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 봄
경기도 일산의 고양지원에 들러 소송 업무를 본 뒤, 서초 법원으로 넘어와 2심 판결을 기다렸다.
법정 드라마에 나오는 ‘변호사가 반론하고 판사와 배심원이 고심하는’ 그런 소송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대부분 심리 날짜를 정한 후, 판사가 한 번에 10건에서 30건 정도의 사건을 집행한다. 그럼 변호사들은 법정에 줄지어 들어가 대기하다가 호명되는 순서대로 앞으로 나가서 짧은 변론을 하게 된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판사의 성향과 맞는 사건의 경우 브리핑을 준비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한 건당 15분 안에 심리가 끝난다.
게다가 판결이 곧장 나는 경우는 상고한 사건, 혹은 검찰이 끼어있는 사건들뿐. 민사의 경우는 돌고 도는 회전목마에 오른 기분이 들기도 했다.
끝나지 않는 전쟁이자 심리전. 누가 먼저 지치는지가 관건인 치킨게임이다.
그렇기에 억울한 사람은 계속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게 민사였다. 재밌게도 법원은 잘잘못을 꼬집어주지 않았다. 분쟁의 중재, 권고, 누구의 죄가 더 무거운지를 결정해 줄 뿐.
오늘도 상대 쪽 변호사와 악수한 뒤 건넨 말은 ‘의뢰인은 합의할 마음이 없으신가요?’ 였다.
질리도록 듣고, 하게 되는 말.
“법무법인 해랑. 나오세요.”
사무관의 호명에 채우는 준비한 자료를 총동원해 변론을 시작했다. 생방송 아나운서가 된 기분으로 목소리에 감정을 섞지 않은 채 위자료가 지급되어야 할 이유에 관해 설명했다. 고작해야 30초에서 1분간.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돌고 도는 치킨게임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협의 권고 내립니다.”
땅땅, 그럴 줄 알았지.
서초 법원을 나온 채우는 사무실로 향하는 대신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전부터 최이겸을 만났더니 괜한 피로감에 몸이 무거웠다.
-오늘 기분도 꿀꿀한데 떡맥 할래?
건물주와의 신경전에 몸살을 앓는 중인 복길의 연락.
-미안. 나 오늘 해야 할 잔업이 너무 많아. 다음에.
-에잇, 혼자 마셔야지.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와.
-응.
답장을 보낸 그녀는 꽉 막힌 도로에 갇혀 음악 볼륨을 높였다. 버라이어티한 하루를 보낸 기분. 답답한 마음에 가슴 안쪽이 따끔거린다.
퇴사 당시, 지급된 퇴직금은 그녀의 계산을 한참 웃돌았다. 웃도는 정도가 아니라 배 이상으로 뛰어있었다.
인사과도, 총무과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입사 7년 차 대리. 근면 성실한 점을 높게 산다는 간단한 답변서 한 장이 뒤늦게 메일로 도착했을 뿐.
통장에 찍힌 엄청난 금액을 보며 문득 떠오른 얼굴이 최이겸이었다는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돈의 출처와 발령의 원인을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근면 성실한 점을 높게 산다고? 눈에 띄지 않게 일하고 입금되는 월급에 만족하며 살아온 제가? 게다가 자신은 최이서 전무의 제안도 거절한 사람이었다. 치졸한 징계를 받아도 모자랄 판.
일종의 위자료였다.
정확히는 최이겸과 붙어먹은 대가, 혹은 사주 일가에 반발한 값. 입막음 비용이었다.
값을 제대로 쳐달란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최이겸이 주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인사발령 공고를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연락 한 통 없이 사라져버린 그를 더는 믿지 않기로 했다.
그저 흔해 빠진 욕망에 속은 거다.
속은 제가 문제였다.
빵!
핸들을 톡톡 두드리던 채우는 뒤차의 경적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비상등을 두어 번 깜빡인 뒤, 가속페달을 밟았다.
에어컨 바람을 줄이고 창문을 열자, 매연이 뒤섞인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든다.
퇴직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차를 구입하고 이사를 한 것이었다. 돈은 충분했다. 강남 고급 아파트를 전세로 얻을 정도의 금액이 입금되었으니까.
채우는 그 돈을 아낌없이 모두 써버리기로 했다. 화대나 다름없는 그 돈이 더럽고 경멸스러워서. 통장에 찍혀있는 금액을 보는 것조차도 증오스러웠다.
관리인이 상주하는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 채우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러곤 승강기 홀로 들어가는데, 누군가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그 선득함에 홱 돌아서자, 정영수가 보였다.
“늦었네?”
채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핸드백을 떨어트릴 뻔했다. 둘뿐인 승강기 홀. 아무리 카메라가 있고 조명이 밝다고 해도 정영수와는 한시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한 걸음씩 물러난 그녀는 승강기 버튼을 누르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왜 오셨어요.”
“왜 오긴. 딸 얼굴 보러왔지.”
“…얼굴 보셨으니 가세요.”
“너무 그러지 마. 오랜만에 만나서 이러면 서운해.”
여진은 열일곱에 채우를 낳았다. 아버지는 동급생이었다고 한다. 덜컥 임신시켜놓고 책임질 용기는 없던 남자는 배가 부르기 시작할 무렵,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그에 여진은 홀로서기를 택했다. 남자의 부모는 하루가 멀다고 찾아와 중절 수술을 요구했고, 여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눈을 피해 숨어버리는 거였다.
학교에 갈 수 없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미혼모 센터에서 아이를 낳고 빈 젖을 물리며 매일매일을 눈물로 보낼 때. 딱 한 번 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당시엔 기저귓값도 없었고, 아이는 배가 고파 우는데…. 분유조차 타 줄 수 없어 밥을 끓여 숭늉을 먹여야 했다며 자조했다.
어릴 적엔 엄마가 미웠다. 하지만 철들기 시작한 뒤부턴 엄마의 삶을 연민했다.
엄마는 아름다웠다. 조금 여유가 생긴 뒤엔 자기 관리에 충실했고, 남자들을 만나고부턴 어려 보이는 외모를 이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런 엄마의 애인이 정영수였다. 마흔 중반인 정영수는 서른 넘은 딸을 두었다기엔 지나치게 젊었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아버지 소릴 듣고 싶어 하다니.
“이사하고 얼굴 보기 힘드니 직접 와야지. 새틴에도 몇 달째 안 들렀다며?”
승강기가 도착했지만, 채우는 올라타지 않았다. 그저 죽일 듯 정영수를 노려보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상처가 있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는 남자.
저 웃음이 싫다. 술에 취해 집을 찾아오는 날이면, 엄마와 저를 착각해 몸을 더듬던 남자.
처음엔 실수로, 두 번째는 오해로. 세 번째는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며.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취한 척하고 있다는 걸.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건 그가 제 손에 발기한 성기를 쥐여주었을 때였다. 잠결이었지만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고, 정영수는 입을 틀어막았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뒤였다.
‘아니, 나로 오해한 거겠지…. 영수 씨가 그럴 리 없어, 채우야.’
엄마는 믿지 않았다. 아니, 믿으려 하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애써 웃었다. 엄마는 물주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애인을 믿으려 했다.
그에 채우가 얻어낸 건 독립이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이따금 찾아오는 정영수로 인해 긴장한 채 살았다.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이에요.”
“우리가 남이야?”
“남이죠. 가족이라고 하지 말아요. 소름 끼쳐.”
채우의 말에 정영수는 찡그리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설마 아직도 그날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이젠 쿨하게 잊자. 그러고 싶다, 채우야.”
질리도록 들은 말이었다.
잊자.
쿨하게.
“네. 잊을게요. 그러니까 부탁인데, 그만 찾아와요. 나 변호사예요. 이제 깡패 새끼는 무섭지도 않고요.”
“쯧, 깡패 새끼라니.”
“그럼 아저씨가 깡패 아니면 뭔데.”
“그만하자. 오늘은 이거 주러 온 거야.”
정영수가 내민 건 하얀색 청첩장이었다.
그 안에 쓰인 이름을 보자 깊은 곳에 응어리져있던 화가 폭발한다. 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제 인생은 창하 그룹 퇴사 전과 후로 나뉘었다. 이젠 바보처럼 앓는 짓, 하지 않을 것이다.
채우는 엄마의 이름과 정영수의 이름을 곱씹으며 청첩장을 핸드백 안에 넣었다.
“두 분, 행복하게.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세요. 저 찾아오지 마시고요. 엄마한테도 전해주세요. 참 편리하게 산다고.”
씹듯이 읊조린 뒤 돌아서던 그녀의 팔이 잡혔다. 험악하게 인상을 쓴 정영수가 못 참아 주겠다는 듯 소리친다.
“정말 이럴 거야!”
몸이 흔들렸다. 남자의 강한 힘에 더럭 겁이 나 열려있는 승강기 문을 움켜쥐었다.
“놔요. 경찰 부르기 전에.”
“정채우,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헛바람을 삼킨 그녀가 정영수의 방향으로 휘청일 때였다.
“뭡니까. 그쪽.”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두 사람은 경직됐다. 정영수의 뒤로 나타난 건 최이겸이었다.
태연히 승강기 홀 안으로 들어온 그가 정영수에게 잡힌 채우의 얼굴을 지긋이 내려다본다. 그에 당황한 정영수가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헛기침하며 분을 가라앉히곤 채우의 어깨를 한번 움켜쥐었다.
순간, 최이겸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미안하다. 어쨌든 엄마는 보러 와. 걱정하시니까.”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 정영수는 최이겸에게도 한소리 했다.
“가족사입니다.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합니다.”
최이겸은 스쳐 지나가는 정영수를 끝까지 응시했다. 밖으로 나간 정영수의 앞에 멈춰선 세단. 채우는 정영수가 차를 타고 사라진 뒤에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뭡니까. 가족사?”
어질어질한 감각에 이마를 짚은 그녀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 치며 승강기에 올랐다. 그러곤 문을 닫으려는데 최이겸이 올라탔다.
“뭐 하시는….”
대뜸 따져 물으려던 채우의 얼굴 앞을 가로지른 손. 그는 12층 버튼을 누른 후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섰다.
“집에 갑니다.”
12층. 그녀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황당하다는 얼굴로 최이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오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정면을 응시할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채우는 부러 13층 버튼을 눌렀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임인 듯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럼, 수고해요.”
12층에 멎은 승강기.
문이 열리고 최이겸이 내린다. 채우는 문이 닫힐 때까지 최이겸을 바라보았다. 기가 막히게도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그녀의 바로 앞집이었다.
바보처럼 결국 13층에서 내려 한 층을 내려왔다. 조용한 계단식 아파트. 지금껏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맞은편 집에 최이겸이 산다니.
한 번쯤 마주칠 법도 하지만, 마주친 적 없는 그 집에….
채우는 실소하며 문에 기댔다. 잠잠한 호수의 수면 같던 그녀의 세상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타나지 말지. 그냥 그대로 사라져버리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핸드백 안에 넣어둔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최이겸입니다. 저장해요. 내 번호, 지웠을 것 같아서.
이어 울린 짧은 진동.
-내일 봅시다.
이겸은 조용한 휴대 전화를 뒤집어 내려놓았다.
답장 같은 걸 보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휴대 전화에 시선이 간다. 재킷 주머니 안에 든 소지품을 꺼내 휴대 전화 옆에 내려놓은 그는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지금껏 살아본 그 어떤 곳보다도 작은 소형 아파트. 정채우는 이런 곳에 살고 있었다. 물론 혼자 살기 나쁘지 않지만, 20억이란 돈을 쓰기엔 아까운 곳이었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문 그는 테이블에 놓인 채우의 명함을 응시했다. 법무법인 해랑의 정채우 변호사.
네모반듯한 그것을 집어 든 이겸은 종이 끝을 가볍게 구기며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정채우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집요함이 정당화될까.
실소한 그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앞머릴 쓸어넘길 때였다. 엎어놓았던 휴대 전화가 울린다. 저장조차 되지 않은 번호의 주인을 가늠하던 이겸의 미간이 굳어졌다.
“전화 받았습니다.”
[최이겸! 와, 이 자식! 오랜만이다!]
“그래. 오랜만이네.”
상대는 오늘로 리사이틀을 끝마친 대학 동기였다. 함께 무대에 오르고 연습했던. 누가 메인을 맡고 서브를 맡든 상관없이 연주 자체를 즐겼던 친구였다.
하지만 사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이겸은 며칠 전 회사로 도착한 리사이틀 초대권을 구겨버린 뒤, 비서에게 지시했다.
숍에서 가장 화려한 꽃다발을 보내라고.
[공연 보러 왔었던 거 같은데, 왜 그냥 갔어? 얼굴 보면 좋았잖아. 응? 우리 최 전무님. 승진했다며? 축하한다.]
“아, 일정이 꽉 차서. 연주 좋더라.”
거짓말은 쉬웠다. 사고 직후, 끔찍한 자기연민에 빠져 세상의 비극을 모두 끌어안은 듯 굴 때와는 달랐다.
[어쨌든 놓고 간 꽃, 잘 받았어. 명함 보고 연락한 거야. 애들도 다 너 보고 싶어 하는데, 언제 한번 모이자. 나 당분간 한국에 있을 거거든.]
“그래. 자리 마련해. 시간 내 볼 테니.”
로이였던가 마이클이었던가. 한국인이면서 굳이 미국 이름을 쓰는 놈이었다. 공연을 관람하지 못한 건 정말로 일 때문이지만, 시간이 남았다 하더라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겸은 상대의 수다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담뱃불을 붙였다.
[결혼은 안 했지?]
“했어.”
[뭐? 정말? 네가 결혼을 했다고? 야, 왜 말도 없이 하냐? 와, 서운하다!]
“거짓말이야. 무슨 결혼을 해. 아직 멀었어.”
어울리지 않는 농담에 상대는 잠시 멍하니 침묵했다. 그러다 요란하게 폭소하며 과장된 목소리로 너스레를 떤다.
연주는 제가 책임지겠다며. 결혼행진곡이 얼마나 대단한 곡인지 증명해주겠단다.
이겸은 결국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더는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조용한 실내. 순간, 정채우의 집에서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 밤에 어딜….
그는 굳게 닫힌 현관문을 노려보았다.
‘그 직원 말이냐? 사직서 냈더라.’
처음으로 제가 먼저 꼭대기 층에 오른 날이었다.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물었다.
‘제주도로 발령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 권한으로요.’
‘그래, 발령 냈지. 직원들 사이에 소문이 하도 파다하고 더러워서. 차라리 술집 여자를 만나! 덜컥 애라도 가졌다며 찾아오면 어쩌려고 부하직원을 건드려!’
‘제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쨌든 그 애는 손절해. 뻔뻔하게 찾아와서는 돈을 뜯어내더라. 발칙하고 영악한 계집애.’
아주 오랜만에 동요했다. 군대에서 손에 철심이 박혔을 때. 그때의 끔찍함과 닮은 감각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얼마 주셨습니까.’
‘10장을 부르기에 두 배로 줬다. 네놈만 아니었어도 비서실로 불러들여 잘 활용했을 텐데. 네놈 때문이다. 고작 그런 애한테 한눈판 네놈 때문이야. 그러니 죄 없는 인재 망치지 말고 너 할 일에 집중해. 지금이 계집애 치마폭에 놀아날 때냐!’
이겸은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젠장….”
경련이 일어난 손끝 근육이 경직된다.
몇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날의 통증이 이따금 되풀이되곤 했다. 훈련 중에 일어난 불운의 사고. 그로 인해 끝나버린 천재 피아니스트의 삶.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틀렸다.
불운의 사고가 아니었으며, 제 삶은 그 이후 다시 시작되었다.
이겸은 손을 쥐었다가 펴며 점차 감각을 되찾았다.
갑작스러운 출장 뒤 입국한 그는 어디에서도 채우를 찾을 수 없었다.
법무실, 그녀의 자리엔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고 강서준은 승진을 했다. 정채우에게 일을 맡기고 싶다며 고집부리던 최이서도 결국 포기하고 강서준을 곁에 두었다. 그녀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열흘이었다. 열흘 만에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던가?
처음엔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여자는 돈을 뜯어낼 만큼 궁하지도, 욕망이 크지도 않았다. 그건 제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랜 시간 정채우를 관찰했고, 눈길이 가는 이유에 대해 느지막이 깨달았다.
자신은 정채우에게 반해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그는 습관처럼 새틴을 찾아가 정채우를 기다렸다. 우연과 우연이 겹쳐 이어진 관계이기에, 아직도 우연의 힘이 남아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괘씸하게도 여자는 완벽하게 숨어버렸다. 진실이 무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최이겸. 이겸아? 최이겸!]
닫힌 현관문을 노려보던 이겸은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미안하다. 아직 업무 볼 게 남아있어서. 다음에 연락하자.”
[어? 어어. 그래, 알았어.]
이겸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현관으로 걸어갔다. 막 문고리를 돌리려는데, 건너편에서 또다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이겸의 얼굴에 긴장이 사라졌다. 부쩍 피로한 얼굴로 침실에 들어선 그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전무님.]
“김동희. 내일 동선 알아내서 알려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보내준 자료 말입니다. 누락된 파일이 꽤 되던데요. 작년 하반기 인사과에서 작성한 인사이동 서류, 전부 올려주세요.”
[갑자기요?]
“예, 꼭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간 이겸은 저를 응시하던 정채우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변하지 않은 외모. 좀 더 성숙해진 향기와 바뀌어버린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위자료를 뜯어내 잠적해버린 여자치고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무섭게… 노려보았달까?
변했다, 정채우가.
저만 보면 생글생글 웃으며 얼굴을 붉히던 모습은 사라지고 닿으면 베일 듯 날카로운 분위기만 남았다.
빌어먹을, 계속해서 정채우 생각뿐이었다.
욕지거릴 내뱉은 이겸은 샤워 밸브를 열었다. 서늘한 온도의 물이 쏟아진다.
***
“이름이… 김동희 씨네요?”
최이겸의 비서로 추정되는 사람이 메일을 대신 보내왔다. 당시 사건 정황이 담긴 진술서부터 블랙박스 영상, 대화가 녹음된 파일까지. 어쩐지 너무나 완벽했다.
사무장 경일과 함께 받은 자료를 검토하던 채우는 아픈 머리를 짚었다. 조금 열이 났다. 시달린 것도 모자라 수면 부족을 겪은 탓.
“보니까 같은 부대 출신이에요. 2011년, 근무지는 강원도. 전방이고요.”
“오, 최 전무. 보기보다 대단하네? 피아노 쳤다기에 호리호리한 샌님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몸 좋아요. 특전사 느낌.”
채우의 말에 두 눈을 가늘게 뜬 경일이 피식 웃었다.
“둘이 아는 사이 맞지?”
“네. 최 전무님 모르는 사람은 없었어요.”
“흐음… 아닌 거 같은데. 뭐, 오케이! 난 여기까지만 할 테니, 좀 알아봐. 이 김동희라는 사람, 아주 웃긴 부류인 것 같네. 협박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
경일의 말대로 협박이 통할 상대가 아니란 건, 김동희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2011년 함께 최전방에서 근무한 두 사람은 넉 달 정도의 격차를 두고 제대했다. 그 이유는 최이겸의 사고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사고를 당했는지는 몰랐다. 채우는 최이겸의 손에 철심이 박힌 사고 당시 최초 목격자가 김동희라는 대목에 집중했다.
‘그런 사건으로 엮여있는데도 협박을 했다고…? 돈을 뜯어내려고?’
자료가 더 필요했다. 그녀는 블랙박스 영상과 녹취록을 동시에 틀었다. 이겸이 말한 운전기사가 사고 직후 차에서 내려 앞차의 문을 두드리는 게 보인다.
이때까지도 최이겸은 차에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김동희가 뒷좌석으로 와 차창을 두드린다. 기사가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야! 이야, 최이겸. 살아있었냐? 죽은 줄 알았는데.]
거북하리만치 밝은 음성. 변호사의 촉이 말했다. 이제부터 껄끄러운 대화가 시작될 거라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귀 기울이던 순간, 그녀의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채우는 노트북을 닫은 뒤 키폰을 집어 들었다.
“네.”
[변호사님, 마포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받아보셔야 할 거 같은데….]
“마포? 무슨 일이래요?”
[모르겠어요. 피의자가 명함을 줬다고 하는데. 누구냐고 물어볼까요?]
“아니에요. 연결해주세요.”
그녀의 의뢰인 중 마포지역과 연관된 사람은 없었다. 들여다보던 자료를 덮으려던 채우는 김동희의 이름 옆, 서울시 마포구라고 적힌 주소를 발견했다.
설마….
[정채우 변호사님?]
“네, 정채우 변호삽니다. 무슨 일이시죠?”
아니겠지.
[마포경찰서 이병근 경장입니다. 폭행신고가 접수돼서 출동했는데요. 피의자가 변호사님을 불러 달라고 하네요? 오실 수 있으시겠어요?]
“…피의자가 누구죠?”
[아, 최이겸 씨입니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끝이 멎는다. 설마, 내일 보자고 했던 그 말이 이 뜻이었을까?
나직하게 한숨 쉰 채우가 경찰에게 물었다.
“혹시, 피해자가 김동희 씨인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예, 김동희 씨입니다.]
“…바로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한… 30분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차가 막힐 시간이라.”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최이겸.
끊어진 전화를 내려놓은 그녀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검지와 중지로 꾹 눌렀다.
이어 최이겸의 번호가 휴대 전화 액정에 떴다. 이를 갈며 화면을 노려보던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지금 갈 겁니다.”
[기다리죠.]
“내일 보자더니…. 이런 식인 줄 알았으면, 수임 거절했을 거예요.”
[그럼 난 계속 찾아갔겠죠. 어쨌든 빨리 오십시오. 변호사님이 계셔야 안심이 되니까.]
전화는 저 할 말만 하고 끊어졌다.
고민하듯 자리에 앉아있던 채우는 뭐 씹은 표정으로 일어나 짐을 챙겼다.
변호사라는 직업의 고충 중 하나. 의뢰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무조건 편파적인 편들기를 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오늘 가장 못마땅한 변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확… 다른 곳으로 옮겨버려?
실행하지도 못할 계획을 곱씹으며 터덜터덜 사무실을 나서는데, 화초에 물을 주던 경일이 그녀를 부른다.
“정 변. 여기 뜰 생각하지 마. 그런 표정 지어도 안 돼. 해랑에 뼈를 묻어. 봄바람 죽인다. 바람 쐬고 와.”
‘둘이 걸어요.’라며 알아들을 수 없는 후렴구를 흥얼거리는 경일.
귀신같은 저 촉은 업계에 30년 이상 뼈를 묻은 사무장의 비기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마포경찰서에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오래되어 낡은 타일 벽. 제법 높다란 건물을 올려다본 그녀는 매무새를 고치곤 안으로 들어갔다. 단순 폭행사고라면 좋겠지만, 어쩐지 의도된 냄새가 풍겼다.
복도를 지나 형사과의 문을 열자 시끌시끌한 내부가 그녀를 반겼다. 두리번거리던 채우는 태연히 경찰 앞에 앉아있는 최이겸을 발견했다. 그가 즐겨 입는 브랜드의 정장에 묻은 피. 입술은 터져있었고 테이블에 올려둔 손엔 폭력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아있는 남자는 누가 보아도 피해자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퉁퉁 부은 얼굴과 찢어진 옷. 흐트러진 머리카락까지.
채우는 황당한 마음에 실소했다. 제가 아는 최이겸의 모습이 아니다. 언제나 우아하고 단정하며 치밀한 면모를 보였던 남자가 아닌, 치기로 똘똘 뭉친 파락호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채우가 다가서자 담당 경찰관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최이겸 씨 변호사 맞으시죠?”
그 말에 그녀는 저를 보는 최이겸과 눈을 맞췄다.
“아직 아닙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예? 아, 네.”
막 서류를 건네주려던 경찰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채우는 최이겸의 앞에 섰다. 그러곤 카메라 녹화 버튼을 누른 뒤, 앞으로 내밀었다.
“정채우입니다.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해서요. 최이겸 씨, 법무법인 해랑의 정채우를 변호사로 선임하시겠습니까?”
동영상 속 최이겸이 잘생긴 눈썹을 꿈틀하며 올린다. 그는 굽었던 허릴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임하겠습니다.”
채우는 촬영한 영상을 저장한 후에야 경찰이 건네준 서류를 받았다. 그러곤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제 명함입니다. 피해자의 상태도 그렇고, 제 의뢰인도 심신미약에 상태가 좋지 않은 거로 보입니다. 두 분 모두 병원 치료부터 시작한 뒤, 사건을 진행하도록 하죠.”
“예. 뭐, 신고를 받고 출동하긴 했는데. 두 분 다 입도 벙긋 안 하셔서 곤란하던 차였어요. 단순한 언쟁은 아닌 것 같고…. 최이겸 씨가 창하 그룹 전무님 맞으시죠? 근데 비서실에 연락도 못 하게 하시고. 아, 이런 거 정말 답답합니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저쪽도 변호사 불렀다니까 좀 기다려보시든지요.”
“그래요?”
경찰은 채우의 명함을 앞뒤로 살피더니, 그 위에 최이겸의 이름을 썼다. 그녀는 인계서류에 사인하며 김동희를 보았다. 최이겸의 또래, 블랙박스 영상에서 보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피하는 김동희.
둘 사이에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일어나세요.”
채우는 이겸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겸이 손을 내민다.
“잡아줬으면 하는데.”
“신체 건강하신 거 압니다. 일어나세요.”
“그렇게 보입니까? 안 되는데….”
피식 웃은 최이겸이 경찰 쪽을 힐금 보곤 재차 손을 내밀었다.
빌어먹을, 쓸데없이 치밀해선….
채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겸의 팔을 잡아 제 어깨에 두르게 했다. 그러자 상체를 기울인 그가 절뚝이며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댄다.
한마디로 쌍방 폭행. 이쪽도 못지않은 피해자다, 이거였다.
채우는 앓는 소리까지 완벽하게 재현하는 최이겸을 부축해 경찰서를 나왔다. 시선이 쏠리는 것에도 아랑곳없는 최이겸.
“상대가 고소할 겁니다. 누가 봐도 저쪽 상태가 더 심각해 보이잖아요.”
채우는 이겸의 차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이내 그가 맨몸으로 붙들려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진단서 끊어봐야 아는 거고…. 글쎄요. 저쪽이 고소해주면 나는 더 좋은 거 아닌가?”
“왜 때리셨는데요.”
“기분이… 나빠서요.”
뭐?
확 욕지거릴 쏟아붓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춘기 십 대도 아니고. 기분이 나빠서 사람을 팼다고? 그게 지금 서른 넘은 남자가 할 말인가?
분을 가라앉힌 그녀는 제게 둘린 이겸의 팔을 풀었다. 그러자 균형을 잃은 그가 갈비뼈 부근을 감싸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에 또 바보처럼 놀라 걱정스러운 어투가 튀어나왔다.
“설마, 정말 다치셨어요?”
“다쳤다니까요.”
“봐봐요. 네?”
“여기서? 적어도 차에 가서 하죠. 우릴 보는 시선들이 대단한 거 같은데.”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채우는 다급히 셔츠를 잡았던 손을 뗐다. 너무 자연스러운 접촉이었다. 다른 의뢰인이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최이겸은 다르다.
“어쨌든… 정당방위 성립 실패하면 합의금만 고스란히 떼일 거예요. 아무리 저쪽이 상무…. 아니, 전무님을 협박하고 있다고 해도요. 그러니까 제게는 다 말해주셔야 해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우는 순순히 뒤따르는 이겸을 차에 태웠다. 그러곤 운전석에 오르는데, 경찰서 입구에 다급히 멈춰서는 차 한 대가 보였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가 경찰서를 올려다보며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더니 안으로 사라진다.
어쩐지 김동희의 변호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이 부르는 대로 쥐여주실 거 아니면, 말해보세요. 무슨 일인지.”
작은 경차와 최이겸은 퍽 어울리지 않았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압도하던 그 모습과 대조적으로 그는 작은 차에 짓눌린 듯 보였다.
서서히 속도를 올려 경찰서를 빠져나온 뒤에야 최이겸은 말문을 열었다.
“일종의 피해보상이라고 해둡시다.”
“무슨 피해를 보셨는데요.”
“아직 블랙박스 영상 다 안 봤나 본데.”
“보고 있었는데, 누가 경찰서로 호출해서요.”
면허를 딴지 얼마 안 됐지만, 초보티는 벗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긴장한 건지 핸들을 쥔 손바닥에 땀이 고인다.
최이겸 때문이었다. 1년 전과 다르지 않은 눈빛으로 저를 지긋이 응시하는 그로 인해 옆얼굴에 불이 붙는 것만 같다.
“제 손을 망가트린 사람이… 김동희입니다.”
급격하게 줄어드는 속도.
“네?”
“김동희라고요. 날 끌어내린 사람이.”
당황한 채우는 결국 가까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적당한 빈 곳을 찾아 차를 세웠다.
“그게 정말이에요?”
“범인이 조작된 걸 짐작한 건 몇 개월 전이고, 확인을 오늘 했죠. 블랙박스를 보면 아실 겁니다. 천천히 보세요.”
“근데 자료엔….”
“최초 목격자라고 되어있을 겁니다.”
두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창틀에 팔꿈치를 괴곤 상처 난 입가를 문질렀다. 시멘트 담벼락을 타고 자라난 담쟁이덩굴이 그의 실루엣을 선명하게 한다.
“우리… 식사 전이면, 밥 먹으러 가죠.”
역시 뜬금없기로는 세계최강. 채우는 날카롭게 그를 째려보며 차를 출발시켰다.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해요. 갑작스럽게 나온 거라 일이 밀려버렸거든요. 자료는 메일로 보내주시면 되고…. 김동희 씨도 변호사를 선임하셨다고 하니까 그쪽이랑 날짜 잡아 연락하겠습니다.”
“정채우 씨.”
다시 복잡한 시내 길로 들어선 채우는 그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정 변호사.”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맞아놓고. 뭐가 좋다고 저렇게 실실거린담?
그런데도 채우는 후련하게 느껴지는 그의 표정을 읽었다.
정채우, 정 변호사, 채우 씨.
“네! 왜왜왜, 왜요!”
계속되는 부름에 차를 멈추곤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찌푸리듯 미소지은 그가 자신의 가슴팍을 감싼다.
“좀, 많이 아픈데. 나랑 병원 밥 좀 같이 먹읍시다.”
***
[뭐? 정말? 알겠어. 일단 오후 일정 조정해놓을 테니, 수임료 제대로 받아와. 그럼 되지, 뭐.]
“죄송해요, 사무장님.”
[어쩌겠어. 의뢰인이 상해를 입었는데, 변호사가 당연히 같이 있어야지. 그래서… 최 전무는?]
“응급실이고, 검사받으러 들어갔어요.”
[오케이, 접수. 그럼 수고해. 일 있으면 연락해주고.]
“네.”
경일과의 통화를 마친 채우는 병원에서 지급해준 마스크를 썼다. 감염병의 예방을 위해 병원 내에선 무조건 마스크를 써야 한단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간호사는 최이겸의 상의를 벗겼다. 채우는 시퍼렇게 멍든 그의 가슴팍을 보며 충동적으로 욕지거릴 내뱉었다.
주먹으로 때린 상처가 아니다. 마치 차로 들이받은 듯 시커멓게 죽어버린 피부.
저 꼴을 하고도 태연자약했던 건가? 제 발로 걸어서 차에 탔고, 경찰서에 앉아서 저를 기다렸다고?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최이겸에게 어떤 감정이 남아있어서가 아니라, 제 의뢰인이 피해자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비서실엔 알리지 말라는 최이겸의 당부 때문에 홀로 자리를 지키던 채우는 휠체어를 타고 검사실을 나오는 이겸을 보았다. 가슴에 두껍게 붕대를 감은 채였다.
의사로 보이는 사람들을 몇이나 대동한 채 응급실 안으로 들어온 그가 단번에 채우를 찾아냈다.
안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웃는 남자. 이겸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의아한 시선들이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한다.
채우는 이겸의 손을 쌀쌀맞게 쳐낸 뒤, 담당 의사에게 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갈비뼈 골절 외엔 괜찮으십니다. 병실을 잡고 정밀검사를 받아보셨으면 하는데, 극구 거절하셔서요. 변호사님이시라고요?”
“예.”
“일단 집으로 돌아가셔도 되지만, 혹시라도 통증이 심해졌다고 호소하면 다시 병원으로 와주셔야 합니다.”
“강제입원 안 됩니까?”
부러 최이겸을 흘겨보며 물었다. 그러자 멋쩍게 웃은 의사가 고개를 젓는다.
“일단 거동은 가능하니까요. 힘드시겠지만…. 잘 좀 살펴주셔야겠습니다.”
왜 저를 끌어들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꼴이 우스워질 것 같아서 참았다. 어차피 최이겸의 집엔 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들 것이다. 그들은 최이겸의 상처를 금방 눈치챌 테다.
최 회장이 목숨처럼 아끼는 둘째를 이렇게 무방비하게 둘리 없었다.
“부축, 안 해줍니까?”
뻔뻔하게 또다시 내민 손. 채우는 재차 이겸의 팔을 잡아 어깨에 둘렀다. 커다란 남자가 제 반도 안 되는 여자에게 매달려 걷는 꼴이라니.
게다가 최이겸의 숨이 귓가에 흩어질 때마다 몸에 힘이 들어갔다.
“집에 가시면, 꼭 본가에 연락하세요.”
“그러죠.”
“그리고… 이번 사건을 끝으로 더는 수임받지 않겠습니다. 여기까지만 할게요.”
“왜, 돈 벌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벌고 싶죠. 근데 창하 그룹 돈은 싫어요. 이미 받을 만큼 받아먹어서, 더 먹으면 탈 나요.”
조수석 문을 열고 그를 태웠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차에 오른 그가 상체를 세우던 그녀의 팔을 잡는다. 그에 채우는 이겸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맞춰야 했다.
“우리, 할 말이 많은데. 언제 할까요.”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우리가 나눌 대화는 사건 관련한 것뿐이고요.”
“서운한데요?”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그녀를 빤히 보던 그가 손끝으로 마스크를 내렸다. 얼굴이 드러난 순간, 왜 창피함이 밀려들었는지 모르겠다. 엄지로 입가를 누르며 턱을 움켜쥔 그는 쓰라린 표정으로 웃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계속 엮여야겠습니다. 정채우 씨랑.”
채우는 이겸을 아파트에 버려버렸다. 실상은 얌전히 부축해 12층 그의 집 앞까지 잘 모셔다 놓은 거지만, 그래도 그녀로선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 최이겸이 나타난 그 순간부터 매일 시, 분, 초 단위로 그의 생각을 했으니까.
‘나랑 엮여야겠다고…? 왜?’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은체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는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지…. 많은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현실은 달랐다. 무엇하나 예상대로 이루어지는 게 없었다. 그래서 멍청한 짓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과거의 그를 향한 사랑이나 호감 따윈 해묵은 잔상일 테니까.
사무실로 돌아온 채우는 비서인 미령에게 일정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크고 작은 소송들이 그녀의 컨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을 통으로 할애해도 모자랄 양의 소송들.
채우는 소맷단을 접어 올린 뒤, 긴 머리를 높게 묶어 올렸다. 이어 법원에 보낼 자료들을 하나씩 추려 출력을 요청할 때였다.
“변호사님, 로엠의 이시윤 변호사님이시래요. 연결할까요?”
수화기를 손에 든 비서가 목소리를 낮췄다.
로엠의 이시윤?
“누구지? 방으로 연결해주세요.”
“네.”
로엠의 이시윤이라….
채우는 사무실로 들어가 연결된 전화를 받았다.
“네, 정채우 변호삽니다.”
[안녕하세요. 김동희 씨 변호사, 이시윤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수화기를 귓바퀴와 어깨 사이에 끼운 그녀는 책상에 놓인 서류를 뒤져 김동희의 파일을 찾아 열었다.
“김동희 씨는 어떠신가요? 병원에 가신다고 들었는데.”
[지금 병원 진료 마치고 나오는 길입니다. 입원 처리했고, 의사 소견으론 아마 4주 정도 나올 것 같다더라고요.]
“그러신가요? 쾌차하셔야 할 텐데….”
[그쪽 의뢰인은 괜찮으십니까? 경찰관 말로는 멀쩡히 걸어나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저희 의뢰인은 갈비뼈 골절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요청했지만, 일정상 거절하셨고요. 대략 8주 예상합니다.”
채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최이겸의 갈비뼈를 그렇게 만든 건 김동희였다. 비단 김동희가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싸움 도중 생긴 부상인 만큼 책임은 그쪽에 있었다.
[…이상하네요. 우리 의뢰인은 한 대도 안 때렸다던데.]
“그걸 믿으세요? 싸움에 일방통행이 어디 있습니까? 아시면서.”
[하긴, 자해공갈이란 것도 있으니까요. 근데 갈비뼈 골절이면 밥도 제대로 못 먹지 않나요? 최이겸 전무, 잘생겼던데. 얼굴 상하겠네.]
이것 봐라?
남자는 조금도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되레 장난처럼 받아치는 말본새에 채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어쨌든 오늘 일어난 쌍방 폭행 사건은 각자 사비로, 혹은 실비로 해결하는 게 어떨까요.”
[글쎄요. 그건 좀 억울한데요.]
“억울하시면, 뭐. 고소하셔야죠. 단, 저희도 수사를 몇 개 의뢰하려 합니다. 이번엔 형사, 민사. 그리고 군법까지 동원해야 할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협박에 능하신 우리 김동희 씨께 증거는 모두 갖추었다고 전해주세요. 2011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물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수임 늘리고, 배당금도 늘리고. 혹시 모르죠. 보너스를 받게 되실지도.”
상대는 다른 말을 하지도, 섣불리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채우는 이시윤의 대답을 기다리며 천천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고민에 빠진 상대는 어떻게 대응할까. 순순히 물러설까? 아니면 반발할까. 또 무슨 말장난을 하려나?
[내용 증명을 보내실 거면… 우리, 직접 만나도록 하죠. 해랑의 정채우 변호사님. 안 그래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어쩐지 남자의 목소리엔 즐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럼 그렇지.
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인사도 하지 않았지만, 문제 되진 않을 것이다. 무례한 행동에 대한 답이나 마찬가지니까.
‘근데 정말 갈비뼈를 다치면 밥을 못 먹나? 숨 쉬는 게 힘든 거 아니고?’
단정한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던 그녀는 최이겸의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곧 죽어도 그에게 전화를 걸고 싶진 않았다.
고민하던 채우는 파일을 뒤져 전무의 명함을 찾아냈다. 개인 휴대 전화 번호로 보이지만, 분명 수행 비서의 연락처일 터.
채우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이어진 통화음 이후,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개인 폰으로 연락하는 게 더 좋은데요. 정채우 변호사님.]
이 남자가 미쳤나? 설마 업무용 휴대 전화도 본인이 직접 관리하는 거야?
채우는 당황한 걸 들키지 않으려 괜히 헛기침하곤 말을 돌렸다.
“…업무용 휴대 전화 아니었나요? 비서님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비서 없습니다.]
“…네?”
[수행 기사는 있지만, 비서는 없어요. 김 실장님이 출산휴가 낸 뒤부터 공석입니다.]
제게 비서실 이동을 제안했던 그였다. 그저 변덕일 거라고 여겼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아, 물론 비서실에서 돌아가며 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긴 합니다. 전담 비서가 없다는 거지.]
“…그러시면, 비서실로 연락하겠습니다.”
[정채우 씨.]
수화기 너머에서 짧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를 바꾼 건지 목소리의 깊이가 달라진다.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내게 직접 물어봐요. 뭐든 대답해줄 테니까.]
“…아닙니다. 실은, 전무님 상태를 알리려 한 거예요. 비서님은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 그럼 끊겠습니다. 쉬세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힘겹게 들려 김동희의 변호사가 연락해왔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채우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복잡한 마음에 눈두덩을 누르며 고개를 젖혔다.
비서도 없고, 넓은 집도 없다. 하물며 전무라는 직함조차도 껍데기처럼 느껴진다.
고작해야 1년. 제가 만든 최이겸이란 남자의 가이드라인이 무너졌다.
***
지하 주차장 트라우마라는 것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차에서 내린 채우는 전속력으로 승강기 홀에 들어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오늘은 정영수가 보이지 않았다.
창하 그룹 퇴사 이후, 그녀는 완벽하게 독립했다. 언제고 제 인생에 핵탄두가 될지 모르는 엄마와 끔찍한 정영수. 그리고 최이겸을 향한 미련으로부터.
모두 잘라냈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12층에 도착한 채우는 언제나처럼 조용한 복도를 지나 집 앞에 섰다. 돌아서서 벨을 누르면 최이겸이 나올까? 관심 가져본 적 없던 이웃의 존재가 이토록 신경 쓰일 줄이야.
신경을 쓰지 말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녀가 도어록을 열 때였다. 등 뒤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돌아선 채우는 외출복 차림의 이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가세요?”
“약속이 있어서.”
청바지에 셔츠. 편안해 보이는 차림이지만, 틈 없이 완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저 남자의 상태가 얼마나 엉망인지. 얼마나 무모한 외출을 감행하는 것인지.
이대로 나갔다간 운전대를 잡기도 전에 쓰러질지 모른다. 신경 쓰지 말자던 다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 그녀는 어느새 이겸의 앞을 막아섰다.
“안됩니다. 김동희 씨 변호인과 통화했어요. 그쪽에선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네요. 근데 우린 이렇게 통원을 한답시고 집으로 왔어요. 분명 조사 나올 거예요.”
“말했잖아요. 고소, 무섭지 않다고.”
“그래도 안 돼요! 그 꼴을 하고 어딜….”
물론 꼴이 엉망인 건 아니지만, 상처를 본 이상 그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겸은 제 앞을 막아선 채우를 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실은, 성수동에 가려고 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채우는 제 귀를 의심했다.
“…배가 고프셔서, 성수동엘 가신다고요?”
“알잖아요. 거기서 친구 놈이 식당 하는 거. 내 주변에 제대로 된 요리하는 놈은 그놈뿐이라.”
“잠깐만요. 배가 고파서, 성수동까지 가신다는 거… 진심이에요?”
“식당에서 혼자는 밥을 못 먹잖아요.”
그럼 배달을 시키면 되지 않냐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황당한 마음에 얼굴에 열이 오른다.
“배달시키세요. 아니면 병원에 입원하시든가. 거긴 식사라도 꼬박꼬박 나오니까요. 그리고 본가에 연락하신다면서, 안 하셨죠?”
이겸은 씩씩거리는 그녀를 보며 웃음이 배어 나온 입가를 문질렀다. 그러더니 자신의 휴대 전화를 불쑥 내밀었다.
“배달, 시켜본 적 없습니다. 부탁 좀 하죠.”
“어플… 안 써보셨어요?”
“배달 자체를 시킬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집엔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제가 이곳에 머무르는지도 모르실 테니.”
궁금증이여 사라져라.
채우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며 자신의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러곤 배달 사이트에 들어가 메뉴판을 띄워 이겸에게 보여주었다.
“고르세요. 지급은 현금, 혹은 카드. 배달원이 오면 현장 결재하는 거로 하면 돼요.”
“매운 게 좋은데.”
“아픈 사람이?”
“속은 멀쩡해요.”
그는 참으로 성의 없이 화면을 스크롤 했다. 이어 메뉴 하나를 고르더니 주소입력까지 완벽하게 끝낸다.
채우는 뭔가 속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주문을 완료함과 동시에 휴대 전화를 뺏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볼게요.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어플은 본인 핸드폰에 꼭 깔아두시고요.”
쏴붙이고 현관문을 여는데, 벽에 기대선 이겸이 그녀의 팔을 지그시 잡았다.
“나랑 같이 밥을 먹읍시다. 양도 많던데.”
“…수작 부리지 마세요.”
정면을 응시하려 노력했다. 최이겸의 표정을 보게 된다면, 분명 마음이 약해질 게 뻔했다.
“수작 좀 부리면 안 됩니까?”
“네.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불편하고 기분 나쁩니다. 그리고… 애인이 싫어할 거예요.”
애인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최이겸에게 곁을 주는 것 같아서 거짓말로 선을 그었다.
팔을 잡았던 그의 손이 느릿하게 떼어진다.
“애인이 있단 말은 처음 듣네요.”
“네. 몇 개월 안 됐지만, 확실히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불편하게 해서.”
“그럼 쉬세요.”
집 안으로 들어온 채우는 현관문에 기대섰다.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가면서 본 최이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아니, 엉망인 건 저였다. 채우는 한숨을 내쉬며 오른쪽 벽에 매달린 거울을 보았다.
“하, 이 꼴을 하고….”
두 시간을 미친 듯이 뛰었다.
인적 드문 밤의 공원. 밤이 되어도 더위는 쉬이 가시지 않았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뛸 때만큼은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러다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 속도를 줄여 서서히 걸었다.
마치 어디선가 최이겸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비 오는데 뭐 하는 거냐며 화난 낯으로 어깨를 잡을 것만 같다.
그래서 더욱 천천히 비를 맞으며 걸었다. 운동복이 흠뻑 젖고 머리에서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미친 여자처럼 물에 젖어 나타난 그녀를 본 관리인의 표정이 마뜩잖게 구겨졌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욕조 가득 뜨거운 물을 받아 들어갔다. 차가웠던 몸에 피가 돌며 찌릿찌릿, 소름이 돋았다.
대체 날 왜 이렇게 흔들어.
전신이 젖었지만, 가슴속은 바싹 말라버렸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 혹독했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했는지.
붉게 물든 세상, 하얀 늪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이제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
다음날 출근한 채우는 곧장 블랙박스 영상을 재생했다. 차에서 내린 김동희가 최이겸을 알아보더니 반갑게 알은체한다.
이겸은 차창을 내린 채였고 김동희는 밖에 서 있었다. 사고가 크지 않다며 좋게 해결하려는 듯싶더니, 김동희가 불쑥 상체를 차 안으로 들이밀었다.
[이겸아, 근데 손은 괜찮냐? 설마 아직도 피아노 치는 거 아니지? 그러지 마. 효도해야지. 너 피아노 못 치게 하려고 최 회장님이 얼마나 마음고생 하셨는지 알면. 사업이나 열심히 해, 인마.]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소리는 명확하게 들렸다. 그러다 멱살이 잡혔는지 컥컥대는 소리가 들린다.
[야! 놔, 놔! 왜 이래?]
[뭐라고 했어.]
[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어.]
[뭐야… 아직도 몰라? 하. 재밌네, 이거. 야야, 이거 놔봐. 미안한데 맨입으론 말 못 해주겠다. 우리 따로 좀 만나자. 엘릭이 네 작품이란 소문 있던데…. 정보 공유 좀 해야지. 우리 사이에.]
그리고 몇 초 뒤, 김동희는 다시 화면에 잡혔다. 기사에게 거수경례를 해 보인 김동희가 차에 올라 사라진다.
영상은 여기까지였다. 채우는 모니터 방향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폈다. 화면만 보아선 김동희가 최이겸의 손을 망가트렸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누군가 고의로 사고를 의도했다는 심증만이 있을 뿐. 김동희는 현재 용의자가 아닌 증인에 가까웠다.
그럼, 폭행 사건 당시 사고와 관련된 대화가 오갔다는 뜻인데….
테이블을 손톱 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던 그녀의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네, 정채우 변호삽니다.”
[저 이시윤입니다. 오늘 만나죠.]
이시윤이 누구인지 떠올리는 건 쉬웠다. 하지만 시간을 따로 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중요한 예약 상담 진행 5분 전, 채우가 말했다.
“4시 괜찮으시면 해랑 1층 카페에서 뵙죠. 제가 오늘은 상담 건이 많아서요. 아니면 다른 날에 뵙든지요.”
[알겠습니다. 4시, 1층으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그녀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긴장하지 말자, 정채우.
오늘의 고객은 벌써 네 번째 해외 법인 설립 건을 상의하러 오는 운동선수였다. 한마디로 크게 한 건 터트려줄 고객님.
관련 자료 몇 건을 추려 미팅룸으로 향하는데 눈앞이 핑 돌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 오후부터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점심엔 꼭 폭식하고 말겠다며 다짐한 그녀는 곧장 미팅룸에서 상담을 시작했다.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한 해외 법인. 상대는 유명 야구선수로, 매니저와 함께 찾아왔다. 해외 구단에서 들어오는 자금관리를 위해선 법인설립이 불가피한 상황. 그는 몇 군데의 법무법인을 돌고 돌아 결국 해랑으로 왔다며 머쓱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창하에서 한 달에도 몇 건씩 체결한 계약 아니던가?
채우는 창하 그룹 재직 당시 각종 해외 법인 사업을 도맡아 진행해온 만큼, 수월한 상담을 할 수 있었다.
“그럼, 해랑에서 진행하겠습니다.”
“후회 없으실 겁니다. 자금 관리해주실 세무 대리인과 제가 따로 연락해 처리하겠습니다.”
“메이저리그만 가면 모든 게 만사형통일 줄 알았는데, 복잡하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골머리 썩는 일 없으실 거예요.”
채우는 수더분하게 웃는 남자와 악수했다. 맞잡은 손에 박힌 굳은살. 그건 분명 노력하는 사람의 흔적이었다.
결국, 대화가 잘 통하는 고객과의 상담 때문에 끼니를 거르고 만 그녀는 미령에게 샌드위치를 부탁한 뒤, 계약서를 복사했다.
밥때는 놓쳤지만, 뿌듯함은 하늘을 찔렀다.
이 정도면 수임료만 15억, 상당한 보너스가 보장된 일이었다. 물론, 해랑의 식구들과 팀을 이루어 움직인 만큼 나눠야 할 테지만, 흔치 않은 고액수임의 기회임은 분명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시원하게 사인한 고객에겐 90도 인사도 아깝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따금 살인, 강도, 사기 등을 저지른 범죄자들이 변호를 의뢰해오곤 한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변호사를 선임하고 무기징역을 최소형량으로 낮추는 꿈을 꾸었다. 그에 변호사는 최선을 다해 ‘나쁜 새끼’를 ‘불쌍한 새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뢰를 받을 때면 변론을 하면서도 자괴감이 들어, 다 때려치우고 싶어지곤 했다. 그래도 결국 판결이 끝나면 만족한 의뢰인에게 수임료를 입금받는다.
그런 관점에서 변호사는 자기중심적 사회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속물이 되어도 ‘변호사니까.’라는 소릴 들을 거라고.
그러니 어제 한 거짓말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고작해야 애인이 있다는 거짓말 따위는….
“이야… 정채우. 저저저저 메이저리그 유태호 선수 아니야? 수임 따냈어?”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선 그녀가 부러움에 몸부림치는 선배들을 응시하며 생긋 웃어 보였다.
“제가 다른 건 선배들한테 안 돼도, 해외 법인 건은 또 제대로 하잖아요.”
“야야! 이번엔 채우한테 붙어야겠다.”
“같이할 거지?”
마치 해랑의 축제 같았다. 다들 벌써부터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겠다며 할 일도 잊고 너스레를 떤다.
채우는 미령이 가져온 샌드위치로 대충 배를 채운 뒤, 두 건의 미팅을 더 진행했다.
그렇게 4시 하고도 20분. 미팅룸에서 나온 그녀가 시간을 확인하곤 부리나케 1층으로 향했다. 약속 시각은 4시. 벌써 20분이 지난 후였다.
‘가버린 거 아니야?’
개인 연락처라도 알고 있다면 약속을 미뤘을 텐데.
발을 동동 구르며 승강기에서 내려 카페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정채우 변호사님?”
막 밖으로 나온 남자가 그녀의 앞을 막아선다. 제 또래로 보이는 외모에 살짝 날카로운 눈매. 산뜻한 호감형에 가까운 남자는 싱긋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이시윤입니다. 다행이네요. 지금이라도 만나서.”
***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이겸이 몸을 일으키며 휴대 전화를 고쳐 쥐었다.
“최고급 백합으로 보내시고, 이름은 표기하지 마십시오.”
[명함도 보내지 말까요?]
“예. 봉안당 주소는 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매년 음력 오늘 날짜에 보내야 하니 기록해두시고요.”
[예. 그런데 전무님, 회장님이 오늘도 찾으셨습니다. 재택근무 일정을 알려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내일부턴 출근할 예정입니다. 오늘까지는 좀 쉬고 싶네요.”
비서실 윤 과장은 당황한 눈치였다. 입사 이래 전무가 이토록 오래 회사를 비워본 적이 없던 탓이다.
윤 과장과의 통화를 마친 이겸은 적당히 물로 배를 채운 뒤 샤워를 했다. 아직 거동이 어색하지만, 첫날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젖은 머릴 힘겹게 털고 옷을 챙겨입는데, 식탁 위에 놓인 봉투가 보였다. 지난밤 정채우의 도움을 받아 주문한 음식. 손도 대지 않은 그것이 차갑게 식어 쓰레기로 바뀌었다.
‘애인이 싫어할 거예요.’
정채우의 말을 떠올리자 묵직한 통증이 심장을 죈다. 가슴을 지그시 누른 그는 차 키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약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한숨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에도 다르지 않았다만….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정채우의 집. 어제까지만 해도 저 문이 언제 열릴지 가늠해보는 묘한 스릴을 즐겼건만, 오늘은 아니었다.
최이겸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의 집 현관문을 노려보다 대기 중이던 승강기에 올랐다.
‘최 회장님, 통 크시더라.’
예상했던 대로 그날의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다. 원인 모르게 망가져 버린 브레이크. 운전병은 당황했고 병사들은 겁에 질렸다. 가드레일을 박은 차에서 튕겨 나간 사람 중엔 이겸도 있었다.
그것도 날카로운 차량 파편이 손등에 박힌 채.
당시엔 부러져버린 다리 통증이 더 심해, 손등의 상처는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 생명엔 지장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날 이후 네 번째 손가락에 마비가 왔다. 재활에 실패한 그에게 내려진 장애판정. 예술업계는 패닉에 빠졌고 군 수사는 차량 결함으로 마무리되었다.
<비운의 피아니스트,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삶을 택하다. 창하 인터내셔널 상무 최이겸 독점인터뷰.>
모 일간지의 헤드라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인으로 가장한 누군가가 언론사에 제 이야길 퍼트렸고, 이겸은 곧장 언론사를 고소했다.
‘네가 아쉬운 게 뭐가 있다고. 다시 시작하면 돼. 세상을 다 네 아래에 놓고 깔보고 살란 말이다! 그깟 피아노는 네 인생에 하등 쓸모없었어!’
아버지 성격대로의 괴팍한 위로라고 여겼다. 하지만 모든 건 저 편한 대로 끼워 맞춘 착각이었다.
이겸은 차에 오르자마자 재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늘 예약 꽉 찼다.]
“그래도 나 한 명 정도는 받아줄 수 있잖아.”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다 죽어가는데?]
“죽을 거 같아. 그러니까 밥.”
[어휴, 친구라고 하나 있는 게 날 밥통으로 생각하고 말이지.]
“줄 거야, 말 거야.”
[와. 김밥 싸줄게.]
웃을 때마다 가슴뼈가 아파 숨만 크게 들이켜곤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곧장 성수동으로 향하려던 이겸은 충동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향한 곳은 법무법인 해랑이 있는 테헤란로. 왕복 10차선 간선 도로를 서서히 달려 골목에 들어섰다. 이겸은 이곳으로 향하게 한 충동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형체 없는 그리움과 괘씸함, 미약한 짜증을 억누를 만큼 정채우와 마주 보고 싶었다.
물러설 때 물러서더라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렇게 법무법인 해랑의 간판이 달린 건물 앞, 여유로운 분위기의 카페 창가에 앉아 있는 채우를 발견했다.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열심히 무언가를 적던 그녀의 앞에 음료를 든 남자가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러자 무표정하던 채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겸은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빌어먹을 만치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돌아선 그가 미간을 좁힌 채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러곤 저장되어있던 경일의 번호를 찾아 누른다.
“최이겸입니다. 급히 면담을 좀 하고 싶습니다. 정채우 변호사님과요.”
“나는 이름 듣자마자 너인 줄 알았는데. 전혀 몰랐어?”
더운 날씨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라니. 아니, 그것보다 더 황당한 건 하필 상대편 변호사가 자신의 동창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꽤나 가까이 지냈던.
“미안. 전혀 몰랐어.”
채우는 에이드 안의 얼음을 아작 깨물었다. 그러자 설탕을 듬뿍 넣은 아메리카노를 휘휘 저은 시윤이 반듯한 눈을 찡그렸다.
“뭐,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어.”
이제 보니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짓궂은 눈웃음부터 예쁘장한 입매 끝에 새겨진 보조개까지. 그에 문득 옛날 생각이 났지만,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럼, 일 얘기 할까? 네가 김동희 씨 변호사인 건 껄끄럽지만, 할 건 해야지.”
“그래도 살살해줘. 너 무서워. 옛날부터 진짜 무서웠어.”
“무섭긴? 내가 얼마나 착했는데. 어쨌든 우리 쪽은 아직 내용 정리 중이야. 그쪽은?”
“우리는 진단서와 고소장. 그리고 내용증명.”
시윤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가져온 서류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고소장은 챙겨가고 내용증명은 줘. 내용증명 1도 쓸모없는 거 알면서 왜 이런 걸 가져오고 그래?”
채우는 피식 웃으며 시윤이 내민 서류 봉투를 받았다.
“뻔한 내용이겠지만, 한번 읽어봐. 그리고…. 최이겸은 뭐야? 그 집안, 명재랑 일하지 않나? 그런데 허명재는 어쩌고 해랑에 맡기는 건데?”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 그는 어릴 때처럼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꽤나 뺀질뺀질해 변호사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건만, 번듯한 명함을 내미는 남자가 됐다.
“그거야 최이겸 씨 마음이고. 우리 의뢰인이랑 김동희 씨, 사연 있는 관계인 거 알지?”
“사연?”
“음…. 아직 못 들었으면 굳이 파고들지 마. 아는 얼굴이랑 법정에 서는 거, 별로거든. 그리고 폭행 사건도 마찬가지야. 쌍방폭행이기 때문에 고소성립 자체가 불가능할 거고.”
“되는지 안 되는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자고.”
“그러든지.”
벌써 4시 50분. 그녀에겐 5시에 예약된 마지막 미팅이 남아있었다. 에이드를 급히 들이켠 그녀가 서류를 챙기려 하자, 시윤이 채우의 손목을 잡았다.
“벌써 가게?”
“바로 미팅이 있거든. 오늘 반가웠다.”
“그래? 아쉽네….”
“다음에 봐.”
“동창회도 좀 나오고 그래.”
“알았어.”
“그리고 최이겸 말인데…. 아니다. 네가 최이서는 모르겠지.”
“최이서? 창하 전무?”
입가를 만지작거리던 시윤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지금은 사장.”
“아, 사장. 근데 최이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사고뭉치를.”
“그럼, 작년 이맘때인가…? 더 전인가. 그때 일도 알아? 너 창하 그룹 법무실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묘하게 캐묻는 말투에 채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사실, 알지도 못했고.
잡혔던 손목을 빼낸 그녀가 서류를 챙겨 일어났다.
“법무실 직원이 뭐 대단하다고 다 알겠어. 내가 임원 뒤봐주는 사람도 아니고. 관심 없었어.”
“그럼 쓸데없는 질문을 했네. 미안.”
채우는 조만간 또 보자는 시윤과 악수한 뒤,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 언쟁을 벌일 상대가 동창이라는 점에서 꽤나 속 시끄러워지게 생겼다.
게다가 높은 확률로 김동희의 소송을 계속해서 맡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시윤이 차에 오르는 걸 보는 둥 마는 둥 한 채우는 서둘러 해랑으로 올라갔다. 탕비실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하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벙긋거린다.
하지만 고객과의 미팅 1분 전. 서류를 챙겨야 해 바쁘다며 손을 흔든 채우는 아무 생각 없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시간 약속은 칼이네요, 변호사님.”
이런 기시감은 반갑지 않다. 채우는 뒷걸음질 쳐 밖으로 나가 자신의 문패를 확인했다. 다섯 시 예약 고객은 최이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왜…?
“예약, 하셨나요?”
“했죠, 물론. 사무장님께 직접.”
찡그리듯 웃어 보인 그가 미간을 긁적이며 그녀의 뒤편으로 살짝 눈인사한다. 채우가 돌아본 곳엔 어쩐지 뿌듯한 표정을 한 경일이 서 있었다.
“사무장님, 원래 고객님은….”
“바쁘시대. 예약 취소됐다고 전화를 그렇게 했는데, 정 변이 안 받아서.”
“아, 휴대 전화.”
급히 약속장소로 향하느라 놓고 간 휴대 전화. 책상 앞으로 간 채우는 부재중 표시를 보며 당황한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이건 분명 뭔가 있었다. 계획적인 냄새가 솔솔 풍긴다.
싸늘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이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휴대 전화를 두고 갔네요.”
그에 찻잔을 집어 든 이겸이 경일에게 눈짓하며 대꾸한다.
“괜찮습니다. 변호사님도 쉬어가면서 일하셔야죠.”
“몸은 어떠세요. 직접 운전해서 오셨어요?”
“아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닙니다.”
괜찮다는 투로 말하면서도 그는 꽤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켠 그녀가 이겸의 곁을 스쳤다. 순수하게 그의 뒤에 놓인 복사기를 쓰기 위해서였지만, 거리가 좁혀지자 괜한 긴장에 목소리가 떨렸다.
“차는 드신 거 같고…. 너무 돌아다니지 마세요. 뼈 안 붙어요.”
“근데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정 변호사님을 만날 수 없잖습니까.”
“그럼 전화로….”
“핸드폰을 잘 잊어버리는 거 같아서.”
열 받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채우는 복사기 위에 시윤에게서 받은 서류를 올렸다. 그러곤 의미 없이 버튼을 누르며 최이겸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뒷모습을.
“말해보세요. 무슨 일이신지.”
“고소장 쓰러 왔습니다.”
“김동희 씨를 고소하시게요?”
“한 명이 아닐걸요.”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앉았다. 회전의자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최이겸이라니.
잠시의 침묵 속, 복사기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그럼….”
“내 손을 망가트린 사고와 관련된 인물 전부.”
“전부요?”
“네, 전부.”
채우는 황당한 얼굴로 실소했다. 이제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제게 사건을 맡기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을.
“소송비용이 더 들어갈 겁니다. 수임료도요.”
“수임료는 청구하는 대로 드리죠.”
“뭘 원하시는데요?”
“진정성 있는 사과.”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가 저를 놀리는 거라 생각되었으니까. 사고를 당한 피아니스트라는 점에서 그의 억울함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대처 방식은 납득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사과의 말을 듣겠다고 관련자들을 고소하며 돈을 쓴다?
참지 못한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왔다.
“전무님.”
무릎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선 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대단한 거 같아요, 부자들이란. 평범한 사람들은 수임료 무서워서 고소 함부로 못 하는데. 고작 사과 좀 받겠다고 일을 벌여요?”
“돈이 많아 다행입니다. 돈을 써서라도 억울함을 풀 수 있으니.”
“뭐든 돈으로 해결하시나 봐요.”
“종종, 필요한 경우에만.”
“그래서… 두 배 넘는 퇴직금을 주신 거였어요? 원망듣고 싶지 않아서?”
비스듬히 올려다보던 그의 눈썹이 구겨진다. 마치 낯선 나라의 언어를 들은 것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다 알고 있으면서.
채우는 태연하게 입꼬릴 올렸다. 행복함에 젖어있을수록 비참함이 크다는 걸 안다. 지나치게 발버둥 치면, 그만큼 더 가라앉게 될 거라는 것도.
“정채우 씨.”
“거절합니다.”
단호하게 말한 그녀는 그와 닿기 전 물러섰다. 무슨 의도인지 몰라도 의뭉스러운 장단에 맞춰 헛짓거릴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최이겸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힘겹게 팔을 뻗어 돌아서는 그녀를 잡아챘다.
“아!”
순간 가슴을 움켜쥔 채 아파하는 최이겸. 놀란 채우가 웅크리려는 이겸을 황급히 부축했다. 그는 통증이 심한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직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병원엘 가셔야죠! 입원하라니까요!”
“정채우.”
“네!”
“잠시만… 조용히.”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댄 그녀의 어깨 위로 이겸의 이마가 닿는다. 이어 옆얼굴이 맞닿고 숨소리가 겹쳤다. 잠시나마 시간이 정지하는 기분이었다.
가만가만 숨을 고르던 이겸은 그녀의 어깨와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서서히 힘을 주자 좁혀지는 그의 품. 채우는 멍하니 남자의 양팔을 움켜쥐었다.
“못 일어나시겠으면 구급차 부를게요.”
“병원은 안 내킵니다.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럼 집에서 제발 좀 쉬세요.”
“간호해 줄 겁니까?”
뜨겁고 말랑한 무언가가 뺨을 스쳤다. 그의 입술이었다.
이겸은 서서히 상체를 세워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작은 몸에 흐르는 긴장을 눈치챈 건지, 여운이 남는 미소를 띤 그가 고개를 젓는다.
“미안합니다. 애인이 있다고 했죠. 조금 전 말은 못 들은 셈 쳐요. 오해하게 만드는 건 좋지 않으니까.”
창백한 안색, 그런데도 여유로운 척하는 표정. 그리고 샅샅이 헤집는듯한 눈빛까지. 전부 실수라고 여겼던 그날과 닮아 있었다.
“그날도 실언했다 생각하라더니….”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알아듣는 눈치였다. 제가 언제를 이야기하는지.
“알다시피, 내가… 좀 발랑 까져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요.”
“뭘까요.”
“섹스하고 싶다고요…? 나랑?”
미소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진다. 차가운 눈빛이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
책상에 엎드린 채우는 발을 동동 구르며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나… 미친 거 아니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 없지.
고개를 격하게 저은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다른 일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만져지는 건 종이요, 눈에 보이는 건 활자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겸의 목소리만 계속해서 맴돌았다.
‘이것도… 나쁘지 않지만, 난 좀 더 제대로 된 키스를 하고 싶은데.’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이다. 스쳤다고 해도 될 만큼의 접촉. 거기서 물러났어야 했다. 실수였다며 그를 밀어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혀와 제 혀가 비벼지고 있었다. 아픈 사람답지 않게 목덜미를 감싸 쥔 채 벌어진 입술을 헤집고 들어온 남자. 그에 채우는 주저앉고 말았다.
“변호사님, 어디 안 좋으세요?”
간식을 갖고 들어오던 미령이 빨개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아뇨, 좀 더워서요.”
놀란 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간식 접시를 받아들었다. 달콤한 카페라테와 다디단 마카롱. 그것도 캐러멜 시럽을 잔뜩 뿌려 코팅한 마카롱이라니. 그녀에겐 더없이 완벽했다.
“최이겸 씨가 사 오신 간식이에요. 단 거 좋아하시는 거 아셨나 봐요.”
제가 최이겸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게 없었다는 걸 깨달은 건, 재미있게도 아파트 근처 죽집에서였다. 잣죽부터 호박죽, 전복죽은 기본. 그 외에도 기상천외한 메뉴들을 보며 채우는 고민 했다.
어떤 걸 사다 줘야 그 남자 취향에 맞출 수 있을까.
사소한 취향조차도 모르는 사이. 그게 바로 최이겸과 자신의 거리였다. 물론, 그는 제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다만.
“제일 많이 사 가는 게… 전복죽인가요?”
“네. 전복죽을 많이들 사 가시고, 삼계죽도 잘 나가요.”
“달콤한 것 중에는요?”
“아무래도 호박죽을 많이 찾으시죠.”
“그럼… 셋 다 주세요.”
결정 장애에 시달린 땐 모두 다 선택하는 게 상책이다. 채우는 죽이 포장되는 동안 이걸 자연스럽게 건네줄 방법을 고민했다.
벨을 누르고 최이겸이 나오면 봉투를 쥐여준다. 그러곤 마카롱 잘 먹었다고 인사를….
‘고민할 필요조차 없잖아.’
그녀는 터져 나온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왜 하필 제 취향의 마카롱을 가져와선…. 물론, 한 개도 남기지 않고 해치워버린 저도 문제였다.
대체 언제부터일까? 최이겸이 저를 의식하고 취향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은.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군침이 돌 때쯤, 완성된 죽이 포장되어 나왔다.
채우는 묵직한 쇼핑백을 들고 아파트로 향했다. 이젠 완연한 여름.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아파트 승강기에 오른 그녀는 또다시 잡다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만일이지만, 최이겸이 집에 없다면 어쩌지?
의심 없이 그가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가 바보 같다. 워낙에 바쁜 남자인 데다가 재벌이나 다름없는 그가 이렇게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도 퍽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메마른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느덧 12층에 내린 채우는 조용한 현관문 앞에 섰다. 심호흡하고 초인종을 누르려던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는 바람에 놀란 그녀가 뒷걸음질 쳤다.
그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건 성수동 원 테이블 다이닝 사장님이었다. 최이겸의 친구라던.
남자도 채우를 알아봤는지 다소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 안녕하세요.”
그에 채우가 먼저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이겸이 보러 오신 거예요?”
남자는 지난번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한 어투였다.
“아뇨, 보러온 건 아니고…. 식사를 못 하셨을 거 같아서. 제 거 사는 김에 좀 샀어요. 제가 여기 앞집 살거든요. 근데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많이 샀는데…. 마카롱을 받기도 했고. 그리고….”
횡설수설, 과도한 변명을 늘어놓던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이게 아닌데. 꼭 죄짓다 걸린 사람처럼 꼴이 우습게 됐다. 하지만 남자는 몹시 만족한 표정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
“어쩐지, 갑자기 이사했다더니…. 들어오세요. 지금 자고 있는데, 금방 일어날 거예요.”
“아니에요. 그냥 이것만 드리고 갈게요. 들어가 보세요.”
채우가 죽 봉투를 내밀었다. 하지만 씩 웃으며 거절한 남자는 문을 열어둔 채 밖으로 나왔다.
“장사 때문에 가야 해요. 다친 거 같던데, 병원도 안 가고 뭐 하는 건지. 제가 싸 온 김밥보다는 죽이 더 나을 거 같네요. 김밥은 그쪽이 드시고 죽은 저놈 주세요. 혼자서는 밥 못 먹는 놈이라.”
자신을 신재훈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구겨진 운동화를 툭툭 펴 신은 뒤, 승강기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활짝 열린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집안과 복도를 번갈아 보며 고민했다.
보조 등 몇 개만 켜져 어두컴컴한 집안. 재훈의 말대로 최이겸은 자는 것 같았다. 한 손에 든 죽 봉투가 무거웠다.
채우는 죽만 두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그녀의 집과 창밖 풍경이 다른 것 외엔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어질러질 물건조차도 없는 곳. 일 년 전 그의 집에서 보았던 피아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소파와 테이블. 노트북과 태블릿 등이 놓인 업무용 책상 외엔 사는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은 채우는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최이겸을 보았을 때, 반했을 때 느꼈던 온도가 이 집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슬프도록 서늘한.
일부러 방치해 둔 집안 풍경에서 묻어나는 건, 무엇에도 몰두하려 하지 않는 그의 속내였다.
음식만 두고 돌아가려던 그녀는 창문 방향으로 놓인 소파에 앉았다. 창밖, 화려한 도심의 불빛들이 심해에 파묻힌 듯 먹먹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1년 전, 그와 몸을 섞은 대가는 실직이었다. 물론 해고를 당한 건 아니었지만 거액의 퇴직금이 마치 먼저 물러나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비참함을 상기할 때마다 혈관이 저릿하고 전신의 피가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저 남자는 왜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서 저를 흔드는 건지. 게다가 그는 거액의 퇴직금에 대해 모르는 눈치였다.
‘대체 왜 몰라. 모르는 게 말이 돼?’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문득 낯선 느낌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핸드백을 챙겨 나가려다 침실에 있을 최이겸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몸도 성치 않은 주제에 그렇게 돌아다니니, 버틸 여력이 남아있을 리가.
채우는 소리를 죽이곤 침실문을 열었다. 이미 한 뼘 정도 열려있던 문은 조용히 움직였다.
정체된 공기 속, 그의 체향이 가득하다. 그녀의 몸 곳곳에 들러붙는 기분이었다.
잘 때도 참 반듯하게 누워 자는 남자. 불을 켜지 않아 잠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잘 때조차 단정하다는 것을.
‘그런데 참 발랑 까졌다 이거지.’
채우는 이끌리듯 침대에 앉았다. 제게 미련, 혹은 호감. 관심 따위가 남아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최이겸이 겁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마음껏 흔들어 깨우고 싶다. 그가 밉지만, 끌린다. 미움과 서운함에 짓눌려있던 남은 애정이 약한 곳을 비집고 나왔다.
이러다 정말 깨울 것 같아서 채우는 숨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그러곤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척임과 함께 최이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갈 겁니까.”
몸을 일으키려는 건지 힘을 주는 게 보인다. 채우는 다급히 그의 어깨를 잡았다.
“더 쉬세요, 그냥…. 저는 음식만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
“아까부터 잤어요. 꽤 많이.”
아직 잠이 덜 깬 남자의 목소리는 건반의 낮은음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의 어깨를 잡은 손등 위로 떨어지는 시선. 어둠 속이지만, 언뜻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가지 말아요.”
그녀의 손등 위로 이겸의 손이 겹쳐진다.
“나랑 밥 먹읍시다.”
***
살다 살다 이렇게 맛있는 김밥을 최이겸과 먹게 될 줄 몰랐다. 적당히 간이 된 밥과 꼬들꼬들한 단무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우엉, 햄, 오이장아찌까지…. 지금껏 알던 김밥의 전형적인 맛이 아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김밥을 먹던 그녀의 미간이 그의 손가락에 꾹 눌린다.
“왜 그렇게 심각합니까?”
채우는 구겨진 미간을 문지르며 떨어진 단무지를 입에 넣었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종종 이렇게 돼요. 이상하죠?”
“음, 아뇨. 예뻐요. 전엔 이런 거 안 보여주더니.”
막 삼키려던 음식물을 뿜어낼 뻔했다. 그녀는 이겸이 건네준 물로 속을 진정시킨 뒤,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사고기록 조회를 의뢰했어요. 아까 말씀하신 거, 농담은 아닌 것 같아서.”
그의 선택은 전복죽이었다. 딱히 고심해서 고른 것 같진 않았다. 최이겸은 거리낌 없이 제일 위에 올려진 걸 잡아 뚜껑을 열었다.
“사고기록이라면, 군 조사기록?”
“네. 조사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해서 오류를 찾아야 하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그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 많은 양을 깔끔하게 비운 것에 왜 제가 뿌듯해지는 건지.
“차 사고였습니다. 사고 자체는 조작된 게 아니에요. 워낙 큰 사고였고, 튕겨 나간 동기 중엔 목숨을 잃은 친구도 있었으니까.”
그는 티슈로 입가를 닦은 후, 가슴팍을 누르며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나른한 미소 뒤에 숨겨진 건 억눌리고 짓이겨진 무언가.
지금의 미소는 가짜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 손에… 파편이 박혀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고가 아니었고. 사주를 받은 김동희가 직접 박아넣은 거였죠.”
“사주한 사람은요.”
“높은 확률로 최호. 제 아버집니다.”
이럴 줄 알았어.
블랙박스 영상을 보았을 때부터 나쁜 예감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 배후로 최 회장을 의심하진 않았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사고. 아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으로 유명한 최 회장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채우는 경련이 일어나는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미안해요, 아깐. 가볍게 여겨서…. 왜 최이겸 씨가 진정성 있는 사과를 원했는지 알 거 같네요.”
“다른 건요.”
“김동희가 진짜 나쁜 새끼란 거?”
“그리고 또?”
대답을 이어나가던 그녀는 상체를 기울여 다가온 그로 인해 말을 멈춰야 했다.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꼭 이럴 땐 입안에 침이 고이고 호흡이 꼬여버린다.
“상무님은…. 아니, 최이겸 씨는 나한테 왜 이래요.”
“당신이 복직했으면 좋겠어요.”
“복직? 그거뿐이에요…?”
“아니.”
경직되어있던 그녀의 뺨을 지나 귓바퀴를 스친 손이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채우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마카롱, 맛있었습니까?”
“…네.”
“해랑 1층 카페에서 산 건데.”
“정말요?”
“어떤 남자랑 너무 다정하게 대화 중이라 말도 못 걸었습니다. 그 남자가 애인?”
채우는 제가 했던 거짓말을 떠올렸다. 최이겸을 밀어내려 애인이 있다는 거짓말을 했고, 미친 듯이 공원을 뛰었다.
밀어내지 않으면 이끌려갈 거로 생각해서였을까?
“애인이 있으면서도 남자 집에 찾아오는 거…. 아주 못된 짓인데.”
이쯤 되니 그가 무얼 원하는지, 제 마음이 어떤지.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둘 다 미련을 떨고 있었다. 옳은지, 그른지. 무엇이 정답인지 상관없었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사람 마음, 함부로 갖고 놀지 않아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곤 제 뒷머릴 움켜쥔 남자의 손을 감쌌다.
“진짜 못된 짓은 섹스한 이후 470km 떨어진 곳으로 발령낸 회사와 두 배 넘는 퇴직금을 입금한 상부가 했죠. 난…. 단 한 번도 나쁜 짓 한 적 없어요.”
그는 변명하지도, 이렇다 할 감정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납득 못할 변명부터 튀어나왔다면, 분명 실망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압니다.”
최이겸은 말을 자르곤 반대편 손으로 발개진 그녀의 뺨을 감쌌다.
“이젠 알아요. 정채우 씨, 나쁜 사람 아니란 거.”
마치 어른에게 칭찬받은 아이라도 된 것처럼 이유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이제야 알겠다니.
입술 안쪽을 잘끈 깨문 채우는 제 얼굴을 감싸 쥔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럼 이전까지는 몰랐다는 뜻이죠?”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오해할 일이 있었던가요?”
오해는 여지로 인해 벌어진다. 제가 남긴 여지는 없었다. 당시의 자신은 어리석을 만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했으니까. 여지를 남겨가며 상황에 따라 다른 태도를 보이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하며 최이겸이 말했다.
“정채우 씨가… 나를 피하는 거라고 오해했달까.”
“제가 왜요.”
“돈을 받았으니까.”
돈이라니. 그게 바로 여지였구나.
잠시 머릿속이 멍했지만, 채우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 올렸다.
“맞아요, 받았어요. 누가 입금해준 건지 몰라도, 그 돈 받아서 이렇게 잘살고 있네요. 위자료라고 생각했거든요.”
묘하게 허탈해졌다.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몸에 힘이 풀린 그녀에게 최이겸이 말했다.
“그럼 더 뜯어내요.”
“네?”
빤히 응시하던 그가 몸을 기울여 양팔 사이에 그녀를 가두었다. 최이겸의 빤한 시선에 그녀의 몸이 소파에 한층 깊이 파묻힌다. 채우는 그에게 재차 되물었다.
“대체 뭘… 더 뜯어내란 거예요?”
“돈이죠. 그 돈을 준 사람에게 원하는 만큼 더 요구해요.”
태연하고 어처구니없는 대답. 황당한 마음에 숨을 크게 들이켠 그녀가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더 빨랐다.
“꼭 그래야 할 겁니다. 그게 수임료가 될 테니까.”
“수임료를 왜 그쪽에서…!”
그는 두 눈을 치켜떠 그녀를 보았다.
“정채우 씨가 받은 퇴직금. 내가 주는 거라고 짐작한 거 아니었습니까? 나를 먼저 의심한 건 정채우 씨예요.”
“모순이에요. 합리적 의심이었다고요!”
“그럼, 왜 연락 안 했습니까.”
풍랑을 만난 배처럼 그녀의 세상이 균형을 잃고 출렁거렸다.
그를 의심한 게 아니라 최이겸의 세상을 의심했다. 저를 괴롭히는 건 그가 아니라 그가 속한 세상이라고. 그래놓고 원망은 그를 향했다.
“구질구질해 보일까 봐요.”
“누가, 당신을.”
“됐어요. 그만 해요. 달라질 것도 없는데, 대체 왜….”
“아니. 정채우 씨는 더 많은 돈을 받아낼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그를 밀어낸 뒤 일어나려던 그녀의 양팔이 잡혔다.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여기까지 합니까? 나는 지금부터가 시작인데.”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 입술이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거칠고 조급하게 밀려드는 살덩이. 그녀의 몸이 다시 소파에 파묻혔다.
어떠한 신호와 전조도 없이 시작된 키스. 그래서 더 자극적인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정수리까지 단번에 잠식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소파에 올린 채 더욱 깊고 진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그녀의 목덜미로 파고든 커다란 손. 긴 머리카락이 이겸의 손가락에 엉긴다.
마치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눈 충동적인 입맞춤의 연장선 같았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빨아들여 깨무는 감촉이 야하고 선정적이다.
그가 환자였다는걸 깨달은 건 손바닥에 닿은 붕대의 감촉 때문이었다.
채우는 그의 가슴팍을 더듬어 조심스럽게 밀어내려 했지만, 이겸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되레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쥔 뒤, 입을 좀 더 벌리게 만들어 혀를 깊게 넣었다.
절로 몸속 깊은 곳에 열이 고였다. 젖은 살덩이가 은밀하게 비벼지는 소리에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턱을 움켜쥐었던 손에 힘을 푼 그가 서서히 입술을 떼어내자, 채우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었다. 너무 가까워서 그가 저를 보고 있는 건지, 제가 그를 보는 건지. 아니면 서로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건지 혼곤하였다.
“우리…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침묵이 무거워질까 봐 대수롭지 않은 듯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가볍게 몇 번 입 맞춘 그가 웃음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정채우 씨한테 들이대는 중이고, 정채우 씨는 나랑 밥 먹어주러 왔다가 걸려 넘어진 거죠.”
그녀의 갸름한 턱선을 따라 움직이는 남자의 손끝.
“난… 채우 씨, 일으켜 줄 생각 없어요.”
***
병원에서 지어온 마지막 약을 털어 넣었다. 차가운 물 한 통을 말끔하게 비운 이겸이 돌아서자 우지끈 소릴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강제로 열린 탓에 울리는 비상벨 소리. 이겸은 태연하게 비상벨을 끄곤 방문객을 맞았다.
입구에서 경호원 둘을 대동한 최이서가 재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며 들어오고 있었다.
이겸은 쇠지레를 든 경호원들에게 말했다.
“원상복구 해 놓고 가요. 조용히.”
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말한 뒤, 비틀린 문을 들고 엉거주춤 버티고 섰다. 이겸의 태도에 실소한 최이서가 신발도 벗지 않고 거실로 들어섰다.
“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회사도 안 나오고. 휴가라도 떠난 줄 알았더니, 이런 데 처박혀 있었어?”
“신발 벗지? 아니면 걸레로 닦고 가든가.”
“짐 챙겨. 너 찾아내라고 회장님 난리 치신다.”
삐딱하게 말한 최이서는 휑한 주위를 둘러보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꽤나 시달린 것인지 최이서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그에 이겸은 짜증스럽게 받아쳤다.
“집안에 처박혀 있다고 해. 아니면 출국했다고 하든지.”
“출국했다는 놈이 쫓겨난 직원이랑 붙어먹어? 다 봤어. 대체 뭐야? 왜 이 앞집에 그 계집애가 살아?”
현관 방향으로 삿대질하는 최이서.
빌어먹을. 대체 언제부터….
“한마디만 더 하면 창 열고 밀어버릴 테니, 입단속 잘해.”
이겸은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한 뒤, 최이서를 무시한 채 침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급히 따라 들어온 이서가 누우려는 이겸의 손을 잡아당겼다.
“최이겸.”
몸이 밀리는 통증에 이겸은 가슴을 붙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놀란 최이서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이겸이 말을 막았다.
“정채우에게 갔어야 할 돈이 증발했던데. 누구야. 형이야?”
“뭐…?”
“아버지는 20억을 줬다고 하셨는데, 정채우가 받은 건 퇴직금뿐이더라. 약 2.4배 받았어. 그럼 얼마겠어. 많이 봐야 2억이야. 뭘까, 이건.”
침대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이겸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곤 최이서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른 입술을 훑고 피식 웃는 최이서.
“입이 싸네. 그렇게 안 봤는데.”
이겸은 분을 누르며 최이서를 노려보았다. 계속해보라는 듯 턱짓하며 창가로 간 최이서가 문을 열더니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내가 처리 안 했으면 아버지가 나서셨을 거야. 적당히 발령내고 끝내려 했더니, 일을 키운 건 정채우다? 나 아니야.”
“제주도로 보내는 게 적당히 끝내는 건가? 그래놓고 아버지껜 정채우가 돈을 요구했다고 거짓말을 했어?”
끓는듯한 이겸의 눈빛. 최이서는 양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아버지가 날 의심하시는데 어떻게 해? 그 여자 임신시켰냐고부터 물으시더라. 내가 무슨 의자왕이냐? 부하 직원 다 건드리고 다니게.”
“남은 돈은. 아버지 이름으로 20억 나갔고, 퇴직금 외에 정채우가 가져간 건 없어. 그건 또 어디에 썼는데?”
“그 정도 돈으로 뭘 하겠어. 그냥 적당히 먹고 노는 데 썼겠지.”
비어있던 퍼즐의 조각은 최이서가 갖고 있었다. 최이서가 관련되어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주동자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해온 짓이 우습고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터졌다. 킥킥거릴 때마다 금 간 곳이 아팠다.
이상하게 생각한 최이서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뭐야…. 너, 다쳤어?”
“가. 문 제대로 고쳐놓고.”
“그러지 말고.”
“꽃이나 보내. 봉안당에.”
흠칫 놀라 굳어진 최이서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꽃… 네가 보낸 거였어?”
“다녀왔나 보지? 왜. 설마 형이 죄책감을 느낄 리는 없고…. 신기하네.”
최이서는 혼란스러운 듯 주위를 멍하니 훑었다. 이겸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채 짜증스럽게 손짓했다.
“내일은 출근할 거고,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 아버지껜 못 찾았다고 그래. 회사에서 뵈면 내가 설명할 테니까.”
“최이겸. 꽃 보내지 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최이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왜.”
“내가 할 테니까….”
퍽이나. 겁먹은 개처럼 어딘가에 대가리만 처박겠지. 그럼 세상이 모를 줄 알고 엉덩이를 치켜들 것이다. 우스워지겠지.
“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어?”
최이서를 자극하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그토록 반대하던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끊어놓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도 마다치 않는 혈육이라니.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이겸의 눈빛이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내 손 망가트린 게 아버지라는 거, 알고 있었어?”
순간 변해버린 최이서의 표정에 사실 확인이 필요 없어졌다. 이겸은 헛웃음 지었다. 가슴 안이 시리다 못해 쿡쿡 쑤신다. 이겸은 뻐근해지는 손을 서서히 말아 쥐었다.
‘나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안 잃을 거예요. 최이겸 씨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걸려 넘어지면서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아요. 이도 저도 아닌 관계. 그게 딱 좋을 거 같은데…. 안 그래요?’
정채우에게 들은 말 중 애인이 있단 소리 다음으로 충격적이었다고 할까?
몇 년 전, 건물 밖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던 채우는 울고 있었다. 펑펑 울었다기보단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참 맛없게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도 흡연의 충동이 일었다.
근처 편의점을 찾아 처음으로 담배를 사서 여자가 있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엔 반쯤 태운 꽁초만이 남아있었다.
말을 걸어보고 싶어서였을까?
결국, 손에 든 담배를 구기지 못한 채 불을 붙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무엇이든 관심으로 시작해 호감으로 이어지다 권태로 결론지어진다. 잘 울고 폭식하는 데다가 단 음식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만큼 좋아하고, 스트레스가 쌓일 땐 매운 거로 푸는 여자.
아직 알아야 할 것투성이건만, 이도 저도 아닌 관계를 바란다?
최이서를 내쫓은 이겸은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에어컨을 켰다. 정채우와 함께 하며 일어난 열기는 단내에 가깝다.
여름의 향기였다.