없단 말에도 한사코 짐을 들고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온 이들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릴 숙였다. 낯간지럽고 부담스럽다. 그리고 오글거리기도 했다.

“저녁은 제가 살 거예요.”

채우는 뒷좌석에 실린 고급 쇼핑백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금액의 선물. 고작 저녁 한 끼로 값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뻔뻔하게 받기만 하고 입을 닦을 수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준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입술을 붙여왔다.

“좋아요. 성수동으로 가죠.”

***

어떻게 이렇게 제 취향을 정확하게 간파한 건지.

채우는 맵고 달고 짠 음식들을 보며 발끝에 힘을 주었다. 마음 같아선 물개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이런 실력으로 원 테이블 키친만 운영하다니. 이건 재능의 낭비요, 손해였다.

채우는 네모난 김밥을 보며 자그마한 턱을 쓰다듬었다.

“진짜 신기해요. 어떻게 김밥을 네모로 만들죠?”

“레시피가 있으니 만드는 거겠죠.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

“계란찜이 푸딩 같아요! 하, 완전…. 하트모양 어묵을 마트에 파나?”

“그것도 식재료 상에서….”

“설마, 게장은 직접 담그는 거 아니시겠죠?”

“외가가 서해안에서 유명한 게장 집을 한답니다. 간장을 받아온다던데.”

“어? 비 온다.”

말을 하는 족족 그녀는 꼭꼭 씹어 삼켜버렸다. 몇 번이나 말이 잘린 이겸이 차양 밖을 보며 실소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가 올 것처럼 보이지 않던 하늘에서 조금씩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채우는 차양 밖으로 손을 뻗어 빗물을 받았다. 1년 전 그날과 비슷한 날씨.

그땐 제 생일이었는데….

새삼스럽게 기억을 곱씹던 그녀는 불현듯 날짜를 떠올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어?”

“생일 축하해요.”

그녀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왜 기억하지 못한 걸까. 이 정신으로 무슨 일을 한다고.

‘어쩐지. 선물을 쥐여주지 못해 안달하더라니.’

그것도 모르고 가치니 뭐니 하며 그를 몰아붙인 게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마워요. 사실 까먹고 있었어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럴 것 같았어요.”

“알고 계셨어요?”

“모를 수 없죠.”

그녀는 네모난 김밥을 한입에 욱여넣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최이겸과 생일을 보내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복길이 얼굴 보러 오라고 닦달할 때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만….

“오늘 기분 좋아 보이던데. 내 생일이라서 기분 좋은 거였어요?”

“사실 긴장했습니다. 부담스럽다며 무조건 거절할까 봐.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아니라곤 못 하겠지만…. 너무 과하긴 해요.”

“전쟁터에 나가려면 무기를 제대로 갖춰야죠. 그런 의미로, 오늘 김 실장님이 복직했습니다.”

채우는 김 실장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무표정하며 항상 피곤해 보이지만, 일 처리는 누구보다 깔끔했던.

출산휴가를 쓴다 하지 않았나…?

“아이는요? 이렇게 빨리 복직하셔도 돼요? 아직 어릴 텐데.”

“김 실장 말로는, 고양이 한살이면 성묘라고 하던데요?”

“…고양이요?”

“예. 김 실장님, 싱글입니다.”

푸흡, 음식물과의 조우를 간신히 피한 그녀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곤 이겸을 마주 보았다. 양 뺨이 붉어진 그녀와 달리, 그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짓궂은 아이 같다.

이겸은 생맥주를 한 모금 삼키곤 말을 이었다.

“실은, 제 부탁을 받고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계셨던 겁니다. 이제 복직하셨으니, 적어도 일정 문제로 섹스 중에 통화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번엔 다른 이유로 목이 꽉 메었다.

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모르겠어요. 어려워.”

“어려울 거 없어요. 정채우 씨는 내 법률대리인이자, 내가 사랑하는 여자고…. 내 연인으로 이렇게, 지금처럼 있으면 되는 거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이겸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러웠던 남자의 눈빛엔 어느덧 진중함이 감돌았다.

너무해.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람 마음을 쥐고 흔들다니.

채우는 김밥을 집어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러곤 우물거리는 그를 보며 눈을 흘겼다.

“맛있죠?”

“맛있네요.”

“저도 이렇게 얼굴 보고 밥 먹는 거 너무 좋아요. 매일매일 이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되죠.”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에 붙은 밥알을 떼 주었다. 그러곤 점점 빗발이 거세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내일이 결혼식인데, 비가 오네요.”

“아…. 그러게요.”

“내일 식장에 들어가면 서프라이즈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채우 씨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뒤집어엎어도 되고 정영수의 뺨을 날려도 됩니다. 단, 무사히. 볼일 마치는 대로 나 있는 곳으로 와요.”

결국, 엄마는 정영수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다.

채우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사랑을, 가족을, 혈육을. 양심과 도덕성을 돈이 이겨버렸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자 재차 손을 뻗은 그가 부드러운 뺨을 어루만진다.

“괜찮을 겁니다.”

“안 괜찮을 거예요. 우리… 그거 없거든요.”

“그거라니?”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말뜻을 헤아리는 이겸의 얼굴 가까이 상체를 기울인다. 그러더니 테이블을 건너,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콘돔 말인데요…. 인터넷으로 대량 주문해 버릴까요?”

-내가 준비한 선물, 꼭 가져가요.

채우는 차 뒷좌석에 놓인 커다란 꽃다발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얀 세레네와 백합, 백장미, 라넌큘러스 등. 온갖 하얀 꽃만 모아 묶은 꽃다발은 마치 순백의 신부를 닮았다.

어떤 자리인지 뻔히 알면서 대형 부케를 준비한 그.

‘짓궂기는.’

어젯밤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오전이 되자 더욱 거세졌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은 그녀는 세라티오로 차를 몰았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남들과는 사뭇 달랐다. 세라티오 꼭대기,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개방해 편안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예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예식임이 분명했다.

여진의 나이 고작 마흔여덟에 서른 넘은 딸이 있다면 누가 믿을까. 다소 늦은 초혼이라 해도 사람들은 믿을 터였다. 그만큼 여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더불어 정영수는 고작해야 40대 초반. 한창일 나이였다.

세라티오에 도착한 채우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뒤, 꽃다발을 꺼내 들었다. 비를 맞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어 우울감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걸어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다. 당당히 걸음을 내디딘 채우는 들고 온 청첩장을 프런트 직원에게 내밀었다. 당황한 직원이 청첩장의 바코드를 확인한 뒤, 전용 승강기로 안내했다.

“혹, 타월 필요하십니까. 고객님?”

“아뇨, 괜찮아요.”

“많이 젖으셨습니다.”

“금방 돌아갈 거라서요.”

싱긋 웃으며 거절하는 채우에 직원은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마자 서서히 굳어지는 표정. 채우는 금속 문에 비친 제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겸이 직접 고른 심플한 원피스와 다소 화려한 액세서리. 날이 날이니만큼 화장에 공들였지만, 파랗게 질린 낯빛은 감춰지지 않았다.

채우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기를, 분해 주저앉지 않길 바랐다.

비가 와서 다행이다. 끔찍하게 날씨가 맑았다면, 그만큼 더 비참했을 테니까.

꼭대기 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계음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룸과 승강기가 연결된 구조인 꼭대기 층.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기는 이들이었다.

채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엔 이른 시각. 식전주를 즐기듯 와인이나 샴페인 잔을 든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하곤 표정을 바꾼다.

누가 봐도 여진과 닮은 이유를 알아채곤 머쓱하게 웃었다.

여진은 정영수와 함께 창가에 있었다. 표정이 썩 밝지는 않지만, 하객들을 맞고 사진을 찍으며 나름의 노력 중인 엄마.

채우는 똑바로 걸어 여진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꽃다발에 가려져 있던 그녀를 알아본 여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매가 드러나는 순백의 이브닝드레스. 머리에 꽂은 붉은 꽃이 엄마를 중국 여배우처럼 보이게 했다.

“채우야.”

다가온 여진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채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채우는 꽃다발을 건네며 권태로운 표정으로 주위를 훑었다.

“이왕 식 올리는 거 제대로 하지, 이게 뭐예요? 꼭꼭 숨어서.”

“이 나이에 무슨. 안 올 줄 알았는데…. 와주니까 좋네. 응?”

“아무리 싫어도 축하는 해주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요. 축하해요.”

여진은 채우에게 받은 꽃다발을 내려놓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객 100여 명이 들어찬 스위트룸. 재밌게도 이곳엔 한물간 연예인이나 국정에서 손을 뗀 정치인, 한때 이름 좀 날리던 건달, 혹은 사업가 등이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곤 서 있었다.

“영수 씨, 채우 왔어.”

채우는 그들 사이에서 저를 보고 서 있는 정영수를 발견했다. 잔뜩 멋을 부린 그가 여진과 함께인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야, 둘이 서 있으니 누가 신부인지 모르겠네.”

그에 여진의 눈썹이 꿈틀했으나, 정영수는 오로지 채우만 보며 서 있었다.

“직접 집까지 찾아와 청첩장 주고 가셨는데, 와야죠.”

채우는 최대한 담담히 말하며 어깨를 폈다.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요란한 경적이 울리는 것처럼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이렇게 와주니까 얼마나 좋아. 이리 와봐.”

그녀는 정영수가 내미는 손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제 몸에 닿으려는 그의 손을 날카롭게 쳐냈다.

꽤 시끌벅적했던 행사장 안에 감도는 정적. 정영수는 굳었고, 여진은 약에 취한 사람처럼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채우는 그를 쳐낸 자신의 손을 보다가 서서히 숨을 골랐다.

“어딜 만져.”

“정채우. 너, 그게 무슨….”

“굳이 식을 올리신다니 도리상 꽃을 샀고, 두 분이 백년해로하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않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온 거예요.”

“야.”

냉정한 그녀의 말에 손톱자국이 남은 손등을 감싼 정영수가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선다. 채우는 그를 노려보며 반대편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몰카 보면서 딸 치니까 좋았어요? 왜…. 정상적으론 좆이 안 서나 봐?”

다가오던 정영수가 우뚝 멈춘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더니 눈에 핏발이 섰다.

“너, 뭐라는 거야!”

정영수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주위 시선을 의식한 듯 차마 때리진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깡패 새끼가 사업가의 가면을 쓰더니, 다행히 수치심이 뭔지 배웠나 보다.

“그럼 대체 왜 내 몰카를 찍은 건데. 추행에 유사강간으론 성에 안 차서? 내 몸이 그렇게 보고 싶었어?”

채우는 그대로 여진을 향해 돌아섰다.

“미안하지만, 신혼여행은 혼자 가야겠어요. 엄마 남편, 구치소에 들어갈지도 모르거든.”

“채우야, 너 그게 무슨….”

“나는 이미 몇 번이나 설명했고, 설득하려 했어요. 듣지 않고 귀 막은 건 엄마야. 그리고… 나는 이제 엄마 없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강기가 열리며 덩치 큰 남자 네 명이 들어왔다. 그들을 발견한 정영수의 눈가가 떨린다.

알아본 게 분명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다가와 채우의 뒤에 선 사람들을.

“결혼 축하합니다, 정 사장님. 아, 이거 날이 너무 좋아서 죄책감 드는데요?”

이 형사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 형사가 내민 손을 위아래로 훑은 정영수의 이마에 핏대가 솟는다.

“청첩장 보낸 적 없는데, 그쪽한테는.”

깡패 새끼 주제에 하객들의 시선을 의식한 정영수가 분을 삭이며 말했다. 그러자 내밀었던 손으로 머릴 긁적이며 찡그리듯 웃는 이 형사.

“이게…. 청첩장이 없어도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꽤 있더라고요. 더 괜찮은 걸 들고 온다거나.”

“뭐?”

“근데 결혼식 끝난 겁니까? 뭐, 뷔페 같은 거 없어요? 우리 배고픈데. 아침부터 약쟁이 놈들하고 한바탕 하고 왔더니.”

능청스럽게 배를 문지른 이 형사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낯익은 분들 많으시네. 아래 있는 애들도 다 올라오라고 해야 할 판인데요?”

그제야 사태 파악을 끝낸 정영수가 주머니 안에 손을 꽂아 넣곤 얼굴 근육을 왕창 구겼다.

“수색영장이나 체포영장, 구속영장 같은 거 없으면 꺼져. 경찰이라고 봐주는 거 없으니까.”

“에이, 아까 말했잖습니까. 청첩장보다 더 괜찮은 거 들고 왔다고.”

이 형사가 허공에 손짓하자, 찰칵 소릴 내며 모든 비상구가 닫혔다. 갑작스러운 고립에 하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이미 발을 빼기 위해 어딘가로 급히 연락하는 사람도 보였다.

순간 이 형사가 정영수의 눈앞에 종이 한 장을 펄럭이더니, 천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정보통신법 위반! 불법 촬영물 제작 및 유통. 특수 강간 폭행 및 가택침입죄를 물어, 도주의 우려가 있는 정영수를 비롯한 관계자 전원을 체포합니다.”

긴급체포영장. 그게 바로 최이겸이 말한 서프라이즈였다.

채우는 씁쓸한 얼굴로 정영수에게 수갑이 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발악할 법도 하건만, 순순히 수갑을 찬 정영수가 코웃음 친다. 마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후회할 거란 듯이.

그가 이 형사에게 뒷덜미를 잡힌 채, 채우를 죽일 듯 노려보며 씹듯이 말했다.

“네 뒤에 누가 있는지 알 것 같다만. 그거 잘못 잡은 줄이야, 정채우. 조만간 다시 보지. 그땐 입장이 바뀔 거 같은데.”

역시, 대가리와 몸통은 따로 있는 걸까?

그녀는 지그시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변호사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채우는 정영수의 행거치프를 빼버린 뒤, 그 안에 자신의 명함을 쑤셔 박았다.

이어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진에게 다가간 그녀가 말했다.

“엄마도 마찬가지예요. 변호사 필요하면 연락해주시고. 필요 없으시면… 사식이나 넣어주세요.”

“채, 채우야!”

여진은 돌아서는 채우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승강기에 올랐다.

앞을 지키던 형사와 눈인사를 나누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경찰들이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한 뒤, 몇 명을 추려 수갑을 채웠다. 그들은 정영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채우는 여진을 연민하지 않기로 했다.

서서히 닫혀가는 문 너머로 여진에게 신원 확인을 요청하는 경찰의 모습이 보인다. 어쩌면 지랄 맞게 운 없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엄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남자는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도망쳤고, 두 번째 남자는 결혼할 생각 없이 죽어버렸으며, 세 번째 남자는 결혼식 당일에 체포되어 버렸으니까.

승강기 문이 완전히 닫히자 눈앞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뾰족한 턱 끝에 매달린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결국, 채우는 로비에 다다를 때까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몸을 웅크렸다.

***

“참 좋으신 분 같아요.”

여자의 얼굴엔 스스로의 커리어에 자신만만한 사람이 갖는 특유의 표정이 깃들어있었다.

“누가요.”

이겸은 쓴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되물었다.

“최 회장님이요. 자식보다 소중한 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다 키워놨어도 영원히 본인에겐 어린애 같다고.”

“아버지가 벌써 노망이 나셨나 봅니다. 그런 소릴 다 하시고.”

진심이었지만,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자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어쨌든 능력도 없는데 허세만 가득한 그런 부류였으면 거절했을 거예요. 들었습니다. 엘릭이 실은 최 전무님 작품이라고요.”

“잘못 아셨네요. 제 형님 작품입니다.”

이겸은 건조하고 권태로운 표정으로 다리를 꼬며 등받이에 기댔다. 그의 시선은 여자의 얼굴 언저리를 맴돌다가 멀리, 로비 입구에 고정되었다.

비가 꽤 많이 내리고 있었다. 정채우의 성격상 우산을 썼을 리 없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진다.

이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있다는 걸 눈치챈 여자가 테이블을 똑똑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최이겸 전무님.”

“예.”

하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대답하는 그.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자리인데, 예의를 지켜주세요.”

아주 오랜만에 어처구니없는 소릴 들었다.

이겸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다가 여자와 눈을 맞췄다.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드리려 했는데,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여자가 따로 있습니다. 그쪽도 잔소리가 싫어서 적당히 비위 맞춰주는 거 아니었습니까? 설마, 저랑 결혼할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네요.”

그의 말에 여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실소한 여자는 양손을 움켜쥐며 애써 미소지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자리에 나오지 말았어야죠.”

“실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그리고 왼손 약지에 아직 반지 자국이 있던데. 꽤 오래 반지를 끼고 계셨던 거라면 평생 안 없어질 겁니다, 그거.”

놀란 여자가 슬그머니 자신의 왼손을 가렸다. 그러곤 자존심이 상한 듯 핸드백을 챙겨 일어났다.

“추측이고 억측입니다. 아버지껜 제가 말씀드리죠. 그리고 거절을 하실 거였으면, 자리에 앉기 전. 선수 치셨어야 해요. 그게 매너라고요.”

여자가 쏟아내는 말을 한 귀로 흘린 그가 일어났다. 이겸은 여자에게 잘 가라는 손짓을 해 보인 뒤, 자릴 벗어났다.

왜 못 알아 본거지?

정채우는 대체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걸까.

이겸은 조금 전 우연히 보게 된 뒷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빗물에 흠뻑 젖은 채우는 직원에게 타월을 받아 창가 자리에 앉았다.

게다가 피아노와 가장 가까운 좌석에 착석한 그녀의 앞엔 생크림을 잔뜩 올린 음료가 놓여있었다.

타월로 젖은 머릴 꾹꾹 누르던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든다. 이어 그를 발견하곤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체포했습니다. 조사 시작했으니, 며칠 내로 결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형사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이겸은 곧장 채우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핥은 그녀가 막 밖으로 나가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선은 재밌었어요?”

“시간 때우기 좋을 줄 알았는데. 영 지루했습니다.”

“저분, 낯이 익은데….”

“정채우 씨.”

혼잣말을 중얼거린 채우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평소와 확연히 다른 그녀.

권태와 노곤함, 상실 따위를 가득 담은 눈동자를 마주한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늘… 힘들었습니까?”

“네. 기분이 별로예요.”

일어난 그가 그녀의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겸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춘 뒤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해줄까요.”

뭐든 해주고 싶다. 아군 하나 없는 전쟁터에 혼자 보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자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 어루만지는 그녀. 간질거리는 감촉에 긴장하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이 피아노, 쳐도 돼요?”

“채우 씨가요?”

“아뇨. 이겸 씨가요.”

그는 입술만 움직여 ‘내가?’라고 되물었다.

“불가능한가요? 호텔이라 좀 그런가…?”

비에 젖은 어깨가 유난히 작아 보인다. 채우는 좋아하는 달콤한 음료를 앞에 두고도 좀처럼 웃어주지 않았다.

“기다려요.”

이겸은 라운지 책임자를 불렀다. 한 곡 연주해도 되겠냐고 묻자,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여자는 이어 내민 명함을 보곤 기꺼이 피아노를 내어주었다.

검고 흰 건반을 보자 가슴이 울렁거린다. 집에 있는 죽어버린 피아노가 아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근사한 소릴 내었던 살아있는 피아노가 앞에 있다.

새틴에서 연주를 그만둔 이후 처음.

순백의 스타인웨이를 응시하던 그는 한 번 더 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감기는 그녀의 눈.

잠시 고민하던 이겸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건반을 눌렀다. 공간을 제압하는 묵직한 선율에 잔소름이 돋는다.

음계와 선율이 교차되고 유려하게 이어질수록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들더니, 결국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이다. 이토록 자신의 연주곡이 길게 느껴진 적은. 집중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이겸은 아주 오랜만에 연주를 완성했다.

의자를 밀어내 일어나는 순간 쏟아진 박수갈채. 누군가는 최이겸을 알아보았고, 누군가는 알아내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자리로 돌아온 이겸은 채우의 어깨를 잡아 저를 보게 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맞춘 그녀의 입술이 잇새에 물려있다.

“죄책감 가질 거 없어요. 복잡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이대로 받아들이면 돼요.”

그는 채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올라가죠. 서프라이즈 하러.”

그녀를 일으켜 세운 그가 주머니에 든 카드를 꺼내 손에 쥐여주었다.

“진짜는 지금부터니까.”

***

수십 장의 사진을 한 장씩 들여다보던 최호의 눈썹이 꿈틀댔다. 모두 이겸의 아파트로 들어서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여자가 있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낯설지 않다는 게 문제다.

“누구라고?”

독한 위스키 한 모금을 삼킨 최호가 물었다.

“1년 전까지 법무실에서 근무했던 정채우 입니다. 지금은 해랑의 변호사로 재직 중이고 새틴, 신여진의 딸이라고 합니다.”

“딸? 신여진한테 이렇게 큰 딸이 있었어?”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못마땅하다만, 술집 마담의 딸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관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여자를 이겸이 진지하게 생각할 리 없다.

물론 1년 전 뜯어놓았던 여자를 다시 만난다는 점이 조금 거슬리지만, 그래 봤자 술집 마담의 딸 아니던가?

“그런데 이건 어디야. 호텔이야?”

“오늘 찍은 사진입니다. 엘릭의 송서영 이사님과 만나신 뒤, 여성분과 룸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허, 두 집 살림을 하시겠다?”

윤씨가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은 게 벌써 20년이다. 최호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윤씨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설마… 둘이 진지하다고 생각하나?”

“둘째 도련님이 여자를 만나시는 건 처음이라….”

“지금껏 설마 연애도 안 해보고 살았을까.”

“제가 알기론…. 어쨌든 신경 써서 지켜보겠습니다.”

“그래. 돈까지 받아놓고 다시 들러붙은 거 보면 보통내기는 아닐 게야. 그건 그렇고. 정영수가 체포됐다던데.”

그에 사진을 챙긴 윤씨가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긴급체포는 48시간밖에 구금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변호사를 선임하면, 금방 혐의없음으로 풀려날 거고요.”

“죄목이 뭐야.”

“불법 음란사이트 운영입니다. 강간미수에 영상물제작 등 여러 가지가 있긴 한데…. 곧장 구속영장 실질심사에 들어간 걸 보면, 표적 수사인 것 같습니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은 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어딘가를 지긋이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정영수가 죽든 살든 상관하지 말고, 검찰에 영상 넘어가기 전에 회수해. 차라리 잘됐어. 그 영상 원본만 우리 쪽에 들어오면 깡패 새끼 비위 맞춰줄 필요도 없고.”

“사람을 심어두겠습니다.”

“담당 형사랑 검사, 판사까지. 명단 갖고 와.”

“예.”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윤씨가 나간 뒤, 최호는 서재를 나와 거실을 가로질렀다. 거대한 성 같은 저택에 살아 숨 쉬는 생명체는 저 혼자뿐. 한때는 적적했지만, 이젠 이조차도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는 정원과 연결된 창문을 열었다. 불어든 바람에 커튼이 크게 들썩였다. 그러는 사이 따뜻한 차를 내어온 도우미가 블랭킷을 가져와 내민다.

“감기 걸리세요, 회장님.”

대략 40대 초반의 여자. 가사도우미들을 총괄하는 실장 박씨가 새로 들인 야간도우미였다. 얼굴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인데, 적당히 살집 있는 체형에 수더분한 이미지가 요즘 젊은 사람답지 않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름이 뭐요?”

“아… 네. 조영주예요.”

조영주라.

최호의 두 눈이 가늘게 뜨이더니, 이어 부드럽게 휘었다.

“시간 괜찮으면 나랑 담소나 나누지. 잠이 안 올 거 같아서.”

“예?”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꽤나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최호는 짐짓 다정하게 웃으며 침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게. 마실 거 들고.”

***

생각보다 꽤 많은 비를 맞은 건지, 색이 연한 원피스 밖으로 속옷의 레이스가 고스란히 비쳤다.

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건만, 막상 벗기기 위해 세우고 나니 그녀의 차림에 부아가 끓어올랐다.

“이거… 이겸 씨가 고른 옷이거든요?”

“압니다.”

“나 젖게 하는 거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그건 당연히 내 앞에서만. 고리타분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봐도 이렇게 예쁜데 남들 눈엔 얼마나 예쁠지. 좀 거슬리긴 하네요.”

그제야 봄꽃 같은 웃음을 터트린 그녀가 젖은 머릴 쓸어넘기며 돌아섰다.

“지퍼부터 내려주세요.”

“지금 벗으면 오늘 내내 못 입을 겁니다.”

“그럼… 그냥 벗고 있죠, 뭐.”

“음…. 역시, 나보다 더 야한 거 같아요. 채우 씨가.”

피식 웃은 이겸은 천천히 지퍼를 내렸다. 그 틈으로 드러난 차가운 등에 입 맞추자 그녀의 어깨가 살짝 펴진다.

그는 애가 타는 마음으로 흰 피부에 입술을 눌렀다. 몸에 들러붙어 있던 원피스가 아래로 떨어지자, 여성용 드로어즈도 발목까지 끌어내렸다.

곧장 섹스하려 한 건 아니었다. 나름 이벤트를 준비했고, 그녀와 함께 꼭대기 층 스파 풀을 찾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속옷 차림으로 서 있는 채우를 보는 순간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에 입 맞추며 발가벗긴 그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더니,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이리 와 봐요.”

그에 쪼르르 다가간 그녀가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이겸은 채우를 돌려 앉혀 다리를 벌리게 했다. 그녀의 등과 맞닿은 그의 가슴이 두근두근, 과격하게 요동친다.

이겸은 서서히 뜨거워지는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오늘 나 선보는 거 보면서 무슨 생각 했습니까? 설마,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요?”

한 손에 가득 차는 젖가슴을 움켜쥐어 위로 쓸어올리자 그녀의 뒷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는다.

“그건 아니고…. 혹시라도 여성분이 물을 뿌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설마 뜨거운 걸 뿌리진 않겠지? 이 정도.”

“질투는요.”

“…질투해야 하는 거였어요?”

이런.

정말 몰랐다는 듯 고개를 치켜드는 그녀가 얄미워 귓불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자 키득대며 어깨를 웅크리는 그녀.

이겸은 그녀의 어깨에 입 맞추며 매끄러운 피부를 어루만졌다. 이어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손을 내린 그는 보들보들한 거웃을 걷어 젖어 들기 시작한 속살을 문질렀다.

유리창에 비치는 선정적인 실루엣. 그의 허벅지에 앉아서 다리를 벌린 그녀는 흥분을 참아내듯 몸을 비틀었다.

이겸은 한 손으로 도톰한 음핵을 비비고, 반대편 손으론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여린 몸이 들썩인다. 나른한 상태에서 찾아온 쾌감에 그녀의 몸이 흐물거렸다.

당장 파고들어 뜨거움을 만끽하고 싶기도, 제 손길만으로 절정에 달하는 그녀가 보고 싶기도 했다.

“실은 옥상에 있는 스파로 데려가려 했는데…. 생각보다 야해서, 박고 싶어졌어요.”

그의 속삭임에 그녀가 앓는 소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겸은 말랑말랑한 살점을 계속해서 비비다 젖은 구멍 안으로 깊게 밀어 넣었다.

손가락에 착 달라붙는 내벽의 경련이 느껴진다.

“울었습니까?”

그는 미끄러운 액을 퍼내듯 손을 움직였다. 여린 피부에 상처 내고 싶지 않아 조심하다 보니, 되레 그녀를 더욱 애타게 했나 보다. 부드러운 엉덩이가 허벅지 위에 비벼졌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게 하더니, 팔을 뒤로 뻗어 목덜미를 감았다.

정말 정신이 나갈 만큼 야한 여자.

“응, 울었어요.”

“나만 울리고 싶었는데.”

“울려봐요.”

“배 안 고픕니까?”

“조금 있으면… 꽉 찰 텐데요, 뭐.”

그의 눈이 서서히 뜨인다. 밑돌던 열기가 삽시간에 차올라 이성을 녹였다.

“허기부터 채워요, 그럼.”

울컥대며 정액이 쏟아져나왔다. 채우는 입안을 채운 정액을 뱉어냈다.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에 젖은 타월을 건네준 그가, 곧장 부드러워진 질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삼키지 말고 뱉어요.”

두 번째 정사였다. 첫 번째는 지나치게 흥분해 삽입하고 얼마 흔들지 못한 채 사정했고, 두 번째는 그녀의 입안에 쏟아냈다.

그러니 이번이 두 번째라고 치잔다. 이겸다웠다.

그는 가차 없이 허리를 쳐올렸다. 덩달아 그녀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너무 잦은 오르가슴을 느껴서인지, 이젠 그가 박아대기만 해도 질금질금 물이 샜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틀자, 한쪽 다리를 잡아 올린 그가 더욱 깊숙이 몸을 묻는다. 그러곤 상체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채우는 의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키스를 받아들이고 다리를 벌렸다.

자극이 더해질수록 정신이 또렷해지는 상황.

엄마는 정영수와 함께 구속됐을까?

혹, 강압 조사를 받는 건 아닐까? 스트레스에 약해 쓰러질지도 모르는데….

48시간 안에 풀려난 정영수가 엄마에게 화풀이할지도.

“다른 생각 하네.”

몸을 움직이던 이겸이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빈틈없이 꽉 채워진 아래를 내려다본 채우는 피식 웃었다.

“딴생각 들게 하면 안 되죠.”

“아아, 내 잘못이다?”

완전히 빠져나갔던 그가 뒤척이려는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젖은 비부 안으로 다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압박감에도 그녀는 부러 여유롭게 굴었다.

“힘 빼요.”

조절이 가능하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겠지.

그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혀를 찬 그가 양손을 잡아 누르며 허리를 움직였다.

“아…!”

채우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들었다. 그는 너무 컸다. 모든 게 그녀를 압도했다. 채우는 치미는 고양감을 음미하며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단단한 가슴팍을 어루만지다, 동그란 젖꼭지를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자 메마른 입술을 깨문 남자가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물며 씩 웃었다.

쾌감이란 칼날에 전신이 난자당하는 기분이다. 결국, 그는 그녀가 여유를 버리고 애원할 때까지 추삽질을 이어나갔다.

짓눌린 피부에서 배어나는 땀. 버석하게 말라 있던 침대 시트가 체액으로 축축해지고, 색이 짙은 카펫 위엔 허물처럼 벗겨진 옷가지가 굴러다녔다.

머릿속이 텅 빌 때까지 박아넣던 그가 탁한 신음을 흘린다. 그녀의 몸이 푹 가라앉는가 싶더니, 남자의 몸이 경직됐다. 사정을 할 때의 그는 지그시 시선을 내리까는 버릇이 있었다.

“젠장….”

“하아….”

채우는 힘없는 손을 뻗어 이겸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따뜻한 떨림에 억눌러왔던 울음이 샜다.

***

“걱정하지 마요. 어차피 타깃은 정영수와 그가 관리하는 불법 플랫폼들이니까.”

독한 척을 하지만, 역시 착해빠진 여자다. 제 어미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그녀는 신여진을 걱정했다.

“채우 씨, 나 좀 봐요.”

이겸은 돌아본 그녀의 입에 아이스크림 한 스푼을 떠 넣어주었다. 그러자 과자를 오물거리던 그녀가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녹여 먹으며 어깨를 부르르 떤다.

“으, 달아.”

둘은 호텔 옥상에 마련된 스파 풀을 찾았다. 몇몇 커플이 둥그스름한 공간을 차지한 채 와인, 혹은 디저트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곳.

비 내리는 밤, 거대한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거, 알아들었어요?”

“안 해요. 안 하려고요. 나는 분명 경고했어요. 엄마 사정은 알지만…. 이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둥둥 떠다니는 플로팅 트레이엔 그녀가 좋아하는 단것들이 가득했다. 반면 그는 올리브 몇 알과 스카치 한잔으로 만족했다.

키스를 할 때마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맛이 넘어와 다른 안주는 필요 없었다. 자꾸만 입 맞추는 제가 귀찮은지, 트레이를 끌고 스파 반대편 구석까지 가버린 그녀.

이겸은 그래 봤자 손 뻗으면 닿을 거리로 도망친 채우를 보며 웃어버렸다.

“역시, 숨바꼭질엔 소질 없는 거 같네요.”

“제가 워낙 눈에 띄잖아요.”

“인정합니다.”

그는 얼음이 든 스카치 잔을 가볍게 흔들어 한 모금 삼켰다. 그러곤 멀찍이 떨어진 그녀를 응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정영수가 운영한 사이트에 올라온 성인물 중, 유난히 세라티오 객실에서 촬영된듯한 영상이 많았습니다. 꽤 오래 해 먹은 탓에 피해자가 신고도 했고요.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진 않았다고 하네요.”

“…뒤에 뭐가 있네요.”

“그 정도로 한곳에서 오래 해 먹었으면 유착이 생길 법하죠. 분명 이번에도 빠져나올 겁니다. 주어진 48시간 동안 내 사람들이 사이트의 서버를 압수하고, 관련 자료를 모두 빼낼 예정이에요. 불법과 합법을 모두 동원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그녀의 입술이 달싹인다. 이겸은 스카치를 한 모금 더 삼키며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채우 씨 집에 설치되었던 영상장치는 저장형이 아닌 송출형이더군요. 걱정 마십시오. 저장형이었다면 문제가 되지만, 송출형이니 자료가 남아있진 않을 겁니다. 단, 따로 실시간 녹화를 했을지 모르기에 압수하려는 겁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물속으로 깊게 들어갔다가 스르륵 빠져나왔다. 그러곤 젖은 얼굴을 쓸어 올리며 피식 웃는다.

“내가 피해자가 될 줄은 몰랐어요. 되어보니 알겠더라고요…. 내가 변호해왔던 그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어떤 절망을 느꼈을지.”

조용히 읊조리는 채우를 응시하던 그가 잔을 든 채 손을 까딱였다.

“와 봐요.”

그에 그녀가 물살을 가르고 길게 헤엄쳐 다가왔다. 그의 허벅지를 짚어 몸을 붙이곤 입술을 맞대온다.

“왜 불러요?”

“또… 설 거 같은데.”

얇은 수영복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피부가 예민해졌다. 그의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고 핥던 그녀가 수영복 안으로 손을 넣어 성기를 움켜쥘 때였다.

“고객님.”

키 낮은 스파 벽 뒤에서 들려온 직원의 목소리. 놀란 채우가 떨어지려 했지만, 이겸이 더 빨랐다. 그녀의 허리춤을 끌어안은 그는 고개만 돌려 대꾸했다.

“무슨 일입니까.”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이미 약속하셨다고.”

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그가 짜증스럽게 젖은 머릴 쓸어넘겼다.

“금방 간다고 전해주시고, 이 분을 방까지 모셔다드리십시오.”

“네.”

직원이 물러간 뒤에도 이겸은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강하게 붙들었다.

“이대론 못 나갑니다. 흥분시켰으면, 싸게 해줘요.”

음란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조금의 동요조차 없는 남자.

직원이 사라진 자리와 이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채우가 울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린다.

발기한 성기가 수영복을 반쯤 들어 올려 귀두가 드러난 상황. 뜨거운 물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안겨 온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입으로는 할 자신 없는데…. 몰래, 넣을까요?”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그녀.

이겸은 그대로 소리 내 웃어버렸다. 큭큭거리며 웃어대던 그가 눈물이 잔뜩 고인 얼굴로 그녀의 콧등을 콱 깨물었다. 그러곤 양손으로 엉덩이를 벌려 수영복을 젖힌다.

“조심해요. 이거 공연 음란죄 성립되거든, 변호사님.”

***

물 묻은 몸에 가운을 걸친 이겸이 향한 곳은 탑층에 마련된 개인 접견실이었다.

그가 복도에 나타난 순간부터 긴장감이 맴돌았다. 입구를 지키는 낯익은 얼굴들이 이겸을 보곤 깊게 고개 숙인다. 지킬 게 많은 건지, 잃을 게 많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겁이 많은 건지.

최이서는 그날 이후 개인 경호원을 늘렸고, 결코 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고풍스러운 대리석으로 마감된 실내. 마호가니 원목으로 제작된 문을 열자, 파랗게 질린 채 앉아있던 최이서가 벌떡 일어난다.

최이서에게선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달려온 그가 이겸의 팔을 움켜쥐곤 대뜸 소리친다.

“정영수, 네 작품이지. 어?”

“소문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겸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에 안절부절못하며 제자리걸음을 하던 최이서가 주먹으로 벽을 쳤다.

“대체 왜! 지금 유족들이 재수사 요청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 굳이 왜 세라티오를 건드려!”

“뭐가 겁나는데? 형이 죽인 거 아니잖아. 그런데 겁낼 게 뭐가 있다고.”

“안 죽였어! 안 죽였는데…! 그래도 같이 있었잖아.”

“왜. 특수 강간죄 성립될까 봐?”

눈을 가늘게 뜬 이겸은 미리 준비된 음료를 들어 살폈다. 의심하는 태도에 최이서가 부들부들 떨더니, 그것을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약 안 탔다, 이 개새끼야.”

“내가 개새끼면, 아버진 개구나. 형도 개자식이고.”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지금 뭘 들쑤시고 있는지 몰라? 최이겸, 너 정말 갑자기 왜 이래. 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영상!”

버럭 소리친 최이서가 힘이 풀린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겸은 양쪽 팔꿈치로 무릎을 누르며 상체를 기울였다.

“뭐라고?”

숨을 가쁘게 들이켠 최이서가 주먹을 말아 쥐더니 말했다.

“순진한 척하지 마, 최이겸. 그래, 씨발…. 좋아서 붙어먹었어. 좆 달린 사내새끼를 내가 좋아했다고. 좋아서 박고 박히고, 씨발. 좆 빠지게 붙어먹었는데! 영상이 남았더라.”

이겸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 더는 놀랄 일 따윈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이건 정말이지….

“진짜 개새끼였네. 그래서…. 죽을 만큼?”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냥 잤어. 잘 자라고 키스까지 하고 잤다고.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까… 죽어있던 거지.”

“정영수가 영상으로 협박했나?”

“그래.”

“그래서 그날 이후, 새틴에 드나들지 않은 거고.”

“어!”

“정채우는.”

“신여진 딸이야. 너한테 빌붙어서 무슨 짓을…!”

퍽, 소릴 내며 벽으로 날아간 술잔이 박살 났다. 최이서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유리 조각이 뒹구는 바닥으로 향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분노는 여지없이 끓어올랐다.

이겸은 가운을 여미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거의 울 듯한 표정의 최이서가 털썩 무릎을 꿇곤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나 좀 살려주라. 어? 재심은 없어야 해. 그 영상…! 경찰 손에 들어가면, 끝이야.”

“자초한 일이야. 처음부터 속이지 말았어야지. 아버지도 알고 계시나? 그 영상.”

“정영수. 그 개자식이 날 찾아온 게 아니라, 곧장 아버지를 찾아갔어.”

최이서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이겸은 최이서를 뿌리치곤 테이블에 놓여있던 담배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불붙이지 않은 채, 있는 힘껏 구겨 쓰레기통 안으로 던졌다.

이겸의 검은 눈동자가 비에 젖은 도심을 담는다.

최이서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그날 이후, 제대로 된 잠을 청하지 못해 수면제에 의존하는 최이서.

“그… 그 유가족 중 한 명이 변호사라는 거 알아? 난 알고 있었어. 이시현한테 들었거든. 똑똑한 동생이 있는데, 그놈 하나만 믿고 산다고. 둘이 엄청 애틋한 거 같았는데…. 그 동생이란 놈이 이번 일 터트리려는 거야.”

이미 아는 이야기.

이겸이 반응하지 않자, 고개를 든 최이서가 죽을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시윤, 네가 파고든 김동희 사건의 변호사…. 그 자식이라고. 이래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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